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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9년 8월 넷째 주(8/24) 일요 정기 법회 및 우란분절(백중) 6재입니다.
무더위도 아쉬워 물러가지 못한 2025년 8월 넷째 주 법회일 사찰 전경은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안내 데스크 및 현관에서 법회보 나누며 법회 오시는 분들을 반갑게 맞이하시고, 백중기간 중 사무국 봉사 보살님들의 바쁜 아침 풍경 .
송파 2, 5, 8, 32 구에서 떡과 생수를 보시하시고 나눔 봉사하십니다. 법당 안내팀, 법회팀, 엘리베이터 봉사팀. 열심히 봉사 중입니다.
법회 준비로 법당 내부, 외부에서는 각자가 맡은 봉사에 진심이신 불광 바라밀 형제들의 이 노고를 어떠한 말로 감사하오리까?
재해로 인한 아픈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하려는 수재의연금을 동참하고 계신 혜담 스님과 불광 형제들의 참마음이 널리 퍼지길 바라며.
법회 시작 전 도량을 맑히는 천수경 독경이 끝나고 은은한 타종에 이어 사회자 님 법회 시작 말씀, 부처님 전에 헌향, 헌다를 올립니다.
법문 듣고 조상님을 위한 백중 기도에 동참하시느라 일요법회에 참석하신 불광 바라밀 형제들은 발코니석, 보광당 로비까지 만석입니다.
금주의 법문 : 정진원 교수(동국대학교 세계불교학연구소)
금주의 법어 : 『훈민정음과 불경 언해본』
<세종과 세조,신미대사와 온 백성이 함께 만든 위대한 유산>
안녕하십니까? 방금 소개받은 동국대학교에 있는 정진원입니다. 반갑습니다.
법회보에 보면 오늘 말씀드릴 개요는 「훈민정음 불경은 조선 사부대중이 만든 조선 불교대장경이다」라는 주제로 불광사 불자 법우 여러분과 함께 말씀 나누고자 합니다.
사부대중이라고 하면 보통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이 정도로 생각하시죠.
조선시대 사부대중은 세종대왕 세조임금 요즘 많이 재조명 받고 있는 신미대사 그 수제자 학연 학조 신미대사의 친동생인 김소원 왕실의 여성들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 집현전 학사 그리고 여러 스님들 또 김소원과 같은 유교와 불교에 통달한 학자들, 이름만 나와 있고 어디에서도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조선시대 일만 백성들까지 여러분들에게 그동안 잘들어 보지 못했던 제가 지금까지 연구하고 공부해 왔던 훈민정음에 관련 이야기들을 같이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차례는 다섯 가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조선대장경의 시작 월인석보
조선대장경 이런 말씀은 많이 못 들어 보셨지요. 고려대장경 팔만대장경 이런 이야기는 많이 들어 보셨을 텐데 ‘훈민정음 불경’ 제가 오늘 몇 가지 자료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것은 월인석보 영인본인데 처음에는 ‘훈민정음언해’라고 훈민정음 학습을 할 수 있게 나오고, 부처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그려 놓은 팔상도 그림책이 나오고
훈민정음으로 쓰여 진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이 나오는 월인석보 책을 저는 조선대장경의 시작 조선대장경 스타일의 효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 월인석보 권 1 서문에 등장하는 신미대사와 10인의 집단지성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월인석보 1권 서문에 훈민정음 해례(解例)본에는 신미 스님이라든지 다른 스님들의 역할의 기록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만 우리 모두 ‘나랏말싸미’라는 영화 보셨죠. 영화가 흥행이 잘되지 않고 2주일 만에 막을 내리게 되어 안타까운 일이 있었는데 제가 자문단으로 그 감독이 나를 너무 늦게 만나는 바람에 훈민정음 해례본 ‘나랏말싸미’라는 제목으로 거기에 월인석보의 내용까지는 담지를 못해서 신미대사와 세종대왕의 합작으로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왜곡 날조되었다는 악풀이라든지 타 종교인들의 비방으로 인해 안타깝게 되었지만 저는 작년까지 한국학과 교수로 유럽과 중앙아시아 이쪽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기도 하는 선진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인도 같은 불교 종주국에 가면 학생들이 ‘나랏말싸미’ 예고편만 보여 줘도 월인석보를 전공하고 싶고 한국으로 불교의 종주국 인도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공부하고 싶다고, 우리가 태권도의 종주국인 것처럼 그런 의견들을 피력할 정도로 앞으로 대개의 연구자들은 우리나라에 와서 월인석보를 연구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3. 간경도감 능엄경언해와 금강경언해 발문에 등장하는 신미대사의 활약
월인석보를 성공적으로 만든 거기에 힘입어 ‘간경도감(刊經都監)’이라고 하는 불교경전을 간행하는 간경도감을 세조께서 만듭니다.
거기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능엄경 훈민정음 능엄경을 능엄경언해라고 불렀습니다.
금강경언해 지금 조계종의 소의경전이기도 하죠.
그런 경전들의 맨 끝에 후기 부분에 세조임금께서 이 경전을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지 소상히 기록해 놓은 글로써 신미스님이라든지 학연 학조 또는 고승 대덕스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4. 훈민정음 불경 편찬과 왕실 여성들과 조선백성의 활약
훈민정음 불경이 어떻게 편찬되었고 왕실의 여성들 아이들까지 어떤 역할을 했으며 조선 백성들은 어떤 힘을 보탰는지 말씀을 드릴 겁니다.
5. 우리 고전 월인석보와 훈민정음 불경 세계 문화유산으로
조선대장경 고려대장경 팔만대장경이란 말은 많이
우리의 고전 월인석보를 위시한 조선 초기 훈민정음을 창제하자마자 만들어진 유교 나라에서 조선 불교대장경을 이룩한 그 쾌거를 세계만방에 세계유산으로 고해야 할 때다.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서 (PPT 이미지로 준비해 왔는데) 그림 위주로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세종대왕은 다 아시죠. 훈민정음을 창제하셨고 그 사용설명서가 ‘훈민정음해례본’이고 조선 최초의 찬불가를 지었습니다. 그 노래가 ‘월인천강지곡’입니다. 아버지 세종의 뜻을 이어서 600년 전에 만들어진 훈민정음이 세계의 한류 포텐츠(Potenz)로 요새 K-pop ‘데몬헌터스’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난리 났죠. 거기 나오는 OST 노래들이 빌보드 차트 1.2.3위를 다 차지하고 있고 아주 오랫동안 롱런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모든 것의 모태가 된 것은 세종대왕만큼 세종대왕 그 이상으로 세조임금의 노력이고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세조임금의 어진은 6.25때 불에 타서 밑그림만 남아 있습니다. 그 옆에 복원한 세조의 어진입니다.
세조는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하여 ‘월인석보’를 편찬하고 ‘간경도감’이라는 불경을 만들어서 지금까지 우리가 매일 염송하고 사경하는 유명한 불교경전들을 훈민정음으로 만드신 분입니다.
이것들이 경상북도 안동에서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 추진 중에 있고 거기에 저도 관여하고 있습니다.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은 세계 모든 인류들이 기억해야 할 기록 유산이라고 풀고 있고 그 등재 기준은 진정성, 독창성 가치가 있어야 하고 훈민정음으로만 불교 경전이 창제된 것은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대체 불가성 이것이 불에 타거나 없어지면 다시는 복구할 수가 없겠죠. 세계적 중요성 이런 모든 기준을 다 갖춘 그러한 문화재이기 때문에 세계 기록 유산으로 곧 등재가 되고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지금 아시아 기록 유산으로 등재한 후 세계 기록 유산으로 가는 수순을 밟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기 보면 월인석보 조선대장경의 시작인데 왜 조선대장경= 안 하고 시작이라고 했나하면, 많이 법화경 읽고 사경하시죠. 모든 불교 경전은 형식이 어떻게 되어있죠.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시아문(如是我聞)하사오니 이러이러한 일이 기사골산 천이백오십 비구와 있었다. 그것을 게송으로 말하였다하며 ‘시’가 나오죠.
그런데 월인석보는 세종이 쓰신 찬불가 게송 ‘시’가 먼저 나오고 아들인 수양대군이 쓴 ‘석보상절’ 찬불이 순서가 뒤 바뀌어 나옵니다.
아들 세조가 아버지 세종을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 그런 순서를 뒤바꾼 우리만의 조선 스타일의 대장경의 시작이다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아까 잠깐 보여드렸듯이 이 ‘월인석보’ 책이 얼마나 중요하냐하면, 여기 ‘월인’은 월인천강지곡의 줄임말이고 ‘석보’는 석보상절의 줄임말입니다. 노래책과 산문 책 두 가지를 합한 처음에는 ‘훈민정음언해’라고 해서 ‘어제훈민정음국지의미’라고 한자로만 되어있고 ‘훈민정음해례본’으로 국보 70호죠.
그 옆에 보면 영화 제목에서도 본 ‘나랏말싸미’를 볼 수 있을 거에요. 이런 것으로 훈민정음으로 같이 쓰신 것을 ‘언해’라고 합니다.
언은 우리나라의 문자를 풀이해서 번역했다. 요즈음의 한글 훈민정음으로 다시 썼다. 이런 뜻이에요.
그다음에 도솔래의(兜率來儀) 부터 시작되는 부처님의 생애 여덟 가지 장면을 그림책으로 머릿속에 개요를 잡게 합니다.
훈민정음을 ‘언해’라는 책 속의 책이 왜 있었을까요? 그것은 불교 공부를 학습하는 독학서의 용도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는 겁니다. 그 당시 유교가 국시였던 유교 국가에서 부처님 생애가 팔상도 그림책으로 나오고 ‘석보상절’ 서문은 읽어 보면 알겠지만 훈민정음해례본과 훈민정음 서문의 내용과 형식은 거의 같습니다.
모두 백성들을 편하게 조선 백성들을 불교에 귀의하기를 바라노라 그런 형식으로 발원문에 쓰여져 있어요.
그다음에 12년이 지나서 ‘월인석보 서’에서 세조가 왕이 된 지 5년 차에 이 책이 만들어지는데
그 월인석보 서문에 그 신미대사와 학연 학조 스님 여러 스님들 집단 지성들이 등장합니다.
서문 뒤에는 ‘세종어제월인천강지곡’ 소헌왕후 동중정각 세종께서 친히 월인천강지곡 지으신 공덕으로 왕비 소헌왕후와 함께 정각을 증득하여 지이다. 옛날에는 이쪽부터 책이 철해졌으니까 그 옆에 ‘세조찬술석보상절’ ‘자성왕비공성불가’ 세조가 편찬하고 저술한 석보상절 공덕으로 부인 자성 정희왕비 또한 함께 불가 정각과 같은 말입니다. 성불하여 지이다.
발원문의 성격으로 월인석보가 확실히 쓰여 졌음을 알 수 있는 것이고, 그다음에 월인천강지곡 제1 그 옆에 석보상절 제1 월인천강지곡 첫 번째 노래가 왜 왜 석가불 무량무변 공덕을 응당 행하리. 높고 높으신 부처님의 공덕을 무량한 공덕을 겁겁의 영겁의 시간을 줄지라도 어떻게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말씀 드릴 수 없을 만큼 무량 변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생애를 이 책을 잘 만들 수 있도록 부처님이시여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그렇게 찬불가가 시작을 합니다.
그다음에 작은 글씨로 산문으로 나오는 게 석보상절이고 여섯 가지 책을 소개해 드렸는데
그만큼 또 중요한 것이 작은 글씨로 쓰여 진 불은 부처이시다.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이다.
조선시대 국어대사전 또는 불교 큰사전 쓰여 져 있습니다. 그 옆에 훈민정음으로 보면 부처님께서 욕계 색계 무색계 높은 존귀하신 분이 되어 계실 적에 옛날 옛날 한 옛날이야기 형식에 바탕이 되는 그러한 형식의 글들이 나오게 됩니다.
이 월인석보 7권의 책 속에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몇 가지가 1권에 그야말로 액기스처럼 녹아들어 있는데 신미 대사 이름이 나오고 기록이 나옵니다.
월인석보를 만든 등장하는 11명의 집단 지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나옵니다.
그 첫 번째가 혜각 존자 신미 대사, 탄 선종사 수미, 선종을 대표하는 스님 수미 신미와 수미는 같이 동문수학한 도반이기도 했습니다.
교종에 으뜸인 설중 영사 태안사 대자사 소요사 왕실과 관련된 큰 조선시대 사찰 주지 스님들
탄 선종사 선교 종사 다음에 소임인 대 선사 직분입니다.
대 선사 사제는 탄 선종사로 나중에 직급이 올라가기도 합니다. 그다음에 신미의 좌우 협시 역할을 하고 있는 수제자 학연 학조 스님 이 두 분도 조금 있다 보여 드리기로 하고 열 한번째 일반인 유교와 불교에 통달한 천재 학자 김소원, 신미 스님의 친동생입니다. 신미 스님의 속명은 김수성이었어요. 여기에 잘 안 보여요. 큰 글씨 옆에 의심 가는 곳이 있거든 여기 물음에 혜각 존자 신미와 탄 선종사 수미와 김소원이라 쓰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월인석보의 자문단이 확실히 나오는 것을 여러분들이 지금 눈으로 원문 이미지로 보고 계시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의 의미를 살펴보는 본문이 나오게 됩니다.
월인천강지곡의 뜻은 다 아시죠. 부처께서 백억 화신이 되어 계셔서 교화하시는 것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일천 개의 강에 발 도장 찍히는 것과 같으니라.
월인석보 1권은 신기하게 다른 권수는 108장으로 끝나지 않는데 총 108장으로 끝나요.
애써서 108장으로 끝낸 흔적이 역력합니다. 일부러 108장으로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데 이것은 여러분들이 세조 임금을 다 잘 알고 계시죠. 세조 임금하면 여러분들 어떻게 알고 계시나요. 단종 임금을 죽이고 왕위에 눈이 멀어 왕위를 찬탈한 잔인무도한 포악한 임금
이 정도로 알고 계시죠. 저도 석보상절 월인석보 이 공부를 하기 전에는 세조 임금에 대해서 알고 싶지도 않았고 싫어하는 임금이었는데 세종은 32년 동안 왕 노릇을 했고 세조는 14년 동안 왕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되고 나서부터 많은 어려운 일이 생겨요.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을 죽게 하죠.
사육신 생육신 그리고 동생 안평대군 조카 단종도 강화도에서 사약을 받고 죽죠.
자기 뒤를 이을 의경 세자도 갑자기 돌연사를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로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내가 지은 죄에 벌을 아들이 대신 받았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단종의 어머니 현덕 왕후가 꿈에 나타나 왕위가 그렇게 탐이 났더냐 하며 침을 뱉었다는 꿈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것으로부터 평생 피부병에 시달리게 됩니다.상원사에 세조의 적삼으로 추정되는 옷이 복장에서 나왔는데 과학자들이 분석을 해 보니 나병 즉 문둥병으로 알려져 있죠. 세조가 이생에서 왕으로서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의 반절도 못 채운 왕 노릇이었지만 경제라든지 군사 국방이라든지 아버지가 만든 훈민정음을 글자로 만든 나라는 그때 여진족 거란족 우리보다 먼저 만들었고 너무나 보편화된 일이었어요. 그러나 그 거란족 문자들은 죽었어요. 거란 문자들은 해독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 훈민정음은 어떻습니까? 600년 동안 날개를 달아서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잘 쓰고 있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한글을 배우려고 연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된 것이 세조의 공이 크다. 이생에서 108 참회를 하면서 108배를 올리는 심정으로 ‘월인석보’라는 책과 불교 경전 간경도감을 만들었음으로 참회를 하고 돌아가셨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월인석보 1권은 에세이 식으로 2019년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 발간했고,
월인석보 2권은 2021년 ‘그대 이름은 한글대장경’이라고 썼습니다.
2권은 108장에 비해서 두 권이 같이 붙어있는데 가볍게 76장 밖에 안 됩니다.
옛날처럼 그렇게 두껍지가 않았어요. 그러면 180장정도 되면 90장씩 1권 2권으로 나누어 내는 것이 보편 상식일 텐데 108장으로 만드느라 굉장히 애를 썼구나, 같이 느끼실 수가 있고
월인석보 3권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대신 석보상절 3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3권은 2023년 ‘석보상절, 훈민정음 조선 대장경의 길을 열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썼고 제가 이제 원력을 세우기를 지금 전하는 20권의 월인석보와 10권의 석보상절을 모두 한글 현대 국어로 번역을 하리라 그렇게 원을 세웠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고 월인석보 4권은 불교신문에 ‘월인석보의 향기’라는 책 연재로 끝을 맺어서 아마 올해나 내년쯤에 월인석보 4권이 나올 것입니다.
예불 칠정례 지심귀명례를 지극한 마음으로 한글로 하는 것을 보고 굉장히 지난주 불광사에서
법회 참여하면서 굉장히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원응 스님께 오래 배웠고 원웅 스님의 스승이신 운허 스님께서 동국 역경원에서 한글 대장경 고려대장경을 번역하셨는데 그 봉선사에서 조차도 반야심경 외에는 한글로 풀어서 예불하지 않는데 이 불광사에서 희망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 책 저의 책이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반드시 우리나라에서 없어진 거란 장경을 해독하는 사람도 있고 산스크리스트 장경 빠알리 장경 만주 장경 티벳 장경 연구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렇게 버젖이 남아있는 조선 대장경을 어디에다 이름을 붙여서 우리가 지금 안 쓰는 세모꼴 여기에는 아래아 한글 꼭지 글 이런 것 때문에 다 못 읽겠네.
도외시하는 현재 상황을 낱낱이 고하고 다 같이 조선 대장경을 세계화하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훌륭하게 만들었어요. 1446년 10월 9일이 ‘한글날’이잖아요.
음력으로 9월 상날에 석보상절을 만들기 시작해서 열 달 만에 24권의 대 역작을 수양대군이 만듭니다.
수양대군 혼자 만들었을까요? 저는 아까 말씀드린 김소원이 그 역할을 크게 했다고 봅니다.
김소원이 만들었다는 기록은 조선 왕조 실록 어디에도 나오지 않지만 ‘증수석가보’라는 석가모니의 팔상도에 해당되는 중요한 한글 경전에 엑기스만 모아 ‘증수석가보’란 책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와요.
간경도감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불경학은 한문과 훈민정음에 달통해야지만 이 간경도감에서 만들어 낸 불경을 쓸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쓴 책을 한 글자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번역을 하려고 굉장히 노력을 했습니다. 애초에 훈민정음이 그런 방식으로 번역이 되어 있었고요. 그래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거의 완벽합니다. 완전무결해요. 어쩌다가 한, 두개 오자가 있으면 연구 논문이 될 정도로 오자 활자도 거의 드뭅니다.
간경도감에 「능엄경언해 발의문」 맨 끝에 세조 대왕이 쓴 능엄경 훈민정음을 어떻게 만들었는가가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도 이걸 가로쓰기로 한 거고 어제불성보감 세조가 「능엄경」에 대한 발의문을 쓰노라.
세종께서 살아 계실 때부터 능엄경을 좋아 하셨대요. 그래서 능엄경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라고 하는 명을 받들려고 했지만, 늘 일이 많고 바빴다 그러나 그 바쁜 와중에도 잠을 아껴 가며 먹는 것을 줄여 가며 이 책을 만들었노라 하면서 나의 동생 혜각 존자 신미 대사한테 조선 국왕 불제자가 신미대사에게 라는 글을 올립니다.
상원사의 중창 권선문에도 그런 글을 올립니다. 정말로 조선시대에 혜각 존자는 세조임금에게는 부처님과 같은 역할을 하였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능엄경 발의문에 보면 한문 능엄경 고려 대장경을 어떻게 한글 훈민정음으로 만들었는가. 능엄경의 한문을 경전에 하고 하니 하면 경전에 이런 토를 다는 것을 이걸 구결을 단다고 하는데, 이것은 세조 임금이 직접 달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학이시습지면 불여명악 그런 것은 세조 임금이 다는데 한문 경전을 꿰뚫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걸 교정하는 사람은 신미 대사가 합니다.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는 간경도감의 불경언해를 세조의 뜻을 이어 완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세조의 며느리 경빈 한 씨(인수대비)는 ‘능엄경언해’와 ‘금강경언해’ 교정과 직접 ‘내훈’을 한글로 지은 최초의 왕비 훈민정음 대학자였습니다.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는 한계희 김소원 번역한 문장을 검토하는 것은 박번 윤필상 노사신 정요상 등 조선시대 문신들 유명한 학자들이 합니다.
여섯 번째 체제의 예를 정하는 것은 세종의 다섯 번째 아들 광평대군의 아들, 광평대군이 일찍 요절을 해서 어머니 소헌왕후가 상심해서 일찍 돌아가시는 원인이 되기도 하거든요.
또한 한자음을 다는 것은 조현아 조진아 역관인 중인계급에서 했다. 번역을 바르게 고치는 것은 신미 대사가 하고 월인석보 서문에 나왔던 학연 학조 스님이 번역을 확정하는 것은 세조 임금이 직접 하시고 확정된 책을 세조 앞에서 읽는 사람은 궁녀 조 씨 두대는 한글의 궁서체의 장본인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어요. ‘능엄경언해’ 간행을 도왔으며, 24명의 도제조 제조 부제조 거의 사 부사 판관 수십 명의 100여명의 사람들이 이 간경도감 불경을 간행해 내었습니다. 세조가 살아 있을 때 1462년부터 1467년까지 보면 능엄경 법화경 불설아미타경 원각경 금강경 반야심경 목우자수심결 등 이 모든 것들을 세조가 부결하고 선종에 관련된 목우자수심결 등은 신미 스님께서 직접 부결도 하고 금강경에도 10단계 더 자세한 훈민정음 불경을 만드는 과정이 나오고 세조 임금은 우리가 잔인무도한 임금으로만 기억하고 있는데 그 당시에도 민간 신앙에 숭배 신으로 모셔지기도 하는 해인사에도 이 그림이 있습니다. 부처님과 협시보살이 모셔져 있는 것처럼 세조와 두 신하가 모셔져 있는 그런 민간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정말 중요한 신미와 학연 학조 스님이 월인석보와 간경도감을 편찬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는 이판과 사판을 아주 겸비한 대 스님이라고 감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신미대사는 이것은 법주사 복천암에 모셔져 있는 진영인데요. 이렇게 긴 이름으로 선교도 청석 그림 옆에 써 있는 선종과 교종을 총괄하는 자비와 지혜를 쌍으로 이끌고 세상을 이롭게 하며 나라를 도우며 원융 무애한 지혜를 깨달으신 존자입니다. 이 말씀은 세종대왕이 문종에게 유업으로 남기고 돌아 가셨어요. 문종이 그 이름을 하사하자 유신들이 극렬히 반대를 하여 이름을 비슷하게 조금 바꿉니다. 우국이새라는 말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서 그래서 복천암에는 신미대사의 부도 탑 수안화상 탑이 보물로 전해지고 있고 신미대사는 생물 연대 확실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김소원이 1407년대 출생한 것으로 봐서 수안화상이 1405년 정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을 하고 부도탑이 1480년도에 만들어진 걸로 봐서 80년 즈음에 돌아가신 걸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종에 관련된 책을 많이 쓰셨어요. 복천암에 대한 것도 속리산 법주사 정이품송에 유래가 되는 그 일화가 남아 있는 것은 그 복천사에 와서 대 설법회를 열고 세조 임금을 맞이한 데에서 생긴 일화입니다.
그리고 신미 학연 학조를 조선 왕조 실록에는 거의 기록이 나오지 않아요. 학조 스님은 그래도 오래 사시고 여러 가지 일을 하시고 여러 왕을 모셨기 때문에 기록이 남아 있는데 신미와 학연은 마치 일부러 찾아서 삭제한 것처럼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특히 신미 스님은 요사한 중 간사한 중 유신들이 굉장히 인신공격을 하거나 미워하는 그러한 기록들만 간간히 남겨져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조선의 백성들은 조선의 삼화상이라 불렀고 신미와 학연은 존자 입전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학전 스님은 왕사 승왕 스님들 중에서는 대단히 존경을 받은 왕의 스승이었어요. 1482년에 입적한 기록만 여기저기서 찾아 볼 수 있어서 써 놓았는데 연보를 정리한 게 세종 때 진관사를 중창하시고 세조 때 상원사 낙산사 중창 명나라 사신 상원사 수륙제 봉선사창건 낙산사주석 상원사 주석하셨다가 성종14년에 돌아 가셨다는 기록 정도를 찾아볼 수 있어요.
봉선사는 어떤 절이죠. 세조 임금의 능침 사찰로 부인 정희 왕후께서 창건한 절입니다.
요즘에 고려시대 운악산 설부터 나와 있는데 그건 일제 강점기 때 절에 땅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봉선사에 그 스님들께서 꾀를 써서 한 이야기이다. 원응 스님께서 바로 잡으셨어요. 학전 스님은 굉장히 오래 사시고 1431년부터 1514년까지 사시고 안동 출신입니다. 학가산에 중곡 선사라고 불리기도 하고 지금 안동 관음사에 이 간경도감 지적이 있었다고 해요. 학전 스님의 연보는 세종 14년에 태어나셔서 용문사 불상 조성 해인사 대장경 판각 계승 유점사 중수 명나라 사신 접대 학연 스님하고 행장이 많이 겹쳐요.
세조가 돌아가시고 나서 세조 귀신들 제사를 지내시고 봉선사를 창건하고 탑골 공원에 있는 원각사에도 주석하고 김천 직지사에도 주석해서 부도탑이 남아 있어요.해인사 홍복사 해인사 원당암 중창, 그래서 조선시대 이렇게 절이 많이 중창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지요.
그 역할을 신미 학연 학전이 조선시대 삼화상이 관여했다는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전 스님의 부도탑도 신미 스님 옆에 나란히 있는데 학연 스님의 기록은 없어요.
그리고 김소원도 대단한데 정희 왕후를 보필하는 대단한 학자라고 말했죠. 모든 궁궐에서 시험을 보면 급제를 해서 왕에게 상품을 하사 받는 그러한 기록들도 많이 나옵니다. 성삼문 신숙주 이런 대학자들과 자웅을 겨루었던 천재 학자였다고 해요. 충북 영동에 가면 김수원의 묘가 있습니다. 아까 말한 대로 석보상절이라든가 사리영웅기도 굉장히 중요한데 경복궁에 불당, 경복궁 안에 절을 만들 때 부처님의 가피로 사리 2과가 나투게 됩니다. 나중에 사리 2과가 100개의 사리로 분신을 하게 됩니다. 세종께서 이 기록을 글로 남기라고 해서 쓴 글이 ‘사리영웅기’이고 김수원의 문집 15집에도 글들이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성들의 활약인데 1446년 3월 소헌왕후가 훈민정음 반포 6개월 전에 수양대군의 집에서 돌아 가십니다.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너무나 슬퍼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까 이러다가 둘째 아들마저 어떻게 될까 봐 세종께서 커다란 결단을 내립니다. 불경을 번역하는 것 보다 더 큰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일은 없으니 너가 엄마를 위해서 불경을 대작을 열 달만에 24권을 만들어 냅니다.
제 책에도 썻지마는 월인석보에는 신미 스님의 그림자가 월인석보는 석보상절에 비하면 대학원 수준이라고 할 수 있어요.
훈민정음만 익히면 초등학생도 독학으로 익힐 수 있는 그런 쉬운 경전입니다.
석보상절에는 김수원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썼고 두 번째 나오는 사람이 세조의 부인 정희 왕후인데 이 사람 한 사람만 이야기해도 3시간은 족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자 세종입니다. 조선의 첫 번째 왕비 소헌 왕후입니다. 우리에게 국모는 단연 육영수 여사이듯이 조선의 왕비하면 소헌 왕후를 떠올렸다고 해요. 대단한 여장부 여걸입니다.
세조의 왕비 정희 왕후는 ‘계유정난’이라고 난을 일으킬 때 수양대군이 거사에 실패할까 봐 망설이고 있으니까 정희 왕후가 갑옷을 들고 있다가 그 수양대군에게 갑옷을 입혀 주면서 등 떠밀어서 계유정난을 성사 시켜서 세조 임금이 되었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희왕후와 세조는 대단히 금슬이 좋았어요. 그리고 소헌왕후와 세종대왕도 금슬이 좋았다고 세종대왕은 자리에서 앉아 있다가 소헌왕후가 오면 자리에서 일어나며 예를 갖추었다고 해요.
그리고 세조는 후궁이 숙의 박씨 한 사람 밖에 없을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고 합니다. 인수대비 내훈(內訓)을 쓴 한문경전과 훈민정음에도 달통을 하고 중국 한문 원서를 읽어서 거기에서 좋은 글만을 뽑아서 이런 한글로 만들어진 최초의 여성 교육서 내훈(內訓)을 씁니다.
그리고 조 두대라는 궁녀가 사실은 아까 광평대군의 여종이었다고 해요. 왕이 되기 전부터 눈 여겨 보고 있다가 왕이 되자 바로 궁궐로 불러서 오랫동안 한 40년 정도 전언 상의 상궁 여러 임금을 모시면서 인수대비의 시중을 들면서 조 두대도 인수대비를 도와 내훈을 쓰게 됩니다. 그 역시 계급 사회에서 태어나서 그렇지 그들을 능가하는 대학자라고 할 수 있겠죠.
숙빈 박씨도 금강경언해 과정에 참여했습니다.여든 살이 될 때 비구니 스님으로 출가하셨다. 이렇게 나옵니다.
결론은 월인석보의 미래는 조선 불교 대장경의 미래는 세계 기록 유산으로 함께 만들어서 우리 한글의 한류 콘텐츠의 모태인 K classic 콘텐츠로 회전을 시켜야 하는데 여기 불광사에서 희망을 가져 보면서 여기서 마치겠습니다.(월광화 보살님 녹취)
♬ 찬탄곡 : 무상인(꽃을 바치나이다) ( 고은 작사. 박범훈 작곡 , 김회경 지휘) 마하보디 합창단 ♬
꽃을 바치나이다 꽃을 바치나이다
님께 바칠 것은 피어서 지는 꽃이랍니다
바야흐로 이슬이 내려 꽃은 아름답고 이때밖에 없습니다 꽃을 바치나이다
오래 오래 피는 것보다 님께 바칠 것은 피어서 피어서 지는 꽃이랍니다.
바야흐로 이슬이 내려 꽃은 아름답고 이때밖에 없습니다 꽃을 바치나이다
오래 오래 피는 것보다 님께 바칠 것은 피어서 피어서 지는 꽃이랍니다
우 우 우우우우우 우
수능 백일 및 각종 고시 학업성취 발원문을 스님과 불광 형제들이 합송하고, 이어 혜담 스님께서 백중 기도 축원을 해주셨습니다.
발원문 낭독 : 송파 27구 명등 자은주 보살님 (불광법회불광사 정상화 기도 발원)
현안 보고 : 현진 법회장님
오늘도 새 법우 여섯분이 불광 법회에 처음 오셔서 환영식 더불어 법회장님과 사진도 찍었습니다. 불광의 오랜 도반이 되시길 발원합니다.
혜담 스님과 연화부 거사님들의 집전으로 보문부에서 여법하게 차린 영단을 향해 백중 6재 시식을 시작합니다.
49재 및 기제사, 백중 기도에 동참하시는 대중들이 질서정연하게 영단에 잔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모든 시식 절차가 끝나고 마하보디의 '무상게' 대중과 함께 '빛으로 돌아오소서' 음성공양 올리고 백중 6재 시식을 마쳤습니다.
오늘 49재 맞이하신 분의 가족들은 사진과 위패를 모시고 연화부장님의 염불 에 따라 만불당 얖 소지대에서 위패를 소지하고 계십니다.
법회 마치고 귀가하시는 분들을 위해 시식하시도록 보문부에서는 공양물을 소분하여 제공합니다.
각 구, 법등 가족들이 즐겁게 법등 모임을 하시며 나름의 음식 준비하신 법등도 있고 보문부에서 제공하신 비빔밥으로 점심 공양을 하고 계신 즐거운 모습입니다.
백중 6재 시식 공양물을 준비하시는 보문부 봉사하시는 분들은 전날부터 분주하게 봉사하시고 계십니다..
시식에 쓰인 그릇 설거지 삼매에 드신 봉사자 여러분들. 두루두루 감사합니다.
재활용 및 음식 쓰레기 처리에 열심이신 보살님들은 ,법회에 참석하신 8~9백명의 뒷모습을 아름답게 정리해 주시는 거룩한 불들 입니다..
법회 후 대웅전에서 염송팀의 집전으로 금강경 독송이 매일매일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오늘도 모두가 편안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오늘은 4조 보현행자 여러분과 수선화보살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법회 준비를 끝내고 백중 6재를 위하여 영단에 위패를 준비하시는 거사님들과 함께 한 간식 타임은 훈훈하고 정겨운 시간이었습니다.
오늘도 청정팀은 형제 여러분이 편안하게 기도 정진하시길 두 손 모읍니다.
오늘의 법회가 진행되기까지 전날부터 법회보 접는일, 영단 설치, 보문부 영단 진설준비, 많은 분들의 정성으로 이어짐을 찬탄드립니다.
열기가 바닥까지 뜨겁게 달구던 무덥던 지난 주에도 봉은사, 동명사에서 1인 시위 정진 중이신 불광 형제분들.
토요집회에 참석하여 남문, 동문, 서문에서 각 출입구에서 시위 정진하시고 기록으로 한 것 남겼습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_()_
|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
첫댓글 길고 어려운 법문을 녹취하신 월광화보살님 대단하십니다. 법회 사진 찍으신 보현화보살님 그리고 지일심보살님, 불광법회를 사진과 글로 편집하여 올리신 마음님 모두 거룩하신 노고에 깊이 찬탄올립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