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퀴의 덕, 원만성
인간이 바퀴를 발명한 것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매우 오래됐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바퀴가 나오니까 말이다. 또한 중국의 춘추시대에는 전쟁의 도구로 말이 끄는 전차를 애용했고, 유럽에서도 고대 로마에서 전차를 전쟁의 도구로 사용했다. 전차가 가진 가장 중요한 기능은 신속한 기동에 있는데 이 기능을 가장 잘 구현하는 것이 바퀴이다. 바퀴가 없다면 전차도 없다. 그 무한한 회전성은 바로 완전한 바퀴의 원형에 근거하고 있다. 바퀴는 그 모양이 완전한 원형이어야지만 그 기능을 다 할 수 있다. 만약 바퀴가 정사각형이거나 아니면 찌그러진 원형인 타원형이라면 바퀴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바퀴는 원만해야한다.
우리의 삶 역시 원만성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나의 삶이 타원형이거나 네모지거나 극단적으로 세모의 모양이라면 세상을 굴러갈 때 얼마나 힘들겠는가. 얼마나 저항을 받을 것이며, 얼마나 충격을 받을 것이며, 그 달리는 속도 또한 얼마나 느리겠는가. 내 몸은 또 얼마나 망가질 것인가.
그 바퀴의 핵심은 마찰을 제거하는 베어링에 있다. 베어링이 있음으로 해서 바퀴는 부드럽게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베어링이 없던 시절 마차바퀴의 축에는 마찰을 줄여주는 끈적한 기름과 같은 물질을 발랐다. 어린 시절 마차 바퀴에 발라져 있었던 그 새카맣고 끈적한 액체를 우리는 아부라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보니 이는 기름의 일본말이었다. 우리 삶의 마찰을 제거하는 베어링은 과연 무엇인가.
바퀴는 자전거와 같이 앞바퀴와 뒷바퀴가 있는 것이 있는 반면, 또 옛날 마차와 같이 좌우측에 바퀴가 있는 것이 있다. 고대 마차의 바퀴는 그 축간거리가 일정하게 규정되어 있다. 진시황이 고속도로인 치도(馳道)를 만들 때 이러한 바퀴 간의 축간거리를 고려해서 일정한 규격의 도로를 건설했다. 전철(前轍)을 밟는다는 말에서 전철이란 앞서 지나간 마차바퀴 자국을 말한다. 서양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경제학 용어로 경로의존(path dependency)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한번 앞에서 지나간 경로는 설사 그것이 불합리하다하더라도 그대로 따라간다는 법칙이다. 오늘날 우주로 발사되는 우주선 동체의 규격이 고대로마 마차를 끄는 말 두 마리의 엉덩이의 폭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고대 로마의 마차의 두 마리의 말 엉덩이의 폭이 도로의 폭을 결정하고, 이것은 후일 철도의 표준규격을 결정했으며, 유타주에서 조립한 우주선은 열차를 이용하여 발사장까지 이동하는데 턴널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결국 열차의 궤도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오늘날의 우주선의 동체는 고대 로마의 마차를 끄는 말 두 마리의 엉덩이 폭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전거의 바퀴는 앞과 뒤의 바퀴이다. 규격적이지 않고, 타는 사람의 신체적 조건에 따라 적당히 가변적이다. 좌우 바퀴와 같은 규격적이고, 법률적이고, 고정적이고 기계적 엄격성을 거부한 자전거의 바퀴는 우리의 삶이 각자 살아가기에 알맞도록 가변적이고, 융통적이며, 인간적이다.
바퀴에 바람을 넣어 진동의 불편함을 제거하고 구름성을 좋게 한다는 생각은 획기적이다. 만약 우리가 어렸을 적 보았던 마차바퀴와 같이 나무로 만든 바퀴였다면 아마도 오늘날의 이동의 신속성은 없었을 것이다. 땅의 모든 충격을 그대로 받으며 달리는 나무바퀴는 힘들다. 마치 세상이 우리에게 가하는 힘듬과 충격을 우리가 온몸으로 받는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피곤할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고무바퀴의 발명 역시 바퀴의 발전에 획기적 발명이라고 할 수 있다. 바퀴에 공기를 넣음으로서 우리는 지면으로부터의 충격을 완화하여 쉽게 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공기가 든 고무바퀴는 위대하다.
자전거는 두 개의 바퀴가 있다. 바퀴는 혼자서는 기능을 하지 못한다. 물론 외발자전거가 있기는 하지만 그 외발자전거를 자전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나로 가는 자전거는 균형을 잡기가 어렵다. 그것은 곡예를 하는 보여주기에 불과하다. 우리의 삶 역시 보여주기식의 가식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직위와 어느 정도의 재산, 어느 정도의 학식 등 모든 외적인 형식이 우리 삶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또 바퀴가 하나가 아니고 두 개라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외발자전거가 균형을 잡기가 어렵고 불안한 것처럼, 혼자 사는 삶은 힘들고 불안하다. 누군가 나와 함께 할 때 우리의 삶 또한 안정된다. 자전거의 두 바퀴는 우리가 좋은 친구, 좋은 배우자와 같이 누군가 나와 함께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지혜를 일깨워준다.
첫댓글 자전거 여행과 바퀴의.의미에 대한 글 잘읽었습니다. 맘 먹고 자전거를 사서 한강변을 위아래로 몇 차례 주행을 했었는데 백강의 글을 읽으니 다시 패달을 밟고 싶군요.하계연수시 자전거에 대한 이야기 한마디 해주시지요.
고무바퀴가 땅의 충격을 먼저 받아주니 사람들은 편하게 갈 수 있었던 거군요
저도 단체생활에서 이런 완충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막 듭니다
이미 가정에서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살면서 조금은 이런 역할 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자연의 많은 것이 이런 역할을 해 주기 때문에 오늘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뭐가 나를 일차적인 충격에서 보호해 주는지 찾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행복한 고민거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번 지송님의 전시회 모임 때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님에도 자전거로 오신 백강의 모습에서 백강의 자전거 사랑의 심도를 잘 알 수 있었어요. 자동차보다는 스피디하지 않은 슬로 라이프도 즐기면서 건강도 챙길 수 있는 저전거타기, 멋집니다. 여건만 된다면 따라했으면 하는 유혹이 생기네요~
자전거를 통해 관련된 역사도 알게 되고 인생에 대입하여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 해주신 백강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자전거를 타게 되면 백강의 글을 되새기고 음미하게 될 것 같군요.
나이가 들수록 할 수 있는 운동이 점점 줄어듭니다. 걷기나 조깅도 나이가 들면 무릎 때문에 어렵게되지요. 그런데 자전거는 체중을 안장에 얹고 타는 운동이기에 나이가 들어도 계속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2019년 제가 DMZ횡단을 할때도 80이 넘은 노인이 그 힘든 코스를 완주했거든요. 저보다도 오히려 더 잘타더라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전거라고 하면 위험하다는 생각부터 먼저 하더라고요. 내가 보기에는 어느정도 숙달되면 절대로 안전합니다. 단 타기전에 몇가지 안전에 관한 사항을 미리 숙지를 해야겠지요. 만약 회원들 중 자전거를 타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몇가지 당부할 사항이 있긴 합니다.
바뀌를 일상생활과 연관지어 신선한
교훈을 도출하는것은 창조적 발상으
로 생각됩니다.
우리삶에도 바퀴내 공기와같은 완충
역할도 중요하고 두 바퀴는 우리의
더불어 함께하는 삶이 되겠지요.
나역시 중고시절 자전거를 타면
양손을 놓고 타거나 달리는 자전거
위에서 팔굽펴 피기등 묘기를 부
렸지요.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내 고향은 자전거의 고장입니다. 어렸을 때 자전거는 재산목록 1호에 해당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지요. 비교적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지방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자전거를 타고 시장을 보러가곤 했지요. 나도 은퇴 후 한동안 할 일 없이 배수건달이었을 때 한강고수부지 자전거길이 나의 일터가 된 적이 있었어요. 그러나 당시의 자전거 안장은 쿠션이 좋지 않아 전립선염에 취약하여 이 후 자전거를 아주 멀리 장시간 타는 것을 피하고 있어요. 요즘엔 기능성 좋은 자전거가 많아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될 듯 합니다. 자전거를 타면서 생각한 것을 글로 잘 묘사한 백강의 자전거 철학, 잘 읽고 음미합니다.
바퀴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 감탄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기에 늦은 나이가 아니라는 충고 감사하고, 용기를 내볼까 생각하게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