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산(泰山)
2005년 4월 말 함께 운동하는 대학 친구 몇 사람 내외들이 중국 중원지방 여행에 나섰다. 산동성(山東省)의 성도 제남(濟南) 공항에 내려 북경의 교포여행사 김 사장과 현지 가이드를 만나 곧 바로 태산으로 향하였다. 태산을 보기위해서는 먼저 산 밑에 있는 대묘(岱廟)를 관광하고 태안(泰安)에서 일박을 한 다음 날 산을 오르는 방법도 있으나 우리 일행은 정상에서 자고 다음날 새벽에 일출을 보기 위하여 태산으로 직행하였다. 태산은 제남(濟南)에서 서남쪽으로 약 200 km 쯤 되는 곳에 있는 해발 1532 m 높이의 산이다. 이 산은 우리나라 오대산과 비슷한 높이지만 산동성 일대가 넓은 평야지대인지라 아주 높은 산으로 보인다. "태산이 높다하되..."라는 시조를 통해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태산은 중국에서도 하나의 신령한 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태산은 호남성(湖南省)의 형산(衡山), 하남성(河南省)의 숭산(嵩山), 섬서성(陝西省)의 화산(華山), 산서성(山西省)의 항산(恒山)과 함께 예로부터 오악(五岳)의 하나로 일컬어졌으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동쪽에 있다고 하여 일명 동악(東岳)이라고도 불리웠다. 공항에서 버스로 약 한 시간 반 정도 가서 산 밑에 도착하니 중천문(中天門)행 버스 터미널이라 한다. 일행은 여기서 자그마한 산악 버스를 갈아 타고 다시 약 20분간 올라가 하차하니 이번에는 로프웨이를 타고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원래 태산을 제대로 오르고자 하면 대묘(岱廟) 뒤에 있는 대종(岱宗)의 홍문(紅門)으로부터 걸어 올라가야 하지만 그러자면 9 km의 거리를 7천 4백여 돌계단을 밟아 올라가야 하며 적어도 다섯 시간을 소비하여야 한다는데 우리 일행들의 형편이 그럴 수는 없어 쉬운 방법으로 로프웨이를 선택 한 것이다. 로프웨이를 타고 오르면서 본 산세는 험준하고 바위와 절벽들로 이루어져 그 경관도 이름값을 하는 것 같았다. 산 정상에 있는 옥황정(玉皇頂)에서 약 50 m 바로 아래에 있는 신치빈관(神憩賓館 Shenqi Hotel)이라는 곳에서 여장을 풀었다. 호텔은 입구에 有朋自遠方來... 라는 논어 첫머리에 나오는 글귀를 크게 써 붙이고 먼 곳에서 온 손님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이 호텔은 중국의 최고위급 인사들도 들린다고 하며 그런대로 하루 밤은 지낼만한 곳이었다. 이 호텔 바로 밑으로 공자묘(孔子廟)가 있고 주변에 호텔과 여관들이 여럿 보였다. 드디어 그동안 꼭 한번 오고 싶었던 태산에 도착한 것이다. 이튿날은 올 때와는 달리 날씨가 맑았다. 우리 일행이 새벽 다섯 시를 조금 지나 일관봉(日觀峰)으로 올라가니 어디에서 모두 왔는지 아마 5, 6백 명은 족히 될 만한 많은 사람들이 해돋이를 보려고 나오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밤새 걸어 올라온 사람들이고 옷차림으로 보아 대부분은 산위 여관이나 호텔에서 자고 나온 사람 같이 보였다. 태산에서 일출을 보면서 각자의 소망을 빌면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전설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올라왔는지 모른다. 우리는 구름 속으로부터 해가 떠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장관이었다. 여러 가지 색으로 변하는 하늘과 운해(雲海)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은 과연 볼만한 것이었다. 이렇게 날씨가 맑은 날은 한 달에 5, 6일 정도밖에 안된다니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태산은 옛날 역대 황제가 즉위할 때 그 정당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천지신(天地神)에게 제사를 드리는 소위 봉선(封禪)의 의식(儀式)을 하던 장소로 더욱 유명하다. 이 봉선 제사는 태산 밑 태안시내에 있는 대묘(岱廟)에서 지내기도하고 또는 산위에서 지내기도 했는데 멀리 진(秦)나라 때부터 역사상 72명의 황제가 여기에 와서 그 의식을 치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양귀비(楊貴妃)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당(唐)나라 현종(玄宗)은 개원(開元) 13년(725년) 11월 초겨울 추운 날씨에도 재상을 비롯한 문 무 백관을 대동해서 태산에 올라 몸소 호천상제(昊天上帝)와 오제 백신(五帝 百神)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봉선의식(封禪儀式)을 마치고 현종 일행은 장작을 모아 큰 불울 놓고 제문을 불살랐으며 황제의 만수무강을 외치는 신하와 백성들의 만세 소리는 산골자기를 진동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는 정상 바로 밑 큰 바위벽을 깎아 기태산명(紀泰山銘)이라 새겨 글자에 황금을 입히고 996자의 마애 비문(磨崖 碑文)를 새겨 두었다. 당 현종이 남긴 紀泰山銘 (오른쪽)
음각한 비문에 금박을 입혀 비록 퇴색은 했지만 지금도 누렇게 빛나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볼 수 있었다. 또한 태산에는 수많은 문인 묵객들이 올라가 글이나 시를 남기고 있다. 공자는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게 보이는구나.”(登泰山而小天下)라 하였고 당대(唐代)의 유명한 시인 두보(杜甫)는 “마땅히 정상에 올라 한번 바라보니 모든 산들이 작아 보이네.”라고 끝맺은 다음과 같은 오언율(五言律)을 남긴 바 있다.
岱宗夫如何 岱宗에는 대체 어떠한지 齊魯靑未了 齊魯의 수목은 아직도 덜 푸르는데. 造化鍾神秀 산세의 造化는 신의 작품을 모아 놓은듯하고 陰陽割昏曉 陰陽은 저녁과 새벽을 가르고 있네. ?胸生層雲 가슴을 펴 한번 움직이니 구름이 생기고 決?入歸鳥 눈을 크게 떠서 자세히 보니 새들이 돌아오네. 會當凌絶頂 힘들어도 마땅히 정상에 올라가서 一覽衆山小 한번 바라보니 모든 산들이 작아 보이네.
태산 위에는 팽진(彭眞) 교석(喬石) 등 현대 사람들의 글귀도 다수 보였는데 그 중 주은래(周恩來) 전 총리의 부인이며 정치협상위원회 주석까지 했던 여성 혁명가 등영초(鄧潁超)가 8순의 나이에 태산에 올라 남겨둔 글귀(登泰山看祖國山河之壯麗!, 태산에 올라 조국 산하의 장려한 모습을 보노라!)가 눈에 띠었다. 등영초(鄧潁超)는 손문(孫文)의 부인 소경령(宋慶齡) 모택동(毛澤東)의 부인 강청(江靑)과 함께 중국 현대사에서 드물게 보는 여걸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녀는 그 후 12년을 더 살고 세상을 떴다. 많은 글귀들 가운데서도 여성이 남긴 유일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여기에 옮겨본다.
등영초의 글씨
태산에서 내려 와 우리는 산 밑에 있는 대묘(岱廟)로 향하였다. 대묘는 태산의 신을 모시는 곳으로 동악묘(東岳廟) 또는 태산행궁(泰山行宮)으로도 불리는 곳으로서 9.6 평방 킬로나 되는 광대한 부지위에 조성된 큰 사당이다. 경내에는 수 백년 된 취백(翠柏)나무들이 가득 찼고 개중에는 수령이 2000년이나 된다는 한백(漢柏) 5주가 있다. 정양문(正陽門) 배천문(配天門) 인안문(仁安門)을 거처 역대 석비군(石碑群)을 자나니 정전(正殿)인 천황전(天?殿)이 나오는데 여기가 고대 황제들이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대묘의 역사는 고대 전국시대까지 올라가나 현재의 천황전 건물은 북송시대에 창건한 것이라 한다. 높이 약22 m 전면 너비 49m 폭20m나 되는 엄청난 크기의 건물인데 이것은 자금성(紫禁城)의 태화전(太和殿) 곡부(曲阜) 공묘(孔廟)의 대성전(大成殿)과 더불어 삼대고궁(三大古宮)이라 불리는 것이다. 대묘를 자세히l 보려면 적어도 다섯 시간 정도는 걸릴 것이지만 갈 길이 바빠 대충 보고 곡부(曲阜)를 향해 떠났다. 태산 정상의 玉皇頂
(2) 곡부(曲阜, 취부)
곡부는 제남(濟南)에서 서남쪽으로 약 150 km떨어진 곳으로 춘추시대(春秋時代) 공자(孔子)가 태어나 활동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곡부는 봉건 제후국의 하나인 노(魯)나라의 도읍이었다. 현재 곡부의 인구는 약 70만이라는데 그 중 공자의 후손들이라 할 수 있는 공(孔)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약 5분의 1을 차지한다고 한다. 그것도 그럴 것이 곡부 사람들은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 등 공자와 관련 있는 곳을 중심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곡부는 결국 공자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만한 도시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이제 공자의 고향에 왔으니 그의 생애와 그 시대를 잠간 살펴보고자 한다. 공자는 동주(東周) 영왕(靈王) 20년(기원전 552년)에 노(魯)나라의 한 무신(武臣)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구(丘)라 하며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보통 공자(孔子)라 부르고 있으나 자(子)자는 당시 ‘선생’과 같은 남자에 대한 존칭이다.
孔廟 입구
공자는 아버지와는 달리 무를 멀리하고 글공부에 힘을 기울였으며 나이 52세에 중도(中都)의 재(宰)라는 낮은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곧 출세할 기회가 찾아 왔다. 이듬해에 공자는 이웃 제(齊)나라와의 정치담판에서 제나라의 책략을 꺾고 노나라의 국위를 크게 선양한 일이 있어서 그 공으로 대사구(大司寇)라는 최고 재판관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공자는 당시 삼환(三桓)이라 불리던 세도가들에 의해 노나라 왕실이 농락당하고 있는데 분개하여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도덕정치를 구현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쫓겨 나 다른 나라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이리하여 14년 동안 어렵게 방황한 뒤에 공자는 젊은이들의 교육과 미래를 이끌어 나갈 후진 양성의 뜻을 굳히고 69세의 나이에 노(魯)나라로 다시 돌아와 교육과 학문분야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게 된다. 공자가 학당을 열자 수천 명의 제자들이 운집했고 학문과 덕행에 뛰어난 인재들이 속출했으며 그는 불과 5년 사이에 시(詩) 서(書) 예(禮) 악(樂) 역(易) 등 유학(儒學)의 큰 체계를 재정리하고 기원전 479년에 74세로 서거한다. 2500 여년전 공자가 활동했던 시대는 은(殷)을 이은 주(周)나라가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긴 뒤 즉 동주(東周)시대였다. 이 때는 중원(中原)의 황재가 전국을 다스릴만한 힘이 없었으며 지방의 제후(諸侯)들이 나라를 분할하여 통치하게 인정하고 황제에게는 일정한 조공을 바치게 한 이른바 봉건영주제도(封建領主制度)가 성립됐던 시기였다. 따라서 곳곳에서 제후들이 세력을 다투고 정치와 사회가 크게 혼란했던 때이다. 공자의 정치사상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나왔으며 지(智) 인(仁) 용(勇)에 입각한 덕치(德治)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와 제자들의 언행을 기술한 논어(論語)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약 200년 후에 맹자(孟子, 기원전 372 - 289)와 순자(荀子)에 의해 크게 발전하였으며 이 유학(儒學)은 한(漢) 당(唐) 북송(北宋)을 거처 남송(南宋)의 주희(朱熹, 1130 - 1200)에 이르러 성리학(性理學)이라는 새로운 유학으로 다시 태어난다. 일명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불린 이 새 유학(儒學)은 원(元) 명(明) 청(淸) 사회의 지도이념으로 자리 잡게 되며 이는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이퇴계 선생을 비롯한 조선(朝鮮)시대 사회 지도층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공묘 대성전
공묘(孔廟) 우선 곡부의 중심에 있는 공묘를 들어가 보자. 공묘는 당초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공자 사후 다음 해 공자를 위해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삼간짜리 작은 건물로 시작했다. 공자가 평생 노국의 왕실 권력 회복을 위하여 노력한 사람인지라 왕실에서 특별히 배려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 뒤 특히 명(明) 청(淸)대에 와서 증축이 거듭 되어 오늘에 와서는 엄청난 큰 규모로 확장되었는데 지금은 중국 삼대 고궁건축물(故宮建築物)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공묘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성문(?星門)을 비롯한 일곱 개의 대문을 지나야 한다. 그 여섯 번째의 문은 규문각(奎文閣)이라는 높이 23.35 m의 유명한 목조건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북송시대(1018년)에 지은 건물이며 원래 여기에는 많은 고서적들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문화혁명 시기에 그 대부분을 잃었다고 한다. 모택동(毛澤東)의 정치적 야심 때문에 생긴 홍위병(紅衛兵)들의 횡포를 여기서도 찾아 볼 수 있었다. 그 이름 때문에 조선 왕실의 기록문서 서적들을 보관하기 위하여 지었던 창경원내 규장각(奎章閣)이 생각났으나 이 규문각(奎文閣)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이다. 공묘 규문각
공자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는 역대 황제들의 글을 새긴 13개 석비를 안치한 십삼비각(十三碑閣)을 지나 비로소 본전(本殿)이 있는 구역이 나온다. 본전으로 들어가는 대성문(大成門)을 통과하니까 행단(杏壇)이라는 작은 건물이 먼저 나타나는데 여기는 옛날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라 한다. 현판의 글씨는 청(淸)나라 고종(高宗)의 친필. 행단(杏壇)을 지나 드디어 공자의 상을 모신 본전 대성전(大成殿)에 닿았다. 대성전은 황재의 어전(御殿)에만 적용되는 소위 황궁 건축양식으로 지은 건물이며 높이 32 m 전면 너비 54 m 깊이 34 m 의 어마어마한 건축물이었다. 이것은 자금성의 태화전(太和殿)에 비교되는 건물이다. 지붕의 기와도 물론 황궁 건축에만 허용되는 황금색 기와이다. 현재의 대성전은 북송시대(1018년)의 건물을 청나라 때(1724년) 개축한 것이란다. 대성전 안에는 가운데 공자(孔子)의 소상(塑像)이 있고 그 오른편에는 증삼(曾參)과 맹자(孟子)의 상이 그 왼편에는 안회(顔回)와 자사(子思)의 상이 각각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싸고 다시 11 명의 덕망 높았던 제자들과 뒤에 공자에게서 크게 영향 받아 주자학(朱子學)을 창시한 주희(朱熹)의 상을 합쳐 소위 12철(哲)의 소상(塑像)들이 둘러 서 있다. 대성전 뒤에는 공자의 부인을 모신 침전(寢殿)이 있으며 본전 경내 밖에 옛날 공자의 집에서 사용했다는 공택고정(孔宅故井)이라 하는 조그마한 우물이 있었다. 그 옆에 공자가 자녀들을 가르쳤다는 시예당( 詩禮堂)이라는 작은 건물도 보였다.
행단
공부(孔府) 공부는 공묘 바로 옆에 있는 공자의 자손들이 살았던 저택으로서 연성공부(衍聖公府)라고도 불린다. 방의 수가 463개나 되는 커다란 저택이다. 공가(孔家)의 권력을 엿 볼 수 있게 하는 장대한 건물들이다. 중국의 역대 황재들은 공자의 자손들을 중히 대우하였으며 특히 46대 공종원(孔宗願)이 연성공(衍聖公)이라는 작위를 받으면서 그 지위는 크게 격상되었다. 공가의 부와 특권을 상징하는 이 연성공 타이틀은 공씨 종손(宗孫)들에게 세습으로 내려왔다. 역대 황재들은 연성공이 황제를 방문하기 위하여 자금성을 들어올 때에는 말을 탄체 오문(午門)을 지날 수 있도록 하는 등 특별히 예우하였다고 한다. 공부(孔府)안에는 세 갈래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서로(西路)에는 객실과 서제가 있으며 동로(東路)에는 공가(孔家)의 사당이 있고 그리고 중로에는 관아(官衙)가 있다. 대문을 거처 가운데 길을 따라 이문(二門) 중광문(重光門)을 지나면 관아의 중심인 대당(大堂)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연성공이 황제의 사신을 접견하거나 칙명(勅命)을 읽었던 장소라 하며 이 밖에도 중요한 인사를 만나거나 행사를 할 때 이곳에서 했다고 한다. 대당(大堂) 뒤로는 살림집들이 이어지고 있다.
공림(孔林) 공림은 공자를 비롯한 역대 자손들의 묘지이다. 중국에서는 황제들의 묘지를 능(陵)이라 하고 성인들의 묘지는 림(林)이라 하여 관림(關林) 공림(孔林) 등으로 부르고 있다. 공림의 규모는 그동안 계속해서 확장되어 현재에는 야 200 핵트 알이나 되는 커다란 규모이다. 그 안에는 약 3600 개의 비석이 있으며 약 10만주나 되는 수목이 심어져 있어 울창하다. 공림으로 들어가는 참배도로는 꾀 길었다. 중간쯤에 가서 만고장춘(萬古長春)이라는 문을 통과하고 공림 바로 입구에는 지성문(至聖門)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경내에 들어가니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만발하여 은은한 꽃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숲 속의 작은 길을 따라 한 10분간 걸어서 마침내 공자의 묘에 참배할 수 있었다. 묘 앞에는 두개의 비석이 서 있다. 그 옆에는 아들 공리(孔鯉)의 묘가 있었으며 앞쪽으로 손자 공급(孔伋)의 묘가 함께 있었다. 공급(孔伋)은 ‘중용’(中庸)의 저자로 알려진 유명한 사람이다.
孔林(공자의 능묘)
공자묘의 왼편에 작은 건물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자공여(子貢廬)라고 하였다. 즉 공자 사후 자공이 6년 동안 여기서 공자의 묘를 지키며 여묘살이를 한 집이다. 다만 지금의 건물은 명나라 때 다시 지은 것이라 한다. 동시에 그때 자공이 손수 옮겨 심었다는 해나무(楷木)의 마른 둥치가 작은 집 안에 보존되고 있다. 해나무는 둥치가 곧고 단단하여 공자와 공가의 상징 나무로 되어 있다. 공림에는 공씨 자손으로 유명한 사람들의 무덤이 모두 있다. 그 가운데는 건륭(乾隆)황재(1736 - 1812)의 딸 우(于)씨와 결혼한 제 72대 연성공 공헌배(孔憲培)와 유명한 경극(京劇) ‘도화선’(挑花扇)의 작가이며 제64대 자손인 공상임(孔尙任)의 무덤도 있다.
(3) 정주(鄭州, 쟁쪼우)
대추로 유명한 정주는 하남성의 성도(省都)인데 궁후(功夫) 무술의 발상지 소림사(少林寺)를 찾아 가려면 반드시 들려야하는 국제공항이 있는 곳이다. 약 170만 명이 사는 정주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20 km 가면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황하(黃河)가 유유히 흐르고 있다. 최근에 와서 정주는 1억 인구의 하남성(河南省)을 대표하는 깔끔한 현대 도시로 크게 변모하고 있어 처음 들리는 사람으로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널따란 도로들이며 새로 지은 빌딩들 그리고 휘황찬란한 조명과 화려한 야경은 상해나 북경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비교적 내륙이면서도 정주가 최근 이렇게 발전하고 있는 것은 동서와 남북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교통의 요충이기 때문이다. 즉 강소성(江蘇省) 연운(連雲)항에서 서안 난주 우루무치를 거처 카자흐탄 국경도시 훠얼궈쓰까지 가는 동서 횡단 고속도로와 북경과 주해(珠海)를 잇는 남북 종단 고속도로가 정주에서 교차한다. 특히 연운과 훠얼궈쓰를 잇는 롄훠고속도로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현대판 실크로드라 할 만큼 아주 중요한 동맥이다. 동시에 북경과 주해를 잇는 징주(京珠)고속도로 역시 경항운하를 대채하는 남북간 물산교역을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정주를 성도(省都)로 하는 하남성(河南省)에 관하여 좀 더 소개해 보고자 한다. 하남성은 동으로는 산동성(山東省)과 서로는 섬서성(陝西省)과 접하고 있는 황하(黃河) 이남의 흔히 중원(中原)이라 불리는 지방이다. 면적은 남한의 두 배에 가까운 16만 7천여 평방 킬로 미터이며 숭산(嵩山)과 같이 높은 산도 더러 있으나 대부분 평야지대로 되어 있다. 연 중 강우량이 1000 밀리 내외에 불과하여 밀 보리 면화 야채 등 밭농사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기후는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그것과 유사한 것 같이 보였다. 이곳 정주대학을 졸업했다는 교포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이곳 하남성(河南省)의 특징 다섯 가지를 들어 보면, 첫째 고(古)자 문화인데 하남성은 중국 고대문명의 발상지이며 중국 역사상 실존했던 가장 오래된 왕조라고 하는 은(殷)을 비롯해서 주(周) 진(秦) 위(魏) 당(唐) 송(宋) 등이 도읍을 두었던 곳이다. 1955년 정주 시내의 판축(版築) 성벽에서 약 3500년 전 은(殷)나라 도읍터가 발견되고 청동기(靑銅器) 등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둘째는 하(河)자 문화인데 하남성은 옛날부터 황하 주변의 생태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황하는 과거 약 1500회에 달하는 홍수로 그 물길을 계속 바뀌어 왔으며 이 지방의 흥망성쇠 역시 황하와 떼어 놓고 얘기할 수 없으며 이로 말미암아 치수(治水)가 역대 왕조들의 커다란 국책사업으로 발전하여 온 곳이기도 하다. 셋째로 근(根)자 문화인데 중국문화의 많은 것들이 이곳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한자의 기원이라고 하는 갑골문자(甲骨文字)가 은대(殷代) 후기의 도읍이었던 안양(安陽) 은허(殷墟)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옛날 구주(九州)시대에는 이곳을 예주(豫州)라 했는데 그것이 중주(中州)로 바뀌었고 다시 중원(中原)으로 되었으며 이 중원(中原)에서 중국(中國)이라는 나라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옛 이름 예주(豫州)를 기념하기 위하여 현재 하남성의 자동차 번호판은 모두 예(豫) 자를 수자들 앞에 쓰고 있다. 넷째는 권(拳)자 문화이다. 영화 등을 통하여 이미 익히 알려져 있는 소림무술 즉 소홍권(小洪拳) 대홍권(大洪拳) 금강권(金剛拳) 태극권(太極拳) 등이 이곳에서 나왔다. 마지막으로 화(花)자 문화인데 낙양(洛陽)에는 모란꽃이 유명하고 개봉(開封)에는 국화꽃이 유명하다.
(4) 개봉(開封,카이펑)
개봉(開封)은 정주 동쪽으로 약 70 km 떨어진 곳에 있는 인구 약 50만 되는 아주 오랜 고도(古都)이다. 옛 이름은 개봉(啓封) 또는 변경(?京)이라고도 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낙양을 서경(西京)이라 하고 개봉을 동경(東京)이라고 불렀다. 개봉은 오래전 우리나라에서 TV 연속 드라마로 소개된 포청천(포증,包拯)의 고향이다. 개봉은 또 수호전(水滸傳)의 무대이기도 하다. 개봉의 역사는 멀리 2700년 전 춘추시대까지 올라가지만 처음으로 나라 도읍으로 된 것은 기원전 364년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였던 위(魏)나라의 수도 대량(大梁)으로서 번영을 누리던 때이다. 그 뒤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한(後漢), 후주(後周), 북송(北宋), 금(金) 등의 왕조가 개봉에 도읍을 두었다고 하여 흔히 칠조고도(七朝古都)라 불린다. 개봉 시내에 들어서면 먼저 보이는 커다란 성문이 있는데 그곳에는 ‘대량’(大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옛날에는 성벽도 있었으나 허물어져 지금은 볼 수 없다. 특히 북송시대에는 인구 약 150만에 달하는 세계적으로도 큰 도시로서 번영을 누렸다는데 그 위용은 북송의 화가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라는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원본은 대만의 故宮博物館에 있다고 함) 그 후 청조(淸朝) 시대에는 하남성서(河南省署)로서 그리고 중화민국시대에는 하남성회(河南省會)로서 중원(中原)지방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1954년 성도(省都)가 정주(鄭州)로 옮겨간 이후에는 중국 6대 고도(이 밖에는 西安, 北京, 洛陽, 杭州, 南京)의 하나로서 유명 관광지로만 남아 있다. 그러면 여기서 잠간 송나라(北宋)의 개국 역사에 관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서기 618년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건국한 당(唐)나라가 황소(黃巢)의 난(亂)(875 - 884)으로 국력이 쇠퇴해지면서 그 진압에 공이 컸던 주전충(朱全忠)에게 제위를 빼앗겨 300년을 체우지 못하고 멸망하자 중원지역은 군벌세력들의 각축장으로 변하였다. 그 뒤 50여 년 동안에 중원에서는 무려 다섯 개의 나라가 차례로 흥망을 거듭하게 되었는데 (五代十國時代) 그 마지막 왕조 후주(後周)의 장군 조광윤(趙匡胤)이 대권을 탈취하여 960년 개봉을 수도로 하는 송(宋)나라를 건국하였다. 이 때의 송나라를 그 뒤에 이어지는 남송(도읍은 杭州)과 구별하기 위해 북송이라 한다.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은 군벌들이 세력을 장악하고 있는 이상 언젠가 자기에게도 위협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주변의 군벌들을 거세하기로 마음먹고 차례로 교모하게 그들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문관을 기용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하여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체계적인 문민통치 시스팀을 완성하였다. 한편 문민통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법을 엄격히 시행하고 문관을 채용하는데도 공정한 과거제도를 통해서 널리 인재를 등용하였다. 송 태조는 수나라 때 시작되어 당나라 때에 체계가 잡힌 과거제도를 다시 개혁하여 최종시험은 황제가 친히 시행함으로써 모든 관리들을 직접 선발하였다. 이리하여 과거를 통해 등용되는 관리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이를 중앙집권체제의 기초로 하였던 것이다. 또한 주요 포스트에는 한 사람이 그 자리를 오래 차지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이 자랄 수 없도록 제도화하였다. 이러한 조광윤(趙匡胤)의 새롭고 탁월한 국가경영기법은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 50여년 동안의 거듭된 쿠데타를 보고 터득한 정치 노우하우라 할 수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조광윤(趙匡胤)은 일본의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비유할 수 있는 장수이다. 좋은 예로 북송(北宋) 167년 동안 개봉(開封) 부윤(府尹)을 지낸 사람은 도합 147명이나 되었다는데 이는 한 사람이 평균 1년 2개월을 체우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종 때의 유명한 판관 포청천(包拯, 999-1062)이 개봉 부윤을 지낸 기간도 불과 1년 3개월밖에 되지 아니했다고 한다.. 개봉 부윤을 지낸 사람 가운데는 시인으로서도 유명한 구양수(歐陽修)도 있다. 그는 24세에 진사시험에 수석 합격하여 관리로 나아가 제 4대 인종(仁宗)황제 때에 개봉부윤이 되고 나중에는 재상(宰相)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북송 중기에 문학 철학 등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대 문장가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등을 길러낸 자이다. 당시의 개봉 성도(城都)는 그동안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황하 범람으로 수많은 유적 및 유물과 함께 현재의 개봉시(開封市) 지하 7 - 8 m 아래서 햇빛을 보지 못한 체 묻혀 있다. 개봉 부근을 휩쓴 황하 홍수는 모두 여덟 차례가 있었다는데 그중 두 차례는 인재(人災) 즉 사람들이 전쟁 중 황하 재방을 헐어 수공(水攻)을 감행한데 기인하는 것이라 한다. 개봉시내가 물바다가 된 홍수만도 네 차례나 되었다. 5460 여 km에 달하는 황하의 물 빗은 붉은 황토색이며 중 하류로 엄청난 토사를 실고 온다. 이렇게 매년 쌓인 토사로 황하의 하상(河床)은 개봉 시가지보다 약 10 m 가량 높다고 한다. 지금의 개봉은 관광지답게 옛날 모습을 많이 되 살려 놓고 있으며 주로 북송시기의 번영했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개봉에서 볼만한 몇 곳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개봉 철탑
철탑(鐵塔)
이 탑은 높이가 55 m 나 되어 개봉 시내에서는 어디서나 쉽게 보이는 유물로서 1049년에 건립된 8각 13층의 탑이다. 지금은 공원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개보사(開寶寺)라는 큰 절에 있었던 탑이란다. 붉은 색 오지벽돌로 되어 있어 그 색깔이 철과 같다고 하여 철탑이라는 이름이 부쳐졌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튼튼하기가 무쇠와 같다고 해서 철탑이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이 탑의 목적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함이고 당초에는 나무로 된 목탑을 세웠다가 기울어져 헐어내고 그 자리에 다시 54종류의 각기 다른 모양의 붉은 오지벽돌을 구어 이들을 서로 힘을 받도록 얽어 쌓아 올렸다고 한다. 천년 세월의 풍상을 격어면서도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 서 있을 정도로 견고하다. 청일전쟁 때 일본군 비행기 총탄 62발을 맞았으나 일부의 손상만 입었을 뿐 그대로 견뎌내었다고 한다. 그 때의 손상부분을 보수한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탑의 기단이 보이지 아니하는데 이것은 황하의 범람으로 기단을 포함해서 두 층이 지하에 묻혔기 때문이다. 탑신의 오지벽돌들을 자세히 보면 비천 용 기린 보살 역사 사자 등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탑 안에는 중심 기둥이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168개의 계단이 나선형(螺旋形)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그 수는 우연이겠지만 북송의 존속 기간 167년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이 계단을 타고 탑 정상 근처까지 올라 갈 수 있으며 그곳에서는 개봉 시가지를 내다 볼 수 있다. 탑 남쪽으로 웅장한 접객전이 한 동 지어져 있는데 그 안에는 송 금대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으며 벽에는 극락세계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철탑은 개봉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옛날 유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값진 것이다.
용정
용정공원(龍亭公園)
이 곳은 용정(龍亭)을 중심으로 하는 커다란 공원이다. 용정은 옛날 송나라 궁전이 있었던 자리에 축대를 높이 쌓아 전각을 하나 지은 것인데 원명은 만수정(万壽亭). 그 안에는 송나라 건국 축하식전을 화려하게 재현해 두고 있다. 지금의 건물은 강희(康熙) 31년 즉 1692년에 지었다고 한다. 용정으로 올라가는 석단은 3 층으로 되어 있고 대리석계단 72개로 이어져 있으며 돌계단 가운데는 자금성과 같이 용이 조각되어 있다. 이 석단에서 앞으로 보면 커다란 호수가 가운데 길을 경계로 하여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번가호(藩家湖) 양가호(楊家湖)라 하는 이 호수들도 몇 차례의 황하 홍수 뒤에 인공으로 조성된 것이다. 용정에서는 하루에 몇 차례씩 송 태조의 등극 모습을 퍼포먼스로 보여주고 있어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준다.
송도어가(宋都御街)
호수 건너 용정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오조문(午朝門) 앞으로는 송도어가(宋都御街)라 불리는 넓은 길이 나오는데 양편에는 송(宋)나라 시대의 거리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두었다. 상점이나 주루(酒樓)들의 간판들까지 옛날 모양을 하고 있다. 어가(御街)는 황제가 다니던 길이라는 뜻이다. 원래의 모습은 황제가 다니는 길이 가운데 있었으며 양 가로 일반 사람들이 다니는 보도가 있었고 그 옆에는 연꽃이 피고 버드나무들이 욱어진 물길이 있었다고 한다. 길 양편에는 상점과 주루들이 이어져 있었다. 지금 복원된 어가(御街)의 북단 서편에는 번루(樊樓)라는 커다란 주루(酒樓) 하나를 복원해 두고 있다. 원래 변경(?京) 시절에는 시내에 72개나 되는 주루가 있었다는데 그중 가장 크고 화려했던 곳이 이 번루(樊樓)였기 때문이다. 번루는 한 번에 손님 천명을 맞이할 수 있을 정도로 거창하였고 송말의 명기(名妓) 이사사(李師師)도 이 번루에 있었다고 한다. 전하는바에 의하면 이사사는 미모와 식견을 겸비하였을 뿐더러 의협심까지 갖춘 여인이었다. 지금 복원된 번루의 중루(中樓)에는 비운의 명기 이사사의 서제, 가야금 타는 방, 그리고 침실이 마련되어 있다. 이사사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북송 말기의 휘종(徽宗)황제가 이사사를 보기 위하여 황궁에서 지하도를 통하여 자주 번루를 찾았다고 한다. 휘종은 이사사를 비밀리에 만나다 못해 나중에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사사를 궁궐로 불러들여 이명비(李明妃)라는 칭호를 내리고 총애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휘종은 뒤에 금(金)나라와의 약속을 배반하여 금군의 침공을 자초하게 되어 그 죄값으로 제위를 아들 흠종(欽宗)에게 물려주었는데 흠종은 곧 이사사를 폐위하고 궁궐에서 추방했기 때문이다. 궁궐에서 쫓겨난 이사사는 어려운 나날을 보내다가 개봉을 점령한 금나라 장군에게 잡혀갔으나 끝내 절개를 지키고 저항하다 자결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송도 어가(御街)변의 번루
개봉부(開封府)
송나라 때의 수도 행정부를 재건해 놓은 건축물이다. 정무를 보는 사무실과 과거시험을 치르는 전각 등을 재현 해 두고 있다. 정원에 들어서면 큰 바위에 “관원들의 봉록은 백성들의 고혈과 같은 것이며 아래 백성을 우롱하기는 쉬우나 하늘을 속이기는 어렵다”라는 취지의 글을 새겨 두고 있다. 정무를 보던 전각에도 “청정렴명”(淸正濂明) “정대광명”(正大光明) “근정위민”(勤政爲民) 등의 현판을 걸어 두었다. 이런 것을 보면 북송의 제왕들이 백성을 위해 얼마나 공정하고 청렴한 시정을 강조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특히 부윤(府尹)의 재판정에는 범죄자의 목을 자르는 커다란 작도 세 개가 놓여 있는 것이 몹시 인상적이다. 그 하나는 황족이나 그 친척들 중에서 불법한 일을 저질렀을 때 사용하는 것이고 그 다음 작도는 환관 중신 등 관료들이 잘못했을 때 처형하기 위한 것이며 나머지 또 한 작도는 백성 가운데 중죄를 지은 자가 있을 때 처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당시의 법 집행이 얼마나 엄격했던가를 잘 보여 주는 것이다. 포청천이라는 청렴하고 소신 있는 명판관도 이러한 제도와 사회 분위기속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여겨졌다.
개봉부
청명상하원(淸明上河園) 개봉시를 관광도시로 개발하기 위하여 만든 거대한 공원인데 앞에서 언급한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에서 보는 송나라 때의 화려했던 개봉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곳이다. 장택단의 청명상하도는 길이 5m 25cm 폭25cm의 길다란 그림인데 그 속에는 814명의 인물과 73마리의 짐승 29척의 선박 100여 채의 집과 건물 및 170여 거루의 나무 등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사람들이 교외로부터 다리를 따라 변하(?河)를 건너고 성문을 지나 변경(?京)시내로 들어가고 또 나오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청명상하원에는 그림에서 보는 길거리 모습 건축물들 심지어는 강에 떠 있는 선박까지 옛날 모양 그대로 재현해 두었다. 바로 들어가는 곳에 장택단(張擇端)의 석상이 서 있다. 개봉을 찾는 관광객들이 한나절을 보낼 수 있는 유원지로서는 훌륭하게 보였다. 이 밖에도 상국사(相國寺) 포공사(包公嗣) 악비묘(岳飛廟) 한원비림(翰園碑林) 번탑(繁塔) 등 시간이 충분하면 돌아볼만한 곳이 많다.
청명상하도 일부
(5) 소림사(少林寺)
정주에서 서쪽으로 약 85km 가면 숭산(嵩山)의 웅장한 모습을 만나게 된다. 숭산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중국 5악의 하나로서 1440m의 태실산(太室山)과 1512m의 소실산(少室山)의 마주 보는 두 산으로 이루어 져 있다. 태실산이 산 높이에 있어서는 소실산 보다 낮은데도 불구하고 태실산으로 불리는 것은 산세가 더욱 웅장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등봉(登封, 옛 이름은 嵩陽)이라는 작은 시가지가 있다. 이들 산 이름은 옛날 치수의 신으로 알려진 하(夏)나라 시조 우(禹)임금의 두 부인 즉 태실(太室)과 소실 (少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사기의 하본기 (夏本紀)에 나오는 우임금이나 하나라는 아직 그 실존이 증명되지 아니한 신화에 속하지만 최근 1977년 이 부근 등봉현 왕성강(王城崗)에서 발굴된 유적들이 하나라의 왕도의 것이라는 주장들이 있다. 소림사(少林寺)는 등봉 시내에서 약 2km 떨어진 소실산(少室山) 북쪽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소림사는 서기 495년 북위(北魏) 시대에 창건된 고찰이며 소림사가 유명하게 된 것은 인도의 고승 달마(達磨)가 여기서 선종(禪宗)을 창시했기 때문이다. 달마는 소림사 뒤편 산 위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달마동(達磨洞)에서 9년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아니하고 면벽수행(面壁修行)을 했다고 한다. 소림사의 문수전(文殊殿) 안에는 달마의 면벽수행으로 석벽에 그림자가 찍혀 있었던 것을 상징하는 면벽영석(面壁影石)이 노여 있다. 소림사라고 하면 무엇보다 무술이 유명하다. 소림무술(少林拳)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일찍이 당나라 2대 황제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천하 통일 전쟁을 하고 있을 때 무술을 익힌 소림사 승려들이 한 때 쫓기고 있던 이세민(李世民)을 구해 준데서 비롯된다. 후에 이세민은 이들 13 승려들에게 가사(袈裟)를 내리고 후한 상으로 높이 대우했다고 한다. 절 안에는 이런 경위를 쓰고 그 공적을 높이 칭송한 이세민의 친필 비석이 서 있다. 말로는 친필이라 하나 자세히 보니 글 중간에 나오는 이름 세자만을 친필로 쓴 것이었다. 2005년 중국 정부는 소림무술을 UNESCO 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고자 하였으나 이번에는 지정받지 못하였다. 그것은 한 나라에 두 건 이상은 지정하지 아니하는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게 될 것으로 이곳 사람들은 믿고 있다.
소림사 입구
대웅보전(大雄寶殿) 뒤쪽에 있는 천불전(千佛殿)의 돌로 된 바닥에는 48곳이나 움푹 파인 흔적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동안 승려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수련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소림사에서 나와 서쪽으로 약 500m 쯤 되는 곳에는 그동안 소림사의 역대 승려들의 묘지라 할 수 있는 탑림(塔林)이 있다. 220여 기에 달하는 크고 작은 탑들은 멀리 당나라 시대부터 청나라 때 까지 건조 된 것이라고 하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어져 있다. 고명한 스님들은 각기 문이 밀봉된 단독 탑에 안치되어 있고 그렇지 않은 보통 스님들은 문이 뚫려 있는 공동 탑에 모셔져 있다. 소림사에서 나와 점심을 먹고 무술시범을 보려고 등봉(登封)시내에 들리게 되었는데 시내 곳곳에 있는 무술학교가 인상적이었다. 지금 등봉(登封)에는 약 60 여개나 되는 무술학교가 있으며 그곳에서 수련하고 있는 학생들은 4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한국에서 온 학생들도 있다는데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차를 타고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체련복을 입은 학생들이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씩 때를 지어 무술수련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수련생은 나이 제한은 없고 어린 아희들로부터 스무 살이 넘는 사람까지 다양하다고 하며 보통 3년이나 5년 정도 수련을 하는데 때로는 심지어 9년 동안 수련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들은 때로 운동선수로 나가는 수도 있으나 대부분 도시로 나가 회사 또는 건물의 경비원으로 일한다고 한다.
대웅보전 앞 당 태종 비석
천왕전
(6) 낙양(洛陽, 로양)
하남성의 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낙양은 인구 약 80만의 고도(古都)이지만 정주에 비해서는 현대화가 훨씬 덜 된 침체해 보이는 도시이다. 그러나 5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로서 북망산(北邙山) 삼국지(三國志) 등으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동주(東周) 후한(後漢) 위(魏) 서진(西晉) 북위(北魏) 등 9개 왕조가 도읍을 두었던 곳이라 구조고도(九朝古都)라고 한다. 다만 옛날의 궁전이나 유적들은 모두 불탔거나 허물어져 없어진 것이 아쉽다. 서안(西安)의 유적들은 대부분 지상에 남아 있는데 비하여 낙양(洛陽)과 개봉(開封)의 유적들은 대부분 불탔거나 땅 밑에 묻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중국 고대 조각문화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용문석굴(龍門石窟)은 중국 삼대 석굴 중 하나에 들만큼 유명하고 훼손 마모되지 아니한 일부 조각 불상은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찬란히 빛나고 있다. 그리고 약 2000년 전 중국에 최초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건립된 백마사(白馬寺)는 중국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반드시 한번 답사해야 하는 고적(古跡)이라 할 수 있다. 낙양(洛陽)의 어원(語源)은 이곳이 망산(邙山)을 뒤로 하고 남으로 낙하(洛河)를 바라보는 양지(陽地)라는 데서 나왔다고 하며 낙읍(洛邑) 또는 낙읍(?邑)으로도 불렸었다. 교통이나 지리로 보아서 한 나라의 도읍으로 알맞은 지형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마치 태양이 떨어지는(落陽) 곳이라는 인상을 주어 근세에 와서는 사람들이 기피하는 경향이 있고 특히 사업하는 사람들은 이곳에 투자하기 싫어함으로써 경제적으로는 매우 낙후된 것 같이 보였다. 심지어 청일전쟁 때 일본군도 같은 이유에서 낙양에는 들어가지 아니했다고 한다. 낙양에는 모란(牧丹)이 대단히 유명하고 백마사 맞은편에는 커다란 모란원이 있으며 해마다 4월 15일부터 25일 사이에는 모란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용문석굴(龍門石窟)
용문석굴은 돈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 대동(大同)의 운강석굴(雲崗石窟)과 함께 중국 삼대 석굴의 하나이며 앞을 흐르는 이수(伊水)의 강물과 건너편 향산(香山)에 자리 잡은 관경사(觀經寺) 등이 함께 어울려 풍광이 빼어난 예술보고로서 UNESCO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곳이다. 일지기 수(隋)나라 양제(煬帝)는 이곳의 풍치가 너무나 좋아 낙양(洛陽)을 도읍으로 정했다고 한다.
伊水와 觀經寺
용문산(龍門山) 기슭에 석굴이 조영되기 시작한 것은 터키계의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가 평성(平城, 현재의 大同)에서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긴 493년 전후라 알려져 있다. 그 뒤에도 수(隋) 당(唐) 송(宋) 등 역대 왕조가 석굴을 계속 조영하여 현재에는 크고 작은 동굴수가 1,300 여개에 달하고 조각된 부처들은 작게는 2cm부터 크게는 17m 에 달하는 것까지 도합 11만 체나 된다고 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을 들어 보면 북위의 궁정생활을 그린 빈양삼동(賓陽三洞), 2cm 내외의 소불(小佛)이 15,000 여 체나 새겨진 만불동(万佛洞), 천장에 커다란 연꽃을 새겨둔 연화동(蓮花洞), 칙천무후(則天武后)를 모델로 하였다는 커다란 노사나불(盧舍那佛)이 조각된 봉선사(奉先寺), 약 배합법을 써 두었다는 약방동(葯方洞), 위체서법(魏?書法)의 대표적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고양동(古陽洞) 등이 있다. 가장 주목 할 만 한 곳은 역시 높이 17m 에 달하는 노사나불(盧舍那佛)이 조각된 봉선사(奉先寺)라 할 수 있겠는데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얼굴을 닮게 조각했다는 이 거대한 불상은 엷은 미소를 띠고 있어 실로 아름답고 강한 눈동자를 지닌 체 전혀 훼손되지 아니한 상태이다. 양쪽 주위에 배치된 나한 보살 천왕 역사의 조각들도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어 과연 용문석굴을 대표하는 보물들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이 봉선사 석굴은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건조했으며 이를 위하여 무후(武后)는 지분전(脂粉錢, 공전) 2만관을 내어 놓았다는 기록이 불상 밑에 새겨져 있다.
용문석굴 전경
이것으로 보아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으니 여기서 잠시 이 여인의 내력에 관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중국 역사상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유일한 여성이며 가장 세도가 컸었던 여자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아버지는 산서성(山西省) 출신으로 무사각이라는 자이다. 그는 일직이 목재상으로 재물을 모았는데 태원(太原)에서 이연(李淵)을 만나 친교를 맺었다가 훗날 이연(李淵)이 당왕조(唐王朝)를 세우게 되자 이주도독(利州都督) 공부상서(工部尙書) 등 벼슬까지 한 사람이다. 무사각은 이연(李淵)의 소개로 취한 후처에서 미낭(媚娘)이라는 딸을 얻게 되며 예쁘게 생긴 그녀는 자라나 궁중에 들어가 태종(太宗)의 후궁이 된다. 그 뒤 제 3대 황제로 즉위한 고종(高宗)이 태종 사후 비구니가 되어 절에 있던 미낭(媚娘)을 다시 궁중으로 데려와 후궁으로 삼았다. 오죽 잘 났으면 자기 아비의 첩을 취했겠는가. 그녀의 갖은 모략으로 결국 왕비가 죽게 되자 고종은 재색 겸비했던 미낭(媚娘)을 정식 황후로 삼았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 32세였다. 황후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은 갖은 책략을 다해서 세력을 키워 나갔으며 특히 당시 지배 세력이며 남존여비(男存女卑) 사상으로 보였던 유교(儒敎)나 도교(道敎)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불교(佛敎)를 숭상하기에 이른다. 고종(高宗)이 사망하자 자기 소생의 중종(中宗)을 밀어내고 690년 67세의 나이로 스스로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주(周)로 바꾸어 16년 동안 직접 다스리게 된다. 이렇게 되니 무후(武后)에게 아첨하는 승려들이 “무후(武后)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이 세상에 내려온 사람”이라는 예언(預言)을 담은 불경들을 지어 앞을 다투어 헌상하였다. 그러나 무후(武后)는 82세를 맞이하던 해에 무력반란으로 왕위를 중종(中宗)에게 이양하게 되며 이리하여 당왕조(唐王朝)가 부활하게 된다.
봉선사 대 노사나불
중종(中宗)은 재차 즉위한 다음 그녀에게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라는 칭호를 바치는데 측천(則天)은 궁성으로 들어오는 성문의 이름이며 15년 전 무후(武后)가 주(周) 왕조의 성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곳이다. 사실은 측천황제(則天皇帝)라 불러야 할 것이나 사람들은 그녀를 황제로 부르기가 싫어서 이때부터 측천무후(則天武后)라 부르게 되었다. 측천무후가 국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것은 거의 반세기 가까이 되는데 그 동안 반대세력을 잔인하게 숙청하여 포악하다는 평은 받았으나 과거(科擧)를 통해서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였고 치세 중 농민반란이 없었던 점 등으로 보아 국정은 비교적 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모 택동(毛澤東)이 중국을 공산치하로 통일을 이룬 뒤에 송경령(宋慶齡) 강청(江靑) 등 세도가 컸던 여인들이 측천무후(則天武后)를 숭배하거나 걸출한 여성(女性) 정치가(政治家)로 미화한 것은 이러한 배경을 두고 한 일이며 그녀가 예나 지금이나 중국 지배층 여인들의 우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봉선사 천왕상
관림(關林) 삼국시대 촉(蜀)나라 유비(劉備)의 휘하에서 무술과 덕망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던 의장(義將) 관우(關羽, 關雲長)의 수급이 매장되어 있는 묘소이다. 묘당(廟堂)의 경내에는 취백(翠柏)나무들로 울창하고 주요 건축물로는 무루(舞樓) 산문(山門) 의문(儀門) 배전(拜殿) 이전(二殿) 삼전(三殿)이 있으며 이들 건축물들은 대체로 명대(明代) 및 청대(淸代)의 황제들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역대 황제들이 이렇게 거창하게 묘실(廟室)을 지어 관우(關羽)를 높이 섬긴 것은 충신의 모범으로 신하들에게 본을 보여 주자는 것이었으리라. 삼전(三殿)뒤에 관우(關羽)의 수급을 묻었다는 수총(首塚)과 석방(石坊)이 있다
關林(관운장 능묘)
관우(關羽)는 장비(張飛)와 함께 유비(劉備)와 결의형제하고 주군에 대한 충성심이 철석과 같이 변하지 아니한 사람으로 알려져 중국 곳곳에 관우(關羽)의 사당이 지어져 있으며 세계 여러 곳의 차이나 타운에 가보면 관우를 기리는 사당이나 묘(廟)들이 있다. 지금 중국에서는 관우를 상업의 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관우를 모신 사당을 보면 많은 곳에서 관우를 관성대제(關聖大帝)로 높이 추앙하고 있다. 아마 관우(關羽) 사후 조조(曹操)가 내린 형왕(荊王)이라는 호칭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관중의 삼국지(三國志演義)를 보면 위(魏)의 조조(曹操)가 관우를 흠모하여 온갖 선물을 다 보내면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관우는 끝내 이를 거절하고 유비의 부인을 모시고 유비에게 돌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관우가 지키고 있던 형주성(荊州城)을 비운 사이 오(吳)나라 여몽(呂蒙)이 쳐들어와 이를 점령하게 되는데 이에 당황한 관우가 돌아와 성을 되찾으려고 하나 결국 오국(吳軍)에게 잡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관우는 끝내 투항을 거부하고 참수되니 그 수급은 낙양(洛陽)의 조조(曹操)에게로 보내지는데 조조(曹操)는 나무를 깎아 몸을 만들어 수급에 붙여 정중히 장사지내게 명하는 대목들이 새롭게 떠오른다. 한편 수급을 잃은 관우의 유해는 형주(荊州)에서 그리 멀지 않은 당양(當陽)에 묻혀 있다. 여기서는 관우를 황제급으로 대우하여 아예 관능(關陵)이라 부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관우의 유해를 이곳에 매장한 사람은 오(吳)의 손권(孫權)인데 향나무로 머리를 조각하여 붙이고 관은 녹나무(樟木)로 짜서 황금 줄로 묶어 안장했다고 전한다.
백마사 백마사는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불교가 중국으로 처음 전래해 오면서 최초로 창건된 절이며 19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고찰(古刹)이다. 백마사의 유래를 보면 채음(蔡?)과 진경(秦景) 두 사람이 불교경전을 구하러 서역(西域)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천축승(天竺僧) 섭마등(攝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을 만나 백마에 경전을 싣고 함께 낙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이 두 천축(天竺, 지금의 인도) 승려들은 이 절 안에 묻혀 있다고 한다. 현존하는 주요 건물로는 천왕전(天王殿) 대불전(大佛殿) 대웅전(大雄殿) 등이 있다. 사찰 경내에서 우리나라 일붕(一鵬)스님의 백마사 방문을 기념하는 커다란 시비(詩碑)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시비는 대충 중국 최초 불법이 전해진 백마사에 와보니 감개무량하다는 내용인 듯 했다
백마사 입구에서
백마사 천왕전
|
출처: 알로이스 원문보기 글쓴이: 알로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