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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27권중에 빌레몬서는 성경을 읽는 성도에게 잘 읽혀지지 않는 책으로 무관심하게 넘어 갈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장으로 되어 있고 25절 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짧은 서신 속에는 깨닫지 못한 깊은 보화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는 빌레몬서를 사랑의 진수가 담긴 책이라고 했고 장로교의 아버지 존 칼빈은 그리스도의 겸손이 꽃처럼 피어있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왜 사랑의 진수의 책일까?....... 기독교의 사랑 아가페사랑이 그대로 묻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 예수님사랑을 받아 빚진 자가 되었기에 누구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의 향기가 빌레몬서에서 보여 집니다.
또 한 가지 그리스도의 겸손이 꽃처럼 피어나는 것은 세상에서 살 때 나를 자랑하고 싶어 의뜸이 되고 부자 명예 소유한 것이 많아 세상에서 꽃을 피웁니다. 그러나 주님앞에 무릎을 꿇게 되면 콧대 높은 자리에서 낮아짐의 겸손을 배우고 그래서 누구든 남을 더 낮게 여기는 겸손이 마치 꽃이 드러나는 모습처럼 아름다움이 빌레몬서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이처럼 빌레몬서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말씀을 두 번에 걸쳐 은혜를 나누고자합니다.
빌레몬서를 쓴 사도 바울은 3차전도 여행중에 3년이나 되는 긴 시간을 에베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때 에베소 근처 골로새에 살고 있던 부자 빌레몬이라는 사람이 에베소에 다니러 왔다가 바울로 통해 전도를 받게 됐습니다. 그 이후 빌레몬은 예수님을 믿게 되고 새 사람 되어 오직 예수님만을 충성되이 섬기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빌레몬은 예수님사랑을 멈출 수 없어 가족을 전도하고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시작된 교회가 골로새 교회입니다. 골로새 교회가 날로 부흥하여 바울이 파송한 에바브라를 목회자로 모시게 되었는데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이 기둥이 되어 든든히 세워져 가는데 이런 소문이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이 듣고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편지시작을 보면 이렇습니다. 1-2절...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라고 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 때 전도자 바울은 누구나 인정하는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런데 위대한 사도 바울로부터 빌레몬이 복음의 서신을 받았을 때 얼마나 빌레몬의 마음이 뜨거웠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매달마다 첫 날이 되면 몇 년 동안 변함없이 카톡으로 말씀과 함께 짧은 격려의 편지를 받습니다. 마치 나이 많은 바울이 젊은 빌레몬에게 편지한 것처럼 지금 나이가 90살이 가까이 되신 원로목사님께서 저에게 잊지 않고 서신을 보내십니다.
제가 부목사로 있을 때 잘못하면 꾸중하셨던 목사님이신데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나쁜 말보다 좋은 말을 더 많이 들었지만 좋은 말은 다 잊어지고 사랑의 채찍 싫은 말이 잊어지지 않는데 원로목사님이 부목사 때 가르쳐주신 충고가 마음 판에 더 새겨지고 있습니다. 후배를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도 사랑의 편지를 보내십니다. 빌레몬도 그렇게 바울의 사랑의 서신을 받아 떨리는 심정으로 편지를 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쓴 편지 시작을 보세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된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한 평 남짓한 컴컴한 감옥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감옥이란 자유 없는 삶이지만 바울은 절대로 원망이나 불평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위해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때문에 감옥에 있어요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날 때 예수쟁이들을 잡아 감옥에 넣고자 혈기 등등하게 찾아 다녔어요~~~ 그런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나고 철저히 자기를 부정합니다.....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그만큼 자신을 죄인의 우두머리로 비교하며 죄인임을 고백했던 바울입니다.
그 이후 오직예수로 살았고 오직 예수만을 위해 충성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으니 예수 믿기 전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라고 자신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 바울이 빌레몬과 그의 가족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문안하기를 1절 하반절에......빌레몬을 말하기를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을 사랑을 받은 자로라고 했습니다. 그 누구라도 받으면 견딜 수 없는 황홀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대할 때 예수님 사랑의 엔돌핀이 내 심장에 솟구쳐 올라야 합니다.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에서 뿐 만 아니라 세상에서 누구를 만나든 예수사랑 정신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에 따뜻함이 전달되어야 합니다...... 예수사랑의 정을 불어넣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정신입니다. 빌레몬은 그런 사랑을 바울로 부터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빌레몬을 하나님나라를 위해 함께 일하는 동역자로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주향성도는 다함께 하나님나라를 위해 이 땅에서 교회를 섬기는 동역자입니다. 동역자는 항상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한 배에 타고 있는 공동체의식이 강해야합니다.
동역이란 함께 일하고 함께 자고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먹고 살아가는 공동운명체입니다. 가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목사는 교회 일을 하는 사람 성도는 손님으로 오는 사람 이것은 따로 따로입니다. 이런 모습은 동역의 모습이 아닙니다.
출17장에 보면 아름다운 동역의 모습이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앞에 아말렉족속과의 한 판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가 아말렉족속과 싸워 이기고 여호와 닛시 승리의 깃발을 들어 올렸던 것은 찐한 동역의 결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아론과 홀이 하나님의 산에서 협력하여 기도하고 싸움의 현장에서는 여호수아가 아말렉족속과 치열한 한판 전쟁이 펼쳐졌습니다. 비록 모세가 여호수아와 함께 아말렉족속과 싸움의 현장에서 혈투를 벌리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산에서 그 이상의 영적싸움을 기도로 동역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모여 동역자로써 교회를 섬기며 우리가 살아가지만 교회를 떠나서도 언제나 교회를 생각하며 동역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위해 돕는 아름다운 동역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롬8:28b.....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협력이 곧 동역으로 함께 하는 마음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빌레몬을 동역자로 부른 바울은 2절 말씀에 보면...... 빌레몬 가족들을 일일이 챙기며 네 집에 있는 교회라고 부르며 칭찬하고 있습니다.
주목해야할 말씀을 보세요 네 집에 있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빌레몬 집에서 시작된 교회가 바로 골로새교회입니다.
초대교회는 다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요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120여명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두아디라시에서 온 자주색 옷감장수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행 16:15) 주향교회는 김민자권사집에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지금 핵가족시대에 살고 있습니다......지난 주 설 명절을 보냈지만 가족들 잠깐 모여 부모님께 인사드리면 다 흩어집니다. 만남과 헤어짐이 너무 짧습니다. 그래서 가족이 그리워집니다. 따로 따로 살기 때문입니다.
이불 하나 가지고 5명 10명 식구가 발만 덮고 자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웃고 즐기며 행복이 가족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가족은 개인중심입니다. 아파트에서 함께 살아도 따로따로 방 이예요 복지사회 사각지대에 독거노인들 혼자 살지요 고독이 깊어 고독사가 증가 합니다. 갈수록 사람이 그리워지는 세대에서 우리가 살아 갈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를 네 집에 있는 교회” 라고 했어요 가족공동체를 말합니다. 골로새교회가 바로 빌레몬의 가정교회로 시작되어 부흥했습니다.
사람의 가족은 한 피와 살을 나눔으로 이루어지는 혈통 가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말합니다. 가족 안에 다른 피가 섞일 수 없습니다. 저희가족들을 보면 제가 B형이요 아내는 A형입니다. 자녀들도 A형 AB A형 입니다. 만약 제가 피가 부족하여 급하게 B형 피를 공급받고자 하는데 사랑하는 아내가 피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혈통, 한 피는 누구나 해당되는 영적가족 교회 입니다. 찬송가 220장 가사처럼 ♩♬ “ 사랑하는 주님 예수 같은 주로 섬기나니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 한 몸 같이 친밀하고 마음으로 하나되어 우리주님 크신 뜻을 지성으로 준행하세 ” ♭♪
우리 주님 크신 뜻 안에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모습이 영적 가족 교회로 우리가 찬양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가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릅니다. 나에게만 흐릅니까?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성도들에게 흐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를 보혈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피를 수혈 받아 생명 살리는 피가 아닌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살리신 피 이기에 보혈입니다.
이 보혈의 피가 우리를 가깝게 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로 건너 갈 수 없는 다리 역할을 예수님의 피로 생명의 길로 건너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하나입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우리는 지금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요 자매로 이루는 것이 네 집 교회가족의 모습 입니다.
마치 노아의 가족식구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120년동안 노아는 교회 같은 방주안으로 주변사람들을 들어오라고 복음을 외쳤습니다. 하루도 한 달도 일년도 아닌 120년동안 외쳤지만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좋아 노아의 말에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은 방주안에 노아의 8식구만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 물로 심판 받았습니다. 그냥 메몰 차게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 아니지요 기회를 주었습니다, 방주안으로 한 가족되라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거부했습니다.
우리 주향가족은 예수님 안에서 한 피 받은 가족입니다. 교회와 같은 방주안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오시는 그날까지 천국 영적가족으로 끈끈한 그리스도예수의 사랑으로 살아가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초대교회 빌레몬 집에서 모인 교회성도들의 믿음의 소문을 바울은 듣고 기도하는 가운데 칭찬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신앙을 깊이 들어가 보면 놀라운 것은 그냥 성도들을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4절 하반절...... “기도할 때 너를 말함은” 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영성의 깊이가 있는 칭찬입니다. 우리가 칭찬할 때 인색한 마음을 가지면 안되지요 그러나 진정성 있는 칭찬이 되면 좋겠어요 이런 칭찬은 바울처럼 깊은 기도와 함께 칭찬할 때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 올 것입니다.
기도가운데 바울이 빌레몬이 속한 골로새 교회 가족들을 칭찬하는데 먼저 사랑과 믿음을 들었습니다....... 믿음의 교제를 들었습니다....... 믿음의 역사를 들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간혹 교회에서 주님을 믿는 성도가 쉅게 사람을 믿다가 상처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의 대상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요, 사랑의 대상입니다.
바울의 동역자 빌레몬은 예수를 잘 믿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를 사랑했습니다. 빌레몬 잘사는 부자입니다. 상전으로 많은 노예들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주에 종인 오네시모에 대해 살펴볼 것인데 그는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그런 종이 상전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 화려한 도시 로마까지 도망갔습니다. 어떻게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났는지는 모르지만 바울로 통해 죄인인 오네시모가 예수를 믿은 거예요 하나님의 역사는 신묘막측하지요 하나님 하시는 일이 어땋게 종 인 오네시모가 바울만나 예수님을 영접하는 역사가 나타납니까? 생각하면 우리의 눈높이로 정말 측량 할 수 없어요~~ 하나님하시는 일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빌레몬에게 간곡히 부탁한 것은 예수님 사랑으로 오네시모를 다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10절,12절)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어찌 자기가 부린 종을 쉽게 받아줄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빌레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차별 없이 주님사랑으로 받아드린 것입니다......... 빌레몬의 신앙의 위대한 인격은 오직 '사랑과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고, 사랑이 있으면 믿음의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내 안에 믿음이 있어야 믿음의 역사가 나타 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주님 사랑이 있어야 사랑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빌레몬 집에 있는 골로새교회를 바울은 3절 말씀 축복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축복의 근원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님 나란히 동격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나란히 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신성모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존재인 천사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나란히 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이나 천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격인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 준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우리아버지께서 축복하시는 것은 "은혜와 평강"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은혜는 원인이고 평강은 결과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 평안입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내가 바라본 환경이 처참하여도 주님이 주신 평안을 입으면 모든 환경을 주님의 옷깃으로 나를 덮어주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와 평강의 축복입니다.
독일에서 목회하셨던 루터교 슈몰크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1704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교회의 30년 종교 전쟁의 고통으로 실의에 빠져있는 신자들을 열심히 심방하면서 돌보았습니다. 전쟁의 여파로 36개 마을의 교회들을 돌보아야 했는데 한 번 심방을 나가면 며칠씩 집을 비우기 일쑤였고, 집에는 어린 아이들 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심방을 마치고 며칠 만에 돌아와 보니, 화재로 집이 완전히 불에 타 없어지고 연기만 내뿜고 있었습니다. 슈몰크 목사는 열심히 두 아들을 찾았습니다. 열심히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섬뜩한 생각이 들어서 잿더미를 헤치니 거기에 두 아들이 서로를 꼭 껴안은 채, 불에 타 죽어 있었습니다. 한동안 정신을 잃고 억장이 무너져 망연자실 했습니다.
새까맣게 탄 두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슈몰크 목사는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얼마나 울었을까요? 그의 고백속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감동이 다가와 슈몰트목사님 주님이 주신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목사님 기도가 시로 옮겨 놓은 것이 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대로’ 찬송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 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이런 은혜와 평강의 축복이 누구에게 임합니까?.......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일차적으로 빌레몬과 그의 가족들이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온 골로새 교우들을 지칭하는 말이요 오늘 우리주향교회 모든 성도들을 향한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