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에서
기진한 마음으로
당신을 부릅니다.
저로서는 못 오를 바위 위로
저를 이끌어 주소서
(시편61,3).
시인은 피신처와 보호가 필요하다.피신처는 광야에 있는 바위로 여겨진다.“바위”는 적들로부터 도망친 사람들에게 천연의 요새를 제공해 주는 높이 솟아오른 바위다.그곳은 원수들이 접근할 수 없다.시인은 자기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호신용 바위에 하느님이 자신을 데려다 놓으시기를 바란다.시편에서 하느님은 자주 바위로 불린다.바위는 많은 경우 구원에 대한 시적 은유로 나타난다.교부 베다는,교회는 바위로 굳건함을 유지한다고 했다.그에 따르면, 교회는 악마와 유혹과 이교도들의 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지만 언제나 승리할 것이다.예수님은“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6,18)라고 말씀하셨다.
시편 61편의 전체적 의미:시편 61편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기 힘든 상황에서도 시인이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하느님의 도움으로 구원을 받고 하느님과의 깊은 친밀감에 이르게 됨을 보여준다.이 시편에서는 많은 은유를 사용하여 기도를 심화한다.곧‘못 오를 바위’,‘피신처’,‘굳건한 탑’,‘천막’,‘당신의 날개’등과 같은 은유는 영적 상상력을 키워준다.“땅끝에서 기진한 마음으로 당신을 부릅니다”(3절)는 하느님과의 거리감을 잘 표현해 준다.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도우심만이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이 기도의 원동력이다.“당신의 날개 그늘에 피신하고 시습니다”(5절)라고 고백한다.하느님은 우리가 특별한 억압을 받고 있을 때 우리의 보호수단으로서 피신처가 되어주신다.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의 날개 그늘에 피신하고 싶으면 열망을 갖고 주님과 우리를 결합시켜야 하고,지속적이고 꾸준한 투신의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이 시편은 우리가 자애와 진실의 하느님을 닮아 우리도 그와 같은 자질을 갖추도록 초대한다.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3-2 시펴 42-89편/바오로딸)
제2장
창조의 복음
62. 선의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이 문헌에 신앙의 확신에 관한 장이 포함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정치와 철학 분야에서,창조주의 개념을 단호히 부인하거나 타당하지 않다고 여기어 종교가 통합 생태론과 온전한 인류 발전을 위하여 커다란 이바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다른 이들은 종교를 그저 관용되어야 하는 하위 문화쯤으로 여깁니다.그럼에도 과학과 종교는 각자의 고유한 현실 접근 방식으로,서로에게 생산적인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Ⅰ.신앙이 주는 빛
63. 생태 위기가 복합적이고 그 원인이 다양하기 때문에 해결책이 현실을 해석하고 변화시키는 한 가지 방법에서만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이는 여러 민족들의 다양한 문화적 풍요,곧 그들의 내적 삶과 영성에 의지해야 합니다.만약 우리가 파괴한 모든 것을 바로잡게 하는 생태론을 발전시키고자 한다면,어떠한 학문 분야나 지혜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여기에는 종교와 그 고유 언어도 지혜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여기에는 종교와 그 고유 언어도 포함됩니다.가톨릭 교회는 철학적 사상과 나누는 대화에 열려 있습니다.그래서 교회가 신앙과 이성의 다양한 종합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교회의 사회 교리의 발전은 사회 문제와 관련하여 그러한 종합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 사회 교리는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풍요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64. 더 나아가 이 회칙이 해방의 길을 함께 찾고자 모든 이와 나누는 대화에 열려 있지만,저는 먼저 그리스도인과 일부 다른 신자들에게,신앙적 확신이 자연 보호와 그들의 형제자매들 가운데 가장 취약한 이들의 보호를 위한 강력한 동기를 어떻게 부여하는지 보여 주고자 합니다.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을 자신들이 살고 있는 환경을 돌보도록 촉구한다고 볼 때,그리스도인들도“특히 피조물 안에서의 자기의 책임은 물론 자연과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의무가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이 우리의 확신에서 나오는 생태론적 의무를 더 잘 깨닫는 것은 인류와 세상 전체를 위해서 좋은 일입니다.
Ⅱ.성경 이야기의 지혜
65. 창조 신학 전체를 되풀이하지 않으면서,우리는 위대한 성경 이야기가 인간과 세상의 관계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물을 수 있습니다.창세기에 나오는 첫 창조 이야기에 보면 하느님의 계획에는 인간의 창조도 포함됩니다.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다음“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습니다”(창조1,31).성경은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창조1,26참조).이는 모든 인간이 저마다 헤어릴 수 없는 존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단순히 어떤‘것’이 아니라 어떤‘인격’입니다.인간은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주체가 되며,자유로이 자신을 내어 주고 다름 인격들과 친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모든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특별한 사랑은“인간에게 한없는 존엄을 부여”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인간 존엄 수호를 위하여 노력하는 이들은 이러한 노력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그리스도 신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모든 인간의 삶이 순전한 우연이나 무한한 순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희망 없는 혼돈 속에 떠다니지 않고 있다는 확신은 얼마나 놀라운지요!창조주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예레1,5).우리는 하느님 마음에서 생겨났고,이러한 이유로“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사유의 산물입니다.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사랑하시고 필요로 하시는 존재입니다.”
66. 창세기에 나오는 상징적이고 서사적인 고유한 언어로 표현된 창조 이야기는 인간의 실존과 그 역사적 실재에 대한 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이러한 설명은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세 가지 관계,곧 하느님과 관계,우리 이웃과의 관계,지구와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암시합니다.성경에 따르면 이 세 가지 핵심적인 관계는 이 세상과 우리 안에서 깨어졌습니다.이러한 불화가 죄입니다.창조주와 인류와 모든 피조물의 조화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여기고 피조물로서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아서 깨어졌습니다. 결국 이는 이 땅을“지배”(창세1,28)하는 우리의 임무,곧“그곳을 일구는 돌보는”(창세2,15)임무를 왜곡하게 되었습니다.그 결과 인간과 자연이 맺은 본디의 조화로운 관계가 충돌하게 되었습니다(창세3,17-19참조).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모든 피조물과 체험한 그 조화가 이러한 불화의 치유로 여겨진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보나벤투라 성인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모든 피조물과 맺은 보편적 화해를 통하여 어느 모로 본디의 순수 상태로 돌아가려 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는 거리가 멉니다.현재 상황에서 죄는 전쟁,여러 가지 형태의 폭력과 학대,가장 취약한 이들의 유기,자연에 대한 공격에서 모든 파괴적인 힘으로 드러납니다.
67.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지구는 우리보다 앞서 존재하였고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이러한 사실은 유다-그리스도교의 사상에 대한 비난에 응답하도록 해 줍니다.사람들은 인간이 땅을 “지배”(창세1,28)하게 했다는 말이 창세기에 나온다는 것을 근거로,인간을 본성적으로 지배적이고 파괴적인 존재로 묘사하면서 유다-그리스도교 사상이 무분별한 자연 착취를 조장하였다고 주장합니다.이는 교회가 이해한 바른 성경 해석이 아닙니다.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때로는 성경을 부정확하게 해석한 것이 사실이지만,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우리에게 이 땅에 대한 지배가 부여되었다는 사실이 다른 피조물에 대한 절대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강력하게 부인해야 합니다.성경 구절은 그 맥락 안에서 올바른 해석학을 통하여 읽어야 합니다.성경 구절은 우리가 세상이라는 정원을‘일구고 돌보아야’한다고 말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창세2,15참조).‘일구다’라는 말은 밭을 경작하고 갈거나 밭일을 한다는 뜻이고,‘돌보다’라는 말은 보살피고 보호하며,감독하고 보존한다는 의미입니다.이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 책임을 지는 관계를 의미합니다.모든 공동체는 생존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풍요로운 땅에서 얻을 수 있으면서도,동시에 이 땅을 보호하고 후손들을 위하여 이 땅이 계속해서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야 하는 의무도 있습니다.“땅은 주님의 것입니다”(시편24(23),1참조).그래서 “땅과 그안에 있는 모든 것”(신명10,14)은 주님의 것입니다.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절대적 소유에 대한 모든 주장을 물리치십니다.“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땅은 나의 것이다.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25,23).
68. 하느님께 속한 땅에 대한 책임은,지성을 지닌 인간이 자연법과 이 세상의 피조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정교한 균형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그 이유는“그분께서 명령하시자 저들이 창조되었고 그분께서 저들을 세세에 영원히 세워 놓으시고 법칙을 주시니 아무도 벗어나지 않았기”(시편148,5-6) 때문입니다. 율법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를 위한 다양한 규범을 인간에게 차근차근 제시하고 있습니다.“너희는 너희 동족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져 있는 것을 보거든,그것들을 모르는 체하지 말고 반드시 너희 동족을 거들어 일으켜 주어야 한다.너희가 길을 가다가 나무에서건 땅에서건 어린 새나 알이 있는 둥지를 보았을 때,어미 새가 어린 새나 알을 품고 있거든,새끼들과 함께 어미 새까지 잡아서는 안 된다”(신명22,4.6).이와 같은 이유로,이렛날에 쉰다는 것은 인간이 쉰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나 나귀도 쉰다”.(탈출23,12참조)는 것도 의미합니다.분명히 성경에서는 다른 피조물을 고려하지 않는 자의적인 인간 중심주의가 통하지 않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개정판/한국천주교주교회의)
꽃 피고
꽃 지며
3월과 4월이
꿈같이 지나고
계절의 여왕
5월의 첫날
초록 이파리들
흥겨이 춤춘다
햇살 밝고
바람 좋은 오늘
나도 지상에
살아 있어 행복하다
(5월 첫날의 시/정연복)
늘 행복한 날만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