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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Marcel Proust (마르셀 프루스트 1871-1922)
인간 내면의 모습을 의식의 흐름에 기대 저술하였으며,
이 기법의 등장은 이후 세계 문학의 흐름을 바꿔 현대문학의 창시자가되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으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총 7편, 4천 쪽이 넘는 이 방대한 연작소설은
소설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면서
세계 문학의 흐름까지 변화시켰으며,
프루스트에게 '현대소설의 창시자'라는 칭호를 안겨 주었다.
발랑틴 루이 조르주 외젠 마르셀 프루스트는
1871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의 오퇴유(오늘날 라 퐁텐 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드리앵 프루스트는
저명한 내과 의사로, 콜레라 연구로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은 인물이었고,
어머니 잔느 클레망스는
부유한 유대인 상인 집안 출신이었다.
프루스트는 예민하고 유약한 상류층 소설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만년에도 검고 숱이 많은 머리, 크고 검은 눈동자와 가냘픈 몸매,
남성성과 여성성이 혼재된 모습, 병약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런 이미지처럼 프루스트는
전형적인 파리 상류 가정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에는 사교계의 총아로 지냈으며,
육체적 질병과 정신적인 혼란스러움을 지닌 인물이었다.
선천성 천식 때문에
어린 시절 대부분을 침대에서 보냈고,
천식 외에도 신경증적 증상과 소화 장애 등으로 초췌하고 예민했다.
태양빛, 거리의 소음, 향수 냄새조차 참지 못할 정도여서
바깥출입도 거의 하지 않았을 정도라고 한다.
때문에 장남이었지만 가족들에게 큰 기대를 받지 못했고,
아버지의 뒤도 동생 리베르가 잇게 되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헌신적인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한가로이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유년 시절에 거의 누워만 지내면서
독서와 편지 쓰기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프루스트는
11세 때 파리 콩도르세 중등학교에 입학했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지적 능력이 탁월했던 예민한 소년은
학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까지 깨달으면서 힘겨운 10대를 보냈다.
17세 때는
문학적 재능을 가진 친구들과 함께
교내 잡지 〈르뷔 릴라〉를 창간하고,
사교계 생활을 시작하면서
문학 살롱에 드나들고 문학 습작을 했다.
이듬해 대
학 입학자격고사을 통과했고,
군대에 자원해 약 1년간 오를레앙에서 군 복무를 했다.
제대 후
파리로 돌아온 그는 파리 대학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군 복무 기간에도
휴가 때마다 파리에 와서 살롱을 드나들었고,
대학 시절에도
사교계 활동에 몰두해 작가, 화가, 음악가, 귀족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그런 한편으로 비평이나 단편소설을 꾸준히 발표했고,
법학사 시험과 문학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그럼에도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아마추어 작가나 예술 애호가, 즉 자신의 기준에서 한량이 될까 봐 걱정했다.
프루스트는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대학 졸업 후 마자랭 도서관에 사서로 취직했다.
그러나 근무한 지 6개월 만에
신경쇠약을 이유로 1년짜리 휴가를 얻어
몇 차례 연장하던 끝에
그마저도 귀찮아지자 그만두었다.
1896년,
아나톨 프랑스의 서문과 마들렌 르메르의 삽화, 레이날도 앙의 악보를 곁들여
첫 단편집 《즐거움과 나날》을 자비 출판했지만,
잘 팔리지 않았고,
비평가들에게도 그리 큰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이후 드문드문 예술 평론을 잡지에 발표하던 그는
영국의 예술 평론가 존 러스킨의 저작들을 읽고 심취하여
1900년부터 6년간 그의 작품들을 번역하는 데 몰두한다.
1903년에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프루스트는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다.
1905년에는
사랑하는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났는데,
프루스트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고
그때까지 미뤄 두었던 소설 쓰기에 대해 본격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모님이 남겨 준 유산이 많아
경제적으로도 풍족해서
그때까지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면서
전업 작가 생활을 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
러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 때문인지
목숨이 위협받을 정도로 천식이 심해졌다.
결국 프루스트는 어머니가 죽은 지 석 달 만에 파리를 떠나 요양원에 입원했다.
1910년,
39세부터 프루스트는 집에 틀어박혀 소설 쓰기에 몰두했다.
그토록 좋아했던 사교계 생활을 포기했고,
몇몇 친한 친구 외에는 집에 들이지도 않았다.
소음과 냄새를 참기 힘들었으므로
방의 벽에 코르크를 대고 지냈으며,
이따금 발레 공연이나 휴양을 떠나는 것 외에는
거의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유년 시절의 기억, 사교계 생활과 인물들,
내면의 갈등, 사랑의 경험 등을 재구성하여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총 7편의 연작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912년 그는 제1편 《스완네 집 쪽으로》를 완성하고
여러 출판업자들에게 보냈으나
장황하고 무미건조하며, 지루하다는 등의 답을 받았다.
거기에다 이 작품은 한 권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총 7편 중 1편에 불과했다.
프루스트는 결국 출판업자를 찾지 못하고
1913년 11월 원고를 자비로 출판했다.
심지어 대문호 앙드레 지드조차
이 작품을 읽어 보고 출판을 거절했는데,
이후 이 일을
'자신의 생애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 가장 큰 후회스러운 일 중 하나'로 꼽았다.
이 작품은
출판 직후에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않았으나
제2편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가
1919년 공쿠르상을 타면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세계대전 동안에도
그는 계속 소설을 쓰고 완성된 소설의 퇴고를 반복하며 지냈다.
2편의 출판이 늦어진 것은 세계대전 때문에 1914년경부터 출판사들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었다.
이후부터는 지드의 배려로 작품이 계속 간행될 수 있었다.
제3편 《게르망트 쪽》과
제4편 《소돔과 고모라》는
그의 생전에 출간되었고,
제5편 《갇힌 여인》,
제6편 《사라진 알베르틴》,
제7편 《되찾은 시간》은
그의 사후인 1927년까지 이어서 출간되었다.
17, 18세기 소설들이
사회의 거대한 흐름과 그 안에서 요동치는 인간의 운명 등을 그려 낸 데 반해,
프루스트는 오직 인간 내면의 모습,
그중에서도 인간의 '의식의 흐름' 그 자체에 집중했다.
때문에 일부 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출간되었을 때
'소설이 아니라 그저 여러 단편적인 인상을 모아 놓은 글'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두서없는 문체,
감정의 흐름과 명상적인 분위기,
일관되지 않은 흐름,
그때그때 좇은 감각의 묘사 등
이 작품은 소설이라기보다 인간 정신의 탐구라고 부를 만하다.
때문에 이 작품은 질적, 양적 측면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읽기 힘든 작품 중 하나로도 꼽힌다.
그러나 이 작품을 온전히 읽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오
늘날 우리들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발상,
즉 기억이 감각 경험, 오늘날 비자발적 기억이라 불리는 것에 의해 촉발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비자발적 기억이라는 관념은
이후 20세기 문학을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심리학에서도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이 두서없어 보이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허물어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요소들이 프루스트를 '현대소설의 창시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이 작품 이후에 무엇을 더 쓸 수 있겠는가?
프루스트는 영원히 사라져 가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평은
이 작품이 지닌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
프루스트는 단편집
《즐거움과 나날》,
장편소설
《장 상퇴유》(1952년 출간),
논픽션
《러스킨 읽기》,
《생트 뵈브에 대한 반론》(1954년 출간) 등을 썼으나,
그의 작품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거의 유일하다고 여겨진다.
그전의 단편소설들과 장편소설 역시
이 작품을 위한 준비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스완네 집 쪽으로》를 쓰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계속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집필에만 몰두했다.
말년에는 관절염으로 목과 양손을 쓰지 못하게 될 지경이 되어
침대에 누워만 있다가 1922년 11월 18일에 파리 자택에서 사망했다.
죽기 직전 빈사 상태에서 원고를 가져오게 하여 고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32. Jean Paul Charles Aymard Sartre (장 폴 사르트르 1905-1980)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한 철학적인 사색과 관찰로
당대 유럽의 사상계를 주도한 실존주의 철학을 선언한 작가이다.
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였다.
장 폴 사르트르는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작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사상계를 주도했으며,
소설, 희곡, 철학 논문, 문학 비평서, 철학서 등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했다.
장 폴 샤를 아이마르 사르트르는
1905년 6월 21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장 바티스트 사르트르는 해군 장교였고,
어머니 안네 마리 슈바이처는 노벨 평화상을 받은 슈바이처 박사의 사촌이다.
2세 때 아버지가 죽은 뒤 어
머니가 그를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외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초등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책에 둘러싸여 많은 책을 읽었으며,
이 시기에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12세 때
어머니가 사업가 조제프 망시와 재혼하면서 함께 라 로셸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중등학교를 다녔다.
17세 때
대학 입학자격고사에 합격했으며,
명문 대학인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국립 고등사범학교) 준비과정 2년을 보낸 뒤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 진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했다.
준비과정 시기에 철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으며,
폴 니장과 함께 동인지를 만들어
첫 소설 〈병자의 천사〉를 발표했다.
폴 니장을 비롯해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서 만난 레몽 아롱, 메를로 퐁티, 시몬 드 보부아르 등은
그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특히 《제2의 성》, 《위기의 여자》 등을 쓴
프랑스의 대표적인 페미니즘 철학자 시
몬 드 보부아르와는
이 시기부터 교제를 시작하여 평생의 동반자가 된다.
두 사람은 서로의 독립성을 중시하고자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계약결혼을
처음 시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두 사람의 계약결혼은
당시 도덕주의자들을 분노하게 했고,
평생 구설에 올랐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계약결혼 상태를 50년간 유지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수많은 위기가 있었으나
이 관계는 사르트르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고,
보부아르는 사르트르 사후 인터뷰에서
"사르트르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았다.
우리의 삶이 그토록 오랫동안 조화롭게 하나였다는 사실이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라고 말했다.
또한 사르트르는
《철들 무렵》에서,
보부아르는 《초대받은 여자》에서 계약결혼을 형상화하기도 한다.
사르트르가 대학을 졸업하던 1929년은
많은 일이 일어난 해였다.
미국의 경제 대공황으로 증시가 붕괴되었고,
우파가 프랑스 정권을 장악했으며, 유
럽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아가던 시기였다.
또한 그해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계약결혼 관계를 맺은 해이기도 하다.
그 직후 사르트르는 군에 입대했고, 1
8개월의 병역을 마친 후에는
3년간 르 아브르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곳은 후일 《구토》의 무대가 된다.
1933년,
사르트르는 현상학에 심취하여
후설과 하이데거 철학을 연구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떠났다.
1년간의 유학을 마친 뒤
다시 르 아브르 중등학교를 거쳐
파리 파스퇴르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이때의 연구를 바탕으로
철학 논문 《자아의 극복》, 《상상력》 등을 썼다.
《상상력》에서
그는 고대부터 후설에 이르기까지 주요 서양 철학 사상 속에서
상상력과 이미지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고찰하고 이미지론을 정립했다.
이는 대학 시절에 쓴
의식의 본질에 관한 철학 논문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1938년에는
현상학적,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존재론을 표현한 장편소설 《구토》를 발표했다.
'실존주의 철학의 선언서'라고 일컬어지는 철학서이자
'안티로망'의 선구 격인 소설로,
소설과 철학의 경계를 허문 한편,
양쪽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유례없는 작품이다.
부빌의 항구도시를 배경으로
32세의 연구원 로캉탱은
일상적 행위에 직면할 때마다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정립하고,
그 안에서 공허하고 압도적인 실재에 짓눌려 있는 자신을 인식한다.
"모든 것이 근거가 없다.
이 정원도, 이 도시도 그리고 나 자신도.
이것을 깨닫게 되면
가슴이 메스꺼워지고 모든 것이 붕 뜬 상태가 된다. 이
것은 구역질이다."
즉 구토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포함해
사물의 우연성을 비정립적으로 포착할 때 체험하는 철학적 구토로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사르트르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
이런 개념은 5년 후
철학서 《존재와 무》에서
보다 발전되어 정립된다.
《구토》는 발표된 후
카뮈와 블랑쇼 등의 찬사를 받으며 공쿠르상 후보에 올랐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에 징집되었고,
1940년 6월에 파리가 독일군에게 점령되자 전쟁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1941년 수용소를 탈출하여 파리로 왔다.
이후 교사로 일하는 한편,
보부아르, 메를로 퐁티와 함께
'사회주의와 자유'라는 집단을 결성해
레지스탕스 운동을 벌였으며, 활발하게 저술 활동도 했다.
전쟁 기간에 사르트르는
이때 벌어진 굵직한 사건들을
'자유의 길' 3부작인 《철들 무렵》과 《유예》 등을 통해 다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발표한 가장 중요한 작품은
1943년의 《존재와 무》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 입장에서
존재론을 정립한 저작으로,
사르트르의 중심 사상이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사상계를 대표하는 저작물로 꼽힌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메를로 퐁티 등과 함께
〈현대〉 지를 창간하여 전후 문학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사르트르는 지식인, 문학인의 사회 참여를 주장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전쟁 체험과 레지스탕스 활동 등이 일으킨 변모라 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을 통해
문학의 사회 참여에 대해 주장했으며, 전후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사상을 형상화한 작업은
소설보다 주로 희곡으로 나타났는데,
전쟁 중에 발표한 〈파리 떼〉, 〈닫힌 문〉,
전후에 발표한 〈무덤 없는 사자(死者)〉, 〈더럽혀진 손〉, 〈악마와 신〉,
〈알토나의 유폐자들〉 등이 그것이다.
1950년대에
사르트르는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전후 냉전 상황에서 공산주의를 지지했으며,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그러면서 실존주의 그룹, 〈현대〉 지의 중심인물들과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1952년,
사르트르가 〈현대〉 지에 〈공산주의와 자유〉라는 글을 발표하면서부터
카뮈, 메를로 퐁티 등과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개인주의적인 실존주의에 의한 사회 참여에 있어
한계에 부딪힌(후일 이를 인정했다) 사르트르가
사상과 행위에서 자기모순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르트르는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적극적으로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때에 따라 일관성 없는 모순된 행위 및 애매하고 관념론적인 주장을 많이 했다.
1956년경부터
사르트르는 프랑스 공산주의자들과 거리를 두었는데,
현대의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가
동맥경화에 빠져 있음을 깨닫고,
실존주의 철학의 입장에서
공산주의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변증법적 이성비판》으로 집약된다.
1960년대에는
베트남전에 대한 저항,
알제리 독립 지지,
소르본 학생운동,
공산주의운동,
반미운동 등에 가담하면서 활발히 활동했다.
1964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나
이마저도 정치적 저항의 표시로 수상을 거부했다.
1970년대 초에
알랭 제스마르와 베니 레비 중심의 마오이즘 집단에 가담하고,
마오이즘 기관지인 〈인민의 대의〉를 펴냈다.
또한 극좌파 일간지 〈해방(리베라시옹)〉에도 참여했다.
1973년에 건강 악화로 실명했고,
1977년에는 급기야 걷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지만,
사르트르는 계속해서 공식적인 사회 활동을 했다.
여기에는 레비의 도움이 컸다.
말년의 활동으로 사르트르의 명성은 더욱 치솟았고,
동시에 수많은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죽기 직전까지 사회 활동을 하고 글을 쓰다가 1980년 4월 15일 사망했다.
- 청아출판서(이한이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