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제일정이라는 피향정의 유래를 더듬어 보면 신라 정강왕1년(887) 최치원(호 고운)이 태산군수로 재임 중에 풍월을 읊고 소요하던 연못가에 세워진 정자이며 연못에 핀 연꽃의 향기가 주위에 가득하다 하여 “피향정”이라 이름했다. 신라 정강왕때 태산군수를 지내던 고운 최치원이 이 곳 연못가를 거닐며 풍월을 읆었다 한다. 누정의 창건연대는 분명치 않고 현재의 건물은 조선 인조(1623~1649)때 태인현감 유근(유근)이 다시 고친 것이다.
기록『증보문헌 비고』에 의하면 광해(1608∼1623)때 현감 이지광(1615∼1618)이 중건하고, 현종때 현감 박숭고(1661∼1664)가 또 초라한 건물을 확장하여 중건하고, 현재의 건물은 숙종42년(1715) 현감 유근이 전라관찰사와 호조에 교섭하여 정부의 보조로 부안 변산에서 재목을 베어다 세운 것이다. 그리고 철종7년(1856) 현감 이승경이 인부 2,692명 장인(토공, 목공) 577명, 엽전 1,600량을 들여서 동량은 그대로 두고 모두 갈았다.
피향정은 상하에 연못이 있어 유명했는데, 상연지(피향정 동북편)는 원래부터 있었으나 하연지(지금 연못)는 영조20년경(1740년경) 현감 오언부가 새로 판 것이라 한다.(『태인현지』)건물의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내부는 마루를 깔았는데 앞뒤의 돌계단을 통해 오르내릴 수 있도록 되어있다. 정자마루아래는 28개의 원형의 돌기둥을 받치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이 30개가 되어야 하는데 중앙의 2개를 세우지 않고 28개를 세웠으니 이는 우주의 28숙(별)을 따른 것이라 한다. 후면(서편)에는 호남제일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4면은 모두 개방되어 있으며 주위에는 퇴를 돌리고 난간을 가설하였다. 천정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정이나 좌우의 퇴량 윗지붕은 우물천정을 가설하였다.평면은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되었고 공포는 간단한 초익공 형태이며, 기둥 사이의 창방 위에는 소로를 받쳤다.
⊙ 현감 유근의 중수기문『蓋聞天上桂殿 在聲 不聞之鄕 海中銀臺 卽微茫難求之域 鵬宵萬里 適資 禽之嘲 鰲背三山空 燕土之腕, 是皆六合之外, 群聖在而不論 豈若四海之間, 一世得以寓目者哉, 至如, 唐家一時之制都, 置沆水之材, 漢室十里之關, 只誇凌宵之栢, 雖曰曲盡乎人巧, 亦非自得於天然美哉, 披香之爲亭也, 非高明寬敞之稱非輪奐壯麗之謂始營小寔取便於延賓, 前臨大池, 別有宜於翫物, 百頃涵境若對錢湖之塘, 十丈開花會移玉井之種, 露 紅 之苒苒風, 飜翠盖之依依, 濂園物理之靜觀, 受淨植之淸願竹 世慮之逍遺, 何待薰爐之焚燒, 乍燕寢之凝淸, 悅欄室之生臭, 殆同令君之坐席, 長留 可笑博望之乘 , 遠求安息, 疑曼陀之散雨, 卽色空兮非太乙之泛波 孰披拂兮聊暇日而寓賞, 得古人之命名, 是邑也, 海東名區, 湖南勝地, 名賢硯士之所經 , 騷人韻客之所 嘆, 學士高風尙瞻武城之祠宇, 靈川遺化, 不廢文翁之講堂, 惟玆享之更佳, 寔廣輿之攸記詩山北峙, 畵屛, 洛坪西關, 縱橫繡陌, 柳外簾幕爭矜, 大堤之繁華 花間女娘, 解通塘之歌曲, 朴監務之增拓, 旣得結構之良, 李僉樞之繼修, 實多潤色之美, 乎銀鉤鐵索, 東崗相國之題, 白露秋蓮, 石川訶佰之什, 久而各擅於一路, 亦嘗圖入於重震, 鳴呼成毁無常, 盛衰有數, 雨凌風震, 穰失周詩之翠飛, 歲荒民飢, 根變南國之鳥昧, 非徒行路之嗟惜, 無復使華之登臨, 武昌之樓日頹, 幾多仙鶴之訴, 曲江之亭, 秋晩, 不聞吏部之吟, 太守百廢未興, 三宜不去, 還如子京之在巴郡, 適値丘樓之 頹, 縱異仲舒之治江西, 緩, 勝閣之修飾, 取云政通而民理, 不計時屈而擧瀛, 趙淸獻之修城隍, 亦爲賑范文正之興土木, 豈曰非時, 遂乃秦記營門, 移書地部(戶部), 寫美材於蓬島, 役不逾期, 損玉粒於太倉, 粮無告 , 易桶改瓦, 咸引舊而增新, 滌池疏塘, 宛浮紅而핍泛綠, 昔之腐墨荒穢, 今焉繪素芳菲, 畵棟亂雲影落憑夷之窟, 朱欄輝日色, 奪眞仙之居, 梅陜谷之單衣, 滿室濃 , 莊漆園之化蝶, 宿花夢魂, 人稱湖浪翁, 自愛花中之君子, 存諸中者發外, 所貴一德之淸馨, 無廢後而侈前, 惟糞同志之勉助』聖上四二年乙未榴夏 完山 柳 近 思叔稿
첫댓글 태인의 문화유적을 하나씩 정리하여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