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파(北學派) 학자 유득공(柳得恭) /시인 이정연
조선 정조 때의 북학파(北學派) 학자이자 규장각(奎章閣) 4검서(檢書)의 한 사람이다.
역사 방면에 뛰어난 저술을 남겼으며, 문학에도 뛰어나 한시사가(漢詩四家)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저술 가운데 《발해고》를 통해 발해의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남북국시대론’의 효시를 이루었다.
1748년출생하여 1807년에 60세로 사망하였다.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자는 혜풍(惠風)·혜보(惠甫), 호는 영재(冷齋)·영암(冷菴)·가상루(歌商樓)·고운당(古芸堂)·
고운거사(古芸居士)·은휘당(恩暉堂) 등이다.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였기 때문에 서얼 신분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요절하여 모친 아래에서 자랐고, 18~19세에 숙부인 유련(柳璉)의 영향을 받아 시 짓기를 배웠으며,
한시(漢詩)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이서구(李書九)와 더불어 한시사가(漢詩四家)
또는 후사가(後四家)로 꼽힌다. 20세를 지나서는 박지원(朴趾源)·이덕무·박제가와 같은 북학파 인사들과 교유하였으며
1774년(영조 5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고, 1779년(정조 3) 박제가·이덕무·서이수(徐理修)와
함께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에 임명되어 '4검서'라 불린다. 이를 계기로 서얼출신이라는 신분제약에서 벗어나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포천현감(抱川縣監)· 양근군수(楊根郡守)·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사도시주부(司寺主簿)·
가평군수(加平郡守)· 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800년 그를 아끼던 정조가 승하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다가 1807년(순조 7)에 60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양주(楊州) 송산(松山:의정부시 송산동)에 묻혔다.
생전에 그는 개성·평양·공주 등과 같은 국내의 옛 도읍지를 유람하였고 두 차례에 걸쳐 연행(燕行)하고 돌아왔으며,
이 경험을 토대로 문학과 역사 방면에 뛰어난 저술을 남겼다.
1). 시문으로 자신의 시문을 모은 《영재집(冷齋集)》과 한국의 역대 시문을 엮은 《동시맹(東詩萌)》(1772)이 있다.
2). 중국 여행과 관련된 것으로서 청나라 문사들의 시문을 모은 《중주십일가시선(中州十一家詩選)》(1777)이 있으며,
후에 《병세집(竝世集)》(1796)으로 완성되었다. 연행과 관련된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 《연대재유록(燕臺再游錄)》
이 있고, 연행할 때의 단상(斷想)들을 모아 놓은 《금대억어(金臺臆語)》가 《후운록(後雲錄)》에 수록되어 있다.
3). 신변잡사와 단상들을 연대순으로 써내려간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와 한국의 세시풍속을 최초로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가 있다. 《경도잡지》는 뒤에 김매순(金邁淳)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다.
4). 역사서로서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발해고(渤海考)》 《사군지(四郡志)》가 있다.
그는 역사가라기보다는 시인이었으므로, 그의 역사인식은 문학론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북학파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학작품들을 섭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국 서적을 다양하게 섭렵하였고, 한국역사에도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만주 ·몽골 ·회회(回回) ·
안남(安南:베트남) ·남장(南掌:라오스) ·면전(緬甸:미얀마) ·타이완 ·일본 ·류큐[琉球] 및 서양의 홍모번(紅毛番:영국) ·
아란타(阿蘭陀:네덜란드)에도 관심을 가짐으로써 중국 일변도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그의 역사관을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지만, 처음에 남방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출발하여 점차로 북방 중심으로
변모해갔고, 그 결과 《발해고》 《사군지》를 저술하여 한국사학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는 《발해고》를 통하여 발해의 옛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였고, 《사군지》에서는 북방 역사의 연원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특히 《발해고》 머리말에서 고려가 발해 역사까지 포함된 ‘남북국사(南北國史)’를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비판한 뒤에, 발해를 세운 대씨(大氏)가 고구려인이었고 발해의 땅도 고구려 땅이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주장함으로써 ‘남북국시대론’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상과 같은 그의 역사 인식은 나중에
정약용(丁若鏞) ·한치윤(韓致奫) 등이 저서로서 업적을 남기는데 기여하는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묘는 성모병원 4거리에서 축석고개 쪽으로 가다가 위로 개설된 양주행 고속도로 못미처서 현대 오일 뱅크 주유소가 있고
바로 전인 왼편 길옆에 이성중묘 안내판이 있다. 따라가면 한전 송전소 담을 끼고 난 길이 된다.
이어진 담을 끼고 좌회전 하면 바로 이성중(李誠中)묘와 아래로 묘 2기가 오른편 산중턱에 보인다.
그곳을 지나 고속도로 밑의 토끼굴로 빠져 오르면 문화 유씨(柳氏) 중랑장종중(中郞將宗中) 세장지(世葬地)에 이른다.
이곳에 유소노(柳紹老)를 필두로 아래에 정연하게 묘군(墓群)이 포진하고 있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조선 후기 영재(冷齋) 유득공(柳得恭)의 오언율시(五言律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