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부 출판의 비밀 속으로
시인의 초대다. 연분홍 꽃다발을 들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안내하는 이가 반갑게 맞으며 단상 앞쪽으로 데려간다. 그는 바로 옆자리 동경에서 온 번역가가 있다고 귀띔이다. 그녀의 얼굴을 힐끔 훔쳐보았다. 얼굴이 오래된 찻잔처럼 은은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아우라가 우러나온다.
“저는 싸구려 시인이에요”
시인은 일어나 자연스럽게 한마디다. 그리고 한 송이 한 송이 꽃을 보듯 인사를 나눈다. 그는 백만장자가 부럽지 않은 듯하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라는 시집 100만 부 출판 기념회 초대장에 따라온 감사 인사에‘실로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제 이름으로 세상에 나간 시집 한 권이 100만 권이나 독자들 손에 들어갔다니요.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귀하고 무거운 축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라는 글귀에 스며있다.
사회자가 참석한 이들을 일일이 소개다. 한평생 문학만을 연구한 석학들이 축하의 말을 건네며 부러워하는 표정이다. 이어 작가 번역가 출판사 대표 등도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중 나를 놀라게 한 이가 있다. 곁에 앉아 있던 번역가다. 그녀는 이 시집만이 아니다. 박경리의 <토지>도 번역했다고 덧붙인다. 토지는 방대한 소설이라 끝내 다 읽지 못한 채 오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책이다.
흉상 제막식을 앞두고 토크 시간이 주어졌다. 시인과의 대화가 아니라 참석한 이들이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그녀는 번역했던 경험담을 담담하게 풀어 놓는다. 요사이 글 나부랭이를 써서인지 모른다.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백만 부 이상 출판한 세계적인 명작을 많이 연구한 듯하다. 작가이며 비행사인 생테지 페리의 <어린 왕자> 등 여러 작품을 이야기하며 독자에게 사랑받는 글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다는 얘기다.
백만 부 출판의 비밀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가 보고 싶어졌다. 무엇이 한 권의 시집을 그렇게 멀리, 그리고 오래 사랑받게 만드는 것인지 궁금하였다. 이 시집을 번역하게 된 이유나 동기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잠시 후, 어두운 숲길을 헤매는 이에게 길을 일러주는 사람처럼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자신이 번역해 본 한국 시집은 두 권뿐이라고 했다. 윤동주의 「서시」는 자기 성찰과 양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시였고, 나태주의 「꽃을 보듯 너를 본다」라는 시는 사랑과 존재,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알려준 시였다고 한다. 하나는 삶의 방향을, 다른 하나는 삶의 태도를 가르쳐 주었다는 그녀의 말은 조용했지만 또렷했다.
왜 그 두 작품뿐이었을까. 하는 마음에 다른 시인들의 작품은 눈여겨보지 않았느냐고 되묻자, 그녀는 잠시 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 짧은 침묵 속에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배어 있다. 그녀의 말속에는 “어렵다”, “로컬하다”라고 하는 표현이 섞여 나왔다.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곧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클래식 음악처럼 아름답지만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것일지. 아니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치를 담지 못했다는 의미일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한 나라의 언어와 정서는 그 자체로 이미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특히 시는 그 뿌리의 가장 섬세한 결을 드러내는 장르이기에, 다른 언어로 옮겨질 때 그 결이 온전히 살아남기란 쉽지 않다. 한국 시 번역에서는 조사나 함축된 의미, 문화적 뉘앙스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어려움을 자주 본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선택한 시는 설명 없이 마음에 스며드는 시였다. 복잡한 맥락은 몰라도 이해할 수 있고, 문화적 차이를 넘어 곧장 감정으로 닿는 시들. 어쩌면 언어의 강을 건너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시다.
글 쓴다는 게 쉬운 일 아니다. 처음 할아버지의 시집 한 권을 어렵사리 번역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번역이 서툴러서인지, 시가 어려워서인지 독자가 없어 1쇄로 끝났다. 마침, 대학연구소에서 연구자료로 쓰겠다고 하여 넘기고 말았다. 이어서 여러 수필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삶의 체험을 기록하고 경험을 형상화하여 수필집을 선보였다. 대형서점이나 인터넷을 오가며 독자를 만나보았으나 만 부 출판은 언감생심이다. 문학평론가가 제아무리 찬사의 말을 덧입혀 그 글을 높이 떠받든다 한들, 읽어 줄 독자의 눈길이 닿지 않는다면 그것은 싸구려 시만 못하다. 시인께서‘독자만 보고 시를 쓴다.’라고 가끔 하던 말이 가슴 깊이 와 닿는다. 그 속에 백만 부 출판의 비밀이 숨어 있지 않을까.
백만…. 장자든 출판이든 너나 나나 부러워할 듯하다. 백만장자는 단순히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수많은 선택과 시간, 그리고 작은 결실들이 쌓여서 만들어 낸 산물이다. 한 권의 책이 백만 부에 이르기까지 여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처음엔 조용히 건네던 한 문장이 누군가의 마음에 머물고 그 마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며 끝내 수많은 손에 닿는다. 그렇게 쌓인 백만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기록이 이라기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이야기의 흔적이고 오래도록 읽히고 싶은 마음이 모여서 일구어낸 금자탑이다.
시인의 흉상 앞에 섰다. 흉상은 출판사에서 백만 부 출판 기념으로 만들어 왔다. 어쩌면 그렇게 시인과 똑같이 닮았는지 감탄이다. 그 앞에서 부드러운 연분홍 장미꽃다발을 시인께 건네며 손목을 부여잡았다. 부디 건강히 지내시라고.
첫댓글 유병덕 수필 <백만 부 출판 비밀 속으로> 잘 읽었습니다
김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