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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수행을 해온 서울대 출신 8 스님 (1부)
6~7 년 전에 집단적 출가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소위 ‘서울대 출신 8 스님’은 지난 5월 8일 부처님오신날에 KBS TV가 그들의 출가 이후의 모습을 담은 TV 특집다큐멘터리 ‘선객(禪客)’을 전국에 방송하면서 다시금 세인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까지 올바른 수행보다는 오히려 잘못된 수행을 해왔던 것으로 보여서, 놀라움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만일 잘못된 수행이라면 깨달음을 얻거나 심신(心身)의 향상을 기대할 수 없고 혹은 숨은 부작용(副作用)마저 걱정해야 하므로, 불교의 입장에서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그들이 출가하기 전 서울대 학생이었을 때, 강정진 거사(법기선원, 존칭 생략)에게서 잘못된 수행법을 배웠고,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 그것으로 수행해왔기 때문입니다.
신문이나 방송의 보도 혹은 기타의 자료에 의하면, 그들의 수행은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무기(無記, 생각이 없이 멍한 상태)와 번뇌(煩惱, 생각이 많은 상태)를 모두 떨쳐버리는 것"을 가장 중요시합니다. 이것이 바로 강정진 거사가 주장하는 수행법의 가장 큰 특징이자 핵심이며 또 간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수행은 번뇌(煩惱) 하나만 떨쳐버리려고 하는 일반 불교의 수행과는 크게 다릅니다.
그런데 강정진 거사의 수행법은 아래에서 보듯이 치명적인 결함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따른다면 반드시 수행이 잘못되어 버립니다. 이를테면 동쪽으로 간다고 하면서 서쪽으로만 계속 가는 것과 같아서, 수행하면 할수록 더욱더 비뚤어집니다.
서울대 출신 8 스님은 그런 줄도 모르고, 강정진 거사의 수행법대로 무기(無記)와 번뇌(煩惱)를 모두 떨쳐버리려고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수행이 모두 빗나가는 헛된 결과만 초래했다고 보여집니다.
여기서는 강정진 거사의 수행법 중에서 특히 무기(無記)와 관련된 결함(缺陷)을 법리적 측면, 조화적 측면, 실제적 측면으로 나누어서 보겠습니다.
1. 법리적 측면에서의 결함
강정진 거사는 “중생의 속성은 무기(無記, 생각이 없이 멍한 상태)와 번뇌(煩惱, 생각이 많은 상태)로 구성되었고, 무기와 번뇌를 각각 따로 대처해야 하는데, 지금까지의 불교는 번뇌(煩惱)를 끊는 데만 주안을 두고, 무기(無記)에 대처하는 데는 소홀했다”고 주장하는데, 터무니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망치는 무분별한 언동입니다. 그런데 서울대 출신 8 스님은 그만 깜빡 속았습니다.
(가) 불교를 파괴하는 주장입니다. 불교가 등장한 이후 지난 2천5백년간 중생은 본래 부처(本來佛)이지만 다만 번뇌가 덮힌(煩惱所覆故) 상태로 파악되었는데, 무기(無記, 생각이 없이 멍한 상태)와 번뇌(煩惱, 생각이 많은 상태)로 구성되었다는 말은 처음입니다. 강정진 거사는 이런 엉터리 주장으로써 불교를 더럽히고 타인까지 망치므로, 차라리 불교를 떠나기를 권고합니다.
(나)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무기(無記, 생각이 없이 멍한 상태)가 지금까지의 불교를 뒤바꾸는 새롭고 중대한 혁명인 것처럼 거창하게 떠들지만,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습니다. 마치 무기(無記)를 주장하는 자체가 곧 정당한 근거인 양 행세합니다. 주장과 근거를 아예 구분하지 못하는 원시적인 지능수준을 보여줍니다.
불교의 역사나 문헌(文獻)을 보더라도 무기(無記)에 관한 언급은 극히 희소하며, 그나마 일회성(一回性)의 간단한 의미로만 사용되는데, 이런 무기(無記)가 여태껏 묻혀 있다가 왜 지금 새롭게 각광받아야 하는지 자세히 밝혀야 합니다. 또 자신의 착각(錯覺)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이런 점도 철저히 검토해야 합니다. 이런 내외적 조건을 충분히 갖출 때에만 비로소 정당한 근거로 인정받는데, 전연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데 무기(無記)란 일반인들이 대부분 처음 들어보는 용어이고 또 얼핏 생각하기에 다소 그럴싸해 보이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터무니없습니다. 또 무기(無記)는 수행자에게도 거의 의미가 없어서 극히 특수한 경우에만 사용됩니다. 이처럼 생소하고 빈약한 쓰임새뿐인 무기(無記)라는 용어를 파격적으로 앞장세우는 과장된 수법을 사용하여, 듣는 사람을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잠시 현혹시킬 뿐, 뒷받침하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무책임한 망발(妄發)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불교는 여실지견(如實知見)으로서, 사물을 실(實)답게 알고 실(實)답게 보므로, 근거가 확실하며 과장이나 허풍이 없습니다. 불교를 흔히 과학(科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불교가 존재하는 한 중생(衆生)이란 곧 번뇌를 의미한다는 점에 이론(異論)이 생길 리가 만무합니다.
(다) 내용이 불명확합니다. 무기(無記)의 내용 또한 극히 불명확합니다. 강정진 거사는 중생이 무기(無記, 생각이 없이 멍한 상태)와 번뇌(생각이 많은 상태)라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주창(主唱)하면서도 그 내용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으며, 다만 무기(無記)라는 말만 자주 사용합니다.
내용이 불명확하다는 것은 무기(無記)와 번뇌가 정확히 어떤 것이고, 또 상호관계(相互關係)가 어떤지, 가령 서로 정반대되는 것인지, 혹은 정반대가 아니고 서로 비슷한 것인지, 또는 정반대도 아니고 비슷한 것도 아니고 그냥 제각기 별개의 것인지, 제대로 밝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강정진 거사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봅니다.
무기(無記)와 번뇌(煩惱)를 명확히 구분하고 또 상호관계를 엄밀히 규정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로서, 의심의 여지가 없게끔 철저히 또 객관적 입장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것이 전적으로 결여된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무기(無記)와 번뇌가 자체적으로 모순(矛盾)을 잉태하는 탓으로, 내용을 명확히 밝힌다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중간하고 애매모호한 내용이 되었던 것인데, 이처럼 우스운 꼴을 보이다니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입니다.
그 결과 무기(無記)와 번뇌(煩惱)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전연 명확하지 않은 가운데, 서울대 출신 8 스님은 그것에 각각 따로 대처하는 수행을 지금까지 해왔던 것입니다. 실로 희극(喜劇, comedy)이 아닐 수 없으며, 수행이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정진 거사는 근거가 없고 내용마저 불명확한 무기(無記)를 앞세움으로써, 일반인을 쉽게 끌어들이는 부끄러운 소득을 얻고 있습니다. 일반인은 무기(無記)라는 생소한 말을 들으면 마치 새로운 내용이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끌려들어오기 쉽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불교는 내용이 아주 명확한 탓으로 천일조(千日照, 천 개의 태양이 비춤)라고 불리웁니다. 천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비추는 것과 같다고 하니, 얼마나 내용이 명확한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라) 역동적(力動的, dynamic) 지식이 부족합니다. 역동적 지식이나 관점에서 보면 무기(無記, 생각이 없이 멍한 상태)는 독자적인 실체가 있을 수 없고, 다만 번뇌(煩惱)의 종속적 변수(從屬的 變數) 내지 반사적 존재(反射的 存在)에 불과함이 분명해집니다.
비유하자면 빛과 어둠에서, 어둠은 독자적 실체가 아니라 오직 빛의 부재(不在)라고 정의되므로, 어둠은 독자적인 실체가 없고 다만 빛의 종속적 변수 내지 반사적 존재인 것과 같습니다.
강정진 거사는 역동적(力動的) 지식이 결여된 탓으로 무기(無記)와 번뇌를 각각 서로 다른 독자적인 실체로 보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현대인이라면 대체로 역동적 지식이 풍부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좀 뜻밖입니다.
그런데 수행은 인간 내면의 심층(深層)에 깊게 도사린 무의식(無意識) 혹은 아뢰야식(阿賴耶識, 유식불교)을 통찰하는 작업이 핵심을 이루므로, 역동적(力動的) 지식 내지 관점이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이것이 없다면 형식적인 수행은 몰라도 진정한 수행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반면에 불교는 역동적(力動的) 지식의 무한한 보고(寶庫)입니다. 번뇌는 혹복혹기(或伏或起, 혹은 잠복하고 혹은 일어난다는 뜻)한다는 한마디 말만으로도 불교의 역동적 지혜가 얼마나 뛰어난지 능히 증명됩니다.
(마) 범주(範疇, category)의 착각이 존재합니다. 강정진 거사는 무기(無記)를 특히 강조하지만, 막상 그에 관해서 내놓을만한 내용이나 설명할 건덕지가 전연 없는 관계로, 궁색한 나머지 현대의 정신분석학(精神分析學)이나 심리학(心理學)의 지식을 빌려오거나 흉내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기(無記)는 게으름을 유발한다. 무기(無記)가 많은 중생들은 매사에 의욕이 없으며 잠도 많아지게 되고 생각이 단편적이 된다. 따라서 행동도 무거워지고 설사 행동으로 옮겨도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우울증이나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 신음하거나 쾌락이나 술에 빠져 인생을 낭비하기 쉽다” 와 같은 설명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범주(範疇, category)의 착각이며, 체계(體系)의 오류입니다. 불교와 심리학은 겉보기에는 유사점(類似點)이 매우 많지만 속내에서는 범주와 체계가 전연 다르기 때문에, 비슷한 설명을 한다거나 지식을 빌려오는 일은 금물(禁物)입니다.
이런 범주의 착각이 존재하는 까닭은 강정진 거사가 수행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수행을 얼마큼 했다면 학문의 차원은 멀리 뛰어넘기 때문에 이런 일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자나 심리학자에게 강정진 거사가 앞세우는 무기(無記, 생각이 없이 멍한 상태)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백이면 백 모두 즉석에서 바로 번뇌(煩惱) 때문이라고 대답하리라고 봅니다. 현대의 학문(學問)은 이미 상당한 경지에 올라서, 강정진 거사와 같은 가짜의 도인(道人)보다 수준이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바) 무지(無知)를 의심케 합니다. 강정진 거사는 중생의 속성이 무기(無記)와 번뇌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합니다만, 의아심을 일으킬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중생의 속성은 본래불(本來佛, 본래부터 부처)로서, 중생은 다만 번뇌(煩惱)가 두텁게 덮힌 탓으로 그것을 모를 뿐이지, 본래의 속성은 추호도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불교가 자랑하는 천하제일(天下第一)의 대발견(大發見), 대광명(大光明), 대지혜(大知慧)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강정진 거사는 수행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 의미와 내용을 충분히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처럼 무지(無知)를 의심케 하는 말을 반복한다고 보여집니다. 참된 수행을 얼마큼 했다면 이런 말은 절대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혹시 용어(用語)를 제대로 고르지 못한 탓으로 그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약간 남아 있기에 더 이상 문제삼지 않습니다만, 정말 한심하다는 생각은 금할 수 없습니다.
(사) 사람을 망치는 수행법입니다.
수행이란 보통 10~30년이 넘는 기나긴 기간에 걸쳐서 심신(心身)이 총집중된 가운데 매순간 간단(間斷)없이 진행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수행법에는 털끝만한 결함도 없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자의 마음속에 수행법의 진위(眞僞)에 대한 의심이 계속 생겨나서 완전한 믿음이 자리잡지 못하기 때문에, 수행은 처음부터 불가능해지거나 혹은 억지로 수행할지라도 잘못되기 마련입니다.
강정진 거사의 수행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무기(無記)는 지금까지 보았듯이 불교를 파괴하고, 올바른 근거도 없고, 내용도 불명확하고, 역동적(力動的) 관점도 결여되고, 범주도 착각하고, 무지(無知)까지 의심케 합니다. 따라서 이런 무기(無記)를 중요하게 내세우는 것 자체가 도리어 큰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무기(無記)를 앞세우는 강정진 거사의 수행법은 치명적인 결함을 가졌고, 어떠한 가치도 없고, 오히려 사람만 망칠 것이 확실합니다.
수행의 세계는 칼날처럼 준엄하기 때문에, 毫釐有差 天地懸隔(호리유차 천지현격,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진다는 뜻, 3조 승찬, 신심명)은 누구도 예외가 되지 않는 대철칙(大鐵則)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광명정대한 대로(大路)를 따라가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수행이 잘못되는 것이 필연입니다. 선어록(禪語錄)에서 古路依舊然(고로의구연, 옛길은 변함없다는 뜻)이 많이 보이는 까닭도 수행법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질 것이 전연 없고, 大路卽古路(대로즉고로, 큰길이 곧 옛길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대 출신 8 스님은 경솔하게도 강정진 거사의 잘못된 수행법을 따랐던 탓으로 지금까지의 수행이 모두 비뚤어지고 헛될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뒤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빨리 참된 수행법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불교의 수행법은 위에서 지적한 결함이 전연 없기 때문에 수십년을 따를지라도 의심이 생기거나 믿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으며, 그것이 지닌 위대한 내용과 무한한 가치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더 수행자의 가슴속에서 절실하게 메아리칩니다.
수많은 선지식(善知識)들이 불교의 수행법을 전해준 불조(佛祖, 부처와 조사)의 은혜를 다 갚으려면 분골쇄신(粉骨碎身, 뼈를 가루로 만들고 몸을 부숨)을 몇천만번 할지라도 모자란다고, 육성(肉聲)으로 생생하게 말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아) 강정진 거사의 수행법에는 지금까지 말했던 무기(無記) 이외에, 관법(觀法)-염법(念法)-의법(疑法)이라는 3 단계 주장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이것 역시 강정진 거사가 진정한 수행을 안했던 까닭에 단지 세속적인 분별지(分別智)로써 나누고 설명한 것으로서, 수행의 진실과는 동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문제가 한층 더 심각하지만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른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그 밖에도 크고 작은 갖가지의 결함이 있는 까닭에, 강정진 거사의 수행법은 정말 어이없는 대착각(大錯覺)의 연속이며, 불교가 아닌 천마외도(天魔外道, 서산대사 선교석) 중에서도 가장 하열(下劣)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분량이 많아서 2. 조화적 측면에서의 결함과 3. 실제적 측면에서의 결함은 시차를 두고 2부에서 계속하겠습니다.)<1부 끝> (2003-08-09)
<참고사항> 제가 써서 인터넷에 올렸던 강정진 거사 비판의 글(제목과 날짜만 표시함):
1. 강정진 거사의 잘못된 수행을 비판합니다 (2003-6-21)
2. 서울대 출신 8 스님의 잘못된 행동을 비판합니다 (2003-6-29)
3. 성철스님이 외도(外道)라고 쫓아낸 강정진 거사 (2003-7-3)
4. 강정진 거사의 낮은 수행경계를 비판합니다 (2003-7-8)
5. 강정진 거사와 제자들은 대론(對論)하시오 (2003-7-14)
6. 일묵스님은 강정진 거사의 앞잡이가 되지 마시오 (2003-7-23)
1부에서 계속됩니다)
2. 조화적 측면에서의 결함
중생의 속성을 무기(無記, 생각이 없이 멍한 상태)와 번뇌(煩惱, 생각이 많은 상태)로 구분하고, 각각 따로 대처해야 한다는 강정진 거사의 주장은 얼토당토않은 횡설수설인데, 우연하게도 때마침 구도(求道)의 열정에 목말라 하던 순진한 서울대학생 몇몇을 사로잡기에 성공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날 소위 ‘서울대 출신 8 스님’ 입니다.
무기(無記)와 번뇌(煩惱)의 구분은 불교의 근본과 완전히 배치(背馳)될 뿐만 아니라 수행마저 망가뜨리는 아주 삿된 소견이므로, 아무리 관용과 자비를 표방하는 불교라고 해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 한마디로 불교의 근본을 모르는데서 나온 소리입니다. 불교는 마음의 실상(實相)을 일심(一心) 즉 한마음에서 구하고, 일심(一心)만이 진심(眞心) 내지 정심(正心)이라고 봅니다. 즉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하나여서, 마치 허공(虛空)이 온 우주에 퍼져있지만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도 온갖 일에 관여하지만 오직 하나라는 것입니다. 때때로 마음이 여러 개 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혹은 여러 개로 구분되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마음은 어디까지나 하나입니다.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로 보고 하나로 대처해야 합니다. 이것은 불교의 핵심이자 생명입니다. 또 반드시 하나의 마음 즉 일심(一心)이라야 필경 무심(無心)이 되고, 무상(無相)이 되고, 다시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지혜도 없고 소득도 없음, 반야심경)이 되기 때문에 불교는 말 그대로 일심지법(一心之法, 한마음법, 마조록)인 것입니다.
불교의 구도자(求道者)들은 모두 일심(一心)이 안되어서 많은 고통을 겪으며, 피나는 수행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일심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이유도, 오로지 일심(一心)만이 존재의 유일무이한 실상(實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강정진 거사는 중생의 속성을 무기(無記)와 번뇌(煩惱)로 구분하고 각각 따로 대처하므로, 사실상 마음을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또 수행에 의하여 무기(無記)와 번뇌(煩惱)를 각각 불망(不忘)과 불매(不昧)로 그 속성을 바꾼다고 주장하므로, 마음을 둘로 나누는 태도를 끝까지 견지합니다.
(나)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東亞細亞)의 불교는 육조 혜능 이후 돈오문(頓悟門)이 대세가 되었고 점수문(漸修門)은 배척당하여 명맥마저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배척당한 점수문도 일심(一心)을 인정하는 것은 확고하며, 다만 수행의 방편으로 번뇌를 난상(亂想, 어지러운 생각)과 무기(無記, 생각없음)의 둘로 나누고, 각각 따로 대처하는 以定治平亂想 以慧治平無記(이정치평란상 이혜치평무기, 정으로써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혜로써 무기를 다스린다, 고려 보조국사, 수심결)를 주장합니다.
점수문(漸修門)은 일심(一心)을 확고히 인정하면서, 다만 수행의 방편으로 번뇌(煩惱)를 둘로 나눈 것에 불과했지만, 그러고서도 철저히 배척당했던 까닭은 본체든 방편이든 하여간 둘로 나누어서는 수행이 무조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강정진 거사는 마음을 아예 둘로 나누는데다가 수행의 방편마저 둘로 나누므로, 점수문(漸修門)과도 천지 차이가 나며, 이 때문에 불교에 속한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다) 무기(無記)와 번뇌(煩惱)를 구분하고 각각 따로 대처한다면, 그때마다 매번 주관(행위의 주체)과 객관(행위의 객체)이 분리되어야 합니다. 즉 무기를 인식하기 위해서도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야 하고, 무기를 따로 대처하기 위해서도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야 하며, 번뇌를 인식하기 위해서도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야 하고, 번뇌를 따로 대처하기 위해서도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모두 4 개의 주관과 4 개의 객관이 존재하므로 결국 마음이 8 등분 되어야 합니다. 또 주관과 객관이 한번 분리되면 염념상속(念念相續) 때문에 그 뒤부터 사사물물(事事物物)마다 주관과 객관의 분리가 일어나게 됩니다. 즉 무기와 번뇌를 한번 구분하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마음은 4 등분, 8 등분, 12 등분, 16 등분, 등등으로 무한히 세분(細分)됨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와 반대로 마음을 번뇌 하나라고 보면 주관과 객관의 분리는 일어나지 않거나, 혹은 일어났던 분리도 얼마 후면 사라집니다. 즉 대상이 하나이면 마치 대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가 되는데, 이것은 실제로 수행을 해보면 확실히 알게 됩니다.
첫째, 무기(無記)와 번뇌(煩惱)의 구분은 생멸(生滅)에 속합니다. 생멸(生滅)이므로, 불교의 수행이 지향하는 적멸(寂滅)과 정반대가 됩니다. 수행을 안하면 이 말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데, 강정진 거사는 진정한 수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멸(生滅)을 수행인 양 착각하고서도 태연한 것입니다.
生滅滅已 寂滅爲樂(생멸멸이 적멸위락, 생멸이 없어져야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은 석가모니가 전생(前生)에서 나찰에게 몸을 던져서까지 들었다는 유명한 구절로서, 불교 만대(萬代)의 표준입니다. 이 구절처럼 생멸(生滅)이 없어져야 하는데 거꾸로 생멸을 키우므로, 수행이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유상유작(有相有作)입니다. 즉 무기(無記)와 번뇌(煩惱)를 구분하는 것은 유상(有相)이며, 각각 따로 대처하는 것은 유작(有作)입니다. 그런데 참된 수행은 무상무작(無相無作)이므로, 반대방향이 되어서 수행이 될 리가 만무합니다.
셋째, 능소구망(能所俱忘, 주관과 객관을 함께 잊음)이 불가능합니다. 주관과 객관이 항상 분리되어 각각 4 개 이상 존재해야 한다면, 주관(能)과 객관(所)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늘이는 꼴이 되므로, 진정한 수행의 차원인 능소구망(能所俱忘)은 점점 더 요원해집니다.
위와 같은 문제점들은 강정진 거사의 수행법에서는 반드시 나타나지만, 올바른 수행법에서는 전연 나타나지 않는데, 자세한 내막은 실제로 수행을 해야 확연히 알게 됩니다. 강정진 거사는 올바른 수행을 한 적이 없어서 까맣게 모르는 것입니다.
(라) 무기(無記)와 번뇌(煩惱)를 구분하고 각각 따로 대처한다면, 마음이 4 등분, 8 등분, 12 등분, 16 등분, 등등으로 순식간에 무한히 세분(細分)되어 버리는데, 이런 마음으로 수행한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수행을 조금이라도 해보았다면 이런 말은 절대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강정진 거사는 진정한 수행을 한 적이 없음을 이 말 한마디로써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첫째, 진정한 수행은 모든 것을 버리고 놓음으로써 마음이 체념상태로 되어 텅 비면서, 그때까지 무수한 주관과 객관으로 세분(細分)되었던 마음이 일심(一心) 내지 무심(無心)으로 돌아가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이때 만약 강정진 거사의 주장처럼 세분된 마음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면 일심(一心) 내지 무심(無心)이 불가능한 까닭에 수행은 영원히 시작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오늘날 심리학자와 일반인들도 잘 알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말로 실제에 응용하며, 심지어 동양적 수행을 부정하는 기독교(신,구) 목회자들조차 잘 알고 실무에 적용하는데, 불교를 내세우는 강정진 거사가 모른다는 것은 정말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둘째, 진정한 수행은 모두 극히 단순한 형태를 취하는데, 예컨대 ‘오직 화두만 들라(화두법)’ ‘오직 관찰만 하라(관법)’ ‘오직 염불만 하라(염불법)’ ‘오직 기도만 하라(기도법)’ 등입니다. 그 이유는 마음의 세분화를 막고 일심(一心) 내지 무심(無心)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수행이 단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강정진 거사는 그와 반대로 세분(細分)된 마음을 권장하므로 참된 수행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일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진정한 수행은 피동적(被動的)으로 마음의 흐름을 뒤따라 가야 합니다. 선어록에서는 倒騎(도기, 짐승을 거꾸로 탄다), 虛舟(허주, 빈 배), 수류(隨流, 흐름을 따름), 수시(隨時, 때를 따름) 등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도 일심(一心) 내지 무심(無心)일 때에만 가능하며, 마음이 세분화되면 전연 불가능합니다.
넷째, 진정한 수행은 지금-여기(now-here)에 집중해야 하는데, 역시 일심(一心) 내지 무심(無心)일 때에만 가능하고, 마음이 세분화되면 불가능합니다. 강정진 거사처럼 무기와 번뇌를 구분하고 각각 따로 대처하는 것은 지금-여기를 소외(疏外)시키고, 과거-딴곳에 집착하는 행동임을 주의해야 합니다. 선어록에서는 ‘밤중에 담 넘어온 도둑을 아들로 여긴다’는 무시무시한 경책(警責)으로 나타납니다.
다섯째, 진정한 수행은 뭐니 뭐니 해도 지관쌍수(止觀雙修), 정혜쌍등(定慧雙等), 적조쌍류(寂照雙流)가 99%를 차지할만큼 절대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놀랍게도 강정진 거사의 책이나 글에서는 이에 관한 언급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까닭은 물론 강정진 거사가 진정한 수행을 하지 않아서 그런 개념이나 내용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위에서와 같이 세분(細分)된 마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섯째, 그 밖에도 수행의 중요한 특징으로서 조용동시(照用同時), 무위실상(無爲實相), 회광반조(廻光返照), 조고각하(照顧脚下), 부즉불리(不卽不離) 등이 있지만, 모두 일심(一心) 내지 무심(無心)을 전제로 하며, 세분된 마음으로는 불가능함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이런 지적까지 굳이 하는 것은 강정진 거사의 수행법이 워낙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진정한 수행은 경이(驚異)의 세계이며, 기적(奇蹟)의 세계이며, 혁명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가본 사람은 알지만, 가보지 못한 사람은 꿈에도 알 수 없습니다. 또 가본 사람은 신비(神秘)로 가득찬 장관(壯觀)을 보긴 했지만 말로 나타낼 수가 없어서 벙어리처럼 그냥 미소(微笑)만 짓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얼마큼 해본 사람이라면 강정진 거사가 참된 수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당장 알 수 있습니다. 비록 그가 수행했다고 자처(自處)하고 수행에 관해서 장황하게 이야기할지라도, 일심(一心)을 등지고 끝없이 세분된 마음으로는 장님(盲人)처럼 전연 엉뚱한 곳에서 헤매는 신세를 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무지(無知)와 욕심 탓으로 수행에 관해서 제멋대로 횡설수설할 뿐이며, 심리적으로 연약하고 순진한 젊은이들이 그의 화려한 호언장담(豪言壯談)에 넘어가 따르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덟째, 원효대사(元曉大師)는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수행에 들어갈 때에는 고요히 一如之境(일여지경, 하나의 경계)을 지키고, 수행에서 나올 때에는 一味之心(일미지심, 하나의 마음)을 잃지 않기 때문에 하나를 지킨다고 말한다(入時靜守一如之境 出時不失一味之心 故言守一)” 라고 하였습니다. 즉 수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一如之境(일여지경)과 一味之心(일미지심)을 잘 지켜서 守一(수일, 하나 지킴)한다는 내용인데, 一如之境(일여지경)과 一味之心(일미지심)은 경심일여(境心一如, 경계와 마음이 같음)인 탓에 사실상 동일하며, 결국 일심(一心) 즉 한마음을 지키는 것이 수행의 전부임을 밝혔던 것입니다. 이처럼 일심(一心)의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추호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홉째, 일심(一心)은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수많은 도(道)와 갖가지 수행에서 모두 공통된 근원적 바탕이자 구체적 실천방법이기도 한데, 강정진 거사는 이것마저 모르거나 무시하고 있습니다.
열째, 서양문화(西洋文化)는 일심(一心)의 중요성을 모르다가 현대에 와서 정신분석학의 등장으로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인간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은 무의식(無意識)의 존재를 인식한 뒤로, 무의식의 통찰에 의하여 의식(意識)을 확장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고도로 확장된 의식상태(意識狀態)가 바로 일심(一心)임을 뒤늦게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일심(一心)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수용(受用)하려면 수행이 상당히 진척되어 의식의 확장에 해당하는 출격장부(出格丈夫)로의 대변화(大變化)나 정신의 환골탈태(換骨奪胎)가 어느 정도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강정진 거사는 수행을 안한 탓으로 이것이 없었고, 따라서 일심(一心)을 이해할 도리가 없었으므로, 무한히 세분(細分)된 마음을 수행이라고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 여기서 꼭 지적하고 싶은 것은 강정진 거사가 불교에서 가장 낮은 차원인 외수(外修)에나 비견(比肩)될 정도로 수행의 경지(境地)가 낮고 문제점이 많다는 점입니다. 외수(外修)란 일심(一心) 즉 진심(眞心) 내지 정심(正心)으로서의 마음을 닦지 않고, 마음 아닌 다른 대상(육체, 행위, 의례, 지식, 교리, 등)이나 마음의 일부 기능(심리조절, 정신단련, 정신통제, 등)만을 닦는 수행을 말합니다.
육조 혜능 스님은 일찍이 外修覓佛 未悟自性 卽是小根人 聞其頓敎 不信外修(외수멱불 미오자성 즉시소근인 문기돈교 불신외수, 外修로 부처를 찾기 때문에 자성을 깨닫지 못한다. 하지만 이같이 근기가 작은 사람일지라도 단박에 깨치는 가르침을 듣고 外修를 믿지 아니하고,,,, 단경)라는 구절로, 외수(外修)를 단단히 경책한 바 있습니다.
첫째, 강정진 거사는 13 살 때 산성사라는 절에 갔더니, 주지인 지산스님이 친절하게 방으로 들어오게 하여 여러 가지를 꼬치꼬치 물어보면서 "오늘부터 관세음보살을 불러보렴.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참 좋단다." 라는 그 한마디 말을 듣고 그때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음 속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20 살 때 양산 통도사에 가서 구하스님을 친견했는데, 스님께서 '옴마니반메훔'이란 글씨를 써 주시면서 '옴마니반메훔'을 부르라고 하셔서 그날부터 '관세음보살'에서 '옴마니반메훔'으로 바꾸어 불렀다고 합니다.
이처럼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염송(念誦)은 아주 어리석고 둔한 짓이어서, 마음에서 우러난 참된 수행이 아니라 잘해야 껍데기만 남은 외수(外修)일 뿐입니다. 더욱이 20 대 중반까지는 천진불(天眞佛)의 면모가 많이 남아 있으므로 그보다 이른 나이에 섣불리 수행하는 것은 도리어 천진불을 해치기 때문에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둘째, 강정진 거사는 수행에 관해서 언어적(言語的) 설명(說明)이나 수사적(修辭的) 논리를 마구잡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수행에 의하여 무기(無記)와 번뇌(煩惱)를, 망각(忘却)하지 않음인 불망(不忘)과 어둡지 않음인 불매(不昧)로 그 속성을 바꾸어 부처가 된다”라는 등입니다.
그러나 정작 수행의 주대상인 마음은 마치 텅 빈 허공과 같아서 어떠한 설명이나 논리도 붙을 수 없기 때문에, 구차한 설명이나 논리를 함부로 남용(濫用)하는 것은 도리어 마음을 모른다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수행은 회광반조(回光返照, 빛을 되돌려 자신의 마음을 비춤)의 작업이므로 이런 역설적(逆說的) 측면에 반드시 밝아야 합니다.
강정진 거사는 온갖 신조어(新造語)를 만들어가면서까지 언어문자에 의한 설명을 끝없이 계속하는데, 이것은 법을 위해서라기보다 사실은 자신(自身)의 마음속에 있는 의문(疑問)을 해소하고, 불안을 완화하고, 미심(未審)함을 덮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심리학은 이런 정도는 익숙하므로, 눈이 조금이라도 떠진 사람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즉 진정한 동기(動機)는 어디까지나 본인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비슷한 심리학적 사례를 들자면, 겉보기에 강인한 신념의 소유자는 마음속에 정반대로 연약한 경향을 가진 경우가 많고,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에게 끈덕지게 종교를 전파하는 사람은 마음속에 자신의 믿음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는 등입니다.
강정진 거사는 이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깨닫기는커녕 도리어 엉뚱한 장광설(長廣舌)을 늘어놓음으로써 자신의 마음속의 콤플렉스(complex)를 해소하려고 하므로, 수행과는 정반대로 향하며 허다한 문제점까지 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若不降心 依文取證 無有是處 自誑誑他 彼此俱墜(마음을 항복받지 아니하고 글자에 의해서 증함을 얻는다면 옳지 못하다.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여서 피차가 함께 추락한다, 대주, 돈오입도요문론)라는 경구를 꼭 되새겨야 한다고 봅니다.
셋째, 강정진 거사는 10 년 전쯤에 입적한 성철(性徹) 스님의 견해를 과도하게 모방하였습니다. 즉 돈오돈수(頓悟頓修), 오매일여(寤寐一如), 육조 혜능과 육조단경(六祖檀經), 오조 법연 스님과 대혜 종고 스님, 내외명철(內外明徹), 수행불행(修行佛行)에 대한 강조는 모두 성철 스님을 고스란히 뒤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모두 특수한 수행상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것이어서 범위가 지극히 협소하고 논점이 한정된 탓으로, 일반적인 수행에서는 그 비중이 아주 작아서 비유하자면 1 %도 채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일반적인 수행의 99 %를 차지할만큼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지관쌍수(止觀雙修, 정혜쌍등 혹은 적조쌍류도 비슷한 내용임)에 관해서는 강정진 거사의 언급이 전혀 없음은 앞에서 이미 지적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화가(畵家)가 소뿔(牛角) 하나만 그리고, 소(牛)의 나머지 부분은 그리지 않은 것처럼 이만저만 이상한 게 아닙니다.
이처럼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 원인은 강정진 거사가 수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행으로 인한 자기 마음의 변화과정은 직접 알지도 체험하지도 못했고, 단지 이런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방어적인 동일시(同一視, identifying) 기제(mechanism)에 의하여 성철 스님의 견해를 자기도 모르게 대거 흡수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방어적인 동일시(同一視)는 자기정체성(self-identity)이 결여되거나 자기상실(自己喪失)에 빠진 사람이 타인의 됨됨이나 특장점(特長點)을 자기도 모르게 정신적으로 대거 섭취하여 자기 것으로 삼는 병적 기제(mechanism)로서, 불균형(不均衡)하고 기괴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므로 반드시 지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동일시(同一視) 기제를 자각하고 청산하는 일은 수행의 과정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의 인격형성은 대부분 아동기(兒童期)와 청년기(靑年期)에 부모 등 타인의 인격을 동일시(同一視) 기제에 의하여 섭취함으로써 이루어지므로, 이것을 모두 자각하고 청산해야만 비로소 자기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彼大丈夫 我大丈夫(피대장부 아대장부, 그대는 대장부 나 또한 대장부), 丈夫不行佛行處(장부불행불행처, 장부는 부처가 갔던 곳을 가지 않는다) 등의 선어(禪語)는 모두 타인에 대한 동일시(同一視)를 철저히 자각 청산하여 타인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자기의 청정한 본래면목을 되찾은 경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철(性徹) 스님은 수많은 제자를 두었지만, 제자들 중에서 성철 스님을 모방하는 사람은 전혀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모방은 수행과 절대적으로 상극(相剋)되므로 수행자가 타인을 모방하는 일은 꿈에도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강정진 거사는 성철 스님을 대거 모방한 것이 눈에 띄므로, 수행의 경지가 모자란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넷째, 강정진 거사는 우리나라에서 많이 하는 화두선(話頭禪, 공안참구법)을 “의심의 특성을 원용(援用)하여 세번뇌(細煩惱)를 평정하게 하는 의심법(疑心法)”이라고 설명했는데,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대표적인 수행방법으로 꼽히는 화두선(話頭禪)을 이처럼 함부로 매도(罵倒)할 줄은 정말 뜻밖입니다.
화두선은 치열한 구도(求道)의 열정에 불타서 생사를 떼어놓고 정진했던 수행자들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한 것이며, ‘의심의 특성을 원용(援用)한 의심법(疑心法)’이라는 것은 강정진 거사가 단지 외부에 나타나는 겉모습만 보고 제멋대로 갖다붙인 해석으로서, 전연 당치도 않습니다.
화두선(話頭禪, 공안참구법)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같아서 어떤 이유나 설명도 붙는 즉시 타버리며, 사람의 면문(面門, 얼굴)도 타버리고, 상신실명(喪身失命, 목숨을 잃음)까지 당하는 등 최상승(最上乘)의 수행법으로서 자타공인(自他共認) 되고 있는만큼, 막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자신의 낮은 경지와 문제점만 보여줄 뿐입니다.
3. 실제적 측면에서의 결함
강정진 거사가 주장하는 수행법으로는 실제로 수행에 들어가는 것조차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제적 측면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보지만, 참고적으로 약간 지적할까 합니다.
(가) 수행의 실제적 측면은 두 가지의 주요한 국면으로 이루어지는데, 모두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 진아(眞我, true self)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즉 진아(眞我)가 처음에는 아주 희미한 낌새로나마 느껴지다가, 이윽고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비록 가시적인 형상(形相)은 없지만, 이런 과정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며, 이때부터가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 이전은 수행의 예비단계에 불과합니다.
강정진 거사가 말하는 수행법을 보면 최종완성단계인 무여열반에 가서야 비로소 진아(眞我)가 나타난다고 하므로, 그가 말하는 수행은 모두 예비단계에 불과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진아(眞我)가 극히 희미하게라도 나타나기 시작하면 그에 대해서 최소한의 요구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즉 ‘오직 화두만 들라(화두법)’ ‘오직 관찰만 하라(관법)’ ‘오직 염불만 하라(염불법)’ ‘오직 기도만 하라(기도법)’ 등입니다. 그 밖에는 어떠한 요구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때 만약 강정진 거사의 주장처럼 무기(無記)와 번뇌(煩惱)를 구분하고 각각 따로 대처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기면 진아(眞我)는 즉시 죽거나 파괴되어버립니다. 수행을 해봐야만 이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맹독(猛毒)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번뇌(煩惱)와 조우(遭遇)하기 시작합니다. 즉 처음에는 번뇌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다가, 이윽고 폭풍노도(暴風怒濤)처럼 점점 더 세차게 밀려오고 물러가기를 끊임없이 되풀이합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지 피동적 자세로 번뇌를 완전히 수용(受容, accept)해야 하며, 또 번뇌가 대동(帶同)하는 전체 영역(full range)까지 세밀히 관조해야 합니다. 선어록에 세간(細看, 자세히 본다)이라는 말이 수없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 외에는 어떤 유위(有爲)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때 만약 강정진 거사의 주장처럼 무기(無記)와 번뇌(煩惱)를 구분하고 각각 따로 대처한다면, 번뇌는 즉시 숨거나 다른 형태로 바뀌어버립니다. 이것도 역시 수행을 해봐야만 그 심각한 해독(害毒)을 알 수 있습니다.
(나) 강정진 거사가 가르치는 대로 수행을 계속한다면 심신(心身) 양면에 걸쳐서 실제로 아주 나쁜 결과가 초래됩니다.
첫째, 자연조절장치(自然調節裝置)에 위배됩니다. 사람의 몸과 마음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수많은 자연조절장치(自然調節裝置)가 자동적으로 작용하여 조화를 이루어가기 때문에 생명이 유지됩니다. 예를 들면 고통이 심해지면 엔돌핀과 같은 특수성분이 분비되거나 기절(氣絶)하게 되고, 극심한 위기를 만나면 자기(ego)를 벗어나서 초연해지는 등입니다. 이런 자연조절장치(自然調節裝置)를 모르거나 일부러 거스르는 것은 어리석을 뿐입니다.
무기(無記)와 번뇌(煩惱)를 구분하고 각각 따로 대처하는 것은 바로 자연조절장치(自然調節裝置)를 거역하므로 반드시 삼가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중대한 피해까지 각오해야 합니다. 이것은 잘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불교의 수행과 깨달음은 자연조절장치(自然調節裝置)와 가장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혹은 자연조절장치(自然調節裝置)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불교를 두고 수승(殊勝, 뛰어남)하다거나 무상(無上, 위가 없음)의 진리라고 말하는 요인 중에는 이것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봅니다.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유명한 선어(禪語)인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 에도 대우주(大宇宙)의 자연조절장치(自然調節裝置)는 어김없이 조화되어 있고, 이를 외면하고서는 접근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강정진 거사의 잘못이 아주 크기에 굳이 이런 지적까지 하였습니다.
둘째, 선근(善根, 선을 낳는 근본)까지 파괴됩니다. 무기와 번뇌를 구분하면 고요한 일경(一境)과 일심(一心)의 상태인 선정(禪定)을 스스로 어지럽히므로, 求佛聖智 卽要禪定 若無禪定 念想喧動 壞其善根(구불성지 즉요선정 약무선정 염상훤동 괴기선근, 부처의 성지를 구한다면 선정이 요긴하니, 만약 선정이 없으면 망상이 시끄럽게 일어나서 선근까지 파괴한다, 선문경)에 곧바로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가정법(假定法)을 사용하여 만약 수행을 상당히 했던 사람이 강정진 거사의 수행법을 억지로 따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장 요란한 폭발음(暴發音)이 터지고, 정력(定力)과 혜력(慧力)이 즉시 무너져내리면서, 수행으로 쌓았던 모든 공덕(功德)이 삽시간에 산산조각 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물론 정신적 심리적 현상이어서 물리적 현상과는 다릅니다만, 제게는 거의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이를 보더라도 강정진 거사의 잘못된 수행법은 즉각적인 파괴적 위력까지 가지고 있으므로, ‘수행자의 무덤’이라고 부를만 합니다.
4. 결어(結語)
강정진 거사의 수행법이 지닌 결함은 지금까지 보았던 것처럼 법리적 측면에서는 조금 드러나지만, 조화적 측면에서는 현저히 드러나고, 실제적 측면에서는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런 까닭에 수행을 안해본 사람은 그 결함을 잘 모르고, 수행을 해본 사람이라야 확연히 알게 됩니다.
이 때문에 수행을 안해보았거나 수행을 잘 모르는 사람은 자칫하면 강정진 거사의 수행법에 속아 넘어갈 우려가 많습니다. 만일 속는다면 진정한 수행이 불가능해지고 선근(善根)도 파괴되고 심신(心身)의 장애까지 받는 큰 피해를 당하기 쉬우므로 주의해야만 합니다.
근원적 잘못은 어디까지나 강정진 거사 자신이 올바른 수행을 한 적이 없었거나 혹은 그릇된 수행을 해놓고서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상화(理想化)하며, 심지어 책까지 펴내면서 거짓된 미사여구(美辭麗句)나 호언장담(豪言壯談)을 사용하여 잘못된 수행법을 주변에 퍼뜨리는데 있습니다만,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불교가 마냥 모른 척할 수는 없기 때문에 대책 마련이 시급합니다.
서울대 출신 8 스님은 출가 전인 서울대 재학 시절에 멋모르고 강정진 거사의 수행법을 따르기 시작한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여태껏 바른 수행을 했을 턱이 없고, 반대로 잘못된 수행만 해온 셈이기에, 수행의 공덕(功德)은커녕 심신(心身)에 걸쳐서 많은 손실(損失)까지 자초했음이 분명하므로, 이제부터라도 철저한 반성을 통해서 진정한 수행의 길로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끝> (2003-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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