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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의 혼인 잔치
본문: 요 2:1-11
요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본문은 가나의 혼인 잔치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졌습니다. 이 짧은 이야기가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한 것들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역하시는 비밀스러운 방식을 배웁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하나의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의 사역 방식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시는지는 그분의 성품(주권과 거룩함)에서 나옵니다. 그분의 성품을 배워야 그분의 사역 방식을 배우고, 또한 그 반대도 성립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비밀로 가득 차 있으므로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학자마다 나름대로 해석을 내어 놓습니다. 우리는 본문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열고자 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오용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본문이 길므로 우리는 둘로 나누어서 관찰하겠습니다. 말씀을 통해 여러분이 영생을 위한 지혜를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사흘째 되던 날“은 1장 43절에 말하는 날부터 계산한 것으로서 19절에 설명한 사건(세례요한이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심문받은 것)부터 7일째 되는 날입니다. 매우 극적이었던 한 주일이 가나 보도로 마무리됩니다. 요한이 이렇게 일주일간의 사건을 기술한 것은 이것이 모두 매우 중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대하는 보도도 매우 중요한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주던 장소인 베다니로부터 가나까지 120km 떨어졌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젊으셨으므로 3일 만에 그 거리를 주파하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 일행은 결혼식의 첫날이 아니라 시작한 지 며칠 지나서 그곳에 도착한 것 같습니다. 부잣집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이 지나야 가능한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의 결혼은 7일간 지속합니다.
„갈릴리 가나“는 공관복음서에서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지만, 요한복음에서 몇 번 등장하므로 중요한 도시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나를 몇 번 방문하셨습니다(2:1; 4:46). 나다나엘이 가나 출신입니다(21:2). 그곳에서는 예수님이 물을 술로 변화시킨 사건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보지도 않고 치료하기도 하셨습니다(4:46 이하). 그러므로 그곳에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이 나름대로 모임을 구성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결혼식(혼례)“은 구약성경에서 생의 절정으로 여겨졌습니다(참조: 사 49:18; 61:10; 62:5; 렘 7:34; 16:9; 25:10; 33:11). 탈무드도 그렇게 말하며, 사람은 결혼해야 한다는 것을 매우 강조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랍비는 „아내가 없는 남자는 사람이 아니라“라고 했습니다.
처녀가 결혼할 때는 결혼식이 일주일간, 과부의 재혼 시에는 삼일 지속합니다(참조: 토빗 11:18). 결혼식 첫날 저녁에 신랑은 횃불을 든 들러리 처녀(참조: 마 25:1 이하)들이 수행하는 신부를 만나 결혼식이 벌어지는 자기 집으로 데려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결혼식 행렬에 참가합니다. 이러한 일은 공적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랍비들은 자기 학생들과 함께 행렬에 참가하기 위해 수업을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신부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일입니다. 결혼식에는 노래와 춤이 있고 하객은 맛있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신랑의 친구들은 결혼식 진행을 맡았고 이것 때문에 몇몇 종교적 의무에서 제외되기도 했습니다. 친구 중의 한 명은 전체를 지휘했습니다(참조: 요 3:29).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결혼이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을 나타내므로,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호 2:18 이하; 사 54:4 이하; 겔 16:8 이하):
호 2:19 “내(하나님)가 네(이스라엘)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사 544-:5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런데 예수님은 이 그림 언어를 사용하여 자기와 함께 메시아 시대가 왔다는 상징으로 사용하셨습니다(마 9:15; 25:1 이하; 눅 12:35 이하; 요 3:29; 계 19:7 이하; 21:2,9; 22:17):
마 9: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메시아가 계실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요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계 19:7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가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왔다는 것을 몇 번이고 나타내셨는데, 가나의 결혼식에서 여기에 대한 분명한 표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한은 간단하게 단지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라고 합니다. 당시에 마리아는 14km 떨어진 나사렛에서 살았으므로, 그곳까지 온 것을 보면 아마도 이들은 친지 관계였을 것입니다. 5절은 이러한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남편 요셉이 결혼식에 왔다는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공관복음 기록자들도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록할 때 요셉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참조: 막 3:31 이하). 그러므로 요셉 대신 가장이 된 예수님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이 말은 우리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오늘날의 서술 방식에 따르면 전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대적 서술 방식이기 때문이며, 또한 최대한 간결하게 보도하려는 성경 특유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며칠 전에 부르심을 받았는데,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이미 가나로 가고 있는 도중이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스마트폰이 없는 시대에 예수님이 길 도중에 주인에게 전화하여 새롭게 얻은 제자들을 잔치에 데리고 가도 좋으냐고 물어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집에서 세례 요한이 있는 베다니로 떠나시기 전에 이미 초대를 받으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40일 광야에서 금식을 하신 후에 나사렛에 돌아가셔서 일어난 모든 일을 어머니에게 알려주셨다. 자기가 이제 집안을 책임지는 가장의 신분을 벗고 앞으로는 메시아로서 공적으로 사역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어머니의 이해가 필요했다. 더욱이 어머니는 예수님의 탄생 비밀과 그분이 메시아 사역을 위해 탄생하신 분임을 알고 계신다. 예수님이 다시 세례 요한에게 가서 공개적으로 그의 증거를 받는 것을 통해 제자를 모으려고 하신다는 계획을 밝히셨을 때, 마리아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주지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통해 몇 명의 제자들을 모으자마자 바로 가나를 향해 떠나셨다. 따라서 2절에서 제자들도 초청받았다고 한 것은, 당시 유대인의 랍비와 제자들의 관계는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랍비가 몇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잔칫집에 가는 것은 오히려 잔치를 빛나게 하므로 당연히 허용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혹은 마리아가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오신다는 것을 짐작하고 주인에게 미리 허락을 받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하필이면 (먹고 마시는) 결혼식 하객이 되셨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1) 유대인에게 결혼식은 종교적인 성격이 있다. 결혼식에 참여하는 것은 신앙적인 의무에 속했다. 이들은 그만큼 혼인을 귀중하게 여겼다. 2) 예수님은 일주일간 계속 머무신 것이 아니라 중간에 떠나셨을 것이다. 3) 예수님은 자기 의무를 피하지 않으셨다. 벵엘이 말했듯이, 그분은 사회생활을 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거룩하게 하셨다. 4) 예수님은 무엇보다 결혼식을 메시아 시대의 상징으로 보셨으며, 이것을 메시아 시대가 왔다는 상징으로 사용하고자 하셨다.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큰일입니다. 이것은 잔치의 기분을 망치는 것으로서 신랑집 체면이 깎이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가까운 친척이므로 이 사실을 빨리 알아차리고(참조: 2:10), 즉시 예수님께 고했습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이 큰 문제를 알려준 것은 당연하고도 좋은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가장으로서 마리아가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알림에는 이적을 일으켜 결혼식을 이러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은밀한 청원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적을 일으켜 달라고 요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난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겸손하게 그녀의 바램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응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냉정했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표현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입니다(삿 11:12; 삼하 16:10; 19:23; 왕상 17:18…). „여자여“라는 말은 무시하는 말투가 아닙니다(참조: 요 19:26; 20:13 이하). 그러나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어머니 이름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거리감을 둔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렇게 냉정한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이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하나님의 사역에 간섭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가 그리스도의 때를 결정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리스도의 때는 그분이 이적을 행하실 때입니다. 그분은 메시아로서 공생애에 들어오셨지만, 아직은 공개적으로 이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앞으로 많은 이적을 통해 자기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는 아버지께서 정하실 일입니다. 마리아가 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 이적을 행하시는 일과 그리스도의 때(“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를 알려면 좀 더 깊이 탐구해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혹은 집에서 가사를 돕고자 이적을 행하신 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위경에는 예수님이 어릴 때에 이적을 행하셨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신 것은 공생애에 들어와서 자기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고 그 사역을 수행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외에는 결코 이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적을 남용하는 사람, 자기를 위해 사용하는 자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적그리스도입니다. 이적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그런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이 드디어 메시아로 세례를 받으시셨다는 것을 듣고, 또한 그 사역을 시작하면서 6명의 제자를 모아 결혼식에 참석한 것을 보았으므로, 바로 이때가 이적을 통해 자기를 메시아로서 나타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로써 결혼식도 위기를 벗어납니다. 인간적으로 충분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마리아가 하나님의 때(예수님이 이적을 통해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나타내는 때)를 결정하려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예수님이 포도주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과 메시아로서의 자기 계시를 어떻게 연관지었을까요? 이 두 사이는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요? 우선 우리는 마리아가 성경에 대단히 밝은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의 성경 이해는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눅 1:46-55의 마리아의 찬양시 내용을 생각할 때, 우리는 13세 정도의 소녀가 구약에 그렇게 깊은 이해를 가졌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제 그녀는 거의 50세가 되었는데, 그간 자기 아들 메시아에 관해 성경 연구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모두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메시아와 포도주 관계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포도주“는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입니다(창 14:18; 왕상 5:5; 시 80:9,15; 사 5:1 이하; 55:1; 렘 31:5; 32:15). 포도주는 또한 메시아 구원 시대가 왔다는 표적이기도 합니다(창 49:11-12; 사 25:6; 호 2:22; 욜 2:19 이하; 4:18; 암 9:13-14; 슥 8:12; 마 26:29; 눅 10:34).
예를 들어 사 25:6에서 마지막 날(메시아의 날)에 있을 성대한 기쁨의 만찬에 대해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이 구절이 가나의 이적 사건과 매우 비슷하지 않습니까? 창 49:11에서도 메시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이러한 메시아 예언을 아는 마리아가 예수님이 포도주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하객들에게 자신을 메시아로 밝히실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좋은 것이지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이 일하실 때를 자기가 결정하려고 한 것은 마리아의 잘못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자기 생각대로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로부터 받아서 하시며, 항상 아버지의 손짓을 기다리십니다. 그분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십니다. 이적 하나라도 자기 뜻대로 일으키시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이적을 통해 사람을 고친다고 하는 사기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마리아는 그런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 사역에 간섭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바로 이러한 정황을 나타냅니다. 올바른 일일지라도 잘못된 때에 했다면, 이것은 올바른 시간에 잘못된 것을 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저촉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일의 시간과 때를 정하십니다. 이것은 늦어도 다니엘부터는(단 2:21; 7:12,25; 8:13-14; 9:24 이하; 12:7,11-12) 성경 진리에 속합니다(참조: 왕상 11:12; 시 31:16; 사 39:6; 암 9:13; 미 5:2; 합 2:3; 마 24:36; 막 1:15; 눅 22:53; 행 1:7; 갈 4:4; 살전 5:1; 계 3:3).
단 2:21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단 8:13-14 “내가 들은즉 한 거룩한 이가 말하더니 다른 거룩한 이가 그 말하는 이에게 묻되 환상에 나타난 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준 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하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단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시간과 때가 특히 중요하므로 이 말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그리스어로 hora라고 하는 예수님의 때는 원래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한 그분 사역의 완성을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의미합니다(요 7:30; 8:20; 12:23,27; 17:1). 그러나 이곳에서는(2:4)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지만, 메시아께서 행하시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의미합니다(7:6,8; 11:9에서도 같다). 예수님은 지금 이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고 하십니다. 즉, 메시아께서 첫 이적을 일으키시는 구속사적 사건의 때는 하나님이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때를 마리아가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호라 외에 적절한 시기를 의미하는 카이로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를 기다리지 않으므로 예수님을 재촉합니다. 이러한 자기 형제들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 때(카이로스)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요 7:6). 불신적인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으므로 항상 자기가 때를 결정합니다.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시간을 너무 이른 시간으로 측정해서 일어난 피해가 많이 있습니다.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측정한 것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때른 정한 것입니다: 제7안식교, 여호와증인, 신사도 교회 등.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니다. 그분의 삶의 모든 순간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화를 다음과 같이 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는 메시아로서의 사명이 있다. 나는 어머니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해야 한다. 예수님의 이러한 구분과 어머니와의 간격은, 예수님을 낳고 기른 어머니로서 큰 아픔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 이제부터 예수는 내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나를 떠나 메시아로서 살아야 한다!” 마리아는 이렇게 분명하게 자기 아들로서, 집안을 대표하는 가장으로서의 예수를 포기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녀는 그 순간 예수님이 12살 때의 일을 기억했을는지 모릅니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눅 2:48-49)
따라서 우리는 마리아가 4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5절의 비밀스러운 마리아의 태도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이러한 마리아의 태도는 깊은 순종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얼핏 본다면 마리아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시지 않았을 것이고 4절 말씀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겸손한 순종의 표시이고 하나님이 그녀의 순종을 온전히 받아주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포기될 때에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좀 더 생각해본다면, 하나님은 이적을 일으키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이적이 일어난 것은 마리아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마리아가 먼저 말을 꺼낸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마리아가 순종의 사람이라는 것은 가브리엘의 잉태 고지에서 나타납니다. 그가 마리아를 방문하여 잉태한다는 고지를 하자 그녀는 너무나 놀랐지만,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처녀로서 잉태하는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 1:38).
5절에서 왜 하인들이 마리아에게 왔는지, 마리아가 무슨 의미로 하인들에게 말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요한은 그런 것을 설명하는 데에 관심을 두지 않고, 단지 매우 간결하게 마리아가 종들에게 예수님께 복종하라는 지시하는 것만 보도합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태도에 조금도 상처를 받지 않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긴다는 표시입니다.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도록 억지를 쓴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마리아는 가장 순종적이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모범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배웠습니다. 이것은 때와 순종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절도, 미움, 음란, 욕심과 같이 분명히 드러나는 죄가 아니므로 우리는 때의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결정하는 것도 분명히 죄며, 이것은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 아무리 선하게 보일지라도 때가 맞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 계획대로 일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때를 묻지 않고 자기가 그 때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때를 묻고 분명한 하나님의 손짓이 보일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었을 때 일을 하십니다. 때를 기다리는 것이 인내심이 없는 우리에게 가장 큰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인간이 일하기를 그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볼 때에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힘을 빌리지 않으시고 홀로 일하시고 홀로 영광을 받습니다. 마리아와 같은 성숙한 사람도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그녀의 진정한 성숙함은 잘못을 깨달았을 때에 바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가 규정하는 데에 익숙한 현대인 중에서 이러한 들리지도 않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