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묵상 글 >
교종 프란치스코의 새해 결심
1. 뒷담화하지 않는다.
2. 음식을 남기지 않는다.
3. 다른 이들을 위해 시간을 낸다.
4. '보다 검소한' 소비를 한다.
5. 가난한 이들과 '몸을 부딪히며' 만난다.
6. 다른 이들을 판단하길 중단한다.
7.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갖는 이들의 친구가 된다.
8. 서약에 충실한다. 예를 들어 결혼.
9. '주님께 여쭙는 것'을 습관화한다.
10. 행복하라.
++++++++++++++++++++++++++++++++++++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자료 >
주일 미사와 고해성사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 공동 사목 방안 - 제4부
- 주교회의 2014년 춘계 정기총회 승인 -
4 ) 성경 봉독과 사제의 강론 (두 번째 단락부터 시작)
이번 전국 토론을 통해서 많은 참가자들은 풍요로운 말씀 전례를 위해서는 공동체 전체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하였습니다. 곧 말씀 선포를 위한 사제의 강론과 이를 받아들이기 위한 신자들의 준비가 가장 많이 언급되었습니다. 이번 토론을 통해서도 언급 되었듯이 한국 교회 신자들이 주일 미사 전에 성경을 봉독하는 비율은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집에서 미리 그 주일의 독서와 복음을 봉독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미사 시간 시작에 가까스로 성당에 도착하는 신자들이 많은 상황에서 미리 성경 봉독을 하고 미사 참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집에서 미리 성경을 봉독해 오지 않은 신자들을 위해 미사 전에 공동체가 함께 봉독하는 시간을 갖는 본당들도 있지만 이보다는 주중에 소공동체 모임이나 각종 신심단체 모임, 가정기도 등에서 주일 복음을 미리 읽고 묵상하도록 권고하는 것이 더욱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말씀 전례에 중요한 것은 사제의 강론일 것입니다. 이번 토론에서 확인된 것처럼 신자들이 강론을 통해 복음을 더욱 잘 알아듣도록 하려면 강론 안에서 회중에게 맞는 쉬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새로운 방법과 전달매체들이 지속적으로 고안되어야 합니다. 매번 동일한 표현과 내용이 거의 매주 계속해서 반복되는 강론,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이 똑같은 어조와 내용으로 이어지는 강론, 복음은 없고 예화만 잔뜩 늘어놓는 강론 등은 대표적인 무성의한 강론으로서 사제들의 분발을 촉구하였습니다. 강론 이전에 사제 자신이 공동체 안에서 솔선수범하고 존재 자체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의 모습, 스스로 체험한 말씀을 강론에서 보여주어야 그 강론이 힘을 얻을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강론의 본질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례헌장 35항은 강론을 사제들이 가장 성실하고 정확하게 수행해야 할 직무라고 말합니다. 동시에 그 내용은 다른 무엇에 앞서 ‘성경과 전례의 샘’으로부터 길어 올릴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계시 헌장 21항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강론의 주된 재료는 살아 있고 힘이 있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강론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르침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이하 내용은 「복음의 기쁨」, 145-158항 참조). 사제는 성령께서 준비 과정에 함께해 주시기를 청하면서 주일 독서와 복음 말씀에서 성경 구절의 핵심 메시지를 발견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론을 준비하면서 말씀이 생각과 감정 속까지 깊이 파고 들어가 사제 안에서 새로운 시각이 싹틀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곧 먼저 사제 자신이 하느님 말씀으로 깊은 감동을 받고 말씀을 일상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교황님은 강론자 스스로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일 충분한 시간을 갖지 않고, 그 말씀이 자신의 삶으로 다가와 도전하고, 그 말씀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에 불과하다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강론자들에게 교황님은 ‘거룩한 독서’를 권고하시는데, 이것은 주님이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성령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한 가지 특별한 방법입니다.
강론자는 또한 신자들의 삶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강론자는 주일 성경의 말씀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인간 상황, 특히 본당 공동체의 상황에 연결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본당 사목자로서 한 주간 동안 신자들과 어울려 살아온 흔적이 강론에 녹아들어가야 합니다. 환자 방문, 공동체의 불화와 화해, 관계들이 축적되어 말씀과 버무려집니다. 강론의 본래 준비는 여기서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사목자와 공동체의 삶입니다.
강론은 그 내용도 중요하지만 방법 역시 중요합니다. 복음화의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이 바로 복음화의 방법과 수단의 중요성입니다. 강론은 간결하고 명료하며 솔직하면서도 시기적절한 것이어야 신자들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전문적인 신학 언어나 예화들을 지양하고 신자들을 직접적으로 복음과 대면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들을 사용해야 하며, 강론 주제가 통일되고 문장의 순서가 명료하고 상호 관련이 있어서 사람들이 강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강론은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차원을 강조해야 합니다. 곧 강론을 통해 사제는 신자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적하기 보다는 더 잘 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하는 데 관심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긍정적인 강론은 언제나 희망을 주고 미래를 가리키고 부정의 감옥에 갇히지 않도록 합니다. 주님의 미사가 비전과 희망으로 열려야지 불평, 탄식, 비판, 비난으로 얼룩져서는 안 됩니다. 이른바 사회 현안과 관련한 미사에서도 우리는 현실을 다만 비판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들 상황에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기를 원하시는지 그 빛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 3월호에 제 5부 연재 -
+++++++++++++++++++++++++++++++++
< FB 영적지도신부 훈화 >
성 도미니꼬 사비오(1842-1857년)
글 : 윤 클레멘트 (양호) 신부님
<전주교구 소속 지도신부>
- 성인과 영성 -
순결과 무죄함의 표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고 태어났다.
그가 네 살이 되었을 때, 그가 보이지 않자 어머니가 찾았을 때, 그는 집안 어느 구석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손을 단정히 모은 채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기도하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는 다섯 살 때에 미사복사를 했고, 일곱 살 때에는 첫 영성체를 했다.
그는 첫 영성체를 하던 날, 자신의 노트에 이렇게 썼다.
첫째, 나는 고백성사와 영성체를 자주 하겠다.
둘째, 나는 축일을 거룩하게 지내겠다.
셋째, 나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가장 좋은 친구로 삼겠다.
넷째, 나는 죄보다는 죽음을 택하겠다.
열 두 살이 되었을 때, 그는 돈 보스꼬(후에 성인이 된 살레시오회 창설자)가 운영하던 오라토리오(Oratory) 학교에 들어갔다.
오라토리오 학교에 들어오는 날 그가 돈 보스꼬에게 질문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돈 보스꼬가 대답했다.
“너는 좋은 재료란다.” 그러자 도미니꼬가 말했다
“신부님은 좋은 재봉사이십니다. 저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 좋은 옷을 지어주세요 ...”
그는 돈 보스꼬의 오라토리오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 참으로 특별한 열심과 사랑으로 살았다.
그는 모든 친구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죄를 짓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기도와 노력을 다했다.
오라토리오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 그와 친구들과의 사이에 아주 특별한 두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 무엇인가를 보면서 서로들 재미있게 웃고 있었다.
그가 가서 보니, 그것은 성인잡지 그림이었다.
그는 즉시 그 잡지의 그림을 찢으면서 말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좋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라고 눈을 주셨는데, 너희들은 부끄럽지도 않니?”
친구들은 곧 뉘우쳤다.
한번은 두 친구가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서로의 손에는 돌들을 들고 있었다.
그는 곧 그들 사이로 달려가서 십자가를 꺼내어들고 말했다.
“이 십자가를 보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죄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우리를 용서하셨다.
계속 싸우려면 먼저 그 돌들로 나를 치고 싸우라.”
그 친구들은 곧 사과했다.
그는 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심한 병을 만나 집으로 갔다. 그는 마지막으로 성체를 모시고 두려움 없이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준비했다.
임종 직전에 그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저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있어요.”
그의 얼굴은 미소를 띤 채 행복한 모습이었다.
성 비오 10세는 그를 가리켜 말했다.
“한 십대소년이던 도미니꼬 사비오는 자신의 짧은 생애를 다하면서 죽을 때까지, 세례 때의 순결과 무죄함을 위해 용기 있게 싸웠습니다.”
- 신부님의 ‘영성의 물가’ 中에서 발췌 -
+++++++++++++++++++++++++++++++++++++++++++++++++++++++++++++++++++
연중 제5주일
2017. 2. 5
마태오 5, 13~16
♠ 복음 공부 - 세상의 소금과 빛의 은유
<안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 있는 사람, 참 행복을 사는 비결을 (5.3-12)말씀하신 후, ‘너희는’ 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제자들, 사도, 복음 선포자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고 모욕 받으며 비난 소리를 듣는 이들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신다. 이처럼 주님의 제자는 어떤 사람인지 그 정체성을 소금과 빛으로 빗대는 은유를 대구법으로 나열한 형태는 마태오 복음에만 나온다.
* 13~14절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소금은 제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음식을 보호하고 맛을 내기 위해 존재하며 일상생활에서 필수품이 듯 제자들도 이 세상에서 꼭 있어야 할 존재이며, 음식에 대한 역할을 너희들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제 맛을 잃으면”이 말은 어리석게 사는 사람들은 버려지고 (불속에 던져지고(3,10), 감옥에 갇히고(5.25)) 짓밟힐 것이라는 경고한다.
* 15절 : 세상의 빛이다 - “세상의 빛”은 유다인들이 이스라엘이나 예루살렘, 율법이나 율법교사, 스승, 하느님의 종, 의로운 사람을 가리킬 때 두루 적용했던 말이다. 예수님도 스스로 빛이며 등불로서 당신을 내세우시며, 산 위에 있는 도시를 감추는 것은 불가능 하듯 제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을 감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이다. 교부들은 함지와 등불을 우리 삶과 연관시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불을 꺼버리는 ‘함지’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을 지니지 못한 속된 사람들 또는 악덕을 뜻하는 반면에 ‘등경’은 생명의 말씀을 지니고 있는 공동체(교회)를 나타내며, ‘등불은 덕을 뜻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마태오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단칸 방 하나에서 생활했던 팔레스티나 농촌을 배경으로 등 하나로 집안 전체를 환히 비추듯, 세상의 빛으로 예수님의 공동체는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하고, 그들의 행실이 빛일 때 집안에 있는 모두를 비추고 온 세상을 향해 선교하는 마태오의 통찰력이 엿보인다.
* 16절 : “착한 행동”은 유다교에서 자비와 자선의 선행을 뜻하며, 후대에는 앞에서 언급한 참 행복 선언(5.3-12)과 뒤이어 제시되는 5.21-48과 결부되어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행동 규범을 설정하는데 사용하였다.
♠ 복음 요약 : 소금과 빛의 은유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부패를 막고 세상의 어두움을 비추는 역할은 앞의 산상설교의 가르침대로 살 때 가능하다. 참된 행복선언에 이어 “착한행실”로 세상에 그 사람이 들어감으로써 더불어 살아 행복을 전해야 할 선교와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이 멀리서도 보이듯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도 예수님처럼 모법적인 행동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시대적 요구에 응답할 사명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지 못할 때 인류에게 버려지고 짓밟힐 것이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심판이 될 것임을 일깨운다.
♠ 대화 방향 : 예수님께서는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의 역할이 무엇에 비유할 수 있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삶의 목적에 다가가기 위하여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누어 보시오.
♠ 참고 문헌 : ▪ 마태오 복음 주해 (이우식 / 바오로딸출판사 한남성서연구소 공동계획 )
+++++++++++++++++++++++++++++++++++++++++++++++++++++++++++++++++++++++
연중 제6주일
2017. 2. 12
마태오 5, 17~37
♠ 복음 공부 - 예수님과 율법 (신앙생활)
* 17~20절 : 율법에 대한 가르침 - 기독교 역사상 가장 주목받았고 중요한 역할을 했던 구절 중의 하나다. 그 당시 율법 해석에 비추어 오해될 수 있음을 사전에 차단하시는 동시에 율법의 뜻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명시하신다. 히브리성경(구약)은 율법서와 예언서 전체를 지칭하는데, 마태오는 종종 율법만 언급하기도 한다(18절). 유대인들이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하느님이 주신 계명과 제의를 준수해야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보다 더 옳게 살아야 하며, 예언서에서 강조하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풀이하면서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율법해석에 더욱 더 충실할 것을 제자들에게 요청하신다. 하느님의 뜻은 산상설교 전체이지만, 5.21-48에서 여섯 가지 율법을 제시하면서 바리사이들처럼 다른 사람에게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직접 율법대로 살아가라는 본을 보여줌으로써 질적으로 능가하기를 요청한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한 자 한 획에 집착하시지 않고, 하느님의 원래 목적과 뜻에 못 미치는 율법의 경우는 보충 심화하시고,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경우는 폐기하심으로 율법을 완성시키시며 “내가 진실로 말한다”(마태오 복음에 30번 이상 사용)라는 무척 장엄하게 나타내는 장엄 어구는 이제부터 당신이 하신 말씀이 모두 이루어질 것임을 확고하는 전권의식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넘어 법정신인 하느님의 뜻을 반영하는 성경의 권위는 사라지지 않음을 강조한다.
* 21~37절 : 율법의 완성- 여기서 6가지 대조가 나온다. 문단마다 “...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는 구절로 시작한다. 도덕적 규범, 바른 인간이 되는데 지켜야 할 도리를 명시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곧 이어서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받으신다.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자비에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자력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겠다는 사람이 바르고 의롭고 정직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함을 예수님께서 비교적 자세히 가르침을 내리신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21-26절). 라삐들은 율법 해석의 전통을 중요시하는 분위기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는 표현으로 당신의 의견을 권위 있게 제시하는 화법을 쓴다. “성을 내는 것은”살인으로 가는 첫 단계이기에 제어할 필요가 있다. 분노는 영혼이 굳은 병으로서 자비심으로 그 마음이 치유되지 못한다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유 있는 분노, 의로움을 지향하는 분노는 오히려 해야 정당하다.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자기 걱정과 멸시받을까 하는 두려움과 자기 체면에 급급하였기 때문이다. 형제를 무시하고 욕을 하는 것조차 살인에 이른다고 하신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27-30절) 십계명의 9번째 계명을 결부시켜 심화시키신다. 마음이 욕정에서 야기되는 결과를 엄중히 경고한다. 분노가 살인의 어미 듯이 음욕은 불륜의 어미다. 눈은 욕망을 일으키는 통로이고, 손은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위의 두 율법은 십계명을 심화시키고 있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옥에 가지 않을 각오로 지키는데 혼신을 다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31-32절) 예수님께서는 이혼과 소박을 폐기시킨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33-37절) 인간의 마음이 표리부동을 떨쳐버리지 못할 때에, 자기한테 없는 것을 남 앞에 보이려할 때, 즉 거짓에 찬 생활을 고집할 때에 맹세는 거짓 맹세다. 다윗은 자기의 진면목이 사람들에게 폭로가 될까봐 온갖 술수를 다 부렸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거짓말을 그만 두지 못한다면 사람들 앞에서 계속 자기를 숨기고 가짜를 보게 한다면 거짓 맹세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또한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도 안 된다.
♠ 복음 요약과 대화 방향 (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은 1~2개 골라 기도한 후, 나누어 보시오.)
예수님이 율법과 예언서(구약)를 어떻게 완성했는지에 대해 영성적으로 접근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른 정통 교사들이 하는 것처럼 율법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존의 말씀을 새롭게 풀이하는 해석을 6가지에 걸쳐서 제시한다. 십계명 2가지, 일반규정 3에서 6까지, 규정에서 유추한 내용을 바탕으로 축소 또는 파기하신다. 여기서는 십계명 2과 규정 3, 4를 다룬다. 율법은 신앙생활을 뜻한다. 율법의 완성이란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율법의 뿌리가 내려가느냐가 관건이다. 곧 율법의 핵심인 하느님의 뜻에 다다르는 것이다. ①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공동체 안에서 사는 법을 익히려 노력한다. 그러나 때로는 나를 귀찮게 하는 사람, 반감을 품은 사람과 함께 잘 사는 법을 모른다. 과연 나는 기도생활과 공동체(FB) 안에서 무엇을 열망하는가? ② 신앙이란 본래 하느님 자신을 내 안에 뿌리 내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마음 깊이 내릴 때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 - 나에게 원망을 품고 나를 험담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화해를 청하거나 기도해 준 적이 있는가? ③ 미움이나 증오로 대립된 사람에게 새롭게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경험이 있는지? ④ 손으로 죄 지었을 때 부끄러웠던 적이 있거나 손으로 주님의 일을 하게 되어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적이 있는지? 이럴 때 기도하는 자세로 임하며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는 참회의 기도를 드려야겠지요.
♠ 참고 문헌 : ▪ 마태오 복음 주석 (이우식 / 바오로의딸 출판사, 한남성서연구소 공동계획)
▪ 마태오 복음 묵상( C.M 마르띠니 지음 / 성염 옮김 )
+++++++++++++++++++++++++++++++++++++++++++++++++++++++++++++++++++++++
연중 제7주일
2017. 2. 19
마태오 5, 38~48
♠ 복음 공부 – 원수를 사랑하여라...!
* 38~40절 : 채권자가 소송을 제기해서 채무자의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마저 주라는 말씀이다. “이웃에게서 겉옷을 담보를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극빈자 보호법이 있어 법적으로 겉옷을 빼앗을 수 없었다. 빈자의 겉옷은 밤에 이불 구실을 했다. 병행문 루카6/29에서는 채권자에게 속옷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고 강도에게 겉옷을 빼앗기는 상황을 전제한다. “당신의 겉옷을 빼앗는 이에게는 속옷마저 거절하지 마시오.”
* 41절 : 로마 군인들이나 관리들이 짐꾼이나 길잡이로 부리려고 유대인들을 강제로 징발한 상황을 전제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키레네 사람 시몬을 보라.
* 42~46절 : 46-47절에서는 직업상의 죄인들인 세관원들과 인종상의 죄인들인 이방인들을 몹시 경멸한다. 본디 유대교에서 직업, 인종 차별의 이념을 발전시켰다. 불행하게도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일찍이 직업, 인종 차별 이념을 수용하여 저런 발설을 했고, 그 발설이 먼저 어록에 기록되고, 마침내 5장 46~47절에 들어 왔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직업, 인종 차별 이념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종종 이방인들을 받아들이셨고 세관원들 및 죄인들과는 친구로 지냈다.
* 47~48절 : 병행문 루카 6/36에서는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어지신 대로 여러분도 어질게 되시오.”라 하는데 이는 어록의 형태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여기의 하느님 모방 사상은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라.”(레위 19/2의 영향으로 생겨났을 것이다. 마태오는 어록의 말씀을 옮겨 쓰면서 ‘어진’ 형용사 대신 ‘완전한’ 형용사를 사용하여 개작 했다. 여기서 ‘완전하다’는 것은 덕을 많이 닦아 완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뜻하지 않고, 여섯 가지 대당명제에 드러나는 예수님의 율법 해석, 여섯 가지를 지킬 때 특히 원수 증오 대신 원수 사랑을 실천할 때 비로소 완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 하느님께서 완전하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느님은 예수님의 여섯 가지 율법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시기 때문에 완전하시다. 특히 원수사랑 대당명제에서 보듯이 사람 차별을 하지 않으시고 골고루 은혜를 베푸시는 까닭에 완전하시다.
♠ 복음 요약 :
㉠ 폭력을 포기하여라...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동태복수법 명제를 예수께서는 폐기하고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마시오.’라는 반명제를 내세운다. 여기 명제와 반명제를 합친 대당명제는 마태오 만들어 붙인가필이다. 그 까닭은 루카 6/29-30에서 보다시피 어록에서는 대당명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당명제에 이어 나오는 구체적인 사례들은 대체로 어록에서 따온 것이다. 구체적 사례들을 눈여겨보면 악한 자에게 맞서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요구한 것보다 훨씬 더 들어준다. 악을 선으로 갚는 식이다. 구체적 사례들은 예수께서 본디 따로따로 발설한 것인데 아마도 어록 작자가 그것을 한 곳에 모았을 것이다.
㉡ 원수를 사랑하여라... 여기에는 적어도 세 가지 단절어가 모여 있으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단절어,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아무런 보수가 없다는 단절어, 하느님을 본받으라는 단절어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나의 몸은 둘로 갈라져 이원상대적(二元相對的)인 것이 됩니다... 만약 당신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원수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다사로운 身心’이내 몸에 육박해 와서 온 몸을 부추겨 똑같이 원수를 사랑하는 길로 몰아세우고 마침내 다사로운 생명이 넘치어 원수를 사랑하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때 내 몸은 살아 있지만 내 육체가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다사로운 심심’이 참으로 내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 대화 방향 :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폭력을 폭력으로 갚지 말고 폭력에 자신을 내맡기는 사랑으로 그 폭력을 이겨내라고 말씀하시며, 그러한 사랑에는 대상의 구별이 없다는 것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경험한 폭력과 분노, 그리고 내가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원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 참고 문헌 : ▪ 보득솔 <가톨릭 청년성서모임> ▪ 200주년 성경주해서
+++++++++++++++++++++++++++++++++++++++++++++++++++++++++++++++++++++++++
연중 제8주일
2017. 2. 26
마태오 6, 24~34
♠ 복음 공부
* 24~26절 : 하늘의 새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두지도 않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 너희들은 새들보다도 훨씬 귀한데 하느님께서 먹여 주시지 않겠느냐?
* 27절 : 걱정하는 사람은 자기 수명을 줄인다는 과학적 보고가 있다.
* 28~33절 :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들꽃 하나보다도 못한데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훨씬 더 잘 입혀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요약된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라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신다.
* 34절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결론적으로 말씀해주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마라.
우리에게 축복받는 길을 가르쳐 주신다. 가장 큰 축복은 걱정 없는 평안함이다. 그리고 그 평안함은 삶에서 우러나오게 된다. 겸손과 친절이 몸에 배게 된다.
♠ 복음 요약 :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해롭기 때문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들이라고 표현하신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세상이 줄 수도 없는 평화와 축복을 주신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삶을 살게 되면 자연히 느끼고 이해하게 된다. 겨자씨가 크게 자라서 새들이 날아와 앉는 나무가 되듯이 그저 우리는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그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의 삶을 살다 보면 남들이 보기에 걱정스럽던 모든 일들이 사라지고 축복으로 바뀌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최근 은퇴하신 정진석 추기경은 그가 쓴 최근 책에서 “ 하느님이 주신 삶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고 이를 받들며 살수록 이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도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다." 최근 읽고 있는 토마스머튼 책에서 감동적인 말을 소개한다. “우리가 하느님 그분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모든 것에서 기쁨과 자연스러움을 발견한다는 것. 왜냐하면 모든 것은 선물이자 은총이기 때문이다.”
♠ 대화 방향 : 삶 속에서 때로는 우리는 걱정하지 않고 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주님께 신뢰를 두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따르다 보면, 어느새 걱정했던 것들은 다 사라지고 축복으로 바뀌어져 있음을 체험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의 옆에는 항상 성모님께서 항상 우리를 도와주신다.
♠ 참고 문헌 : ▪ 세상 한 복판에서 그분과 함께 <송봉모>
▪ 연합뉴스 : 정진석 추기경이 말하는 ‘참된 행복의 길’
▪ 매일의 독서로 읽는 토마스 머튼, 프란치스코 출판사.
++++++++++++++++++++++++++++++++++++++++++++++++++++++
< 수녀님의 알로꾸시오 >
가난의 영성
김 데레시아 (성자) 수녀님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종님께서 한국에 방문하셨을 때 “가난한 교회가 되자. 가난한 이들에게서 배우는 교회가 되자.”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고 FB의 아나윔 정신이 교종님의 말씀에서 가난한 이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점이 있을까?
말이 가난이지 가난이 우리의 마음과 몸을 처참하게 망가뜨리는 현실은 가혹하게 느껴지지만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세례를 자기가 스스로 줄 수 없듯,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지요.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지 않으면 경쟁 사회에서 힘을 모우지 않으면 살아나갈 수 없는 실존을 깨닫고, 하느님 없이는 혼자 숨을 쉴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이웃의 도움이 없으면 자신들의 바람, 요구들을 충족시킬 수 없기에 절망과 밑바닥까지의 자신을 보이며 구걸하는 심정을 부자들은 모릅니다. 그들은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습니다.(루카 6.24) 그래서 가난의 영성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합니다.
지난 날을 돌아보면 가장 기쁨을 준 것도 사람이고, 가장 아픔을 준 것도 결국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기쁨을 준 사람도 아픔을 가져다 준 사람도 나 스스로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고, 따지고 보면 상대방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기대치의 욕심에서 기쁨이나 아픔이 비롯됨을 알게 되지요. 그래서 가난을 내면의 가난으로 이해하여 영으로 가난한 자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은 결국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즉 “하느님의 숨과 기운을 구걸하는 사람들”로 이들은 가난한 이들의 고통과 소외, 절박한 심리적 상태가 부각될 것입니다. 한편 밀양 할매들, 강정마을의 활동가들 위안부 할머니들, 세월호의 유족들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5.6)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난의 영성은 ‘연대하고 소통하는 사랑’의 가장 중요한 표현입니다.
한국 교회가 박해를 피해 교우촌을 이루고 흉년에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도 서로 나누어 굶주려 죽는 사람이 없었던 것을 이상히 보고 군졸들이 들이닥쳤다는 사례가 있듯이, 가난한 교우촌에는 서로에 대한 관심과 선한 의미를 찾아 살아가는 연대가 있습니다. 이들의 시선은 가난한 이웃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지지와 위로하는 더 나아가 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늘 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잘나고 부자가 되고 권력을 갖고자 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끼리는 대화와 소통이 중요합니다. 이웃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이웃의 사정을 관심을 가지고 살피고 이해하는 가운데 위로의 말 한마디, 따뜻한 미소가 내가 가진 것이 남들보다 더 가졌다는 긍지보다 나누는 기쁨을 알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방한했을 때 온화한 미소, 차량에서 내려 유민이 아빠를 만나시던 모습에서 연대하고 소통하는 가난한 모습을 느끼게 합니다. 금년 한 해 FB회원들은 교종님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 미소를 건네는 따뜻한 마음, 상대방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 사랑과 자비심의 폭을 넓혀 이웃의 어려움에 다가가는 가난한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 전국봉사자 월례회의 스케치 >
눈이 휘날리는 서울 당산동에서...
안산 원곡동 세르브스 팀 FB
서기보 권 토마 (순)
2017년 첫해 일월 21일 당산동본당에서 11명 (서울4,전주4 안산2,수녀님1)외 몇 분이 참석했다.
아폴로니아자매님의 2월 축일 축하 속에서 11:00시에 당산동성당에서 묵주기도로 시작했다. ‘빛의 신비’로 각지구별로 한단씩 지향을 두고 돌아가면서 바쳤다.
그리고 어느 때처럼 필립피 4장4절을 율동과 함께 합송했다.
금주의 복음 마태오 4,12~23 을 봉독했다. 잠시 묵상하고, 5명 정도 개인묵상을 나눴다. 처음부터 누구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자녀와 가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데레시아(소화데레사) 수녀님은 마치 이를 정리하듯 내려가면서 말씀하셨다.
‘가난(아나윔)은 연대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라는 교종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가 되자.’
가난은 우리에게는 심적 부담이 되는데 이를 통해 배울 점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깨우쳐주는 것이 많다. 가난한 이는 혼자 살수가 없다.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서 위로를 받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자신의 자존심을 무릅쓰고 이웃에 의탁할 수밖에 없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 하느님숨에 굶주리는 이는 하느님숨을 쉴 수 없음을 의미하고, 하느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한다. 이를 찾아서 산다는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자(마태복음). 이웃에 동의가 있어야 갈증을 달랠 수가 있다. 영적으로 가난하지 못하는자는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거나 판단한다.
죄인을 정죄하는 사람들. 누군가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 부자는 이를 모른다. 가난한 사람은 서로 연대를 한다.
순교자를 낸 박해시절에 그들끼리 식별 방법 중 하나는 흉년에도 굶어 죽지 않고 사는 마을, 즉 교우촌(연대-관계)을 찾아내는 것이다. 어떻게 연대해야 하여야 하는가?
세월호에 가까이에 가서 손잡아주시는 교종, 어린이에게 마음을 보여 마음을 보여주셨다.
교종 당신이 가난한 분이시다.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 다가서서 가까이에 가서 애기해주고 위로해주는 사람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 강조하셨다. 그것에 가까이다가서는 사람도 가난하고 그것이 복음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교종은 말하셨다.
나에게 다가오는 가난을 피하지 않고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는 자존심이 없고 서로 위로하여야 한다. 이런 코이노니아가 되어야 한다.
묵상 중에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삼종기도에 따라서 교대로 합송했다.
당산동팀에서 준비한 성찬인 중식(두 효주아녜스 자매님이 준비한 밥과 국, 그리고 주문한 쟁반짜장)을 김효주아녜스 자매님의 사무실에서 먹었다.
식후 한 잔의 커피 여유를 만끽한 우리는 전국조정봉사자의 년간 활동실적 및 계획등 전주교구에서 준비한 자료소개를 본다.
3월초에 있을 천호성지의 묵상회 일정표 소개를 하셨다.
이들 모두를 빔프로젝터를 통해서 자세히 들어다 보았다.
묵상회 중에 각 팀 또는 각 지역 별로 성극을 하게 되는데, 성극 주제인 ‘예수님의 유혹 사화’ 를 미리 제시해 주셨다. 그 날 주일복음의 핵심주제인데,
묵상회 전에 각 팀, 각 지역 별로 복음을 미리 묵상하고 준비를 해서 성극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강조하셨다.
그리고 이달의 안건인 ‘FB 창립 50주년 준비’에 관한 브리핑을 준비위원장이 진행했다.
각 분과(기획분과, 교육분과, 조직분과, 50년사편찬분과, 미디어흥보분과)에 필요한 인원추천을 받았다. 그 이후 담당자를 정하는 문제 등은 위원장이 차후 보고하기로 하였다.
다음 월례회의는 가능하다면 서울 이문동에서 2월11일(토) 11시에 개최하기로 하였다.
성당 밖에는 눈이 조금 날리고 있었고, 전주에서 오신 분은 서둘러 돌아가셨다.
데레시아 수녀님, 그리고 수원의 미카엘 형제님과 필자는 스테파노 형제님의 차를 타고 귀가했다.
+++++++++++++++++++++++++++++++++++++++++++++++++++++++++++++++++++++++
< 회원 기고 >
아버지의 정원
전주 효자4동성당 파티마 소화 데레사 팀 FB
김 세실리아 (양숙)
30여 분 남짓 나의 출퇴근길은 15개 이상의 신호등을 거쳐야 하는 도심을 통과하는데 언제나 2백여 미터의 빽빽한 자동차 행렬로 으레 신호 2개 정도는 건너뛰어야 하는 서곡 4거리를 지나야 한다.
30년이 넘는 직장생활이지만 긴장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조금 늦게 출발한 날이면 더욱 여유가 없다.
그나마 북적이는 서곡 다리만 건너면 나타나는 초록색 가로수 길은 빠른 작전이 필요한 자동차 숲을 탈출하여 한숨 고르게 하는 보너스 코스다.
그 길은 청량한 분위기가 있어 순간적 여유를 선물로 내어 준다,
운전 중 차장 밖으로 비치는 인도 불럭 양쪽으로 계절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가로수가 쭉 뻗은 그 길은 누구라도 걸어 나오면 모두 멋져 보인다.
몇 년 전 남원으로 6년간이나 자차로 출퇴근할 때가 있었는데 지인들이 나에게 얼마나 고생하느냐고 위로의 말들을 건넬 때마다 “음, 괜찮아 주변 경치가 좋잖아”라고 대답하곤 했었다.
주말에 가끔씩 모악산에 오르면 코끝에 스며오는 솔향기가 있어 머리가 맑아진다.
재잘 재잘 속살거리는 해맑은 계곡물의 옛이야기에 집중하며 야자 매트 곱게 깔린 폭신한 대원사 길을 오르는 것도 좋고 박물관 뒤편 조약돌 지압 길도 좋지만 소나무 향기 찐한 고즈넉한 마고암 오르는 소나무 숲길은 더욱 좋다.
이따금 집 옆 조그만 공원을 산책하노라면 그곳에 흐르는 바람소리, 풀 냄새, 새소리 등 그들의 선량성에 전염되고 만다.
이렇듯 주변 환경들은 계절 따라 달라지는 맛과 향기가 있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나는 덤으로 행복을 얻는다.
어느 날 잠 못 이루게 하던 고민거리도 눈부신 아침 햇살과 마주하면 “아! 그렇게 하면 되잖아” 스스로 똑똑한 해결사가 되어버린다.
이 모두 그분이 주시는 선물이다.
누구에게나 거저 주시는 아버지의 은총이다.
빡빡한 일상(직장업무)에서 평가, 판단, 의무, 생색내기, 미움 등으로 쪼이고 설레발치고 악바리 부리다가도 어쩌다 시선이 유리창 너머에 꽂히면 한 폭의 총천연색 수채화를 발견하게 된다.
좀 닮으렴 ...들려온다. 아! 아버지
어디에 있든지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발견하는 순간들이다.
못되고 말 안 듣는 딸이지만 ” 당신 안에 머물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절로 나온다.
어느 해 화창한 봄날 항상 붙어 다니는 삼총사(친구) 그리고 수녀 선생님과 함께 나들이를 갔다가 드넓게 펼쳐진 샛노란 유채꽃밭을 만나게 된다.
바로 그때 “아! 좋아, 우리 아버지의 정원, 내가 올 줄 아시고 예쁘게도 가꿔놓으셨네” 동행중이던 세실리아 수녀님의 감탄사가 귓가를 스치는 순간 나는 “수녀님 고향이시군요”라고 말할 뻔하였다.
수녀님이 외치던 아버지의 정원, 와!! 기발하시다.
그 이후로 나는 세실리아 수녀님이 외치던 우리 아버지의 정원을 생각하며 자연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은 순수하고 평화롭고 따뜻한 가보다.
그래서 그 속에 있으면 편안하고 너그럽고 착해지나 보다.
나의 유년시절 우리 집은 그런 곳이었다.
울타리엔 감나무, 대추나무, 살구나무, 고염나무가 연이어 심어져 있었고 마당 끄트머리엔 긴 꽃밭이었는데 채송화, 붓꽃, 맨드라미, 봉숭아, 그라디올라스, 작약 등 예쁜 꽃들이 펴있고 꽃밭 옆엔 청포도 넝쿨 지붕 아래 평상이 놓여있어서 여름엔 맛있는 포도를 따먹을 수 있는 시원한 놀이터였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 이육사의 청포도를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내 고향집 풍경이다.
뒤 안에는 돌로 쌓은 파란 이끼 낀 우물이 있었는데 우물가에는 머루 나무가 울타리 되어 까만 머루 송이를 주렁주렁 드리우고 맞은편엔 앵두나무 두 그루가 앞다투며 아가 볼처럼 탱글 한 빨강 열매를 후하게 퍼내어주었다.
울타리 밖을 나서면 나지막한 갈참나무와 밤나무 숲이었는데 그곳은 여름엔 그네 터였고 가을이면 후드득 떨어지는 알밤을 맛있는 것으로 골라서 줍기만 하면 되는 보물창고와 같은 곳 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밤을 엄청 좋아하나 보다.
고향집 뒷동산 너머엔 복숭아 과수원이어서 여름엔 복숭아를 양껏 먹을 수 있었는데
지금도 동요 ″과수원 길‶을 부르거나 듣게 되면 고향집 그곳이 꿈처럼 생각난다.
그땐 늘 도시에 대한 동경심으로 중학생이 되기를 학수고대하였었다.
그러나 전주시에 있는 중학교 입학으로 시골집을 떠난 이후론 고향집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은 도시 개발로 고향 동네 전체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추억 속의 그리움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도 그 고향집을 생각하면 따뜻한 이야깃거리들이 수두룩하다.
세실리아 수녀님이 외치던 우리 아버지의 정원은 바로 그런 것일 거다.
그렇게 아버지의 정원은 치유의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주 성서형제회 묵상 나눔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공동체) 안에 살아계신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까‶라는 주제로 나눔을 가졌다.
눈만 들면 볼 수 있는 초록색 산야, 바람에 반짝이는 미루나무 잎 새, 늦가을 일렁이는 황금들녘, 옹기종기 귀여운 키 재기하는 야생화 무리, 어느 장애인 교회에서 조용히 봉사하는 손 길, 개인의 삶을 포기한 채 하느님께 삶 전체를 드리는 삶을 선택한 성직자에게서 하느님의 영이 운행하고 계심을 체험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들도 자연(아버지의 정원)처럼 세상 입김에 설레발치지 말고 듬직하게 살아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요즘 매스컴에 난무하는 거짓말의 입술을 닮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잘 늙어가야 하겠다. 아버지가 주시는 영원한 삶을 얻으려면... !
++++++++++++++++++++++++++++++++++++++++++++++++++++++++++++++++++++
< 코이노니아 활동 소개 >
당산동 팀‘칡 채취활동’과‘기쁜 산타봉사’를 마치고...
서울 당산동 로고스 팀 FB
남 파비올라 (은정)
+ 찬미 예수님 !
지난 해 아기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성탄절에 당산동 성서형제회는 어느 때보다 더 따뜻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매년 하는 산타봉사를 위하여 미리 경기도 가평에 가서 칡을 캐오고 칡즙을 만들어 기금 마련을 했었습니다.
소중한 기금으로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하여 작지만 두유와 김을 정성껏 준비하였습니다.
25일에 시간이 되는 성서형제회 회원들과 차량봉사를 해주실 성당 교우분들이 모여서 조를 나누어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한남기 베드로 형제님이 산타복장을 너무 멋지게 하셔서 진짜 산타가 나타난 줄 알았답니다.
기쁜 마음으로 할머니, 할아버지댁을 방문하였는데, 다들 너무 반겨주시고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함께 성탄성가를 부르는데 너무 즐겁게 따라 부르시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특히 '예수님 어서오세요' 를 부를 때에는 할머니들께서 활짝 웃으시며 부르시는데 그 모습만으로도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어느 할머니는 친구분들과 식사 중이셨는데 노래 불러주고 가라고 하셔서 노래를 불러드렸는데 박수를 치시며 너무 행복한 미소를 지어주셔서 저희도 행복했습니다.
저희가 온다고 몸이 불편하신데도 미리 간식과 차를 준비해주시며 내어주시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잠시 함께 시간을 보내다 가는 사람들일텐데도 정성스레 맞이해주신 할머니, 할아버지 너무 감사합니다.
복음말씀도 함께 읽고 오순도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소중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있지는 못했지만 짦은 시간이라도 서로 간에 정과 사랑이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맛있는 음식과 간식도 준비해주시고, 헤어질 때는 저희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해 주시는 모습에서 따뜻한 사랑을 듬뿍 받아 추운 겨울이 따뜻했던 것 같습니다.
주는 것 보다 받은 것이 너무 많은 감사한 날. 성스럽고 기쁜 성탄절에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할 수 있게 해주심에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함께 따뜻한 봉사를 해주신 당산동 성서형제회 회원분들과 차량봉사자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늦었지만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뜻하시는 일 다 이루시고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
++++++++++++++++++++++++++++++++++++++++++++++++++++++++++++++++++++
< FBI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크든 적든 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6년 12월 입출금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