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지역 문화답사를 마치고/안성환/23.05.20
사단법인 울산문화아카데미에서 청송지역으로 답사를 다녀왔다. 야송미술관을 거쳐 객주문학관, 송소/송정고택, 소헌공원, 보광사. 항일의병기념관이다. 청송은 국가보물 9점, 도 지정문화재 43점, 그리고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지질 공원이기도 하다. 지질명소는 24개소이며, 모두가 역사적 가치와 교육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특히 청송은 면적의 80%가 산으로 덮여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산소 카페이다.
우리가 처음 도착한 곳은 『청량대운도전시관』이다. 외관상 그렇게 화려하지 않으며 야송(이원좌 1939~1991)을 닮은 듯 아담하고 검소하였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시선을 압도하였다. 작품은 『청량대운도』. 작품의 크기는 가로 6.7m, 길이 46m이다. 청량대운도를 위해 본 미술관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단일 작품 전시를 위한 국내 최초 전시관이라고 한다. 깜짝 놀랐다. 작품의 소재는 경북 봉화 청량산을 배경으로 하였는데 1989년부터 시작하여 1992년 4월 10일, 약 180일간에 걸쳐 마무리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그림이 워낙 대작이라 그릴 만한 장소를 찾지 못해 여러 날을 헤매다 물색한 곳이 봉화읍 삼계리에 있는 허름한 양곡저장 창고라고 했다. 이곳을 빌려 여기서 의식주를 해결하면서 완성하였다고 한다. 전시장 안에는 작품 감상을 위해 2층 전망대까지 있었다. 국내외에 소장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선생의 신념은 개인에게 팔지 않겠다는 신념이었다. 굳이 금액으로 따지자면 당시의 금액으로 약 30억 정도였다고 한다. 선생의 확고한 신념대로 청송군에 기증했다고 한다. 작품만큼 마음도 크셨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런 거대한 작품 속에 선생 자신을 표현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토끼라고 한다. 작가는 우리의 정서 속에 가장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토끼 세 마리라가 청량대운도 작품 속에 숨겨 놨다고 한다. 해설사는 숙제만 던져 주고 답은 우리 스스로 에게 맡겼다. 나는 단 한 마리도 찾지 못했다. 우리는 전시관을 빠져나와 옆 건물 야송미술관의 또 다른 작품들을 감상하였다. 제대로 감상 하려면 족히 3일 정도 필요할 만큼 감동적이었다. 여기서 그의 독특한 미술세계의 기풍을 읽을 수 있었다. 모든 초고작에는 그때의 계절 별 기상상태, 당시의 주변 환경 등 일기처럼 빽빽하게 기록해 놨다. 이것은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읽었다. 후일 누가 초고작을 보더라도 자연이 빌려준 이름을 잊지 않도록... 선생의 높은 사상에 고개 숙일뿐이다.
이어 객주문학관으로 향했다.
여기는 19세기 말 조선팔도를 누비는 보부상(褓負商)을 중심으로 민중 생활을 생생하게 그려낸 대하소설 『객주』를 무대로 한 문학관이다. 보부상은 보상과 부상을 합친 글인데 물건을 보자기에 싸서 메고 다니며 파는 봇짐장수를 보상이라 하고, 등이나 지게에 지고 다니며 파는 등짐장수를 부상이라 한다. 우리는 작가와의 대화시간을 가질 수 있어 행운을 얻었다. 객주문학관 앞에서 작가와 기념촬영을 마치고 곧바로 소강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8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깜짝특강이 시작되었다. 첫 서두의 포문은 박목월 선생과의 인연을 말씀하셨고 돈 좋아하는 아내와 글쟁이 자신과의 비화로 딱딱한 강의실을 확 풀어 놓았다. 표현 하자면 시골 사랑방 분위기랄까. 처음 만남이지만 어색하지 않는 분위기, 문학의 힘을 일깨워 주는 장면이었다. 강의가 무르익을 쯤 선생은 ‘교도소 죄수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 이야기와 ‘버스여기사의 윤간’이야기로 예화를 들면서 동공을 부동자세로 만들어 버렸다. 이 예화에서 문학작품에는 맛과 멋, 그러니까 감동과 고뇌와 교훈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며 강조 하셨다. 덧부쳐 문학은 평생해야 된다고 하셨다. 이유는 면허증이나 자격증 처럼 한번 인증 받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말씀을 정리 하셨다. 망구를 훌쩍 넘긴 노신사! 객주문학관의 입구 까지 나오셨어 우리들을 배웅 하셨다. 백발이 성성함에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놀랍다.
아름다운 늙음은 나도 닮아 가야지.
바쁜 걸음으로 송소고택과 송정고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송소고택은 조선 후기의 가옥인데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거부하고 청송으로 들어온 심원부의 후손이 거주하는 가옥이다. 당시에 법으로 궁궐 외는 100칸 넘는 집을 지을 수 없다는 법령으로 99칸을 지은 집니다. 송소고택 옆에 송정고택이 있는데 승소심호택의 둘째 아들 송정심상광이 살던 집으로 송소고택과는 담으로 이어져 있다. 송소고택을 지은 후 얼마 후 송정고택을 지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상류층의 주거형태를 볼 수 있는 곳이다.
3번째 코스는 소헌공원이다. 먼저 찬경루가 첫눈에 들어온다. 보고 있노라면 건물의 위풍당당함이 보인다. 청송심씨의 지조를 보는 듯하다. 이곳 찬경루와 운봉관은 문화재로 등재되어있다. 소헌공원으로 명명하게 된 동기는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시계는 오후 3시를 가르키는데 봐야 할 곳은 너무 많았다. 마음이 바쁜 사람은 해설사보다 우리 쪽이었다. 보충 설명은 버스 안에서 듣기로 하고 다시 청송 보광사로 자리를 옮겼다.
청송보광사는 극락전이 현재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 속에서 사찰로서 유지가 어려워 사찰 경내에 왕족을 위한 위축원당(왕을 위해 기도하는 집)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곳 극락전 특징은 청송향토사학자 이정희선생 글에 기록이 잘 되어있다. 기록에 의하면 본 ‘극락전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조선전기의 기술이 가미된 건축물이다’라고 한다. ‘전통양식과 명문과 기록이 명확히 남아 있었어 한국건축사의 기준이 되는 양식과 조선초기에 있었던 양식이 후기에 사라진 것을 확인 할 수 있는 점’이 이라고 한다. 극락전 우측 벽면에는 목재로 만들어진 현어(懸魚)가 걸려 있는 것이 특이하다. 극락전의 현어는 우리나라 유일한 현어라고 한다. 현어의 목적은 화재를 예방하는 주술적인 의미를 가진 물고기나 초화문형(꽃이나 풀과 같은 식물 무늬)을 가진 형태가 대부분이며 위엄이나 청렴을 상징하기도 한다고 한다.
마지막 코스 청송 항일의병 기념공원
항일 의병공원인 이곳에는 의병 2,564명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우국충절에 대한 경외심 고취와 전통정신문화를 보며 청송과 작별 하였다.
2만7천보가 넘는 걸음으로 답사을 마치고 전세버스에 몸을 맡긴다. 다시 선현들의 발 자취를 더듬는다. 고전과 역사의 무게는 저울로 달 수 없고 가치를 논 할 수없다. 『고전은 독서의 백미이고, 역사는 세상공부의 핵심이다.』란 말이 문득 생각하는 시간이다. 공통점은 인문학적 소양과 지혜인 것 같다.
변하지 않은 지혜!
첫댓글 몇 년 전 해설사 없이 그냥 다녀와 아무 기억이 없었습니다.
안샘 덕분에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