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교수의 역사 칼럼(85)
영종여적호(寧從汝賊乎)
어찌 너희 구적(寇賊)을 좇겠는가?
역사를 읽다 보면 나라가 흥할 때도 있고 기울어질 때도 있다. 어쩌다 나라의 기운이 융성할 때 태어나면 참으로 운이 좋은 것이다. 이렇게 운이 좋고 나쁜 것은 한 개인이 잘하고 못하는 것과 상관없으니 이를 운명(運命)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나라가 기울어지는 것은 정확하게 운명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정치를 잘하고 못하는 것에 따라서 나라는 기울기도 하고 흥성하기도 하는 것이다. 요즈음 읽고 있는 속자치통감에서 부분은 원나라가 망하여 북쪽으로 쫓겨 가서 북원(北元)이 되고 쿠빌라이 이후 원나라가 차지하였던 중원(中原)지역을 명(明)나라가 차지하게 되기 10여 년 전 쯤1352년의 일이다.
이 시기 이전에 이미 원나라가 지배하는 중원지역에는 잦은 홍수가 일어나거나 반대로 가뭄이 들었다. 홍수나 가뭄이 자주 일어나서 농사는 안 되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으니 주려 죽는 사람이 수 없이 나타났다. 나아가서 이를 참지 못한 사람들은 사람을 잡아먹기까지 한다. 심지어 자기 자식을 차마 잡아먹지 못하여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는 일까지 기록 되어 있다.
이렇게 비극적인 세월을 맞는 것은 직접적으로 홍수와 가뭄이라는 자연재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짧게 보면 그 말이 맞지만 조금만 길게 보면 원말의 이시기에 특별히 홍수와 가뭄이라는 자연재해 기록이 많다. 그러면 이 시기에 특별히 하느님이 백성을 고통스럽게 하고, 원왕조를 망치려고 가뭄과 홍수가 일어나게 했을까? 그것은 너무 단순한 운명론이다.
사실 역사를 조금만 더 길게 보면 다른 시기에는 홍수와 가뭄을 미리 대비한 경우가 많았다. 해마다 비오고 가뭄 드는 것은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니 미리 홍수를 막으려고 제방을 수축하거나 가뭄에 대비해 저수지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오면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치부하고 부패하여 국가는 도무지 제방을 수축하거나 저수지를 관리할 생각도 경제적 여력도 없었다. 그러므로 홍수와 가뭄은 천재(天災)인 것 같으나 실제로는 인재(人災)인 것이다.
왕조가 망하는 과정은 겉모습은 조금씩 달라도 패턴은 거의 같다. 국가권력을 가진 사람이 부패하고 탐욕스러워 재물을 갈취하고 그 돈으로 사치하고 퇴폐하게 되지만 제방을 관리할 돈이 없게 되고 백성들은 기아 속에 허덕이게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죽기 살기로 도둑질하는 불법을 저지른다. 도둑질하다가 힘이 모자라면 도적끼리 모여서 도적떼가 되고 강도가 되고 강도가 되어야 살 수 있으면 양민들도 강도가 된다. 이 상황이 원말의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란은 일반화 되었다. 그 반란세력 가운데 서수휘(徐壽輝)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명을 세운 주원장(朱元璋)보다 앞서서 반란을 일으켜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1352년 정월에 그는 자기의 장수인 추보승(鄒普勝)을 시켜서 무창(武昌)을 함락시켰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호광행성(湖廣行省)의 평장(平章)인 상절(桑節, 星吉)이 정만호(鄭萬戶)라는 늙은 장수를 기용하여 그와 상의하여 계획적으로 서수휘의 우두머리를 묶어 두었다. 그런데 이때 조정에서는 상절을 대사농으로 임명하니 그는 전장(戰場)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적구(賊寇)의 뇌물을 받은 사람들이 정만호를 모해하고 묶여 있는 사람을 풀어 주고 안팎에서 적구에게 호응하자 최고 책임자인 평장정사는 도망쳤다. 잘 못된 인사가 일을 망친 것이다.
서수휘의 다른 장수인 노법흥(魯法興)이 안륙부(安陸府)를 함락시킬 때의 이야기이다. 노법흥이 와서 공격하는데 지부(知府)인 작로(綽嚕, 丑閭)가 병사를 모집하여 수백 명을 얻어서 인솔하고 적구를 막았는데, 적구의 전대(前隊)를 패배시키고, 이긴 것을 타고서 이를 뒤쫓았다.
그러나 적구가 다른 문으로 들어오자 빠르게 군사를 돌렸는데 성 안에서 불이 일어나자 군민(軍民)이 무너지고 어지러웠다. 계상해보니 막을 수가 없자 돌아가서 조복(朝服)을 입고 나아가서 공당에 앉았다. 적구가 번득이는 칼로 협박하였지만 작로는 오히려 반역이란 무엇이고 순응(順應)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설득될 적구가 아니었다.
한 명의 적구가 작로를 밀어 내려가서 절하게 하였지만 굴복하지 않고 또 화를 내며 욕을 하자 적구의 수괴(首魁)가 차마 해치지 못하여 그를 구속하였다. 다음 날 또 그를 압박하여 반란한 자기들을 좇게 하였는데 작로가 아프게 질책하며 말하였다. “나는 국토를 지키는 신하인데 어찌 너희 구적을 좇겠는가!” 적구는 화를 내고 칼로 작로를 치니 왼쪽 옆구리가 잘리어 죽었다 .
적구는 그가 항복하지 않은 것에 분을 내고 다시 포낭(布囊, 자루)으로 그 시체를 싸가지고 둘러메어 그 집에 두었더니 작로의 처인 후씨(侯氏)가 나와서 크게 통곡하고 또 술과 고기를 앞에다 가득 늘어놓고 목마른 사람은 술을 마시게 하고 주린 사람은 고기를 먹게 하면서 적구의 사자(使者)를 속여서 자기를 막지 않게 하더니 밤이 되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능력은 있으나 퇴직한 만호(萬戶)인 정만호와 하급 지방관인 작로와 그 가족의 처절한 최후였다. 그런데 실제로 이들 하급 관리의 눈물겨운 투쟁은 보는 사람의 감동을 줄뿐 대세를 바꿀 힘은 없었다.
고통을 참지 못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세력을 넓히려고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일으킨 서수휘를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키고 머리에 홍건(紅巾)을 둘렀으니 스스로 적구(賊寇)임을 드러낸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잘 못을 저지른 것으로 인식된다면 감추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대 놓고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고 표시한 것이다. 그것은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는 정부보다 홍건을 두른 사람들을 따르는 것이 더 낫다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때 정부는 명분상으로 정당한 세력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홍건적보다 못한 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래도 이 명분을 좇아 하층관리와 부녀자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를 보면서 황제와 재상, 귀족들이 저지른 죄가 더 무거워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元)을 이끌던 세력이 자기들의 부패를 숨기려 했겠지만 백성들은 벌써 알고 있었고, 그래도 순진하고 힘없지만 이 사람들만 그 부패한 국가와 조정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것이다. 우리의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상황이나 한말(韓末)의 상황이 원말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지금도 맡은 일을 묵묵히 수행하면서도 공무원들은 이러한 역사를 보고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첫댓글 기근이 심하여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었다는 기록은 '선조실록' 임진왜란 기사에도 나옵니다. 이쯤되면 나라가 나라라 할 수 없는데도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망하지 않았습니다. 작로의 부인과 같은 여자는 원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교가 행해진 왕조에서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원나라의 경우 황제의 즉위 시 어린아이가 계속 등극한 것이 중요 문제라고 지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청나라가 망할 때도 그렇구요, 외민족이 중원을 지배하였다가 쇠퇴하여 망해가는 모습을 天災가 아니라 人災라는 지적은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를 잘 하면 가뭄과 홍수 등을 극복할 수 있지만 정치가 혼란스러우면 자연재해를 극복할 수 없다는 주장에 동감을 합니다. 국가의 흥망은 군주가 정치를 잘하느냐, 잘 못하느냐에 달렸는데 작로 부인의 처사는 태풍 속에 꺼져가는 하나의 등불과 같다고나 할 가요. '속지치통감의 편자는 이에 대하여 어떤 사론을 썼는가요? 그의 역사의식이 어떠하였는 지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 까요? 그 찬자가 원의 멸망 원인을 어떻게 보았는 지가 궁금합니다. 이런 하나의 사료를 보고 총체적인 역사를 논하는 역사평론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