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주역》은 언제, 누가 만들었나?
○ 인류가 자연의 변화를 예측할 수 없어 겪는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그것은 원시사회로 갈수록 더 심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무슨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신명(神明)에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이것이 점(占)을 치게 되는 시작이다. 우리가 어릴 때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는 낯선 길에서, 손바닥에 침을 뱉고 다른 손의 손가락으로 침을 쳐서 그 방향을 보고 갈 길을 결정하는 것 같은 것이 바로 점을 치는 원시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확률적인 타당성이 낮아 하나의 학문적 체계를 이룰 수 없었다.
○ 중국 고대 은(殷)나라의 갑골문(甲骨文)을 보면,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점을 쳐서 하늘의 뜻을 물어 본 기록을 적은 것이 많이 나온다. 물론 그 이전의 기록들이 나온다면 점을 치는 역사는 더 오래였다는 것은 자명(自明)하겠지만, 아직까지는 고고학적(考古學的)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더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점을 쳐서 미래의 길흉을 알아보는 이러한 행위는 처음에는 과학적이거나 그 행위에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기보다는 주술적(呪術的)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축적된 경험과 그 기록들을 통괄(統括)할 수 있는 위대한 지성인이 나옴으로서, 미신적 주술행위에서 그 당시로서는 가장 첨단을 걷는 과학적 이론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점을 치고 이를 기록하여, 결과가 어땠는지 하는 것을 정리해 보면 통계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것이 점이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첫걸음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학문적 체계를 이룰 수 없다. 《주역》이 동양경전의 첫머리에 놓일 수 있는 것은 이런 단계를 훨씬 뛰어 넘었기 때문이다.
○ 《주역》이 가지는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의미에 대한 것은 뒤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주역》을 언제, 누가 만들었냐는 첫 물음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그러려면 우선 《주역》이 가지는 독특한 구성부터 간략하게 언급하고 진행하여야 할 것 같다. 《주역》은 다른 책과는 달리 경(經)과 전(傳)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책을 이루고 있다. ‘경’은 서(筮)․괘(卦)․효(爻)․사(辭)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전’은 <단전(彖傳)>․<상전(象傳)>․<계사전(繫辭傳)>․<설괘전(說卦傳)>․<서괘전(序卦傳)>․<문언전(文言傳)>․<잡괘전(雜卦傳)>의 7종․10편으로 되어 있으며, 일명 10익(十翼)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경과 전이 한데 섞여 있는 형식을 취하는 책은 오직 《주역》 뿐이다. 《춘추(春秋)》나 《시(詩)》를 예로 들어보면, 《좌전(左傳)》․《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과 같은 《춘추》의 ‘전’과, 《모시(毛詩)》와 같은 《시》의 ‘전’ 또한 경문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6경의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특징을 전제로 하고 《주역》의 형성시기와 작자에 대한 것을 논해야만 한다.
○ 이에 대한 것은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주역》은 한 사람에 의해 한 때에 완성된 것은 아니고 장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학문적 체계라는 것이 일반적인 학자들의 생각이다. 《역위․변종비(易緯․辨終備)》에 이렇게 말하였다. “지극하구나. 《역》이여! 세 성인이 이루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해보자. 일반적으로 복희씨(伏犧氏)가 처음 8괘를 긋고, 문왕이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를 지었으며, 공자께서 10익(十翼)을 지어 《주역》이 완성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異論)이 있어 조금 뒤 다시 정리하기로 하겠다.
○ 《주역》 이전에 여러 형태의 점을 쳐 미래를 알아보려는 방법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기록은 남아 있다. 《주례․춘관․서인(周禮․春官․筮人》에 “서인(筮人)은 세 가지 《역》을 관장하면서, 아홉 가지 서(筮)가 있는데,……‘아홉 가지 서’의 이름이란, 무경(巫更)․무함(巫咸)․무식(巫式)․무목(巫目)․무역(巫易)․무비(巫比)․무사(巫祠)․무참(巫參)․무배(巫環)인데, 이로써 길흉을 분변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주역》의 <계사전(繫辭傳)․9장>에 나오는 것 이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 《주역․계사전(周易․繫辭傳)․하․2장》에 “옛날 포희씨가 천하에 왕 노릇할 때”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유가경전에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장자(莊子)》․《관자(管子)》․《회남자(淮南子)》에 나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확실히 믿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계사전․하․2장>은 후세 사람들이 끼워 넣은 글일 수 있다는 가설을 배제할 수 없다.
○ 처음 8괘를 그은 사람은 복희씨로 가탁을 하였는데, 64괘를 겹쳐 ‘변화’를 나타낼 수 있어 《주역》의 진면목을 보인 사람은 누구일까? 일반적으로 네 가지 학설이 있다.
1) 왕필(王弼)은 복희씨라고 하였다. 2) 정현은 신농씨(神農氏)라고 하였다. 3) 손성(孫盛)은 우(禹)라고 하였다. 4) 사마천․반고(班固) 등은 문왕이라고 하였다.
○ 이렇게 다양한 학설들이 있지만, 어느 하나도 정확한 것은 없다. 그렇다면 《주역》의 작자는 누구일까? <계사전․하․7장>에 “《역》이 중흥(中興)된 것은 아마 중고(中古) 때인 것 같다”라고 하고, <계사전․하․11장>에는 “《역》이 중흥된 것은 아마 은나라 말엽에서부터 주나라의 초기 덕이 융성할 때인 것 같다. 문왕과 주(紂)임금 사이의 일인 것 같다”라고 하였으니, 공자께서는 《역》이 언제 만들어졌고, 누가 만들었느냐 하는 것을 명확히 밝히지를 않았다. 다만 시기적으로는 ‘중고(中古) 때 만들어졌다’라고 하였으니, 그럼 중고란 어느 때를 가리키는가?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에 “《역》의 도가 심오하구나! 사람으로는 세 성인을 거쳤고, 세월은 세 고대를 지났다”라고 하고, 맹강(孟康)의 주(注)에 “복희씨가 상고이고, 문왕이 중고이며, 공자가 하고(下古)시대가 된다”라고 하였으니, 중고시대란 문왕 때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공자께서 《역》을 만든 사람에 대해서는 막연히 “《역》을 만든 사람은 근심과 걱정이 많았는가 보다”라고 하고, “문왕과 주(紂) 사이의 일에 관한 것인가 보다”라고만 하였다.
○ 이러한 것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우선 《주역》의 경문(經文)인 서(筮)․괘(卦)․효(爻)․사(辭)는 장기간에 걸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순서대로 정리해 보면:
․ 서(筮)가 가장 먼저 원시시대부터 있었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 그 다음 괘효(卦爻)가 그어졌다.
․ 사(辭)는 문자가 생기고 난 뒤에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 ‘서’와 ‘괘’ 가운데는 ‘서’가 앞설 것이다.
․ 8괘가 먼저이고, 64괘가 그 다음 그어졌을 것이다. 8괘는 상고시대 후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많고, 64괘가 그어진 것은 하(夏)나라 보다 더 늦은 시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8괘에 이미 ‘하늘[天]’의 개념이 나오는데, 이는 역법(曆法)과 관련이 있다. 삼황(三皇)의 시대에는 화력(火曆)을 썼는데, 화력에는 ‘하늘’에 대한 개념이 들어 있지 않다. 요(堯)임금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월의 운행과 사시의 변화와 1년이 366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8괘는 요임금 시대나 그 보다 조금 일찍 그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 괘사와 효사는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두 가지가 만들어진 시대적 상거(相距)는 멀지 않을 것이고, 대략 은나라 말엽에서 주나라 초기 사이일 것 같다. 괘사와 효사 등에 나타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문왕이 괘사를 쓰고, 그의 아들 주공(周公)이 효사를 썼다고 하는 설은 그럴 가능성이 있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 다음으로 《주역》의 전(傳)인 10익(十翼)은 공자께서 지은 것이라고 하는 설이 가장 많이 받아드려지고 있다. 《사기․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께서 나이 들어 《역》을 좋아하여 <단(彖)>․<계(繫)>․<상(象)>․<설괘(設卦)>․<문언(文言)>에 서(序)를 하고, 《역》을 읽어 책을 맨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라고 하고, 《한서․유림전(漢書․儒林傳)》에 “공자께서 나이 들어 《역》을 좋아하여, 그것을 읽으면서 책을 맨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으며, 《주역》의 해설을 위해 전(傳)을 지었다”라고 하였고, 《한서․예문지(藝文志)》에는 “공씨께서 《주역》의 해설을 위해 <단>․<상>․<계사>․<문언>과 같은 것 10편을 지었다”라고 하여 모두 공자가 지었다고 하였다. 마왕퇴백서(馬王堆帛書) 《역전(易傳)》의 <요(要)>편에는 “공자께서 나이 들어 《역》을 좋아하여 집에 계실 때는 앉은자리에 책을 두고, 나들이를 할 때는 전대에 넣어 다니셨다. ‘거기에는 예로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가 적혀있는데, 나는 그것을 사용하기를 편안히 여기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나오는 말[辭]을 즐긴다. 후세 선비들 가운데 나에게 의문을 품는 사람은 혹 《주역》 때문일 것이다’”라고 하여, 《사기》와 《한서》에서 말한 《역전》 즉 10익이 공자께서 지은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였다. 《역전》이 공자의 사상을 담고 있고, 공자께서 지은 것이라는 증거들이 속속 나오고 있지만, 그 구성 내용이 복잡하여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대부분이 공자께서 직접 지은 것이겠지만, 그 외에도 옛 사람들의 이미 했던 말도 있고, 제자들이 공자의 말씀을 기록한 것도 있으며, 심지어는 후세 사람들이 기록을 베껴 전할 때 임의로 끼워 넣은 것도 있을 수 있지만, 후세에 끼워 넣은 것 외에는 모두 공자의 사상으로 봐야 한다. 다만 북송(北宋) 때의 구양수(歐陽修)가 “《역전》 가운데 <단>과 <상> 이외에는 공자가 지은 것이 아니다”이라고 하여, 처음으로 10익이 공자가 지은 것이 아니라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구양수 이후의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