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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0(주일) 호세아 10:1~15 ‘지금은 여호와를 찾을 때라’ 예산수정교회 주일설교(이몽용 목사)
호세아 10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과 심판을 선포하면서도, 동시에 회개와 회복을 촉구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12절의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라는 말씀은 타락한 백성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부르심입니다. “여호와를 찾을 때”는 히브리어로“바카쉬”인데 “찾다, 추구하다, 구하다, 간구하다”을 뜻합니다. 원래의 의미는 “간절히 탄원하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은혜 베풀때에 너희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라고 했습니다.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죄인에게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이 그분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누구든지 자기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켜 주님께로 나아오면 누구든지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 ‘찾는다’는 의미는 ‘없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이 아니고 ‘소유했다가 잃어버린 것을 내 것이 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여호와를 찾으라’는 말의 의미는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은 시대를 초월하여 밤에 길을 잃고 헤매는 나그네에게 빛을 비추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방황하는 인생의 길에서 돌이켜 그 분께로 돌아오라고 애타게 부르시고 계십니다.
1. 왜 지금 하나님을 찾아야 할까요?
우리는 왜 하나님을 찾아야 할까요? 첫째는 인생의 유한성과 불확실성 때문입니다(약4:4). “너희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도다”(약4:4)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삶은 마치 안개와 같이 덧없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한계가 없다면 스스로 무엇이 옳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항상 알 수 있을 것이지만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유한성을 지닌 피조물로 창조 되었기에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다해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죄의 문제와 구원의 문제가 남이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찾고 그 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며,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세상이 헛되기 때문입니다(요일2:17). “세상과 정욕은 지나가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덧없고 공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쾌락이나 성공에 의지하기보다는 영원한 가치를 주시는 하나님께로 관심과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역사상 어떤 사람보다 많은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전도서를 통해 자신이 누렸던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말년에 그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 지식에 탐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보다 나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며 인간의 힘으로 인류의 미래를 구원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인간의 노력은 결국 헛된 것이며 그 끝은 멸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생명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물을 떠난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부르시기 때문입니다(렘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찾으면 찾을 것이요 내가 너희에게 발견되리라”(렘29:13)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항상 문을 열어두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분을 찾기만 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보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이 예수님을 마음 문 밖에 세워놓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적용) 내가 붙잡고 있는 세상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내가 붙잡고 있는 영원한 가치는 무엇입니까? 나는 하나님을 찾아야 할 이유를 내 이웃에게 설명할 수 있나요?
2.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첫째는 회개를 통해서입니다(호10:12, 사55:6,7).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먼저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세아 10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이 만연하여 심판이 임박했음을 강조합니다. 우상숭배, 불의, 폭력 등 다양한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며 “지금이 여호와를 찾을 때니”(12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이 임하기 전에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만 심판을 피하고 회복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에서도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직역하면 ‘너회를 위하여 경작해야 할 땅을 경작하라’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이 죄악으로 굳어졌을 때,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거듭나야 함을 의미합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새로운 씨앗을 심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둘째는 진정한 예배를 통해서입니다(요4:23,24).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매가 많을수록 우상의 제단을 많게 하고,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했습니다(1절). 여기서 ‘제단’과 ‘주상’은 우상의 제단을 가리키는 데, 호세아는 그들이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2절) 하나님을 찾으려면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우상의 제단을 깨드리고 하나님께 나아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요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어떤 형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는 우상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또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든지 계십니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 예배를 하든지 상관없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에 나와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는 교회에 나와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만이 언제 어디서나 예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테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은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느 장소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어떤 시간에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어느 장소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려거든 특정한 시간인 주일에 특정한 장소인 교회에서 먼저 예배드리는 사람이 될 때만 가능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신령한 예배는 영적 예배로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의 대상이 사람이 아닙니다. 우상이나 어떤 건물도 아닙니다. 더더욱 십자가는 아닙니다. 오직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에는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설교자에게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설교를 잘하느니 못하느니, 목사님이 지난주간에는 검은 가운을 입었는데, 오늘은 흰 가운을 입었다느니, 인물이 좋으니 나쁘니…”하는 식으로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오직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예배시간에는 예배당의 건물에 마음을 빼앗겨서도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천장에 등이 몇 개인가? 꽃꽂이가 좋으냐 나쁘냐?”등등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신령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특히 신령한 예배를 드리려고 하면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롬 12:1).
크리소스톰은 17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여러분의 눈으로 하여금 나쁜 것을 쳐다보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 눈은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혀로 하여금 누추한 말이나 다른 사람을 향한 악한 말을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 혀가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손이 무법한 일을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손이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손으로 다른 사람을 도우십시오. 그리고 나를 향해서 비난하고 욕하는 자들을 내 입으로 축복하십시오. 눈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머리로는 그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그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제물이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거짓되거나 형식적인 예배가 아닌 진심이 담긴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5살에 왕좌에 올라 장장 72년을 집권했습니다. 그가 다스리는 동안 나라가 부강해졌고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했습니다. 그는 베르사이유 궁전과 루브르 궁전을 건축했으며, “짐은 국가다”라고 호언장담할 정도였으며 일명 태양왕이라고 불리웠습니다.
그 당시 페넬론이라는 궁중설교자가 있었는데, 하루는 왕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당에 도착했을 때, 예배당에는 페넬론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왕이 왜 예배당이 텅 비어 있는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때 페넬론이 대답하기를 “저는 오늘 예배에 임금님이 참석하지 못하신다고 광고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진정으로 예배하러오고, 누가 왕에게 아첨이나 하려고 오는지 친히 보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이 없지 않아 많이 있습니다.
19세기 미국의 헨리 워드 비쳐 목사는 유명한 설교자로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배시간 전에 미리 나와 기다렸다가 예배당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훌륭한 설교자였으며, 그의 여동생 스토브 부인은 “엉클 아저씨의 오두막집”을 써서 노예제도의 참상을 폭로한 유명작가이기도 합니다.
비쳐 목사는 노예제도의 부당성과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회개를 외치는 용감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날도 여느 주일과 마찬가지로 예배당은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 없이 꽉 들어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비쳐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생소한 목사님 한 분이 강단에 서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 슬금슬금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설교자가 “여러분 중에 헨리 비쳐 목사님을 예배하러 오신 분은 다 나가시고, 하나님을 예배하러 오신 분만 앉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 순간 겸연쩍어진 사람들은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시 들어와 앉아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드린다는 기초적인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예배를 드리러 온 것이 아니라 설교만 들으러 온 사람들입니다. 설교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대표기도를 해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하지 않고 사람들을 의식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고, 찬양을 해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잘하는지 보이기 위해 사람을 의식하며 찬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매우 잘못된 태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 드리고, 찬양을 해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찬양을 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릴 때,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마 18:20).
제가 잘 아는 젊은 목사 가운데 한 분은 교회개척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교인이 몇 명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겠습니까. 날마다 부흥을 위해 눈물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철야기도 중에 교인들이 몇 명 없었지만 예수님이 맨 앞자리에 앉아 계시고 그 주위에 천사들이 가득차 있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후 은혜를 받은 이 목사님은 비록 몇 명 안 되는 적은 숫자의 교인이었지만 있는 힘을 다해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몇 천명이 모이는 큰 교회로 부흥되었습니다.
셋째로,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요17:17).
여호와를 찾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한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기근’은 외적인 기근이 아니라 ‘영적인 기근’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일년 음식 쓰레기가 3조원에 이른다는 통계를 감안할 때 먹지 못해 굶어 죽는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찾으려면 말씀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17:17에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의미를 요한복음 15장 1-2절을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예수님 안에 거하라’는 것은 ‘예수님께 붙어 있으라’는 뜻인데 즉, ‘예수님과 지속적인 영적교제를 하라’는 뜻입니다. 마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만이 포도라는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과 지속적인 영적교제를 하는 그리스도인만이 삶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요15장 7-8절에 예수님이 자신과 연합할 때에 주시는 축복을 말씀해주십니다.“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하기 위해 예수님과 지속적인 영적교제를 하면 기도의 능력이란 축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습니다. 즉,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삶의 열매를 맺는 축복까지 주십니다.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이므로 거기에 붙어 있으면 응당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교회공동체를 통해서 입니다(히10:25).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 소유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신 가족입니다. 하나님 자녀, 천국 백성, 성도, 그리스도인, 명칭은 다양하지만 결국 하나입니다. 하나님 가족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 혈통보다 강합니다. 혈통적 가족은 세상 떠나면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천국에까지, 영원히 지속됩니다. 지상과 천상이 연결된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현세와 내세가 이어지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영원히 함께하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히10:25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히려 서로 격려하여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다른 성도들과 함께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며 신앙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거하는 것이 얼마나 선하고 즐거운가!"(시133:1) 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주권은 교회 스스로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권위는 주님이 주신 것이고 세상 권력이 간섭할 수 없습니다(마16:19). 교회는 스스로의 자치권을 가집니다. 교회의 설립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권위를 존중하고, 그 다스림에 복종해야 합니다. 교회는 양육 공동체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성숙시키는 것이 교회의 목표입니다. 양육은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양과 양 사이의 모든 관계에서 신앙이 자라납니다. 목자와 양 사이의 관계에서 신앙이 자라납니다. 우리는 일평생 교회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합니다. 교회 생활이 가정생활의 기반이 되고, 사회생활의 토대가 되고, 모든 축복의 근원이 되시기 바랍니다.
[큐티인묵상간증] [거품 같은 인생, 손정실]
성실하신 부모님의 영향으로 저 역시 시간을 아끼며 부지런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제 안에 말씀의 가치관이 없다 보니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자리만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 저는 결혼 후 친정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빚더미에 앉게 되는 사건으로 주님을 뜨겁게 만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내 감정과 판단이 앞서다 보니 공동체의 권면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참석한 다단계 세미나에서 성공한 사람을 보니 부러웠고, 언젠가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이후 아는 언니가 지인을 소개해줘서 다단계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은 어느새 사업으로까지 확장되어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인재들의 그룹으로까지 성장했습니다(1절). 그렇게 세상에서 승승장구하게 되자 저는 두 마음을 품은 채 형식적인 예배만 드리며 아내와 엄마의 자리를 소홀히 했습니다(2절).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았고, 늘어나는 팀원들과 돈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런 제 마음은 마치 독초가 무성한 밭과 같았습니다(4절).
그렇게 스스로 왕이 되니 나를 위한 성전을 짓고자 다단계 강의와 사업을 이어갔지만 하나님은 속지 않으셨습니다(3절). 자기 유익으로 뭉쳤던 팀은 얼마 못 가 서로를 탓하며 갈라서기 시작했고, 회의감에 빠진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자녀들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자 다단계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스스로 올무에 걸려 옴짝달싹 못 하게 된 것입니다. 잘 나가던 사업이 주춤하고 인간관계까지 무너지니 그동안 쌓아 올린 돈과 인정이 한순간에 사라질 물거품처럼 느껴졌습니다(7절). 이렇게 내 욕심의 끝이자 중독과 같은 다단계 사업이 분열되고 나서야 저는 보잘 것 없다고 여기던 주부의 자리를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정으로 돌아와 주님의 멍에를 메고 묵은 땅을 기경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11~12절).
묵상적용) 남편과 두 아이가 있는 SNS 가족 대화방에오늘 묵상한 내용을 나누겠습니다. 과거 저처럼 일중독에 있는 지체에게 저의 죄고백이 담긴 간증을 전하겠습니다.
적용) 내가 하나님을 찾으려고 할 때에 위의 네가지 통로 중 부족한 통로는 무엇인가요?
3. 하나님을 찾은 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을 찾은 자는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1절). 길들인 암소는 주인이 주는 곡식은 마음대로 먹으면서 일하기는 싫어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의 은혜만 누리고 거룩한 백성답게 살지 않습니다. 이 때에는 하나님이 멍에를 메워서라도 우리로 하나님의 열매맺는 사람으로 서게 하실 것입니다. 12절에 하나님은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언 28장 5절에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축복과 열매는 회개하고 예배를 회복하며,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말씀안에 거하는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비가 오기 전에 땅이 갈라지고 메마르고 황폐하지만 비가 오면 모든 것이 새롭게 살아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인 공의가 비처럼 내리시면 우리 삶도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적용) 나는 비처럼 내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사모하고 회개하며 나아가고 있습니까?
결 론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날 우리도 끊임없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회개를 촉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열매맺는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것을 희망하고 계십니다. 지금이 바로 여호와를 찾을 때입니다.
“내가 은혜 베풀때에 너희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