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새 월화 드라마인 사극 ‘계백’이 지난 7월 25일 첫 방송됐다. 본래 MBC는 지난해 상반기에 ‘주몽’의 후속작으로 백제의 시조 ‘비류,온조’의 이야기를 다룬 사극을 2011년 중 제작,방영할 예정이라 발표한 바 있으나 2011년 들어서 그 기획을 ‘계백’으로 바꾸었다.
한편 계백과 관련해선 탤런트 송지효가 맡게된 여자주인공 ‘은고(恩古)’란 인물이 화제다. 아마 역사매니아들을 제외하곤 은고란 인물에 대해 잘 모를것이다. 은고는 정작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엔 등장하지 않고, 일본서기에 백제 멸망을 다룬 제명천황조 6년 10월에 당나라가 사로잡아간 백제의 왕족, 대신들을 열거한 기록에 의지왕과 그의 처 은고(恩古)라고 단 두 글자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한편 드라마에선 은고를 ‘아버지의 뜻으로 중국어와 국제정세를 배웠고, 상단을 조직 운영하는 뛰어난 지략가이자 정치가’이며 특히 ‘여명단’이란 조직을 이끄는 인물로 설정하였다. 역사에 단 두 글자 등장하는 여인의 화려한 재창조다. 그렇다면 과연 은고는 어떤 인물일까 ? 사실 역사에 단 두글자 등장하는 인물이 대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파악하는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백제 멸망의 미스테리와 관련 어떤 수수께끼의 열쇠를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학계에서도 꽤 관심을 갖고 주목해 온 인물이 은고이기도 하다.
한때 학계에선 ‘은고’라는 인물을 ‘나라를 망친 요녀’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었다. 그 이유는 당평제비(唐平濟碑)에 등장하는 의자왕에 대해 ‘밖으로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 요망한 계집을 믿어 오직 충성되고 어진 사람에게만 형벌이 미치며...’ 운운한 구절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같은 표현은 대개 한 나라를 무너뜨린 뒤 자신들이 그 나라를 침략,멸망시킨것을 합리화하고 상대국가를 깎아내리기 위한 상투적인 비하,비난의 표현으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한편 삼국사기엔 의자왕 16년 3월 ‘왕이 궁인(宮人)과 더불어 음황,탐락하여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고 되어있다. 충신 성충이 임금에게 직언을 하다 죽임을 당한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다. 그렇다면 당평제비에 기록된 요망한 계집, 또는 삼국사기 의자왕 16년조에 기록된 왕과 더불어 음황,탐락한 궁인은 과연 은고일까 ?
보통 당평제비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일본사기에 나오는 의자왕의 처 은고(恩古)란 인물과 한 덩어리로 묶어 인식 바로 은고가 문제의 ‘나라를 망친 요녀’로 생각하기 쉬운데, 하지만 은고가 정말 나라를 망친 요녀인지 100퍼센트 확신할수 있는 근거는 없다. 은고가 의자왕의 비(妃)라면 그녀는 과연 의자왕의 아들중 누구의 어머니일까 ? 어쩌면 이 수수께끼를 푸는것이 은고의 정체와 백제 멸망의 미스테리를 푸는데 어떤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의자왕 4년 왕은 왕자 융(隆)을 태자로 세웠다. 하지만 정작 백제가 멸망할 당시인 의자왕 20년엔 태자 이름이 효(孝)라고 나온다. 당나라가 성(수도인 사비성)을 육박하자 왕은 ‘내 일찍이 성충의 말을 듣지 않은것을 후회한다’며 태자 효(孝)와 함께 북변(웅진성)으로 도망하였다. 따라서 예전엔 의자왕 4년 태자가 된 융(隆)에 관한 기록을 오기(誤記)일 것으로 보았으나, 근래에는 오기라기 보다는 백제의 태자가 중간에 교체되었을 가능성이 유력하게 제기된다. 그 근거는 우선 의자왕 15년 2월 ‘태자궁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리하였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을 세웠다’는 기록이다. 그저 단순히 태자궁을 수리한 의미로 볼 수 없는 이유가 공교롭게도 의자왕이 향락에 빠지고 백제가 혼란스러운 정국으로 치닫는것이 바로 이때부터의 일이기 때문이다.
왕이 궁인과 더불어 음황,탐락해진 것이 바로 태자궁을 수리한 이듬해인 16년의 일이고 충신 성충도 이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백제는 점점 혼란스러운 지경에 빠져든다. 19년 2월 한 마리 여우가 상좌평 책상위에 앉았고, 4월에는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였다. 9월엔 궁중의 괴목(槐木)이 사람의 곡성과 같이 울었으며, 밤에는 귀신이 궁성 남로에서 곡했다. 물론, 백제 멸망시기에 이와같은 잇달은 괴변의 기록은 신라가 백제를 깎아내리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일수도 있다. 하지만 기록을 다시한번 음미해보면 백제의 정국이 가면 갈수록 점점 혼란의 수렁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던것이 아닐까 하는것을 유추해볼수도 있다. 확실히 의자왕이 국정에 뜻을 잃고 향락에 빠지고, 백제 정국이 겉잡을수 없는 혼돈에 빠진것은 의자왕 15년 ‘태자궁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리’한 이후의 일이다. 이때 어떤 정변 같은 일로 백제 태자가 교체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는 구절이다.
필자는 확실히 백제의 태자는 4년의 융(隆)에서 이후 장남 효(孝)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사소한 기록도 아닌 태자와 관련된 그것도 백제의 마지막 태자인데 그 이름을 김부식이 잘못 적었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의자왕은 장남 효(孝)가 멀쩡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3남 융(隆)을 4년에 태자로 봉했을까 ? 융이 효보다 실력이 뛰어났던걸까 ? 아니면 그 당시 융을 지지하는 귀족세력이나 또는 융의 어머니의 힘이 그만큼 막강했던 것일까.
하지만 융에서 효로 태자가 교체된 상황보다 더 의아한것이 백제 멸망 당시 사비성의 상황이다. 사비성이 당군에 의해 포위된 상황에서 의자왕은 태자 효(孝)와 함께 북변(웅진성)으로 달아난다. 그리고 근래에 중국에서 발견된 백제장수 예식진 묘비명에 의하면 의자왕은 웅진성에서 예식진의 배신으로 사로잡혔다. 따라서 의자가 효와 함께 웅진으로 간것은 달아났다기 보다는 후일을 도모한다던가, 남아있는 세력들을 규합 당나라에 결사항전을 하기 위한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하지만 의자가 태자 효와 함께 최후의 항전을 위해 웅진으로 달아났을때, 사비에선 기가막힌 일이 벌어지고 만다. 왕과 태자가 웅진으로 간 동안 사비에선 차남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당나라에 맞선다. 헌데 이때 태자 효(孝)의 아들 문사(文思)가 융(隆)에게 이르기를 ‘왕과 태자가 밖으로 나갔는데 숙부가 자의로 왕이 되니, 만일 당병이 포위를 풀고가면 우리가 안전할수 있겠습니까 ?’ 하고 드디어 좌우를 거느리고 밧줄에 매달려 성밖으로 나가 항복한 것이다.
의자왕과 태자 효는 웅진에서 결사항전을 준비하고 차남 태는 스스로 왕이 되어 사비에서 당과 맞서는 상황에서 어이없게도 백제는 효(孝)의 아들 문사(文思)의 배신으로 허망하게 무너져내리고 만 것이다.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가는게 문사의 행동이다. 만약 백제 태자가 정말 융에서 효로 교체된 것이라면 융과 효 사이엔 매우 심각한 수준의 권력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헌데 그런 상황에서 엉뚱하게도 효(孝)의 아들 문사가 융에게 항복하자고 권유 함께 당나라에 투항한 것이다. 아무리 차남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신변에 위협을 느낀 상황이라 할지라도, 아버지(태자 효)와 할아버지(의자왕)가 웅진에서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는동안 정작 그 아들이자 태손(太孫)이 배신을 하다니. 열 번,백번 그 당시 있었을법한 수많은 상황들을 가정하고 상상해봐도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문사의 행동이다.
은고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은고는 과연 융과 효중 누구의 어머니일까. 통상적으로 ‘나라를 망친 요녀’라 한다면 왕을 미혹케 한 매우 젊고 아리따운 여자를 생각게 하는데 만약 은고를 융이나 효의 어머니로 본다면, 나라를 망친 요녀의 이미지와 직결시키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 장남 효의 경우 백제 멸망시 이미 문사라는 장성한 아들이 있었고 차남 태나 삼남 융도 모두 장성한 나이였다.
은고가 누구 어머니인가 여부를 떠나서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 아들들의 나이를 30-40대 정도로 추정한다면 이때 은고의 나이는 최소한 50대 후반 이상이 된다. 백제가 멸망한게 의자왕 20년의 일이니 의자왕 즉위때 은고의 나이는 30대 후반 정도. 여전히 나라를 망친 젊고 아리따운 요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은고를 융이나 효의 어머니로 가정할 경우엔 그녀는 일단 ‘나라를 망친 요녀’란 누명에선 벗어나게 된다. 왕을 미혹케 하고 나라를 흔들만한 요녀로 생각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고를 융이나 효등의 왕자들과는 아무련 혈연관계가 없는 그저 의자왕의 후비(后妃)로 볼 경우엔 나라를 망친 요녀의 이미지에 가깝게 다가가게 된다. 의자왕이 융이나 효의 어머니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나이가 들어 맞아들인 후비로 볼 수 있는것이니까.
그렇다면 은고는 과연 백제 멸망시 어디에 있다 사로잡혔을까.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의자왕의 처 은고, 자(子) 융 등으로 기록되어 있어 마치 의자왕과 은고 그리고 융 까지가 모두 한 식구로 그리고 마치 은고가 융의 어머니인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기록은 그냥 당나라에 사로잡힌 백제의 왕족,귀족들의 이름을 일괄적으로 나열한 것으로 보인다. 은고는 웅진과 사비중 어디에 있다 사로잡혔을까.
삼국사기의 기록을 놓고보면 웅진에는 의자왕과 태자 효(孝)가 있었고, 사비성엔 융,태 등 다른 왕자들과 그리고 효의 아들 문사가 있었다. 의자왕의 아들들 사이에 권력다툼이 심각했음을 가정한다면, 은고는 아무래도 자기 아들과 함께 있는것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할수 있었을것이다. 따라서 만약 은고가 융의 어머니라면 사비에 있었을것이나, 그렇지 않고 다른 후비라면 웅진에서 남편과 함께 있다가 예식진에게 사로잡힌 것으로 봐야할것이다. 하지만 드라마 계백에선 은고를 사이에 두고 의자왕과 계백이 삼각관계가 되는 것으로 만들어 세 사람을 엇비슷한 연배로 설정해 놓은듯 하다. 그리고 등장인물 소개엔 은고를 부여효의 어머니로, 그리고 연태연이란 다른 가공인물 왕비를 등장시켜 그녀를 부여융의 어머니로 설정했다. 헌데 그래놓고서 은고를 의자왕의 후비가 되는 것으로 설정했으니, 아무래도 전체적으로 어색한 모양새가 되지 않을까 싶다.
고대사야 어차피 사료가 부족하니 개인적으론 특히 은고처럼 역사서에 이름 두자만 달랑 소개되어있는 인물을 상상력을 무한정 발휘 새로운 인물로 재창조하는 그 자체는 난 그다지 나쁘게는 보지 않는다. 다만 은고,의자왕,계백 세 사람을 모두 엇비슷한 나이로 설정해놓고 정작 캐스팅은 의자왕(조재현. 1965년생)과 계백(이서진.1973년생)을 모두 은고역의 송지효(1981년생)보다 16살, 8살 많은 배우로 했으니 전체적인 모양새가 어색해지는것은 아무래도 어쩔수 없을것 같다.
의자왕의 장남(부여효)을 낳는 여자를 은고로 설정해 놓고 대체 어떻게 후비가 되는 스토리를 이끌어 가겠다는 것인지 그것도 좀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일이다. 기왕 이렇게 된 것 그렇다면 드라마 스토리텔링과 관련 재미있는 건의를 하나 해볼까 한다. 차라리 그렇다면 백제가 멸망후 낙화암에서 자살하는 인물을 은고로 하는것은 어떨까. 실상 낙화암이니 의자왕의 3천궁녀이니 하는것은 역사의 진상과는 별 상관이 없는 훗날의 문사들이 백제의 멸망을 탄식하며 감상에 젖어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정설이다. 하지만 기왕에 존재하는 낙화암의 전설이니 스토리텔링적 차원에서 3천궁녀 대신 그 자리에 은고를 넣어보자는 것이다. 극중에서 은고가 여명단이란 조직을 이끄는 인물로도 나온다고 하니, 백제가 멸망한후 은고가 여명단을 이끌고 낙화암에서 최후를 마치는 라스트씬이라면, 백제 멸망의 비장함도 한층 더 무게감을 더하면서 낙화암의 전설도 살릴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수 있지 않을까 ?
[최현순 - 칼럼리스트 - 국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