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9월 26일 금요일
[(녹)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홍]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 순교자
말씀의 초대
하까이 예언자는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예수아 대사제에게, 하느님의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크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한다(복음).
제1독서
<머지않아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리라.>
▥ 하까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15ㄴ―2,9
15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이었다.
2,1 그해 일곱째 달 스무하룻날에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내렸다.
2 “너는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와 나머지 백성에게 말하여라.
3 ‘너희 가운데 이 집의 옛 영화를 본 사람들이 남아 있지 않느냐?
지금은 이 집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너희 눈에도 있으나마나 하지 않느냐?
4 그러나 즈루빠벨아, 이제 용기를 내어라. 주님의 말씀이다.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야, 용기를 내어라.
이 땅의 모든 백성아, 용기를 내어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일을 하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5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맺은 언약대로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에 머무를 터이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
6 ─ 정녕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머지않아 나는 다시 하늘과 땅, 바다와 뭍을 뒤흔들리라.
7 내가 모든 민족들을 뒤흔들리니 모든 민족들의 보화가 이리 들어오리라.
그리하여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8 은도 나의 것, 금도 나의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9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8-22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루카 복음서 9장은 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교육하시는 내용에 초점을 맞춥니다. 열두 제자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받아 파견되고(루카 9,1-6 참조), 빵을 많게 하는 기적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합니다(9,10-17 참조). 이 교육의 정점에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있습니다(9,18-22 참조). 이 신원을 바탕으로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 삶의 형태도 결정되기 때문입니다(9,23-27 참조).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마침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데, 이 고백은 하느님 계시의 선물입니다(마태 16,17 참조).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이 고백을 들으시며 흐뭇해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받은 이 선물에 다른 선물을 더해 주십니다. 수난 예고로 당신께서 누구이신지를 더 깊이 알게 해 주십니다. 베드로는 권능을 지니신 메시아만 알았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밑바닥까지 내려가시는 그리스도, 그래서 인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실 만큼 인간을 사랑하시며, 그렇게 인간이 소중하다고 온 존재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물으실 것입니다. 먼저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18)라고 물으신 다음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9,20)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은 표현으로 대답하기보다는, 참으로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백을 바탕으로 당신을 더 깊이 알도록 이끄실 것입니다.(김태훈 리푸죠 신부)
오랜 방황과 고민, 성찰 끝에 발견한 주님의 얼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공생활과 함께 사람들 앞에 드러나신 예수님의 존재감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이나 행동은 기존의 예언자들과는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탁월한 것이었고, 가르침 역시 신선하고 파격적이어서, 세상 사람들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존재감이 크게 부각되고 점점 화제의 중심이 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분의 정체, 신원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두고 당시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했습니다.
참수된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나서 등장했다, 아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저 옛 예언자 중에 한 사람이 되살아난 것이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루카 9,20)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이었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 각자 신앙인들에게 던져진 질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질문을 던지신 후, 우리 각자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여정 안에서 주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파악,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다시 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돌아보니 주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참 많았습니다. 전혀 아닌 엉뚱한 주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은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우주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전지전능하신 분, 능력과 권세를 지니신 분, 왕중의 왕, 세상 만물을 다스리는 분,
많은 경우 우리가 지니고 있는 주님에 대한 이미지는 지나친 경외심과 두려움이 지배적입니다. 악인들과 죄인들에게 벌을 내리시는 분, 우리의 대죄를 심판하시는 분, 정의와 공정의 주님...
그러나 주님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이 정도에서 멈춰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의 진정한 얼굴, 정확한 이미지를 찾고 마음에 간직해야만 합니다.
오랜 세월, 방황과 고민과 성찰 끝에 제가 발견한 주님의 얼굴입니다.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시는 주님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
나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귀히 여기시는 주님
내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시는 주님
나 모든 고통을 보고 계시는 주님
나의 작은 신음 소리 조차 귀 기울이시는 주님
나의 영성 수준 측정법: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전삼용 요셉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군중은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리고 이어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던져집니다. 우리는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의 인식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까?
한국의 어떤 개신교 목사가 설교 단상에서 “하느님, 까불지마. 내 말 안 들어주면 나한테 혼나”라고 외치거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금송아지를 하느님이라 부르며 자신들이 주는 여물이나 받아먹고 밭이나 갈아줘야 할 존재로 인식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그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 혹은 우리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는지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어떤 분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과 삶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성장은 인간적인 관계의 성숙과 매우 흡사합니다. 마치 부모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성장하면서 변하듯이 말입니다. 어떤 자녀는 부모의 헌신과 재산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심지어 부모를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봉' 정도로 생각하다가 결국 관계를 파괴하고 폐륜까지 저지르기도 합니다. 이는 부모를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 아닌 도구로 전락시킨 교만한 인식에서 비롯된 비극입니다.
그러나 다른 자녀는 성장하여 자신 또한 부모가 되어보니, 비로소 자신들의 부모가 얼마나 위대한 사랑과 희생으로 자신을 키워냈는지 깨닫고 진정으로 공경하게 됩니다. 이처럼 부모를 향한 인식이 성숙할수록 그들의 삶 또한 더욱 풍요롭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점점 예수님을 그분의 참된 모습, 곧 온 우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느님으로 온전히 인식해 나가야 합니다. 이 과정은 때로는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함 앞에서 두려움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깊은 겸손과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구약성경의 야곱은 처음에는 불콩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형 에사우처럼 하느님의 선물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장자권을 가로챈 결과로 형 에사우가 군사 400명을 이끌고 자신에게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나 두려워 떨며 밤새 하느님께 매달렸습니다.
이때 야곱은 비로소 자신이 속임수로 얻으려 했던 장자권의 무게와 그 뒤에 숨겨진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며 겸손해진 야곱은, 결국 형 에사우와 극적인 화해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점점 우리가 편하게 여겼던 예수님을 참 하느님으로 인식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마지막 때, 온 우주의 주인이신 그분을 감당할 수 없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3년을 함께 동고동락했던 가장 가까운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었지만, 타볼 산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실 때, 그들은 두려워 몸을 떨며 얼굴을 땅에 대고 엎어졌습니다.
그들은 평소의 친근한 스승 예수님이 아니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룩한 하느님의 현존을 마주했던 것입니다.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따르던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비로소 온전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였던 사도 요한도, 요한 묵시록에서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보았을 때 죽은 듯이 그 발 앞에 엎어졌습니다(묵시 1,17 참조). 이는 예수님을 인간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보던 한계를 넘어, 그분의 신적인 영광을 온전히 인식했을 때 나타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사랑 가득한 분이시기에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동시에 그분을 인간의 범주에 가두지 않고 하느님으로 인식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영적 성장은 아이들이 부모를 알아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아이들은 처음엔 부모가 자신들에게 당연하게 모든 것을 해 주어야 한다고 여기지만, 나중에 자신들도 부모가 되어보면 부모의 희생과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거룩한 것인지 새롭게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 자체가 자신이 영적으로 성숙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점점 더 예수님의 모습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깊이 살펴야 합니다.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인 성 베네딕토는 '베네딕토 규칙서'를 통해 수도자들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적 여정을 '겸손의 사다리'로 제시했습니다.
이 사다리는 단순히 고개를 숙이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갈수록 그분의 위대함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미미한지를 깊이 깨닫는 영적 인식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 '겸손의 사다리'의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면, 수도자는 더 이상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자신의 참된 존재를 발견하게 됩니다.
성 베네딕토는 이 겸손의 사다리를 통해 인간의 교만을 벗어던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한낱 인간적인 스승이 아닌, 지극히 높고 거룩하며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으로 온전히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께서 온 우주의 주인이신 창조주이심을 빠르게 인식해 나갈 때, 우리는 그분을 만날 준비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 가득한 분이시라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그분을 인간적인 친구나 소원 성취의 도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여겨가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고, 우리가 마침내 그분을 온전히 마주할 준비를 하는 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하느님으로 만드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인간으로 볼 때가 아니라 하느님으로 볼 줄 알 때 나도 하느님이 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부주임 신부님이 한국에서 오는 날입니다. 지난 8월 25일에 비자 연장을 위해서 한국으로 떠났습니다. 원래 신부님의 임기는 8월까지였습니다. 저는 30개월은 짧으니 30개월 더 연장할 수 있는지 물었고, 신부님도 기꺼이 30개월 연장하겠다고 했습니다. 서울 대교구와 달라스 교구가 더 연장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비자 연장을 했으니 새로운 마음으로 남은 30개월을 기쁘고 즐겁게 지내기를 바랍니다. 지난 30개월이 씨를 뿌리는 시간이었다면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30개월에 많은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신부님과 함께 왔던 신부님들은 비자 연장을 하지 않고 모두 돌아갔습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어려움, 음식의 어려움, 문화의 차이,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이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이 있음에도 기꺼이 비자 연장을 선택해 준 부주임 신부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신부님과 함께 본당 설립 50주년 행사도, 서울에서 개최되는 WYD 행사도 준비할 수 있어서 든든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부주임 신부님은 함께 하자는 저의 이야기를 들었고, 저와 함께 하기 위해서 비자 연장을 하였습니다. 저는 말씀의 ‘힘’을 체험했습니다. 환자 방문을 통해서 고통 중에 있는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루게릭병으로 투병하는 형제님은 지금은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약해졌습니다.
형제님은 눈으로 움직일 수 있는 휠체어를 원했습니다. 형제님은 이곳저곳으로 알아보았지만, 휠체어의 가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저는 몇몇 분들에게 형제님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드러내지 않고 작은 정성을 모으는 발걸음이 있었습니다. 2주 후에 형제님이 원하는 휠체어를 마련하고도 남을 만큼의 정성이 모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형제님의 딱한 사정을 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통해서 교우들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형제님과 가족들의 환한 웃음이 세상의 어떤 꽃보다 아름다웠습니다. 교우들의 마음은 “너희 중에 가장 힘들고, 가장 아프고, 가장 헐벗은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머물렀습니다. 진심 어린 말은, 정성 어린 말은,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말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한 말은 반드시 결실 본다는 걸 체험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잘못한 이웃을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라고 하십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의 위선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악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참으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고, 해야 할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식별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내가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오늘의 성인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 순교자
인술도 신앙의 길도 함께 한 쌍둥이 형제 의술 베풀어...갖은 고문에도 신앙 지켜 순교
287~303. 아라비아 출생,
쌍둥이 형제. 의사와 약사의 수호성인.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는 아라비아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다. 시리아로 유학을 떠난 형제는 의학을 전공해 의사가 됐다.
이들은 이후 이탈리아로 건너가 시칠리아의 한 섬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의술'과 함께 '인술'을 펼쳤던 두 성인은 명의(名醫)로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는 무료로 진료해줘 사람들에게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또한 형제는 자신들을 찾아오는 환자의 병을 치료하면서 마음의 고통까지 어루만져줬다.
때로는 기도를 통해 치유 기적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형제 성인의 청렴한 생활과 겸손한 자세, 늘 하느님께 기도하며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믿게 됐다.
303년 이탈리아 전역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의 바람이 불었고 두 성인도 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환자들은 물론 만나는 사람에게 늘 하느님 말씀을 전했던 터라 이들은 즉시 체포 대상이었다.
이들은 갖은 고문과 배교 회유 끝에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두 성인이 순교한 뒤에 성인의 전구로 인한 치유의 기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훗날 유스티아노 황제는 두 성인의 삶을 칭송하며 콘스탄티노플에 거대한 성당을 지어 봉헌했다.
교황 펠릭스 4세도 로마에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 성당'을 지어 많은 이들이 두 성인을 현양하도록 했다.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는 아라비아 태생으로 쌍둥이 형제였다고 전해오는데, 그들의 전기는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므로 전설적이라고 한다. 그들은 시리아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실리시아(Cilicia)의 에게해 (Aegean Sea) 근방에서 살았는데, 그들의 의료기술이 남달리 뛰어나 그 명성이 널리 퍼져서 명의라는 높은 칭송을 듣고 살았다.
또한 열렬한 그리스도인이던 두 형제는 박해가 일어나자 실리시아의 집정관 리시아스(Lysias) 앞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다가 신앙 때문에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이들 외에도 그들의 형제이던 안티무스, 유프레피우스 그리고 레옹시오도 함께 처형당하였다. 이들의 순교 후에 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또 그들의 높은 신앙심을 증명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고 전해온다.
고스마와 다미아노는 이발사의 수호자이고, 루카 복음사가 다음으로 의사들의 수호성인이다.
성 닐로 (Nilus)
활동년도 : 910-1004년
신분 : 수도원장
지역 : 로사노(Rossano)
같은 이름 : 닐루스
성 닐루스(또는 닐로)는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 지방 로사노 출신의 그리스인으로서, 젊었을 때에는 고향에서 세리 일을 맡아 보았고, 젊은 여인과 함께 살았으나 아내는 아니었다고 한다. 940년에 그 여인과 아이가 죽자 그는 캄파니아(Campania)의 팔마(Palma)에 있는 비잔틴 수도원에 들어가서 40년을 살았다. 그가 유명 인사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뛰어난 선성과 지혜 때문인데, 성 데메트리우스 코로네 수도원의 원장이 되면서부터 더욱 두드러졌다.
그는 사라센인들의 침략으로 수하 수도자들을 데리고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와 인접한 곳으로 피신하여 벨레루치오(Vellelucio)에 정착하였다. 성 닐루스는 임종하면서 벨레루치오를 자신의 수도원을 위한 새로운 장소로 선포하였고 그곳에서 그로타페라타(Grottaferrata)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그는 그리스 수도자의 아버지로 공경을 받는다. 그의 세 번째 계승자인 그로타페라타의 성 바르톨로메우스(Bartholomaeus, 11월 11일)는 성 닐루스가 세운 수도원의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졌던 그의 수제자였고, 스승과 같이 찬미가를 짓기도 하였다. 또 그는 노련한 서예가였다.
성 치프리아노 (Cyprian)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안티오키아(Antiochia)
활동연도 : +3세기경
같은이름 : 치쁘리아노, 치쁘리아누스, 치프리아누스, 치프리안, 키프리아노, 키프리아누스, 키프리안
성녀 유스티나(Justin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활동연도 : +3세기경
같은이름 : 유스띠나
• 역사적인 확실한 근거는 희박하나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또는 치프리아노)는 안티오키아에 살던 이교도로서 잡귀신들을 불러 마술을 부리는 마법사였다고 한다.
그는 이런 일 때문에 그리스, 이집트, 마케도니아 그리고 심지어는 인도까지 두루 여행하면서 그의 능력을 과시하고 추종자들을 모았다.
그런데 이교도 청년인 아글레데스란 사람이 안티오키아의 신자이던 미모의 성녀 유스티나(Justina)와 사랑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키프리아누스에게 그녀의 사랑을 완전하게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고, 키프리아누스는 자신의 온갖 예식을 거행하였지만 유스티나의 신앙심 때문에 모든 것이 허사로 끝났다.
그는 자기 창고에 있는 모든 무기를 다 동원하여 유스티나에게 덤비는 악마를 불렀다.
그러나 유스티나는 십자가의 표지로 마귀들의 공격을 막아 내었다.
이에 그는 갑자기 자신이 무력해지면서 억누를 수 없는 어떤 무서운 힘에 압도당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자신이 오히려 위험한 지경에 빠진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악마의 도움을 구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악마가 그를 덮치고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지난날의 과오를 깊이 뉘우친 키프리아누스는 십자가를 만들어 악마의 세력에서 빠져나오는 행운을 맛보게 되자, 즉시 에우세비우스(Eusebius)라는 사제에게 달려가서 교리를 배우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온갖 마술 서적을 불태웠고,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희사하였으며, 마침내 아글레데스와 같이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사제가 되었고 또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성녀 유스티나는 수녀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체포되어 다마스쿠스(Damascus)로 압송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고문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신앙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들은 황제 앞으로 끌려 나가 재판을 받았으며, 니코메디아(Nicomedia, 오늘날의 이즈미트)의 갈루스(Gallus) 강 언덕에서 황제의 명으로 참수형을 당하였다.
그리고 이때 성 키프리아누스를 찾아와 위로하였던 테옥티스투스(Theoctistus)라는 신자도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매장되지 않고 방치된 채로 있었지만, 6일 후 신자인 선원들이 발견하여 로마(Roma)로 옮겨 갔다고 한다.
이들의 유해는 루피나(Rufina)라는 귀족 부인의 영지에 매장되었다가 후에 콘스탄티누스 성당 안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성 바오로 6세 (Paul VI)
신분 : 교황
활동지역 :
활동연도: 1897-1978년
같은이름 몬티니,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1897년 9월 26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콘체시오(Concesio)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는 어려서부터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변호사였던 그의 아버지 조르지오 몬티니(Giorgio Montini)는 일간지 ‘브레시아 시민’(Il Cittadino di Brescia)의 편집자로서 반교회적 사상과 투쟁하였고, 어머니 주디타(Giuditta Alghisi)는 교회 여성운동의 지도자였다. 허약한 체질에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이었으나 총명하고 신심이 깊었던 그는 1903년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체사레 아리치 학교(Cesare Arici Institute)에 들어가 1914년까지 공부한 후 아르날도 다 브레시아(Arnaldo da Brescia) 고등학교를 거쳐, 1917년 브레시아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서 통학하였다.
1920년 5월 29일 사제품을 받고 그는 같은 해 11월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과 교회법을, 로마 대학에서 문학을 배웠으며, 1922년부터는 교황청 외교관 학교(Academia dei Nobili Ecclesiastisi)에서 공부하였다. 1923년 3월 폴란드 바르샤바(Warszawa) 주재 교황대사 보좌관으로 파견되었으나 그곳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11월 로마로 돌아와 1년 동안 교회법과 외교학을 연구한 후 1924년 10월부터는 교황청 국무원에서 근무하였다. 1925년에는 이탈리아 가톨릭 학생연맹(FUCI)의 지도신부로 임명되어 파시즘 학생연맹과 대립하여 싸우기도 했다. 1931년 다시 국무원에 근무하면서 교황청 외교관 학교에서 교황청 외교사를 강의하였다.
그는 1937년 12월 13일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교황청 국무원장 에우제니오 파첼리(Eugenio Pacelli) 추기경의 비서로 발탁되어 몬시뇰로 임명되었다. 1939년 파첼리 추기경이 교황 비오 12세(Pius XII)로 선출된 후에는 새 국무원장 루이지 막리오네(Luigi Maglione) 추기경을 보좌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포로 문제, 유대인 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으며, 전쟁으로 집을 잃은 무주택자들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미국가톨릭복지협회(NCWC)와 교황청 간의 연락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국제 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is)와 국제 가톨릭 이주자위원회(International Catholic Migration Commission)의 설립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54년 11월 1일 밀라노(Milano) 대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며 왕성한 사목활동을 펼쳤다. 많은 성당을 신축 · 보수하고 사목방문에 힘쓰며, 교회를 떠난 노동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여러 작업장을 찾아다니며 복음의 사회교리를 설교하여 그들이 교회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힘썼다. 그는 평신도 사도직과 문화 활동을 장려하고 가톨릭 대학교와 신학교에서 사회과학을 가르치도록 권했으며, 그리스도교 노조 활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청소년 문제에도 큰 관심을 두고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1958년 12월 15일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 10월 11일)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된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위원회와 실무조정위원회의 임원직을 맡아 공의회 제1회기(1962년)에 참석하였다.
1963년 6월 3일 교황 성 요한 23세가 선종한 후, 6월 21일 새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를 교황명으로 택하고, 6월 30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바오로 6세 교황으로 착좌하였다. 그는 곧 공의회의 속개를 발표했고, 제4회기까지 열린 공의회는 1965년 12월 8일 폐막되었다. 제4회기(1965년) 때 지역 주교들에게 교황에 대한 자문 권한을 부여하는 영속적 기구로서 주교대의원회의 설립이 착수되었다. 그리고 공의회의 후속 조치로 전례 개혁, 미사 중 모국어 사용,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대화, 이웃 종교인 및 무신론자들과의 대화 등 가톨릭교회의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비행기와 헬리콥터를 타고 외국을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다. 1964년 1월에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12월에는 세계 성체대회 참가를 위해 인도 뭄바이(Mumbai)를 방문하였다. 1965년에는 미국 뉴욕의 국제연합(UN) 본부를 방문해 평화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고, 1967년에는 터키 이스탄불(Istanbul)을 방문했다. 1968년에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속한 콜롬비아를 찾아 보고타(Bogota) 세계 성체대회와 메데인(Medellin)의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연합회 총회에 참석했으며, 1969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교회일치사무국과 중앙아프리카를 방문하였다. 1970년에는 아시아를 방문하던 중 필리핀 마닐라에서 암살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다수의 교황 문헌을 통해 교리를 해석하고 세상 속 교회의 역할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대표 문헌으로는 성체성사에 대한 전통적 교리를 재확인한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 1965),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의 공동 발전을 위한 방법들을 제안한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 부부 관계와 정결의 가치, 올바른 자녀 출산을 위한 부모와 의료인과 사목자의 역할을 설명한 “인간 생명”(Humanae vitae, 1968), 현대 세계에 부응하는 선교의 방향을 논한 “현대의 복음 선교”(Evagelii Nuntiandi, 1976) 등이 있다.
공의회 이후 전통주의자들의 반발과 국제 정세의 불안 등으로 어려움도 겪었지만,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평신도와 여성의 교회 참여를 증진하고 허례허식을 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의회 제3차 회기를 앞둔 1964년에는 여성, 수도자, 평신도의 공의회 입회를 허용했고, 1970년에는 여성 최초로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Teresia, 10월 15일)와 시에나(Siena)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4월 29일)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또한 그는 교황으로 선출될 때 받았던 삼중관(tiara)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78년 8월 6일 카스텔 간돌포에 있는 교황 별장에서 미사를 드리다 심장마비로 선종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인 1963년 교황으로 선출된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65년까지 공의회를 이끌었으며, 공의회 문헌을 반포하고 결의사항을 실행해 나갔다. 1964년에는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해 정교회 수장이었던 아테나고라스 1세 총대주교와 만나 그리스도교 일치에 앞장섰고, 세계 성체대회 개최지인 인도를 방문하며 아시아 땅을 밟은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1965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를 제정했으며, 재임 기간 중 추기경단을 꾸준히 늘리고 제3세계 출신을 발탁하는 등 가톨릭교회의 보편성을 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1969년 한국 최초의 추기경인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임명한 교황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은 2014년 10월 19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성 요한 23세와 더불어 가톨릭교회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이끈 주역인 제262대 교황 바오로 6세의 시복식을 거행하였다. 시복식은 바오로 6세 교황 재임 중 제정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 제3차 임시총회 폐막 미사 중에 이루어졌다. 바오로 6세 교황의 시복은 그의 전구(intercession)로 일어난 기적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5월 9일 승인함으로써 결정되었다. 본인과 태아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낙태를 종용받았던 미국 캘리포니아의 임신부가 한 이탈리아 수녀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그 수녀가 바오로 6세 교황의 상본(holy card)과 제의 조각을 임신부의 배에 놓고 기도한 뒤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2018년 10월 14일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가 열리는 중에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자신을 시복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성식 미사에서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바오로 사도처럼 새로운 경계를 넘어서, 복음 선포에서나 대화에서나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외향적인 교회의 예언자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평생을 보내셨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당신 스스로 지혜로운 길잡이 역할을 하셨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더불어 우리의 공동 소명, 곧 성덕을 향한 보편적인 소명을 살라고 오늘도 우리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대충대충 사는 것이 아니라, 성덕을 살라고 권고하십니다.”라고 그의 성덕을 칭송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시성으로 역대 교황 중 성인은 82명(대립교황 교부 히폴리투스 포함), 복자는 9명이 되었다. 20세기 교황 중에서 성인품에 오른 이는 비오 10세(Pius X, 8월 21일), 요한 23세(Joannes XXIII, 10월 11일),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0월 22일)와 더불어 총 4명이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2월 6일 교황청 경신성사성을 통해 성 바오로 교황의 기념일을 제정하는 교령을 발표했다. 일반적 관례에 따르면 성인의 축일은 선종일로 지정하는데, 선종일인 8월 6일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임을 고려해 5월 29일을 선택 기념일로 지정했다. 5월 29일은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1920년 사제품을 받은 날이다.
*
*온유하고 혁신적이며 참된 그리스도인 성 바오로 6세 교황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편집장 안드레아 몬다는 41년 전 1978년 8월 6일 선종한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모습을 소개했다. 그는 1900년대 ‘가톨릭 운동’ 역사의 참된 주인공이었다.
Andrea Monda / 번역 이창욱
1978년 8월 6일은 성 바오로 6세 교황(세속명: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의 ‘천상 탄일(dies natalis)’이다. 1900년대의 이 위대한 인물에 대한 이해는 하느님 백성 안팎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과의 영적인 가까움을 전혀 숨기지 않았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6년 재임기간 동안에는 그 이해가 더욱 증폭됐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선임자인 성 요한 23세 교황의 선종 이후 중단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무사히 재개했고,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을 반포했으며, 최초의 해외 사도적 순방과 교회 일치 운동에도 박차를 가했다. 1897년 9월 26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브레시아 주(州) 콘체시오에서 태어나 냉전과 같은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로 기록됐던 그 끔찍한 해에 선종함으로써 20세기의 3분의 2를 거쳐간 그의 삶은 풍성한 모자이크화처럼 수많은 측면을 탐구할 수 있는 인물이다.
*정치적 차원
그 다양한 측면 가운데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말년 생애에서 필자는 그의 정치적 차원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지난 5월 22일부터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에 실린 사회학자 주세페 데 리타(Giuseppe De Rita)와의 인터뷰 시리즈를 통해서다. 여기엔 이탈리아와 유럽의 위기, 서양 사회에 대한 커다란 난관의 순간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역할에 관한 대화가 담겼다. 데 리타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성 바오로 6세 교황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25-1933년 이탈리아 가톨릭 대학 연맹(Federazione Universitarià Cattolica Italiana, 이하 FUCI)의 전국 지도신부를 맡았던 순간부터 1900년대 정치에서 가톨릭 운동사의 참된 주역이었다. 이와 관련해 이 토론에 발제자로 참여한 약 25명의 학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특히 사회 투자 연구원(Centro Studi Investimenti Sociali, CENSIS)의 설립자 주세페 데 리타는 이탈리아 정치가 알치데 데 가스페리(Alcide De Gasperi)가 이끈 기독 민주당(partito della Democrazia cristiana)의 출범을 통해 전쟁의 비극에서 이탈리아가 벗어나는 데 있어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활동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강조했다. 이 견해는 이탈리아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긴 역동의 시기에서 또 한 명의 중심인물은 알도 모로(Aldo Moro)였다. FUCI에서 활동하던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몇 년 동안 알도 모로를 알았고, 끝까지 그와 함께했다. 5월 13일 라테라노 대성전에서도 기념비적인 언급을 통해 그를 기억했다. “주님께서는 이 착하고, 온유하며, 지혜롭고, 무고하며, 친구였던, 알도 모로의 안전을 위한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새로운 욥처럼,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은 그가 이 세상을 떠나기 불과 3개월 전인 1978년 비극적인 봄에 일어난,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악(알도 모로의 암살)에 대해 하느님께서 갚아달라고 탄원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인터뷰 시리즈는 오늘 (이탈리아 주교회의 의장) 괄티에로 바세티(Gualtiero Bassetti) 추기경의 언급으로 끝을 맺는다(세 번째 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 바세티 추기경은 다른 대담자들에 의해 부각된 예언이라는 주제에 관한 몇 가지 실마리를 얻으면서, 오늘날의 이탈리아를 위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활동적인 참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하면서도 혁신가들입니다. 신앙과 절제된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에 온유해야 합니다. 혁신이란 세상(세속)의 정신, 곧 이기주의, 허무주의, 소비주의와 외국인 혐오주의를 반대하며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예언적인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탈리아 주교회의(CEI) 의장이기도 한 바세티 추기경은 인터뷰에서 (이탈리아 정치가) 조르조 라 피라(Giorgio La Pira)를 언급했지만, (그 인물에 대한) 묘사는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모습에도 아무런 문제없이 적용할 수 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온유하고 혁신적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인 오늘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천상 탄일을 기억한다. 지난 1978년 8월 6일 고령의 교황은 삼종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훈화를 마무리했다. “그 무엇과도 비할 데 없는 운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영예롭게 했거나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받은 책임인 말과 행동으로 논리적인 결과에 맞게 살아간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그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운명을 이미 맛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며, 교회 전체도 그렇게 확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