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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스크랩 호아퀸 로드리고(Rodrigo)의 아랑훼즈 협주곡 (Concierto de Aranjuez)
isunamana 추천 0 조회 1 13.07.22 16: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Concierto de Aranjuez (아랑훼즈 협주곡) 호아퀸 로드리고(Joaquin Rodrigo 1901~1999)

지금 흘러나오는 이 음악은 호아퀸 로드리고가 1940년 38세의 나이에 기타와 오케스트라를 위하여 작곡한 Conciertto de Aranjuez for Guitar(아랑훼즈 협주곡)입니다.
이 아랑훼즈 협주곡은 당시 친구이자 당대 스페인 최고 기타리스트인 “레히노 사인스 데 라 마사”(Regino sainz de la Maza. 1897~1982) 를 위해 작곡한곡입니다.
"레히노 사인스 데 라 마사"는 스페인이 낳은 작곡가로 주로 훌라멩고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 활동을 하는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마드리드왕립 음악원에서 수학하면서 프란시스코 타레가의 제자인 “다니엘 포르테아”(Daniel fortea)로 부터 사사를 받었으며 젊은 시절부터 스페인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던 기타리스트였습니다.
1940년 12월 레히노 사인스 데 라 마사의 기타독주로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은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초연되었습니다.
모두들 오케스트라와 기타의 협연시 발생하는 음량차이로 인해 처음에는 협연이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연주회는 대성공을 거두면서 청중과 비평가로부터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아랑훼즈는 마드리드 남방에 있는 18세기 부르봉왕가의 여름궁전으로 로드리고가 좋아하는 시대의 한 상징이었습니다.
마하스(젊은 여인들)와 투우사 그리고 중 남미의 선율로 특징지을 수 있는 이 협주곡은 나포레옹 이전의 마지막 왕이 머물던 궁전의 생명속으로 혼을 불러들이고자 한 의도였을 것입니다.
아랑훼즈 협주곡이 지닌 최대 강점은 에스파냐라는 나라와 민족유산을 음악으로 멋지게 승화시켜 그려냈다는 점이고. 또 에스파냐 민속 악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타를 사용해 지중해 생활의 색깔. 분위기. 멜로디. 그리고 발랄함이 커다란 슬픔으로 돌변하는 역설을 용케 포착하였다는 것입니다.
로드리고는 이 협주곡을 쓰면서 “신과의 대화”라고 표현 했다고 합니다.
극적인 영감과 낭만적인 선율을 유려하게 수를 놓아 조화롭게 흐르게 다룬 것은 그의 내재해 있던 고통과 슬픔의 환란들을 고스란히 여기에 담아낸 인생 자체였기 때문일 것입이다.



< 마드리드 남쪽 타호(Tajo)강 주변에 있는 부르봉 왕가의 여름별장인 아랑훼즈 궁전>

아랑훼즈 궁전은 합스 브르크(House of Habsburg)시대의 역사적 가치가 높은 스페인 왕궁의 중요 유적지로 아름다운 정원과 주변경관이 뛰어난 관광지입니다.
그러나 이 궁전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것은 물론 궁전의 아름다움도 있겠지만 스페인이 자랑하는 시각 장애인인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궁전은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 삼아 1554년 부터 1598년 까지 44년간 필립(Philip) 2세 시대에 후안 바우티스타 데 톨레도(Juan bautista de Toledo)와 후안 데 헤레라(Juan de Herrera)에 의해 건축되었습니다.
아랑훼즈 궁전은 2001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바 있읍니다.

호아킨 로드리고(Joaquin Rodrigo 1901~1999)

<호아퀸 로드리고(Joaquin Rodrigo)>
로드리고는 맹인 작곡가입니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풍부하여 양친은 저명한 음악가에게서 기초교육을 받게 하여 시력의 결함을 갖고 있으면서도 장애를 딛고 일어선 스페인의 대표적 작곡가입니다.
그는 1901년 11월 22일 스페인의 발렌시아주 북부에 위치한 사군토(Sagunto)에서 태어났습니다. 불과 3살(1904) 때 그는 악성 디프테리아 로 인해 완전히 시력을 잃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시력회복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개안에 성공하지 못했고 일생을 어둠속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으로 보는 세계와는 차단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음악에 깊은 관심과 정열을 쏟았습니다.
특히 기타에 대한 강한 애착은 앞을 보지 못하는 로드리고에 있어서 삶의 전부라고 할 만큼 생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파리에서 음악공부를 하면서 피아노로 작곡과 연주를 했는데 이곳에서 부인인 터키의 피아니스트 “빅토리아 카미(Victoria Kamhi)”와 결혼을 했고 스승인 스페인의 저명한 작곡가 “마누엘 데 파야(Manuel de Falla)”를 맞났습니다.
스페인 내란이 끝난 뒤 1939년 스페인에 정착해 음악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국영 라디오를 위한 음악자문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30년 동안 마드리드 대학교에서 “마누엘 데 파야” 음악 강좌를 맡아 후세 음악 교육에도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시각적인 유한한 세상과 편협하고 제한된 세상을 초월하여 영감과 비약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다 높고 넓은 음악의 세계를 살다간 음악가였습니다.
평생 수많은 명예를 누리고 살은 로드리고였지만 1991년 국왕 “후앙 카를로스 1세”로부터 수여받은 ”아랑훼즈 정원의 후작”이라는 작위를 가장 자랑스러워했다고 합니다.


<호아퀸 로드리고(Joaquin Rodrigo)와 빅토리아 카미(Vitoria Kamhi)>
신혼시절에 아랑훼즈에 머물렀던 로드리고는 맹인이었던 탓에 궁궐의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그 곳에서 받았던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가 스페인 내전을 피해 파리에 머무는 동안 아랑훼즈 궁궐을 회상하고 작곡한것으로 전해집니다.
수 없이 희생된 무고한 생명들의 넋을 위로하며 또한 유산으로 첫번째 아기를 잃었던 절망감을 표현한 곡이기도 한 이 협주곡은 화려함이 금새 쓸쓸함으로 변해서 허공속으로 살아져가는 느낌을 주는데 유럽에서 가장 강력했던 스페인 왕실 궁궐의 영화도 생명의 덧 없음 앞에서는 색이 바래져 버린다는 것을 표현한것 같습니다.
이 부부는 천수를 다하며 살다가 1997년 7월 21일 아내 "빅토리아 카미"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로드리고"는 2년후 1999년 7월 6일 그 뒤를 따랐다 하는데 두사람은 아랑훼즈 묘지에 함께 묻혀 있다고 합니다.






Kary karr(케리 카 1941~)콘트라베이스(Contrabass) 연주



<케리 카가 콘트라베이스로 연주하는 "아랑훼즈의 협주곡">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인 케리 카(Kary Karr)는 태평양 전쟁 발발하기전인 1941년 1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1918년 혁명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러시아계 유태인이다.
    7대에 걸쳐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영재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조부 친구인 "디멘 스타인"의 지도를 받다가 "헤르만 라인하겐"밑에서 본격적인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 남 캘리포니아대학과 줄리어드 음악학교에서 수학하였고 "레너드 번스타인"의 인정을 받으면서 1962년 뉴욕에서 데뷔 이때부터 어느 오케스트라에도 소속하지 않고 독주활동에 전념. 콘트라베이스를 대형 첼로처럼 쉽게 다루며 이 악기가 독주악기로서 인정받는데 큰 역할을 한 음악가이다.


Jose maria carreras(호세 카레라스 1946~)성악가


    호세 카레라스(Josep maria carreras)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951년 생활고를 탈피하기 위하여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였다가 모국으로 돌아온다.
    헤어숍을 경영했던 어머니는 그에게 최상의 자율을 주었고 그는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행복해 했다. 그의 나이 6세 때 헤어숍 손님을 청중으로 삼고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중 “여자의 마음”(La Donna e Mobile)을 정확한 음정으로 모두 소화해 내 이때 부터 그의 천재성을 보여준 유명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첫 스승은 “프란시스코 푸이”였지만 이후 “후안 루악스”와 “몽세라 카바예”를 자신의 예술적 아버지와 어머니라 부르면서 역량을 키워 나갔다.
    갑자기 1987년 백혈병으로 무대에서 쓰러져 나간 후 2년 만에 병을 회복한 그는 백혈병 재단(Jose Carreras international Leukemia foundation)을 설립하여 골수기증 활성화를 위해 공연수익금 상당부분을 부담한다.
    호세 카레라스는 한국과의 인연도 많다. 소프라노 신영옥. 조수미등과 해외 오페라 무대에서 공연한 것을 비롯하여 2001년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빅 3테너> 공연을 위하여 처음 한국을 찾았고 2002년 한일 월드컵 요코하마 결승전에서 축하공연도 했다.
    2003년에는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소프라노 신영옥과 <빅 콘서트>를 한 바도 있다.


밀바 (Milva 1939~)


    밀바(Milva)는 1939년 이탈리아 북부 코오로(Goro)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Maria IIva Biolcati 이며 1955년 Bologna로 이주하여 Emilia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야간 사교클럽에 사브리나(Sabrina)라는 이름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1959년 Rai에서 개최된 신인 콩크르에서 우승하여 첫 번째 명성을 얻었고 1960년 Pantera di Goro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음악세계에 나서게 된다.
    1961년 처녀 출전한 산레모(Sanremo) 가요제에서 [서랍 속의 바다]라는 곡으로 3위에 입상하여 서서히 그녀의 실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 하였고 같은 해에 “Labellezza di Ippolita"라는 영화에 처음 출연하여 주목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촌티를 벗지 못한 22살의 시골처녀가 “코오로의 암표범”이라는 애칭을 가진 대 스타가 되기까지는 이탈리아 귀족출신의 “마우리치오 콜냐티”와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41살의 초로에 접어든 콜냐티는 이탈리아 국영 TV의 연출자였는데 훗날 그녀의 남편이 되기까지 헌신적인 노력을 다하면서 뒷바침을 해줘 밀바의 가도는 밝게 빛났으며 지적 내음이 물신 풍기는 세련된 칸초네의 여왕이 되어져 갔다.
    그들은 1961년부터 1969년 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Sanremo 가요제에 출전해서 모두 입상을 하는 대 기록을 세웠고 “비련(Nessuno Di Voi)을 비롯한 수많은 히트곡들을 배출해 내면서 그들 콤비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그녀의 젊음과 욕망은 연극에 대한 불꽃같은 집념으로 변하여 8년간의 결혼생활은 파경을 맞게 되고 30살의 미남 연극배우 “마리오 피아베“와의 스캔들로 말미아마 짝사랑의 연인이 결국 자살하는 비극을 보아야 했다.
    시골띠 소녀에서 “코오로의 암 표범”이 되기까지 그녀는 이렇게 많은 변모를 거듭 했고 지금은 콜냐티와의 사이에서 난 딸 “마르티나”와 함께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1972년 밀바는 내한공연을 가졌었는데 그의 열정적인 무대 매너와 당시 모처럼 세계적인 대형가수에 대한 호응이 좋아 한국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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