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수락산둘레길/靑石 전성훈
디스크로 허리와 왼쪽 다리 그리고 무릎이 좋지 않아, 몸 상태에 따라 행동이 좌우된다. 그날그날 상황에 맞춰서 근린공원을 걷거나 동네 야산인 초안산을 걷기도 하고, 어떤 날은 아예 바깥출입은 꿈도 꾸지 못하고 집안에서 보내기도 한다. 봄이 무르익으면서 몸이 조금씩 호전되는 듯하다. 5월이 지나고 나서부터 둘레길을 걷고 싶다는 유혹이 찾아와 자주 하늘을 쳐다본다. 주말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다. 새벽에 잠이 깨어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조용히 일어나 거실로 나와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고 바깥을 살펴보니 간밤에 비가 내린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잘됐네, 아침 일찍 둘레길 순례에 나서자’하고 맘속으로 읊조린다. 아침기도를 바치고 체조를 하고 메일을 확인하고 부지런히 아침밥을 먹으며 짐을 챙긴다. 생수 2개, 초콜릿 2개, 오이 하나, 막대사탕 한 개를 배낭에 넣고 우산과 필기도구, 수첩 그리고 돋보기도 준비한다. 어디로 갈까 생각하다 수락산 둘레길로 마음을 정한다.
창동역에서 전철 시간표를 확인하니 2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 마을버스를 탈까 찾아보니, 마을버스도 한참 있어야 한다. 별수 없이 창동역으로 되돌아가 소요산행 전철이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주말에는 평일보다 배차 간격이 더 벌어지기 때문에 그러려니 한다. 도봉산역에 내려서 창포원을 지나 상도교 다리를 건너면서 중랑천을 내려다보니 백여 명은 될 사람들이 중랑천변을 달리고 있다. 의정부에서 도봉구까지 단축마라톤이 열린다는 현수막이 보인다. 수락산 입구 개울에서 아주 오랜만에 반가운 소리가 들린다. 몇 년 전 초안산과 동네 근린공원에서 듣고는 더는 듣지 못했던 맹꽁이 노랫소리이다. 반가운 마음에 조금 더 잘 들어보려고 귀를 기울인다. 며칠 전 한바탕 비가 쏟아진 덕분에 개울에는 제법 많은 물이 흐른다. 돌다리를 건너기 전부터 여기저기에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는다는 주인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벽보가 붙어있다. 예전에 비슷한 경험을 했기에 사랑하는 강아지를 잃어버리고 애타는 마음으로 초조하게 기다릴 주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계단을 오를 때도 힘들지만 내려갈 때 무릎이 시큰거려서 조심하면서 걷는다. 아주 힘들면 시도조차 할 수 없지만, 지금은 그런대로 견딜만하다. 숲속 간이탁자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수첩을 꺼내 글을 쓴다. 숲에는 거의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산새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아 정말로 고요하고 적막이 흐른다. 늘 혼자 둘레길을 걷거나 산행을 하기에 외롭거나 심심하거나 적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푹 쉬며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걷는다. 수락산 먹자골목으로 연결되는 길목에는 오르락내리락 계단이 많다. 무릎이 시원찮은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극기 체험코스이다. 깔딱고개처럼 숨을 헐떡이는 게 아니라, 연골판이 닳아 무릎이 아픈 탓에 계단을 내려가는 게 괴로운 일이다. 무사히 극기훈련을 마치고 천상병 시인을 기리는 골짜기로 들어서니 많은 사람이 ‘무장애 숲길’을 걷고 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 있도록 조성된 숲길이다. ‘무장애 숲길’을 벗어나니 그 많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걷는 이는 나 혼자뿐이다. 갑자기 머리 위로 무언가 떨어지기에 만져보니 허연 수술투성이 밤나무 꽃이다. 얼마 전까지 숲속에 진한 향기를 풍기어 여러 사람 가슴에 타오르는 정염의 불길을 피우던 비릿한 그 냄새가 그립다. 한 시간 정도 걸으면 오늘 여정이 마무리될 것 같다. 간간이 바람이 불어 시원하지만 땀을 흘린 등허리는 척척하다. 의자에 앉아 오이를 먹으면서 쉬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바로 옆에 앉더니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는다. 그 순간 아주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른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무례한 행동에 놀라 허둥지둥 짐을 챙기고 그 자리를 벗어난다. 수락산 채석장 쉼터가 마지막 쉼터이다. 시간이 오전 10시 30분을 넘어서자 따사로운 햇살이 비친다. 하늘에는 구름이 가는 듯 서 있는 듯 흐르고, 새파랗게 물든 나뭇잎 사이로 한 줄기 바람이 즐거운 듯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간다. 이제는 당고개역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훨씬 위험하다. 조심스럽게 여정을 마무리하며 무사히 걸어와 준 육신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그래, 잘 해냈구나, 고마워, 장하다.’ (2023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