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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강단-469 베데스다의 환자(요한복음5장1-9절)
성경말씀은 요한복음 5장 1절에서 9절까지 봉독합니다.
[요한복음 5장]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지난 시간에 우리가 찬양곡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사실 4장을 다 끝낼려니까 조금 미안해서 조금 남겼죠.
4장 43절 이하에 어떤 사건이 있는데,
[요한복음 4장]
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뭘 봤을까요?
여기 지금 요한복음 1장부터 4장 42절까지에는 예루살렘에서 큰 이적 행한 것 안 나오죠?
여태까지 있었던 이적 해봐야 갈릴리 가나에서 이적만 있지 딴 얘기는 없단 말이죠.
그런데 여기 갈릴리 사람들이 갈릴리에서 예수님이 일 할 때는 잘 안 믿었지만, 예루살렘에 가서 예수님이 하는 것을 보고 믿었다는데, 뭘 봤는지 요한이 이런 것을 보면 많이 생략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서 행하신 여러 이적을 봤을 거거든요.
봤는데 그것을 낱낱이 다 기록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속에는 다른 복음서에 있는 수많은 기적들을 그냥 생략해버립니다. 대부분 생략해버리고 아주 특색있는 것 몇 가지만 딱 추려서 이야기해요.
그러면서 나중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몇번 행했는지 병자를 몇사람 고쳤는지 귀신을 몇마리 쫓아냈는지 이런 것을 다 기록할려면 그 기록물을 이 세상에 두기에 모자란다. 과장이 심하지만..
그러니까 기적같은 것은 꼭 필요한 몇 가지만 쓰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생략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별로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고 그렇게 했었는데, 왜 그렇냐 하면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거든요.
나사렛이라는 동네가 지금 꽤 유명한 동네가 되었습니다만, 옛날에는 이름도 없는 동네야.
그러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그런 것을 봤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거기서는 별로 일을 믿지도 않고 기대지도 않고 해서 아무 일도 안 하시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는 꽤 여러 이적과 표적과 기적을 행하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그런 것을 봤기 때문에 예수님이 갈릴리에 왔을 때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고 이렇게 했다는 거야.
45절에,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 줄긋고 ‘무슨 일인지 모른다.’
모르지만, 어떻든 믿을만한 뭘 보여준 거예요. 그렇죠?
적어도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사람들도 예수님을 부정할 수 없는 그런 대단한 어떤 역사가 있었다 하는 것을 암시하지만, 그런 것을 요한이 상당히 과감하게 생략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은 그 모든 기적을 낱낱이 들추어가지고 자꾸 기적 기적 하게 되면 성도들이 어떻게 되느냐?
맨날 기적이나 볼려고 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나중에 가서 보면 이 정도 딱 쓰는 것은 너희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가지고 기적 몇번 행했다 이런 것 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가버나움과 갈릴리 가나와는 상당히 거리가 됩니다.
제법 차로도 한참 가야 될만큼 돼요. 제가 계산을 못해 봤는데, 제법 거리가 되는 곳인데,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거의 죽게 되었는데, 가서 고쳐줄려고 하면 가는 동안에 죽어버릴는지 몰라요.
물론 예수님은 죽은 것도 살려내고 나흘되어서 냄새나는 것도 살려내는데..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여전히 표적과 기사를 보고 믿을려고 하는 그런 자세에 대해서 좀 언짢은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 사람은 별로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렇죠?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빨리 내 아들 죽기 전에 내려오라.
순전히 자기 중심으로.. 그럴 수 밖에 없죠.
지금 아들이 죽어가는데 이것 저것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깜짝 놀랄 말씀을 하시는데,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대단한 이야기죠.
예수님께서 지금 갈릴리 가나와 가버나움까지 거리로 하면 총 거리를 제가 알아봤으면 좋겠는데, 하여튼 당장 달려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차로 제법 20-30분 가야 되는 꽤 먼거리예요.
다시 나중에 지도를 가지고 거리를 재어봐야 되겠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거기까지 가지 않고 공간 거리를 초월해서 방장 죽어가는 아이를 살렸다는 거예요. 고쳐주셨다는 거죠.
..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러니까 지금 이 신하와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 가는데 도중에 맞으러 나온거죠. 그게 어제야.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니까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것 아닙니까?
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는 그 순간에 살아버린 거죠.
이런 분 같으면 이분이 누구시냐?
이적이라든지 어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든지 그 행하는 이적을 보든지간에 요한은 항상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이분이 누구시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라면 이분이 누구신가?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는 분이라면 이분을 누구라고 믿어야 하느냐?
요한은 그런 말 안 하지만 눈치가 빠르면 알아들어야 돼.
그렇게 계속해서 마침내 우리 입에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는 말이 나올 때까지 계속 요한이 아주 집요하게 아주 집중적으로 한 주제를 딱 걸고 이렇게 증거하는 거죠.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번째 표적이니라
이런 말도 아무도 안 씁니다. 요한이니까 첫 번째 두 번째 이렇게 쓰는 거죠.
그리고,
[요한복음 5장]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아까 명절이 유월절이니까 이번 명절은 오순절이든지 아니면 장막절이든지 아니면 그 이듬해 명절이 되겠는데,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행각 다섯이 있는 것을 보면 꽤 오래전부터 병을 앓는 사람들이 와서 거기에서 치유받기 위해서..
여러분 병을 앓게 되면 나을런지 안 나을런지 모르지만, 낫는다는 소문만 나면 거기 사람들이 모이거든요.
병원에 가니까 요즈음도 더한 것 같아요.
종합병원에 종합환자들이 다 모였어. 온갖 병자들이 다 병원에 있는 것 같아..
또 전라도 무슨 측백나무 숲이 있는데, 측백나무 숲에 산림욕이 병자를 치유한다하니까 거기에 다 모였어.
또 방사성 동이원소 치료실이라고 해서 갑상선 암 잘 하는 데 가니까 세상 여자들이 다 갑상선 암 걸린 것 같아.. 병원 복도가 꽉 찼어..
그러니까 병에 걸리면 어디 나을 수 있는 길이 없는가..
그렇게 여기에도 행각 다섯이나 지어놓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거죠.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괄호안에 있는 것은 후대에 부연 설명을 한 겁니다.
왜 그런 사람이 모였느냐?
원래 성경에 있던 것이 아니고, 후대에 사람들이 왜 행각 다섯을 지어놓고 사람들이 모였느냐? 설명을 한 거예요.
5 거기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나이가 몇 살일까요?
이 사람이 38년 된 병자라고 하면 문제죠.
병이 걸렸는데 오래 안 나았어. 어떻게..
어지간한 병은 38년 되면 나아버리든지 죽어버리든지 하겠죠.
이것은 죽지도 않고 낫지도 않고 이렇게 오래 간 거야.
그래서 예수님께서 거기 행각 다섯이나 있으니까 얼마나 병자가 있겠어요?
많이 있는데, 아무에게도 예수님께서 은혜를 베푼게 아니고, 딱 그 한 사람만 지목해가지고,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참 부질없는 질문이예요. 그렇죠?
암시롱. 그렇죠?
아시는 말씀 하시나마시나죠.
낫고자 그렇게 38년간 누워 있는데,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어요.
저는 가끔 이것을 볼 때 주례하는 사람이 ‘사랑합니까?’ 하고 그것을 뭐하러 묻습니까?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그 사람 대답이죠.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사람은 병 낫는 것은 뒷전이고 먼저 한번 내려가봤으면..
한편 그런 생각을 했을 거야. 나 같으면 미리 물에 들어가 있지..
그러니까 지금 병 낫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먼저 들어가봤으면 좋겠는데, 자기는 몸이 불편하니까 몸이 덜 불편한 사람이 항상 먼저 들어가버리니까 자기는 안 낫는 거야.
예수님께서 더 비약을 합니다. 이제는 낫는 것도 물에 들어갈 필요도 없고 그냥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끝난 거죠.
물에 들어갈 것도 없고 병 나을 것도 없고, 들고 가면 끝난 것 아닙니까? 그렇죠?
예수님이 유모어가 있는 것 같아..
묻기는 뭐하러 물어봐가지고..
‘내가 너를 넣어줄께’ 한 것도 아니고.. 그렇죠?
병이 낫는다는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우리 보통 사람 같으면 ‘내가 들고 걸어갈 수 있으면 내가 미쳤다고 여기 누워 있겠소?’
그렇게 할 것 같은데, 그냥 이 사람이 걸어가 버렸어요. 그렇죠?
그런데 이게 굉장히 예수님 조용하게 그 사람에게 은밀히 다가가서 한 거야.
은밀히 다가가서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문제는 이 날이 안식일이라는 거예요.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이 못된 것들 봐요.
병 나았으면 축하를 해야지..
그게 안식일이라고 또 딴지를 걸고 무슨..
이런 것은 싸대기를 한 대 맞아도 시원찮아..
..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몰라요. 몰라. 글쎄..
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살짝 고쳐주고 피했다니까..
여러분 예수님께서 얼마나 우리 병을 고쳐주고 싶어 하느냐 하면, 몰래 살짝 눈치 봐가면서 이렇게까지 고쳐주고 싶어 하시는 거야.
말썽 날것 뻔히 알면서.. 병자를 보는 안 고쳐주고는 못 배기는 거야.
그래서,
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그런데 14절이 중요한거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자 그러면 적어도 이 사람의 병은 죄와 상관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죄와 상관이 있다는 거예요.
죄문제가 해소되었으면 벌써 나을 수 있었는데, 죄문제가 해결이 안 되고 고집을 가지고 38년간 낫겠다고 그렇게 있는 거야.
그런데 이 사람은 죄를 회개할 때까지 기다리면 죽을 때까지 회개 안 할것 같아.
그래서 예수님께서 미리 선불로 병부터 고쳐주고 그 다음에 교훈하는 거야.
우리 같으면 회개해야 병 낫는다. 이렇게 말할텐데, 병 먼저 고쳐주고 더 심한 것이 걸리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렇게 낫게 해 줬는데, 또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된다는 거예요?
더 심한 게 걸릴 수 있다는 거죠.
모든 질병이 다 죄의 결과라고 하기는 어려워요.
그러나 어떤 질병은 죄와 상관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병이 나거나 할 때, 병 낫기를 위해서 죄를 자복 하고 서로 위하여 기도하라.
죄를 자복할 것이 있는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감기들었는데, 너 무슨 죄 지었지? 그렇게 하지 말고..
감기라는 것은 병적인 감기도 있고, 그 시절을 따라서 기온차에 적응하기 위한 우리 몸의 적응반응일 수 있다는 거예요.
별 문제가 아닐 수 있어요.
요즈음처럼 독한 바이러스가 인간들이 괜히 바이러스 가만히 놔두면 낫는 것을 자꾸 바이러스 건드려서 성질 돋구어서 바이러스가 많이 업그레이드 되어서 약에 대한 내성이 길러져서 어떤 약도 잘 안 듣는 그런 바이러스고 나오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우리 어릴 때는 감기라는 것은 그저 뜨겁게 꿀물이나 무우국 끓여먹고 땀 내면 낫는 건데, 요즈음 신종플루는 잘 안 돼요.
돼지독감이나 조류독감은 사람보다 훨씬 몸이 온도가 높은 거야.
이런 닭이라든지 이런 새들은 체온이 41.5도나 되는데, 그런 데에서 안 죽는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사람을 41.5도 이상 올릴 수 없잖아요.
그러면 사람 머리가 가버릴텐...
그래서 무섭다는 거예요.
그런 바이러스는 땀내어서는 안 돼요.
그래서 인간들이 자꾸 잔머리를 써가지고, 여러분 의학의 상당 부분은 너무 무식하게 잔머리 굴린 것 밖에 안 돼요.
낫게 하는 것도 아니면서..
아직도 감기 낫게 하는 약이 안 나왔잖아요.
여러분 지금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잡는 약은 없어요. 기껏하는게 바이러스를 조금 히마리 없게 만들어.
비실비실하게 만들면 그러면 결국은 우리 몸에 항체가 바이러스의 활동을 억제하는 것이지, 약 자체가 바이러스를 죽여 없애는 그런 약은 안 나왔어요.
어떻든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래서,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거기 줄을 그으세요.
왜 안식일에 일하느냐? 하니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신 거예요.
그랬더니,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말투가 그래가지고 예수님을 더 미워하는 거죠.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지금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죠.
그러니까 예수님 지금 대개 뭘 하십니까?
여러분 뭐하다가 말썽 난거죠? 병자 고친거죠.
아버지께서도 병 고치기 때문에 나도 병 고친다. 그렇죠?
아버지께서도 병 고치는 것 보고 아들도 고친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아들도 일한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는 창조 다 끝났는데 무슨 일 하겠어요?
여러분 창조 다 끝났는데 일하는 것은 에프터 서비스예요.
에프터 서비스는 고장난 것 고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병을 고쳐주실려고 하고, 예수님도 살짝 살짝 눈치봐가면서, 몰라 이렇게 말썽 날것 뻔히 알면서도 고쳐주실려고 하고, 성령께서도 고쳐주실려고 하고, 성령께서 혼자 일손이 모자라니까 어떤 사람에게 병고치는 은사를 나누어 주셔서 고쳐주실려고 하고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가 건강한 것이 하나님 뜻이고, 또 병 났을 때도 병 고쳐지는 것이 하나님 뜻이지, 병 나서 그대로 병 앓다가 죽는게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병을 나을려고 노력을 해야 돼요.
노력을 하니까 죄가 있다할지라도 38년간 나을려고 노력하니까 하나님께서 찾아주시는 거예요.
전에 우리 어머니가 그랬어요.
참 우리 어머니는 초등학교 문턱도 안 가보신 분이니까 글도 몰라요.
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병이 나면 ‘어떤 데에는 뭐가 좋단다.’ 이런 것을 많이 알아요.
그야말로 돌팔이죠.
돌팔이인데, 우리 어머니가 온 동네 사람을 상담해가지고 많이 낫게 하는 거야.
어머니 자신도 무슨 병이 나면 얼마나 고칠려고 애를 쓰는지, 병이 지겨워서 도망을 갈거야. 못견뎌서..
어떻게나 뭘 하고 뭘 하는지 스스로..
병원에 한번도 안 간것 같아..
그리고 81세까지 사시고 다쳐서 알밤 따다고 혹은 잠실가다가 외나무 나리에 난간에 없어서 떨어져서 다친 이런 것 외에는 거의 아픈게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병들은 자기 스스로 민간 대체 요법을 가지고 낫게 하는 거야.
특이해요. 얼마나 나을려고 애를 쓰는지..
제가 병도 아마 징그러워서 도망갈만큼..
이것 해보다가 안 되면 딴것 하고 또 딴것 계속 해대니까 병이 도망가는 거야.
그래서 병 낫고자 하는 것도 살 수 있는 데까지는 열심히 수리해서 살려는 마음 이런 마음이 좋은 마음이예요.
20절,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똑같죠?
어때요? 여러분 여기에 요한이 보여주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똑같죠?
심지어 유대인들도 똑같다고 하잖아요.
동등으로 여긴다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태까지 유대인들은 하나님 한분만 계신줄 알았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거야.
그러니까 하나님 아들은 완전히 관심에도 없었어요.
그런데 요한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 계신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처럼 아들도 공경하게 할려고..
그래서 일부러 이 기회에 심판하는 권세까지 다 아들에게 맡기셨는데, 이것은 아들을 공경하게 할려고..
..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 말씀이 다 옳거든요.
누가 들어도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이 옳은 거야.
심지어 예수님을 안믿는 철학자도 예수님 말씀을 가지고는 흠잡을 수 없는 거예요.
단 뭘 가지고 흠잡느냐?
너무 수준이 높아서 우리가 따라갈 수 없어서 흠이다.
버트란트 러셀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말했어요.
예수님 말씀이 좋기는 좋은데, 너무 수준이 높아서 나는 포기했다. 그냥..
그래서 이 사람은 왜 나는 크리스찬이 아닌가?
‘와이 아임 낫 크리스찬?(Why I am not a christian?)’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예수님이 너무 수준이 높게 말하니까 나는 따라갈 엄두가 안 난다.
이래가지고 포기했거든요.
예수님의 말씀이나 교훈을 아무도 흠잡지 못해요. 다 옳으니까..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잘 듣고, 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
그리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다.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자는 살아난다.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똑 같아요.
하나님 아버지께 생명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에게도 생명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여러분 여태까지 우리가 그냥 예수님만 믿으면 악한 일 행한 사람들도 구원받는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악한 일 행하는 사람은 제대로 믿는게 아닌 거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선한 일을 행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 예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너희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착해야 돼요.
‘너희의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못하면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
실제적으로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그것은 과거에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선한 일을 해야 돼요.
선한 열매, 행실이 없는 믿음, 열매가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거예요.
그래서 분명히 예수님께서 선한 일을 행하는 자와 그리고 악한 일을 행한 자 딱 구분이 납니다.
바울도 참고 선을 행한 자..
그래서 선한 일이 없는 믿음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죽은 거예요.
성령의 열매는 선한 열매가 가득해야 돼요.
우리가 일평생 아무 선한 일도 착한 일도 없이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면 천국 못간다’는 겁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인데, 그 행함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30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32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자기가 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증거한다는 겁니다.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35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표적이예요. 표적..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지금까지 계속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유대인은 믿지 않았어요.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에 도처에, 이 때 말하는 성경은 신약이 아니고 구약을 말합니다.
신약은 성경으로 인정받지 않았을 때예요.
구약성경 전체가 예수님께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다.
양을 잡아서 제사지내는 것도 다 예수님 이야기예요. 사실은..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나는 사람에게 영광받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는 것 뿐이지, 내가 이런 일 해가지고 사람에게 존경받고 영광받을려고 이런 것 하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문제는,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그러면 끝장입니다.
대단한 열심으로 종교적 행위가 무성해요. 바리새인들이..
종교적 열심은 하나님을 때려죽일만큼 열심이야.
그런데 거기에 뭐가 없느냐?
하나님을 사랑하는게 없어요.
지금 대수능 앞두고 입시철 되어서 교회마다 새벽기도 가면 미어터진다는 거야.
하나님의 아들의 일을 위해서는 하나도 안 보여.
자기 아들을 위해서는 새벽에 난리 굿을 피우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을 수 있어요. 종교적 열심은 대단한데..
절에 가도 똑 같아.
절에도 대상만 바꿨다 뿐이지 목적은 똑 같아.
내 잘되고 내 새끼 잘되고 내 아들 시험 잘되고..
담은 1점이라도 더 받게 할려고 그런 것 밖에 없는 거야.
그것도 아들 저주하는 것 보다는 낫겠죠.
그래도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고 하면 가치가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여러분 바리새인들 십일조 얼마나 철저하게 합니까?
안식일 아까 봤잖아요. 안식일에 병도 안 고친다니까.. 안식일 지킨다고..
안식일 지킨다고 엘리베이터 스위치도 안 눌러요.
스위치를 금요일 해질녁에 올려놨다가 내리면 안식일 범하는 것이니까 토요일 해질녁에 내린다니까..
그렇게 하는데, 율법의 근본 정신을 몰라요.
여러분 율법의 근본 정신이 뭐냐 하면, 하나님 사랑하는 것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것을 모르면 아무 것도 아니거든요.
율법 아무리 철저하게 지켜봐야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없으면 빵점이예요. 빵점..
괜히 사람만 잡는 거예요. 그렇죠?
하나님 잡고 사람 잡고..
바로 이 유대인들의 사랑 없는 종교가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서 숨도 못 쉬게 하는 그런 종교 행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니까..
그래서 정말 우리가 찬양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철야를 하든지 뭘 하든지 그게 내 소원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면 참 좋겠다니까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다면 참 좋겠는데, 대부분 그렇지 않다는게 문제라는 거예요.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만약에 하나님이 보내어서 내가 왔다 하지 않고, 자기 이름을 가지고 이름도 예수라 하지 않고, 여호와수아로 하지 않고 그냥 김복동이다 해가지고 그 정도 ‘복동교’가 생겨봐.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이름으로 나와서 그랬으면 굉장히 사람이 따르고 또 종교하나 나왔을텐데, 예수님은 자기 이름으로 온게 아니라, 하나님 이름으로 왔다 하니까 받아들이지 않는 거예요.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의 율법을 너희가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를 정죄하고 너희를 고소할 것은 모세의 율법이 너희를 고소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을 제대로 지켰느냐?
모세의 율법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어요.
모세의 율법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돼요.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열심히 전도해야 돼요.
온 세계가 다 내게 속했으니까 너희가 중간 역할을 해가지고 내게 돌아올 수 있게 하라.
이것을 해야 되는데, 하나도 모르거든 이것을..
오늘날도 교회를 다니면서도 정작으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뒷전이고, 그냥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가 부자되고 내가 출세하고 내가 잘되고 이렇게 한다면 탐심이요, 탐심은 우상숭배와 같아요.
탐심은 우상숭배예요.
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여러분 모세가 전하는 율법대로 했다면 예수님을 핍박할 수 없죠.
정말 성경을 바로 봤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바로 알아봤어야 돼요.
..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모세의 율법을 제대로 공부했으면 모세의 율법도 예수님에 대한 증거였다.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그러니까 모세의 글도 안 믿었고, 예언자들을 보냈지만 예언자들도 안 믿었고, 예수님도 안 믿었고 아무 것도 안 믿었어요.
그리고 율법을 갖다가 지나치게 과잉해석해가지고 쓸데없는 소리 해가지고 사람들에게 잔뜩 부담지우고 하나님의 아들 오니까 하나님의 아들 때려죽이고..
유대교라는게 그래요. 종교라는게 까딱하면 그럴 수 있어요.
모세의 율법은 죄인된 사람들이 고소하겠죠.
그러나 예수님은 고소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죄를 담당해주면서까지 변호하실려고 하는데, 그런 예수님을 배척을 하는 거예요. 유대교가..
종교라는게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우리들도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가 신약이나 구약이나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성경 배우는 목적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서 생명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한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마음으로 되지 않으면,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그런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천사의 방언 만국 방언을 다해도 아무 것도 아니야.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에 그 많은 말씀을 두줄도 요약한다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몸같이 하라.’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이 율법을 폐하느냐 안 폐하느냐 그런 말을 하는데, 여러분 하나님 사랑을 어떻게 폐하며 이웃 사랑을 어떻게 폐한다는 겁니까?
율법 정신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인데..
폐한것은 모형으로 하던 것은 폐한 거예요. 모형으로 하던 것..
양으로 제사 지낸다든지 할례한다든지 이런 모형으로 하던 것은 폐하는 것이고, 또 명절 같은 것도 명절은 대개 제사와 관계된 것인데, 제사와 제물이 바뀌니까 그런 것은 일부 폐한 거거든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진짜 폐해버린 것은 그 과잉 해석된 것. 미드라쉬 미쉬나 게메라 토셉타 할라까 하까다..
끝없이 해석한 장로의 유전 그런 것은 다 폐해버린 거예요. 아무 것도 아닌 거죠.
율법의 근본 정신은 폐할 수가 없는 거죠.
폐하면 성경 다 폐하는 건데..
그런 개념도 정확하게 정리가 안된 채 ‘은혜 시대니까 율법은 필요없다.’ 이런 뚱딴지 같은 소리하면서 성도들이 많이 혼란에 빠져 있는 거예요.
신학교에서 이런 것 딱부러지게 한 시간도 공부를 안 합니다. 제대로..
공부를 제대로 해보면 율법의 근본 정신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바리새인들 보세요.
‘너희 속에 사람 사랑은 놔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그 이상 할 말이 없어요.
그러면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우리가 앞으로도 요한의 증거를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잘못하는 것을 보고도 우리는 깨닫고 배워야 돼요.
잘 하는 것도 보고 물론 깨닫고 배워야 되는데, 잘못된 것을 보고 우리가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아야 되거든요.
우리가 그 사람들 비난하고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은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런 것을 배워서 우리 자신을 가다듬으라고 바리새인들 못된 소리 하는 것 다 기록해서 보여주는 거거든요.
6장은 다음 시간에 보겠습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사도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일하셨는지 어떤 마음으로 사역을 하셨는지, 또 예수님의 사역을 유대인들이 어떻게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거역했는지 이런 것을 보면서 새롭게 우리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잘 배워서 유대인들이 범한 실수를 다시 되풀이 하지 않도록 도와 주옵시고, 율법의 근본 정신이었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잘 배우게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