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역린 逆鱗
일행들은 동 격렬비열도에 쪽배 3척을 대고 수색한 결과, 피골 皮骨이 상접 相接한
연락병 여섯 명이 한 무리의 낯선 무리들과 함께 있었다.
낯선 십여 명의 무리들은 고구려 출신 병사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본선으로 귀선 歸船 하였다.
맥궁과 환도 대두 環刀 大頭를 소지하고 있던 고구려 병사들의 사연 事緣 또한 기구 崎嶇하였다.
추모성왕 고주몽은 동부여에서 함께 탈주하였던 협보. 오이. 마리의 도움으로 고구려를 개국하였다.
그런데 추모대왕 주몽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른 고구려 2대왕 유리왕은 왕비가 죽은 후,
후궁 사이에서 중심을 잃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 右往左往 고민하더니,
후한 출신의 후궁을 떠나보내고는 ‘황조가’라는
감성적 感性的인 시 詩를 짓는 등 기마족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탈 逸脫된 행동과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서기 3년 (유리왕 22년)
그러한 유리왕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던 고명대신 顧命大臣이자,
대보 大輔직을 수행하던 협보와 각간 마리가 수차 충언을 간하자, 유리왕은 오히려 대노 大怒하고 만다.
감히, 대왕의 언행에 대하여 제동 制動을 걸고 심기 心氣를 불편하게 만들다니,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 역린 逆鱗]
용의 턱밑에는 거슬러 난 비늘이 유독 惟獨 하나가 있는데 이를 역린이라 하며,
'역린을 건드리면 용이 크게 노한다'는 전설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분노 憤怒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출전 出典은 한비자 韓非子의 세난편 說難篇이다.
협보를 한직 閑職인 정원관리사로 좌천 左遷 시켜버리고, 마리는 관직을 박탈 剝奪 당한다.
이에 실망하고 화가 난 협보는 고구려와 유리왕을 한탄하며, 일족들과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데리고
남쪽의 왜 倭로 가버리고, 이어 열흘 후 협보의 뒤를 따라 남 쪽의 왜로 가고자 요동반도 대련에서 출항한
마리 일족도 해상으로 나왔으나, 격렬비열도 부근에서 마침 불어온 큰 풍랑에 의해 배가 침몰 沈沒하고,
일족 상당수는 해상에서 흩어져 버렸다.
십여 명의 생존자만이 반파 半破된 쪽배에 겨우 의지하여, 동격렬비도로 표류 漂流하여 먼저 와있던
사로국의 연락단들에 의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다행히 고구려 일행들은 식량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섬에 있던 그들은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성왕 고주몽 왕의 의형제 협보 마리 오이 중 마리의 자제와
그 가솔 家率들이였다.
이민자 가족이었다.
그들의 가고자 하는 행선지 行先地를 물어보니
딱히 정해 놓은 곳도 없지만 다만, 유리왕과의 불화 不和로 인하여 탈출하는 과정이었기에 다시
고구려로 되돌아가기에는 곤란한 처지라고 하였다.
우문청아는 고구려 출신 난민들의 처지가 십수 년 전, 자신들이 산동성 봉래 바닷가를 출항하여
처음으로 배를 타고, 요하로 이주하여 수년간 숨어 살았으며, 그 후에 초원으로 다시 이주하였던
자신들의 피난민 신세와 흡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원화 부단주 오첨욱과 의논한 후,
“초원으로 가는 길이니, 함께 초원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보니
그들도 잠시 심각하게 상의하더니,
“초원으로 따라가겠다”고 하였다.
아니,
타고 온 배도 이미 파선 破船되어 망망대해 茫茫大海 바다 한가운데에서 움직이기가 곤란하니
다른 방도가 없는 형편이었고 또, 남쪽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두 손 들어 반겨줄 사람이 있거나,
별 뾰족한 행운이 기다린다고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넓은 들판을 말 타고 달리는 것이 장기 長技인 기마족 騎馬族 체질이니,
초원 생활에 크게 불편할 것도 없을거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이것도 자신들의 운명이거니 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다.
고구려 이민자 중, 우문 사로 또래의 아이들도 두 명 있었다.
아이들은 금세 잘 사귀고 어울러 지냈다.
그 가솔들 중에는
맥궁과 환두대두의 제작 방법을 잘 아는 장인들이 몇 명 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협보와 마리의 출국 出國은 신생국 고구려에게 도움이 되었다.
유리왕에게 따끔한 경종 警鐘을 울려준 계기 契機가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기둥을 담당하던 고명대신(顧命大臣 : 선대 先代부터 나라를 위하여 충정 忠貞을 다한
원로대신 元老大臣) 두 사람이 조정에서 사라지고 보이지 않으니, 그제야 유리왕은 제정신을 차리고
술과 향락 享樂을 끊고, 국사 國事에 전념 專念하게 된다.
신 新의 왕망 군과 치열하게 싸우며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얼마 후에는 대 代(현재의 북경 인근)까지
진출 進出하였고, 그곳 전투에서 왕망 군과 싸우다 장렬 壯烈하게 전사 戰死하였다.
고구려 제2대 유리명왕의 무덤은 북경 인근에 있다.
현재 북경 부근이 고구려의 세력권, 즉 고구려의 확실한 관할 영토 인 것을 밝히는 유적이다.
한편,
백제 수군 水軍에 나포 拿捕되었다는 나머지 연락병들의 생사 여부는 하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들이 범죄를 저지른 도피자는 아니지만, 그 무리들과 연좌 連坐 되어있는 것이 문제였고, 비애 悲哀다.
열흘 후,
사로국의 연락단 100여 명과 고구려 병사 15명 등, 우문청아 일행은 난하 포구로 무사히 입항하여,
말과 마차를 이용하여 항가이산맥으로 이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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