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4대 은행(중국은행과 중국 공상은행, 중국 건설은행, 중국 농업은행) 중 3개 은행이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제 3자 제재, 제재 대상자와 거래하는 제 3자에 대한 제재/편집자)을 우려해 재제 리스트에 오른 러시아 은행(이하 러시아 제재 은행)과의 대금 송금및 수신, 이전, 결제 등 소위 '환 거래(코레스 뱅킹)'를 중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러시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기업인)들도 수출 대금을 국내로 송금하는데 비상이 걸렸다. 러시아 은행들이 미국 주도의 달러화결제시스템(SWIFT)에서 퇴출당한 뒤, 국내 기업들은 주로 중국의 주요 은행들을 통해(코레스·환거래 계약·뱅킹/편집자) 수출 대금을 받았는데, 이마저 막힐 위기에 처했다.
러시아에 진출한 KEB-하나은행 측은 최근 공지를 통해 "미국의 '세컨더리 제재'로 인해 주요 중계기관(코레스 은행/편집자)으로 부터 송금 중계 불가 방침을 통보받았다"며 "3월 1일부터 수취은행이 국내 하나은행, 혹은 우리은행일 경우에만 달러와 유로화 송금이 가능하다"고 알렸다. 그러나 러시아 법인(법률적으로 러시아 거주자/편집자)이 아닌 현지 진출 국내 기업의 지사나 사무소는 비거주자여서 러시아의 대통령령에 의해 달러·유로화의 해외 송금은 일단 금지된 상태다.
중국 공상은행 본사/사진출처:위키피디아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중국은행과 중국 공상은행, 중국 건설은행 등 3개 은행은 달러결제 플랫폼인 SWIFT는 물론, 러시아 자체 결제시스템인 SPFS(러시아어로는 СПФС), 중국 플랫폼 CIPS 등에서 제재 대상 러시아 은행들과의 거래를 중단했다. 그러나 중국은행은 여전히 루블과 위안으로는 거래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같은 사실은 러시아 '퍼스트 그룹'(Первая Группа)의 알렉세이 포로신 CEO 등 외환거래 전문가들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그러나 제재 대상이 아닌 러시아 은행과의 거래는 여전히 가능하다고 한다. 현재 300여개의 러시아 은행 중 신용도가 높은 상위 36개 은행이 미국 등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다.
중국 주요 은행들이 러시아 제재 은행들과 거래를 차단 혹은 제한하는 것은, 미국의 세컨더리 제재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22일 러시아 군산복합체와 거래하는 제3국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하는 대(對)러시아 세컨더리 제재에 관한 행정명령(제 14024호)을 발동했다.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행) 개시 이후 처음으로 내려진 세컨더리 제재 조치다.
이 명령에 따르면, 미국 재무장관은 국무장관과 협의를 통해 기술, 국방, 산업 분야에서 러시아 군산복합체와의 거래를 촉진한다고 판단되는 외국 금융기관에 제재를 가할 권한을 갖는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전세계 금융기관들이 (대러) 제재를 우회하거나 회피를 조장할 수 없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고, 월리 아데예모 부장관은 "새 행정명령은 중국, 튀르키예(터키), 아랍에미리트(UAE) 등 러시아의 제재 회피를 도운 국가의 은행을 표적으로 삼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미 재무부/사진출처:위키피디아
이후 중국의 주요 은행들은 미 연방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의 추적을 받는 러시아와의 달러 거래를 중단했고, 급기야는 루블과 위안화 거래까지도 일부 제한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리콤 트러스트 투자은행의 분석 책임자인 올레그 아벨레프는 “중국 은행들이 세컨더리 제재 조치가 발표된 지난해 12월부터 러시아 은행과의 거래를 제한하기 시작했으며, 현재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에 앞서 터키와 UAE 금융기관들도 러시아와의 거래를 제한한 바 있다.
중국 은행들의 거래 제한(혹은 중단)은 러시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수출 대금 회수에 직접적인 타격을 안겨주고 있다.
현지 진출 국내 기업(기업가), 금융 등 관련 기관 주재원들이 대거 가입된 카톡방에는 최근 수출 대금의 국내로의 송금 방법에 대해 의견을 구하는 글이 올라왔다. 한 참여자는 지금까지 러시아의 가스프롬뱅크에서 중국 은행 두 곳을 거쳐(2중 코레스 뱅킹/편집자) 국내로 대금을 송금했는데, 2월부터 거부됐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참여자는 중국 은행들이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위안화 (송금)는 막지 않는데,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가는 위안화는 돌려보낸다고 했다.
러시아에서 이뤄지는 대부분의 해외 결제가 위안화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중국의 주요 은행들이 '코레스 뱅킹 업무'를 차단할 경우, 러시아에서 국내로 위안화 송금도 불가능해 한러 무역 부문은 앞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을 것으로 우려된다.
하나은행 글로벌 네트워크/사진출처:홈페이지
이같은 우려는 지난 1월 중순, 중국 국영은행들이 러시아 '파트너'(코레스 계약 은행)와의 거래를 제한하고 있다는 미 블룸버그 통신의 보도가 나올 때부터 제기됐다. 당시 이 통신은 중국 은행 소식통들을 인용, 적어도 두 개의 중국 국영 은행들이 러시아 파트너를 점검하기 시작했으며, 러시아 방산업체들과 협력하거나 제재 대상자를 돕는 파트너와는 관계를 끊을 계획을 세웠다고 전했다.
실제로 중국의 주요 은행들은 올해 들어 러시아 제재 은행들에게 달러화 거래를 중단하겠다고 통보했으며, 일부 은행은 러시아와 모든 금융거래를 차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2월 들어 러시아와의 수출입 거래를 집중적으로 중개한 중국 제지앙 광저우 커머설 은행이 러시아·벨라루스와 금융거래를 중단(공식적으로는 2월 10일)했다고 러시아 경제 매체 베도모스티는 보도했다. 이 은행은 비교적 러시아에 대한 규정 준수가 덜 엄격하고, 지리적 위치로 인해 러시아 수입업체들에게는 '핵심 결제 센터'로 불렸다고 한다.
중국이 러시아와의 지정학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은행 거래를 차단하는 것은, 러시아보다 미국과 유럽 등 서방과의 거래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칫 미국의 '세컨더리 제재'를 받는다면, 은행들이 커다란 상업적 이득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모스코프스키 콤소몰레츠(MK.ru)에 따르면 러시아 정치기술센터(Центр политических технологий)의 수석 연구원 니키타 마슬렌니코프는 "중국과 미국 간의 무역 규모가 중국-러시아보다 몇 배나 크다"며 "중국 은행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기반을 두고 행동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중국 은행들도 미국의 세컨더리 제재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그는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한) 2014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면서 그러나 "여전히 수십 개의 은행이 제재를 피해 중국과 거래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러시아 당국은 미국의 세컨더리 제재가 국제법 위반이라며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크렘린은 러시아가 이같은 제재를 우회할 수 있는 옵션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유코스 앤 파트너스'의 파트너 겸 센트럴 대학의 비즈니스 교육및 분석 센터 소장(директор центра бизнес-образования и аналитики Центрального университета)은 "러시아 대형 은행이 중국에 대표 사무소를 개설하면서 결제 송금이 훨씬 쉬워졌다"며 "VTB 은행(러시아어로는 ВТБ)은 상하이 지점을 통하면 결제 조건에 변화가 없음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하이의 VTB(러시아어로는 ВТБ в Шанхае)는 두 국가 간에 루블·위안화로 거래할 수 있는 독립적인 중국 은행"이라고 밝혔다.
러시아 알파뱅크의 중국 지점 모습/사진출처:알파뱅크
문제는 러시아 진출 국내 기업들이다. 이들은 중국 은행들의 '코레스 뱅킹'을 통해 국내로 수출 대금을 송금해야 하는데, 중국의 주요 은행들이 이를 거부한다면, 상하이의 VTB라도 거래를 시도해볼 만하다. 다만, 상하이의 VTB은행이 국내 주요 은행들과 코레스 계약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한편, 중국 2곳에 지점 개설 허가를 받은 러시아 알파뱅크는 중국 최대 신용 평가기관 중 하나인 '리안헤 신용 평가사'(Lianhe Credit Rating Co., Ltd)로부터 안정적인 전망과 함께 AA- 등급을 받았다고 21일 밝혔다. 이 은행은 중국 진출및 사업 개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신용 평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또 은행의 중국어 로고를 중국 특허청에 신청했다고도 했다. 알파뱅크는 지난해 가을 중국 금융당국으로부터 베이징과 상하이에 지점 개설 허가를 받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