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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0. 묵상글 들 (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 형제와 자매를 얻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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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0.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형제와 자매를 얻다
우리는 부모와의 혈연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 혈연관계를 통하여 형제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시며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50).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새로운 형제자매를, 어머니를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자체이신 분과 하나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8,14-15). 그리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5,1).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3,26).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폐5,8).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에페5,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히브2,11-13).
하느님께 향한 믿음으로 형성된 새로운 부모 형제의 관계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성당에 잘 나오지 않는 남자 분들이 가끔 “아내가 열심히 해서 치맛자락만 붙잡고 있으면 반 천당은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주님과 맺은 관계와 내가 맺는 관계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데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아내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묵주반지를 끼고 신자라고 폼냅니다. 그것도 금으로 만들고, 때로는 보석을 박아 자랑합니다. 자동차 안에는 십자가나 묵주를 걸어놓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주님을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매달고 다니고 간직하면 좋은 일이 생기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면 부적이나 다름없죠.
스승과 제자, 스승과 나의 관계는 어떤 물질이나 상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혈연이나 가정, 민족이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장차 완성될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가족을 미리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은 이미 한 가족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창조물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태양을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노래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행실이 하나였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는 차원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사는 가운데(갈라2,20) 형제자매, 어머니를 많이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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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0.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마태 12,5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적 가족’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 니이다.”(마태 12,50)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는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새로운 가족을 밝히십니다. 동시에 우리를 당신의 신적 가족으로의 초대입니다. 또한 이는 “주님의 기도”의 첫째와 셋째 청원기도에 대한 내용이기도 하고, 당신께서 ‘겟세마니에서 바친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은 누가 이루는가? 그것은 당연히 하느님이 이루십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또 우리와 함께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곧 우리를 당신 뜻을 이루시는데 협조자로 삼으십니다. 당신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당신의 그 구원의 사업에 참여시키십니다. 당신의 구원을 주시고자 하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응답하는 자인 셈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기도’에서 잘 보여주십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당신의 뜻을 아버지께 맡기십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고 의탁하심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십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사용되는 동사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는 흔히 ‘신적수동태’라고 불리는 형태입니다. 곧 뜻을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따라서 이는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응답하게 하소서.’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는 장소요 공간인 셈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 선이라는 신뢰와 의탁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드린 기도에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마태 11,26)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가족을 이루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린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마르코 복음>에서는 ‘당신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들’(마르 3,34)이요, <루카복음>에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군중’(루카 8,19)이요, 여기 <마태오복음>에서는 “제자들”(마태 12,49)로 제시됩니다. 그러니, 당신의 영적 가족을 이렇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사람들”(마르 3,34)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입니다. 이는 설혹 피를 같이한 혈육이라 하더라도 당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당신의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없으나,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당신 안에 머무르면 한 가족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뽑으실 때도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셨듯이,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라고 하셨듯이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비록 힘들어도, 손해 보면서도 함께 하는 동행자요 동반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있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만 합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이나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입니다. 사실, 성당에 와 있다고 해서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고,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진정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됩니다. 곧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기의 뜻을 실현하는 이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입니다. 이는 산상설교의 마지막 결론 말씀에 해당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이처럼, 무엇을 행하는지가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줍니다. 곧 아버지의 뜻을 행하면 아버지의 자녀이고 아버지께 속해 있으며, 사탄의 뜻을 행하면 사탄의 자녀이고 사탄에 속해 있고, 자신의 뜻을 행하면 자신의 자녀이고 자신에 속해 있는 것이 됩니다. 곧 자신의 행위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존재는 행위를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대체 누구의 뜻을 실행하고 있는가?
나 자신의 뜻인가 하느님의 뜻인가?
주님!
오늘 저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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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0.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갔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한처음에는 아무 것도 없는 무(無)에서 세상을 조성하셨고, 인간을 지어내신 후에는 자연현상을 이용하여 홍수로 심판하시기도 하셨으며, 이집트의 파라오 같은 거대한 우상숭배 문명이 저지르는 죄악에 맞서는 경우에는 역사적 위기현상과 자연현상 그리고 사람들의 위기감과 공포심 같은 심리현상까지도 아울러 이용하여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가 전해 주는 이야기가 바로 그러합니다.
홍해를 마른 발로 건너게 하는 이 기적에 있어서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치기 생활을 하며 인근 지형지물과 조수간만의 사정에 익숙해 졌을 모세의 인생 경험도 활용하셨을 듯합니다. 무엇보다도 파라오와 이집트 군대의 막강한 위력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꺾으시고, 극도의 공포감에 떨었을 히브리인들을 역시 극적으로 구출해 내심으로써 조상대대로 물려받아 막연했을 연약한 신앙을 구체적인 역사적 체험으로 만들어서 확고한 신앙으로 바꾸고자 하신 하느님의 뜻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열 번의 재앙보다도 홍해를 건넌 이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이 두고두고 기억하게 만들어 준 하느님 원체험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시는 방식은 그 어느 방식으로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저 과학적으로 뒷받침되는 증거만 확인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본시 하느님은 증명되는 존재가 아니시고 우리가 증거해야 하는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합리적 사고를 지향한다는 무신론자들이 당혹해 하는 성서의 두 기록 중 하나는 노아의 대홍수요 또 다른 하나가 모세의 홍해 탈출입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할수록 이 두 사건을 확인시켜주는 증거들이 차고 넘치도록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활한 우주의 신비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더욱 일상적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식이요 장이 있습니다. 바로 가정입니다. 부모의 신앙과 사랑으로 길러진 자녀들이 자신의 가정을 이룩하는 매우 자연스러운 인생의 장을 활용하시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펼치십니다. 가정은 인간을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고 가장 당신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신다는 계시가 잘 드러나는 하느님 현존의 장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작은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만큼 마귀의 질시도 심해서 가족이기주의가 발목을 잡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성 가정이 되라고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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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0.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봄이 되면 잔디밭에 불청객이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잡초입니다. 그중에서도 아주 고약한 것은 클로버(토끼풀)입니다. 클로버의 엄청난 번식력에 애물단지가 됩니다. 뽑아 버리지 않고 그냥 두면, 잔디밭을 클로버밭으로 만들어 버리니까요.
어렸을 때는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해 참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폴레옹의 이야기를 알게 된 뒤에 ‘행운’을 상징한다고 해서 시간만 나면 잔디밭에 앉아서 네 잎 클로버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제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른 친구들만 계속해서 네 잎 클로버를 찾는 것입니다. 이때 생각했습니다.
‘행운이 내게 오지 않는구나.’
하긴 소풍 가서 ‘보물찾기’를 해도 늘 ‘꽝’이었습니다. 보물을 찾지 못하는 저는 ‘행운’도 찾지 못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세 잎 클로버의 의미를 듣게 되었습니다. ‘행복’이랍니다. 이제까지 세 잎 클로버만 봤다는 것은 행복만을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행복보다 행운을 더 좋아했던 것이 아닐까요?
행복과 행운,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클로버처럼 행복은 지천으로 깔렸지만, 행운은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행운보다 행복이 더 큰 가치니까요. 이 행복을 위해 주님께 더 가까이에 있어야 합니다. 어디에나 계신 주님을 체험하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아는 것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가족의 관계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 제자를 가리키며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은 것, 미사에 빠지지 않고 나갔다는 친분만으로 모든 것을 얻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하지만 청하기에 앞서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요?
청하기에 앞서 먼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으며, 이 안에서 우리가 간절하게 원하는 행복을 찾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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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인생을 두 번 사는 것이다(마르티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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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한 도공 선생님이 반을 두 그룹으로 나눠서 각 그룹마다 다른 과제를 주었습니다. 첫째 그룹은 학기가 끝날 때까지 완벽한 도자기 하나를 제출하라고 했고, 두 번째 그룹에게는 학기가 끝날 때까지 퀄리티와 상관없이 최대한 많은 도자기를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3개월 후, 어느 그룹에서 훌륭한 도자기가 나왔을까요?
두 번째 그룹이었습니다. 물론 학기 중에 만든 몇백 개의 도자기 중에는 실패작도 많았지만, 학기가 끝날 무렵에 만든 도자기들은 아름답고 전문적이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연습하면 할수록 창작의 재미를 발견하면서 멋진 도자기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그룹은 ‘완벽한 도자기 하나’라는 함정에 빠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책하며 만족스럽지 않은 도자기를 제출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모습을 첫 번째 그룹처럼 완벽한 모습이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죄 중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며, 사회 안에서 철저하게 단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실패를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배반했음에도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실제로 제자들은 계속된 실패 속에서 점점 완벽한 제자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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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0.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부님들과 여행하면서 저와 다른 점을 보았습니다. 한 신부님은 스마트폰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길가의 꽃도 스마트폰에 설치된 웹을 통해서 꽃의 이름을 알아냈습니다. 기상악화로 항공기 운항이 결항되었을 때도 다른 항공편을 예약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정보를 스마트폰을 통해서 검색하였습니다. 식당 예약, 숙소 예약, 표 구매도 모두 스마트폰으로 하였습니다. 같은 스마트폰인데 저의 스마트폰은 주로 전화 걸고, 문자 보내고, 뉴스 검색에 사용되었습니다. 다른 신부님은 준비를 잘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가방에 바나나, 샌드위치, 사과, 라면을 마련하였습니다. 항공기가 결항되었을 때 신부님이 준비한 간식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행 중에 세탁기도 한번 돌려서 옷을 깨끗하게 입도록 하였습니다. 요리도 잘 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같은 가방인데 저의 가방에는 물병과 장갑, 이어폰이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대부분 저 스스로 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였습니다. 항공권 예약, 숙소 예약, 표 예약, 식사준비, 여행 일정도 모두 다른 신부님들이 하였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큰 문제가 없었고,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주변에서 많은 분들이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의 말이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앞으로는 스스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삶의 질이 떨어집니다.’ 요리를 할 수 있으면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예약을 할 수 있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미리 준비 할 수 있으면 돌발 상황에 어려움을 극복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스스로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모세에게 이렇게 불평하였습니다. “왜 우리를 광야로 끌어냈습니까? 왜 우리를 굶주리고, 목마르게 하였습니까? 이집트에는 먹을 것도 많았고, 목마르지 않았고, 잠 잘 곳도 있었습니다.” 의, 식, 주를 해결하는 삶의 질에서 광야는 이집트보다 못 하였습니다. 신앙 안에서 삶의 질은 의, 식, 주의 해결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중요하였습니다. 이집트에서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광야로 나갔습니다. 이집트에서는 하느님을 섬길 수 없었기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광야로 나갔습니다. 비록 굶주리고, 목마를지라도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행사하신 큰 권능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백성은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과 그분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삶의 질을 높이는 또 다른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가족, 이념, 세대, 계층, 학연, 지연, 혈연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한 차원만 높이 보면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 있습니다. 태양계는 은하계에 속해 있습니다. 은하계는 성단에 속해 있습니다. 우주라는 관점에서 보면 지구는 정말 작고, 외로운 별입니다. 그 작은 별에서 사는 우리가 벽을 세우고, 서로 다투고, 갈등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작고 외로운 별에 사는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한다면 이 별은 태양계를 넘어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머물면 그곳이 하느님의 집이고, 그곳이 우주의 중심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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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0.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 순례 여정
- 주님 중심의 참가족 공동체 -
사람은 섬이 아닙니다. 사람은 혼자 구원받지 못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힘들어도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겸손히 노력하면서 서로 배우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말그대로 공동체는 배움터입니다. 늘 초보자의 마음으로,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인 믿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늘 초보자의 정신으로 영원한 학인으로 살아가야 할 평생 순례 여정중인 평생학인인 우리 수도공동체 형제들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전 피정지도때 늘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서로 좋아서, 마음이 맞아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다 다른 사람들입니다, 공통점이 없습니다. 그래도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중심이, 바라보는 방향의 중심인 주님이 같기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늘 중심인 주님과의 관계를, 형제들 상호간의 관계를 깊이하기 위해 끊임없이, 날마다, 평생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주님과의 관계가 한결같은 공동체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서로간 존중과 배려, 사랑의 관심은 필수입니다. 섬세해야 하고 디테일에 강해야 합니다. 서로간의 관계에 사소한 것은 없습니다.
-“저 오늘부터 휴가 다녀 오겠습니다.”
수도원 원로인 마르코 재무 수사님의 난데 없는 뜻밖의 휴가 출발 인사가 얼마나 고마웠던지요! 뭔가 주고 싶은 데 줄 것이 없어 마음으로 강복을 드렸고 후에 문자 메시지와 더불어 성전 사진도 선물했습니다.
“수도원 성전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즐겁고 행복한 휴가 보내시기 바랍니다. 친애하는 마르꼬 수사님!”-
-“주문한 책 잘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도미니코 수사님! 백합꽃 감사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신부님! 백합꽃 감사인사를 받으니 웬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집니다. 좋은 밤 되세요.”
재무보조이자 수도원 장로인 도미니코 수사님과 주고받은 메시지와 사진입니다.-
참으로 공동체 생활에 ‘겸손한 친절과 사랑’은 영적 윤활유가 됩니다. 새벽 휴게실 게시판에 소개된 종신서원을 앞둔 순교복자수도회 네 분 수사님들의 ‘한결같이’ 일치의 중심이신 주님을 고백하는 상본 성구聖句 내용들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찬송합니다”(시편138,1)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4,13)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13,3)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얼마전 종신서원을 한 우리 아브라함 수사의 상본 성구입니다.
“아브라함아!”(창세22,1)-
평생 삶의 좌표로 삼아야 할 성구입니다. 주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 줄 평생 각자 삶의 닻이되고 돛이 될 주님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은총이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할수록 형제들과의 관계도 알게 모르게 함께 깊어간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혈연관계의 가족 관계를 능가하는 주님 중심의 한 가족 공동체 형제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흡사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는 듯하며 주님 중심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장면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에워싸고 있는 한가족같은 이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중, 어떤 이가 예수님의 가족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알렸을 때 오고 간 내용들이 우리들에겐 충격적 가르침이 됩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신후 당신을 중심으로 하여 에워싸고 있는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십니다.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함께 있던 떨어져 있든 상관없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눈에 보이지는 않드라도 세상에 널리 퍼져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며 주님 중심을 살아가는 이들이 모두 예수님의 한가족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이런 공동체의 모범이 예수님 중심으로 한가족을 이루어 살아가는 우리 수도공동체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한가족 공동체임을 실감할 때가 이 거룩한 미사전례입니다. 국적과 인종이, 문화와 언어가 달라도 미사만 함께 하면 주님의 한가족처럼 느껴져 금방 친해집니다.
주님 중심의 공동체는 살아있는 유기적 생명체요, 주님 향한 순례 여정중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공동체의 믿음과 사랑, 희망의 내적성장과 성숙은 필수입니다. 이를 위해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형제들입니다.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은 물론 서로간의 우애友愛를 깊이하는 공동전례기도 은총입니다. 비단 수도공동체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의 주님 중심의 일치를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함은 필수입니다.
오늘 탈출기에서 이집트의 추격을 받으며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자손들의 홍해를 건너는 과정은 그대로 순례 여정중인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그 긴박하고 절박한 생사의 갈림길에서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의 보호와 도움으로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다를 건너는 탈출의 여정에 성공했습니다. 마지막 묘사가 그림처럼 눈에 선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걸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 그날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해주셨고, 이스라엘은 주님께서 이집트인들에게 행사하신 큰 권능을 보았다. 그리하여 백성은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다. 그때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
그대로 주님의 보호와 인도하에 있는 순례 여정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구원이요, 알게 모르게 세상 바다를 건너는 우리 공동체의 여정중 좌우에서 죄악의 공격과 유혹을 막아주는 벽이 되어 주시어 세상 바다 가운데서 마른땅을 걸어 가듯 하루하루 살 수 있게된 우리들입니다.
이어지는 탈출기 15장은 주님의 승리를 기리는 모세의 찬미와 감사의 노래입니다. 새삼 매일 영적 순례 여정중, 영적승리의 삶을 위해 공동체가 함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성공적인 공동체 생활을 원하십니까? 다음 제 좌우명 고백시중 한연이 답을 줍니다. 이처럼 주님을 중심으로 모두가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평생 전사로, 주님의 평생 학인으로, 주님의 평생 형제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戰士’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행하는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끊임없이 형제애를 실천하는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를 받으소서.“
비단 수도공동체뿐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의 공동체 성원들의 공통적인 필수 요소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을 중심으로 모두가 늘 전우애戰友愛, 학우애學友愛, 형제애兄弟愛가 창조적, 긍정적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이상적이며 현실적인 주님 중심의 순례 여정의 참가족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공동 미사전례 은총이 이런 공동체의 성장과 성숙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오늘 본기도가 강론을 요약합니다.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의 은총을 인자로이 더해 주시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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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0.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새로운 가족 관계를 보여주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어떤 이가 예수님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오셨다'고 전하자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여시는 겁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를 뿌리로 무성히 자라난 나무입니다. 그러니 각 지파의 기초 단위가 되는 혈연적 가족이 매우 밀접하고 결속력 강한 단위체임은 당연하고 명백한 사실이지요.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9-50)
예수님은 전통적 가족의 근거를 혈연에서 아버지로 중심을 이동시키십니다. 피 한 방울 안 섞였어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모여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이 가족이고 공동체가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나 형제들과의 관계를 부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이어진 새로운 유대를 선언하시는 겁니다. 마리아와 형제들이 소유한 가족의 지위는 혈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들이라서 누리는 특권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 장면이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을 피해 달아나자. 주님이 그들을 위해 이집트와 싸우신다."(탈출 14,25)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뒤쫓아온 이집트 군대를 치시자 그들이 겁에 질려 외칩니다. 지금 이 현장에서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명확히 구분됩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편이시고, 그들을 학대하고 착취해온 이집트는 주님의 적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 정체성은 그들의 원체험인 이집트 탈출에서 시작되었지요. 파스카 체험은 언제라도 그들을 결집시키고 하나로 만드는 힘의 원천이자 근원입니다. 그 자리에서는 아군과 적군, 내 편과 네 편이 명백히 갈립니다. 이스라엘에게 주님은 자신들의 주인이고 임금이신 반면, 이집트에게는 자기들과 싸우는 적국의 신이십니다.
그렇게 형성되어 온 민족의식, 전통적 가족 개념에 예수님께서 새로운 가능성을 던지신 것입니다. 한 아버지의 자녀인 이상 그분 말씀을 듣고 뜻을 실행하는 모든 이는 서로 어머니고 형제자매입니다. 끝내 "우리" 안에 받아들이지 못할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복음 환호송)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 말씀을 지키는 이들에게 "우리"이신 삼위 하느님이 오셔서 그 치밀하고 사랑 가득한 "우리" 안에 그들을 받아들이십니다. 성삼위 하느님과 어우러져 "우리"가 된 이들은 또 다른 말씀의 경청자, 실천가들과 합하여 그보다 더 큰 "우리"로 확장됩니다. 혈연이나 인종, 국가, 문화에 구애받지 않는 한 아버지의 자녀들,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들로 영적 가족을 무한히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의 가정이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써 더욱 뜨겁게 성삼위 하느님과 결속하는 찐 가족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 역시 아버지 중심의 진정한 영적 가족으로 거듭나기를 축원합니다. 무엇보다 말씀에 대한 사랑과 나눔을 통해 하나의 가족으로 엮인 소중한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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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0.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
'예수님의 참가족!'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가리키며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49)
'세례성사'로 새롭게 다시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들 중에, 오래지 않아 냉담하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
우리 모두 이 물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해야 하지 않을까?
세례성사는 끝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하는 '입문 성사'입니다.
세례자와 대부대모는 이를 꼭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배 신자들은 이제 막 영적 걸음마를 시작하는 새 신자들을 잘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나의 부활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과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삶이 힘들고 고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버지,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예수님도 당신 뜻대로 사시지 않고,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사셨습니다.
그래서 십자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
지금 여기에서 내가 실행해야 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내가 너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 낮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 땀 흘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참가족'이고, 이런 '영적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과 삶'이 분리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고, 이 뜻을 실행하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요 누이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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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0.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지난 3월 시작된 ‘사랑의 기쁨 가정’의 해를 맞이하여 가정 사목에 대한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전남대학교 교수들과 현시대의 가족에 대한 개념과 문제점을 되돌아보고, 교회와 세상 안에서 진정한 성가정을 이루기 위한 노력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그 글은 가족이라는 말에 담긴 이중성을 이야기합니다. ‘가족’이라는 말은 따뜻함과 안정감을 나타내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지나친 간섭과 폭력이 당연시되는 단어가 되기도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내 기대와 욕구가 투사되는 소유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류도향 교수는 ‘혈연에서 관계로: 확장하는 가족의 원리’라는 글에서 가족의 패러다임이 ‘혈연’에서 ‘관계’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가정 폭력이나 저출산, 이혼 가정과 1인 가구의 증가라는 사회 현상도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새로운 ‘가족’에 대하여 이야기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가족들이 찾아왔다고 전합니다. 그는 어쩌면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부정하고, 그분께서 마귀의 힘을 빌려 기적을 일으킨다는 바리사이와 같이(마태 12,24 참조) 악의적 의도를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새로운 가족을 소개하십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공동체나, 같은 공간에서 함께 먹고 생활하는 공동체, 또는 선택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제대로 실행하는 공동체가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족은 공동체입니다. 하나의 구심점으로 같은 삶의 양식을 취하며 서로 위로하고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여러분의 가족은 무엇으로 하나 되어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하느님의 뜻’이 여러분의 가족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주는 구심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이며, 차별과 질투가 아닌 배려와 나눔입니다. 오늘도 그러한 여러분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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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0.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2,46-50: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탄이 예수님의 친척들을 등장시켜 그리스도의 신성 본질을 흐리게 하려고 한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47절). 이 말은 “예수여, 그대는 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어째서 하늘에서 왔다고 자랑하는가?” 하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48절) 하고 반문하시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49-50절)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게 되면 누구나 가릴 것 없이 예수님의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인간적인 혈연관계의 부모와 자녀 간에, 형제간의 정과 예의를 무시하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본분에 대한 완성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가족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우리들의 모습은 하느님의 자녀의 모습, 즉 그리스도의 형제자매 모습이어야 한다는 진리를 밝혀주시는 것이다. 이제는 하느님의 가족으로 변화되고 성화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은 죄를 많이 짓고 부족한 우리를 당신의 형제, 자매로 받아주셨다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50절)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당신의 어머니를 극구 칭찬하시는 말씀이 된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당신의 신앙으로 고백하였기에 말씀이신 하느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낳아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온 당신의 어머니를 칭찬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도 이제는 말씀을 따르고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형제도 될 수 있고, 자매도 된다. 그 어머니는 어떻게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주님을 낳아줄 수 있을 때, 복음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낳아줄 수 있을 때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사랑이 생겨나도록 하는 그 순간 주님의 어머니가 된다.
이제부터 나 자신의 삶이 마리아가 될 때, 작은 마리아로서 진정으로 세상에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작은 마리아의 삶을 통하여 참다운 신앙인으로 사는 삶을 이루게 된다. 이 세상에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께서 세상에 계시듯이, 왜 성모님께서 계실 수 있도록 하지 않으신 이유를 우리를 통하여 마리아를 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어떤 분은 말씀하셨다. 마리아가 되어야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전해줄 수 있음을 잘 알고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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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0.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방법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9-50).”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
또는 ‘구원을 받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가족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참 가족’에 관한 가르침을 주신 말씀으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이 말씀의 겉만 보는 것이고,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말씀은 ‘당신의 가족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말씀이고,
그 방법은 곧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 또는 ‘구원을 받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라는 말씀의 뜻은,
“‘어떻게 사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
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라는 말씀의 뜻은, “나의 제자들처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면서 살아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마태오복음 7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신앙인이 되었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신앙인’으로서 살아야 하늘나라에 들어갑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방법에 관해서 이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45).”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일에 관해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4-36).”
이 말씀을 설명해 주신 것과 같은 비유가 루카복음에 있는데,
그것은 바로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뜻’은 모든 아들이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외면하고
‘먼 고장’으로 떠나가서 방종한 생활을 합니다(루카 15,13).
자기 스스로 아들 자격을 버리고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집에서 작은아들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작은아들 자신이 집을 버리고 떠난 것입니다.)
그랬다가 회개하고 돌아왔는데,
‘회개’는 자기 스스로 버려서 잃어버린 아들 자격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아버지는 회개하고 돌아온 작은아들에게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를 받아들여서 잔치를 벌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일’도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 일이고,
잔치에 참석한 일도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 일입니다.)
큰아들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밖에’ 있는데(루카 15,28),
그가 ‘밖에’ 있으면서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 것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를 거부한 것과 같습니다.
그것도 역시 자기 스스로 아들 자격을 버린 일과 같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죄의 종’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참으로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들로서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서 아버지가 베풀어주는 잔치에 참석하는 것은
참된 자유를 얻어 누리는 일입니다.
그 자유가 바로 구원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신앙인은 ‘영적으로 죽은 신앙인’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신앙인’은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야 영적으로 살아 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고, 아버지의 집에(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일에 아버지의 뜻을 외면하고 자신의 뜻만 고집 부린다면,
그것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집을 떠나간 것과 같은 일,
또는 큰아들이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 것과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의 ‘밖에’ 있는 사람들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은 곧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요한 14,23-24).”
(이 말씀의 표현만 보면, 우리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야만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아버지는 처음부터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우리의 실천은 그 사랑을 받는 방법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실천하지 않는 것은
이미 주신 사랑을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목표를 이루는 방법으로 ‘믿음, 사랑, 실천’을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사랑과 하나가 되어야 하고,
사랑은 ‘온 삶으로’ 실천하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다고 주장해도, 사랑이 없으면 믿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삶으로’ 실천하지는 않고 말로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빈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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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0.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2019. 7. 23.)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모세는 하느님께서도 미리 말씀해주셨듯이 파라오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탈출 3,19)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사막으로 즉시 인도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용기를 주시고 또한 희망을 주셨습니다. 드디어 그렇게 원하던 탈출 순간이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너나할 것 없이 서둘러 이집트를 떠나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앞을 내다보시며 모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내가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면, 그가 그들의 뒤를 쫓을 것이다. 그런 다음 내가 파라오와 그의 모든 군대를 쳐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면, 이집트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탈출 14,4)
파라오의 모든 말과 병거와 기병들이 백성을 추격하고 앞에는 커다란 바다가 가록 막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바다 위로 손을 뻗습니다. 하느님께서 밤새도록 거센 바람을 일으키시어 바닷물을 밀어 내시고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 한 가운데로 난 마른 땅을 걸어 들어가는데, 그들 좌우로 물이 벽이 되어 줍니다. 뒤이어 이집트인들이 뒤 쫒아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라오의 모든 말과 병거와 기병들이 한 가운데로 들어가서 이스라엘 쫒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에서 이집트 군대를 내려다 보시며 이집트 군대를 혼란에 빠트리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빠져나가자 모세가 손을 뻗자 바닷물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을 쫒던 이집트의 말과 병거와 기병들 위로 물이 덮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중에 한 명도 살아 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고 계실 때에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 하려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이 사실을 예수님께 기별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을 전하는 그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하고 반문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키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9-50) 세상사람들은 제자들을 철부지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습니다.
모자라도 한참 모자르다는 뜻으로 손가락을 세고 있지요. 그러나 주님은 어떠한 분이신가요? 당신만을 바라보는 제자들에게 넘치도록 은총과 기쁨을 담아 주십니다. 철부지가 세상의 셈에서 벗어나 꾸밈없이 온전히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뒤에서는 이집트 군인들이, 앞에는 넓게 펼쳐지는 바다, 그 사이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는 사실 진퇴양난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마음에서 손을 뻗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도움을 주시어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지고 마른 땅이 나오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다 헤아릴 수 없어도 위기에서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출구가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모세처럼 앞을 향하여 손을 뻗는 것이지요.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허황한 몸짓 같아도 그것이 하느님께 내미는 희망의 표시이며 절규인 것입니다.
세상은 우습게 여기는 하나하나에 하느님께서는 파도를 가르시는 바람을 일으키시며 그 청을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께 희망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계산이나 틀이 아닌 당신 뜻으로 바램을 꼭 이루어 주십니다.
주저하지 말고 하느님께 모세처럼 손을 내밀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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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0.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모든 욕구는 부여받았고 생존을 위한 것임을 인정한다면 이런 결론에 이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매몰차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중략)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한 가족이 되려면 아버지의 뜻이 있어야 하고 그 뜻을 따르는 어머니가 있어야 하며 또 그 뜻을 따르는 자녀들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아버지가 그런 가정을 원하지 않는다면 어머니는 아이를 홀로 키워야 합니다. 그렇게되면 아무래도 자녀는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랑을 다 받고 자랄 수는 없게 됩니다.
어머니가 아버지 뜻을 따르지 않고 다른 가정을 원하거나 자녀를 괴롭힌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버리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가정에 면면히 흐르는 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뜻’은 하나의 욕구입니다. 욕구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만약 욕구가 저절로 생겨난다면 저는 진화론을 믿을 것입니다. 욕구는 생존과 맥락을 함께 하고 생명이 태어나는 것처럼 욕구도 태어납니다.
생명이 없으면 욕구도 없습니다. 욕구가 없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생명이 저절로 생겨날 수 없는 것처럼 욕구도 저절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주어지는 것입니다.
부모 없이 태어나는 생명체 하나만 데려오십시오. 그러면 욕구도 저절로 생겨난다는 것을 믿고 진화론을 따르겠습니다. 저절로 생겨나는 생명도 없고 그래서 저절로 생겨나는 욕구도 없습니다. 모두 부모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욕구에 대해 지금까지 가장 완전하게 정리했다는 사람이 아브라함 매슬로입니다. 그는 욕구의 단계를 두고 아래 욕구가 충족되면 위 욕구로 나아간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우선적인 욕구는 ‘생존 욕구’라 합니다. 1단계로 먹고 자는 욕구입니다.
2단계는 안전 욕구입니다. 먹을 것이 해결되면 안전한 곳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생존 욕구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해결되면 3단계로 소속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고 합니다. 가족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4단계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생긴답니다.
마지막으로는 아무리 인정을 받아도 자신이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5단계는 자아실현 욕구입니다. 자아실현 욕구는 동물들의 무작정 생존만 하려는 욕구보다 훨씬 고귀한 욕구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이론입니다. ‘모든 욕구는 다 생존 욕구이고 이 욕구들에는 단계가 없습니다.’ 자아실현 욕구가 해결되면 생존에 대한 욕구는 해결된 것일까요? 자아실현 욕구를 쫓다가 생존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아실현 욕구도 다 먹고 자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존 욕구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배트맨: 다크 나이트’의 조커 역할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은 ‘히스 레저’를 압니다. 역대 영웅 장르에서 연기상을 받은 경우가 없다고 합니다.
조커 역할을 얼마나 잘했으면 처음으로 아카데미에서 상을 주었겠습니까? 이 영화에서 조커를 보면 지금도 꿈에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연기가 완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상식 때 히스 레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 이 영화가 개봉하여 엄청난 흥행이 되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언제나 완벽한 내면 연기를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흥행 수입을 올리는 스파이더맨의 역할도 거절했습니다. 그는 상도 돈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혼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연기로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연기가 완벽하지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연기를 통해 자기만족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조커의 연기를 어떤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해놓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우울증으로 약물을 지나치게 복용하여 숨지고 만 것입니다.
현실이 이런데도 자아실현 욕구는 가장 윗 단계에서 있으므로 생존 욕구가 해결된 상태에서 추구하는 욕구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욕구는 생존을 위한 욕구이고 이 다섯 가지 중 하나라도 결핍되면 생존에 문제가 생깁니다. 배가 고파 죽거나 외로워 죽거나 자기에게 만족하지 못해 죽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아버지의 뜻으로 모인 한 가족입니다. 아버지의 뜻도 하나의 ‘욕구’입니다. 아버지의 욕구는 서로 사랑하여 상대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누군가를 살리는 양식이 되라는 욕구입니다.
이 욕구는 분명 아브라함 매슬로가 말한 생존 욕구와 반대되는 욕구입니다. 분명히 이 욕구를 따르다 보면 이태석 신부님처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기는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우리를 죽게 만드는 욕구를 넣어주셨을까요?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모든 욕구는 생존을 위한 욕구이고 그 욕구는 부모로부터 부여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 곧 서로 사랑하라는 욕구는 나를 죽이는 욕구임에도 무엇을 위한 생존 욕구일까요?
우리는 그것이 육체가 아닌 ‘영혼’임을 압니다. 따라서 육체를 살리려는 욕구를 따르면 영혼은 죽을 것이고, 영혼을 살리려면 육체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혼이 영원히 사는 법을 알려주러 오셔서 십자가에 아버지 뜻을 위해 당신을 죽이셨습니다.
부모가 아니면 생명과 욕구를 넣어줄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뜻을 넣어주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는데 바로 가르침과 양식입니다.
이를 하느님께서 주실 때는 진리와 은총이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욕구가 들어오고 그 욕구는 육체가 아닌 영혼을 살리는 생존 욕구입니다. 부모가 넣어주는 욕구가 그 생명을 죽이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영원히 살기를 바라며 사랑의 욕구를 넣어주셨습니다. 그 욕구는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이제 하느님 아버지의 뜻으로 만들어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가족 공동체가 됩니다.
모든 욕구는 주어진 것이고 그 욕구를 받으면 그 욕구를 준 부모만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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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0.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 곁에 둘러앉는 새로운 영적 가족!
복음서 안에서 이해하기 힘든 내용으로 손꼽히는 대목이 오늘 소개되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오해하기 쉬운 내용이니, 잘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잘 파악해야겠습니다.
언뜻 보기에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지나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공생활을 위해 출가(出家)하신 예수님의 안부가 궁금했던 성모님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친척들 왈, “자네 아들 예수가 미쳤나 보네. 틈만 나면 신성모독죄를 저지르고, 공개석상에서 막말을 서슴지 않고, 아마 과대망상증에 걸렸나봐. 저러다가 제 명대로 못살 듯하네.”
아들 걱정에 뜬눈으로 밤을 꼬박 지새운 성모님은 사촌형제들과 함께 예수님께서 머무는 거처를 찾아와 면회를 신청합니다. 그 상황에서 제가 예수님이라면 만사 제쳐놓고 문밖으로 뛰어나갔을 것입니다. 어머니께 인사를 올리고 정중히 안으로 모실 것입니다. 사도들이나 둘러서 있는 사람들에게도 “제 어머니이십니다.”라고 소개해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언행을 보십시오. 통상적이지 않고 정말이지 기가 찰 정도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않은 불효자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복음 12장 48~49절)
숙고하지 않고 들을 때 예수님의 말씀은 오해하기 십상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어머니도 모르는 체 하시는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부모나 어른들에 대한 존경이나 배려가 중요하지 않은가 보다,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에서는 부모를 각별히 사랑하고 존경의 예를 표하라고 가르칩니다. 부모 공경은 십계명 안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은 지역이나 인종, 종교나 국가를 초월해서 보편적인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진의는 이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당신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이제 이 세상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질서, 새로운 가치관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이제 세상 모든 만물은 예수님을 정점에 두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제 모두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부모나 가족, 어른이나 친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이 세상 그 어떤 존재에 앞서 우선적 선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존재도 예수님 위에 자리 잡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출생신분이나 가족의 배경을 무시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가족이나 친척들이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깡촌 나자렛 출신임을 경멸해서 그런 것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제 때가 이르러 출가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중인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께서는 혈연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영적인 가족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영적인 가족은 혈연이나 지연, 학연이나 기타 세상적인 유대관계를 뛰어넘어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 곁에 둘러앉는 가족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매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공동체가 바로 영적인 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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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0.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2016년 7월 19일)
순례하는 사랑 덩어리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구원에로 초대받았습니다. 그런데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예수님의 참 형제자매가 되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12,50)뿐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최상의 법이며 이것이 바로 제자가 되고 예수님께 속하기 위한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혈연관계, 가족이나 종족이라는 자연적 관계, 신분 등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일차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이러한 관계보다도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되려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그분과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특정한 계명을 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파견되신 예수님을 우리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이니 좀더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것입니다(10,27). 그것은 또한 예수님에 의해서 해석된 사랑의 계명들이기도 합니다(5,18; 6,10; 12,50).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예수님을 믿고 하느님의 자비를 살아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사랑 덩어리가 되는 것, 곧 하느님의 자비가 이 세상과 이웃들 안에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실행함으로써 종말론적인 가정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 순례의 호흡이자 목표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사랑의 순례자였습니다. 그는 한 인간에게서 형제를 발견하였고, 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실 때 수난 당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영혼이 녹아버렸습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사랑 때문에 하느님의 가난한 순례자가 되어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습니다.
어느 날 성 프란치스코가 페루지아에서 아씨시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계속 눈물을 흘리자 같이 가던 순박한 사람이 어찌된 영문인지 묻자, 그는 “형제여, 나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사랑을 생각하면 이 세상 온 골짜기와 모든 거리를 나의 눈물로 채워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형제도 덩달아 울음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형제가 되신 주님의 육화의 겸손과 헤아릴 수 없는 수난의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을 참을 수 없어 끝없는 순례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분의 수난의 사랑이 그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고 해야겠지요. 사실 주님 친히 그를 사랑의 전달자로 쓰신 것입니다.
주님 사랑의 악기가 되어 죽을 때까지 영원한 사랑의 연주를 했던 그를 교회가 ‘제 2의 그리스도’(비오 11세)라 하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인은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온 마음과 정신과 혼을 다해 실행함으로써 진정한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실 때 그분의 어머니들이 됨을 상기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소명을 되새기면서, 하느님의 사랑에 불타는 사랑 덩어리가 되어 끝없는 사랑의 순례를 시작할 때입니다. 주님의 진정한 형제자매가 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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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0.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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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0.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제1독서(탈출14,21~15,1ㄴ)
탈출기 14장 16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내밀라 했고, 오늘 독서 탈출기 14장 21절에서는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는다.
모세가 갈대바다(홍해)앞에서 뻗은 손은 어떤 손인지 묵상해 보자.
첫째, 그 손은 믿음의 손이었다.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래서 손을 뻗었다. 하느님의 분명한 계획이 있으시다는 것과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 29절에는 '믿음으로써, 그들은 홍해를 마른땅처럼 건넜습니다. 이집트인들은 그렇게 하려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탈출기 14장 21~22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내시어, 바다를 마른 땅으로 만드셨다. 그리하여 바닷물이 갈라지자,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 들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물벽 사이를 통과할 때, 기분이 어땠을까요?
'섬뜩하군'하고 두리번거리며 걷는 사람, '이게 다시 쫙 합해지면 어떡하지?'하는 걱정으로 통과하는 사람, '믿음으로~'하고 한걸음 한걸음 기도하며 걷는 사람,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에 찬양노래를 부르며 걷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둘째, 그 손은 은총의 손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너없이 창조하신 하느님, 너있시 구원하신다'고 말했다. 홍해를 가를때 하늘로부터 손 하나가 내려와 가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세보고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다.
모세를 통해서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나없이, 우리없이, 우리 교회 없이도 얼마든지 하느님 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함께 일하자고 하시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겠다고 하신다.
이것은 주님께서 먼훗날 우리네 삶을 마치고, 주님 심판 대전에 서게 될 때, 주님 앞에서 '주님, 저도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에 한몫 동참하고 협력했네요.'하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그 기쁨으로 주님 대전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모세가 내밀던 그 손 배후에 하느님의 권능의 손, 은총의 손이 함께 함을 잊지말고 찬양해야 한다.
'주님, 권능으로 영광을 드러내신 당신의 오른손이, 주님, 당신의 오른손이 원수를 짓부수셨나이다.'(탈출15,6)
여기서 오른손은 힘과 권능의 상징인데, 모세는 주님의 능력에 대한 순종과 고백을 드러내고 있다.
어린 아이가 자전거를 처음 탈 때, 자식이 자동차 운전 연습을 처음할 때, 아버지가 그 곁에서 그리고 뒤에서 핸들을 잡아 쓰러지지 않고 바른 방향으로 조정해 준다.
그렇듯이 내 인생의 핸들을 나 혼자서 잡고 있었다면, 자주 방황하고 자주 미로를 헤매었을 터인데, 그런 나로 하여금 가야할 곳을 갈 수 있게 하고, 넘어야할 장애물을 넘게 한 것은 내 연약한 손을 내가 다만 순종으로 하느님께 내밀 때, 배후에서 강력하게 혹은 부드럽게 붙잡아준 하느님의 은총의 손이 있었음을 믿고,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한다.
세째, 그 손은 기적의 손이었다.
우리는 모세가 손을 내밀었을때 물이 갈라진 것만을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서 손을 내밀라 했을때, '이 작은 지팡이와 손으로 안 갈라지면, 내가 사람들 앞에 폼생폼사 개망신을 당할텐데'하고 주저하지 않고 순종과 믿음으로 내밀었을때, 수많은 기적들이 함께 일어난다.
'이스라엘 진영 앞에서 지금까지 인도하시던 천사가 그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뒤로 간다. 천사만이 아니라 앞서서 방향 조정하고, 갈길을 일러주던 인도의 구름 기둥이 뒤로 가서 파라오 군대의 추격을 차단하는 보호의 기둥으로 변한다.
밤새도록 동풍이든, 남풍이든, 동남풍이든, 거샌 샛바람이 일어나 바닷물을 밀어내어 벽이 되게 하신다.'(탈출14장 9절, 21절 참조)
그리고 걸어가야 할 밑바닥이 물빠진 후 진흙탕이라면, 걸어가면서 빠질 수도 다칠 수도 있을텐데, 잘 걸어갈 수 있는 평탄대로 마른 땅이 되게 하신다.
이렇게 마른 땅위에서 찬양하며 갈 수 있고, 주 대전에 영광 돌리며 갈 수 있으며,
편안히 갈 수 있고 발걸음이 고통스럽지 않게 갈 수 있도록 자부적 사랑으로 보살펴 주신다.
앤드루 머레이(Andrew Murray)는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느님의 순종의 학교에 입학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한평생 배워야 할 많은 수업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순명; Oboedientia, Obedience)의 수업이다.
루카복음 5장 4절 이하에서도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가 깊은 데로 저어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고기를 잡은 일이 생긴 것과 같다.
네째, 그 손은 심판의 손이었다.
'바다위로 손을 뻗어 이집트인들과 그들의 병거와 기병들 위로 물이 되돌아오게 하여라.' (탈출14,26)
하느님께서는 파라오와 우상숭배로 젖었던 이집트 땅을 응징하기 위해서 모세를 사용하신다.
모세가 첫번째로 내민 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길을 여는 손이지만, 또 한번 손을 내밀자(탈출 14,27~28참조) 그것은 심판의 도구가 된다.
모세가 거의 끝까지 다 가서 백성들을 보내놓고 뒤로 돌아서서 손을 내민 것이다. 내밀자마자 반대편 끝쪽에서 부터 물이 쫙 덮혀 왔을 것이다.
'물이 되돌아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따라 바다로 들어선 파라오의 모든 군대의 병거와 기병들을 덮쳐 버렸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했다.' (탈출14,28)
이처럼 심판은 하느님의 고유한 권한이요 일이시지만, 때로는 그 심판의 권위와 권세에 하느님의 백성들도 동참하게 허락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19,28)
끝으로, 우리는 하루의 시작인 '새벽녘에' 그리고 '아침에' 악의 세력을 제압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묵상해야 한다.
'새벽녘에 주님께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에서 이집트 군대를 내려다 보시고, 이집트 군대를 혼란에 빠트리셨다~ 이집트 병거들의 바퀴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시어, 병거를 몰기 어렵게 만드셨다.'(탈출14,24)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었다. 날이 새자 물이 제 자리로 되돌아 왔다.'(탈출14,27)
우리는 여기서 왜 새벽의 첫 시간을 맏물로, 우리 시간의 주재자이시고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하느님께 봉헌하며, 생명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바쳐야 하고, 미사를 봉헌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야 한다.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지혜6,14)
새벽은 이처럼 악의 세력들이 가장 많이 준동하는 시간이지만, 동시에 하느님께서 이 악의 세력을 진압하시는 시간이기 때문이며,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주시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힘없고 연약하기 짝이 없고, 흔들거리며 고통스런 내 손도 전능자 주 하느님의 손이 붙잡아 서시면, 주 하느님의 큰 기적을 나타내는 놀라운 도구가 되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기적을 이루는 바탕인 믿음과 주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전제되어야 한다.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복음(마태12,46~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50)
여기서 '실행하는 사람이'로 번역된 '포이에세 ~ 아우토스'(poiese ~autos; dose~the same)는 '실행하면, 바로 그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바로 그 당사자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주고 있다.
'포이에세'(poiese)의 원형 '포이에오'(poieo)는 어떠한 일을 적극적으로 행하거나 존재하는 물질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인데, 여기서는
'내 아버지의 뜻'을 목적어로 취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여기서 '포이에오'(poieo)는 '~하는 자는 누구든지'를 뜻하는 '호스티스 안' (hostis an; whoever)과 함께 가정법으로 쓰여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만 하면 누구든지'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바로 그 조건이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본 문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실행한 것은 그저 예수님의 말씀을 긍정하면서 묵묵히 듣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에는 눈에 보이는 행위 뿐만 아니라, 눈에 띄지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결단을 내리는 마음을 가지는 것까지도 포함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로마8,14~16)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손에 이끌려 바다 가운데 마른땅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모세를 믿고 두려움을 이기며 바닷속으로 들어간 이스라엘은 결국 주님의 손에 이끌려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주님의 큰 권능을 보게 된 이스라엘은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과 그분의 종인 모세를 더욱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보시고,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 14절은, 초대 교회 때 사도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들 역시 새로운 파스카 사건, 곧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체험한 이들로, 주님을 충실히 믿는 이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지키는 이는 누구라도 당신의 어머니요, 누이이며, 형제라는, 곧 어머니와 형제의 외연을 크게 넓히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형제, 자매라 부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과도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맺음으로써 서로 형제, 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따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형제, 자매라는 이름만 별 의미 없이 사용하곤 합니다.
이런 우리를 향하여 오늘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영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세상의 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마태12,43-50)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 성경은 ‘밖에 서 있음’을 이야기 하려고 밖에서 있음을 두 번, 반복해 말씀하심을 기억하면서,~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 ‘밖에 서 있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는 하늘의 참 가족의 모습인지 반문하시는 것이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예수님의 제자란, 내 밖의 예수님으로 찾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시다.
(루가9,23)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예수님과 한 몸, 한 형제가 되기 위해 육의 부모 형제를 떠나 따랐던 제자들이다. 왜? 福 받으려고~ 하늘의 福, 하늘의 생명을 받으려고 따른 것이다.
(요한6,40)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어떻게, 어떤 것을 믿는 것인지~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우리의 모든 죄의 속죄 제물로 오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죽음, 그 십자가의 길이 구원의 진리임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하느님의 뜻이며 일이다.(요한6,29참조)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실행(實行), - 예수님의 대속, 그분의 십자가로 얻은 하늘의 생명을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지키는 것, 실행이다.
본문 앞 절로 가 보면(성경의 뜻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
43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 진리의 물(말씀)로 쫓겨나간 것이다. 더러운 영, 그 거짓이 쉴 곳,- 물(진리) 없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온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 되었기에 물, 그 진리의 말씀이 없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 자연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살지만,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
(이사1,3~ 로마3,10~ 등 참조) 사람의 마음, 그 속에만 물(진리)이 없다는 것이다.
44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 진리의 말씀으로 쫒겨나온 그 집이, 거짓 가르침으로 그 진리의 말씀이 치워져 있다. 그 거짓으로 말씀(물)을 지키지 못해 비워진 것이다. (나는 어떤지 살펴보자!)
45 그러면(더러운 영은)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
= 예수님의 십자가로 받는 구원, 그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도(낳고도) 사람의 길로, 말로, 그 계명으로 헛된 구원의 가르침을 주는 그 거짓으로 구원의 말씀(물)을 잃어버려 구원의 예수님(성전, 집) 밖에 서 있는 나, 그렇게 내 밖의 예수님을 찾는 그 분리의 상태는 하늘의 가족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 속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지혜의 말씀을 깨닫는(낳는) 신앙이 아닌 성경의 겉(밖), 곧 사람의 지혜로, 문자 그대로 보는, 그 밖에 서서 읽고 믿어 행한다면, 그리고 그 성경 밖의 세상 肉의 뜻을 위한 자리에 서서~ 그 세상의 말, 이야기를 하느님의 말씀에 비유하여 듣고 行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이사55,8참조) 그 '밖의 것'으로는 예수님과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곧 그분의 말씀으로 서로 구원의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그 구원의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이다.
(1요한4,1-2) 1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2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
=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외아들을 사람의 몸으로, 우리의 속죄 제물로 보내심을 믿는 것, 그래서 죽음으로 끝나야 할, 그 멸망의 운명인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얻어 하느님의 자녀로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그 사람, 그가 하느님의 영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하느님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로마8,3)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가 말씀안의 삶을 누리도록 늘 이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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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20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매일미사ㅣ김태완 야고보 신부 집전
https://youtu.be/NNqDjfwwSHg 36:08
2021. 7. 20.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2021년 7월 20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매일미사
김태완 야고보 신부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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