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부활절이라 부활의 말씀을 묵상하였지만
광화문 부활절 연합예배의 추태를 보며 부활이 없는 부활절을 지키는
종교적 사욕과 그 광기로 넘치는 천태만상의 사이비를 목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용서의 완성임이도 불구하고
두 집단의 세력을 과시하는 정치 이념적 충돌은 타락한 종말론적인 부활절의 허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 부활의 증거보다 사욕으로 얼룩진 세력을 과시하는 추태는
인본주의 신앙으로 점철된 한국 교회의 일그러진 자화상, 그 자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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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터 트러커 교수가 제시하는
자기 실현의 비결을 읽은지도 오래되었는데
문득 사역의 길, 그 프로페셔널의 조건이 묵상되었습니다.
사역의 길은 온전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우리 주 예수의 말씀을 따라 복음의 은혜를 순종하는 길입니다.
돌이켜 보면 제 나이 21살 때부터 설교를 시작하였는데
참으로 아득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스펄전은 17살 때부터 설교를 시작해서
사역의 커다란 족적을 남겼습니다.
일찍 사역을 시작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늦깎기 사역자도 많습니다.
신학을 할 때는 가장 어렸고
그 때 나이 많은 사람은 50대도 있었습니다.
일찍 사역을 한 사람은 세상 경험이 없고
늦게사역을 시작한 사람은 세상 경험이 풍부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 언제나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의 때요,
믿고 순종하여 따르는 길에는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역의 부르심에는 서열이 없고 순서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 그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길을 갈 뿐입니다.
그러나 사역의 서열을 따지는 곳이 노회인데
노회는 변화된 새사람보다는 옛 사람의 향취가 더 풍성합니다.
노회의 상처는 부교역 시절의 상처와 비례하며
일찍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사역자도 부교역자와 노회를 통하여
풍성한 세상 경험을 합니다.
누구든 사역자의 가슴에는 세상이 주는 고난의 상처보다
사역자의 길에서 얻는 상처가 훨씬 더 깊습니다.
사역자의 길, 그 프로페셔널의 조건은
그 모든 고난의 환경 가운데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사역의 그릇에 담아내는 일입니다.
☞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1:23-25)
화려한 스펙이 사역자의 길, 그 프로패셔널의 조건이 되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의 지혜로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지 아니 하였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증거하였습니다.
뛰어난 웅변과 달변, 그리고 그 멘토링의 리더쉽으로 하는 사역은
결과적으로 바울이 떠난 에베소 교회에 나타난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습니다.
☞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행20:29-30)
오늘날 한국 교회의 종말론적인 이단과 사이비 현상은
초대 교회 교린도교회를 어지럽게 하였던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바로 그 사탄의 일꾼들이 벌이는 미혹하는 거짓 영의 역사입니다.
에베소 교회와 고린도 교회를 비롯하여
요한 계시록의 버가모 교회는 사탄의 회가 있었고
또한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니골라당이 있었으며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벌의 행음이 있었고
사데 교회는 흰 옷 입은 자 겨우 몇 명 뿐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에도 넘쳤던 복음의 가라지가
종말론적인 한국 교회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식 밖입니다.
유다서의 가만히 들어 온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은 자들과 동급이었습니다.
또한 출애굽의 구원을 받았으며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멸망받은 자들이요,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된 자들과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에베소 교회의 양의 탈을 쓴 이리가 없습니까?
우리 교회는 교린도 교회의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의 역사가 없습니까?
우리 교회는 버가모 교회의 니골라 당이 없습니까?
우리 교회는 두아디아 교회의 이세벨이 없습니까?
우리 교회는 사데 교회의 흰 옷을 입고 주와 함께 다니는 합당한 자가 자가 몇 명입니까?
바로 오늘날 목회 멘토링으로 사역의 성공가도를 달리는
우리 앞에 선 예배 사역자와 찬양 사역자와 하나님 일의 봉사자들이 사데 교회의 그 흰 옷 입은 자들이 아니라면
참으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벧엘의 거짓 제사장 아마샤가 위협하였고
미가야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 시드가야가 핍박하였으며
예레미야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 하나냐가 계시의 증표인 예레미야 목의 나무 멍에를 꺽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길에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를 만났으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며 호통치며 맹인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 앞에는 아모스의 아마샤가 없습니까?
우리 앞에는 미가야의 시드기야가 없습니까?
우리 앞에는 예레미야의 하나냐가 없습니까?
우리 앞에는 바울의 바예수가 없습니까?
사역의 길, 그 프로페셔널의 조건은
오직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주의 남은 고난을 질그릇에 채우는 것입니다.
사역의 성공으로 누리는 세속의 부귀영화는
웅변과 달변, 그리고 화려한 스펙과, 그 멘토링의 리더쉽으로 얻은 이단과 사이비의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이 뿌리라고 하였고
야고보서는 부자의 재물은 썩었고 그 옷은 좀 먹었으며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고 말씀하였습니다.
☞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6:8-12)
☞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약5:1-5))
오늘날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아실현으로 자기를 세우는 사역의 길은
목회 사역으로 바벨탑으르 쌓는 이단과 사이비의 첨탑입니다.
오늘날 찬양 사역자들 가운데 대중의 무대를 버리고
도서벽지를 찾아 다니며 찬양하고 무대가 아닌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는 모습은
주 안에서 아름답고 향기롭기 그지없습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그 은혜를 전하는 찬양 사역자들의 아름다운 꽃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시온의 대로, 그 생명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