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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남아프리카의 킬리넌 광산에서 거대한 다이아몬드 덩어리가 발견되었습니다. 인부들이 놀라서 관리자에게 가져갔지만, 관리자는 그동안 그렇게 큰 다이아몬드원석을 본 적이 없어서 다이아몬드원석이 아니라며 창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다른 관리인이 다시 그 다이아몬드를 주어서 겉부분을 긁어내고 정밀하게 측정한 결과 지금까지 발견된 다이아몬드 중 가장 큰 다이아몬드원석인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영국 왕실에 바쳤습니다. 그 보석은 다시 네덜란드의 유명한 세공업자에게 보내어 졌고 오랜 시간 치밀한 세공을 거쳐 값진 왕실 보석으로 가공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영국 왕실의 왕관과 홀에 사용되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다이아몬드인 “킬리넌 다이아몬드”의 발견에 대한 일화입니다. ‘숨은 보석’을 찾아낸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일상대화를 하면서 ‘숨은 보석을 찾았다’는 표현을 씁니다. 지금은 유명 관광지인데 그전에는 그렇게 좋은 줄 모르고 있다고 어느 순간 알려지고 많은 사람이 몰려올 때 “숨은 보물을 찾았다”는 표현을 씁니다. 참 개성있고 노래 잘 부르는 가수인데 오랫동안 언더그라운드 활동을 하다가 갑자기 이름이 알려지고 유명인이 되게 되었을 때 “숨은 보석을 찾았다”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숨은 보석같은 맛집”, “숨은 보석같은 명소”, “숨은 보석같은 인물”등 ‘숨은 보석’이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원래는 정말 값어치가 나가는 것이지만 정말 제대로 몰라보고 있다고 어느 순간 확 드러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런 표현을 씁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을 보면서 우리는 진정 보석을 발견해야합니다. 정말 인생의 값진 진리를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의 그 가르침속에서 우리는 보석과 같은 진정한 값어치있는 진리를 발견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속에서 발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정말 주님을 믿는 우리가 믿음속에서 발견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발견한 것으로 담대한 믿음속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가르침 첫째는, 말씀의 참 의미, 숨은 뜻, 진정한 진리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 33,3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수많은 말씀을 모여있는 백성들에게 알려주시고 말씀을 통하셔서 하나님 나라와 구원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도, 지난 주까지 살펴 본 말씀에도 예수님께서는 일반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할 비유의 말씀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국어공부할 때도 주로 은유법, 대유법, 풍유법같은 비유법은 정확한 의미를 잘 모르고 말을 하는 사람, 말을 쓰는 사람 즉 연설가, 혹은 작가만이 제대로 알 수 있는 비유법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법에서 하신 말씀의 정확한 의미는 우리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비유법으로 말씀하셨을까요? 그래도 국어책에 나오는 작품들은 어느 정도 식견을 가지면 그리고 좀 더 깊이 연구를 하면 비유에 등장한 단어들의 내면적 의미를 알아차리겠지만 성경말씀속에서 쓰신 비유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영적인 지각이 있을 때에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비유를 하실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만 알아들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경의 지식은 성령의 임재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도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려고 해도 제대로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아직 성령이 임하지 않고 제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아직 참 구원의 경험을 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시고 제대로 알려주셔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해석해 주실 때에만 제대로 비유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보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속의 진리를 알고 싶어 하지만, 성령님께서 일깨워주시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시고 우리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셔야 우리가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두 앉히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세족식을 하시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세족을 한다는 것은 종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종이 주인을 발을 씻기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주인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발을 씻기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완강히 반대하며 거절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세족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7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예수님께서 의미를 설명하시니 이젠 뭔가 깨달았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세족의 귀한 의미를 깨달은 베드로가 잘 깨달은 것 같은데 이젠 베드로가 오히려 “그럼 머리도 감겨주시고 손도 씻겨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세족식을 하시며 섬김의 의미를 보여주시는 지, 세족식의 보여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겨주시는 영적 의미를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하셔서 성령체험을 하고 난 이후에야 베드로는 세족식의 의미를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지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제대로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읽어도 제대로 그 말씀의 뜻을 제대로 분별할 지식을 가지지 못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삶속에서 제대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임하실 때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8~12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도 지식의 말씀을 알게 되는 것도 믿음이 생기고 병고치는 은사가 생기는 것도, 능력을 행하고 예언을 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영을 분별하며 방언을 말하는 것도, 방언을 통역하는 것도, 모두 성령이 임하셔야 가능하고 우리의 모든 삶속의 신앙적인 부분들, 영적인 일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말씀속에서 우리의 삶속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이고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삶이 이뤄질 것인지 아는 것 또한 우리는 바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속에서 온전한 역사가 나타나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거울로 보는 것도 정말 또렷하게 볼 수 있는데 무슨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다고 하냐라고 하겠지만 초대교회 당시,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의 세상에서 쓰는 거울은 청동거울입니다. 금속을 닦아서 금속에 비춰보는 거울입니다. 지금같이 제련이 잘된 금속도 아니고 울퉁불퉁한 금속거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희미하겠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면 주님의 나라가 임하면 하나님의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에게 일어난 수많은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확연하게 알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지식으로는 제대로 깨달을 수 없고 오로지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역사로 제대로 깨달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신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지식적 노력이나 우리의 부단한 지식탐구의 노력보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임한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통해 우리가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가르침 둘째는, 우리의 생활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가운데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 37절입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같이 갈릴리바다 건너편으로 가게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가는 도중 바다에 광풍이 일고 큰 파도로 인해 제자들은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세상이라는 바다가 우리를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할지라도 고통이 생기고 어려움에 놓이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생기는가?’라고 의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려운 현실과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라’고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실 때는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다 있을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것에 취해 있는 내 영혼을 깨우기 위해서,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것에 더렵혀진 내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서,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멀어진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삶이라는 인생의 바다에서 인생의 고난이라는 풍랑을 주십니다.
시편 119편 71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신 고난 속에 ‘하나님의 이러한 뜻이 담겨 있었구나!’라고 우리가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인생에 있어 우리를 단련시키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능한 장군은 그냥 아무 사람에게 임무를 맡기지 않습니다. 반드시 고된 훈련으로 인해 몸과 정신이 굳건히 다져진 군인들에게 임무를 맡깁니다. 정신력도 뛰어나야하고 체력도 뛰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임무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현상에 유혹당하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보고 담대하게 살아가야할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있음에도 눈에 보이는 현상에 무서워합니다. 갑자기 불어대는 엄청난 광풍, 광풍으로 인해 배를 위협하며 휘몰아치는 파도를 보고 두려워합니다.
마가복음 4장 38절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놀라운 은혜의 복음을 듣고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과 함께 무엇이든 하겠다고 다짐까지 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풍과 파도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연환경을 통치하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연환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 자연환경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로써 그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함께 하신 성자하나님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이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세상가운데 두려워하고 걱정하며 환경으로 인해 우리의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환경을 다스리시고 이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시키시며 환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과 환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환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욥기 23장 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가운데 살아가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께서 고난과 연단을 통해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세상의 환경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보여주시는 것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고난과 재앙마저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우리에게 허락된 것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면 이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하나님의 훈련이며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하나님의 치료약인 것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말씀이 결국은 세상의 환경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라는 교훈임을 깨닫고 환경과 상황에 좌절하지말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묵묵히 이겨내시고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가르침 마지막 셋째, 예수님의 존재를 깨달으라입니다.
마가복음 4장 41절입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결국 예수님과의 관계속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가르침의 핵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핵심가르침은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세상을 다스리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타고가던 배는 갑자기 일어난 광풍과 그로 인한 엄청난 파도로 인해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그 때 제자들은 상황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마음에 걱정이 엄습해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상황을 이렇게 해결하십니다.
마가복음 4장 39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어 바람을 멈추게 하시고 바다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 외치시며 파도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의 삶속에서의 두려움은 세상과 환경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능력앞에 경외함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의 존귀함을 느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우리는 얼마나 세상을 두려워하고 세상의 상황과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염려와 걱정으로 살아가는 지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들이 능히 우리를 몸은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을 죽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몸과 영혼 모두를 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가치관을 가질 때에만 정말 세상가운데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진짜 우리보다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재력, 지식, 학벌, 외모, 권력, 인맥 등등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우리가 가진 것과 세상의 사람들이 가진 것을 비교하면 우리는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정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눅들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가진 무기는 정말 하찮아보여서 이 무기가지고 뭘 해낼 수 없어 보일 정도로 세상 사람들의 무기는 강력하고 두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의 관점으로는 이 세상을 이길 수 없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을 이기는 것을 고백하며 우리는 살아갑니다. 다윗이 엄청난 크기의 장군 골리앗, 중무장한 골리앗앞에서 아무런 보호장비없이 무기도 물맷돌하나를 들고 이렇게 외칩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사무엘상 17장 47절입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힘으로 세상의 위협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겨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진 무기는 정말 세상을 이겨내기에는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무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큰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신앙에서 발견해야할 단 한가지는 예수님의 존재, 예수님의 자격,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이 누구이시기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께서 무엇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신지,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면 우리는 참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정말 세상가운데 참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세상가운데 일어나는 엄청난 재앙들, 험란한 풍파들, 우리의 생활속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경제적 위기, 인간관계의 갈등같은 광풍과 파도를 만나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기를 기대하며 예수님께 우리의 인생을 맡기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위기를 해결해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우리의 삶가운데 우리는 엄청난 위기를 맞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전도사역을 하는 중에도 이런 위기를 경험했는데 우리가 우리의 삶속에서 평안한 삶, 순탄한 삶, 아무런 흔들림이 없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정말 허무맹랑한 기대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알아야할 사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살아갈 의미를 발견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속에서 우리를 연단시키고 훈련시키시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런 고난속에서 우리를 구해주시고 우리에게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우리 주님 예수님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며 모든 환경과 분위기를 지배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세상의 통치자, 주권자이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