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성군, 안규홍 의병장 순국 109주년 의군제공 합동 추모 제향
보성군(군수 김철우)은 지난 21일 보성군 득량면 파청승첩비각에서 보성향교 주관으로 안규홍 의병장 순국 109주년과 함께 의군제공 합동추모 제향을 거행했다.
이날 추모제에는 고병돈 광복회 광주·전남 지부장과 초헌관인 유영관 부군수를 비롯한 각계각층 인사와 주민 200여 명이 참석해 구국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안규홍 의병장과 의군제공 111위의 넋을 기렸다.
안규홍 의병장은 보성읍 우산리 택촌마을에서 태어나 문덕에서 자랐으며, 머슴살이 의병장으로 ‘계홍’, ‘안담살이’, ‘담살이’ 등으로 불렸다. 안규홍 의병장은 1908년 문덕면 동소산에서 창의의 기치를 세워 의병을 모아 일본 정예부대를 급습, 격멸시키는 등 큰 성과를 거뒀으나 1910년 문덕면 동산리 법화마을에서 체포되어 32세에 짧은 생을 마쳤다.
보성군은 한말 호남의병의 대표 의병장이었던 안규홍(1879~1911,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과 안규홍 의병부대에 군자금 및 군수품을 지원했던 군량관 박제현(1871~1934,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이 살았던 안규홍․박제현 가옥을 등록문화재 제699호로 지정하여 관리․보존에 힘쓰고 있다.
안규홍·박제현 가옥은 한말 일제에 항거하여 구국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머슴과 주인이 함께 서훈을 받은 유일한 곳이다.
또한, 보성군은 임진·정유재란부터 한말․일제강점기까지 777명의 의병이 활동한 호남 의병의 중심 거점으로 전라좌도의병장 임계영 장군, 우산 안방준 의병장, 담살이 안규홍 의병장 등을 배출한 충절의 고장이다.
또한, 지난해 보성지역 의병 활동사를 연구·기록한 보성 의병사를 편찬 하는 등 다양한 의병 관련 콘텐츠를 제작하고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의병 선양사업 추진에 힘쓰고 있다.
♠전라남도 보성군은 의병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보성군은 임진·정유재란부터 한말·일제강점기까지 777명의 의병이 활동한 곳이다. 구한말 보성 의병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집이 보성군 문덕면 동산리 법화마을에 있다. ‘보성 안규홍·박제현 가옥’이다.
이곳은 최근까지 현지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근대역사유적지였으나 문화재청이 2017년 12월 5일 국가등록문화재 제699호로 지정하면서 세인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보성 안규홍·박제현 가옥은 의병이었던 두 사람이 함께 살았던 집이다.
안규홍은 머슴의 신분이었고 박제현은 주인이었다. 안규홍은 머슴 출신으로 의병을 조직해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32세에 짧은 생을 마쳤다.
의병장 박제현과 안규홍가옥
부농이었던 박제현은 안규홍 의병부대의 운량관(運糧官)으로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문덕면 동산리 대지주였던 박제현의 소유였던 이 집은 1872년에 신축되고 1933년에 중수된 것으로 추정되며 구한말 의병장의 주거지가 국내에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여서 그 역사적인 가치가 남다르다.
조정래의 장편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인 전라남도 보성군은 의병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외침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보성의 의병은 분연히 떨쳐 일어나 외침에 맞섰다. 보성군은 임진·정유재란부터 한말·일제강점기까지 777명의 의병이 활동한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어느 편지글에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표현을 했는데 이는 ‘만약 호남이 없다면 국가도 없다’라는 뜻이다. 그만큼 호남의 백성들이 국가를 지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보성 의병은 호남 의병의 중심이었다. 보성 의병의 유구한 역사는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야욕을 드러내던 한말에도 어김없이 발현된다. 구한말 보성 의병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집이 보성군 문덕면 동산리 법화마을에 있다. ‘보성 안규홍·박제현 가옥’이다. 이곳은 최근까지 현지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근대역사유적지였으나 문화재청이 2017년 12월 5일 국가등록문화재 제699호로 지정하면서 세인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보성 안규홍·박제현 가옥은 의병이었던 두 사람이 함께 살았던 집이다. 안규홍은 머슴의 신분이었고 박제현은 주인이었다. 그런데 이 집을 박제현·안규홍 가옥이라 하지 않고 안규홍·박제현 가옥이라고 명명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머슴이었던 안규홍이 의병장이었고 주인이었던 박제현이 안규홍 의병부대의 참모인 운량관(運糧官)이었기 때문이다. 신분의 격차에 대한 의식이 뚜렷했던 시절이었으니 ‘머슴이 이끌고 주인이 따른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사례이다. 오랜 기간 신분의 질서에 묶여 살아온 이들이 이렇듯 혁명적 인식전환을 해야 할 만큼 풍전등화에 처한 국가에 대한 위기의식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안규홍(安圭洪, 1879~1910년)은 머슴 출신으로 의병을 조직해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32세에 짧은 생을 마친 항일의병장이다. 그에겐 ‘담살이’, ‘안담살이’란 별명이 있는데 이 말은 전라도 사투리로 ‘머슴’을 일컫는 말이다. 안규홍은 1879년 4월 10일 전남도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택촌에서 아버지 안달환(安達煥)과 어머니 정 씨 사이에서 서얼(庶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7대조까지 벼슬에 오른 양반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살림살이가 매우 궁핍했다. 안규홍이 4살 때 그의 아버지가 타계했고 어머니는 남편의 매부이자 부농이었던 박중규(朴重奎, 1837~1892, 박제현의 부친)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살았다.
안규홍은 10살 때부터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안규홍은 ‘꼴을 베는 꼬마머슴(전라도 방언 깔담살이)’으로 주인의 시중을 들고 소와 말에게 먹일 쇠죽 끓이는 일을 하며 성장했다. 안규홍은 이 집에서 20년 동안 머슴노릇을 하다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고종이 퇴위하고 조선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을 조직했다. 1908년 4월 보성군 동소산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한 안규홍 의병부대는 보성을 중심으로 전남 남부지방 곳곳에서 크나큰 전과를 올렸다. 안규홍 의병부대는 1908년 4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26회의 전투를 치렀다. 안규홍 부대는 파청(巴靑), 진산(眞山), 원봉(圓峰) 등지에서 승리하며 일본 순사와 군인, 일진회원 등 200여 명을 사살했다. 일본 통감부가 ‘가장 용맹하고 출몰이 기민한 거괴(巨魁)’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일제는 1909년 9월 1일부터 조선의병 토벌작전인 ‘남한대토벌작전’을 펼쳤다. 안규홍 의병장은 보성군 문덕면 동산리 법화마을에서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어 1910년 6월 22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47년 보성 사람들은 안규홍 선생을 기려 득량면 예당1리 파청에 ‘의사안공파청승첩비’를 세웠다. ‘담살이 의병장’으로 불렸던 안규홍은 항일투쟁의 공적을 인정받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서훈됐다. 안규홍이 벌교 장에서 일본 헌병을 맨주먹으로 살해한 게 전설처럼 전해지면서 ‘벌교 가서 주먹 자랑 마라’는 이야기가 생겨나기도 했다.
부농이었던 박제현(朴濟鉉, 1871~1934)은 안규홍 의병부대의 운량관으로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박제현의 어머니가 안규홍의 고모였으므로 박제현과 안규홍은 사촌지간이다. 박제현의 아버지 박중규(안규홍의 고모부)는 안규홍이 어릴 때부터 그의 가족을 거두어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안규홍이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었을 때에도 노모와 가족을 부탁했을 정도로 의지했다고 한다. 박제현은 안재홍보다 8살이 많은 사촌형이었다. 하지만 안규홍이 서얼 출신이고 박제현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처지라 서로 얼마나 가깝게 지냈는지는 알 수 없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긴 했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여전히 차별의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제현은 1908년 2월 안규홍 의병부대의 군수장(軍需將)이 되어 450여 의병의 보급품지원에 이바지했으며 파청·진산·원봉 등지에서 전투에 참여했다.
그가 체포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설이 있다. 전남 순천 병산사의 양가쟁이 고개에서 일본군과 교전 끝에 체포되었는데 이때 손발을 절단당하여 불구의 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1909년 보성군 문덕면 병치 마을에서 붙잡혀 일본 헌병에게 고문을 당해 불구로 고초를 겪다 63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설이 있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보성 안규홍·박제현 가옥’은 머슴과 주인이 함께 의병 공적을 인정받은 유일한 사례를 증거하는 문화재이다. 문덕면 동산리 대지주였던 박제현의 소유였던 이 집은 1872년에 신축되고 1933년에 중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소산 법화마을의 높은 지역에 위치한 이 건축물은 현재 사당, 안채, 사랑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처마 등의 원형이 일부 훼손되었지만 대체로 근대기 한옥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안규홍이 담살이를 했던 사랑채(85㎡)와 박제현의 안채(144㎡,)가 원형대로 남아 있다. 구한말 의병장의 주거지가 국내에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여서 안규홍·박제현 가옥은 그 역사적인 가치가 남다르다.
정면 4칸 반, 측면 1칸 반 규모의 사랑채에는 비교적 넓은 3개의 방들과 협실이 있는데 안채 방향에서 오른쪽에 있는 방에는 주인 박중규, 박제현이 차례로 기거했고, 가운데 방은 손님 숙소로 사용했으며, 마굿간 옆 협실에는 머슴과 일꾼들이 기거했다. 꼬마머슴이었던 안규홍은 반 칸 규모의 협실에서 생활하며 잔심부름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안규홍은 사랑채와 대문채 사이에 있었으나 현재 사라진 행랑채에서 기거하였으며 결혼 후에는 어머니, 처와 함께 대문채 앞쪽에 별채를 짓고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구간에는 쇠죽을 끓이는 아궁이가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지고 마구간은 창고로 바뀌었다. 의병활동 당시 안규홍은 마구간 지하에 숨어 일본군의 추적을 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