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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삼국 시대
삼국 시대(三國時代)는 후한이 몰락하기 시작했던 2세기 말부터 위, 촉, 오가 세워져 서로 다투다가 서진이 중국을 통일
하는 3세기 후반까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엄격하게는 위가 세워진 220년부터 오가 진에게 멸망한 280년까지를 삼국시대로 보나, 많은 사람들은 황건의 난을 삼국
시대의 시작점으로 보기도 한다.
중국의 다른 국가들과 이름을 구별하기 위해 역사가들은 위를 조위, 촉을 촉한, 오를 동오라고 부르곤 한다.
비록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시기는 중국과 일본, 한국, 중화민국, 베트남 등에 낭만적이고 흥미롭게 묘사되고
있다.
삼국 시대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전되었고, 최근에는 TV, 영화, 비디오 게임 등으로 제작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명나라의 나관중이 쓴 삼국시대에 기반을 둔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이다.
가장 권위있는 역사 기록은 진수가 쓰고 배송지가 주석을 단 삼국지이다.
삼국 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시기였다.
후한 말의 인구조사에는 그 당시 인구가 약 5천만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서진 초에는 천 6백만 정도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진의 인구 조사는 한의 인구 조사보다 덜 정확했기 때문에 실제 수치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역사
황건적의 난 - 후한의 힘은 화제의 재위기 이후에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고, 경제적, 정치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많은 황제들이 어려서 재위에 올랐고, 사실상 친척들이 더 많은 권력을 지녔다.
황제들이 성년에 이르러도 외척들은 권력을 내주길 꺼려했기 때문에, 황제는 권력을 찾기 위해 관리들과 환관들에게 의지
할 수 밖에 없었다.
환관들과 외척간의 다툼은 그 당시 중국정부의 가장 큰 문제였다.
환제와 영제의 재위기동안 환관들에 대한 관리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으며, 많은 관리들이 공개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번째와 두번째 저항은 실패로 돌아갔고, 환관들은 저항에 참여했던 관리들을 처형하라고 황제를 설득했다.
몇몇 지방의 통치자들은 이렇게 억압적인 정치 분위기를 기회삼아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려고 했다.
환제와 영제의 재위기는 한나라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런 정치적 분위기에 더해서 당시 중국에는 많은 자연재해들과 여러 반란들 역시 존재했다.
184년 2월, 도교적 교단 태평도의 지배자였던 장각은 형제였던 장보와 장량과 함께 정부를 상대로 황건의 난을 일으켰다.
난은 급속도로 퍼져 수십만에 이르렀고, 중국 곳곳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36개의 요새를 가지고 있었고, 큰 요새는 만명 이상, 작은 요새는 6~7천명 정도의 군사를 가져 한나라 군대와 비슷
한 규모가 되었다.
그들은 "창천이사 황천당립 세재갑자 천하대길(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푸른 하늘이 죽고 노란 하늘이 일어나니, 갑자년에 천하가 크게 길해지리라)"라는 구호를 내새웠다.
영제는 황보숭과 노식, 주준을 보내 황건적을 물리치도록 했고, 지방의 관리들에게 군사를 보내 이를 돕도록 명했다.
삼국지연의는 바로 이 시점부터 시작된다.
황건적은 결국 패배하고 중국 각지로 흩어졌지만, 제국의 혼란스러운 상황때문에 살아남아 산지에서 도적으로 살아갔고,
이로 인해 시대의 혼란은 더욱 커졌다.
중국 곳곳으로 퍼진 도적떼들을 다 처리할 능력이 한나라 군대에는 없었다.
188년, 유언은 지방관들이 직접 그 지방을 통치할 수 있게 해달라 영제에게 건의했고, 영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는 주가 도적들을 잘 처리할 수 있도록 했지만, 이로 인해 중국 내부의 혼란은 결국 더 커지게 되었다.
권력을 잡은 동탁 - 이듬해에 영제가 죽고 다시 또 외척과 환관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환관 건석은 외척이었던 하진을
죽이고 왕세자자리에 올라있던 유변을 대신해 유협을 왕세자로 바꿀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유변은 황제가 되어 소제가 되었고, 하진은 원소와 함께 그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장양이 수장으로 있던 환관무리 십상시
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하진은 또한 양주의 동탁과 병주의 정원에게 병력을 보낼 것을 명했다.
그러나 십상시는 이를 알아차렸고, 동탁이 낙양에 도착하기 전에 하진을 암살했다.
그러자 원소는 궁을 급습해 십상시와 2천여명의 환관들을 살해했다. 이로써 외척들과 환관들의 긴 싸움은 끝났지만 군주
들간의 전쟁이라는 새로운 혼란의 시대를 열었다.
이 일로 인해 북동쪽 국경에 있던 동탁이 수도로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북서쪽 국경에서 창족과 전쟁중이었고,
이로 인해 동탁은 잘 훈련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군대를 끌고 낙양에 왔을 때 그는 쉽게 수도를 점령 할 수 있었다.
동탁은 더 능력있는 사람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유변 대신 유협을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낙양으로 가는 도중에 동탁은 전쟁통에 도망나온 유변과 유협을 지키고 있던 군대를 만났다.
동탁이 거만하게 행동하자 유변은 겁을 먹었으나 유협은 침착하고 권위있게 동탁에게 그들을 보호하라고 명했다.
동탁은 처음에는 한나라의 권위를 세우고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그의 정치적인 능력은 군사적 능력보다 훨씬 떨어졌다. 그의 행동은 점차 폭력적이고 권위적으로 변했으며, 그에 반대하는 사람을 모두 처형하거나 멀리 유배를 보냈고, 황제에 대한 존경 역시 점차 없어졌다. 그는 왕실의 예절을 모두 무시했으며, 궁궐에 무기를 가지고 다녔다.
190년에 반동탁 연합군이 조직되었다. 191년 5월, 계속된 패배에 결국 동탁은 헌제를 데리고 장안으로 도망쳤다.
동탁은 낙양에 살던 수백만의 거주자들을 장안으로 강제이주 시키면서 그의 정치적 무능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그는 반동탁 연합군이 낙양을 점령하지 못하게 낙양을 불태웠고 결국 그 당시 중국에서 가장 큰 도시를 불태우는 일을
저질렀다.
게다가 그는 군사들에게 지나가면서 보이는 마을의 주민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했다.
군사들은 주민들의 목을 베어 장안으로 가져왔고 이를 전쟁에 승리한 것 처럼 보이게 하는 전리품으로 사용했다.
1년후에 동탁은 왕윤과 여포의 쿠데타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조조의 강세 - 191년, 연합군 사이에서는 황실의 친척이었던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점점 연합군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몇몇 군주들을 제외한 나머지 연합군주들은 한나라의 재건보다는 자신의 힘을 더 강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다.
결국 한나라는 군주들에 의해 나누어졌다. 원소는 업의 북쪽 지역을 그의 상관이었던 한복으로부터 빼앗아 다스렸고,
북쪽 국경지대의 공손찬과 대립했다.
원소의 바로 남쪽에 있던 조조는 원술, 그리고 화이허와 창 강근처를 지배하고 있던 유표를 상대로 대립했다.
손견이 죽은 뒤 그 뒤를 이어받은 남쪽의 손책은 비록 원술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힘을 키우고 있었다.
서쪽은 유장이 익주를 다스렸고 그 북쪽에는 마등등과 같은 많은 군주들이 있었다.
동탁은 여포와 사도 왕윤에게 살해당했다. 여포는 동탁의 부하들(이각, 곽사, 장제, 번조)에게 차례로 공격당했다.
왕윤과 그의 가족들은 전부 처형당했다. 여포는 잠시 장양에게 몸을 위탁하다가 원소의 밑으로 들어갔다.
195년 8월, 헌제는 이각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장안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위험한 방랑을 하면서 자신을 지지
해줄 사람을 찾았다.
196년 조조는 황제를 모시면 다른 군주들에게 명령을 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지니게 된다는 모사 순욱의 제안에 따라
황제를 모셨다.
조조는 189년 겨울에 군사를 일으켰다. 몇번의 전술과 전투로 조조는 황건의 몇몇 무리를 격퇴했다.
이로인해 조조는 장막과 진궁등을 무리에 합류시키게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황건적과 싸워 약 삼십만의 군대를 흡수했다.
196년, 그는 허창으로 수도를 바꾸고 근처에 둔전제를 시행했다.
비록 높은 세금(농산물의 40~60%)을 부과하기는 했지만, 농부들은 안정적으로 군사들에게 보호를 받으며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이는 후에 그의 두번째로 성공적인 정책이라고 일컬어진다.
194년, 조조는 서주의 도겸을 상대로 전쟁을 했는데, 이는 도겸의 부하였던 장개가 조조의 아버지 조숭을 살해했기 때문
이었다. 도겸은 유비와 공손찬의 도움을 받았으나, 조조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서주가 함락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조조는 자신이 없는 동안 여포가 연주에 침략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도겸에 대한 전쟁을 잠시 미루고 후퇴했다.
도겸은 그해 사망했고 서주를 유비에게 물려줬다.
이듬해인 195년, 조조는 여포를 연주에서 쫓아냈다. 여포는 서주로 도망갔고, 유비에게 몸을 의탁했다.
남쪽의 손책은, 원술에게서 독립하고, 양주의 군주들이었던 유요, 왕랑, 엄백호등을 물리쳤다.
197년에 원술은 스스로 중 (후한)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다른 군주들의 분노를 불러온 실수였고, 또한 그의 부하였던 손책과도 대립하게 되었다.
조조는 손책에게 원술을 공격하라는 명을 내렸다.
손책은 이를 따랐고, 또한 원술에 대항해 유비, 여포 등과 연합을 하라고 조조를 설득했다.
결국 원술은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도망쳤다.
후에 여포는 원술의 잔여병력과 힘을 합쳐 유비를 배신하고 서주를 점령했다.
유비는 그의 의형제였던 관우, 장비와 함께 조조에게로 도망쳤다. 뒤이어 조조는 유비와 함께 서주를 공격했다.
여포의 부하들은 그를 배신했고, 원술의 지원군은 오지 않아 결국 여포는 그의 부하였던 송헌과 위속에게 포박당해
조조에게 끌려갔고, 이후 조조의 명에 의해 처형되었다.
200년, 외척이었던 동승은 헌제로부터 조조를 암살하라는 밀명을 받았다. 그는 유비 등과 함께 거사를 준비했으나,
조조에 의해 발각되어 유비를 제외한 공모자들은 모두 처형되고, 유비는 북쪽의 원소에게로 도망쳤다.
황건 잔당들의 반란과 궁 내부의 위협들을 처리한 뒤, 조조는 공손찬을 상대로 승리한 원소에게로 눈을 돌렸다.
원래부터 조조보다 신분이 더 높았던 원소는 거대한 군대를 모으고 황하 북쪽의 댐을 따라서 야영지를 세웠다.
200년에 유표를 상대로 승리하고, 허공의 반란을 진압한 손책은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그는 임종의 자리에서 동생이었던 손권을 후계자에 임명했다.
조조는 관도 대전에서 원소와 충돌했다. 군사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승리했는데, 특히 원소의 군량창고에
불을 질러 군대를 무기력하게 만든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유비는 형주의 유표에게로 도망쳤고, 많은 원소의 군대는 궤멸되었다. 202년에, 조조는 원소의 죽음과 이후 원소의 아들
들의 내분을 기회로 삼아 황하 북쪽으로 진격했다.
그는 204년에 업을 함락시키고, 기주, 병주, 청주, 유주를 점령한다.
207년 말, 오환을 상대로 한 북방 정벌에서 승리를 거둔 후 화베이 평원에 대한 확실한 지배권을 얻었다.
적벽 대전 - 208년에, 조조는 제국을 통일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했다. 유표의 아들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하고 형주를
넘겼으며, 조조는 거대한 함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장강 남쪽을 지배하고 있던 손책의 후계자 손권은 저항을 계속했다.
손권의 모사 노숙은 북쪽에서 도망쳐 온 유비와 동맹을 맺었고, 주유는 손가를 섬기던 노장 정보와 함께 손권의 해군
제독에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 5만명은 적벽에서 조조의 대함대와 2십만 군대와 마주쳤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자 조조의 함대에 불을 질렀고, 결국 조조는 대패해 북쪽으로 도망쳤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유비와 손권은 결국 살아남았고, 촉과 오가 세워지는데 큰 공헌을 했다.
북쪽에 돌아 온 후, 조조는 211년 북서쪽 지역을 병합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이로써 점점 힘을 길러갔다. 그
는 계속해서 힘을 길렀고, 결국 217년, 그가 조종하는 헌제에 의해 위왕에 올랐다.
유비는 형주의 태수들이었던 한현, 금선, 조범, 유탁을 물리치고, 214년에는 유장이 통치하던 익주를 점령했고, 형주에는
관우를 남겨두었다.
손권은 합비 전투를 끝내고 형주로 눈을 돌렸고, 둘 사이의 연합을 깨져가는 듯 보였다.
219년, 유비가 조조에게서 한중을 빼앗자, 조조는 손권과 동맹을 맺고 형주를 쳤다.
손권의 장수 여몽에 의해 관우는 잡혔고, 결국 처형당했다.
삼국의 정립 - 220년 1월, 조조가 죽고, 그해 10월 조조의 아들 조비가 헌제에게 황제 자리를 내놓을 것을 강요했고, 결국
한나라는 멸망했다.
조비는 낙양에서 자신이 황제임을 선언하고, 국가의 이름을 위로 했다.
221년, 유비는 멸망한 한을 재건하기 위해 스스로 황제임을 선언했다.
같은해에 위는 손권에게 오왕의 자리를 수여했다. 1년 후에, 촉은 관우를 죽인 것에 대한 보복으로 오에 전쟁을 선포했다.
유비는 손권의 지휘관 육손에 의해 대패하고, 촉으로 후퇴한 뒤 곧 사망했다.
유비가 죽은 후, 오와 촉은 위를 상대하기 위해 다시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222년, 손권은 조비가 내려준 직책을 거부했고, 229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북쪽은 완전히 위가 점령했고, 남서쪽은 촉이, 남쪽과 동쪽은 오가 지배했다.
국경 외부는 중국 사람들에게는 제한된 곳이었다.
예를 들어, 촉의 정치적 지배권은 남쪽(현재의 윈난 성과 미얀마)의 남만에 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제갈량의 남정 - 223년, 유비가 패배하고 사망하자 유선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패배한 후 촉과
오의 적대기간은 끝났으며, 두 국가 모두 내부 문제와 외부의 적(위)에 집중하기를 원했다.
손권은 이 전쟁의 승리로 촉이 형주를 노릴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났고, 이후 남동쪽의 원주민이었던 백월에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224년, 제갈각은 약 십만명의 백월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면서 3년간에 걸친 전쟁을 끝냈다.
그들 중 약 4만명 정도가 오의 군사에 편입되었다.
그동안 촉 역시 남쪽의 원주민들에 의해 골치를 썩고 있었다. 남만은 촉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익주의 도시들을
점령했다.
제갈량은 남쪽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촉군에게 남쪽으로 진격할 것을 명했다.
그는 남만의 대장 맹획과 몇번의 전투를 벌였고, 결국 맹획은 항복했다.
남만인들은 촉의 수도였던 성도에서 사는 것이 허락되었고, 또한 군대에도 남만부대가 생겼다.
제갈량의 북벌 - 제갈량의 남만 정벌이 끝나자, 촉은 북쪽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227년에 제갈량은 촉의 주력 군대를 한중으로 이동시켰고, 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듬해에 제갈량은 조운과 함께 기산을 공격했다.
그러나 선봉이었던 마속이 가정 전투에서 전략에 의해 패배를 하고 만다.
그 후 6년동안 제갈량은 몇번의 공격을 더 했으나, 물자 공급문제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
234년 제갈량은 마지막 북벌을 감행했고, 웨이허남쪽의 오장원에서 전투를 했다.
그러나, 그해 제갈량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한번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오와 남쪽 - 제갈량이 북벌을 할 동안, 오나라는 위나라가 침입하는 것을 계속해서 막고 있었다.
특히 합비근처는 적벽 대전 이후부터 계속해서 오와 위 사이의 긴장이 계속되고 있던 지역이었다.
계속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합비의 거주자들은 결국 장강 남쪽으로 이사할 수 밖에 없었다.
제갈량이 죽은 뒤, 화이허남쪽에 대한 위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는 오의 수비선을 쉽게 뚫을
수 없었다.
손권의 긴 재위기는 오나라의 전성기로 여겨지고 있다.
북쪽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과 백월족 이주민들로 인해 농사를 지을 인력이 풍부해 졌다.
또한 바다를 통한 운송업도 발전해 만주나 타이완등으로의 바다 여행도 가능해졌다.
오의 상인들은 현재의 베트남 북쪽 지역이나 캄보디아 등과도 교역했다.
경제가 번영한 것과 같이 문화나 예술 역시 발전했다. 낙양남쪽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 역시 이때였다.
삼국 시대의 끝
230년대 후반부터 조씨 가문과 사마씨 가문사이의 긴장감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조진이 죽은 후, 조상과 사마의간의 파벌싸움이 시작되었다.
조상은 그와 가까운 사람들을 요직에 앉혔으며,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사마의를 배척했다.
위나라에서 땅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던 가문 중 하나였던 사마씨 가문은 사마의의 군사적 성공에 힘입어 그 세력이 커졌다. 게다가 사마의는 매우 능력있는 전략가이자 정치가였다.
238년에 사마의는 공손연의 반란을 진압하고 랴오둥 반도를 정부의 직접통치하에 두었다.
결국, 그는 조상과의 힘싸움에서 이긴 셈이었다.
조상과 그의 가족들이 고평릉으로 간 틈을 타 사마의는 낙양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사마씨 가문에 대해
대항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죽림칠현이었다. 죽림칠현중 하나였던 혜강은 조상의 몰락 이후에 사마의에 의해 처형당
했다.
촉의 멸망 - 제갈량이 죽은 후, 그가 차지하고 있던 승상자리는 장완과 비위, 동윤이 차지했다.
그러나 258년 이후, 촉의 정치는 환관들에게 조종당했고 점차 부패하기 시작했다.
제갈량의 후임이었던 강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촉은 점점 무너져 갔다.
263년에 위는 세갈래로 공격을 진행했고, 촉군은 한중에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강유는 황급히 검각에 수비진을 폈으나, 사람이 다니지 않았던 험준한 지역인 음평을 통해 진군해 온 위의 등애에 의해 측
면을 공격당했다. 그
해 겨울 등애에 의해 수도인 성도가 함락되고, 황제 유선은 항복했다. 결국 촉나라는 43년만에 멸망했다.
유선은 낙양에서 위나라에 의해 "안락공"에 봉해졌다.
위의 멸망 - 260년 조모가 사마소를 죽이려 했다가 오히려 사마소에게 살해당한 후, 그 뒤를 이어 조환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곧이어, 사마소가 죽고 그의 "진왕"직은 아들 사마염이 물려받았다.
사마염은 바로 황제가 되려는 생각을 품었으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신하들의 간언에 따라 조환은 조모와는
달리 황제의 자리를 내어 줄 생각을 하게 되었다.
264년, 사마염은 조환에게서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았고, 위를 멸망시키고 진을 세웠다.
이것은 40년 전 조비가 한을 멸망시킨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오의 멸망 - 손권이 죽은 후 어린 손량이 252년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오는 급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촉의 멸망은 위나라가 오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선이 항복한 후 사마염(사마의의 손자)은 246년, 위의 황제를 몰아내고 진의 새로운 황제가 되면서 46년간 이어진 조위를 멸망시켰다.
진이 생겨난 후 오의 황제였던 손휴가 사망했고, 신하들에 의해 손호가 황제에 자리에 올랐다.
손호는 촉망받던 영재였으나,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급격히 포악해져 자신에게 간언을 하는 신하들을 처형하거나 유배
보냈다.
269년, 진의 남쪽을 지휘하고 있던 양호는 왕준과 함께 지금의 쓰촨 성 지역에서 오를 정벌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4년후, 오나라의 육항이 유능한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279년 겨울, 사마염의 명에 의해 진이 공격을 시작했고, 쓰촨 성 지역의 함대는 강을 따라 형주로 향했으며, 창 강을 따라
건업(현재의 난징 시)에서 강릉까지 다섯군데를 동시에 공격했다.
이런 맹공에 결국 건업은 280년 3월에 함락당한다.
손호는 항복하고, 봉토를 받아 그 봉토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로써 삼국 시대는 끝났고, 약 300여년간의 혼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인구
황건의 난 이후에 중원에 심각한 기근이 왔다. "170년 봄에, 하내의 몇몇 부인들이 남편을 먹었고, 하남의 몇몇 남편들이
부인을 먹었다."고 기록된 것 처럼 식인풍습이 널리 퍼졌다.
동탁이 권력을 잡은 후, 군대를 동원해 많은 여자들을 납치하고 강간했다. 반 동탁연합이 결성되자, 동탁은 갑자기 낙양의 시민들에게 낙양의 모든 궁궐과 절, 공관서와 민가를 모두 불태우고, 장안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당시 비참했던 생활상을 고려할 때 시민들이 장안까지 살아서 도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했다.
조조가 서주를 참략했을 때, 수십만의 사람들이 산채로 땅에 묻혔고, 강은 막혀 마을이 회복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각 (후한)이 관중 (지명)을 침략했을때, 당시 수십만의 주민이 있었고, 이각의 명령하에 군대가 약탈을 자행해 결국
서로를 잡아먹는 현상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아래의 표에서 볼 수 있듯, 삼국시대의 인구감소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후한 말기에서 서진의 통일까지 125년밖에 안되는 기간이었으나, 인구는 약 35%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이후 수나라의 시대까지도 인구가 회복되지 못했다.
또한 인구중에 군사의 비율이 매우 높은 시기였다는 것도 특징적이다.
예를 들어, 촉의 인구가 900,000명이었을 당시 군인은 100,000명으로 군인이 전 국민의 10%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삼국지에 삼국 시대의 인구가 기록되어 있다.
다른 많은 중국의 역사 기록이 그렇듯, 이 인구수 역시 실제 인구보다 적은 수일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인구조사가 정확
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또한 세금 회피자들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
후한 말기, 자연재해와 사회적 불안정때문에 경제 상황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고, 결국 많은 농지가 버려졌다.
몇몇 지방관리들과 귀족들은 그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요새를 세우고, 농사를 지어 점차적으로 자급자족 체제를 마련
했다.
이런 요새와 영지체계는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왕실의 몰락으로 인해, 헌 동전을 녹여서 주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돈을 주조했기 때문에, 국가가 아닌 개인이
주조한 동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삼국시대에는 새로 주조한 동전은 화폐로써의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비단과 곡식들이 화폐의 역할을 주로 하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지역적인 분열은 결국 후의 경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삼국시대로부터 약 700년이나 지난 북송시대에도 중국의 지역 경제권은 크게 3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8-2 황건적의 난
황건의 난(黃巾之亂) 또는 황건적의 난(黃巾賊之亂)은 중국 후한 말기 호족 지주에 의한 토지겸병의 위기에 끊임없이
직면해 있던 농민이 황건적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배경
외척이나 환관의 전횡으로 인하여 부패한 정치 밑에서 한층 더 곤궁을 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는 미신적인
민간신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현세구제(現世救濟)의 종교가 유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경과
태평도 창시 - 후한 영제 때에 거록(鋸鹿)의 장각(張角)은 스스로 대현량사(大賢良師)라 호를 짓고 황천(黃天)의 신(神)의 사자(使者)라고 일컬으면서 병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장각은 스스로 아홉 마디(九節)가 나 있는 지팡이를 짚고 설교하고 다녔는데, 170년대 초 무렵부터는 제자를 사방에 파견하여 포교(布敎)에 힘썼다.
이같은 교리는 빈곤 속에서 질병에의 공포와 불안을 품고 있던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10여 년 사이에 화북(華北)의 동반부로부터 양쯔강(揚子江) 유역에 걸쳐 수십만 명의 신도를 얻어 일대 교단(敎團)으로 성장했는데, 이 교단의 이름이 태평도(太平道)이다.
태평도는 주술(呪術)에 의한 요병(療病)을 중심으로 하고, 한대(漢代)에 유행한 참위설(讖緯說)·음양오행설 등과 잡다한
민간 신앙을 가미하고 다시 도가(道家)의 설로 윤색한 것이다.
장각은 이 신도들을 36개의 방(方)으로 조직했는데, 이 조직은 빈민의 반(反)권력적인 성격과 결합하여 군사적인 조직이
되기도 했다. 즉, 장각은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호를 지어 최고위에 앉고, 2명의 동생 중에서 장보(張寶)는 지공장군
(地公將軍), 장량(張梁)은 인공장군(人公將軍)이라 일컬었으며, 1만 명 전후의 신도로 이루어지는 방(方)의 책임자로는
장각의 제자가 선출되었는데, 그들은 신도로부터는 사(師:스승)라 불림과 동시에 방은 그대로 장군이름으로 불렸다.
이러한 태평도는 후한 정부로서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정부는 탄압책을 강구하여 해산명령을 내렸으나, 이것은 도리어
신도의 단결과 교단의 조직을 강화시키고, 반(反)권력적인 성격을 강화시켜 주는 결과가 되었다.
봉기 - 장각은 한제국(漢帝國)의 창천(蒼天) 대신 황천(黃天)의 세상을 실현해야 한다고 하면서 민중을 선동하여 60년
주기(周期)가 새로이 시작되는 갑자년(甲子年)인 184년의 음력 3월 5일을 기해서 봉기하려고 했다.
장각은 부하 마원의를 보내 뇌물을 주어 환관 봉서를 꾀어낸다.
그러나 궐기할 날짜를 눈앞에 두고 봉서에게 편지를 전하던 장각의 부하 당주가 계획이 누설되어 장각의 심복 마원의와
환관 봉서가 처형되고 관련자 1000명이 옥에 갇힌다. 정부의 탐색의 손길이 뻗쳤기 때문에 장각은 갑자기 예정을 변경
하여 음력 2월에 일제히 봉기하여 순식간에 전국 각지에서 대반란이 일어났다.
진압군 편성- 황건적의 난은 후한 전국 13곳에서 일어나고 이에 후한 황제 영제는 외척이자 대장군 하진과 대책을 의논
한다.
이리하여 옛 유비의 스승이었던 노식과 황보숭, 주준 등 3명의 장수가 황건적과의 전투 부대로 편성되고 조조도 기도위에
임명되어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한편 강동의 손견도 하비에서 부하 황개, 한당, 정보, 조무와 함께 1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참여한다.
그리고 유주의 탁현에서는 유비가 장비, 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수백 명의 장정들을 모집해 모집한 용사 500명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유주성 전투 - 의병을 일으킨 유비는 유주성으로 가 유주 태수 유언을 만난다. 얼마 뒤 황건적 대장 정원지가 5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유비는 의병 500명을 이끌고 유주의 관군 대장 추정과 함께 유주성 앞 대흥산에서 대치한다.
정원지는 부장 등무를 내보내 맞서게 했으나 유비의 의형제 장비에 의해 베어진다.
이에 정원지는 직접 나서지만 오히려 유비의 의형제 관우에 의해 목이 베인다.
대장 정원지가 쓰러지자 황건적들은 우왕좌왕하고 유비 삼형제는 황건적들을 무찌른다.
청주성 전투 - 유주성 전투 후 다음 날 황건적에게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한 청주 태수 공경의 편지가 도착한다.
유주 태수 유언은 교위 추정을 시켜 군사 5000명을 보내 유비와 함께 청주의 황건적을 무찌르게 한다.
청주성에 도착한 유비는 황건적들을 끌어들려 계곡으로 유인한 뒤 무찌른다.
공경도 군사를 내어 황건적을 앞뒤로 포위해 무찌르고 유비군은 큰 승리를 거둔다.
유비는 광종으로 노식 장군을 도우려 가지만 노식의 의견으로 1000명의 병사들을 내주어 황보숭과 주준을 도와주려
영천으로 향한다.
영천 전투 - 형주 장사의 산골 영천에서는 한나라 관군 대장 황보숭과 주준이 황건적을 토벌하고 있었다.
주준은 첫 전투에서 황건적의 대군을 이끌고 있는 파재와 싸우지만 패배하고 주준이 장사에서 농성으로 들어가자 파재는
이를 포위한다.
그러자 주준은 황보숭과 함께 장각의 동생 장량과 장보와 합류한 파재를 화공으로 공격해 무찌른다.
장량과 장보는 형 장각이 있는 광종으로 도주하였으나 도중에 조조를 만나 1만 명의 전사자를 내고 6월에는 팽탈의 황건군은 다시 격파했고 남은 황건적들은 예주 자사 왕윤이 이끄는 별동대와 관군의 협공으로 격파당하면서 예주의 황건적은
모두 평정한다.
유비는 뒤늦게 전투 후에 도착해 황보숭과 주준의 명으로 다시 노식이 있는 광종으로 돌아간다.
광종 전투 - 그러나 유비는 광종으로 가던 도중 노식이 뇌물을 거절해 모함을 받아 중랑장 자리를 빼앗기고 끌려간다는
소식을 듣는다. 결국 유비는 탁군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노식에게서 받은 1000명의 군사를 돌려보내고 탁군으로 향
한다.
그러다가 탁군으로 가던 도중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에게 쫓기던 노식에게서 중랑장 자리를 빼앗은 중랑장이자 서량
자사 동탁을 도와준다. 그러나 동탁은 유비가 벼슬이 없는 것을 알고 무시하고 결국 주준에게로 갔다.
곡양 전투 - 유비와 주준이 양성에서 장보와 대치하고 있는 동안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이 병으로 사망해 황건적의
사기는 크게 떨어진다. 장각의 뒤를 이어 동생 장량이 황건적을 이끌지만 관군 대장 황보숭과 거록 태수 곽전은 황건적의
본거지 곡양을 기습 공격하고 기도위 조조를 앞세워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모두 승리한다.
결국 장량은 곡양에서 전투 중 전사하여 목이 베이고 만다. 조정에서는 공을 세운 황보숭과 조조에게 큰 벼슬을 내리고
황보숭의 상소로 노식을 다시 중랑장으로 임명한다.
양성 전투 - 양성에서 대치한 유비와 주준의 관군과 장보의 황건적은 치열하게 싸우고 유비의 의형제 장비가 황건적들의 부장 고승을 베면서 황건적들은 양성으로 쫓겨 들어간다. 이에 유비는 기다리는 장기전으로 돌입해 황건적들의 내부
분열을 일으키려는 작전을 세운다.
유비의 작전은 그대로 성공해 장보의 부장이던 엄정이 장보를 살해하고 성문을 열어 항복한다.
완성 전투 - 남양 지역에서는 3월 장만성이 황건군을 이끌고 남양을 공격해 남양 태수 저공을 죽이고 이에 6월 새로
임명된 남양 태수 진힐이 장만성을 죽였으나 다시 손중, 조홍, 한충 등이 군사를 모아 형주의 완성에서 저항하자 유비와
주준은 남양 태수 진힐, 형주 자사 서구와 합류해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한다.
전투 중 손견의 1500명의 군사와 합류하여 다시 재정비를 하여 유비는 북문, 손견은 남문, 주준은 서문을 공격한다.
손견과 유비는 성벽을 넘어 황건적들을 무찌르고 손견이 조홍을 사살하고 손중 역시 동문으로 도망가다가 유비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그리고 한충도 남양 태수 진힐에게 죽고 10월 마지막 남은 손하의 황건군마저 괴멸당하면서 남양군 10개의 고을이 평정된다.
황건적의 재봉기 - 그러나 황건이 완전히 소탕되지는 않았고 188년이 되자 황건과도 관계 있는 백파(白波)의 적(賊)이
산시성(山西)에서 일어나고, 산둥성(山東) 방면에서는 칭조우(淸州)와 쉬조우(徐州)의 황건이 연달아 맹위를 떨쳐 전국을
전란과 무질서 상태에 빠뜨렸다.
그 후에는 192년 동탁이 죽고 이각과 곽사가 서량군을 무찌른 틈을 타서 청주에서 다시 수십만 명에 이르는 황건적이
들고 일어나 제북상 포신과 연주 자사 유대까지 전사시키는 등의 위세를 떨쳤다.
이에 이각은 주준의 추천으로 종군태수 조조를 시켜 청주의 황건적들을 토벌하고 제북까지 공격해 100일 만에 황건적
30만 명을 항복시키고 청주병으로 흡수한다.
하지만 그 뒤에도 황건적들의 활동을 계속되어 194년 황건적 잔당의 대장 관해가 군대를 이끌고 청주의 북해를 습격
하기도 했으나 북해의 황건적들은 유비와 태사자에 의해 토벌되고 그 뒤에도 연주와 서주 일대에서 계속 약탈을 자행
하던 황건적 대장 하의, 하만, 황소의 황건적 잔당은 조조에 의해 다시 토벌되었다.
의의
중국 역사에서 황건의 난은 제국의 말기 정부의 실정으로 천하가 혼란스러워졌을 때 종교를 매개로 한 정부반대집단의
성장과 궐기의 대표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발흥 초기에는 종교적 신앙에 기초하여 사람들을 위로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교세의 성장 이후 현세구제의 표어로 사람들을 모아 상당한 규모의 사회세력으로까지 성장하였고 이후에는 정치 세력화
하는 움직임을 보여 정부와 충돌한 것이다. 원말의 백련교의 성장으로 인한 명나라의 건립 등의 사례와 더불어 황건의
난은 중국 역사에서 종교가 제국의 교체를 불러온 대표적 예로 꼽히고 있다.
8-3 위
위(魏, 220년~265년)는 후한이 멸망한 후 삼국 중 하나로 삼국 중 가장 강대했던 나라였다. 천부적인 전략과 재능을 가진
조조는 삼국 시대의 군웅들 가운데 두각을 일찌감치 드러내었고, 후한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협천자 영제후(挾天子領諸侯) 즉,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여 천하쟁패의 시대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당대의 숙적 원소와의 회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중원 일대를 평정하여 최강 세력으로 발돋움했다. 조조 사후 그의 아들 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한나라를 멸하고 위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조씨 세력은 촉한 제갈량과의 대결에서 급격히 성장한 사마의에게 정권을 내주었고, 그의 손자인 사마염에 이르러 제위마저 내주고 말아 46년의
역사로 그 끝을 맺는다. 중국 대륙이 삼국으로 분할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위나라의 영토가 당시 중국 영토의 3분의
2를 차지하였고, 병력과 인구 면에서도 압도적 우세를 보였다.
역사
《삼국지》에서 정통으로 삼고 있는 위나라는 220년(황초 원년) 후한 왕조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으면서 266년(진시 원년)
사마염에게 선양하기까지 5대 황제 46년간에 걸친 왕조로, 실제 건국은 조조가 죽은 이후에 일어난다.
189년(중평 6년) 조조는 여러 제후와 함께 동탁 토벌을 위해 군사를 모집하는데, 이때 조인, 하후돈, 하후연 등 조조의
일족이 그를 따른다.
191년(초평 2년)에는 일찍이 청류파 지식인이었던 순욱이 조조의 진영에 가세한다. 순욱은 곽가, 순유, 종요 등 국방과
내정 면에서 활약하는 여러 명사들을 천거했다. 192년에는 황건적의 잔당을 굴복시켜 자기 군사로 흡수한 다음 정예를
선발해 ‘청주병(靑州兵)’으로 부른다. 이 정예 부대가 대륙 각지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조조는 원술, 여포, 원소 등을 쳐부수고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적장이었던 장료, 장합, 가후와 같은 인재를 얻는다.
조조는 옛 원한을 잊고 재능만 있다면 투항한 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도 그 뜻에 감복하여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이 ‘재능제일(才能第一)’이라는 인재등용 방침은 210년에 ‘구현령(求賢令)’으로 공포되는데, 여기에 기라성 같은 인재가
모여들어 크게 활약하게 된다. 이것이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조조의 수집벽인데, 알고 보면 조조의 뛰어난 통솔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후한 왕조는 이미 쇠퇴하고 있었지만 조조는 황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196년(건안 원년)에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오자 조조는 그를 받들어 허창으로 천도한다.
이때 원소의 참모도 황제를 영입할 것을 진언하지만 원소가 주저하는 사이 조조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만다.
조조는 황제를 봉대함으로써 대의명분을 얻어 관군이 되고, 자신에게 대적하는 자는 조정의 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또한 같은 해에 ‘전농부 둔전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당시 전쟁은 현지 조달로 식량을 충당했는데, 식량이 남으면 버리고
부족하면 약탈하는 식이었다. 그 때문에 농촌은 황폐해지고 유랑민이 급증했다.
이에 조조는 “천하를 통일하는 일은 강력한 군대와 충분한 식량에 달려 있다”면서 농업의 중요성을 역설, 계획적으로
식량을 생산·저장하려고 시도한다.
이리하여 백성을 모집해 빈농에게는 토지뿐만 아니라 밭갈이 소와 농기구, 그리고 종자까지 대여해 낙양, 허창 주변에서
둔전시킨다. 이미 둔전제 자체는 한나라 때부터 있었지만 조조의 둔전제는 각지에 전농부를 설치하고 전농관이라는 농업
전업관에게 이를 관리하게 했다.
그래서 사방을 정벌하는 데 식량을 수송하는 노고가 없어져 삼국시대 최대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조조는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208년에 승상, 213년에 위공(魏公), 216년에 위왕(魏王)이 되어 이미 제위를 넘볼 수 있는 세력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후한의 충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황제로 즉위하지는 않는다. 조조가 죽은 지
9개월 후 아들 조비가 헌제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음으로써 황제가 되었다.
조비는 수도를 다시 허창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여, 낙양을 발전시키는 데 힘쓴다.
낙양은 중국 삼국 시대 중 규모·인구 면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아버지 조조의 뜻을 받들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였으며, 부하·장수들을 등용함에 있어서 허물이 없게 하였다. 그런 조비가 황제에 오른 지 겨우 7년 만에 병사한 후, 위나라는 제갈량이 이끄는 촉나라의 침입을 받게 되고, 그 뒤를 이은 조예조차 239년(경초 3년) 34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후계자 조방은 이때 겨우 8살로, 사마의와 조상이 후견인이 된다. 곧이어 조상은 사마의의 실권을 빼앗고 정무에서 소외
시키지만 사마의의 노회환 전술에 말려들게 된다. 249년(정시 10년) 사마의는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조상 등을 실각시키고, 그에게 무고한 반역죄를 씌워 삼족을 모두 멸하고 만다. 이리하여 조씨 일족은 쇠퇴하고 실권이 사마씨에게 옮겨지며,
사마의가 죽은 후에도 그의 아들 사마사, 사마소에게로 권력이 승계되었다.
254년(가평 6년)에는 이풍, 장집 등이 주도한 사마사 제거 계획마저 실패하여 모두 처형되고, 황제 조방도 폐위를 강요
받는다. 이때부터 관구검, 문흠에 의한 반란이 일어나고, 257년(감로 2년)에는 제갈탄의 반란이 일어나지만 모두 진압되어 사마씨에 반대하는 세력이 일소된다. 260년에는 조방의 뒤를 이은 조모가 사마소를 제거하려고 수백 명의 측근을 이끌고
출격하는데, 반격하는 군사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리하여 마지막 황제 조환이 사마소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하지만,
사마소가 갑자기 죽게 된다. 마침내 266년(함희 2년) 아들 사마염 시대에 선양에 의해 진 왕조로 정권이 교체된다.
8-4 촉
촉한(蜀漢, 221년~263년)은 중국 삼국 시대 때 유비(劉備)가 지금의 쓰촨 성 지역에 세운 나라이다. 한 황실의 후예가 세운 마지막 한나라이기에 계한(季漢)으로도 불린다. 220년 사실상 한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던 위왕 조비(曹丕)가 헌제(獻帝)를 내쫓고 제위를 찬탈하자, 당시 익주(益州)와 한중(漢中)을 점거하고 있던 유비가 한 황실의 후예라는 정통성을 내세워
황제임을 선언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하였다(역사적으로 “촉한”이라 불린다). 수도는 성도(成都)이다.
유비 사후 후주(後主) 대에 이르러 진지(陳祗) · 황호(黃皓)와 같은 간신의 발호와 무리한 북벌로 점점 쇠망의 길을 걷다가,
263년 위의 대대적인 정벌에 멸망하고 만다.
유비
유비(류베이, 劉備, 중국조선말: 류비, 161년 ~ 223년)는 중국 삼국 시대 촉한의 초대 황제(221년 ~ 223년)로, 자는 현덕(玄德), 시호는 소열제(昭烈帝)이다. 삼국지(三國志)에서는 조위(曹魏)가 한(漢)을 계승한 정통 황조라고 보았으므로 유비를
황제로서 칭하지 않고 촉한 선주(先主)라고 불렀다. 진서(晉書) 열전에서 유비의 묘호가 열조(烈祖)라고 칭한 바 있으나
이것이 그의 정식 묘호가 아니고 후세 사가들이 추봉한 묘호이다. 황건 평정 이후 한창 세력을 상승할 때는 유예주(劉豫州)라고도 불리었다.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아들인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국지의 흔한 군웅들과
달리 뚜렷한 기반이 없이 출발였으나 한 고조의 풍도를 가지고 관우(關羽), 장비(張飛), 제갈량(諸葛亮) 등의 인재들을 등
용하여 당대 중원의 패자였던 위왕(魏王) 조조(曹操)와 끝까지 맞서 촉한(蜀漢)을 건국하였다.
생애
출생 - 유비는 탁군 탁현(지금의 허베이 성 바오딩 시 줘저우 시) 출신으로, '한나라의 황손'으로 기록되었으며, 팔이 길어 그대로 뻗어 무릎까지 닿고, 귀도 남달리 커서 거울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 아버지 유홍을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짚신과 멍석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집안 동남쪽에 높이 5길이 넘는 뽕나무가 있어 가마 덮개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 집에서 귀한 인물이 날 것이다”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유비도 이 나무에 올라가 놀면서 “나도 이러한 덮개가 달린 가마(황제의 가마)를 탈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숙부 유자경은 "함부로 말하지 마라. 구족이 멸한다."고 주의를 시켰다고 한다.[1]
15살 때 유학해 노식(盧植) 문하에서 수학한다. 이때 공손찬(公孫瓚)도 유비와 함께 공부했다.
그러나 유비는 그다지 독서를 좋아하지 않아 개를 좋아하고 놀러다니거나 음악을 듣는 데에 몰두했다.
말수가 적고, 늘 남을 공손히 대하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황건적의 난 때 장각(張角)은 청주, 유주, 서주, 기주, 양주, 연주, 예주, 형주 등으로 세력을 점점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혼란한 시기에 유비는 기꺼이 천하호걸과 교류했으므로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그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관우와
장비도 있었는데, 세 사람의 깊은 관계가 《삼국지연의》의 첫 부분에 나오는 ‘도원결의(桃園結義)’의 전설을 낳게 된다.
황건적의 난에서 형주 웅거까지 - 영제 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주군(州郡)에서 모집한
의병들을 이끌고 교위인 추정의 군대에 가담해 황건적을 토벌하여 그 공적으로 안희현위(安喜縣尉)에 임명되었다.
독우가 공무 때문에 안희로 왔을 때 유비가 독우에게 만나기를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이에 곧바로 독우가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 곤장을 들고 200대를 때렸다. 그리고 인수를 풀어 독우의 목에 걸고 그를 말뚝에 묶은 다음 관직을 버리고
달아났다.
얼마 후 유비는 단양에서 병사를 모집하는 임무를 맡은 도위(都尉) 관구의(毌丘毅)와 행동을 같이하다가 하비에서 적을
무찌른 공로로 하밀승(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지만 다시 관직을 버린다. 그 뒤 유비는 고당위(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어 현령으로 승진하나 적에게 격파되어 공손찬에게로 달아난다.
공손찬의 부하시절 - 공손찬은 유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하고 청주자사 전해(田楷)와 함께 기주목 원소 (袁紹)와 싸웠는데, 그가 자주 전공을 세웠으므로 평원상으로 임명했다. 이윽고 조조가 서주를 정벌하자 서주목 도겸(陶謙)이 전해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으므로 유비는 전해와 함께 도겸을 돕는다. 이때부터 전해 밑을 떠나 도겸에게 몸을 의지하여, 예주자사에 임명된 후 소패에 주둔하였으며, 도겸이 죽은 후에는 주위의 권유를 받아 서주를 지배하게 된다.
공손찬 사후 - 196년(건안(建安) 원년) 유비는 조조로부터 진동장군에 임명되어 원술(袁術)과 대치하는데, 그 사이에
하비의 수장인 조표가 배신하여 여포(呂布)를 불러들였고, 여포는 하비를 기습하여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는다.
유비가 여포에게 화친을 구하자 여포는 유비의 처자를 유비에게 되돌려보내고 유비는 소패로 돌아온다.
그러나 소패로 돌아온 유비가 1만여 명의 병사를 모집하자 여포는 이를 꺼림칙하게 생각해 유비에게 공격을 감행하였다.
유비는 패주하여 조조에게 귀부하였는데 조조는 유비를 후대하여 예주목으로 삼았고 유비가 소패에서 군사를 모아 여포를 견제하는 것을 지원하였다. 이에 여포는 고순을 보내 소패를 공격하였고 조조는 하후돈(夏侯惇)을 지원군으로 보냈으나
결국 유비와 하후돈은 고순에게 패배하여 다시 유비의 처자는 사로잡혀 여포에게 보내진다.
10월, 이에 조조는 친히 여포를 정벌하여 유비와 함께 여포를 하비에서 포위하여 사로잡고 여포를 참형에 처한다.
여포가 자신을 살려 쓰도록 조조에게 말하여 조조가 의심을 품자, 유비는 여포가 행한 패악을 조조에게 말했고 조조도
이에 동의했다.[2]
조조의 부하시절 - 유비는 조조와 함께 허도(許都)로 귀환해 좌장군에 임명되고 조조에게 후한 대우를 받았다.
유비가 왔을 때 조조의 참모 정욱(程昱) 등은 “유비는 영웅의 자질이 있고 민심을 얻고 있으므로 남을 섬길 인간이 아니다”
라고 말하여 죽일 것을 권하지만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3] 그 무렵 헌제의 국구인 거기장군 동승(董承)이 조조를 주살하라는 밀칙을 받고, 유비도 은밀히 이 계획에 가담했다. 어느 날 조조는 유비를 식사에 초대해 “지금 천하에 영웅이 있다면 그대와 나뿐이다.”라고 말했다. 유비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 따르면, 이때
천둥이 쳤기 때문에 유비는 그 탓으로 돌렸는데, 이것은 《삼국지연의》에서도 똑같이 기술된다. 그래서 유비는 조조 주살 계획이 탄로나기 전에 원술 토벌을 빙자해 서둘러 조조 밑을 떠난다. 그리고 원술을 멸한 후 유비는 하비를 점거하고 서주차사 차주(車胄)를 죽인 후 관우를 남겨 하비를 수비하게 한 뒤 소패로 돌아온다. 이때 군현들 다수가 조조를 배반하여 유비의 군세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유비는 세력을 키움과 함께 손건을 원소에게 사신으로 보내 조조에 대항하는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1]
원소의 부하시절 - 이때 조조는 왕충(王忠)과 유대(劉岱)를 보내 유비를 공격하나 패배하게 된다. 200년 조조는 유비를
토벌하고, 유비는 또다시 패배하여 청주로 달아났다. 당시 청주자사 원담은 유비가 예전에 무재로 천거한 적이 있어 군사를 보내 유비를 맞아보내고 원소에게 이를 알렸다. 원소는 장수를 보내 유비를 영접하고 업(鄴)에서 2백 리 떨어진 곳까지 가
유비를 만나는 등 유비를 대단히 환영했다고 한다. 전투에서 승리한 조조는 유비의 처자를 붙잡고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온다. 원소와 조조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는데, 여남의 황건적 유벽 등이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원소에게 호응하자 원소에게 파견되어 유벽 등과 함께 허 아래를 약탈하였고, 이때 조조에게서 달아난 관우가 돌아왔다. 조조가 조인을 보내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원소에게 돌아갔다.
유비는 원소 밑을 벗어나려고 원소에게 형주의 유표(劉表)와 협공하도록 진언하였다. 이리하여 원소는 유비를 여남에 파견하여 황건적 공도의 무리와 합쳐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어 여남에 진을 치고, 조조는 채양(蔡陽)을 시켜 공격하지만 채양은 패배하고 전사한다. 조조는 원소를 격파한 후 몸소 남하해 유비를 격파하였다.
유표의 빈객 - 유비는 유표 밑에 몸을 의지한다. 유표 역시 교외에서 직접 유비를 영접하는 등 유비는 상빈으로서 대우
받았고, 유표는 유비에게 군사를 주어 신야에 주둔하게 한다. 그러나 이후 형주의 호걸 중에 선주에게 귀부하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지자, 유표는 그의 마음을 의심하여 은밀히 제어하였다.
배송지가 《삼국지》에 주석으로 인용한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유비가 주연 석상에서, 변소에 가서 허벅지에 살이 찐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 자국을 본 유표가 그 이유를 묻자 “나는 항상 말안장에서 떠나본 일이 없기 때문에 허벅지에 살이 찌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말에 오르지 않아 벌써 허벅지에 살이 붙고, 세월이 흘러 노년에 가까운데 아무런 공적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한탄한 것이다”라고 대답한다.[4] 유명한 ‘비육지탄(脾肉之嘆)’이란 고사다. 또한 유표의 부하 괴월(蒯越), 채모(蔡瑁) 등이 연회를 이용해 유비를 살해하려고 하자 유비는 적로를 타고 힘을 내라며 다그치자 놀랍게도 3길이나 뛰어올라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5] 배송지는 또 이 일이 실제로는 없었을 것이라는 손성의 비판을 뒤에
덧붙였다.[6]
적벽의 싸움에서 삼국정립까지 - 한편 조조는 하후돈과 우금(于禁)에게 유표를 공격하라 명을 내렸는데, 유비가 박망 지역에서 이를 막아낸다. 유
비는 자기 진영을 불태우고 도망가는 것처럼 꾸미고 복병을 써서 그들을 완전히
격파했다.
208년 유표가 죽자 후계자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했다. 제갈량은 “유종을 없애고 형주를 지배해야 한다”라고 진언했지만 유비는 듣지 않았다.
이때 유종의 측근과 형주 주민의 상당수가 유비를 따라나서 하루에 겨우 10리 정도밖에 행군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비에게 “먼저 행군하여 강릉을 지켜야 한다”라고 진언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지금 사람들이 나만 의지하고 있는데,
어찌 이들을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조조가 기병 5천 명을 급파했기 때문에 유비는 당양의 장판교에서 추격당해 크게
패하고 만다.
유비는 유표의 큰아들 유기(劉琦)가 있는 하구로 도망쳤다. 그후 유비는 손권(孫權)과 동맹을 맺어 적벽에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유기를 형주 자사로 천거하는 한편, 무릉, 장사, 계양, 영릉 등 4군을 평정하였다. 유기가 죽자 군신들은 유비를 형주자사로 추대했으므로 손권은 유비를 두려워해 자기 여동생인 손부인(孫夫人)과 결혼시켜 관계를 돈독히 하려 애썼다.
211년 익주자사 유장(劉璋)이 조조의 침공을 두려워하자 유장의 별가종사였던
장송(張松)은 유비로 하여금 장로(張魯)를 토벌하게 하자고 진언했다.
이를 받아들인 유장은 법정(法正)을 유비에게 파견했다. 그러나 실은 장송이나
법정 모두 유비를 익주의 새 주인으로 맞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촉의 지형, 병기, 인마의 적고 많음 등의 정보와 지도를 제공한 장송의 행동에서 추측할 수 있다.
드디어 유비는 부군사 중랑장 방통(龐統)과 함께 익주로 들어서고, 유장은 몸소 마중나와 맞이했다.
유장은 유비를 행대사마 겸 사례교위로 천거하고 병사를 증강시켜 백수의 주둔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유비는 곧바로 장로를 토벌하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 인심 장악에 힘썼다.
211년 조조가 손권을 토벌하자 손권은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므로 유비는 유장에게 1만 명의 병사와 군수 물자를 요청
했다. 그러나 유장은 병사 4천 명과 요구한 군수 물자를 절반밖에 보내지 않아, 이에 유비는 격노했다. 때마침 장송은 “지금 촉 공략을 앞에 두고 어찌해서 떠나려는 것인가?”라는 내용의 편지를 유비에게 보내는데, 형 장숙(張肅)이 이 사실을 유장에게 알려 장송이 처형된다. 이때부터 유비와 유장의 사이는 악화되었다. 유비는 백수관을 지키는 양회(楊懷), 고패(高沛)를
참살한다. 유비는 지름길로 관중에 이르러서, 여러 장수들과 군사와 처자들을 인질로 잡고, 병사를 이끌고 황충(黃忠), 탁응 등과 함께 진격해 부성(涪城)에 도착하여 그 성을 점거했다. 유장이 유괴(劉璝)·냉포(冷苞)·장임(張任)·등현(鄧賢) 등을 보내 부성에서 유비를 막게 했지만 모두 격파되어 패하여, 퇴각하여 면죽(緜竹)을 보전했다.
유장이 다시 이엄(李嚴)을 보내 면죽의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했지만, 이엄은 부하들을 통솔하여 유비에게 항복했다.
유비의 군대는 더욱 강해지니,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파견해 군 아래의 현들을 항복시켰고, 제갈량, 장비, 조운(趙雲)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강을 거슬러 올라 백제(百帝)성과 강주, 강양을 평정하였으며, 오직 관우만이 남아 형주를 진수했다.
그리고 유비가 진군하여 낙성을 포위하는데 이때 유장의 아들 유순(劉循)이 성을 지키고 있었고, 공격당한지도 또 1년이
되었다.
214년 낙성이 격파되자 유비는 제갈량, 장비, 조운을 이끌고 성도를 포위하고 유장의 항복을 받아냈다. 유비는 익주 자사를 겸하게 되고, 유장의 옛 신료도 그대로 고관으로 취임시켜 촉한의 기반을 구축했다.
215년 유비는 형주를 둘러싸고 손권과 대립하였으며, 결국 형주 동부의 강하, 장사, 계양을 오나라에 양보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218년 유비는 마초(馬超)와 장비를 시켜 무도의 하변을 취하게 하고 그곳 이민족들과 연계하여 무도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조조가 조홍(曹洪)에게 군사를 주어 마초를 물러나게 한다. 유비는 양평관에 주둔하고, 219년 봄 군대를 이끌고
정군산에 진지를 구축해 하후연(夏侯淵)과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유비는 황충에게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크게 치게 하고 적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공격, 하후연을 무찔러 죽였다. 이에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나섰지만, 유비는 한중을 끝까지 사수하며 상용까지 공략했다. 그리고 같은해 7월 위왕 조조에 맞서 한중왕에 오른다. 한편 형주에 있던
관우는 위의 조인(曹仁)이 지키는 번성을 공격하다가 손권에게 배후를 찔려 전사했다. 결국 오나라에게 형주를 빼앗기고
만다.
촉한 성립과 유비의 죽음 - 220년(위나라 황초 원년) 위왕 겸 대장군 대승상조비(曹丕)가 한 헌제에게 강제로 선양받아 황제가 되었는데, 이때 촉한에서는 헌제가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헌제 살해 소식은 물론 그릇된 소문이었지만, 이것이 유비가 제위에 오르는 명분이 되었으므로 제갈량은 유비에게 황제로 즉위하도록 권했고, 221년 4월 마침내 유비는 황제로 즉위했다. 연호를 장무(章武)로 하고, 유선(劉禪)을 황태자로 세웠다.
대부분의 신하들이 칭제를 권했지만, 전부사마 비시는 상소를 올려 “강대한 적을
아직도 이기지 못하고 있는데, 즉위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 쉽지
않습니까? 옛날 한 고조께서는 초와 약정을 맺어, 진나라를 격파시킨 사람을 왕
으로 칭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전하께서는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황제에 오르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삼국지 촉서 비시전). 이에 유비는 비시를 좌천한다.
유비는 손권이 관우를 해한 것에 분노하여 오나라를 정벌하려고 했었고, 황제에
오른 이후 직접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 위나라를 강하게 의식한 조운이 간했으나 유비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222년(장무 2년) 2월, 유비는 친히 제장들을 이끌고 자귀에서 진군하여 무릉에 다다른다. 유비는 시중 마량(馬良)을 보내여 오계 소수민족을 회유하고, 진북장군 황권(黃權)에게 장강 북쪽의 제군을 통솔하게 하여, 이릉에서 오군과 맞선다.
연의에서 유비는 75만 대군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지만, 실제 정사의 기록으로 추정하여 볼 때, 당시 유비가 이끌었던 촉한의 군세는 4만 ~ 8만 명 규모의 익주 본대와 형주 유랑군, 이민족의 연합군(총합 10~12만 가량)으로 추정된다.
6월, 육손은 병사들에게 띠풀을 가지게 하여 화공을 통해 유비군을 공격하고, 형세를 갖추어 동시에 공격하여 장남(張南),
풍습 등의 촉장의 머리를 베고 40여 곳의 진영을 격파한 후, 마인산에 포진된 유비의 군대를 포위, 공격해 유비군의 진영을 붕괴시키는데 촉군은 이 전투에서 대패하여 죽은 군사가 8만이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벌에 실패한 유비는 겨우 달아나 백제성으로 들어간다. 육손은 군사들을 이끌고 촉군을 계속 추격하였지만, 조비가
이를 알아채고, 오나라 강동 땅이 비어있는 틈을 타 오나라 본국을 공격하였기에 육손은 군사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8월, 유비는 군사를 거두어 무현으로 돌아온다. 10월, 223년 4월 관우, 장비의 사망과 이릉전쟁으로 인한 화병이 심해진
유비는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이엄을 보좌로 삼고 영안궁에서 63살의 나이에 붕어(崩御)하였고, 8월에 혜릉(惠陵)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유비의 후손들은? - 263년 촉한은 멸망했다. 그와 함께 유선과 그의 일곱 후손들은 모두 위나라 내지(內地)로 옯겨
졌다. 그 후, 유선의 6남인 유순(劉恂)이 안락공직을 이었으나 영가의 난에 휘말려들어 유비의 적자손들은 절멸당하였다.
그러나 유선의 동생인 유영(劉永)의 손자 유현(劉玄)은 살아남아 성한(成漢)으로 도망가 황제 이수(李壽)에게 안락공의
칭호를 받는다. 그 후, 동진(東晉)의 장수 환온(桓溫)은 성한을 공략, 멸망시켰는데 도중에 환온을 따라온 역사가 손성은
유비의 증손자이자 마지막 후예인 유현을 만났다고 한다. 그 후 유현의 소식은 불분명하지만 그의 후손은 중국 각지에
퍼져 촉한 소열황제 유비의 혈통을 잇고 있다고 전해진다.
평가
유비는 오랫동안 정의의 사자이자, 한 황실 정통성의 대명사로 통했다. 유비의 명성과 인덕의 경우는 정사의 여러 기술에서도 기술된 바가 있다. 연의에서는 당시 민중의 성군상과 유교적인 영웅을 묘사하기 위해 본인의 능력보단 그릇과 덕,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을 강조하여 묘사한 바가 있고 현대에 들어 유비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일부 학자들에게 무능한 군주
였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실제로 유비와 그의 부하들과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었던 면이 있으며 살아서 치렀던 대부분의 전투의 지휘와 정책의 시행은 유비 그 자신이 총괄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도 하후돈의 대군을 박망파에서 격파한 것도 제갈량이 아니라 유비였으며, 진수(陳壽)의 정사는 적벽대전에서 싸운 우두머리 중 하나로 유비를 기록하고 있고, 조조
의 말년에는 한중을 방어하려 하는 조조의 친정 대군을 격파하는 등 여러 번 그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유비의 군사적 능력은 이릉 대전에서 진 것으로 인해 빛이 바랜 바가 없지 않다.
진수의 평은 다음과 같다.
《선주는 홍의(弘毅-포부가 크고 굳셈), 관후(寬厚-너그럽고 후함)하고 지인(知人-사람을 알아 봄), 대사(待士-선비를 잘
대우함)하니 한 고조의 풍도와 영웅의 그릇을 갖추었던 것 같다. 나라를 들어 제갈량에게 탁고했으나 심신(心神-마음)에
두 갈래가 없었으니 실로 군신(君臣)의 지공(至公-지극히 공정함)함은 고금의 성궤(盛軌-아름다운 본보기)다. 기권(機權-
기지와 임기응변), 간략(幹略-재능과 모략)은 위 무제(조조)에는 미치지 못해 이 때문에 그 영토는 협소했다.
그러나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저들의 기량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헤아리고, 오로지 이익만을 다투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려 했다 말할 수 있겠다.》
진수의 평을 볼 때 진수는 유비를 조조와 함께 묶어 평가하고 있는데 진수의 조조에 대한 평가를 보면, 조조는 한신(韓信)과 백기라는 중국역사상 기권간략의 대명사인 두 명장에 이름을 견줄 정도로 동시대에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보고 있다. 즉 진수가 기권간략면에서도 최고라는 전제를 내린 조조와 대등한 관계로서 평가, 비교하고 있는 군웅은 유비뿐인 만큼,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진수의 평에서 유비의 역량은 조조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진수의 평가상으로 유비는 상호보완적인 면으로서 조조에 견주어지는 인물로서 평가하고 있다.
8-5 오
오(吳, 229년 ~ 280년)또는 동오는 후한이 멸망한 후, 삼국 중의 하나로 친자 3대에 걸쳐 구축되었다.
비옥한 땅과 풍부한 인재를 갖추었으며, 잦은 군사적 진출 시도에서는 미흡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방어전에서는 양호한
전적을 보였다. 상황에 따라 촉한(蜀漢) · 위(魏)와 화평을 맺는 유연한 외교술을 펼쳤다.
위촉오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건국되었으나,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였고 가장 나중에 멸망하였다. 손견(孫堅)과 손책(孫策)의 맹활약으로 강동에 기반을 잡았고, 수성의 달인인 손권(孫權)을 통해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마지막 황제인 손호(孫皓)가 서진(西晉)의 사마염(司馬炎)에게 항복함으로써 삼국 시대는 그 끝을 맺는다.
오나라의 건국 이후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어 이른바 육조 시대가 열려 중국 경제와 문화의 중심이 화북에서 강남으로 옮겨지게 된다.
연혁
오나라는 황룡(黃龍) 원년(229년), 손권이 황제로 즉위한 이후 천기(天紀) 4년(280년) 진에 항복하기까지 4대 52년에 걸친
왕조다. 오나라의 손권은 위의 조조(曹操) · 촉한의 유비(劉備)와 비교하면 이미 손견과 손책이 쌓아올린 기반이 있어 처음
부터 혜택받은 인물이었다. 오나라의 시조가 되는 손견은 일찍이 이 지방에서 이름을 떨친 춘추 시대의 병법가 손무(孫武)의 후손이라고도 하며, 17살 때 해적을 퇴치해 일약 유명한 인물이 된다. 그리고 중앙 정부에서 관리가 되어 각지의 반란 진압을 맡고, 명망 높은 원술(袁術)의 후원 아래에서 반동탁 연합군에도 가세하지만 초평(初平) 3년(192년) 형주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를 공격하던 중에 허무하게 죽고 만다. 당시 손견은 일개 태수에 불과해 손견이 죽은 다음에는 영지와 병사 모두 원술에게 흡수되었다. 그렇지만 전장에서 수많은 무공을 세움으로써 세상에 손씨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황개
(黃蓋) · 정보(程普) · 주치(朱治) 등과 같은 신하는 계속해서 맏아들 손책을 받들었다.
손책은 실질적인 오나라의 창업자라고도 할 수 있는데, 처음에는 원술 밑에서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후 강동에 기반을
쌓고 독립해, 친구 주유(周瑜)와 협력해 세력을 확대해 갔다. 손책은 성격이 활발하고 기꺼이 남의 의견을 잘 받아들였으므로 그 당시 장소(張昭) · 장굉(張紘) · 태사자(太史慈) · 여몽(呂蒙) · 주태(周泰) · 장흠(蔣欽) 등과 같은 문무 관리가 수하에
들어왔다. 그러나 건안(建安) 5년(200년), 손책은 자신이 죽인 오군태수(吳郡太守) 허공(許貢)의 밑에 있던 식객의 손에 의해 26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손책은 임종을 맞을 때 동생 손권에게 후사를 부탁하며 “군세를 이끌고 싸우는 것이라면
내가 더 낫다. 그러나 현자를 발탁하여 나라를 지켜내는 일은 네가 더 낫다”라고 유언한다. 그리고 내정에는 장소, 군사에는 주유를 각각 보좌역으로 선정해 손책의 유언대로 오나라가 운영되어갔다.
이리하여 겨우 19살 때 손권은 오나라의 주인이 되었다. 흔히 정권 교체기에는 휘하의 신하가 무더기로 퇴출당하는게 일반적이었지만, 손권은 손책의 신하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중요 인물인 장소와 주유가 솔선수범해 손권에게 충성을 바친 것도 이유였지만, 역시 젊은 손권이 위업을 이룰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손권의 치세에는 노숙(魯肅) · 제갈근(諸葛瑾) · 감녕(甘寧) · 서성(徐盛) 등의 인재들도 가세하였다. 건안 13년(208년), 유비와 연합해 천하 통일을 노리는 조조의 야망을
적벽(赤壁)에서 분쇄하였다. 그 뒤 유비와 형주(荊州) 영유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건안 24년(219년), 관우를 공격해 형주에서 양측이 나눠 가지던 영역을 독점했다. 그 사이 조조에게 순응해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황초(黃初) 2년(221년), 촉한이 오나라를 침공하자 육손을 파견해 이를 저지하지만 이듬해 유비와 화해해 국교를 수복했다. 권모술수가 팽배한 당시의
난세에서 손권의 이러한 유연한 외교술은 오나라에 큰 도움이 되었다. 황룡 원년(229년), 손권은 마침내 제위에 올라 황제가 되었다. 오나라는 또한 해상 무역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손권은 황제를 칭한 후 점차 독단적이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중신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공손연(公孫淵)과 화친하려 했다가 사자의 목숨과 예물만 빼앗겼으며, 단주(亶州)와 이주(夷州)의 주민을 잡아와 인구를 늘리려 했으나
사로잡은 사람들에 비해 보냈다 죽은 군사가 많아 큰 손해를 보았다. 결정적인 것은 후계자 선정 실패로, 오나라를 쇠퇴에 빠트려 결국 멸망길에 들어서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태자 손등(孫登)이 손권 재위 중에 죽자 손권은 손화(孫和)를 새로운 태자로 내세우지만, 동시에 손화의 동생 손패(孫覇)도 아껴 노왕(魯王)으로 봉하고 태자와 동등하게 취급했다. 그래서 신하들도 손화파와 손패파로 갈라져 서로 싸우게 된다.
당시 승상(丞相)인 육손(陸遜)이 “적자와 서자 사이에는 마땅히 차별을 두어야 한다”고 간언하지만, 손권은 듣지 않고 오히려 손패파의 참언을 믿어 육손은 유형에 처해지고 곧이어 분사하고 만다. 이 권력 투쟁에서 유능한 신하 수십 명이 방출되거나 처형되었다. 적오(赤烏) 13년(250년), 손권은 손화를 태자 자리에서 내쫓고 동시에 태자로 즉위하려고 한 손패에게 자결
을 명해 결국 막내아들인 손량(孫亮)을 태자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파벌 양쪽을 중벌에 처한 손권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손권 자신의 결단으로 인한 손화파와 손패파의 대립으로 촉발된 신하들 간의 파벌 싸움은 폐제 시대까지 피로 피를 씻는 꼴로 이어져 나라를 혼란에 빠트렸다. 2년 후 손권은 아직 10살밖에 되지 않은 손량을 남기고 죽고 만다.
그후 손량의 치세에 정권을 장악한 제갈각(諸葛恪)은 처음에는 선정을 펼쳐 널리 민심을 얻고, 동흥 전투에서 승전하여
그 명망이 한때 드높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교만해져 20만 대군을 무리하게 징발하여 합비신성을 공격하였다가 대패하여 민심을 잃었고, 돌아와서는 자기 실패를 가리는 데 급급하고 다시 출정하려 하여 동료들을 두렵게 했다. 마침내 손준(孫峻)이 손량과 공모하여 제갈각을 죽이고, 손준은 실권을 쥐고 제갈각을 능가하는 만행을 벌여 오나라는 더욱 어지러워졌다.
손준이 죽자 그 권세는 손준의 종제 손침(孫綝)에게 넘어갔으나 손침의 정치는 손준과 다를 것이 없었으며, 더욱이 제갈탄(諸葛誕)의 난을 효과적으로 돕기는커녕 오히려 패퇴를 거듭하고 마침내 제갈탄을 지켜내지 못했으므로 원성이 자자했다. 영안(永安) 원년(258년), 손량은 실권을 장악한 손침을 주살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손침은 손량을 내쫓고 폐제의 형이며
손권의 여섯째 아들인 손휴(孫休)를 황제로 옹립하니 곧 오 경제(景帝)다. 경제는 손침과 대립하던 끝에, 장포(張布) ·
정봉(丁奉)과 모의해 그를 체포해 처형한다.
경제는 즉위 초기에는 조세를 감면하고, 과거 제도와 유사한 관리 등용 제도를 실시하는 등 오나라를 개혁해 보고자 하였
으나 말년에는 측근 장포와 복양흥(濮陽興)에게 정무를 위임했으며, 장포와 복양흥 역시 비교적 악정을 펼쳤으므로 원망이 높았다. 원흥(元興) 원년(264년), 경제가 죽고 때마침 촉한의 멸망과도 겹쳤기 때문에 이 기회에 훌륭한 황제를 세워 거국일치로 오나라를 융성시키려 했다. 이때 지목된 사람이 바로 앞서 태자에서 폐위된 손화의 아들 손호이다. 그런데 황제가
된 손호는 성질이 포악하고 오만방자해 대사면을 연발하는 한편, 손휴의 아들 손완(孫) · 손굉(孫) · 손망(孫) · 손보(孫)를
잡아들여 손완과 손굉을 죽였다. 더구나 연회 자리에서 신하들을 취하게 만들어 허튼 언동을 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이고, 안면을 벗겨내거나 눈을 도려내는 잔인한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 또 간신 하정 · 잠혼(岑昏)을 총애하고, 백성들을
가혹한 노역으로 내몰았기 때문에 민심은 급속도로 나빠져갔다.
280년 진나라가 오나라를 침공하자 손호는 어이없이 그대로 항복하여, 중국대륙은 통일되어 삼국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