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찬송; 해방의 노래
1사무 1,24-28; 루카 1,46-56
2018.12.22.; 이기우 신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마지막 판관이자 최초의 예언자로 알려진 사무엘이 출생하게 된 계기는 그 어머니인 한나가 눈물 어린 기도로 하느님께 간청했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만약 하느님께서 아기를 갖게 해 주시면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했으므로 아기가 태어나자 사제 엘리에게 데리고가서 예언자로서 양성시켜 달라고 청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독서의 내용인데, 이와 상통하는 내용이 오늘 복음에도 나옵니다. 엘리사벳을 찾아간 마리아가 자세한 사정을 털어놓기도 전에 이미 엘리사벳이 알고 인사말을 하자 마리아는 성령에 가득 차서 하느님을 찬송했습니다. 이른바 마리아 찬송, 혹은 Magnificat입니다. 이 노래 안에는 마리아를 포함한 신심 깊은 유다인들이 전승으로 전해 내려오던 역사적 희망이 강하게 피력되어 있습니다. 이 노래를 통해 그 역사적 희망은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로 고스란히 전수되었습니다. 당연히, 이 역사적 희망은 Exodus Paradigm의 일환입니다.
우선 이 역사적 희망을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자세가 지극한 겸손과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을 청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른지 알 수 있습니다. 무신론적인 공산주의 사상이 처음부터 실패하게 된 원인이 여기에 있지요.
역사적 희망의 첫 번째 프로그램은 정치적 역전입니다.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통치자들을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시는 일입니다. 독재가 설 자리는 사라지고 정치 권력은 점점 더 평등하게 행사되는 방향으로 역사는 흘러갈 것입니다.
역사적 희망의 두 번째 프로그램은 경제적 역전입니다.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시어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일입니다. 경제적 불평등이 매우 심각한 작금의 현실에서 이를 뒤집어엎고 경제적 평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역사는 흘러갈 것입니다. 가진 자들의 갑질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추억이자 코메디로만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에 따라서 정치 권력은 왕정정치에서 귀족정치로 바뀌었다가 시민혁명을 거쳐 주권재민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러자 지식인들과 언론이 여론을 형성하는 또 다른 새 권력자로 영향력을 행사하고는 있지만 조만간 민초들의 여론이 지식 엘리트들의 역할을 넘어서게 될 것입니다. SNS로 약칭해서 부르는 사회적 네크워크 의사소통 수단이 신문과 방송의 영향력을 넘어서고 있는 추세로 보아서 그렇습니다.
정치적 힘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고르게 분산되는 속도보다 훨씬 더 느리게 경제적 힘이 편중되어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제 민주화는 정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사막의 신기루처럼 요원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역사의 대세는 바꾸거나 멈출 수 없습니다. 더디기는 해도 오기는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은 분명합니다. 세상보다 앞서 경제적 민주화, 돈의 성화를 앞당기는 일입니다. 가진 바 재산을 하느님의 뜻대로 쓸 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단 한 사람이라도 생겨나고 그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고, 세 사람으로 늘어나는 흐름에 머지않아 역사의 대세가 형성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손에 쥐고 있으면 그냥은 놓게 할 수 없습니다. 더 좋아하는 것을 손에 쥐어줄 때까지는 그렇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이 재산의 무상함과 함께 영원한 생명과 그에 따른 영적인 몸의 품위가 자유와 지성과 양심을 통해서 드러나는 그 만큼 사람들은 각성하게 될 것이고, 돈의 한계와 독성에 대해서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알게 되고 깨닫게 되는 그만큼 세상의 권력과 재력의 한계를 깨닫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허락하시는 양심과 자유와 지성의 가치를 한껏 발휘하여 인간의 현실 역사를 앞당기는 꼭 그만큼 하느님 나라는 다가올 것입닏. 하느님을 아는 만큼, 믿는 만큼 인간의 현실이 하느님의 것으로 바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