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통해서 그림을 그리는 재료는 수많은 것들이 있겠는데요,
현재의 저를 기준으로 볼 때는 극히 몇 가지로 축소될 수 밖에 없겠는데요,
연필, 크레파스, 수채, 그리고 유화 정도입니다.
특별한 경우에는 그 밖의 다른 재료들도 사용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그 정도 만으로 저는 그림을 그리고 지낸답니다.
아, '아크릴 물감'도 많은 이들이 사용하고는 있지만, 저는 유화를 선호하는 사람이라,
아크릴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특징도 있겠는데요,
제가 제일 많이(중요시) 사용하는 게 '유화'인데(중요하고 큰 그림들은 거의 전부가 유화니까요),
유화는 '캔버스'라는 곳에 그리는, '아크릴'과는 달리 마르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제법 많은 시간을 요하는 그림이기도 한데요,(아크릴은 물로 개서 그리기 때문에 수채화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유화는요, 붓이 많이 필요한 그림이기도 하답니다.
색깔마다의 붓이 필요하다고나 할까요?
물론, 그 많은 색깔의 각각의 붓이 필요할 수는 없지만,
유화 한 작품을 그리려면(단 번에) 상당히 많은 붓이 필요하거든요?
수채화 붓처럼 한 번 그린 뒤, 물로 빨아서 다른 색깔을 찍어 바를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다 보니 이론 상으론, 자기가 그리고 싶은 색깔마다의 붓이 필요하다는 건데,
물감이 쉽게 마르지 않기 때문에, 다른 색깔을 덧칠할 경우는 이전의 색깔과 섞이기 때문에, 붓 자체가 다른 색깔로 변하는 등의 번거로움이 함께 하는 그림이라서요.
저 같은 경우는,
유화 한 작품을 하려면 꽤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데,
(작품에 따라 다릅니다만, 큰 작품일수록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도 한데, 어떤 경우는 단 번에 그릴 때도 있긴 하지요.)
하다 멈추고, 며칠 뒤에 다시 하는 등(물감 마르른 것도 계산해 가면서),
그러다 보면 많은 붓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두세 개만 있어서 하루 분량의 그림을 그릴 수도 있는 등,
상황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요,
근데,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그 설명을 늘어놓는 건...
오늘은 '유화 붓'에 관한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 여러분의 이해가 필요해서 그런 거랍니다.
저만 떠들어 봤자, 여러분은,
그게 무슨 소린가?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아무튼, 유화는 붓이 많이 필요한 그림인데,
돈이 많아서 단 한 번 사용하고 붓을 버릴 거라면, 빨지 않고도 가능할 일이지만,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처지도 아닌 저는,
유화를 한 번 그리고 나면,
원래는(?) 그 붓들을 다 빨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화가들 작업실에는 항상 붓 빠는(석유 종류) 통이 있는데요,
유화를 그린 뒤, 붓에 묻어있는 물감 찌꺼기를 석유에 빨아야, 며칠 뒤에 마른 상태로 그 붓을 깨끗하게 또 사용할 수 있어서지요.
제 옛날 학생시절엔, 석유로 붓을 빤 뒤, 그래도 남아있는 찌꺼기를 빨랫비누 등으로 빡빡 문질러 하얀 거품이 날 정도로 빨아서 사용하곤 했는데,
그래야 붓의 수명도 오래 가고 다음 그림 그릴 때 깨끗한 붓으로 산뜻하게 그림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그렇게 가르쳤고, 그렇게 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는데,
그 붓을 빨고 말리는 과정이 여간 번거롭고 짜증나는 게 아니랍니다.
그렇지만 옛날엔 그저 '그렇게 해야하나 보다.'하면서,
귀찮긴 하지만, 죽자사자 그렇게 하면서 지내왔는데,
아,
언제부터인지(어쩌면 60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저에겐 붓 빠는 게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이 돼 버렸답니다.
여러분들은 그럴 겁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화가가 붓 빨기가 죽도록 하기 싫다니!
맞는 말입니다.
근데, 화가인 저는 요즘, 붓 빨기가 너무 귀찮고 싫어서... 어떤 때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유화 물감이 굳어서 '막대기'가 돼 있는(전에 그리고 빨지 않고 내팽개쳐 둔 붓들이 다 굳어서) 붓을 보면서, 한숨이 나와... 그림을 그리려다가도 포기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랍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구요?
요즘의 제 일상이자, '화가의 삶'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이러니라 아니 할 수 없고,
이건 말도 안 된다! 면서도 그림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이라, 저 자신도 당혹스럽기만 한데요,
손이 떨려서 제대로 선이 안 나오는 건 어느새 옛일이 돼버렸고,
이젠, 붓이 빨기 싫어 그림을 못 그리는 게 일상이 되고 있다는 거지요.
물론,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있고, 앞으로도 그리긴 할 겁니다만, 화가로 살다 보니, 그런 과정들이 운명처럼(?) 저에겐 벌어지고도 있답니다.
근데요,
그럴 때마다 저에겐 한 사람이 떠오르곤 하기도 한답니다.
제 옛날 '제자'인데요,
오래 전의 일이지요.
제가 대학 4학년 때 알았던 제자니까요.
그 녀석하고는 몇 년, 제가 '홍은동' '연희동' 화실을 할 때, 함께 했었는데,
그 당시에도 저는 하기는 하면서도 붓을 빨면서는 혼자 궁시렁대기 일쑤였는데(하기 싫다고),
어느 날인가는, 제가 그림을 그리다 무슨 일이 있어서 바쁘게 군산에 내려갈 일이 생겼는데,
이삼 일 뒤에 돌아와 보니,
붓이 말끔하게 빨려 있는 거 아니었겠습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녀석이 제 붓을 너무나도 깨끗하게 빨아놓아서,
제가 감동을 했던 일이 있은 뒤,
이따금 한 번씩 녀석은 그렇게 제 붓을 빨아놓곤 하드라구요.
(붓만 빨아놓는 게 아닌, 제 어설픈 다른 미술도구 뒤처리도 해 놓는 등, 제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역할을 해주었답니다.)
그렇게 스스로 알아서 '이쁜 짓'을 하던 녀석이라, 그 뒤로도 저하고는 오랫동안 관계가 이어졌는데,
제가 스페인에 갔을 때도, 제 스페인에 보냈던 짐처리 문제도 녀석이 맡아 주었고, 어찌나 꼼꼼하게 신경을 써주었던지, 제가 바르셀로나에서도 뭔가 한 가지 일로(짐 점검을 하다가) 그 녀석에게 감동했던 적이 있는 등,
나중에 제가 외국생활에서 돌아왔을 때까지도(녀석은 이미 결혼해서 아이가 둘인가 있었는데) 일정 기간 교류가 이어졌는데,
그 뒤로 녀석이 아예 소식을 뚝 끊고 사라져버렸답니다.
처음에야,
곧 찾겠지...... 하고 지냈었는데,
한 해 두 해... 십 년, 그 넘게...
그 녀석은 제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답니다.
제가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아마, 이런 얘기를 그 전에도 이 까페에 했을 건데요.)
아,
오늘도 붓을 빨면서(너무나 하기 싫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짜증을 내는데,
문득, 그 녀석이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20년도 넘었습니다. 녀석이 사라진 지가......
제가 죽기 전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 중(셋? 그런데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의 하나입니다......
첫댓글 살아가면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인데 미치도록 그리운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만날 수 있는 행운이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러길 간절히 바라고 있답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