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原畵)
김광한
A잡지사에서 편집장으로 일한 40년전의 일입니다. 독자들의 대부분이 청소년들인 A잡지는 일종의 대중잡지였는데 최근 들어 재력이 막강한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청소년 잡지들 때문인지 점차 판매부수가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장인 독고씨는 기존의 여자탤런트대신 이름 있는 화가들이 그린 그림으로 채우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표지에 그림을 실어주는 대신 화가의 그림을 공짜로 기증받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한데 모아서 전시회를 하자는 것이었는데 속셈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그림을 모아서 화상(畵商)에게 넘겨 몫 돈을 챙기려는 의도가 다분히 배어 있었습니다. 실제 1년여가 지났어도 표지에 게재된 그림들을 한데 모아서 전시한 적도 없었고 대부분 화가들에게 가져온 그림들은 사무실에서 곧바로 사장의 자택으로 가져갔거나, 인사동 화랑에 매물로 내 걸리기 일쑤였습니다.
편집장인 저로서는 한달에 한번씩 나오는 월간잡지의 표지화 화가를 물색하는데 여간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름 있는 화가들, 일테면 호당(當) 몇 만원씩 한다는 그림들은 신통치 않은 지명(知名)도 낮은 대중잡지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했고 또 들어간다고 해도 원화(原畵)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슬라이드나 사진, 또는 다른 잡지에 실린 적이 있는 것을 제공해 잡지사측으로서는 별 소득이 없는 것이었다. 궁리 끝에 저는 전시회에서 특선(特選)이나 입선(入選)을 한 적이 없는 재야(在野)작가(作家)들을 동원했는데 재야작가들 역시 그림을 제공하는데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또 힘들여 받아 온 그림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독고 사장은 주판알을 굴리기 일쑤였습니다.
“이 그림 호당 얼마짜리요?”
“비록 재야작가이지만 대성(大成)할 소질이 있습니다. 두고 보십시오.지금은 3만 밖에 나가지 않지만 기다려 보십시오.”
“그래요. 그럼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릴까?”
하며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팔아서 현금으로 챙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렇지 않다는데 불만인 것이었습니다. 저는 여러 연고 선을 통해 값나갈만한 작가를 물색 했습니다.그러자니 한 달 내내 화가들을 섭외하는데 시간을 뺏겼습니다.
사장과의 대화를 눈여겨 듣던 사장 차의 운전기사인 탁 기사는 그림 값이 비싸다는 것과 그림을 구입하게 된다면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 어느 날 제게
“부장님 저도 그림 한 점 얻을 수 있습니까?”
하고 귓가에 대고 슬그머니 물었습니다.
“기회를 봐서 한점 구해줄게”
그의 눈빛에 탐욕이 서려 있었습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호당 얼마짜리란 말을 듣다보니 그림 값이 비싸다는 것과 그림을 모아두면 제법 재산가치가 될 것이란 계산에서였던 것입니다.“
탁 기사는 그림을 얻으러 간다는 말만 나오면 언제나 반색을 하며 내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혹시나 자기 몫의 그림이 한점 생길까하는 기대감에서였습니다.
저는 이런 탁기사의 표정이 안타까워서 그림 한점을 얻어줄 계획을 세웠습니다. 제가 잘 아는 재야(在野) 화가(畵家) 가운데 소천(小川)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친구한테 부탁하면 소품(小品) 한점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저는 인사 동에 있는 그의 화실로 탁 기사를 데리고 갔습니다.그리고 머뭇거리고 있는 탁 기사를 소천화백에게 인사를 시켰습니다.
“우리회사의 탁기사인데 평소에 소천화백을 존경하고 있다네. 어려운 부탁이네만 우리 탁 기사에게 소품(小品) 한 점 선사할 수 있겠나? 그럼 탁기사가 평생 동안 자네 그림을 신주처럼 간직 할 텐데”
하며 소천 화백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흡족한 표정이었습니다. 생면부지의 운전기사가 자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것이 잘 납득이 되질 않았으나 그림을 팔아먹지 않고 평생 간직하겠다는 탁기사의 순수한 마음이 와 닿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머리를 끄덕이며,
“마땅한 것이 없는데 그렇다면 한 점 드려야지”
하며 표구가 안 된 그림을 서랍에서 한 장 꺼내 주었습니다. 그것을 받아든 탁 기사는 너무도 황송한 나머지 눈빛이 빛나다 못해 눈물까지 어른 거렸습니다. 제가 탁 기사에게 고맙다고 소천화백에게 인사를 하라고 하니까 그는 넙죽 엎드려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은혜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별로 값나갈 것 같지 않은 그림이었지만 탁 기사는 평생 처음 받아보는 그림인지라 너무도 황송했던 것입니다. 차를 타고 올 때 탁 기사는 제게 머리를 긁적이면서,
“부장님 그림 값이 꽤 되겠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호당 오만원은 되겠지.”
하자 그는 속으로 호당 오만원이면 받아든 그림이 삼십호는 되겠다, 꽤 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 제게 한턱내겠다는 말을 열 번도 더 했습니다.
이때부터 탁 기사는 점차 그림에 대해 일가견을 갖게 되었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도처의 표구(表具)상을 들락거리기도 했고 화가들에 대한 평가를 나름대로 진단하기도 했습니다.
“부장님 또 한점 얻을 수 없습니까.? 집에 걸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감상을 하겠습니다. 그림을 보게 되니까 욕심이 사라지는 것 같군요.”
하며 자신의 소감을 얘기했는데 그의 얼굴은 그림과 연관돼 탐욕의 빛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림을 감상하려는 의도에서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호당 얼마씩이라는 재산 가치로서 갖겠다는 속물근성이 탁 기사를 점차 타락시켜 갔습니다.
그러던 어는 날이었습니다.
잡지에 게재가 되지 않은 만화의 원고가 없어졌습니다. 한번 쓰면 버려지는 원고지만 만화가에게 다시 그려 달랠 수가 없어서 전전긍긍하다가 사저사정해서 만화가에게 다시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건데 이상하게도 이미 잡지에 게재된 만화도 몽땅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만화원고 못 봤느냐고 직원들에게 물었더니 경리부의 미스 오가
“밤늦게 탁기사가 편집실로 원고지와 함께 가져갔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마침 그날은 탁기사 아들의 첫 돌이었습니다.직원 몇 명이 돌 반지를 사들고 저녁나절 탁기사의 월세 집을 찾아갔을 때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탁 기사가 이미 써버린 만화 원고를 뭣 하러 가져갔는가? 더군다나 무협 만화를, 그러다가 문득 지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그의 좁은 방의 벽에 없어진 만화의 원고가 정갈스럽게 빽빽이 표구가 되어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만화가 여기 있었구먼.”
제가 말하자 그는 멋쩍고 송구스럽다는 듯이
“부장님한테 말씀 드릴까하다가 죄송합니다. 이것 모두 원화(原畵)가 아닙니까? 지금이야 별것 아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꽤 나갈 걸요. 안 그렇습니까?”
하며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는데 그의 눈빛에 탐욕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있어서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