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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2일 연중 제6주일
제1독서 : 집회 15,15-20
제2독서 : 1코린 2,6-10
복 음 : 마태 5,17-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1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할 것은 ‘예’ 하시오.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참으로 중요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듣기 무척 어려운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합니까?
우리는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율법을 깨시는 행동을 하셨고,
특히 인권을 침해하는 안식일 법에 대해 거침없이 이제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정결례를 지키지 않으셨으며 율법에 매여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통렬히 비난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말씀은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혼동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편리하게 이 부분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가필한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마태오 복음사가가 자기의 생각을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쓴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바르게 알아들어야 합니다.
우선, ‘율법이나 예언서’라는 번역은 정확한 번역이 아니어서 오해의 소지를 주고 있습니다.
‘법(경전)과 예언서’라고 옮겨야 하고 그 말은 바로 성서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법’을 지칭할 때 네 가지 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십계명만을 지칭하고,
둘째는 모세 오경만을 의미하고,
셋째는 전체 성서를 말하는데, 이때 그것을 ‘법과 예언서’라고 불렀습니다.
마지막으로 소위, 율법이라고 불릴 수 있는 구전법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법’이 참으로 중요했지만,
구약성서가 모든 법을 망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성서 안에 구체적인 법규에 해당하는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물론, 신명기나 민수기, 레위기 등에 규정들이 있지만
삶에 지침이 되는 구체적인 법규라기보다는 근본적인 정신이 되는 내용이 더 많습니다.
십계명도 근원적인 정신이지 구체적인 법조문들은 아니지요.
예를 들면,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고 할 때
어떻게 지내는 것이 거룩히 지내는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들이 성서 안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하느님께서 주신 ‘법’을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지킬 수 있는 법규로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생겨 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거듭되는 논의를 거쳐 규정들을 만들었고,
그것을 전수하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이 이 구체적인 규정인 율법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근본적인 삶의 원칙이 되는 것,
다시 말하면 법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조금 더 설명을 드리면,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계명을 구체적으로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 법이라는 율법이 생겨났던 것이지요.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의미를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일’의 정의가 무엇이냐는 것에 대해 논쟁을 벌였습니다.
온갖 종류의 일이 거론되고 예컨대, ‘짐을 지는 것은 일이다.’고 했을 때
다시 그러면, ‘무엇이 짐이냐’라는 문제를 놓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그들의 규정에 의하면, 마른 무화과 열매 하나 이상,
한입에 먹을 수 있는 양의 우유 등은 짐이라는 것입니다.
정신노동인 ‘쓰는 것’도 일인데
그러면, 얼마 이상 쓰는 것이 일이냐? 두 글자 이상은 일이다. 이런 규정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웃지만, 그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율법학자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규정들을 지키도록 가르치고 전하는 그것이었지요.
바리사이파들은 누구입니까?
바리사이라는 의미는 분리된 자들을 지칭하는데
바로 이 많은 규정들을 틀림없이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
일상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에서 분리된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해 철저하게 그 규정들을 지키기 때문에 자기들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이 규정들이 오랫동안 성문화되지 않았고 다만 구전으로 전수되다가
기원후 3세기 중엽에야 성문화되었고 미쉬나(Mishnah)라고 불리지요.
이제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 그것은 이 율법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에 매여 그 정신은 잃어버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강하게 질책하셨던 분이시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신 그것은 무엇입니까?
분명하지요. 법의 참된 의미, 진정한 의미의 법의 정신, 법의 밑바탕을 흐르는 원리,
다시 말해, 그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하는 그 정신,
바로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전 삶을 투신해야 하는 바른 삶의 뿌리가 되는 원리,
그것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일점일획이라고 번역한 것도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희랍어 iodh 라는 말은 어간, 다시 말해 글자의 뿌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의미는 오히려 율법의 근원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구약성서에서 모든 법의 핵심이며 근원이 되는 기초는 무엇입니까?
예, 십계명이지요.
그런데, 이 십계명도 그 전체의 근본 밑바닥을 흐르는 정신은 한마디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공경심, 존경심입니다.
크게, 하느님에 대한 공경심, 그리고 사람 서로에 대한 존경심이지요.
예수님께서 완성하러 오신 것은 바로 그 공경심과 존경심,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완성하십니까?
그것을 법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서 완성하십니다.
존경심이나 공경심은 단순히 규정이나 규율을 지키는 데 있지 않고,
따뜻한 마음을, 다시 말해 사랑을 지니는 데 있지요.
예수님께서 완성이라고 하실 때 그 의미는
이제 모든 법의 참된 정신이며 의미인 사랑을 이루시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법을 지키는 데는 항상 어떤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니겠지만 규정에 어긋나지 않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인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내가 이만큼 사랑했으니까 나로서 충분히 사랑했고 그래서 만족스럽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어떤 의무이지요.
진정한 사랑은 늘 미진하게 느껴지는, 더 줄 수 없는 안타까움,
늘 부족한 어떤 것, 아무리 부어도 부어도 한계가 없는 그런 것이지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이 사랑이지 법이 아닙니다.
이어서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옛 법은 이러이러하다...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하시면서
근본적인 법의 정신, 그 원칙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십니다.
예컨대, ‘살인하지 말라’고 들었지만, 내가 이르노니, 형제에게 성을 내지 말라.
형제에게 성을 내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자기 형제에 대한 존경심 없이 바보라고 무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살인과 같은 것이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면서
근본적인 법의 정신, 하느님의 뜻,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지녀야 하며
그것이 사랑의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행위 그 자체보다는 그 밑바닥에 있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도록 촉구하십니다.
예컨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이 말씀을 너무 글자 그대로 알아듣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중히 보시는 것은
어떤 한 번의 행동보다도 그 밑바닥에 흐르는 정신, 마음이라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누구나 지니고있는
본능적인 성적인 충동을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계속해서 마음속에 지니고 있으면서 마음으로 범하고 또 범하는 것은
오히려 실제 행동에 못지않게 나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너무 글자에 매여서 알아들으려고 하면 참으로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근본정신을 강조하시기 위해 강한 어법을 쓰신 것입니다.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 버려라.
또 오른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던져 버려라.’
눈과 손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만,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그 손이나 눈이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게 한다면
차라리 그것이 없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시는 그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눈과 손, 참으로 소중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소중한 하느님의 선물도 잘못 사용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죄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시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참으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그분의 선물이고 그 선물들은 모두 우리가
사랑이신 당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겸손할 때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처럼
있는 그대로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길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줄리아 카메론은 35세에 그토록 가고 싶었던 영화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는 다른 학생들보다 자그마치 15살이나 많았지요.
주위에서는 나이가 너무 많다고 이야기했지만, 자신에게는 창조적 열망과 인생 경험이 많고
배움에 대한 욕구가 다른 학생보다 훨씬 강하다고 믿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책에 이런 내용을 적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지금부터 피아노를 배워서 잘 칠 때쯤이면 몇 살이나 되는지 아세요?”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알아요. 하지만 그것을 배우지 않아도 그 나이를 먹는 건 마찬가지예요.”
하지 못하는 이유만을 찾는데 너무나 익숙한 ‘우리’ 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사람은 그만큼 가능성이 훨씬 많은 삶을 살게 됩니다.
따라서 지레짐작으로 할 수 없다며 좌절과 절망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할 수 있는 이유를 바라보며 희망과 의지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계명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실천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일 역시 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고 있습니다.
바빠서, 여유가 없어서,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지금 하는 것이 마음에 와닿지 않아서….
이런 이유로 과연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할 수 있는 우리와 함께하면서 더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사랑 실천은 자기 기준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주님 기준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당시에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도
더 엄격한 주님의 기준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시고,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십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기 뜻보다는 주님의 뜻을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판단으로 ‘이 정도는 괜찮다.’라는 안일한 생각이
주님과의 거리를 더 멀게 만들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외국어를 잘 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듣기와 말하기입니다.
중학교에서 3년, 고등학교에서 3년을 배웠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학원’도 다녔습니다.
읽는 것과 쓰는 것은 어느 정도 되지만,
듣기와 말하기는 미국에서 지낸 지 4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힘들고 어렵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가 말하고 듣고자 하는 열의와 갈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영어를 배웠던 방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평가하는 것은 듣기와 말하기가 아니었습니다.
쓰기와 읽기 그리고 문법이 평가의 기준이었습니다.
교포사목을 하고, 한국 사람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으면
아무리 미국에서 살아도 영어로 말하고, 듣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반면에 미국 성당에서 지내고, 미국 사람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으면
영어에 익숙해지는 것을 봅니다.
수영을 하려면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영어를 하려면 영어의 바다로 들어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기준도 있습니다. ‘기도, 성경 읽기, 봉사, 친교’입니다.
봉사와 친교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신앙생활이라면
기도와 성경 읽기는 영적으로 다져지는 신앙생활입니다.
봉사와 친교는 신앙생활의 꽃입니다.
본당에는 봉사와 친교를 위한 조직과 단체들이 있습니다.
전례를 위해서 ‘해설단, 독서단, 복사단, 성가대, 제대 봉사회, 헌화회’가 있습니다.
이렇게 봉사하는 분들이 있기에
신앙생활의 핵심인 미사가 거룩하게 봉헌될 수 있습니다.
친교를 위해서는 구역과 반 모임이 있습니다. 성모회가 있습니다.
이렇게 봉사하는 분들이 있기에 본당 야유회도 갈 수 있고,
매주 미사 후에 음식 나눔도 할 수 있습니다.
장례가 나면 연도를 하고, 장지에도 함께 갑니다.
기도와 성경 읽기를 위한 조직과 단체도 있습니다.
성령 기도회, 레지오, 성서 공부반이 있습니다.
봉사와 친교라는 꽃은 기도와 성경 읽기라는 거름이 있어야 시들지 않습니다.
지금 나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채우는 신앙생활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3년간 코로나 쓰나미와 함께하였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의 일상도 힘들게 했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백신과 치료제로 이제 우리와 이별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백신과 치료제가 있습니다.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강력한 예방 주사입니다.
성체성사는 나약해진 우리의 영혼에 힘을 주는 주님의 보약입니다.
고백성사는 조금씩 약해진 나의 몸과 마음을 비우고 새롭게 정비하는 보수공사입니다.
견진성사는 하느님의 군사가 되는 특수 훈련입니다.
병자성사는 심신이 약해진 이들을 위한 특진입니다.
혼인성사는 주님의 축복으로 보호받는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신품성사는 주님을 위한 봉사자를 선별하는 의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신앙인들이 충실히 살아가도록 많은 예방 접종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께 의지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강력한 ‘백신’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부귀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와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런 삶을 택하였습니다.
가진 것이 많았던 부자 청년은 울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욕심이 많았던 부자는 재물을 창고에 쌓았지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것은 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표징이라고 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을 비롯한 많은 순교자들은,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주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오늘 하루도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주님의 지혜‘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의 지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지혜는 위대하니 그분께서는 능력이 넘치시고 모든 것을 보신다.”(집회 15,18)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지혜’를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1코린 2,7)로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 2,9)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지혜’는 복음에서 ‘율법의 완성’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사실 히브리인들은 시나이 율법을 통하여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백성, 거룩한(의로운) 백성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과 맺었던 십계명은 차차 613항으로 늘어났고,
그들의 삶을 율법으로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부터 안식일법, 정결법, 단식법 등을 통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하며 대립되었고,
마치 율법의 거부자 혹은 파괴자로 여겨졌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갈라 3,34-35)
그렇다면 대체 ‘율법의 완성’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있다.”(집회 15,15)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는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에게서 ‘율법이 완성’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는 것이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라고 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곧 ‘사랑’이야말로 옛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의로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이 ‘새로운 의로움’을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여섯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중 첫 번째에서 네 번째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살인, 간음, 이혼, 맹세에 대한 옛 율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째 의로움에서 ‘살인’에 대한 것으로 외적 행동의 의로움을 넘어서,
죄의 뿌리인 내적 지향의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율법의 본질이 ‘화해’에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둘째와 셋째 의로움에서도 ‘간음’의 내적 뿌리가 마음에 있음과
이혼이 불륜을 불러오는 뿌리라고 말하면서,
죄를 뿌리에서부터 잘라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곧 죄를 불러오는 마음의 눈과 손을 잘라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다.”(마태 6,22)
넷째 의로움은 ‘맹세’에 대한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뿐만 아니라,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자신을 보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진리인 것이 아니라 단지 진리에 응답하는 사람들이기에
“예”할 것은 “예”(ναι ναι)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οû οû)라고 응답하라고 하십니다.
곧 응답하되 맹세가 아니라 행동으로 응답하고,
행동하되 진리 안에서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 하십시다.”(1요한 3,18)
그러니 행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은 우리의 응답 곧 원의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제1독서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있다.”(집회 15,15)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제가 행동으로 가르치게 하시고,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시고,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과 달리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6주일: 가해
오늘 전례는 율법과 그 율법을 표현하고 있는 계명들에 관한 주제가 나온다.
복음과 율법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 율법은 복음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율법이 본래의 근본정신은 잃어버리고 형식적인 것만 남아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형식주의를 책망하시는 것이다.
법은 인간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은 잘못할 때도 그 행동은 자율적이고 인격적이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택하느냐이다. 집회서는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 15,17)
생명은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하느님의 법을 받아들여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하며,
죽음은 그 하느님의 뜻을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하는 좌절의 한 형태를 말한다.
여기서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은 생명을 선택할 수 있으며, 항상 하느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에 있어 주체가 된다.
복음에서 법이라는 것은 그 법이 인간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변화시키는
그 본질적 의미를 알아듣고 살 때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이, “사랑하라.”라는 적극적인 계명으로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계속 죽일 수 있다.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계명이,
나 자신이 충실하고 진실하라는 계명으로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거짓 맹세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법이 변화되면 그 법은 이미 복음이며 은총이 된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안에서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구약의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인해 충만한 의미가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됨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7-18절)
여기에는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어기지 말고 실천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치라고 권고하신다(19절).
예수님은 율법의 근본적인 의미를 해석해 주심으로써
인간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드러나게 해 주셨다.
이제 율법은 인간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더 자유롭게 해주는
은총의 복음으로 예수님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하는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21-22절)
여기서 선과 악은 마음속에 있으며, 형제를 무시하거나
그의 명예를 훼손한다면 이미 그를 죽이는 것이다.
즉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그를 떼어냄으로써
그를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예물을 바치려 할 때 원한을 맺고 있는 형제와 화해하라고 하신다(참조: 23-24).
주님 앞에 참된 제물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 사랑과 용서로써 마련되는 것이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27-28절)
여기서도 악한 욕망, 욕정과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 생겨나는 악을 비난하신다.
우리의 눈이나 다른 지체가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시면서, 이혼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모세의 이혼장은 간음을 허락하는 것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 법을 폐기하신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32절)
그러니 악의 공범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러한 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드려라.”(33-37절)
맹세는 이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을 개입시키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은 우리 모두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인데,
이웃을 불신하는 데에서 쓰이게 되면 형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도 믿지 못하는 이중적인 거짓 맹세가 된다. 그래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기를 요구하신다.
“예!”가 됐든 “아니오.”든 입술로 말하는 그것이 마음속에 똑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37절)
이러한 법은 명령이라기보다 복음의 새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완성하러 오신 율법은
율법주의나 전통적인 관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은총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복음이 복음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엄격한 것 같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은총에 의해 그를 실현할 힘도 주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복음을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1코린 2,7)라고 말하고 있다.
오직 성령에 의탁하는 사람만이 그 지혜를 체험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세상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그 지혜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1코린 2,8)
그 지혜를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시고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1코린 2,10)라고 한다.
우리는 성령의 선물을 받고 있기 때문에(참조: 로마 8, 2-4),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율법을 실현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을 가르치실 때 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은총으로 가르치시며,
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깨닫게 해줄 뿐만 아니라,
배운 것을 성실하게 실행할 마음을 주시고 또한 실제로 실행하도록 하신다.”라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De gratia Christi et de peccato originali, in PL 44,359)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깨우쳐주신 율법의 근본정신을 삶으로써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8)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이 되어
행복을 누리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여야 하겠다.
의인이, 성인이 되는 길
-지혜, 선택, 훈련-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시편119,1-2)
이런 이들이 의인들이요 성인들입니다.
어제는 배나무들의 거대한 뿌리를 보며 믿음의 뿌리에 대한 깨달음을 나눴습니다.
오늘 새벽 배밭 산책 중 소스라친 깨달음의 은총에 감사했습니다.
바로 배나무들이 뿌리를 내린 배밭 땅의 흙입니다.
배밭 땅의 흙이 없으면 어디에 뿌리를 내립니까?
바로 똑같은 이치가 우리가 믿음의 뿌리를 내린 배밭 땅의 흙 같은 공동체에도 적용됩니다.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께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공동체의 은총은 절대적입니다.
은총입니다.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매사 하느님 찬미와 감사요, 기쁨이요 행복이요,
사랑과 겸손이요, 마음의 순수와 자유로움입니다.
제 집무실 커다란 게시판에는 2년 전 써놨던 깨달음의 글이 지금도 붙어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고마움의 고백입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수도공동체입니다.”-2021.7.20.
그렇습니다. 공동체 생활도 정말 커다란 은총입니다.
형제들 하나하나로부터 평생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형제들 하나하나의 모습에서 예수님 얼굴이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 되는 길도 없습니다.
더불어의 삶이요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제가 좋아하고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좌우명시도
수도원 25년 기념감사제가 없었다면, 또 마르코 수사님의 각별한 당부가 없었다면
이 시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행복기도 역시 수도원에 잠시 머물렀던
바오로 신부님의 부탁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은총의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10여 일 동안 순례 여행을 다녀온 어느 자매님의 감사 메시지도 은총의 고백이었습니다.
“아멘!
주님께 찬미 찬양드립니다!
잘 살아가겠습니다.
순례를 하며 신부님께서 강조하시던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신 말씀을 체감했습니다.
이렇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은 주님의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제가 무엇이기에 넘치는 축복과 은총을 주셨는지 눈물이 납니다!
앞으로 더욱 긍정적이고 간절한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겸손한 고백인지요!
수십 년을 한결같이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는 참 사랑스런 성녀 같은 분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의인으로, 성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바라시는바 우리 모두 한결같이 당신을 사랑하여
닮은 참 나의 의인이,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첫째, 지혜입니다.
무지의 마음 병에 대한 궁극의 처방도 지혜입니다.
그러니 지혜를,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리하여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사랑할 때 성령의 은총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사랑의 지혜입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지혜를 사랑할수록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여기서 사랑은 순수한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의 지혜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줍니다.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 우리는 지혜를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그 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지혜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은총 중의 은총이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의 은총이 하느님의 지혜이신 주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고 깨닫게 합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성령의 은총인 지혜뿐입니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참으로 한결같이 사랑해야 할 분은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제 행복기도 서두처럼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
참회합니다.
믿습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둘째, 선택입니다.
선택의 은총이요 선택의 자유입니다.
타고난 것도 많지만 매일 선택할 수 있는 좋은 것도 무궁무진입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좌절하거나 절망할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주님을, 지혜를, 사랑을, 감사를, 행복을, 기쁨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삶에서 선택 아닌 것이 없습니다.
왜 어리석게도 아까운 시간 불행을 선택하여 어둡고 우울하게 살아갑니까?
참 좋은 올바른 선택을 위해 성령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바로 제1독서 집회서가 선택의 자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내용이라 전문을 그대로 인용하여 다시 나눕니다.
참으로 올바른 선택으로 책임적 존재가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선택하는 대로 받으리라.
참으로 주님의 지혜는 위대하니, 그분께서는 능력이 넘치시고 모든 것을 보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굽어보시고, 사람의 행위를 낱낱이 아신다.
그분께서는 아무에게도 불경하게 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고
어느 누구에게도 죄를 지으라고 허락하신 적이 없다.”
얼마나 중요한 선택인지 선택에 따른 책임이 얼마나 엄중한지 깨닫습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선택의 결단이자 선택의 실행입니다. 선택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참으로 좋으신 주님을 선택할 때 일일시호일, 하루하루 활짝 열린 좋은 날입니다.
셋째, 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계시 되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율법의 깊이를 계시해 주십니다.
우리가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할 바 이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참으로 의인이,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은,
하느님의 지혜를 선택하여 훈련하는 것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지혜에 대한 심오한 계시입니다.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신 주님이요,
주님은 이에 대한 근원적 처방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분, 예수님이 권위를 지니고 확신에 넘친 가르침이 반복됩니다.
살인에 앞서 형제를 “바보!”, “멍청이!”라 하며
무시하고 멸시하는 간접적 살인의 마음부터 깨끗이 정리하라는 것입니다.
예물을 바치기 전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있으면
지체 없이 용감하게 화해하고 와서 제단에 와서 예물을 바치라 합니다.
간음에 앞서 마음의 간음인 음욕부터 일소하라 하십니다.
참으로 주님의 충격 요법적 표현을 통해 간음이 얼마나 치명적 죄인지 깨닫습니다.
사실 성적 문란이 모든 화근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른 눈이 죄짓게 하면 오른눈을 뽑아버리고,
오른손이 죄짓게 하거든 오른손을 잘라 버리라 합니다.
말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의 해악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 엄중함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호히 죄를 끊어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간음의 경우도 철두철미합니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를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요,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간음은 아예 상상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불륜의 죄가 얼마나 관계를, 영혼을 파괴하는지 생각한다면
간음은 꿈도 꾸지 못할 것입니다. 간음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런 죄를 지었을 때는 지체없이 참회하는 것입니다.
맹세의 경우도 철두철미합니다.
무지로 인한, 제 분수를 넘은 맹세는 아예 하지 말라 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기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하시니,
우리는 머리카락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 말하는
솔직담백한 답변뿐이니 이 이상의 것은 모두 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득 지난 수요일 마르코 복음 말씀과 묵상이 떠오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흡사 마음이 더러운 오물 가득한 쓰레기통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무지의 현실입니다.
과연 여기서 제외될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 대로 창조되었다는 고귀한 품위의 인간의 참으로 어둔 측면입니다.
이래서 평생 영적전쟁에 영적훈련입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하와를 유혹했던 뱀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여기 영적 훈련에는 요령도 첩경의 지름길도 없습니다.
부단히 성령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선택하여 죽을 때까지
평생 훈련함으로, 쓰레기통 같은 마음을 뿌리로부터 정화하고 성화하는 길뿐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수도자들은 죽는 그날까지 하느님을 한결같이 사랑하여,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를 영적훈련으로 삼아,
하루하루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바침으로
아예 우리 마음에 애당초 죄가 뿌리내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래야 마음의 순결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주일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찾는 영적 훈련에 항구하게 하시며
당신을 닮은 참 나의 의인이자 성인으로 살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 받으소서.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마태11,25). 아멘.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가지게 된 것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신 사실을 깨닫고,
그 함께 계심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모세가 함께 계신 하느님을
존중하며 살기 위한 지침으로 율법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열 가지로 나누어 만들었습니다.
기원전 12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십계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기원입니다.
그것이 유다교에 율법이 있는 경위입니다.
후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안정되면서,
그들은 십계명을 더 발전시켜 여러 가지 상황을 가상하여 조항을 많이 늘렸습니다.
율법은 그 시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한 실천 지침입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사라지고, 기원전 4세기 이후,
그 시대 유식한 사람들이 율사라 불리며, 율법해석을 직업으로 하는 이들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들이 등장하면서 율법 조항들은 많아졌습니다.
인간 삶의 여러 상황을 假想하여 사람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때부터 그것을 지키는 데에 골몰한 이스라엘은 율법의 의미를 차차 잊어버리고,
그것을 엄격히 지키는 데만 신경을 썼습니다.
하느님이라는 숲은 잊어버리고 율법 조항이라는 나무에만 시선을 빼앗긴 꼴이 되었습니다.
율사들은 율법의 字句를 절대화하여 철저히 지킬 것만 사람들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대한 유다인들의 그런 자세를 비판하셨습니다.
그분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로 시선을 가게 하는 율법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지킬 것만 강조하면서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잊어버린 하느님을 되찾아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의로움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조항 몇 개를 해석해 보이십니다.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만이 아니라,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그분의 뜻을 소중히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미워하거나 해치지 않으십니다.
그와 반대로 하느님은 사람에게 자비로우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나를 대립시켜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이라는 숲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함께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시면, 이웃은 모두 형제자매들입니다.
형제자매는 서로 위해주고 사랑하며 축복하는 관계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예수님은 해석하십니다.
異性을 바라보는 눈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욕구를 기준으로 이성을 볼 것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기준으로 이성을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축복하고 배려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성을 보는 우리의 시선도 축복하고 배려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 시대 유다인들의 관행인 離婚法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남성 위주의 사회였던 그 시대의 이혼법은 아내가 싫어지면 남편이 이혼장을 써주고 내보냅니다.
이스라엘이 유목민이었을 때, 좁은 천막 안에서 여성이 학대받지 않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배려하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배우자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율법에 대해서도 해석하십니다.
거짓 맹세뿐 아니라,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자기의 말을 절대 기준으로 삼겠다는 것이 맹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말이나 행위를 절대화하지 말고,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절대적인 분으로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율법은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구약성서가 하느님이 주신 율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각하면서 사람들이 만든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존중하고, 그분을 기준으로 살게하기 위해 만들어진 삶의 지침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을 위한 지침입니다.
따라서 시대가 달라지면 새롭게 표현될 수 있는 지침입니다.
같은 하느님이지만, 우리의 의식 수준이 달라지면, 그분과 함께 사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몽매하였을 때, 그들은 높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신앙은 교회가 주는 교리를 믿고, 교회의 계명을 지키며,
교회 교직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사람들 각자가 자기가 필요한 정보를 얻어 자유롭게 선택하며 삽니다.
오늘의 신앙생활은 각자가 하느님에 대해 듣고,
자유롭게 선택하여 하느님의 뜻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축복하고 배려하시는 분이라,
신앙인 각자는 자기 방식대로 그 축복과 그 배려를 실천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두려워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각종 災害를 하느님이 내린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자연재해들이 자연의 어떤 조화로 발생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으십니다.
율법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하느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웃을 축복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 것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참으로 자유롭게 사는 길이고, 율법을 완성하는 길입니다.
이웃과 경쟁하고, 이웃을 비난하는 마음이 자유롭지 못한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앞에 자유로운 세계를 열어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고통, 곧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가 혹은 대자연이 만드는 그늘입니다.
사람들이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혹은 대자연의 조화가 잘못되어 생기는 그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시대 유다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자유를 잘못 사용하였을 때, 발생한 그늘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그 그늘인 죽음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고백합니다.
비록 그런 그늘들이 있어도, 우리는 이웃을 축복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며,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참다운 자유를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