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신학과 교회 개척 3 - 내 인생의 최대 은혜의 후원자는 단연
박승준 집사 부부이신데 어느날 청송 교도소를 다녀오자고 하셔서 모시고 갔다.
여수에서 7시간 정도 달려 갔는데 정말 경치좋은 오지였다.
거기서 수감생활을 하는 장형제와 이형제를 면회하고 돌아 왔는데 얼마 후에 두 형제가 출소해서 찾아왔다!
이형제는 결핵을 심하게 앓아서 폐가 많이 손상된 상태였는데, 영어의 몸이 되어다가 자유의 몸이 되어서인지 의욕이 넘치셔서 언덕길도 숨이 차서 오르지 못하는 체력으로 과욕을 부리다가 안타깝게 열흘 쯤 후에 소천하셨다!
장형제 또한 한쪽 폐가 없어 몸이 한쪽으로 기운 체형으로 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하며 신학공부를 했다.
마침 한 자매와 사랑에 빠져 울산에 계신 노모님과 협력해서 결혼을 성사시켰다!
교회 근처의 잘아는 예식장 사장님의 협조를 얻고, 주례는 김강호 목사께 부탁드리고, 음식은 아내가 맡기로 했다!
신혼집을 여천시에서 알콩달콩 꾸렸고 목사 안수를 받고, 마산에서 교회를 개척해서 교회당을 이사하던 날
내 품에서 심장마비로 소천하셨다!
며칠을 컴퓨터로 작업하며 밤을 세우셨단다!
노모께 평소 시신기증을 원하셨으니 그 뜻에 따름을 권면드렸더니 쾌히 승락하셔서 경남대학병원에 시신기증을 해드렸다.
얼마 후 울산에서 생활하시던 노모께서 우리집에서 생활하기를 원하셔서 모시고 와서 같이 생활하시다가 노환으로 소천하셨다!
인생을 정말 노모님 같이 기구하게 사시다 가신 분을 없으리라!
아드님을 그토록 사랑하시고 최고의 후원자로 사시다가 먼저 천국으로 떠나 보내시고 십여 년 후 그 뒤를 따르셨다!
그즈음 신집사님 가정이 멀리서 이사오셨다.
직장을 잃으셔서 오징어 소매를 소유하신 봉고차로 삼천포에서 도매로 사서 여수 각지로 우리 두 부부와 팔러 다녔다.
광양의 백운산으로 여름 소풍을 교인들과 갔는데, 이댁 잔망스런 둘째 아들이 우리와 떨어져 혼자 계속의 깊은 소(웅덩이)에 빠져 의식을 잃은 것을 지나던 아저씨가 건져내어 살려주셨다!
할렐루야!
그 분께 감사드렸고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하다!
사람좋고 신실하신 이장로님은 애양원에서부터 교제해왔는데 퇴직하시고 교회 옆에서 분식가게를 운영하셨다.
음식 솜씨 좋은 아내는 하루 수십 개씩 김밥을 싸서 사모님을 돕고 나는 설거지를 돕기도 했다.
한번은 바울이가 그댁 형아들과 놀러나가 아홉시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아 크게 걱정하던 차에 마침내 귀가해서 본 때를 보여야겠다고 생각해서 매를 들었다.
그댁 형아들 대신 잘못없는 취학 전인 바울이의 엉덩이를 엎드려 뻣쳐 자세로 다섯 대를 때렸다.
착해서 한번도 때려본 적 없는 아들을 때리며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바울아! 잘못없는 너만 때려서 미안해! 대신 잘 커줄거지?"
교인들과 사택에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는데 바울이가 난데없이 "아빠! 나가 원숭이 되고 싶어!" 하질 않는가?
"왜 되고 싶은데?"
"바나나 싫컷 먹고 싶어!"
듣고 계시던 박종만 집사께서 나가셔서 바나나를 한 박스를 사오셨다!
이장로님 사모께서 섬 출신이셔서 뻘배를 타고 여자만(灣)의 세발(細足)낙지를 한 수대씩 잡아 오셔서 전교인이 포식하기도 했다.
한번은 여수 화양면의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데 작은 포구에서 전어배가 들어와 5,000원 어치만 파시라 했더니 선장님이 목사인줄 아시고는 큰 광주리로 가득 전어를 공짜로 주셔서 이웃이 모여 집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가을 전어 대잔치를 벌였다!
이웃교회에 나가시는 설두현 장로님과 송지연 권사님의 사랑을 잊지 못한다!
이장로께서 박종만 씨를 소개시켜 주셨다.
어렸을 때 나무에서 떨어진 이후 점차 다리에 힘이 빠져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나 성품이 곧고 포용력이 있으시다.
우린 곧 친구가 되어 많이 만나 식사하고 토론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 출석하면 안되느냐고 하셔서 공동체 식구가 되셨다!
교회 개척을 하면서부터 교회의 재정 80%를 선교에 쓰기로 작정하고 거의 지켰다.
생활비가 부족해서 노가다를 했는데 한번은 수요예배를 드릴 시각인데 공사장에서 시멘트 타설을 하는 날이어서 시멘트에 방부제를 타는 작업을 하다보니 시간은 다되었고 흰 방부제 가루로 온 몸을 목욕한듯 되어 장로님 사모님과 아내가 데릴러 왔으나 교인들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양해를 얻도록 했다.
그래도 예배시간은 지켜야 된다 커니 옥신각신 하던 차에 공사장 십장이 전후사정을 듣고 일찍 보내줘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예배를 인도했다!
개척 삼년 차에 하나님의 은혜로 좀더 넓은 건물로 이사하고 성도도 60여 명으로 부흥하고 연 예산도 2,400여 만원을 세웠는데 중국의 선교 문이 열렸으니 들어오라는 전갈이 와서 십여 년 전에 하나님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마침 한 선교단체에서 필리핀으로 열흘 간 단기선교를 떠나는 팀이 있어 주님께서 선교로 부르신다면 비용을 주시라고 기도드렸다.
이소식을 들은 둘째 처형께서 120만 원을 보내오셔서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필리핀으로 향했다!
처음 이틀은 영어가 들리지 않아 답답했으나 삼일 째가 되니 영어가 들린다.
할렐루야!
원주민들과 어울려 씻지 않은 손으로 밥을 비벼먹어도 전혀 어색하지도 않다.
화장실의 쪼그려 앉아보는 변기에 커다란 두꺼비가 앉아 있고 물을 한컵 떠서 골짜기에 흘려보내며 왼손으로 닦으니 휴지가 필요없게 되어 현재까지 애용하게 되었다.
현지 주민들이 그렇게 사랑스럽고 예뻐보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선교에로 부르심을 확신했다!
함평에서 오신 칠십 대의 노목사님과 친해져서 노인에 관한 이해를 넓히는 계기가 됐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입으로 먼저 안사람을 녹여놓고 나서 마지막에 심을 넣고 죽여준다면서?"
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 크하하!
돌아와서 아내와 하나님의 소명을 확신하고 노회에 사직서를 냈다.
교인들은 극구 말렸지만 되돌이킬 수 없어 눈물로 이별했다.
감사한 것은 전세금을 되돌려 준 것이다!
우선 선교비로 쓰기로 하고, 300만 원을 떼어 박종만 집사께 장사 밑천으로 드렸다.
우리가 나중 귀국하면 주셔도 되고, 안주셔도 된다고 하고!
자! 이제부터 다시 맨손으로 주님 손만 붙잡고 또 출발이다!
화이팅!
19.선교 훈련 시절 - 목회자 3가정과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건축기술자, 행정가, 기사와 그 가족이 60-70명이 모였다.
의료팀이기에 다양한 직업군이 필요해서다.
먼저 마닐라로 가서 인디옥 선교센타를 빌려 60일 간의 훈련을 시작했다.
선교학, 실무교육, 영성훈련을 받고 개인적으로는 시원한 새벽에 조깅으로 체력훈련을 했다.
군대에서 만난 박계현 목사 가족이 합류해서 큰 위로가 되었다.
깜찍하고 예쁜 한나와 아장아장 걷는 유민이가 팀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정규과목으로 서석주 자매로부터 중국어 초보를 배웠는데 권설음이 우리말에는 없어서 어려움이 많다.
특히 4성이 있어 발음마다 높낮이가 다르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다행히 한문 혼용성경을 읽었기에 한자에는 어려움이 없다.
중국어는 한자만 어느정도 알면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나와 아내가 발음하면 애들이 웃는다.
중2때 까진 외국어 발음이 원어민과 같이 낼 수 있단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릴 때 5개 국어를 가르친다고 하잖는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말이 통하니 장사고 뭐고 못할 일이 있겠는가?
어떤 강사가 영성훈련을 한다고 지은 죄를 공개 자복하도록 감정을 북돋웠다.
내 앞의 처녀 간호사 가 "제가 연거퍼 강간을 당했습니다. 주여 용서하소서!"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자매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강사는 계속하라고 부추겼다.
무슨 소리냐고 큰소리를 내며 자매를 붙들고 방으로 들어가게 해서 진정시켰다.
자매가 한국적인 상황에서 훈련을 무사히 마칠지 걱정이 됐다.
아니나다를까 그녀는
해외훈련을 마치고 귀국해서 훈련을 이탈했다.
어설픈 영성훈련으로 귀중한 헌신자를 한명 탈락시켰다!
초기엔 점심 후 오침을 하는 현지인들을 보고 아까운 시간을 잠으로 낭비한다고 팀원들은 땡볕에 배구 등을 하고 놀았는데 보름 후에 모두 몸살을 앓아서 우리도 오침을 하기로 했다.
미정자매가 땡볕에서 도로작업을 하는 새까맣게 탄 현지인들이 안타까와 시원한 콜라를 대접하려고 동네 수퍼에 갔는데 빈병을 회수하기 위해 야진을 해야했다.
상황이 복잡하고 영어가 짧은 자매는 큰소리로 "나가 이 콜라를 저 사람들에게 마시우고 빈병 가져다 줄께! OK?" 하니 광주 사투리를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보던 우리는 박수를 쳤다!
한번은 현지 예배문화 체험을 하자고 마닐라 시내의 비교적 큰 규모의 현지인 예배당에 단체로 갔는데 현지인과 위화감을 주지 말자고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참석했다.
아뿔사! 예배에 참석한 현지인들이 한결같이 긴팔 양복 정장에 구두까지 신은 차림이 아닌가?
그날 우리는 애들 말로 쪽팔렸다! ㅋ
하기사 우린 양복은 가지고 가지도 않았으니!
우리 또래의 센타에서 운전을 담당한 현지인 직원이 얼마나 신실하게 섬기는지 팀원들이 크게 감동했다!
선교지에서 저런 신실한 형제들을 만나야 할텐데!
주말에는 헌드러드 아일런드로 배를 타고 소풍을 갔는데 마닐라 가까운 바다에 백여 개의 무인도를 개발하여 관광객들에게 임대해줬다.
어떤 연인은 작은 섬 하나를 통째로 전세내어 발가벗고 에덴동산의 즐거움을 만끽했다나 어쨌다나! ㅋ
쪽빛 하늘과 바다가 어울어지고 해변의 모래가 밀가루같이 곱고 부드럽다.
육지에서만 살았던 촌놈들이 난생 처음 스노클링을 하며 산호 사이를 누비는 열대어의 현란한 몸짓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내는 신혼여행을 온듯 싱글벙글이다.
하기사 신혼여행을 덕진공원으로 갔으니! 원!
훈련을 마칠 즈음 며칠간 졸업여행을 남쪽 섬 일로일로로 떠났다.
마닐라 항구에서 배로 29 시간은 그다지 지루하지 않았다.
중간 어디 해협에선 몇년전 대형 여객선이 침몰하여 4,000여 명이 상어밥이 되었다고!
좌우의 빤히 보이는 육지도 수키로씩 되니 수영선수라 한들 상어의 바다에서 용을 쓸 수 있으랴?
자다가 꽝소리에 놀라보니 선이가 이층침대에서 떨어졌다.
잠결이어서 다치진 않았다!
귀국하여 인천의 한 교회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훈련했다.
서울의 한 대형교회에서 후원이 없는 목회자 선교사에게 후원한다고 오라고해서 한나절을 소모하고 갔다.
마침 결혼식 주례를 하고 계셔서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교단이 다르다고 차 한잔을 주지않고 가라셨다.
교단의 벽을 실감하며, 시간이 많이 아까왔다!
인천에서 단체 비자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지루했다.
어찌나 까다롭고 수속이 더딘지 재대로 갈 수 있을지 염려도 됐다!
주여! 길을 열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