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치우다가 날자지난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의 얼굴에 굵은 매직으로 욕설을 적었길래 주워 읽으려니 도저히 ㆍㆍㆍ
핸드폰에서 칼럼내용을 검색했더니 지난 11월 21일자 '4월총선 대차 대조표'라는 제하의 글인 즉 내 판단으로도 가히 안하무인ㆍ선동ㆍ언론ㆍ언론인의 국론분열 論造의 내용으로 비판받을 내용이었어.
김대중 칼럼니스트의 '4월총선의 대차 대조표' 제하의 글을 규탄하며 이 글을 퍼나르는 자들에게 고하노라!
국민을 우습게 보며 선동하는 수단 방법ㆍ論法도 高단수라는 걸 국민이 잘 알터,
'선거는 축제요 의무니까 기권 말고 투표장으로 나가 꼭 투표해서 투표율을 제고합시다.'라고 써논 낙서가 일리있는 규탄 글였지.
☆이승만 부정 선거ㆍ독재정권을 엎어버린 우리 학생들의 4월 의거를 모르는가?
<자유여 ~ 영원한 소망이여 ~ 피 흘리지 않고는 거둘 수없는 고귀한 열매여~
그 이름 부르기에 목마른 젊음이었기에 맨 가슴으로 총탄앞을 헤치며 달려 갔더니라.
불의를 무찌르고 자유의 나무에 피 거름 되어 나는 여기 누워있다.
잊지말자 사람들아 뜨거운 손을 잡고 맹세했던 아 ~ 그 날 4월19일을!
우리 서천군 기산면 드므니 출신 노희두 선배님의 부르짖음을 모르는가?
4ㆍ19의거 최초 총살 당한 우리고교 선배님의 부르짖음을 잊었는가?
보라 들으라! 4ㆍ19 묘지 盧선배님 묘소 앞에서 울부짖던 동국대학교 동기생의 포효를!
☆ 노희두 선배님은제가 탯줄 짤린 바로 우리故鄕 舒川郡 麒山面 두남리 出生으로 우리 (65년 1월 졸업/19 期)母校 長項農高선배 이시며 동국대학교에 進學 在學 중 烈血鬪士로 學生義擧에 參與했다가 鎭壓警察이 쏜 銃에 맞아 死亡한 最初의 守節死임을 밝혔다.
노희두 (1939. 06. ~ 1960. 04.)
충남 서천에서 출생, 장항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동국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1960년 4월 19일, 3·15부정선거와 이승만 독재정권을 규탄하며 3만 명의 대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당시 법학과 3학년이었던 노희두 역시 동국대 시위대 2천여 명과 함께 효자동을 거쳐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고 있던 경무대로 향했다.
오후 1시 30분 경,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경찰의 총알이 동국대 시위대 선두에 서 있던 노희두 선배님의 가슴을 관통하여 노희두는 4·19혁명 경무대 앞 첫 희생자가 되었다.
노희두 열사의 유해는 1963년 9월, 서울 강북구 수유리에 4·19 기념 묘지가 조성되면서 4·19혁명 유공자를 모신 제1묘역 98번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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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테타 유신ㆍ종신 정권을 죽여 버리고 마침내 軍政을 종식, 문민정부를 출범ㆍ 정착 시킨 열혈투사들의 5월 광주 의거와 6월 민중 항쟁의 열매를 짖밟으려는가!
누가 무얼? 얻어 먹겠다고 누굴 위해 공산화를 획책 한단 말인가?
착각하지 말거라!
자기 배때기나 채워가며 호의호식하려는 걸래 만도 못한 것들아!
보라! 눈을 뜨고 저 빗자루와 걸래가 하는 일을 똑바로 보거라!
빗자루 걸래는 이 初겨울 바람에 뒹구는 낙엽을 쓸어담고 비록 헤어진 걸래지만 네 놈들이 흘린 국물이라도 닦아내는 살신성인의 험한 일을 수행 하는 걸 보거라!
걸래커녕 빗자루만도 못한 것들 같으니라구!
'허구 헌날 할 일 없이 아스팔트 위에서 데모나 하던세력 이라니? 운동권세력 이라니?
찢어진 입이라고 맘대로 지껄여도 되느냐?
정작 네놈들은 만약 공산화 되려는데도 입 다물고 얼음판에 자빠진 소ㆍ돼지처럼 주댕이 닥치고 뱃대기 두들길 궁리하겠지?
주댕이를 하로불에 달군 인두로 확 칮어버리고 프다.
김대중 칼럼氏에게 묻노라.
"왜 국론분열 시키는가?
국힘당 혁신위원장을 하고픈가? 이동관이 대행 하고픈가?"
언론ㆍ언론인의 역할과 사명이 무언가를 배우지 않았나?
{아래, 조선일보에 게재된 김대중의 안하무인ㆍ선동 칼럼}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3/11/21/OAVVAGUZ7RCPNAFJ3IZSSJP6J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