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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궁(神弓) 4장
第 4 章. 매서운 아가씨 소 운영(蘇 雲英).
2.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하는 소운영의 꼴에 화가 난 도일봉은 이
한 대 주먹 정도는 진짜로 때려주려고 벼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다급한 비명소리에는 그만 정신이 깜빡 들었다. 이 막무가네인 계집
애는 아무래도 문부인을 닮아있다. 동생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문부
인의 동생을 때린다면 무슨 면목으로 문부인을 대할것인가 말이다.
아차 싶은 도일봉은 주먹을 거둬들이려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
다. 도일봉은 할 수 없이 재빨리 주먹을 펴서 그대로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힘껏 내팽게쳤다. 소운영은 너무 놀라 도일봉
이 가슴을 움켜 쥐었다는 사실도 모른체 땅바닥에 나뒹굴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소운영은 그야말로 창피막심이었다. 불한당 같은 작자에게 잡혀
땅에 곤두박질 당했으니 아가씨 체면을 어찌 유지한단 말인가!
'아이코! 이놈이...!'
소운영은 또 그제서야 자신의 가슴이 은근히 아파옴을 느끼고 기
겁을 하고 말았다. 이 불한당의 지저분한 손이 바로 자신의 젖가슴을
만졌지 않은가! 창피한 것 보다 더한 수치심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또 더욱 화가 치밀었다. 도무지 참아낼 수가 없었다. 막 몸을 일으켜
재차 덤벼들려 하는데 도일봉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금빛찬란한 물건
이 눈에 띄었다.
"황룡궁!"
소운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황룡궁은 청운장의 보물이다. 이찌
이런 불한당의 수중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소리쳤다.
"이 도적! 그 자리에 서랏!"
도일봉은 돌아서서 소운영을 바라보았다. 이 계집애가 왜 이토록
막무가네로 나오는지 짜증이 치솟았다. 이젠 욕까지 하고 도둑으로
몰아대니 도무지 참아낼 도리가 없었다.
"이 계집애가 정말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누가 네까짓것이 겁나서
피하는줄 아니? 그따위 소릴 한 번만 더하면 진짜 떼려줄테다!"
"이 죽일놈이! 황룡궁은 형부의 보물이다. 어찌 네깟 녀석이 지니
고 있냐 말이야? 훔치지 않았다고?"
"계집애가 정말 하늘 높은줄도 모르는군. 황룡궁은 문형이 내게 준
것이다. 보아하니 문형과는 한식구인 모양인데, 그렇다고 내가 너를
혼내주지 못할 것 같으냐? 응?"
"이 불한당! 네깟것에게 형부가 그런 보물을 내줄리 없어! 당장 내
놔!"
도일봉은 정말 이 계집애가 막무가네라고 생각했다.
"그만두자 그만둬! 대장부(大丈夫)5가 참아야지."
도일봉이 몸을 돌리는데 소운영이 어느새 몸을 날려 앞을 막으며
손을 휘둘렀다. 그녀에게 이젠 도일봉이 도둑이든 아니든 그것이 문
제가 아니었다. 이 새카만 불한당 녀석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소운영이 날뛰자 도일봉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 계집애가 앞 뒤 분간없이 이토록 한심하게 날뛰는구나!'
더 상대했다간 귀찮은 일만 쌓일 것 같았다.
그러나 도일봉이 피하면 피할수록 소운영은 더욱 매섭게 날뛰었
다. 도일봉의 주먹에 어느새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영아. 이 무슨 짓이냐!"
문부부가 뜰로 들어서 놀라 외치고 있었다.
문부인은 뾰루뚱해져서 나간 동생이 한동안 보이지 않자 궁굼해서
찾아 나서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이곳 뒷뜰로
왔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일이 벌어져 있다.
소운영은 언니의 목소리를 듣기는 했으나 손을 멈추지 않았다. 또
다시 퍽퍽! 도일봉의 가슴에 두 대의 장력을 적중시키고야 말았다.
도일봉은 다소 인상을 찡그렸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뒤로 물러나
쓱쓱 가슴을 문질렀다. 이 계집애는 성질이 못되먹어서 양보하지 않
으면 언제까지고 멈추려 하질 않을 것 같아 일부로 맞아준 것이다.
"영아. 너...!"
"흥!"
소운영은 심하게 콧바람을 날리며 홱 몸을 돌렸다. 문부인이 난감
한 표정으로 도일봉을 바라보았다.
"영아. 너는 어째서 말썽만 부리고 다니느냐? 여자가 되가지고 함
부로 손을 쓰다니!"
소운영이 눈을 부라리며 대들었다.
"언니가 뭘 안다고 그래? 저 불한당이 먼저 손을 곰단 말이야. 저
따위 말이 뭐 대단하다고? 그저 좀 놀려주려고 했는데... 저자가 날
괴롭혔단 말이야. 저..저,.,.불한당이 날 때렸어!"
도일봉은 다만 어이가 없었다. 계집애가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
분수(有分數)지! 자기가 한 일을 누구에게 뒤집어 씌운단 말인가! 도
일봉은 소운영을 매섭게 노려보며 인상을 곰으나 문부인이 살짝 눈을
찌뿌리는 것을 보고는 이내 참았다. 정말이지 이 선녀같은 문부인 앞
에서는 전혀 힘을 쓸 수 없었다.
문부인이 소운영을 나무랐다.
"억지소리 하지말고 어서 도공자에게 사과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아버님께 연락해서 외출을 못하도록 할테다."
그 말에 소운영은 대번에 찔끔하고 말았다. 부친은 언니 말이면
무엇이든 믿는다. 부친이 언니말을 듣고 외출을 못하게 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소운영은 무엇이든 일을 벌이고 다니는 것
을 좋아했다. 하지만 저 불한당한테 당한 수모가 막중한데 어찌 사과
를 한단 말인가?
"저런 작자에게 사과를 하라고? 내가 당한 수모는 어쩌고? 저 작자
가 내게 사과를 한다해도 난 용서못해!"
소운영의 말에 문부인은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동생이 언
제나 말/썽을 일으키지만 자신이 말하면 잘 듣곤 했다. 그런데 이토
록 완강한걸 보면 도일봉이 정말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 같다. 그러
나 도일봉의 잔득 찌뿌린 표정을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도일봉
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소운영은 지금 도일봉이 자신의 가슴을 한 번 움켜쥔 것을 두고
이처럼 완강하게 나오는 것이다. 물론 스스로도 부끄러운 일인지라
내대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도일봉은 그 일에 대해 느끼고 있지도
않은 듯 하지만 역시 상당히 불만스럽고 수치스런 일이다.
도일봉은 속으로 여전히 소운영을 욕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부인
에게는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소란을 부려 죄송합니다. 제가 사과 하겠습니다."
"영아. 도공자가 이렇듯 사과를 하니 너도 어서 사과를 하거라."
소운영은 코웃움을 쳤다.
"흥. 그가 언니한테 사과하는 것이지 내게 사과하는 것인줄 알아.
불한당에게 무슨 공자 운운이야? 내게 사과를 한다해도 나는 받지 않
겠어. 혹, 저 말을 내게 준다면 모를까 말이야."
그녀의 말에 문부인과 도일봉은 동시에 발끈하고 말았다. 문부인
이 먼저 호통을 쳤다.
"영아. 너 정말!"
"흥!"
그러나 소운영은 코웃움만 쳤다.
도일봉은 화가 치밀어 당장이라도 주먹질을 할 것 같았다. 울구락
붉으락 얼굴색이 수시로 바뀌었다. 문부인이 재빨리 나섰다.
"도공자. 동생이 허튼 소리를 하는 것이니 나무라지 마세요."
도일봉은 문부인의 별빛같은 눈둥자를 보며 이내 화를 촣였다. 성
질 같아서는 그저 저 계집애의 따귀라도 갈겨주고 싶었지만 문부인이
있는한 결코 화를 낼 수도 없다.
"부인. 동생에게 화내지 마십시오. 제가 잘못 했습니다. 장군을 드
리지요."
도일봉은 그대로 몸을 돌려 안으로들어가 버렸다. 문부인 때문에
참긴 했으나 도무지 끓어오르는 화를 견뎌낼 수가 없어 차라리 자리
를 뜬 것이다.
문부부와 소운영은 다만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문국환이 고
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도형제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야."
소운영이 말했다.
"흥. 제깐 녀석이 화를 내 봤자지!"
"영아. 너, 날 따라 오너라!"
문부인이 호통을 치며 앞장서자 소운영은 혀를 쏙 내밀어 보이고
는 언니뒤를 따라 안채로 향했다. 소운영은 걱정하진 않았다. 한차례
잔소리를 듣는 것 보다는 그 불한당이 정말로 말을 줄까 그것이 궁굼
했다. 문국환은 도일봉을 보고갈까 하다가 이내 안채로 향했다. 뒷채
엔 어느새 장군만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다음날.
날이 밝자 도일봉이 작별을 한다고 찾아왔다. 문국환부부는 가슴
이 철렁했다. 떠날 사람이긴 했지만 어제일로 마음이 상해 서두르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도일봉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보
퉁이를 등에 메고 황룡궁은 허리에 걸고 있었다.
"문형. 부인. 그동안 정말 잘 지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더 머물
고 싶지만 가봐야지요. 곧 다시 오겠습니다."
문국환은 몇번 만류했으나 도일봉의 마음이 정해진 것을 알고는
그만두었다. 문부부는 그를 대문까지 배웅해 주었다. 문부인은 장군
이 없는걸 보고 놀라 물었다.
"말은요? 말도 대려 가야죠?"
"하하. 장군은 이미 그 아가씨에게 주었는데 제가 대려 가겠어요?
장군이 나를 따라다녀야 고생만 할 뿐인걸요. 그리고 내 두 다리도
튼튼하니 애써 말을 탈 필요도 없고요. 그 아가씨가 장군을 잘 돌봐
주면 됩니다. 그리고 장군은 사람 태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아가
씨 혼자만 타라고 일러 주십시오. 그럼, 곧 다시 뵙지요."
그 말을 남기고 도일봉은 유유히 떠나가 버렸다.
문국환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말은 그렇게 해도 화가 다 풀어진 것 같지는 않구려."
"그래요. 그는 말을 친구라고 했는데 마음이 상했을 거예요. 영 돌
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진 않을거요. 이곳엔 친구도 있고, 또 선녀도 있는데 그가 어
디로 가겠소? 하핫."
"당신 지금 저를 놀리시는 거예요? 도공자는 그리 옹졸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래요 그래. 그대 말이 맞아요. 우리도 이제 들어갑시다. 선녀
님!"
"짖굳어요. 호호."
두 사람은 밝게 웃으며 손을 맞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일로 신이난 사람은 소운영 뿐이었다. 어제 언니한테 잔득 꾸
중을 들어 입이 닷발이나 튀어나와 있었는데, 잠에서 깨어보니 그 불
한당이 정말로 말을 두고 갔다는 것이다. 믿지 못하고 단번에 뒷뜰로
뛰어가보니 말은 정말로 그곳에 있었다.
"불한당이 정말로 두고 갔다!"
그녀는 기뻐서 펄쩍 뛰었다. 말 한마디에 이런 명마를 두고 가는
멍청이도 있을까 자못 의심스러웠다. 그러다가 문득. 이 불한당이 말
을 두고 간 것은 언니 때문이지, 결코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약이 오르고 괜시리 짜증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확실히
말은 이제부터 자신의 것이다. 불한당을 생각할때면 기분이 나빳으나
이 멋진 말이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절로 신이 났다.
소운영은 크게 기뻐하긴 했으나 말에게 함부로 다가가진 못했다.
어제처럼 말이 행패를 부린다면 곤란한 일이다. 주인을 닮아 성질이
고약하여 자신에게 승복하지 않으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그녀는 어
제처럼 무작정 다가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말은 얌전한 것이 목을 쓰다듬어도 전혀 반항할 기미가 없었다. 그녀
는 더욱 기뻐했다.
"말아, 말아. 네 이름이 장군이라 했지? 이제 그 멍청한 주인은 떠
났으니 내가 너의 새 주인이다. 내가 잘 대해줄테니 염려는 말아라.
자 자. 가만히 있거라."
소운영은 조심조심 말 등에 올랐다. 치마를 입고 있어 불편하긴
했지만 뒷 뜰엔 자신밖에 없는지라 신경쓸 것 없었다.
"장군아. 천천히 가자."
소운영은 장군의 목을 쓰다듬으며 작게 말했다. 장군은 그녀의 말
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소운영은 기분
이 좋았다. 안장없는 말은 처음 타보는 것이지만 크게 불편하진 않았
다. 그녀는 점차 속력을 내게 했다. 두 다리를 말 옆구리에 단단이
고정시키고, 두 손으로 갈기를 움켜잡았다. 장군이 뒷 뜰을 바람처럼
달리는데도 마치 의자에 앉아 있기라도 한 듯 편하다. 그녀는 너무
좋아 시간 가는줄도 몰랐다.
문국환 부부가 장군을 보러 왔다가 이런 소운영을 보고 쓴웃움을
지었다.
"저 아이는 너무 철이 없어요!"
부인의 말에 문국환도 고개를 끄덕였다.
"머지 않아 임자를 만나겠지요. 너무 걱정마오. 처제는 저래도 스
스로는 충분히 지킬 수 있어요. 곧 철이 들겠지."
문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안체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어제의 회의에서는 무슴 일이 있었나요?"
문국환은 이렇듯 서생 차림을 하고는 있으나 조부의 뜻을 이어 학
문과 무예를 함께 익히는 사람이다. 그의 조부는 송나라의 마지막 충
신이라는 정충(正忠) 문천상(文天상)이다.
문천상이 오파령(오파령) 전투에서 몽고군에게 사로잡혀 끝내 몽
고에 투항하지 않고 옥사(獄死)한 후, 식구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하
였다. 그러나 그중 몇몇은 초야(草野)의 의사(義士)들에게 구출되어
몸을 숨겼다. 문국환의 부친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초야의 의사들에게 구출된 문국환의 부친은 강서(江西) 길수(吉
水)의 정든 고향땅을 등지고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 이곳 남창부에
자리를 잡은 그는 어떻게든 무너진 가문을 일으키고, 잃어버린 나라
를 되찾으려 노력하다가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다. 문국환은 그런 부
친의 뜻을 이어 청운장을 세웠다. 물론 부친의 친구들과 뜻있는 의사
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장인인 소남천(蘇南天)도 부친의 친구중
한명이었다.
마찮가지로 청운장은 일개 서생이 머무는 곳은 아니다. 실제로는
용이 숨어있고,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방대한 조직을 지닌 반원(反
元) 세력인 것이다. 파양호에 자리잡고 있는 청응방(淸鷹幇)이 청운
장의 휘하세력이고, 수도없는 영웅호걸들이 청운장과 연결되어 있다.
천목산(天目山)에 위치한 귀운장(歸運莊)의 소남천도 물론 뜻을 같이
하는 동지요, 장인이다. 이런 방대한 조직을 갇춘 청운장이 일개 서
생의 집으로 알려진 것은 역시 신분을 속이기기 위한 포석일 뿐이었
다.
문국환은 이런 방대한 조직과 각지의 영웅들 간의 상호연락을 맡
아 하루 한시도 쉴세가 없었다. 요사이는 주로 점점 시끄러워지고 있
는 무림분쟁(武林分爭)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 중이다.
송이 망한지도 어느덧 오십년이 넘고 있다. 망국의 황손들은 어디
로 흩어져 버렸는지 찾을길이 없고, 어쩌면 영영 무너진 송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국토와 백성들을 유린하
고 있는 저 몽고의 달자들은 어쩐단 말인가! 한시라도 저들을 물리쳐
저 머나먼 사막, 자기들 고향으로 좇아야 한다.
몽고의 달자들을 좇아내고, 잃어버린 국토를 찾으려면 힘이 있어
야 한다. 그러나 이미 군권을 장악한 몽고에 대항할 만한 힘이 있던
가.
문국환과 몇몇의 의사들은 이 힘을 무림에서 찾으려 했다. 무림이
란 관부와는 다른 세계이다. 천하에는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무림
의 방파와 세가들이 있다.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고, 추구하는 이상이
다르지만 이들 개개의 집단에는 대단한 힘이 잠재되어있다. 이들을
하나로 뭉치기만 한다면 몽고의 철기와 한판 건곤일척(乾坤一擲) 자
웅을 겨뤄볼만 하다. 그러나, 아! 그러나.
현 무림의 상태는 아득하기만 하다. 몽고에 투항하거나 앞잡이 노
릇은 하지 않더라도 그들 모두는 자기들의 문파를 지켜내느라 바쁘
고, 또 일이 꼬이느라고 요 몇 년, 각파간의 분쟁이 끊이질 않고 있
다. 그중 몇몇의 문파간에는 이미 서로 한 하늘을 이고 살지 않겠노
라 선언하며 원수가 되어 피를 흘리고 있는 실정이다.
문국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갈수록 어려워만 지고 있다오. 몽고놈들의 탄압이 너무 가혹하여
이젠 서로간의 연락도 쉽지가 않아요. 그리고 요사이는 두가지 일이
벌어져 무림을 뜨거운 솥처럼 닳궈놓고 있어요. 그 첫째가 바로 '장
보도(藏寶圖) 혈사(血事)'예요. 어떤 경로를 통해 이 장보도가 강호
상(江湖上)에 유출 되었는지는 몰라도 강호의 호걸들이 너나 할것없
이 이 장보도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어요. 벌써 수도없는
사람들이 이 한 장의 지도를 뺏기고 빼앗느라 피를 흘리고 있어요.
들리는 말로는 징기즈칸이 서하를 정벌할 때 얻은 보물들을 한곳에
감추어 두었는데, 이 지도가 바로 그 보물을 찾는 열쇠라는 것이오.
두 번째는 바로 '무림분쟁(武林分爭)'이라오. 어찌된 일인지 각 파의
보물이 없어지는가 하면, 제자들의 원인모를 죽움들이 잇따르고 있
소. 사고를 당한 문파에서는 흉수(凶手)를 경쟁자에게 떠넘겨 칼부림
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오. 무림의 하늘위에 거대한 먹구름이 뒤덮여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어려운 일이오. 휴우... 그래서 나는 한분
의 협사(俠士)를 모셔 각파간에 화해를 주선해볼 생각이오."
"그분이 누군데요?"
"과거에 마운수(魔雲手)라 불리웠던 양종보(楊綜寶) 노협(老俠)이
오. 이분은 당년에 명성이 대단하셨고, 강호인들은 아직도 그분을 존
경하고 있으니 어렵긴 해도 어쩌면 화해가 가능할수도 있겠지요."
"그렇군요. 후우. 당신의 노력은 끝이 없어요.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소. 이 일은 바로 내 일인데 어찌 소
홀하리요. 내 대에서 끝나지 않으면 운기가 이어 해결해야 할 일이
오. 달자놈들을 다 물리칠 때 까지 어찌 한시라도 소홀히 하겠으며
끝이 있겠소. 난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오."
"예. 그래요."
문부인은 행복했다. 어느 누가 자신의 부군만큼 훌륭할 수 있겠는
가! 그녀는 남편의 허리를 감싸안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문국환도
굳어진 얼굴을 풀고 아내의 어깨를 안고 안채로 향했다. 소운영은 여
전히 장군을 타고 좋아하고 있었다.
몇일 후. 소운영은 장군을 타고 귀운장으로 출발했다.
귀운장은 동천목산(東天目山)아래 도도히 흐르는 장강을 굽어보며
자리하고 있다. 고풍스런 귀운장 건물 저 언덕 아래에는 규모가 상당
한 포구가 자리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선박들이 그 포구에 정박되어
있다. 대부분 귀운장에 소속되어 있는 선박들이다.
귀운장으로 돌아온 소운영은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청운장의 안부
를 전해주었다. 그리고 장군을 얻게된 경위를 한바탕 자랑삼아 늘어
놓았다. 그녀의 부친 소남천은 풍체 좋게 생긴 50대 사내였다. 다져
놓은 기반이 튼튼하고 수 많은 수하를 거느리는 자의 여유와 위엄을
두루 갇춘 모습이다. 또한 가전의 무공인 낙영신장법(落影神掌法)과
72로 유운검법(遊雲劍法)에도 정통하여 장강 일대에선 상당한 명성을
쌓고 있다. 모친 또한 비슷한 나이였으나 몸이 허약한 것이 흠이었
다. 그러나 병색이 완연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이 부인은 상당한 자
색을 갇추고 있었다. 딸들은 모두 모친의 그런 미모를 이어받은 모양
이었다.
소운영은 그런 부모앞에 앉아 장군에 관한 이야기를 지칠줄 모르
고 늘어놓았다. 장군이 어떻게 백호와 싸우게 되었고, 장군이 위험에
처했을 때 어떤 사냥꾼이 나서서 어떻게 도와 주었다는둥, 자신이 언
니집에 와 있는 그 사냥꾼과는 또 어떻게 싸워서 장군을 넘겨 받았다
는둥 길기도 했다. 물론 많은 부분 보태기도 하고 빼기도 했다. 도일
봉은 다만 졸지에 훌륭한 사냥꾼이 되어 버렸고, 또 여인에게 얻어맞
은 남자가 되어버렸다.
딸의 말을 듣고난 소남천이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 또 말을 보태는구나. 백호는 영물이다. 아무에게나 눈에 띄는
짐승이 아니야. 그런 영물을 잡은 사람이 어찌 네게 패해 항복을 했
겠느냐? 그 사람은 필시 보통인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이 사위
와 친구가 되었다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기껏해야 사위의 체면
을 봐서 네게 양보한 것이겠지. 그 사람 성명이 뭐라 하더냐? 사위의
친구라면 필시 젊은 사람 일텐데?"
소운영은 자신의 허풍이 들통나자 금방 뾰루뚱 해져서는 혀를 쏙
내밀었다.
"피, 아빠는 잘도 알아 맞추시는군요! 아빠 말씀은 거의 옳지만 한
가지만은 틀려요."
"뭐가 틀렸다는 게냐?"
"그 멍청한 사냥꾼 말이에요! 그는 결코 훌륭한 사람이 아니에요.
새까만 깜둥이에다 키도 작고 비쩍 말랐어요. 공부하고는 아예 담을
쌓은 인간이라 붓 한 번 잡아본 적이 없데요. 일자무식(一字無識).
멍청하기가 꼭 소 같다니까요. 그리고 말이에요. 언니를 처음 본 것
은 관도상에서였는데 글쎄, 그 인간은 언니가 뭐 천산의 선녀인줄 알
고 길바닥에 대고 통통 소리가 나도록 절을 했다지 뭐여요. 흥 흥."
언니만 못한 미모를 갇춘 소운영은 늘 이같은 일만 생기면 크게
질투를 해댄다. 그런 뚤째 딸을 잘 알고 있는 소부부는 소리내어 웃
었다.
"호호. 네 말대로라면 그 사람은 멍청이가 아니라 아주 순진한 사
람인 듯 하구나. 하지만 길바닥에 대고 절을 했다는 것은 훗, 재미
있구나. 음. 너는 평소 남자 애들이라면 아주 못마땅해 하는 것 같던
데 그 사람을 멍청이라 욕하면서도 꽤나 자세히 알고 있구나? 왜? 그
사람이 마음에 들던?"
"엄마!"
소운영은 화들짝 놀라며 마구 도리질을 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멍청하고 무례한 인간을 누가 좋아
하겠어요?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요!"
"그래? 하루에 몇번 쯤이나 생각하고 화를 내느냐?"
"말을 볼 때마다... 엄마!"
"호호홋."
"핫핫."
소부부는 재미가 있어 대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소운영은 삽시간
에 어쩔줄을 모르고 얼굴만 붉혔다. 모친의 유도신문에 그만 속마음
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녀는 후딱 자기
방으로 도망치듯 가버렸다. 소부부의 웃움소리가 그녀의 뒷통수를 따
라붙었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소운영은 마구 심통을 부리며 도일봉을 욕했
다.
"그 멍청한 녀석 때문에 내 꼴이 이게 뭐람! 어디 만나기만 해봐
라. 단단히 혼을 내줄테다. 새까만 깜둥이. 비쩍마른 말라깽이. 흥!"
도일봉을 욕하면서도 소운영은 장군을 보러갔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온 이후 매일같이 장군을 타고 산책을 했다. 둘은 이미 많이 친
해져 있었다.
벌써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무더위가 물러간 지는 이미 오래전
이고, 천목산의 단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날도 소운영은 장군과 함
께 단풍구경을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한사람을 만났다. 소운영도 익히
알고 있는, 어릴때부터의 교분이 있는 청년이었다. 바로 귀운장과 어
깨를 나란히 함녀 장강일대를 주름잡는 백운산장(白雲山莊)의 둘째아
들. 운중학(雲中鶴)이 바로 이 청년이다. 운중학은 부친과 함께 요긴
한 일로 귀운장을 방문했다가 소운영이 보이지 앉자 밖으로 나왔던
모양이다.
소운영은 어렸을 때 이 운중학을 오빠라 부르며 잘 따르기도 했
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왠지 서먹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대갓
집 귀공자랍시고 거들먹 거리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다. 하
긴, 배경이 좋으니 거드름을 피울만도 하다. 더욱이 소운영 본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누구 못지 않게 거들먹 거리는 여인이 아니던가! 여
하튼 그녀는 능글맞게 미소짓는 운중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안녕 영매. 정말 오래간만이지?"
운중학의 싱글벙글 하는 모습을 보며 소운영은 샐죽한 표정을 지
었다.
"그렇군요. 정말 오래간만이에요. 하지만 나는 그리 안녕한 편은
아니에요."
소운영은 요사이 심기가 편칠 않다. 언제부터인지, 이유가 뭔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요즘 매사에 흥미를 잃고 있었
다. 그처럼 심하던 장난질과 말썽도 일으키지 않는다. 괜시리 한숨이
나오고, 혹은 무엇인가 잃어버린 듯 허전하기도 하다. 장군을 타고
한바탕 달리다보면 그 기분이 조금 나아질 뿐이다.
운중학은 소운영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왠일이야 영매? 어디 아픈건 아냐? 아름다운 미인이 수심(愁心)에
잠겨 있으니 안타까운걸. 무슨 일인지 내가 알면 안될까?"
소운영은 갑자기 운중학의 입에 발린 소리가 역겹게 느껴졌다. 자
신이 아는 모든 청년들은 언제나 아첨하는 말 뿐이다. 그런 말투는
이제 신물이 난다. 그녀는 운중학을 매섭게 째려 보았다.
"그렇게 알고 싶어요? 정 그렇다면 말 못할 것도 없죠. 난 지금 혼
자 산책을 하고 싶단 말이에요. 그런데 운공자께서 이렇듯 방해하고
나서니 안녕치 못한 것이에요. 이만하면 됐나요?"
소운영의 앙도라진 말투에 운중학은 무안하여 뭐라 말을 못했다.
소운영은 팩 토라져서는 힘차게 장군을 몰라 달렸다.
"허어 참!"
할 말 잃은 운중학은 다만 달려나가는 소운영의 뒷모습만 바라보
았다.
귀운장으로 돌아온 소운영은 운중학 부자가 온 이유를 단번에 알
아버렸다. 시녀 한명이 그녀에게 축하한다고 말하며 웃었기 때문이
다. 운중학 부자는 바로 청혼을 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소운영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쿵"하고 무언가 가슴 한쪽을 때리는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 다급해 졌다. 자기 자신도 뭔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그녀는
당장 엄마에게 달려가 품속을 파고들며 울움부터 터뜨렸다. 소부인은
딸이 이토록 당호끭해 하며 울움을 터뜨리자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자
상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자 자. 영아. 무슨 일로 이렇게 울기부터 하느냐? 울움을 멈추고
차분하게 말해 보려무나. 그래야 이 엄마가 도와줄게 아니냐?"
"엄마, 엄마! 아빠가...아빠가 날 시집 보낸데요! 난 절대 시집가
지 않을래요. 엄마엄마. 가서 좀 말려주세요. 예 엄마!"
"이 애가... 이 애가 무슨 소리냐? 여자가 나이들면 자연 시집을
가야지. 그것이 여인의 도리가 아니냐! 난 또 무슨 큰 일인줄 알았구
나."
"앙. 그래도 난 안갈테예요! 그는 아첨만 잘하고, 저를 이상한 눈
으로 처다봐요. 난 절대 그에게 시집가지 않을래요 엄마!"
"이 애가! 그가 어떻다고 그러느냐? 인물 좋고 총명하기로 소문난
사람 아니냐? 또 양가의 교분은 어떻고. 그만한 시랑감이 어디 있다
고?"
"싫어요, 싫어요. 그에게 시집 보낸다면 난 집을 나가고 말테예요!
엄마. 제발좀 말려주세요. 응 엄마!"
"계집애가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엄마 앞에서 그 무슨 소리냐? 넌
당장 네 방으로 돌아가 있거라. 어서!"
소운영은 엄마까지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자 그만 울면서 방을 뛰
처 나가버렸다. 소부인은 딸의 철없음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저것이 저토록 철이 없다니 원..."
자기 방으로 돌아온 소운영은 한참 동안이나 서럽게 울었다. 그러
다가 그녀는 돌연히 울움을 멈추었다.
"내가 왜 울고 있지? 나는 그가 왜 싫은거지?"
울고 있는 이유나, 운중학이 싫은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운중학과는 가깝게 지냈다. 그에게 특별한 감
정은 없었으나 어려서부터 사귀어온 교분은 그대로다. 그런데 그가
왜 갑자기 싫어진 것일까? 아첨만 잘해서? 아니면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니까? 물론 그런 이유도 있긴 하다. 하지만 꼭 그것만이 이유
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이유를 꼭 집어낼 수 없다. 다만 마
음만 다급하고 서러울 뿐이다.
소운영은 문득 집을 나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삽시간에 굴뚝 같이 치솟았다. 어디로 가야할지, 누구를 찾아가야 할
지, 또 왜 꼭 집을 나가야 할지도 모르면서 마음 속에서는 속히 집을
떠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갑자기 친구들이 보고 싶은것도 같았고,
언니가 보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또 모두 아닌것도 같았다.
소운영은 곧바로 간단한 행장을 챙겼다. 그리고는 언니집으로 간
다는 한마디만 쪽지로 남긴체 아무도 모르게 장군을 타고 귀운장을
빠저 나갔다.
소운영이 보이지 않자 귀운장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부친 소남천
은 딸이 예의가 없다고 노발대발하며 무사들을 풀어 소운영을 찾아오
라 야단이었다. 또 백운산장 운중학 부자에게는 양해를 구하고 혼사
는 당분간 덮어두기로 했다.
"에이, 못된 것!"
첫댓글 잘보았습니다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잘밨어요
감사합니다
즐감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ㅋ
시집 안 가요 ㅎ~~~~
즐감요
감사히 읽습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잼있네요 !
감사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