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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재앙을 막는 예배 /역대상 21:13-30
조동천(현대교회 목사)
로마제국은 법과 질서가 존중되었던 가장 안정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살펴보아도 로마처럼 훌륭한 체제를 수립한 국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방세력도 감히 로마에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문명이 완전히 몰락해 버렸을까요? 불과 100년 밖에 걸리지 않는 짧은 기간에 로마제국은 극심한 빈곤과 무정부상태에 빠지고 외국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어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이 논하는 바에 의하면 로마가 쇠퇴하고 망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었습니다.
1. 이혼의 증가와 가정의 파괴
2. 과다한 세금 부담과 지나친 소비풍조
3. 쾌락에의 욕구 증가와 스포츠의 잔혹화
4. 점증하는 적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군비의 증강
5. 종교가 다양하고 혼란한 형태들로 타락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국민을 단일한 신앙으로 통일시킬 수 없게 된 것.
바로 이러한 요소들이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일이다. 법과 질서 군사적 힘으로 근본적인 해결이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들의 근본적이고도 종합적인 치유법이 어디 없을까요? 사회나 개인을 바라볼 때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은 모두들 하고 있지만, 어디서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습니다. 저마다 해결방향을 제시합니다만, 그것들은 늘 표면적인 미봉책에 불과했습니다. 제도를 바꾸거나 사람을 갈아치운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깊은 무언가 본질적인 것을 해결해야 할 것 같은 상황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미국 의사인 그레이스와 그래함 팀이 128명의 외래 환자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가 있습니다. 두드러기 때문에 찾아온 31명의 환자들-자신이 멸시, 천대를 받고 있다고 느낄 때에 두드러기가 생긴다고 합니다. 27명의 습진 환자-심한 간섭이나 방해를 받고 있다고 느낄 때 습진이 일어났고, 10명의 비염 환자-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비염이 일어났고, 7명의 천식 환자-어떤 절망감을 가졌을 때 천식이 일어났고, 9명의 십이지장 궤양 환자들-증오심을 품고 복수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걸림. 연구팀의 연구 결과는- 대부분의 질병의 원인이 물리적인 데 있기보다는 정신적인 데 있다는 것입니다. 화 잘 내고 신경질 잘 부리고, 혈기 내는 것도 예외가 아닙니다.
미국 북쪽 위스컨신주의 먼로 병원장 신들러 박사는 말하기를 류마티스의 30%는 신경의 긴장으로 인하여 압박을 받는 근육들의 고장으로 생긴다고 하고, 피부병의 33%와 담낭병의 50%는 내적 생활의 혼란에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적어도 현대인의 모든 질병의 절반은 신체조직의 고장에서 생긴 것이기보다는 마음의 걱정과 생활의 어려움에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실을 접했을 때, 이것의 표면적인 증상과 원인이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파헤치고 거기서 해결하는 일은 대단히 지혜로운 일입니다. 다시 말해 물리적인 현상 속에는 어떤 정신적이거나 영적인 원인이 잠재되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갓 선지자에게 들어서 알았던 사람입니다. 다윗이 다스리는 나라에 칠 만명이 죽는 전염병이 돌았는데(14절), 22절을 보면 이 질병의 문제를 만났을 때, 그 해법을 제단을 쌓은 것으로 제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위하여 여기 한 제단을 쌓으리니 그리하면 전염병이 백성 중에서 그치리라 하니”(22절하).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걸 어쩌면 좋습니까? 성경의 논리는 명백합니다. 질병과 자연재해와 인사사고 등 우리가 겪는 불행의 많은 부분에 영적인 원인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스나 에이즈 같은 바이러스나 세균의 창궐이나 태풍같은 자연적인 재해, 그리고 전쟁과 각종 인재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치료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에 있다는 영적인 문제와 직결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제시하시고 실행하시는 재앙을 막는 근본적인 길은 예배입니다. 어떻게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배의 기회(15절): 예배의 주도권
첫째, 예배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일의 배경은 다윗이 백성의 수를 계수하는 잘못을 행함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15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사자를 보내셨더니 사자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사자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15절)” 여기서 멸망당할 것을 멈추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재앙을 내리신 분도, 잠깐 멈추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 때 하나님의 심정이 표현이 되어있는데 “이 재앙 내림을 뉘우쳤다”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아주 치욕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고 완전하시고 계획대로 이루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인데, 뉘우쳤다는 표현이 얼마나 하나님의 명예에 치명적인 것입니까? 원래 심판 받아서 징벌로 다 멸망해야 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뉘우쳤다니요? 이것은 하나님이 뜻을 돌이켰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렇게 안하셔야지 그런 일을 왜하셨을까요? 예를 들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표준새번역 창 6:6)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 지으신 것을 뉘우쳤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후회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표현입니까? 전능자가 뉘우치다니요! 그런데 그 모든 원인은 하나님 자신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인간에게 있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그만큼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완전하시지만 뜻을 돌이키는 순간이 어느 때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심판 하실 때나, 심판에서 구원을 행하실 때 그 분의 뜻대로 안하시고 그분의 사랑이나 정의를 통해서 뜻을 돌이키시는 것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예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는 그 기회를 우리들이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땅히 우리를 심판하셔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 심판을 멈추시고 돌이키는 그 자리가 예배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냥 멸망을 수행하는 천사로 계속 멸망시키게 하면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다윗도 멸망하고 모든 사람이 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아무도 예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일시적으로 멈추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그 기회를 주신다는 것, 자체는 하나님에게는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일 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뜻을 돌이켜야 되니까요.
회개라는 말이 있는 데 히브리어로는 ‘슈브’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돌이키다’라는 말입니다. 하던 짓을 멈추어서 돌아서는 것!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뉘우쳤다’라는 이 말은 마치 하나님이 회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됩니다. 여기서 나오는 ‘뉘우쳤다’로 번역된 ‘와인나헴’이라는 말은 ‘그가 돌이키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숨을 헐떡이다 신음하다, 슬퍼하다, 위로하다, 회개하다는 의미들이 있는 단어입니다.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숨을 헐떡이시며 신음하시고 슬퍼하시는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단어입니다.
예배가 무엇이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굴을 돌이켜 주시는 것입니다. 외면했던 얼굴을 다시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위로하시며 은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법대로, 정의대로 행하시지 않고 그분이 완전하지 못한 것처럼 대우를 받으시더라도 고통 가운데 뜻을 돌이키는 것, 그것이 예배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갈등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 정의 이것이 동시에 충족되는 기회를 우리가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어야 되는데. 그 죄를 대신 담당해서 죄의 대가를 치루는 제사가 예배 속에서는 필수적으로 진행됩니다. 8절에 보면 제단을 쌓으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에 있는 제사를 보면 무수한 짐승이 피 흘려 죽게 되쟎아요.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는 요세푸스라는 역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그 제물의 피가 예루살렘 성전부터 강물처럼 흘러내렸다고 합니다. 특히 유월절 절기 같은 때가 되면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왜 그렇게 피 바다가 되어야 하느냐?”하는 의문이 듭니다. 하나님의 그 진멸해 나가는 것을 돌이켜서 대신 짐승의 피로 만족해하시는 것이죠. 인간의 죄악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통해서 대신 다른 희생의 제물을 제단에 드림으로 피흘리게 해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동시에 충족시키기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당신의 가던 길을 멈추시고 돌이키시는 순간입니다. 예배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주어진 기회입니다.
16절 보시죠. “다윗이 눈을 들어보매 여호와의 사자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편을 가리켰는지라 다윗이 장로들로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16절)” 지금 이렇게 땅에 엎드려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할 기회를 찾는 것은 무엇이냐면 지금 천사가 심판을 멈추고 잠깐 칼을 빼들고 서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잊지 않아야 됩니다. 여러분 예배드리는 것이 은혜라는 것이 생각이 됩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주일날 예배를 안드리게 되면 죄의 멸망되어 가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습니다. 주일날 예배에 오면 주중에 죄 지었던 발걸음이 멈추어 지고, 하나님 앞에 다시 돌이키게 되고, 엎드리고 베옷을 입는 기회가 다윗에게처럼 다시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예배에 한 주일 동안 빠지게 되면 2주 동안 죄를 연속적으로 범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멸망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진행됩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재난들이, 멸망의 사건들이 우리를 예배로 재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베옷을 입고 땅에 엎드리는 것, 무서운 심판의 칼날을 볼 때 다윗이 진정한 예배를 드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미국의 9.11테러 사건 이후 미 사립과 공립 고등학교에 예배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의 헌법에 의해서, 특별히 케네디 대통령 당시에 학교에서 성경 가르치는 것을 못하게 하고 예배를 금지시켰습니다. 공적인 예배를, 기도회와 같은 것을 학교에서 못하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의 자유가 있는데 기독교 신앙을 안 가진 사람도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유였습니다. 그 이후로 청소년의 총기 난사 사건, 음주나, 낙태나, 마약의 문제 등 사건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강도가 강화되었습니다. 예배가 멈추니까 사회가 급속도로 타락하게 되고 청소년들의 많은 수가 멸망의 자리로 뛰쳐나가는 그런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9.11일 테러사건 이후로 청소년들 사이에 두려움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학교에서 학생들의 이 두려움을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인 공황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대책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학교에서 공적인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교사들이 자발적인 기도회를 하고 그리고는 교사들의 기도회 모습을 방송으로 교내에 내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전부 다 헌법에 위배되고, 주 정부 헌법에도 위배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을 아는 종교 자유를 부르짖는 민간단체에서도 여기에 반론을 재기하지 못했습니다. 한 군데에서 반론을 재기했다가 엄청나게 온 국민들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예배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이 재난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위에 은혜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심판을 멈추고 칼을 높이 천사가 쳐들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즉 하나님께서 슬픔으로 숨을 헐떡이시는 그 신음하시는 순간에 납작 엎드릴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죠. 만약 하나님의 심판이 그대로 임한다면 예배드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죄악 중에 우리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주도자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우리는 예배를 기쁘게 감사함으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2. 예배의 대가 (20-25절):
두 번째, 예배의 대가입니다. 22절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오르난에게 이르되 이 타작하는 곳을 내게 붙이라 너는 상당한 값으로 붙이라 내가 여호와를 위하여 여기 한 단을 쌓으리니 그리하면 온역이 백성 중에서 그치리라 (22절)”여기 보면 다윗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이것도 앞의 18절을 살펴보면 그렇게 천사의 심판이 멈추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갓이라는 선견자에게 이 재앙을 피하는 온전한 예배란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18잘을 보시면,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가서 빨리 제사를 드려라 번제를 드려라 그러면 이 재앙이 멈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주도적으로 가르쳐 주셨을 때, 그럴 때 다윗의 반응이 무엇이냐면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가서 그 오르난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상당한 값으로 내게 넘기라”(22절). 타작하는 이 마당 자체를 다윗에게 넘기라는 겁니다. 자기가 값을 줄테니까 예배를 드리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르난이 23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오르난이 다윗에게 고하되 왕은 취하소서 내 주 왕의 좋게 여기시는 대로 행하소서 보소서 내가 이것들을 드리나이다 소들은 번제물로, 곡식 떠는 기계는 화목으로, 밀은 소제물로 삼으시기 위하여 다 드리나이다(23절)”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엇이냐면 소들은 번제로 드리고, 곡식을 떠는 기계는 당시에 나무로 만들어 졌을 것입니다. 그 기계들을 화목으로 다 태워서 들리고, 그 다음에 밀, 자기들의 먹어야 될 식량을 소제물로 삼아서 하나님께 마음껏 예배드리라고 합니다. “다 그냥 가지십시오.” 그렇게 오르난이 다윗에게 바치면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랬더니 다윗이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24절을 보세요. “다윗 왕이 오르난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결단코 상당한 값으로 사리라 내가 여호와께 드리려고 네 물건을 취하지 아니하겠고 값없이는 번제를 드리지도 아니하리라 하고(24절).” 번제를 드리는데 내가 대가를 치루겠다, 내가 값을 치루고, 내가 사서, 내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를 드릴 때 반드시 내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이 있어야 됩니다. 내 물질이 가야 되고, 내 시간이 가야 되고, 내 재능이 가야 됩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냥 다윗은 얼마든지 왕이기 때문에 오르난의 이런 희생을 그대로 그냥 봉사로 받아들이고 남이 헎신한 그것을 가지고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손해 하나도 안보고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내가 대가를 다 치루겠다”, 그리고서 25절에 보면 금 600세겔을 달아서 오르난에게 대가를 치루고 예배를 드립니다.
여러분 예배를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배는 내 생명과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여기에 보면 너희 몸을 ...제사로 드리라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영적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몸을 드리는데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예배이면서 영적 예배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라즈니시의 「행복론」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돼지가 암소에게 자기가 얼마나 인기가 없는가 하고 한탄하였습니다. “참 불공평하다. 인간들은 착한 것을 이야기 할 때 소라고 비유하고 못되고, 욕심 많고, 나쁜 것을 비유할 때는 '돼지같다'고 한다.” 그리고는 돼지는 또 소에게 말합니다. "너는 우유와 크림을 준다. 그러나 나는 더욱 많이 준다. 나는 베이컨과 햄을 주고 털을 주고 그들은 심지어 내 발을 소금에 절여 먹기도 한다. 그런데도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돼지일 뿐이다. 왜 사람들은 너만 좋아하고 나는 좋아하지 않는 걸까?" 암소는 잠시 눈을 껌뻑 껌뻑하고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글쎄, 아마 나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나의 가진 것을 주기 때문일 꺼야. 그렇지만 너희 돼지들은 죽어서야 주잖아."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죽을 때, 내게 다 필요가 없을 때, 내 삶에서 무의미한 것, 죽은 시간들, 죽은 것들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예배가 안됩니다. 산제사로 드려져야 됩니다. 내가 가진 재능과 시간과 가장 고귀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그것이 산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기꺼이 대가를 치루면서 예배드릴 준비가 돼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 받으셨던 감격적인 예배가 창세기 22장에 나오는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제사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도적이었습니다. 네 아들 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오늘 똑같이 그랬을 때 아브라함이 기꺼이 자기의 독자 이삭을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멈추라 하시고 받은 것으로 여기시고 그를 축복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이삭과 같은 최고의 보물, 가장 값진 것, 하나님 앞에 대가를 치르면서 내려놓을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한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이 이것은 도저히 안되겠는데요” 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아직까지 예배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가를 치루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은 철저히 대가를 요구하는 예배를 원하실까? 다윗은 또 왜 그렇게 꼭 대가를 치루면서 예배를 드렸을까? 실제로 하나님은 대가를 치루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최고의 것으로 주셨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독생자 예수를 우리를 위해서 제물로 삼으시고 십자가에서 번제처럼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에게 정당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예배는 그분의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분이 뜻을 돌이키시고 뉘우쳐서 우리를 징벌치 않으시고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가진 귀한 것으로 그 은혜에 보답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배를 소홀히 여기시지 마시지 바랍니다.
3. 예배의 결과 (26-27절):
예배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응답받은 예배인데 그 예배의 축복은 무엇이냐면 심판의 칼이 칼집에 꽂아 지는 것입니다. 26-27절 같이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사자를 명하시매 저가 칼을 집에 꽂았더라 (26-27절)” 멈추었지만 예배가 응답받는 예배가 되지 않으면, 칼을 뽑아 든 것이 멈추었지만 예배가 응답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칼이 칼집에 꽂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다시 심판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멸망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응답받지 않는 예배는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응답 받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천사에게 명령하셔서 “칼을 칼집에 꽂으라” 이제 완전히 진노가 멈추게 됩니다. 예배는, 온전한 예배는, 대가를 치루는 예배는 이렇게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예배의 최종적인 결과, 가장 큰 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 겸비한 인간이라는 놀라운 복을 받게 됩니다. 한번 보세요. 30절 “다윗이 여호와의 사자의 칼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 앞에 가서 하나님께 묻지 못함이라 (30절)” 여러분 잘 보세요. 감히 하나님 앞에 가서 묻지 못할 정도로 겸비한,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예배에 응답의 결과가 이루어집니다. 내가 하나님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이 생기는 것이 바르게 예배드리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 30절과 대조되는 다윗의 모습이 13절입니다. 13절 같이 보겠습니다.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13절)” 하나님의 손에 빠지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 했습니다. 사람의 손에 빠지는 것은 굉장히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의 손에 빠지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이 나중에 어떻게 바뀝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도 바르게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는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사람 눈치보고,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는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하나님 두려운 줄은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손에는 혼은 나도, 사람한테는 창피한 꼴 당하기 싫어요.” 라고 합니다. 기도는 제목도 “하나님 이것을 좀 면하게 해 주세요.”이렇게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보고 있고 알고 있다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은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이 내 실수를 아는 것만 두려워하게 됩니다. 예배를 잘못 드리게 되면 그런 위선과 외식이 나오게 됩니다. 다윗이 이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쉽게 하나님의 손에 빠져드는 것은 괜찮다고 하였던 사람이, 감히 무서워서 기브온 산당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이제 이 번제단을 붙들고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베옷을 입고 예배하는 심정이 됩니다.
이것이 왜 위대하냐면 다윗이 왕이 아닙니까? 두려운 사람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까? 누가 왕을 컨트롤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왕이 두려운 존재, 신이, 하나님이 생긴 것입니다. 예배는 아무리 높은 사람도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낮출 수 있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정말 이 민족에 재앙에 멈추는, 이 예배의 은혜는 무엇이냐면 왕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왕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있을 때 그 민족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아니 왕이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백성들이야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재판관이 없어도 경찰이 없어도 교사가 없어도 두려움으로 바르게 행하고 말하는 사회가 되리 것입니다. 예배는 이렇게 중요합니다.
사실 3-4절에 보면 요압이 왕을 말렸습니다. 백성의 계수를 세고 교만해질 때 요압이 말리지 않았습니까? “왕이시여 왜 그런 화를 자초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왜 숫자를 세십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했는데도 4절에 보면 왕이 요압을 재촉해서 명령을 했습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몰랐습니다. 그랬는데 이제 30절에 보니까 예배를 드리고 나서 다윗이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정말 예배의 결과가 뭘까를 생각해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진정 온전한 예배는 재앙을 멈추게 하고 심판을 멈추게 한다는 이 은혜와 또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1970년 4월 아폴로 13호
여러 해 전 달나라를 향하여 아폴로13호를 쏘아 올릴 때에 미국의 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아폴로13호는 현대 과학의 걸작품입니다. 이것은 매우 정교하면서도 완벽합니다. 이것이 고장 날 확률은 백만분의 일입니다." 모든 사람의 확신 속에 아폴로13호는 달나라를 향하여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지구로부터 2만 마일을 벗어나지 못한 지역에서 산소통이 터지는 고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돌아올 방법도 막막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미국 텍사스 휴스톤에 있는 우주 지휘소에 비상연락을 취하고 회신을 기다릴 수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휴스톤에서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2만 마일이나 떨어진 우주선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우주 지휘소에서는 다만 북극성을 바라보며 방향을 잡아서 돌아오라고 회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영원한 우주의 미아가 될 위험에 빠진 것입니다. 그때에 미국의 대통령은 전 국민에게 함께 아침 9시에 기도하자고 호소했습니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군인도, 어린이도, 온 국민이 함께 기도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폴로13호가 무사히 태평양에 떨어진 것입니다. 구조된 우주 비행사는 배에 오르자마자 군목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그 주간 타임지 표지로 크게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우주 비행사 중의 한 사람인 스위저트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지구에 계신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기도의 힘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아폴로13호 사건에서 인류는 인간의 능력과 과학의 한계를 배웠습니다. 이 사고는 확률 상 100만분의 1에 속하는 사고였다고 합니다. 미국 상원의 결의로 닉슨 대통령을 비롯해서 우주 비행사의 무사 귀환을 위해 4월 19일 9시를 기하여 온 국민이 기도를 했습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의 조찬 기도회 때 레너드 국방 장관은 그의 간증에서 "미국의 국방의 힘, 경제의 힘, 과학의 힘은 사상 최강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와 은총을 떠나서는 모두 무(無)에 가까운 것입니다." 라고 이렇게 인상적인 말을 했습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는 예배 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모든 과학이 총 집약된 우주 발사기지에서 합심기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휴스턴의 우주 과학기지만큼 여러분의 삶이 완벽하게 잘 짜여져 있습니까? 백만 불의 일의 오차도 없는 인생이십니까? 빈틈이 없습니까? 얼마나 엉성하게 살아갑니까? 아침에 먹었던 생각 저녁에 다 달라지고, 전화하면서 막 생각이 바뀌고, 결정이 막 뒤집어지고, 엉망징찬이 삶인데, 하나님 앞에 예배 없이, 기도 없이, 그분의 은혜 없이 어떻게 여러분 재앙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아세요.
아침에 눈을 뜨면 저는 그렇게 합니다. 침대에서 또르륵 굴러 무릎이 먼저 바닥에 닿게 해서 엎드려서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는 순간 저는 예배하는 순간입니다. 잠이 깨는 순간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어떻습니까? 눈을 처음 뜨는 순간에 예배하십시오. 재앙을 벗어나는 길입니다. 마지막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그분을 경외함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가능하다면 새벽기도! 예배의 기회가 얼마나 큰 은혜예요. 그 새벽기도 나오는 순간은 여호와의 사자가 멸망시키려 가는 길을 멈춘 자리 아닙니까? 수요 예배, 금요 심야 기도회, 주일 예배! 가능하면 예배로 하나님께 기쁘게 해드리십시오. 대가를 치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해지고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재앙들이 다 제거 되는 그러한 축복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