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사명의 땅으로 - 교회를 사임한 지 육개월 후 서류정리를 위해 여수를 방문했는데 후임목사를 두번째 대면했다.
어느 집사님이 말했다. "전도사님과 생각과 일하는 방식이 많이 달라요!"
양전도사는 아는 사람이 많아 후원이 넘칠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재까지 후원이 전혀 없다는 정장로님의 전언을 듣고 여수교회가 부랴부랴 40만 원 선교비를 책정해서 보내왔다.
일년 쯤 지나서부터 자기가 아는 사람을 후원하겠다고 재직들을 종용해서 이년 쯤부터 선교비를 끊었다.
드디어 수속이 완료되어 비자가 나왔다.
해당국의 비자가 나오지 않으면 이웃국가라도 들어가라는 말이 있었다.
얼마나 비자를 기다리기에 애가 탔으면...
먼저 남자들이 7-8명 먼저 들어가기로 했다.
인천항에서 30여 시간을 국제 여객선을 타고 천진으로 향했다.
선상에서 사역자를 만나 사귀었는데
난생 처음 밟아보는 광활한 대륙의 땅!
땅에 입을 맞추지는 않았지만 감격스러웠다!
선상에서 중국어 책을 열심히 읽는 교수와 사역자 두 분을 만나 사궜는데, 부두에서 난감한 일이 생겼다.
우리 팀의 짐이 많아 협력해서 수레에 싣고 가는데 현지인 왈자인듯한 남자가 거들겠다고 해서 만류했는데 자기가 손을 댔으니 돈을 달라고 생떼를 부린다.
우리는 중국어를 못하기에 꿀먹은 벙어리 신세인데 아마 외국인이기에 생떼이리라!
예의 중국어 교수는 한마디도 못하고...
사역자가 "내 친구들인데 왜그러냐?"고 야무지게 말하니 아무소리를 못하고 사라졌다.
아마 그를 본토인으로 알았나보다.
정신이 바짝들었다!
현지에서 통하는 실용회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세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호텔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천진역에서 연길까지 30시간에 주파하는 열차에 탔다.
당시 중국열차는 네 종류의 분류가 있다.
잉쭈어(딱딱한 의자), 롼쭈어(부드러운 의자), 잉워(딱딱한 침대로 삼층 구조), 롼워(푹신한 침대로 이층 구조)이다.
잉워를 탔는데 열차칸이 중국어 특유의 성조로 매우 시끄럽고, 기가 막힌 것은 담배를 어찌나 피워대는지 글자 그대로 오소리 굴속이다.
게다가 남녀 모두 해바라기 씨를 까먹고 껍질을 수북히 버리는데 아침에 차장이 빗자루로 쓸어내는데 그 양이 놀라우리만큼 많다.
취침할 시각이 되니 젊은 여성도 겉옷을 벗어 한쪽으로 개어놓고 앞에서 빤히 보이는데도 태연히 빨간 내복만 입고 자는 모습이 문화 충격이다.
허위허위 달려 마침내 연길역에 닿아 선발대 사역자들과 뜨거운 포옹을 했다.
그들이 먼저 세낸 아파트에 우선 거주했는데 상당히 고급 아파트인데도 창문과 대문이 나무로 한겹 창문이어서 겨울 평균기온이 영하 20도 정도엔 창문에 10센티 두께의 얼음이 붙어 얼어 있다.
한국은 00아파트 101동505호 하면 어린이도 쉽게 찿는다.
하지만 이곳은 00길, 00후통(戶洞), 0단원, 0번째 통로, 0층, 이렇게 복잡하니 몆번째 찾아가도 매번 헷갈려 한국식으로 아예 몇동 몇호를 크게 써줄까 생각도 했다.
고층 이파트는 없고 오층 아파트가 대부분인데 바닥 난방방식이 아니라 공기를 데우는 방식(난치ㆍ루안치)이다.
깜짝 놀란 사실은 아파트 분양시 골조만 분양한다는 것이다.
콘크리트 벽채만 팔기에 주인이 대문부터 주방, 화장실, 천정, 바닥, 벽지 등 내부 인테리어를 몽땅해야 했다.
변기가 없는 화장실이라니 황당하다!
시내 중심지는 아파트가 있는데 조금만 외곽으로 가면 창고식으로 길다란 붉거나 회색 기와가 입혀진 써까래 지붕이 있는 집을 한칸씩 막아 한 가정씩 나란히 사는
평방집이 대부분이다.
수도가 집 밖에 설치되어 있어 겨울철이면 씻기가 어려울듯 하다.
보통 아파트나 평방집과 나란히 작은 창고가 길다랗게 지어져 있는데, 내부는 지하실이 파져있어 겨울철 채소나 곡식을 저장하게 되어 있다.
평방집 내부는 일미터 쯤 깊게 파서 석탄을 때는 콘크리트 아궁이와 솥으로 요리와 구들 난방을 한다.
추운 겨울 열손실을 최소로 하고 난방하는데 지혜롭게 보인다.
석탄을 난방연료로 쓰는 고로 매케한 연기가 코를 찌르고 스모그가 너무 심해 감기 등 호흡기 질병에 걸리면 온 겨울 내내 낳지 않는 경우도 있단다.
한번은 눈에 석탄가루가 날려 들어와 생각없이 비볐는데 너무 따가와 안과에 갔더니 안구 수정체 부분이 몇 밀리 찢어졌단다! 햐!
도시의 대로와 골목길이 온통 얼음으로 포장된듯 아예 얼음 도로여서 중앙선도 보이질 않고 인도와 차도를 구분않고 마음대로 다니고 신호등도 대로를 빼고는 없어 아무곳이나 사람들이 떼를 뭉쳐 횡단해도 별 사고도 없이 차와 자전거가 뒤섞어 잘도 다녔다.
봄이 되어 얼음이 녹으니 대로는 포장되어 있는데 골목길은 비포장 흙길이어서 차가 다닐 때마다 흙먼지가 날린다.
곳곳에 양고기 꼬지 뀀점이 있고 자전거 살을 날카롭게 해서 양고기를 잘게 썰어 꿔서 양념을 발라 구워 파는데, 한개에 우리돈 백원에 두어개를 주는데 입맛에 맞고 매우 맛있다!
거리의 간판이 모두 한자와 한글로 병기되어 있다.
"꼼쀼따" 라고 써있는 간판이 인상적이다.
건물 옥상에 큰 붉은 글씨로 "위대한 사회주의 건설..." 어쩌고 써있는 플랭카드에 가슴이 섬찟했다.
거리의 이름이 특이하다. 동서로 뻗어 있는 길을 인민로(路) 등으로, 남북으로 난 길을 동서가(街) 등으로 불러 매우 과학적이라고 생각했다.
신호등이 가끔 보이는데 차나 사람이나 무시하기 일쑤이다.
유일한 백화점 입구가 찬바람을 막기 위해 두터운 국방색 천으로 투박하게 가려져 있다.
내부에 가면 상품이 진열되어 있다기 보단 쌓여 있고 직원들은 무뚝뚝하다.
심지어 비닐 포장을 뜯어 내용물을 보게 되면 무조건 사야 한단다! ㅋ
백화점 앞 최고의 번화가에 조선 랭면집의 냉면이 맛있고 한국의 두배 쯤 양이 많은데 300, 500원 짜리여서 자주 이용했다.
눈덮인 연길공원은 동물원과 겸했는데 동물은 몇마리 없고 앙상한 볼품없는 나무만 을씨년스럽게 서있다.
처음엔 동역자들과 조깅을 했고, 혼자 조선족이 많이 사는 비교적 현대적인 건물이 많은 서편에서 한족이 많이 살고 평방집이 많고 어수선하고 복잡한 동편까지 2-3키로를 걸으며 그 땅을 위해 기도했다!
자전거가 많이 저렴하다. 30만 원쯤 하는 알미늄 중국산 제품을 15만 원에 사서 3-4키로 떨어진 눈덮인 모아산에 가서 눈 위를 달리며, 구르며 설원을 만끽했다.
아무런 즐길거리가 없는 이곳에 청춘의 끓는 피를 눈밭에서라도 식혀야 하지 않을까?
현지인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왠 이상한 한국녀석이 평생 눈구경 못했는지 강아지 같이 눈에서 달리며 구르는 꼴이라니! 사람은 맞는 모양이다! 자전거를 탈 줄 아니!"
21. 사명의 땅으로 2 - 합작병원의 원장이 우리를 초청해서 간단한 선물을 가지고 방문해서 내어오는 손님 상을 보고 찬탄을 금치 못했다.
큰 교잣상에 요리가 이층으로 쌓여 있질 않은가?
이곳에서는 손님 대접 시 체면을 중시한단다.
짝수로 이층은 보통이며 한달 봉급이 당시 인민폐 700원 정도(한국돈 칠만 원)인데 한끼 식사 대접에 몽땅 쓰기도 한단다.
이정도는 돼야 손님이 "내가 이집에서 대접 좀 받았구나!" 생각하고, 주인은 "대접 좀 해서 체면은 세웠다!"고 생각한단다.
어느 눈치없는 손님이 차린 음식을 말끔히 먹자 남은 음식을 먹으려고 기다리는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대나 어쨌대나!
가족 먼저 삼개월 전에 입국했기에 가족이 많이 그리웠다.
홀아비들의 꼬질꼬질한 모습들이 팀원들에게 역력했다.
마침내 비자문제가 해결되어 가족이 연길공항으로 입국했다! 할렐루야!
우리는 이산가족이 상봉하는듯 법석을 떨었다.
못보는 동안 부쩍 어른스러운 바울이가 "아빠! 나 좀 봐!" 하며 운동화를 벗어 보였다.
거기에 천불 정도의 지폐가 바닥에 깔려있다.
당시 외환문제가 명료치 않아 건축자금을 목돈으로 들여와야 해서 각자에게 분산시켰던 모양이다.
제 지혜로 그랬단다.
기특하다
개원하기 위한 건축이 마무리 되고 침대 및 물품들이 반입되기 시작하자 우리 젊은 팀원들은 초인적인 힘으로 그 힘든 일들을 감당해냈다.
엠블런스 두 대가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대련항으로 배편으로 도착하자 현지직원 한 명과 팀원 둘이 대련으로 가서 연길까지 낮에만 10시간씩 운전해서 삼일 만에 도착했다.
총 30시간 운전한 셈이다.
밤에는 강도가 있어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엠블런스가 깨끗한 새 차여서 병원 홍보차 일부러 경광등을 번쩍이며 시내를 누비고 다녀 주민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병원 건물이 완공되었는데 특히 화장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세식이지만 쪼그려 앉는 방식이고, 옆칸이 고개만 들면 보이는 눈높이까지만 벽돌이 쌓였고, 더 심각한 것은 앞 문이 안달렸다는 것이다!
한 한국인 간호사가 볼일을 보는데 사람이 들어오더란다.
마침 신문을 들고 있었는데 얼굴을 가려야 할지, 아래를 가려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대나 어쨌대나!
ㅋ
중국의 화장실 문화는 독특하다!
평방집의 옛동네는 남녀가 나뉜 공동 퍼세식 화장실인데 공히 앞문이 없다.
여름엔 파리와 모기가 장난이 아니다.
할빈 지역의 시골역에서 화장실을 찾았는데 열 평쯤 되는 큰 홀에 가운데 가로로 긴 홈이 파여 있고 물이 앞에서 흘렀는데 먼저 온 사람부터 앞쪽부터 쪼그려 앉아 볼 일을 본다.
뒷 사람은 앞 사람의 볼일 보는 리얼한 모습을 그대로(?), 본의 아니게(?) 훔쳐보게 되고... ㅋ
북경의 화장실은 최고의 값진 재료로 유명하다.
모택동 시절엔가 급격히 늘어난 인구에 비례하여 많은 화장실을 지어야 했는데 재료가 부족해서 주변의 만리장성의 수천 년씩된 문화재급 벽돌을 빼다가 화장실을 지었단다! ㅋ
우리가 사역을 시작할 즈음 연길에 신장개업한 기아자동차 정비공장장이 출근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독침을 맞고 현장에서 즉사했다.
당국은 북조선의 간첩의 소행으로 추정했으나 밝혀진 바는 없었다.
이마 최근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인해 한국의 사업가들이 물밀듯 들어오는데 대한 경고인성 싶다는 여론이 있다.
얼마 후에 단독으로 나와 사업을 하던 한국인이 아파트 문 앞에서 대기하던 괴한에게 뒤에서 예리한 흉기로 심장을 찔려 절명했다.
혹자는 전문가의 솜씨란다. 일반적으로 뒤에서 찔러 심장을 관통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고도의 훈련을 거친 살인 전문가급 기술이란다!
천부적인 사람들과 친화력이 뛰어난 아내는 나이 지긋한 한족 반장 아줌마를 사궜는데 벽을 맞댄 아파트에 북조선 특무대가 살고 있단다.
안방 장롱 뒤를 보니 아뿔사! 직경 십센티나 되는 구멍이 뻥 뚫려있는 것이 아닌가?
오금이 저려왔다!
주말에는 몇 친한 가족들이 어울려 모아산 뒷편의 전형적인 조선족 마을에 놀러 가곤 했다.
한번은 토종닭 한마리를 가마솥에 삶고 밥을 지어 달래서 먹었는데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밥맛 그대로였다.
당시 닭 한마리에 삼천원 정도인데 감사하다고 이만원을 드렸다.
식사를 하다보니 그 댁에 시계가 없어 늦게 오신 분들에게 부탁해서 벽시계를 하나 선물해 드렸더니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나중에 그댁 주인이 간절히 농사지을 소를 한마리 사달라고 부탁했다.
남의 소로 쟁기질 삯을 주고나면 농사지어도 남는 것이 없단다.
당시 소 한마리에 오십만 원 정도 하는데 한 사람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것 보다 여러 명에게 혜택을 골고루 주는 방침 때문에 도와주지 못했다.
중국어 개인교사의 언니 부부를 소개받아 식사할 기회를 가졌다.
복음 전할 기회를 얻기 위해 최대한 인맥을 동원할 필요가 있어 두번째 만나 교제를 하는데 아파트를 살 돈이 부족하니 500만 원을 빌려달랬다.
겨우 두번 만나 식사한 정도의 인간관계인데 그 큰돈을 쉽게 빌려달란 사실도 황당했지만, 그 돈은 서민이 만져볼 수 없는 큰돈이라 갚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관계도 끊어버린단다.
결국 돈 잃고 사람 잃는 결과이기에 돈 거래는 하지말라는 것이다.
장래를 위해 지혜를 간구했다.
마침 선교비로 천 불이 왔기에 그 돈을 빌려주었더니 일주일 후 너무 적다고 되돌려 주었다.
당시 연변사회는 "정부 돈과 한국사람의 돈을 빼먹지 못하면 바보다!" 라는 말이 떠돌았다.
"사모님! 이댁에서 일하고 싶어요!"
삼십대 초반의 젊은여인이 아내를 찾아왔다.
사연을 들어보니 깊은 산골에서 입업공무원으로 일하는 남편의 봉급이 삼만 원 정도라 도저히 살아갈 수 없어 시내로 나와 한국사람을 찾아 일자리를 호소했더니 우리 집을 소개했단다.
우리 집에는 헬퍼가 필요없으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조건은 매주말은 귀가해서 남편을 만날 것이며, 차비와 시장봐 가는 비용을 우리가 댄다는 것이다.
얼마 후 시골의 시어머님 생신이 돼서 아내는 여러가지 채소와 과일, 돼지고기를 사서 들려보냈다.
한참 후에 현지인들과 집에서 성경공부를 하는데 유난히 관심을 가진 그녀에게 물었다.
"예수님을 아세요?"
"그럼요! 거듭났는데요!"
"언제부터요?"
"이댁에 와서부터요!"
할렐루야!
팀원의 중국어 개인교사가 한족 대학생을 소개했다.
시골 출신의 가난한
여대생이어서 아이들의 숙제와 한어 회화를 위해 우리 집에 입주하여 학교에 다니기로 했다.
아이들과 잘 어울어지고 한어 공부에 많은 도움을 주어 감사했다.
꾸준히 가정생활을 통해 천국문화를 소개했고, 그녀는 나중에 한국에서 신학공부를 마친 한족 목사와 결혼하여 사역을 하고 있다.
친정 식구들이 모두 예수믿게 됨은 기본이고....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