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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실 박영선 의원님 ( 영선마마)의 국정원에 대한 이야기에 공감하고..
사실 이노무 정권에서 일어날 모든 꼼수를 의심할수 밖에 없는것이 슬픕니다.
슬프게도 어쩌다 이 아름다운 대한민국땅에 MB정권과 딴나라당이 음모가 철철 넘쳐 흐르니..ㅠㅠ
그래서 엑스파일을 즐겨보던 제가 멀더와 스컬리만큼도 음모론을 그리 믿지 않았는데..
이제는 모든 행위가 음모와 꼼수로 보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꼼수에서 확인한 각종음모가 사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충분히 일어날수 있는 북한 또는 안보 위험..또는 정국을 얼어붙게 만드는..
내용을 타국과 우리나라 사례로 좀 봤습니다.. (물론 상상으로 끝나야 하고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지만요..)
괴담이라 생각하시고..들어보세요.. 그리고 제정신이 아닌 이놈의 정권이 일으킬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모든 야권에서 주시하는겁니다.
국회의사당 방화
달려라 정봉주 책에서 봉도사님이 이야기하신데로 모든 독재자들의 롤모델인 히틀러가 저지른 행위중 국회의사당 방화.
이건 정말 끔찍하죠. (국회 의사당 방화는 달려라 정봉주 책에 나오는게 아니지만 그 악랄한 독재의 롤모델 히틀러의 악랄한 음모였죠)
나치에서 저지른 죄악이고 그나마 민주적 형태인 바이마르 공화국의 종말에 히틀러가 전권을 잡았던 계기입니다.
훗날 독재정권들이 일으키는 음모설에 대부분 모델로 나옵니다.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Reichstagsbrand)은 나치 독일 정권의 수립 과정에서 발생한 핵심 사건으로 1933년 2월 27일 오후 9시 14분에 발생했다. 최초의 목격자는 의사당 근처를 지나가던 한 대학생이었다. 의사당을 지나던 중 창문이 깨지면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목격자는 즉시 화재를 신고했고, 베를린 소방대가 의사당에 도착했을 때는 의사당은 격렬하게 불타고 있었다. 소방대와 거의 동시에 도착한 경찰은 불길이 여러 곳에서 수직으로 치솟으며 동시에 발화한 것을 발견했다. 경찰은 발가벗고 건물 뒤에 움츠려 숨어 있던 마리뉘스 판 데르 루페를 발견했다. 루페는 네덜란드 출신의 공산주의자이자 실직 벽돌공으로 그 당시 최근에 독일로 넘어온 상태였다. 발견 당시 루페는 방화용 도구를 소지하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당시 국회의장), 그리고 요제프 괴벨스 등이 곧 현장에 도착했고, 화재 현장을 보자마자 괴링은 즉각 화재가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선언했으며, 공산당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하라고 소리질렀다. 아직 화재 진압 중이었고, 괴링의 이 선언으로 화재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의 방화로 그냥 굳어졌다. 수사도 하기 전에. 이때 히틀러와 함께 오페라 감상 중에 같이 현장으로 달려온 괴벨스도 그의 일기에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썼다. 히틀러는 비상 사태를 선언할 기회를 잡았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1919년)의 인권 조항 대부분을 폐지하는 의회 방화에 관한 법령 (비상사태법)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나치 지도자들은 이 의회 방화 사건이 코민테른의 행위로 밝혀졌다고 주장했으며, 범인으로 나중에 "의회 방화 사건 재판"으로 알려진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게 될 1933년 3월 초에 체포된 3명의 남자를 내세웠다. 이들의 이름은 불가리아 공산주의자들인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바실 타네프, 블라고이 포포프였다. 사실 이들을 체포한 프로이센 경찰은 이 불가리아인들이 누구인지 몰랐다. 공산주의자로 의심된다는 신고를 받고 체포했을 뿐으로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체포하고 나서야 그들이 코민테른의 중요한 인물들임을 알았다. 당시 디미트로프는 서유럽 코민테른 활동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베를린 경찰에 따르면, 루페는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방화를 했다고 자백했다고 한다. 고문 끝에, 루페는 자신의 범죄를 자백했고, 공산당 지도자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의회 방화 사건에 관한 법령에 따라 독일 공산당(KPD)은 그들이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해서 1933년 3월 1일 국회 등원을 거부당했다. 이어서 경찰과 나치의 준군사조직인 SA가 독일 내 모든 공산당 건물들을 장악했고, 공산당이 쿠테타에 사용할 무기를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공산당은 나치가 금지한 첫 번째 정당이 되었다.
언론 접근이 차단되고, 지도자들이 감옥에 수감된 상태에서 경찰과 돌격대의 공격을 당한 공산주의자들은 지리멸렬하여 체포되거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제국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공산주의자들과 몇몇 SPD 당원들은SA가 막아서는 바람에 국회 등원을 할 수 없었다.
나치는 자신들의 득표율을 44%까지 올릴 수 있었고, 그 표들은 나치의 우호 정당인 독일 국가인민당의 8%를 합쳐 52%로 다수당이 되게 해주었다. 그러나 3월 선거는 나치에게는 마지막으로 승리한 선거였지만,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나치는 자신들만으로 50~55%의 득표율을 기대했다. 결국 나치는 전권위임법을 통과시키는데 필요한 2/3 이상 다수표를 확보하기 위해 남은 정당들을 협박하거나 회유하여 찬성표를 던지도록 했고, 그 결과 대부분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류되었다. 계속되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사회민주주의자들만이 전권위임법에 반대 투표를 했다. 다음 달, 모든 비 나치 정당들은 불법화되거나 체포와 강제수용소 수감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해산했다.
재판에서 판 데어 루페는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1934년 1월 10일에 참수되었는데, 이 날은 그의 25번째 생일 3일 전이었다. 나치는 루페가 공산주의 음모가 집단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이 음모가 집단이 국회 의사당을 불태우고 봉기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나치는 화재 다음 날 새벽부터 각지의 공산당 본부를 경찰과 돌격대를 동원하여 압수 수색하였고 이 과정에서 봉기 음모를 입증하는 다수의 문서를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확보되었다는 문서"들은 증거로써 재판정에 제출된 적도 없고, 공개된 적도 없다.
반면에, 공산주의자들은 루페가 자신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나치 음모단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루페는 어떤 목소리가 나치 체제 하에서 독일 노동계급의 상황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의사당을 불태우자고 그에게 말했다면서 단독범행이라고 계속 주장했다.
주요 범죄 용의자였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디미트로프는 검사들을 상대로 법정에서 논쟁을 통해 싸웠으며, 자기 자신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법정은 곧 공산주의와 나치즘 간에 투쟁의 장이 되어버렸다. 결국 그는 자기 자신과 공산주의자 동지들이 무죄임을 증명했고, 석방되었다. 거기에 더해, 디미트로프는 방화자가 나치당의 주요 멤버인 것도 증명해보였다.
괴링과 괴벨스 등은 라디오를 통해 공산주의자가 저지른 짓이라고 주장했고, 게슈타포와 형사경찰(KRIPO)이 공산당 본부인 카를 리프네히트관을 습격하여 100파운드에 달하는 폭력봉기 계획과 관련한 문건을 압수했다고 발표하기도 했지만, 재판 과정에서 이 증거물들이 법정에 증거물로 제출되지 않았다. 압수했다는 주장만 제출되었다.
히틀러는 재판 결과에 격노했다. 그는 앞으로는 반역죄에 대해서는 오직 새로 설립될 민족재판소(Volksgerichtshof)에서 다루라고 명령했다. 후에 이 재판소는 롤란트 프라이슬러가 이끄는 동안 수많은 악명을 남기게 된다.
한 돌격대원의 폭로와 사건의 재구성
화재 발생 후 경찰 보고에 따르면 화재 발생 시간인 9시 14분에서 얼마 되지 않아 도착한 경찰과 소방대는 발화점이 60~65개소이고, 건물 전체로 흩어져 있는 점에 놀랐다. 연기를 내지 않고 치솟는 불기둥도 있었다. 경찰과 소방대는 이 불길이 인화재에 의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루페 혼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나치의 주장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주변 정황 또한 나치의 주장을 의심하게 했다.
2월 22일, 화재 발생 5일 전에 괴링은 SA를 보조 경찰로 격상시켰다. 경찰과 늘 대립 관계였던 SA와 SS(아직 SA의 하부조직이었다)가 경찰을 지원하는 반(半) 국가조직이 된 것이다. 또 화재는 선거 기간 중에 발생했다. 정확하게는 선거 1주일 전이었다. 2월 10일, 괴벨스는 선거 기간 중 유세 활동에 대한 상세한 계획을 작성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히틀러는 비행기까지 동원해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유세 활동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 계획서에는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아무런 계획이 잡혀있지 않았다. 특히 27일에는 아무런 연설도 없다고 공식적으로 못을 박아놓기까지 했던 것이다.
사건 후인 1933년 3월, 노이루핀에서 "라르"라는 이름의 SA 대원이 강도 혐의로 체포되었다. 라르는 판사에게 지난 2월의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언급하며 폭로하지 않는 대가로 강도죄를 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때 입회 서기인인 라이네킹이 이 사실을 기록하여 상부에 보고했고, 이 사실은 게슈타포에 통지되었다. 게슈타포는 즉시 라르를 체포했고, 수일 후 라르는 어느 밭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주장한 사건의 전말은 2월 어느 날 밤, 돌격대 사령관 에른스트 룀의 충복인 카를 에른스트가 지휘하는 호위대에서 10명의 대원을 선발했다. 라르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2월 27일에 국회의장 공관으로 가서 대기했다. 당시 국회의장은 헤르만 괴링이었다. 오후 9시, 에른스트가 그들을 이끌고 의사당으로 가는 통로를 통해 의사당에 들어갔다. 그들은 각자 방화 연료가 들은 통을 2~3개씩 지급받았고, 그날 밤 9시에 에른스트의 신호로 일제히 불을 질렀다. 10분만에 작업을 마친 그들은 왔던 길로 되돌아갔고, 그 다음에 루페가 주머니에 성냥 및 점화재료를 소지한 채 의사당으로 들여보내졌다는 것이다. 이 음모에는 요제프 괴벨스가 아이디어를 냈고, 헤르만 괴링이 협조했으며, 실무 지휘는 룀의 수하인 에른스트가 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들은 라이네킹이란 서기관은 잽싸게 게슈타포에 알림으로써 초고속 승진을 하기도 했으나 나중에 비밀리에 사살당했다. 카를 에른스트는 룀 숙청 사건 당시 총살되었고, 라르를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도 룀 숙청 때에 암살되었다고 한다.
공항테러 (자작극이든 북한이 일으키든.. )
기억하시는 분은 기억하실런지 모르겠는데..1986년 아시안게임 개막을 불과 1주일 앞두고 폭탄테러가 일어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당시 아시안게임을 안전하게 개막하자는 분위기와 당시 대통령 직선제 개헌운동 분위기가 일순간 가라앉았죠.
여러가지 설이 있었는데 전두환정권의 자작극 , 북한공작원의 행위.또는 북한의 사주를 받은 제3국 테러리스트의 행위.
이 사건은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아있습니다. 전두환정권도 북한이 하지 않았겠느냐?추측만 하고 이때 북한이 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몇명 고문해서 엉성한 간첩단 사건이라도 만들수 있었는데 ..워낙 미제라서 당시 안기부에서도 도저히 누가했는지 추측만
하고 증거가 없었다 합니다.
추측으로는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가 조사한바로는 북한으로부터 청부받은 아부 니달이 슐레이만 삼린에게 지시하고
슐레이만 삼린이 아부 이브라힘에게 폭탄제조를 지시해 서독 적군파 프레데리케 크라베에게 폭탄운반 임무를 맡겨
크라베가 영국인으로 위장해 김포공항에 입국후 폭탄을 5.6번 게이트사이 쓰레기통에 놓고 홍콩으로 출국했다는 설이
일본 기자를 통해 나온것이 유일한 설입니다.
김포공항 테러
서울 아시안게임 개막을 불과 1주일 앞둔 9월 14일, 서울 김포공항 국제선 1층 청사 밖 5번과 6번 출입문 사이의 철제 쓰레기통에서 고성능 사제 시한폭탄이 갑자기 폭발, 전송객 부부 등 일가족 4명과 공항관리공단 직원 등 총 5명이 숨지고 30여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
당국은 86 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방해할 목적으로 저지른 사건으로 단정하고 북한이 파견한 테러리스트 또는 북한의 조종을 받는 국내외 테러리스트의 소행일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수사과정에서 범인은 물론 범행목적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중부지역당 사건
2012년은 1992년 이후 20년만에 총선과 대선이 돌아오는 해인데..20년전에 대선을 앞두고 당시 민자당 정권에서 여러가지 조작을 합니다.
그중 하나인 중부지역당 사건은 아직도 일부 의혹이 있습니다.
중부지역당 사건은 19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0월 6일 국가안전기획부가 "남로당 이후 최대 간첩단 사건"이라고 주장하며, 95여명을 간첩 혐의로 적발한 사건이다. 당시 안기부는 " '남한 조선노동당' 가담자 95명을 적발해 이 가운데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오씨 등 62명을 구속하고 300여명을 추적중이다"라고 발표하였다.
이 사건은 국민들의 레드 컴플렉스를 자극하였고, 당시 평민당 후보 김대중의 비서가 관여되었다는 사실을 유포시켜, 당시 여당 총재였던 김영삼 후보를 당선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대통령 선거 이후, 여러 의혹들이 나온 가운데, 법원은 '남조선 노동당'의 실체가 불분명하다고 판결하여, 의혹을 더 증폭시켰다.
2004년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의 열린우리당 이철우 의원에 대한 간첩 발언 사건으로 다시 세상에 알려졌고, 당시 안기부 차장이었던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의 성기고문 의혹도 불거져 나왔다.
이 사건은 2005년 1월 3일부터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에서 조사하여 2007년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한겨레 신문 2005년에 나온 내용입니다.
중부지역당사건' 개요ㆍ쟁점
이 사건은 '남로당 사건 이후 최대 규모의 간첩사건'으로 전국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으나, 한편에서는 92년 대선의 막바지인 10월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선거철마다 나타나는 고질적인 '북풍'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국가안전기획부는 92년 10월 6일 북한의 지령에 따라 남한에 지하당을 구축, 간첩활동을 해 온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간첩사건을 발표했다.
안기부는 남한 조선노동당을 거물간첩 이선실이 황인오를 포섭해 서울, 인천 등24개 주요 도시의 46개 기업과 단체 등 각계각층으로 구성된 300명의 조직원을 확보한 가운데 북한 노동당과 남한 대중을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해 온 비합법 지하조직으로 소개됐다.
이선실에게 포섭돼 교육 받은 황인오씨가 91년 7월 강원도 삼척의 모여관에서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을 결성했으며 산하에 강원도당, 충북도당, 충남도당 및 편집국을 두었다는 것이 당시 공안당국의 발표 내용이었다.
이 사건으로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오씨와 민중당내 지하지도부를 구축, 간첩활동을 한 손병선씨, 민중당 전 공동대표 김낙중씨, 전 민중당 정책위의장 장기표씨등 62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건은 구속자만도 62명에 이르고 수배자가 3백여명에 달하는 등 남로당 사건 이후 최대 규모의 좌익사건일 뿐 아니라, 북한 권력서열 22위의 고위 당직자 이선실이 직접 남파돼 공작을 총지휘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도 회오리 바람을 몰고 왔다.
민자당과 국민당은 국회에서 민주당 김대중 대표의 비서 이근희씨가 군사기밀문서를 유출,구속된 데 대한 책임소재를 추궁하는 한편 일부 현역 정치인들이 간첩단과 접촉했다는 정치인 연루설 등을 집중 거론, 민주당측을 공격했다.
또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민주당 부대변인 김부겸씨(현 열린우리당 의원)가간첩 이선실과 접촉해 이씨로부터 5백여만원을 건네 받은 혐의로 안기부에 구속되기도 했다.
13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사건을 두고 시각이 엇갈린다.
유선호 의원과 정형근의원은 당시 민애전 사건 성격과 고문조작 여부 등을 놓고 공방을 벌였다.
유 의원은 '민족해방애국전선(민애전)' 사건은 공안기관이 학생들의 낭만적인통일운동을 북한과 연계해 용공으로 조작한 것으로 규정했다.
반면 정 의원은 북한 간첩이 구축한 지하조직을 통해 일부 학생들이 포섭돼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간첩사건'으로 반박했다.
그는 "이 사건은 동남아의 우리 대사관에 자수한 북한 고위간첩 '은하수'의 정보 제공으로 발단이 된 것"으로 반박했다.
유 의원은 또 "당시 100여명이 넘는 사건 관계자 대부분 억울하게 고문에 의해용공조작돼 처벌됐다"며 "이 의원의 경우 연행 후 2∼3일간 주먹 쥐고 물구나무 서기 등 고문을 받았다"며 당시 고문실태에 대한 국정조사를 주장했다.
반면 정 의원은 논란에 대비해 백서까지 만들었다며 고문 조작 주장을 일축했다.
또 주범으로 거론된 황인오씨에 대한 정형근 의원의 정치입문 제의의 사실 여부와 이선실의 실체, 즉 북한 거물인 이선실과의 동명이인 여부 등도 주요 쟁점이다.
◇ 중부지역당 사건 관련 일지 - 1992.10= 안전기획부,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발표. - 98.8.15= 92년 구속기소된 사건의 주역들 중 황인오씨와 김낙중, 손병선씨 등3명 8.15특사로 형집행정지 또는 가석방. - 2000년=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서열 19위로 상승) 이선실 심장병 사망 확인. - 2004.12.14 유선호-정형근 의원 KBS 라디오 출연, '이철우 의원' 놓고 공방전. (서울/연합뉴스)
따라서 이놈의 혼이 나간 정권이 또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 생각인데.. 박영선 의원님 말대로 선관위로그파일 문제뿐 아니라 선거정국에 찬물 뿌릴 음모를 꾸밀지도 모르니 국정원에 대한 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 느끼고.. 또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서 국정원에 근무했던 민주당 의원분들도 많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문희상 의원께서도 국민의 정부에서 국정원에 계신적 있고 초대 국정원장인 이종찬 우당기념관 관장도
이종걸 의원님의 사촌이시니..충분히 과거에 중앙정보부,안기부, 국정원에서 음모를 꾸민것처럼 예측될 음모의 내용이 뭘까 거꾸로 짐작할수도 있을것입니다.
원세훈 국정원장은 군미필(하악관절염으로 1976년 면제)에 MB옆에만 있던 양반이니 꼼수는 부릴줄 알아도 정보원 출신이 아니라 서툴게 음모를 꾸미다 오히려 똠박을 쓸수도 있을겁니다. 분명히 가카는 양심에 털만 난 분이시라 뭐든지 자기
살길 찾을거고 딴나라당도 뭐든지 정국돌파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시해야 합니다.이 또라이들을...
이런분들 의견을 들어 국정원이 부릴수 있는 꼼수를 미리 예측하는거도 나쁘지 않을거라 싶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네..조만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