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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7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창세 11,1-9
복 음 : 마르 8,34-9.1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9,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크론시타트의 요한 성인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성인께서 어느 날 기도하고 있는데 악마가 찾아와서 이렇게 속삭이며 말했습니다.
“이 위선자야! 어떻게 감히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느냐?
내가 너의 생각을 다 읽었다. 너는 더러운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자 성인께서는 악마에게 별 상관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종종 “저 같은 사람이 감히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라면서 자격 없음을 들어 이야기하십니다.
겸손해 보이는 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인의 말씀처럼 그렇기 때문에 더 기도해야 했습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입으로만 자격 운운하고 있을 뿐, 어떻게든 용서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믿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유혹이 있어도, 또 때로는
온갖 분심으로 가득해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창 신부와 전화 통화할 때면 보통 30분에서 때로는 1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합니다.
특별한 대화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이 즐겁고 마음도 편안해집니다.
주님과의 대화도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벗으로 오신 주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벗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니,
주님과의 대화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에 이분을 절대로 떠나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종 커다란 착각에 빠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 대신 짊어진 키레네 사람 시몬(마르 15,21 참조)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서 따를 수 있을까요?
주님과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서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의 삶을 살면서 주님을 따르고,
또 주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전에 ‘미운오리 새끼’라는 동화를 읽었습니다.
오리 새끼들 중에 유난히 키도 크고, 털의 색이 다른 새끼가 있었습니다.
물 위에 비친 모습이 다른 새끼들과는 달랐습니다.
엄마 오리는 다른 새끼들과는 다르지만 똑같은 정성으로 키웠습니다.
어느 겨울 미운 오리 새끼는 호수로 날아온 백조를 보았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자신이 오리가 아니라 백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백조들과 함께 힘찬 날개짓으로 하늘을 날아올랐습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만화도 읽었습니다.
실력은 있지만 타고난 성격 때문에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선수들이
함께 모여 지옥 훈련을 하였습니다.
모난 성격들이 다듬어지고 외인구단은 뛰어난 성적을 올린다는 만화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미래에 대한 이상을 가진 사람은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곤 합니다.
거짓과 욕망으로 출세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사이에
나눔과 겸손으로 영원한 생명을 꿈꾸는 사람은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작년에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 기획팀’이 발족하였습니다.
보스턴, 탬파, 버지니아, 토론토에 사는 분들이 열정과 신념으로 함께 모였습니다.
일상적인 신앙생활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이상과 열정으로 신앙의 차원을 높여보려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을 개설하였습니다.
좋은 강사를 섭외하고, 홍보하고, 강의를 개설하였습니다.
개인 자격으로 하는 이분들에게 지도 사제가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고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있으니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유리처럼 반사하는 성격이 아니라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는 성격인 저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줌으로 하는 신앙 강좌 기획팀’이 발족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뉴욕에서 모여 단합대회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숙소를 구하고, 함께 미사하고, 맛있는 식사를 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기획팀은 다른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피정의 집을 선택하였습니다.
미사를 하고, 신앙 체험을 나누고, 신앙기획팀이 나갈 방향을 모색하였습니다.
제가 볼 때는 ‘미운 오리 새끼’처럼 보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벨탑’의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우화가 생각납니다.
많은 애벌레들이 아무런 이상도 없이, 목적도 없이
다른 애벌레들을 따라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앞서가는 애벌레는 끌어 내렸습니다. 따라오는 애벌레는 떨어트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강한 애벌레들만이 앞으로 앞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허무였습니다. 그 끝은 타는 목마름이었습니다.
출세,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신기루를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애벌레들은 ‘나비’를 보았습니다.
나비는 측은한 눈빛으로 애벌레에게 그 길로 가지 말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애벌레들은 나비의 눈빛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줄무늬 애벌레는 나비의 말을 듣고 욕망이라는 ‘탑’을 오르기를 포기하였습니다.
누에가 된 애벌레는 시간이 지나면서 ‘노란나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얀 나비와 함께 하늘을 날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올라가야 할 탑은 욕망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올라가야 할 탑은 증오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겸손의 누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사랑의 누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앞서가는 사람을 끌어 내리는 탑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을 밀쳐내는 탑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동료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탑을 말씀하십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탑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가지 않는 길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우리를 영적인 갈증을 풀어 주는
샘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만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죽어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변에 미운오리 새끼가 있다면 무시하지 말고 그들의 꿈과 이상을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주변에 공포의 외인구단이 있다면 그들의 꿈과 이상을 격려하면 좋겠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모습이 있다면 그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면 좋겠습니다.
누에가 되지 않는 애벌레는 결코 나비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마르코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본다면,
어제 복음까지는 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오
늘 복음에서부터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 곧 제자 되는 길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이 말씀은 “나를 따르려면”에서,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지를 확인하게 합니다.
그러니 이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것이 참된 것인지,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진정으로 원하는지를 깨닫는 일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제시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 따르기를 원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표시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려고 하는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두 가지의 표시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버리는 일’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우선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는 집과 가족
곧 소유와 사람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떠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지금 ‘자신으로부터 이미 떠났는지’,
적어도 지금 ‘자신을 버리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릇을 비웠는지보다, 무엇을 채웠는지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릇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곧 보석을 채우고 있으면 보석 그릇이 되는 것이요,
쓰레기를 채우고 있으면 쓰레기통이 되듯이,
자신을 버리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여 ‘예수님의 그릇’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나는 진정 예수님을 받아들여 따르고 있는가?
사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비울 수가 없으며,
이미 자신을 비우신 그분에 의해서 비워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빋아 들이고, 그분께 의탁하여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스스로를 비운다면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신을 실현하는 꼴이 되겠지만,
그분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는 신앙의 행위로 인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신앙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짊어질 때, 비로소 구원의 십자가가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마르 8,34)
주님!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고통을 피하지도 않으며,
없애버리거나 해결하려 하지도 않으며,
극복하거나 초월하려 하지도 않으며,
타협하거나 무관심하지도 말게 하소서!
고통과 함께 사랑하게 하소서.
고통 속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고통 가운데 계시는 당신을 통하여 사랑하게 하소서.
죄의 용서를 끌어안고 사랑의 십자가를 품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은총은
바로 십자가 신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여러모로 미성숙했던 젊은 수도자 시절,
틈만 나면 제가 몸담고 있던 공동체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입만 열면 공동체가 이게 대체 뭐냐고 투덜거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사실 교회 공동체의 근본적인 속성 가운데 두드러진 속성 하나는
‘죄인들의 모임’이란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면면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너나 할 것 없이 다 부족합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나약하고,
오늘 비록 우리가 상처투성이이고,
오늘 비록 우리가 이토록 형편없지만,
하느님 사랑에 힘입어 천천히 성화와 완성의 길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공동체의 미성숙 앞에, 때로 생기는 스캔들 앞에,
이기심 앞에, 세속성 앞에 너무 당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문제성 많은 우리를 늘 기다려주셨듯이
우리 역시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교회 공동체를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느님을 보다 가까이 따르면 따를수록,
복음 정신을 보다 철저히 실천하면 할수록 ‘희한한’ 일이 한 가지 생깁니다.
그것은 바로 그런 노력이 더해짐에 따라 십자가의 무게가 더 무거워진다는 것입니다.
상처받는 일도 많아집니다. 고통도 커져갑니다.
때로 다 벗어놓고 떠나버리고 싶습니다.
그럴수록 복음서를 펼치십시오. 복음서를 읽고 또 읽으십시오.
복음서는 갖가지 고통과 상처, 십자가에 적절한 진단과 처방전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다양한 치료제, 다양한 노하우를 우리에게 전수해줍니다.
새로운 감성으로 다시 읽은 복음서는 갖은 의혹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집착에서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희망의 길을 열어줍니다.
그러나 결국 최종적인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입니다.
십자가의 신비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입니다.
다름 아닌 십자가를 꼭 껴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용, 자아 포기가
신앙인들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잘 설명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코 복음 8장 34절)
세상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십자가를 저주합니다.
십자가만 다가오면 기겁을 하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은총은 바로 십자가 신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징표로 보내주시는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순간, 나약하고 비천한 우리의 몸은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의 인생은
언젠가 반드시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조욱현 토마스 신부
어제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 같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호된 꾸중을 들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많은 사람의 배척을 받고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그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내가 주님으로 모시고 내 입으로 부르는 주님이
진정 나에게는 누구이며, 내가 그분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무엇을 기대하며 그분을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활 태도가 바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베푸셨지만, 당신이 진정으로 가야하고,
또 그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도 항상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34절)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
자기를 버린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뜻을 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악으로 갈 수 있는 자기 자아이다.
이악한 자아를 버리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의 좋은 것까지 모두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제일 힘든 것이 그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 수 있다.
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갈 때 우리는 그분을 올바로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나 자신이지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십자가의 길은 이제 우리가 더욱 당신을 닮게 해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35절)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38절)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가장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입으셨듯이
우리도 이제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창조될 때 입은
하느님의 모습을, 즉 그리스도 아드님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
이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자신이 죽었을 때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삶이 될 것이다.
아마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닮은 우리를 아버지 앞에 영광스럽게 여기실 것이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되어있으니까 말이다.
이제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버릴 수 있고, 끊을 수 있고, 죽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분을 닮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해서 그렇게 될 수 있다.
이러한 자세로 항상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베드로가 0점을 회복할 수 있는 힌트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내가 도대체 누구냐?”
베드로가 나서 대답하였다.
“그리스도이십니다.”
채점은 없었지만 정답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정답의 내용을 밝히셨다.
“사람의 아들이 수난과 죽음을 겪어야 하며,
그러나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이다.”
베드로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펄쩍 뛰며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예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다.
베드로의 마음속뿐만 아니라 제자들 모두의 마음에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래서 베드로의 정답에 함구령을 붙이신 것이다.
베드로는 물론이고 제자들 모두가
예고의 말씀을 진정 깨닫지 못했다는 예수님의 판단 때문이었다.
따라서 베드로의 정답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채워진 답이었던 것이다.
결과는 0점이다.
오늘 복음에는 베드로가 0점을 회복할 수 있는 힌트가 들어있다.
그 힌트가 바로 철저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시험에서 100점을 얻기 위해서는 정답을 써야하며,
그것이 실기시험이라면 정답이 될 수 있는 행동을 수행하여야 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제자들 또한 스승의 길을 따라오기를 원하시면서 추종의 기준을 제시하신다.
추종의 기준을 보자.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고,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십자가를 진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자기 목숨을 살리려 하는 자는 오히려 잃고, 잃는 사람은 되려 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자기를 버림과 잃음‘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자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분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것은 하느님 때문에 내어놓는 것이며,
이는 곧 하느님께서 죽어갈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다.
결국은 예수께서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명이 죽음을 이기도록 생명을 죽음에 부치시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 추종의 길이다.
생명은 귀중하다.
귀중하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이웃에 생명을 바치라는 것이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일방적인 자기 비하나 겸손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예수 옆에 머물기 위해 자신의 명예와 삶을 내어놓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가
마지막 날에 사람의 아들의 부끄러움을 받게 된다.(38절)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자아를 긍정하는 것이고,
목숨을 버리는 것은 목숨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이제 긍정과 사랑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론)과 모범(실천)에 질서 지워져 있어야 한다.
’예수 추종의 길‘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을 따르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제자가 스승을 따르는 데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없다.
스승을 가장 잘 따르는 방법은 스승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을 통하여 주어진
베드로의 숙제에 대한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추종의 길은 나아가 우리의 교과서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