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사태와는 비교도 안 될 상황이 올 수도
"축구선수는 축구만 잘 하면 되고, 영화배우는 연기만 잘 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삼성은 돈만 잘 벌어오면 무슨 짓을 해도 용서가 된다?"
가벼운 반팔 차림으로 강단에 선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는 삼성의 공적이 너무 신화처럼 되어 있는 모습을 우려했다. 그날 청계천에서는 촛불문화제가 크게 열렸지만, 그는 '손님'이었다.
5월 9일 영풍문고 지하에 마련된 갤러리에서는<삼성왕국의 게릴라>(프레시안북)의 출간을 기념하여 도서포털 리더스가이드와 영풍문고, 프레시안북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3회 작가와의 대화>가 열렸다.<삼성왕국의 게릴라>(프레시안북)는 삼성문제에 대해 '피를 토하듯 파헤치고 고쳐보자고 나서는' 일곱 게릴라, 즉 김용철 변호사, 김상조 교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이상호 MBC 기자, 심상정, 노회찬 의원, 김성환 삼성일반노조위원장에 관한 취재와 인터뷰집이다. 이 중에서 심성정 대표와 김성환 삼성일반노조위원장, 프레시안 기자들이 그날 연사와 토론자로 참여해, 정치권에 대한 삼성의 끈질긴 로비 실상과 무노조 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삼성의 집요한 행태가 이 문제를 직접 몸으로 맞부딪친 당사자의 입을 통해 생생히 전해졌다.
45 :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는 삼성의 공과를 균형 있게 전달하는 것이 삼성과 국민에게 유익한 일이라고 역설했다.
심상정 대표가 삼성문제에 대해서 매우 많은 공을 들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무릇 모든 기업이나 조직에는 공과가 있을진대 삼성은 공만 너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삼성의 신화에 취해서 만약 삼성이 잘못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우리가 짊어져야 할 비용이 너무 크다고 심 대표는 경고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예로 '대우사태'를 들었는데, 삼성에 만약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대우사태와는 비교도 못할 만큼 큰 혼란이 온다는 것이다.
삼성은 4월 22일 이른바 '쇄신안'을 발표하며 은행소유 포기를 공식 선언했지만, 심 대표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미 삼성은 많은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은행을 가지고 있는 효과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내년 2월 시행 예정인 '자본시장통합법'에서는 금융사의 지급결제권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삼성은 보유하고 있는 보험지주회사를 통해서 충분히 금융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 심 대표의 관측이다. 심 대표가 말한 '대우사태와는 비교도 안 될 상황'이란 것은 무엇일까? 이미 금산분리 원칙도 현저히 완화된 상황에서 삼성 앞에는 금융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뚫린 것이나 다름 없다. 이에 관해서는 KDI의 유종일 교수가 <한국경제 새판짜기>(미들하우스)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피노체트가 군사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고 신자유주의학파라고도 부르는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를 중용해 완전한 금산결합을 실시했다. 그 결과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이 결합해 거대한 복합투기자본이 되었지만, 마침내 1980년대 초에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2~3년 만에 GDP가 15%쯤 축소되고, 금융시스템 전체가 무너져내렸다. 결국 가장 극단적으로 시장정책을 시행했던 나라가 역설적이게도 공적자금을 대거 투입하여 은행이 다 국유화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역사적 교훈을 통해서 사실상 모든 나라들이 금산분리 원칙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11 :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 김성환 삼성일반노조위원장, 프레시안 취재진이 독자들의 질문을 경청하고 있다
정치권이 삼성의 포로가 되는 과정 씁쓸히 지켜봐
심 대표에 의하면 17대 원내의 구성은 2/3가 초선으로 이들은 당론에 신경을 잘 안 쓰고 열의가 상당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 2004년 국정감사 때는 이건희 회장에 대한 증인채택에 어려움이 없었으나, 당사자인 이건희 회장이 외국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2005년 때는 참으로 논란이 많았다고 술회했다. 결국 표결로 이건희 회장의 증인 채택을 결의했지만, 그때 역시 이건희 회장은 출국한 상황이라 증인으로 참석할 수 없었다. 그나마 2006년부터는 증인채택이라는 말도 못 붙일 만큼 분위기가 싸늘했다고 한다. 결국 논란 끝에 이건희 회장 국정감사 증인채택에 대한 표결이 이루어졌지만, 단 2명의 찬성 표만 나왔다. 이때 이건희 회장은 당당히 귀국, 아니 '개선'을 했다고 심 대표는 말했다. 2007년에는 표결조차 하지 못하였고 심 대표 혼자만 증인채택 이야기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한다.
국회의원들이 삼성에 대해서 발언을 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구조적이다. 심 대표는 '완장'이라고 표현했지만, 삼성의 눈밖에 나는 순간 사실상 간사나 당권에서 배제된다고 한다. 후원금조차 끊기기 때문에 사실상 정치생명의 위기가 찾아온다. 현직 국회의원 중에서 이러한 결과를 감내하며 삼성문제에 용기를 낼 수 있는 의원은 거의 없어 보였다.
이렇듯 삼성공화국의 성벽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하는 심 대표의 표정에 어둠이 잔뜩 끼어 있었다. 심 대표는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는데, 이는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의원에게서 처음으로 제기됐다고 한다. 홍 씨에 의하면 '공화국'이라는 말은 인류가 만들어낸 몇 안 되는 좋은 성과인데, 어떻게 '삼성'이라는 말을 '감히' 앞에 붙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때문에 심대표를 비롯한 시민단체에서 협의를 통해 '삼성왕조'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라는 책에서 '왕국'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심 대표는 삼성국면에 대해서 "이건희가 숨긴 돈을 합법적으로 세탁해주고, 이재용 세습 역시 합법화시켜주는 좋지 않은 결과가 됐지만, 이건희 왕국에서 국민기업으로 거듭나는 중요한 스타트를 끊었다는 것이 큰 의미"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몇 명 안 되는 삼성저격수가 아니라 국민 개개인이 저격수가 되어야 민주주의의 발전의 기본 과제를 이루어낼 수 있다"며 삼성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촉구했다.
25 : <삼성왕국의 게릴라들과의 대화>에 참여한 토론자와 독자들이 대화가 끝난 후에 기념촬영을 했다
세상 밖이 감옥보다 더 큰 감옥 같다
덥수룩한 수염에 '삼성일반노조'라는 글자가 새겨진 유니폼, 책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김성환 삼성일반노조위원장은 독자들에게 자신이 직접 쓴 책을 팔려고 한 두루미를 들고 왔다. "서점을 통해서 팔면 인세 10%를 받지만, 직접 팔면 40%를 받기로 출판사와 협의를 했다. 이 돈으로 고생하는 노동자들을 도울 거다"고 말했다. 출소한 지 3개월 정도 지나 세상에 아직 적응이 안 된다던 김 위원장은 "세상은 어떻게 보면 더 큰 감옥이 아닌가" 하고 독자들에게 일침을 던졌다. 그의 눈에는 세상 사람들이 삼성이라는 감옥에 영혼이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듯했다.
김성환 위원장은 2005년 삼성SDI의 노사협의회 위원장 선거 개입 의혹을 홈페이지 등을 통해 제기한 뒤 삼성SDI로부터 고소를 당해 '명예훼손' 죄로 실형 5개월을 선고받았으나 2002년 받았던 4년의 집행유예가 취소돼 총 3년5개월의 형량이 확정됐다. 출소 예정일은 2008년 10월 7일이나, 2007년 12월 말 '갑작스런 특별사면'으로 풀려나게 됐다.
그는 삼성 노동자들의 분노가 자신을 이 자리로 데려왔다고 말했다. 삼성이 노동자들에게 벌인 탄압을 가장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사례는 "죽은 사람의 명의를 도용해 위치를 추적한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무노조'에 '원칙'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에 역정을 내다시피 했다. '삼성'에 '공화국'이라는 말을 감히 쓸 수 없는 것처럼 '무노조'에는 '원칙'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건희 일가의 '고집'일 뿐이라고 역설했다. 김 위원장은 "임금문제, 구조조정, 비정규직 문제는 노동자의 현실에서 매우 절실한 문제"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에 따르면 삼성은 그 동안 무노조 경영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납치, 감금은 기본이고 경찰과 판검사에게 뇌물을 일상적으로 주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인 이유는 "삶의 보편적 가치를 짓밟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자신의 저서 <골리앗 삼성재벌에 맞선 다윗의 투쟁>(삶이 보이는 창)의 내용을 예로 들며, 삼성의 불법성에 대해서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에서 1년에 518시간씩 20년 동안 일해온 40대 중반의 노동자가 있었는데, 결국 과로사로 사망했다고 한다. 삼성은 그에게 지급할 상여금을 12개월수로 쪼개서 지급했으며, 과로사로 사망할 당시에는 310만원을 지급했다고 한다.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가 제기돼 노동부에서 특별조사를 실시했는데, 단 2주 동안 근로감독 특별조사를 벌인 결과 근로기준법 위반 사항이 1,000건 가까이 발생했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이것이 인간중심의 경영을 한다는 삼성기업의 실상이다"고 말했다.
아내가 현재 '자발적으로' 우유배달을 하고 있다고 소개한 김 위원장은 "생활은 어떻게 유지하느냐"는 독자의 질문에 어쭙잖은 소일로 시간을 축낼 바에야 차라리 삼성 문제에 헌신하는 것이 낫다며 삼성 문제에 끈질기게 투신하겠다고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김 위원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문득 <논어>의 구절이 생각났다. "삼군(三軍)의 장수는 사로잡을 수 있어도, 일개 평범한 필부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자한 편)는 구절을 김 위원장에게 맞게 풀이하면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삼성이 사법부와 국세청, 청와대는 쓰러뜨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일개 노동자인 김성환의 의지는 쓰러뜨릴 수 없다"
26 : 김성환 삼성일반노조위원장은 출소한 지 3개월이 되었지만, 세상은 더 큰 감옥 같다며 삼성이 선언한 인간경영 원칙을 스스로 훼손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