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 고은
떠올랐겄다
그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져버릴
해가
그런 줄도 모르고
오늘도
천동설(天動說)의 그것으로
떡 하니
칠현산 허리에 떠올랐것다
부재가 과거의 실재이기보다
실재가 미래의 부재인가 으흐흐흐
그 햇빛이
1억5천만 킬로미터 저켠에서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허위단숨 와
우리 집 마당
제멋대로인 살구나무 가지들 사이를 경유
내 문맹의 가슴 메리야스를 뚫고
네대여섯대 갈비뼈한테 두근 반 세근 반 와 있것다
방금 나는 휴대폰 전화를 받는다
아이고 자네로군
김승훈 자네의 혼령이로군
저승의 세모시 목소리는 햇빛이 아니라
수묵(水墨) 달빛이로군
또 보세
선술집 / 고은
기원전 2천년쯤의 수메르 서사시 '길가메쉬'에는
주인공께서
불사의 비결을 찾아나서서
사자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하늘에서 내려온
터무니없는 황소도 때려잡고
땅끝까지 가고 갔는데
그 땅끝에
하필이면 선술집 하나 있다니!
그 선술집 주모 싸두리 가라사대
손님 술이나 한잔 드셔라오
비결은 무슨 비결
술이나 한잔 더 드시굴랑은 돌아가셔라오
정작 그 땅끝에서
바다는 아령칙하게 시작하고 있었다
어쩌냐
* 고은 / 1933년 전라북도 군산 출생. 1958년 등단.
絶世美人 / 오탁번
-2006년 3월 21일 오후 3시
조선시대 다식판 하나 사려고
양성면 골동품 가게에 들렀는데
늙은 주인은 어디 가고
갓 스물된 아가씨가 손님을 맞는다
볼우물이 고운 복숭아빛 뺨과
몽실몽실한 가슴을 보며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희고 미끈한 종아리는
왜무처럼 한입 베어먹고 싶었다.
다식판은 보는 둥 마는 둥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2006년 3월 21일 오후 4시 반
천등산 손두부집에 들렀는데
삼원색 요란한 월남치마에
발목 다 보이는 나일론 양말 신은
젊은 아낙이 배시시 웃으며 인사한다
브래지어 한쪽 컵이 망가졌는지
짝짝이 가슴이 붕긋봉곳한
주근깨도 예쁜 아낙의 얼굴을 보며
식사 주문도 잊은 채
정신이 휑하니 아득해졌다.
- 2006년 3월 21일 오후 6시 반
늙은 느티나무가 새잎을 피우고
저녁놀이 서녘 하늘 물들일 때
내내 방망이질한 가슴 진정시키려고
솔잎술 한잔 마시며
옛 사진첩을 그냥 뒤적거렸다
내가 서른여섯살 되던 가을
서른한살 아내와 함께
설악산에서 찍은 사진을 보다가
나는 깜짝 놀라 술잔을 엎질렀다
골동품 가게 아가씨보다도
손두부집 젊은 아낙보다도
몇곱절 예쁜 젊은날의 아내가
방긋 웃으며 내 옆에 서 있었다
그날부터 지갑 속에
아내의 사진을 넣고 다니며
아침저녁 새새틈틈 보고 또 본다
어느날 다따가
絶世美人이 된 줄도 모르는
아내는
달팽이관이 고장나서
메슥메슥 입덧하듯 토하고 있다
아아 아득히 흘러간 젊은 시절
아내가 아기 배고 입덧할 때
귤 하나 사다줄 생각 못했던 나를
호되게 벌주고 있다
- 2007년 1월 12일 오전 9시
새해 들어 입덧 더 심해진
絶世美人의 손을 꼭 잡고
영하 12도 눈보라 치는 날
춘천 성심병원 이비인후과로 간다
* 오탁번 / 1943년 충청북도 제천 출생.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가을 온정리 / 이상국
70년도 넘었다.
내가 이 나라에 오기 훨씬 전에
동해북부선 타고 금강산 원족(遠足) 갔던 아버지가 있었다.
왜놈의 당꼬바지에 지팡이로 멋을 내고
온정리에서 사진을 찍은 젊은 아버지가 있었다.
죄송하게도 당신보다 더 오래된 나이로
2006년 가을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주말에 어디 맛있는 집 찾아나서듯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걸,
나는 역사를 너무 엄숙하게 생각했다.
10월의 북고성에서는
테두리가 높다란 모자를 쓴 군인들이
사회주의 가을을 지키고 있었는데
저래도 어딘가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다니…… 해놓고
나는 주먹으로 내 입을 틀어막는다.
내가 상상했던 온정리가 훨씬 따뜻했을지라도
오길 잘했다. 그러나 분하다.
우리는 늘 이밥을 생각하며 살았지만
이 땅의 가을에는 피가 묻어 있다.
언젠가 내 아들도 이곳에 올 것이다.
누가 오든 온정리가 어디 가겠는가
저 붉은 단풍숲에서 아이들은 연애를 하고
무 밑이 다 들고 나면 또 눈이 내릴 뿐,
앓다 일어난 듯 핼쑥한 풍경을 배경으로
남녘에서 온 관광객들과 함께 나도
김치 하고 사진을 찍는다.
온정리 가을이 따라 웃는다.
밥상에 대하여 / 이상국
오래 받아먹던 밥상을 버렸다
어느 날 다리 하나가 마비되더니
걸핏하면 넘어지는 그를 내다버리며
누군가 고쳐 쓰겠지 하면서도 자꾸 뒤가 켕긴다
아이들이 이마를 맞대고 숙제를 하고
좋은 날이나 언짢은 날이나 둘러앉아 밥을 먹었는데……
남들은 어떻게 살던지,
아버지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때로는 밥상머리에서 내가 지르는 호통소리에
아이들은 눈물 때문에 숟가락을 들지 못했고
그럴 때마다 아내는 공연히 밥알을 줍거나
물을 뜨러 일어서고는 했지
나는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나의 가족들에게, 실은 나 자신을 향하여
어떤 때는 밥상을 두드리고 숟가락을 팽개치기도 했지
여기저기 상처난 몸으로 그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끼 밥을 위하여 종일 걸었거나
배를 있는 대로 내밀고 다니다가
또 어떤 날은 속옷 바람에 식구들과 둘러앉아
별일도 아닌 일에 밥알이 튀어나오도록 웃던 일들을
그는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오래 받아먹던 밥상을 버렸다
그러나 그가 어디 가든 나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안다
* 이상국 /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 1976년『심상』으로 등단.
풀잎의 눈 / 문영
하늘의 창이 흐려진다
고양이 발 걸음으로 오는 가을
슬금슬금 풀잎을 타고 놀다
풀잎이 시들면 도시를 떠나
변두리로 몰려갈 것이다
하늘의 창이 다시 흐려진다
뒷골목을 걸어가는 바람
썰렁썰렁 풀잎을 쓸며 놀다
풀잎이 잠들면 도시를 떠나
하늘 빈터로 달려갈 것이다
나는 풀잎의 눈을
하늘에다 그리며,
창을 열어 도시를 본다
어느 봄날 / 문영
낮에 오던 가랑비에
목련꽃 떨어진 자리가 젖어
겨울나무 끝에 떠 있던
까치집에 불 켜졌느냐고
밤 빗소리에 잠 못 이루는
몸이 자꾸만 자리를 옮겨다닌다
행운목 아래 민달팽이 가족
집 없어 젖어 산다고
가진 것 없이 몸뚱이 하나로
누항의 세월 건널 수 있어 좋겠다고
봄비에 부황 드는 마음이
바보처럼, 따라 젖는다
* 문영 / 1954년 경상남도 거제 출생. 1988년 『심상』신인문학상으로 등단.
마른 연못 / 나희덕
물이 빠진 거대한 연못,
오래전 눈에 박힌 풍경이 나가지 않네
장화 신은 발들이
몸속을 저벅저벅 걸어다니네
울컥 고이는 발자국들,
검고 끈적한 진흙이 삼켜버리네
호미를 든 손들이
몸속에 깊이 박힌 연뿌리를 캐네
숭숭 뿌리 뽑힌 자리마다
진흙이 뱀처럼 흘러들어 스르르 문을 닫네
장갑을 낀 손들이
몸속에 흩어진 잔해를 끌어모으네
이토록 태울 게 많았던가
번제를 올리듯 어떤 손이 불을 붙이네
타오르면서 타오르지 않는 불의 중심,
명치 끝이 점점 뜨거워지네
눈이 너무 매워 움직일 수가 없네
뇌수 사이에서 썩어가던 기억의 잎과 줄기가
몇줌의 재가 되어가는 동안
장화 신은 발들이 불을 둘러싸고 서 있네
그들이 주고받는 얘기가 들렸다 안 들렸다 하고
누구일까, 내 몸을 제물 삼아
마른 연못 속에서 불을 피우는 그들은
* 나희덕 / 1966년 충청남도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난리도 아닌 고요 / 김중식
아무리 둘러보아도
새는 새고,
산은 산이다.
새소리도 산의 고요에 한몫하는
평일 저물녘 하산길.
실제상황이다.
산 전체가
비명(悲鳴)으로 연대(連帶)하고 있다.
난리 때 봉화가 그랬을까,
매 한마리 떴을 때
무인도 갈매기가 통째로 이륙하듯
난리다.
난리도 아니다.
어미새들은 헬기 자세로 솟구치다
뒷덜미를 낚아채인 고양이처럼
횡(橫)으로 미끄러진다.
두 발 두 날개 온 깃털들이
강풍에 뒤집히는 순간의 우산 모양이다.
역방향의 긴장이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새들은 목이 쉬고
산은 꿈쩍도 않는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나는 왜 이미 다리가 풀렸고
세상은 실제상황 속인지,
내려다보이는 서울 서북지역은 아무렇지도 않게
함부로 고요한지.
* 김중식 / 1967년 인천광역시 출생.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슬픈 빙하시대 5 / 허연
살길은 늘 스스로 있었구나.
3부 리그 축구팀의 수비수가 날 울릴 때가 있다. 얼마나 더 살겠다고 MRI 찍는 통 속의 고독을 견디는 구순의 노인이 날 울릴 때가 있다. 쓰러지기 전 거품 문 투우의 마지막 진실 같은 거, 그게 날 울릴 때가 있다.
누군가와 일요일 아침 식은 밥을 물에 말아먹고 싶다고, 겨우내 촌스러운 화장을 하는 여자. 카운트는 끝나가는데 더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곧추세우려는 실패한 복서의 눈빛 같은 거. 절대고독 안에 뒹굴고 있는 입석들의 폐허다. 인생은
떨어지기 전, 떨어지기 전, 그 간들거림.
* 허연 / 1966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세계』신인상으로 등단.
『창작과비평』135호(2007년 봄호)
- 편집인 / 백낙청
- 펴낸곳 / (주)창비
- 펴낸 때 / 2007년 3월
[출처] 389. 이상국 외 -『창작과 비평』135호|작성자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