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형의 투명 유리로 된 간호사실을 돌면 복도와 연결된 중간 지점에 바깥 풍경이 고스란히 보이는 식당이 있다. 흰 페인트가 엷게 칠해진 철재 탁자 네 개와 의자 수십 개가 놓여 있는 그 곳은 환자들이 밥을 먹는 곳이지만, 그 외 시간에 나를 비롯한 여러 명이 간간이 담배를 피우는 장소이기도 하다. 나는 주로 이른 새벽녘 혹은 밤늦은 시간을 이용해 이곳에서 담배를 피운다. 병원 규칙상 그 시간에 나오면 안 되지만, 직원들은 그다지 제지를 하지 않는다. 그건 학연과 지연을 중시하는 이 사회의 특수성이 여기서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5병동의 주임 간호사는 아내와 대학 동기이고, 보호사 가운데 유일하게 날 잘 챙기는 김은 고향 후배이다. 오늘도 나는 어김없이 새벽 다섯 시에 그 곳에 서 있다. 병원 담을 경계로 안쪽에 심어 놓은 동백이 가로등 불빛과 묘하게 어우러져 염염히 타오르고 있다. 나는 담 너머 밖을 보기 위해 성에가 두툼히 낀 창을 소매로 닦는다. 내가 그토록 소망하는 바깥세상은 가로등만 희미하게 켜져 있을 뿐, 아직 어눌한 어둠에 쌓여 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시내로 들어가는 첫 마을버스가 올 것이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병원 건너편 가게 앞에는 일단의 사람들이 웅크린 채로 서 있다. 몹시 추워 보인다. 까만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있다. 허리가 몹시 구부러진 할머니, 행상을 하는 듯 늘 자신의 몸보다 큰 짐을 어깨에 멘 중년의 사내도 있다. 버스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서서히 들어온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컴컴한 어둠 속에 운전자는 헤드라이트를 켜도 겨우 20내지 30m 앞만 볼 수 있다. 그 이상은 볼 수 없다. 헌데 우리는 흡사 모든 걸 보는 것 같이 앞으로만 질주한다. 무엇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지 아랑곳없이 말이다. 나는 다시 담배 한 개비를 더 물었다. 속은 타고 있다. 저 마을버스만 탈 수 있다면, 그래서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하는 허튼 생각으로 마음이 더욱 초조해진다. 삼 년 전, 이 병원에 처음 왔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이곳에 오래 있으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그저 길어야, 아내의 말대로 바깥일들이 조용해지는 대로 몇 개월이면 나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아내는 이곳의 내 생활이 보기 좋았는지 도무지 꺼내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면회도 처음에 몇 번 왔을 뿐, 그 후로는 아예 오지 않는다. 아내의 마지막 말이 기억난다. ‘남 보기 부끄러우니 냉정하게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 반성하고 있으세요. 아니, 이참에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분석해보세요. 무엇이 문제이며 어떤 게 고쳐야 할 점인지…… 내가 적당한 때 빼 줄 테니.’ 분석이라니, 내가 무슨 화학분자도 아니고 뭘 분석한다 말인지, 그 적당한 때가 언제이기에 이 황량한 곳에 무방비로 날 이렇게 내버려두는 건지. 나는 절로 한숨이 나온다. 잠시 후, 실내에 후끈한 히터가 켜지더니 창이 뿌예지고 있다. 나는 습관적으로 둘째손가락을 창에 대고 이리저리 글을 새긴다. 아내, 내 아이들, 세상…… 하긴 이런다고 허한 내 마음이 풀릴까. 그저 나는 한숨 섞인 분노를 창에 뱉을 뿐이다. 그 때, 누군가 조용한 소리로 날 부른다. 나는 고개를 돌릴 생각도 않고 담배를 하나 건넨다. 워낙 일상적인 일이라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뻔하다. “망할 놈들. 내가 잠든 사이에 또 담배를 빼 갔어. 도대체 누구인지 잡히기만 해봐라. 반쯤 죽여 놓을 거야.” 그가 늘 새벽에 하는 소리다. “고마워. 역시 이형밖에 없다니까. 내 여길 나가면 진짜 멋지게 한턱 쏠 테니 기대해.” 박형은 이 병동에서 제일 고참이다. 나보다 두어 살 많은 그는 알코올 중독자로 벌써 십여 년 째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있다. 보통 술꾼들이 한 자리에서 일인 당 소주 두세병을 먹는 것과는 달리 그는 보통 안주 없이 2홉들이 소주 10병에서 15병까지 먹는다. 처음 한두 병 먹을 때는 그나마 정신이 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먹는 속도가 빨라지며 불안해하며 횡설수설해댄다. 그리고 나중은 온전히 정신이 나간다. 내가 미친놈이지. 마누라하고 애새끼를 봐서라도 그때 마지막으로 퇴원했을 때 술을 끊어야 되는데, 아 그때 말이지, 내 눈앞에 병원에 있을 땐 안 보이던 그 놈이 또 보여 가지고 말이야. 자꾸 마시라는 거야. 자기가 책임진다고. 환장할 노릇이지. 그 놈? 그 놈이 누군데. 이야기해도 안 믿을 거야. 의사하고 가족들도 안 믿는데 뭐. 이형도 내가 말하면 날 미친 놈 취급할거야. 글쎄, 굳이 알고 싶다면 말 못할 것도 없지. 그 놈은 말이야. 얼굴은 확실하게 보지는 못했는데, 내 젊은 시절하고 너무 닮은 것 같아. 목소리도 비슷하고 말이야. 그 놈은 내가 꼭 소주를 일여덟병 정도 먹으면 나타나 내게 말을 거는 거야. 그래서 내가 얼굴 한 번 보려 다가서면 그때마다 내 옆으로, 위로, 뒤로 돌아서는데. 어쨌든 난 그 놈이 그땐 너무 좋아. 날더러 자꾸 마시래. 그래서 시키는 대로 먹다보면 아뿔싸, 그땐 항상 늦었어. 두 달 전에 퇴원했다, 가족의 신고로 다시 강제 입원한 그는 술이 조금 깨자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귀신이란 말이야?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박형이 술을 너무 먹으니 환시가 보인거야. 잘 봐. 여기 분열증으로 입원해 있은 애들 중에 특히 환청이나 환시가 많다 하잖아. 어허이, 답답하네. 내가 아무리 술을 많이 먹는다 해도 그런 것도 구분 못할까. 또 내가 정신병자야? 그게 아니라니까. 아니, 귀신이 말하는 법도 있어? 담당 의사한테 말해봤어? 의사는 뭐래? 몇 번 말했지. 근데 안 믿어. 무조건 술 때문이라는 거야. 헛것이 보인거야. 왜 보통사람들도 심신이 피곤할 때 가끔씩 실제 있지도 않은 현상이 안개처럼 비칠 때가 있거든. 아니면 잠깐 꿈이라도 꾼 거겠지. 그는 내 말을 듣자 그냥 헛헛하게 웃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안다. 평소에는 그렇지 않지만 어떤 돌출상황 때 자신의 깊숙이 뿌리박힌 잠재의식, 혹은 쓴 뿌리가 어떤 형상이나, 모양으로 되어 나올 때가 있다. 그 형상이 자기 어릴 때 모습일 수도 있고, 청년기의 모습일 수도 있다. 물론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잘 나타나진 않는다. 주로 우리 같은, 그러니까 심성이 너무 맑거나, 불안정하거나, 연약한 사람들은 한 두 번씩 겪는 일이다. 나도 가끔씩 그럴 때가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을 내 담당 의사에게 말하진 않는다. 괜히 골치 아프게 긁어 부스럼을 만들긴 싫고, 정말 그들이 날 정신병자로 취급하면 곤란하니까. 그렇게 그 장소에서 박형과 함께 담배를 몇 대 피웠을까. 간호사실 맞은편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아침 식사 시간이 된 것이다. 식당과 연결된 복도에는 한 무리의 배식조가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밥과 찬이 담긴 손수레를 끌며 오고 있다. 순식간에 식당은 잠에서 막 깬 환자들로 넘친다. 박형은 언제나 그렇듯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은 뒤, 내 밥과 국을 조금 더 덜어가면서 말한다. 이형, 오후 산책시간 때 꼭 나가지. 내가 봐둔 데가 있거든. 할 얘기도 있고 말이야. 오늘 따라 그가 초조해 보인다. 나는 건성으로 듣고 밥을 반 쯤 먹고선, 내 방에 들어가 누워버린다.
■ 면담(상담) 일지 ㅇ 일 시: 2005년. 12월. 22일 AM 10:00 ㅇ 장 소: 5층 B동 면담실. ㅇ 면담자(A): 정신과 전문의 강 진 섭 ㅇ 환 자(B): 이 시 영 A : 기분은 어때요? 이제 술은 완전히 깼죠? B : 그저 그렇습니다. 혹 담배 있으면 하나 주시죠. A :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있다하더라도 의사가 환자에게 담배를 주는 일은 없죠. 좀 참으셨다가 면담 마치고 간호사에게 달라고 하세요. 됐죠? 자, 그럼 이제 시작하시죠. 당신은 사흘 전에 저희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이유는 술에 만취된 상태에서 사무실에 불을 질렀기 때문입니다. 인정합니까? B : 인정합니다. A : 왜 불을 질렀죠? B : 화가 났습니다. 사장이 끊임없이 부당한 일을 내게 지시했지요. 모든 직원들이 내가 옳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내 비록 그 회사가 아니면 갈 데는 없어도 아닌 건 아니다, 투명하고 정직하게 살자는 주의입니다. A : 그렇다고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그런 식으로 대응은 않지요. B : 그렇겠지요. 헌데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그날 제게 전적으로 호응하던 전직원들이 연말 인사이동 때문인지 그 놈의 사장에 붙어 날 배신했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사람들이었는데……. 전 절대로 홧김에 한 일은 아닙니다. A : 그럼 계획적이었나요? B : 이봐요. 선생님. 지금 무슨 범죄 수사합니까. 그 일은, 내가 자세하게 설명해줘도 당신은 모를 거요. 어쨌든 내 입장에선 최선이었어요. 이런 얘긴 그만 합시다.
나는 어릴 적부터 불을 좋아했다. 아버지로부터 사내 녀석이 저리 약해 가지고, 하는 꾸지람을 듣는 날이면 어김없이 동네 공터로 향했다. 나는 그곳에서 쓰레기를 모아 성냥으로 불을 지폈다. 쓰레기는 주로 신문, 옷가지, 나뭇가지였는데 곁들여 애용한 것은 내 일기장이었다. 주로 아버지에게 야단맞는 날에 기록한 것이었다. 일기장을 하나씩 타오르는 불 속에 집어넣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은 깨끗이 정화되는 것이다. 그 성향은 성장했어도 마찬가지였다. 중, 고교를 거쳐 대학을 다닐 때 나는 각종 시위가 있을 때면 화염병을 제조, 불붙여 던지는 것을 즐겼다. 사람들은 날더러 정말 정의롭고 맹렬한 투사로 알고 있었는데 그건 사실과 달랐다. 난 단지 불을 좋아했고, 이 세상을 향해 불을 던져 지르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던 것뿐이었다. 대상이 누구든지 상관없었다. 국가든, 정치인이든, 대학 총장이든. 그러나 평소에 나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조용하고 온유한 성품을 지닌 자라고 자부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러니까 내가 이 병원에 오기 하루 전이었다. 그동안 직장에서 별 문제도 없었는데, 오직 한 사람. 사장과 갈등이 있었다. 직장에 오랫동안 문제가 되어온 세금문제로 회의가 있었다. 정당하게 납부하는 게 좋다는 내 의견에 그가 제동을 걸었다. 당연히 그를 따르는 자들은 모두 나를 비난했다. 정당하게 세금 내서 어떻게 기업하겠느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경리파트에서 일하는 나로서는 매 번 이중장부를 만드는 게 큰 고역이었다. 또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새파란 세무서 직원들과의 의례적인 접대가 너무 싫었다. 사장은 노골적으로 그것도 공개석상에서 날 몰아세웠다. 나는 순간적으로 피가 끓었고, 밖으로 나가 퇴근시간을 훨씬 넘기며 소주 다섯 병을 마셨다. 그리고는 직장으로 들어가 내 사무실에 불을 질렀다. 다행히 사무실에는 모두 퇴근을 했는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태연히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구경꾼들이 삽시간에 모여들었고 누군가 소방서에 연락을 했는지 소방차가 요란스레 오고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소주병을 든 채로 크게 웃었다. 속이 편해지고 정신은 더 없이 맑았다. 기겁을 한 것은 소식을 듣고 온 아내였다. 다음 날 내가 끌려 간 곳은 이상하게도 경찰서가 아니었다. 눈을 떠 보니 천장과 벽이 모두 하얗게 된 방이었다. 링거가 내 팔뚝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는 침대에 묶여 있었다. 눈을 살포시 떠보니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과 정복차림의 경찰이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뇌파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극히 비정상입니다. 심리상태도 무척 불안하구요. 혈액 속에 알코올도 대량으로 검출되었습니다.” “그럼 고의성이 전혀 없단 말입니까?” “지금으로선 그렇지요. 이 환자는 심인성 및 기질성 정신질환을 동시에 앓고 있어요. 일종의 정신분열증인데……, 굳이 병명을 말하자면 ‘기질적 방화욕구증’이라고나 할까요. 이를테면, 내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갈등이나 욕구불만 등을 불을 봄으로써 해소하는 특이한 병이죠.” 의사는 어려운 의학용어를 써가며 경찰을 따돌리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은 그가 우스웠다. 세상에 그런 병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쨌든 경찰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에 증빙서류나 보내주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상황판단이 되었다. 이건 분명 아내의 재치였다. 현재 다른 병원에서 정신과 간호사로 일하는 아내는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이 병원으로 나를 데려온 것이다. 방화범으로 구속되어 전과가 남는 것보다 정신병원에 집어넣는 것이 남편의 앞날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 것 같았다.
한참을 잔 것 같은데, 시계를 보니 겨우 삼십여 분이 지나고 있다. 박형이 미안한 듯 날 깨운다. 아침식사 후 늘 반복되는 투약시간이다. 힘없이 축 늘어선 환자들 뒤로 나와 박형은 마지못해 줄을 선다. 김간호사와 보호사 김지만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약을 배급하고 또 다른 보호사 황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투약 장면을 지켜본다. “입 크게 벌리고, 다 먹었으면 혓바닥 내밀어요. 그래야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알 것 아뇨. 됐어, 다음.” 황은 오늘도 환자들이 혹 약을 안 먹고 버리는지 일일이 검사하고 있다. 그 장면은 마치 시골농가에서 주인이 닭 모이를 주는 것 같아 나는 몹시 불쾌하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능숙한 동작으로 혓바닥을 내 보인다. 그러나 나는 벌써부터 약을 먹는 시늉만 했지, 혓바닥 뒤에 감춘 약들은 투약시간이 끝나면 화장실에서 모조리 뱉어 버린다. 대열을 이탈해 약을 머금은 채 화장실에서 온 나는 손바닥에 약들을 뱉어낸다. 리스페리온, 올란자핀, 그로자핀, 바륨, 아티판 등 무려 5가지 10알이다. 거의가 중증 정신분열, 조울증, 성격장애 등에 쓰이는 약들이다. 지난 삼 년 동안 나는 퇴원의 희망을 품고 담당의사, 그 밖에 직원들에게 잘 보이려고 꼬박꼬박 약을 먹어 왔다. 그러나 약을 먹기만 하면 한 시간도 채 못 되어 하체가 풀리면서 정신이 몽롱해지는 게 마치 마약을 먹은 지랄 같은 기분이었다. 말도 어눌해지면서 사물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었다. 그래서 최근 들어 그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약을 몰래 버리고 있는 것이다. 화장실에서 태연히 나오려는데 갑자기 투약 장소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린다. “나, 약 안 먹어. 빨리 집에 보내줘.” 얼핏 듣기에 얼마 전에 입원한 신입 여자환자 같다. 이어 김간호사와 보호사 황 의 협박이 시작된다. “이봐요. 여긴 정신병동이에요. 정신과 근무해봤으니 투약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을 텐데.” “간호사님. 저 미치지 않았어요. 얼른 집에 가야 돼요. 아기가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없으면 우리 아기 젖 줄 사람이 없다니까요.” 그녀의 표정은 애절하다 못해 고통스럽다. 보호사 김의 얘기로 그녀는 이제 백 일된 아이를 둔 현직 정신과 간호사라 한다. 미혼 때부터 가벼운 분열증을 앓고 있다가 결혼 후 직장과 육아 문제, 남편의 외도 등으로 발병해서 온 경우다. 김간호사는 다소 망설이다 결정을 한다. “황 보호사! 이 환자 B동에 데려가 결박하세요. 과장님에겐 나중에 제가 말씀드리죠.” B동은 가장 상태가 안 좋은 중증환자들이 온종일 갇혀 있다시피 하는 독방이다. 햇볕도 안 들고 식사 시간 외에는 끈으로 늘 묶여 있어야 한다. 하루 종일 그들이 투여하는 약을 먹고 누워 지내려면 허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이 뒤따른다. 나 역시 처음 이 병원에 왔을 때, 한 번 퇴원시켜달라고 의사에게 대들다 그 병동에 한 달 정도 지낸 적이 있다. 그 곳은 정말 인간이기를 포기한 상태, 대소변도 그냥 누워서 봐야하는 모멸감, 고통, 비애……. 난 그때 정말 죽고 싶었다. 박형과 나는 힘없이 보호사 황에게 끌려가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만 있다.
■ 면담(상담) 일지 ㅇ 일 시: 2006년. 11월. 5일 AM 10:00 ㅇ 장 소: 5층 B동 면담실. ㅇ 면담자(A): 정신과 전문의 강 진 섭 ㅇ 환 자(B): 이 시 영 A : 어때요? 지낼 만해요? B : 네 좋습니다. 헌데 선생님. 이제 저 약도 잘 먹고 적응도 잘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만 퇴원 좀 시켜 주세요. 아내하고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 A : 퇴원? 그건 좀 곤란해요. 보호자 동의도 있어야 하고, 시영씨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지만 언제 집에 들어가 또 불 지를지도 모르고 말이죠. B : 아내가 동의를 안 한단 말입니까? 제 아내를 제발 좀 만나게 해 주세요. A : 글쎄요. 면회 한 번 오라고 말을 해보겠지만. 그보다 어릴 적 아버지와의 관계는 좀 어땠습니까?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지요? B : “ …….” A : 말씀 하시죠. 면회는 말해 볼 테니. B : 아버지. 그냥 보통 분이었습니다. 어머니와도 원만했고 우리들을 끔찍이 생각하시던 분이었죠. A : 아내분의 얘기는 다르던데요? B : 아내는 잘 모릅니다. 그 사람이 제 어릴 때 일을 어떻게 나보다 잘 알겠습니까? A : 약을 좀 더 올려드리죠.
오후가 되자 날씨가 많이 풀렸다. 병동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배실 배실 흐르고 있다. 한동안 추위 때문에 시행하지 않던 산책이 있다하니 모두들 모처럼 달떠 있는 것 같다. 산책코스는 병원 옆 제법 큰 정원이다. 나무와 꽃도 볼 수 있고 흙을 밟을 수 있으며, 재수가 좋은 날엔 길 가던 사람들도 볼 수 있다. 사회사업가 두어 명이 혹 게을러서 빠지게 될 것 같은 환자들을 계속 독려하고 있다. 마침내 우리는 줄지어서 병원 옆문을 통해 세상에 나아간다. 나는 모처럼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시리다 못해 새파랗다. 기분이 무척 상쾌하다. 아, 이대로 이 길을 따라 내 아내와 아이가 있는 집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몇 년 동안 보지 못한 내 아이들은 얼마나 컸을까. 아내는 면회 올 때 아이들을 데려오지 않았다. 자연 나는 외국에 몇 년간 출장을 간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열 살, 네 살이던 내 아이들은 이제 열 셋, 일곱 살이 되었다. 이 병원에 오기 며칠 전, 내가 퇴근하자마자 네 살 된 딸아이가 생일케이크 사달라고 떼를 썼다. 아직 네 생일 아니야, 그래도 사 줘. 오늘 어린이집에서 민수 오빠야 케이크 먹었단 말이야. 다음에 사 줄게. 싫어, 싫어. ……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그때 박형이 내 옆에 바짝 붙는다. 시선을 정면으로 하던 그는 애써 태연한 척 한다. “이형. 저길 봐. 철조망이 약간 망가져 있지. 저번 가을 태풍 때 부서진 건데, 아직 정비를 안 해 놓았어. 어때? 저리로 가면 승산이 있어 보이는데, 안 그래?” “뭐?” 나는 정말 화들짝 놀랐다. 박형이 이런 소리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리로 탈출을 하자고. 그러면 내가 늘 소망하던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고. 아아, 내 가슴은 급격하게 요동치며 파르르 떨리고 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 그것보다 가능이나 하겠어?” 박형은 나의 떨리는 듯한 목소리에 쿡, 하고 웃는다. “왜, 겁나? 이형. 여기는 교도소가 아니야. 설령 탈출하다가 잡히더라도 실정법 위반이 아니거든. 까짓것 독방에 한 번 가면 되지 뭐. 이깟 건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보기엔 충분히 승산이 있어. 계획만 잘 세우면 우린 나가는 거야. 이 좁고 고통스런 곳에서 말이야. 어쨌든 오늘 밤 식당에서 보자. 그때 상세하게 얘기하는 거야.” 나는 다리가 후들거린다. 숨이 거칠어진다. 휴, 하고 긴 숨을 내 뱉으니 조금 나아지기는 한다. 그래도 두려운 건 마찬가지다. 그날 저녁 내내 나는 이 생각에 몰입한다. 저녁밥은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나는 내 방에 꼼짝없이 누워 있다. 가능한가. 나는 왜 이때까지 이런 생각을 못했는가. 그저 새벽에 창밖에 서서 하염없이 바깥을 동경만 했는가. 아내는 내가 갑자기 나가면 어떻게 반응할까. 내 아이들은 날 알아볼까. 환자복을 입고 갈 순 없지 않은가. 내 사복이 어디 있더라. 그리고 돈은. 매달 아내가 원무과로 매식비 등을 송금하는 줄은 알고 있지만 현금은 없지 않은가. 일단 나가면 마을버스를 타고, 아니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서 주면 되지 않을까. 아니지 그 시간에 집에 아무도 없으면. 그리고 택시기사가 환자복차림의 날 의심하지 않을까. 집에 가면, 혹 아내가 병원으로 신고하지 않을까. 아니야. 차라리 강닥터에게 부탁을 해서 아내더러 한 번 면회를 오라고 하자. 그래서 사정하는 거야. 여보. 내가 모두 잘못했어. 그래, 무릎 꿇고 빌면 들어주지 않을까. 아니야. 그것도 아니야. 강닥터가 내 부탁을 들어줄 리 만무하고, 아내는 벌써 이년 째 오지 않았어.
■ 면담(상담) 일지 ㅇ 일 시: 2007년. 12월. 6일 AM 10:00 ㅇ 장 소: 5층 B동 면담실. ㅇ 면담자(A): 정신과 전문의 강 진 섭 ㅇ 환 자(B): 이 시 영 A : 여기 오기 하루 전날, 그러니까 사무실에 불 지른 전날, 아내와 크게 다투셨지요? 부인 얘기로는 그날 사람이 완전히 돌변하여 살림을 부수고 난동을 피웠다 던데. 사실입니까? B : 아내가 왔다 갔습니까? A : 그런 건 말씀드릴 필요 없고. 사실입니까? B : 그런 적 없습니다. 저는 결혼하고 아내와 아이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아내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합니다. 그런 몰상식한 행동을 한 적이 없어요. A : 아내분의 얘기로는 결혼하고 난 뒤, 과음만 하면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했다고 하던데요. 솔직히 말씀해보시죠. 술에 많이 취하면 헛것이 보입니까. 쉽게 말해 자기 자신과 아주 밀접한 사람이 나타난다든가 말이죠. 그 사람이 자신을 조정하고 통제하며 어떤 길로 이끌고 있다는 것 못 느끼셨어요? B : 맹세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난 미치지 않았어요. 솔직히 술은 좀 먹고 다녔습니다. 헌데 그런 일은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평소 하는 것 아닙니까? A : …… 당신은 자신에게 좀 솔직해 지는 게 치료나, 여러 면에서 유리합니다.
그렇게 내내 고민을 하다, 나는 아까 낮에 박형과 만나기로 한 식당으로 향했다. 그는 먼저 와서 아까와는 달리 초조하게 담배를 한 대 물고 있었다. “결심 했어?” 그도 입술이 몹시 떨리고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의 손을 꼭 잡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참 맑은 눈이었다. 술만 먹지 않으면 이렇게 좋은 사람인데, 그 놈의 술 때문에 가정도, 사회생활도 엉망이 된 사람. 어린 시절 너무 힘겹게 살던 와중에 술에 취해 아내를 폭행하는 아버지가 미워,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어느 순간 아버지와 똑같이 닮아버린 그였다. 그는 그 자신이 얼마나 미웠을까. 나 역시 어린 시절, 술에 취한 아버지 때문에 밤마다, 새벽마다 옆집으로, 동네 뒷산으로 피해 다녔다. 이불이 날아가고, 가재도구가 창문으로 던져질 때,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입술을 깨물었다. ……복수하리라.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결혼은 두 명이 하는 게 아냐. 네 명이 하는 게지. 그날 밤. 그러니까 내가 사무실에 불을 지른 전날이었다. 나는 그날 야근이 있어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고 직원들과 간단하게 한 잔을 한 후 집에 돌아왔다. 그 때 갑자기 욕탕에서 나온 아내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난 어이가 없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조신한 아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말을 이어하는 것은 아내가 아니었다. 난 무슨 꿈을 꾸고 있나 싶어 눈을 비벼보았다. 야. 넌 나와 잠자리할 자격이 없어. 넌 언제나 이런 식이지. 지금이 몇 시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는 있는 거야? 도대체 남편이라는 작자가 생각이 없어요. 저번 주부터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몇 번이나 말해주었건만 선물은 고사하고 아예 기억도 못했지? 아내의 어린 시절을 빼다 박은 듯한 조그만 꼬마 여자 아이였다. 넌 누군데? 나는 별 수 없이 조심스레 물었다. 꿈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아내는 나와 이 꼬마의 대화를 듣는 둥 마는 둥 화장대 앞에서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나? 난 네 아내지. 어이가 없었다. 난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하고 골똘히 생각하다, 머리를 말리고 있던 아내를 불렀다. 그런데 아내는 내 목소리를 못 들은 체 했다. 내가 다시 큰소리로 여보, 하고 불렀지만 아내는 태연했다.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왠지 목소리에 힘이 없어지고 발이 바닥에 딱 붙어 꼼짝할 수 없었다. 그때 내 안에서도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 몸이 좌우로 움찔거리더니 내 안에서 무엇인가 쑤욱, 하고 나오는 것이다. 나는 너무 놀라 고함을 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야! 뭐 생일? 지금 생일이 중요해? 나는 이 시간까지 너하고 애새끼들 먹여 살리려고 죽도록 일하고 온 사람이야. 그까짓 생일이 뭐 대수야? 그래. 이제 너 본심이 나오네. 아니 나는 돈 안 벌고 놀기만 했어? 나도 오늘 병원에서 힘들게 일하고 애들 다 씻기고 재우고 이제 조금 쉬는 거야. 아이고, 내가 못 살아, 어쩌자고 너 같은 작자를 만나가지고. 내 참. 어이가 없네. 병원에서 번다면 도대체 얼마나 번다고 그래? 그리고 아이들돌보는 게 원래 여자들 할 일 아니야? 뭐? 말 다했어? 내가 봐도 이런 상황은 아니다, 싶었다. 나는 얼른 내 안의 아이를 끌어안아 입을 막았다. 이상한 건 아내가 이번에는 이 아이들의 대화를 들었다는 것이다. 아내는 내 얼굴을 똑바로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얼른 내가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불현듯 나는 얼마 전, 서점에서 사 온 어떤 심리학자가 쓴 ‘내재적 과거아’라는 책을 생각해 내었다. 어른이 되었어도 각자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어린 시절 아이가 죽지 않고 깊은 쓴 뿌리가 되어 한 번씩 살아난다는 내용이었는데, 나는 그때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다. 아, 아, 그런데 이게 사실이었단 말인가. 그러는 사이에 또 내 안의 아이가 내 손을 뿌리치며 아내의 아이에게 독설을 내뱉고 있었다. 아내의 아이도 못 참겠는지 맞고함을 쳤다. 그 와중에 아내의 얼굴은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아내의 실망한 모습을 보자 나는 끝내 폭발하고 말았다. 나는 예전 내 아버지가 한 것처럼 닥치는 대로 살림을 부수고, 옷가지들을 창 밖으로 던져버렸다. 아내는 기겁을 하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무슨 생각해?” 박형이 날 이상한 듯 쳐다보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이번 주 일요일이라고? 가만 있어봐. 김간호사하고 김지만이 근무는 아니지?” 나는 나름대로 지금까지 내게 잘 해주던 김간호사와 김지만이가 생각났다. “그럼. 나도 양심이 있지. 이형하고 관련 있는 사람들이 피해 보면 안 되지. 걱정 마. 그네들은 다 쉬는 날이야.” 다음 날부터 우리는 하나씩, 하나씩 완벽하게 준비를 해갔다. 박형은 탈출할 때 직원들을 묶을 빨래 줄을 용케 구해왔고, 나는 직원 식당에 청소차 간 김에 과도를 훔쳤다. 당일 직원들의 입에 부착할 테이프는 박형이 생일자 파티에 쓴다며 사회사업가에게 몇 개 빌려 왔다. 갈아입을 사복도 미리 준비했다. 드디어, 당일 새벽이었다. 숨죽여 잠 못 드는 내게 박형이 날 깨우러 방으로 왔다. 물론 나는 깨어 있었다. 우리는 복도를 숨죽여 몸을 바짝 낮추어 걸었다. 내가 뒤에 기다리고 박형이 간호사실을 두드렸다. 그렇게 한참을 두드렸을까. 당직이던 박간호사가 하품을 하며 무슨 일이에요, 하고 문을 열자마자, 박형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다. 나 역시 순식간에 그녀의 팔을 묶고, 입을 테이프로 봉해버렸다. 그 새 박형은 간호사실과 연결된 면담실 소파에 자고 있던 보호사 황을 툭하고 발로 찼다. 그래도 그가 일어나지 않자, 이번에는 박형이 그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그제야 눈을 뜬 그는 박형과 나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형은 그의 멱살을 잡고 일으킨 후에 그대로 머리를 그의 얼굴에 받아버렸다. 어이쿠, 하는 그의 단말마적 비명이 나오자마자 나는 재빨리 테이프로 그의 입을 막고, 빨래 줄로 두 팔을 꽁꽁 묶어버렸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의 바지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5층, 4층, 3층, 2층, 1층 그리고 현관문을 나서자 말자 우리는 단번에 그때 보아 두었던 철조망으로 갔다. 주위는 아직 어둑했다. 박형이 앞장서고 뒤이어 내가 철조망 사이로 빠져나갔다. 새벽공기가 차가왔다. 우리는 서둘러 굳게 닫힌 병원 정문을 가로질러 꿈에도 그리던 마을버스가 도착하는 간이 정류소로 갔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시내로 가는 첫 마을버스가 올 것이다. 나는 매일 새벽마다 서있던 5병동 식당의 창을 바라보았다. 내가 없으니 불은 꺼져 있었다. “어떻게던 발견 안되도록 가급적 멀리 튀자. 이런 생지옥에 다시 올 필요 없어.” 박형이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 했다. 그 말에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가정에서조차 짐이 되어버린 인생들. 스스로 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병동 사람들을 두고 떠나려니 나는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이형, 마누라 만나거든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라. 네 성깔에 이런 데 오래 쳐 박아 두었다고 대들지 말고, 알았지?” 박형이 내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박형이나 잘 하슈. 이 기회에 술도 좀 끊어 버리고.” 나는 어쩌면 이게 그와 마지막 만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에도, 내 눈에도 눈물이 글썽했다. “물론이지. 내 꼭 잃어버린 세월을 꼭 만회할 거야. 이제 다시는 집에는 안 갈 거고 대신 내 고향에 가서 농장 하나 할 거야. 다 생각해 두었어. 자리 잡히면 연락할게. 그때 대포 한 잔 하자구.” 그 때 어눌한 어둠 속을 헤치며 첫 마을버스가 오고 있었다.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잠시 고개를 들다, 내가 매일 서 있던 5병동 식당을 바라보았다. 순간 난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이 켜지나 싶더니, 그곳에 한 동안 보이지 않던 나의 내재적 과거아가 서 있는 것이다. 그 아이는 날 똑바로 보고 있었다. 순간 불안한 정적이 흘렀고, 그 애는 내게 조용히 명령했다. ‘가지마.’ ‘왜?’ ‘그건 너 답지 않아. 정식으로 퇴원 수속을 밟고 가야 돼. 지금 가면 아내가 무척 실망할 거야. 아마 네 얼굴도 보지 않으려 할 걸.’ 그 아이의 말에, 나는 어떤,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이 내게 작용하는 걸 느꼈다. 발이 그대로 얼어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한 동안 보이지 않던 그 애가 왜 지금 나타나서 내 과거와 현재를 이렇게 묶어 버리는 걸까. 나는 뭐라 저항할 수가 없었다. “뭐 해? 안타고.” 박형은 이미 버스에 올라 타 계단에서 날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미 내 몸과 마음은 그 아이의 명령에 얼어붙은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고 있을 때, 마침내 버스기사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아! 탈거요, 안 탈거요? 별 수 없이 나는 박형 더러 먼저 가라며 손 사레를 쳤다. 그는 어이가 없는지 그저 내 얼굴만 빤히 보며 왜 그래, 만 남발했다. 그러는 사이 버스 문은 닫혔고 이제 시끄러운 굉음을 내며 버스는 멀리 동이 트는 곳으로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서 창가의 그 애만 바라보고 있었다. 끝.
당선소감 성탄절 다음날 마침 휴가라 이제 네 살 된 딸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다 당선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제일 먼저 내 소설쓰기의 시발점이 된 형님에게 전화를 거는데 왜 그리 목이 메이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해보니, 오랜 기간 겨울 이 맘 때쯤만 되면 문학을 꿈꾸는 자들만이 공유하는 창작의 고통, 설렘, 찢겨지는 습작 등이 있었다. 무엇을 위하여 이런 힘든 작업을 시작해야 하는지 갈등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굳어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해방이다. 허나 역설적으로 이제 다시 시작일 뿐이다. 창작의 기쁨, 고통 역시 내가 안고 가야할 숙제이다. 내 안의 아이, 내재적(內在的) 과거아를 위하여…….
끝으로, 신춘문예공모를 허락해주신 경남일보와 부족한 글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 해군 군수사령부 장병 및 군무원들, 부산 장전동 교회 찬양팀 ‘비파와수금’, 내 아내 이무선, 아이들(솔파, 미래)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둠이었던 내 삶을 빛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부산시 금정구 장전1동
첫댓글집사님 글 잘읽어보았네요^^ 문학을 꿈꾸는 자들만이 공유하는 창작의 고통, 설렘, 찢겨지는 습작 ...집사님 말씀속에 그간의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지네요..제가 얼마전 읽은 책에 어린시절의 상처 치유하기에 관한 글이 있었는데 그 글을 읽으면서 저도 제 유년의 상처를 애도하고 내면의 아이와 만나는 일단의 작업?을 한적이 있어요...물론 그리 간단치가 않음을 실감하긴 했지만 어느정도의 위안이 들더군요...상처 입은 내안의 아이를 지닌 우리가 아이를 낳아 키우는 현실이..많이 마음이 아파서 ..상처를 지닌 우리가 또 다른 상처를 주는 자리에 서지 않기를..기도하고있습니다...그래도 우리를 보배롭고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
첫댓글 집사님 글 잘읽어보았네요^^ 문학을 꿈꾸는 자들만이 공유하는 창작의 고통, 설렘, 찢겨지는 습작 ...집사님 말씀속에 그간의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지네요..제가 얼마전 읽은 책에 어린시절의 상처 치유하기에 관한 글이 있었는데 그 글을 읽으면서 저도 제 유년의 상처를 애도하고 내면의 아이와 만나는 일단의 작업?을 한적이 있어요...물론 그리 간단치가 않음을 실감하긴 했지만 어느정도의 위안이 들더군요...상처 입은 내안의 아이를 지닌 우리가 아이를 낳아 키우는 현실이..많이 마음이 아파서 ..상처를 지닌 우리가 또 다른 상처를 주는 자리에 서지 않기를..기도하고있습니다...그래도 우리를 보배롭고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
으로 의지하며 기도할때 제 맘에 위로와 희망이 있습니다...이번 일이 집사님께..해방 그러나 다시 시작의 시점이 되어...새로운 귀한 열매를 맺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비록 뒤늦게나마 신춘문예소설에 당선된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또한 집사님과 같이 장전동교회에서 믿음생활을 같이하고있다는데 너무나 기쁨을 느끼며 이를 계기로 더욱더 크고 귀한 열매를 맺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