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리고 또 장벽
밤기차는 끝없는 어둠을 헤치며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가장자리를
따라 서리꽃이 피어나고 있는 창밖에는 어둠만 가득할 뿐 먼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난방장치가 없는 야간 완행열차의 승객들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선잠이 들어 있었다.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은 일행과 화투를
치거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참 유 형, 회충약은 먹었어?"
잔도 없이 술을 한 모금 마신 배상집이 소주병을 내밀며 콧잔등을 찡
그렸다. 풀어진 그의 눈에는 술기운이 흥건했다.
"예, 며칠 전에."
유일민은 4홉들이 소주병을 입에 물고 거꾸로 세웠다. 그의 얼굴도
술기운 덕에 꽤나 혈색 좋게 보였다.
"어떻게, 많이 나왔어?"
오징어 다리를 입에 물고 우물거리며 배상집이 쿡쿡 웃었다.
"에이, 그걸 뭘........"
오징어를 찢던 유일민이 눈을 흘기며 얼굴을 찌푸렸다.
"왜, 더럽다 그거야? 우리들의 가난한 뱃속에서 착취를 일삼아온 그
얌체머리 없는 것들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당연히 확인했어야지."
"선배님이나 많이 하세요."
유일민은 비위 상하는 것을 막으려는 듯 다시 술병을 기울이고 그것
을 배상집에게 내밀었다.
"하! 유 형이 술 마시는 것 하나는 남자다워. 아주 짱짱한 적수라니
까." 배상집은 술병을 받으며 정겨운 웃음을 짓고는, "한 번으로 안심할
수 없으니까 완전 소탕하려면 신체검사 직전에 또 한 번 먹어야 할 거
야. 하여튼 독일사람들 참 대단해. 그까짓 회충 때문에 6개월씩이나 잡
일만 시키며 갱내에 들여보내지 않았다니 말야." 그의 얼굴에는 독일에
대한 선망의 빛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그게 전염을 막기 위한 접촉 차단인데, 회충을 박멸하겠다는 뜻은 좋
지만 그게 전염병도 아닌데 그리 격리시킨 건 너무 과잉반응 같기도 하
고, 모독당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어쨌거나 창피스러운 일이지요."
"아니, 심하다고 생각할 것 없어. 회충이 무슨 경로로든 옮겨다니는
것은 틀림없고, 전 국민들에게 회충이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나타난 회
충 보유자들은 독일 입장에서 보면 전염병 환자들일 수 있어 온 국민에
게 회충이 없는 독일과 회충 정도는 예사인 한국, 그 차이가 결국 국력
의 차이고 민도의 차이 아니겠어."
배상집이 한심스럽다는 듯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회충 사건은 우리나라 광부 제1진이 서독에 도착하자마자 발생한 것
이었다. 광부들은 도착 즉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그들의 몸에서 회충
이 발견되었다. 그러자 서독 보건당국에서는 비상대책을 강구했다. 그
들에게 회충약을 먹임과 동시에 회충이 박멸될 때까지 갱내 작업을 시
키지 않고 따로 격리시켜 폐탄더미 같은 데다 나무를 심게 하는 등 잡일
을 시켰다. 그 기간이 자그마치 여섯 달이었다. 그리고 한국에 회충 보
유자를 제한하는 통고가 온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처음에 서독에서
는 자기네 같은 줄만 알고 폐결핵 환자만을 제한했던 것이고, 한국에서
는 그 규정에 따라 엑스레이만 찍고 대변검사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제 서독 광부로 지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회충 제거가 엑스레이 통과만큼
중요한 일이 되어 있었다.
"화순이 광주에서 얼마나 된다고 했지?"
전라도길이 처음인 서울내기 배상집이 또 궁금증을 드러냈다.
"한 오륙십 리 정도요."
"유 형은 좋겠네. 고향 땅에 가니까."
"글쎄요......"
오징어를 우물거리고 있는 유일민의 입가에 씁쓰레한 웃음이 스쳐갔다.
"자아, 이거 유 형이 마저 비우고 우리도 한숨씩 자자구. 벌써 새벽
2시야."
배상집이 입에서 뗀 술병을 유일민에게 건네며 진저리쳤다. 유일민은
말없이 술병을 받아들었다.
변소를 다녀온 배상집은 곧 잠이 들었다. 유일민은 술병을 다 비우고
스키파카를 여미다가 문득 임채옥을 생각했다. 스키파카는 세월이 흐른
만큼 꽤나 낡아 있었지만 변할 줄 모르는 채옥의 마음처럼 따뜻하기는
여전했다. 유일민은 채옥의 그 솔잎 냄새 같기도 하고 무슨 풀 냄새 같
기도 한, 풋풋하면서도 아련하고 그리고 자극적인 체취를 진하게 맡고
있었다. 눈을 감자 채옥의 알몸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유일민은 채
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는 것을 느끼며 신음했다.
"오빠, 저 감시당하고 있어서 꼼짝을 할 수가 없어요. 어디선가 아빠
한테 들킨 거예요. 그치만 차라리 잘됐는지도 몰라요. 어차피 한 번은
당해야 될 일이었으니까요."
가정교사를 하고 있는 친구네 집으로 임채옥이 걸어온 전화였다.
"굉장히 야단맞았을 텐데........"
"전 괜찮아요. 근데 혹시 오빠한테 무슨 일 없었어요? 아빠가 학교로
사람을 보냈다던가........"
"아니, 아무 일도 없었는데."
유일민은 태연하게 시치미를 뗐다.
"그거 정말이세요?"
"그럼."
"오빠, 아빠가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니까 만나서 무슨 소리를 하더
라도 굽히지 말아야 해요. 알겠어요?"
"......응......"
"오빠, 목소리에 왜 그렇게 힘이 없어요?"
"아니야, 알았어."
"전화 더 길게 못해요. 오빠 사랑해요. 힘내세요."
쪽 입을 맞추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급하게 끊겼다.
차마 잊으라고, 애초에 안 될 관계였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채옥이는
더욱 열렬해지고 단단해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서독행을
작정하고 있는 터였다.
그 뒤로 몇 차례 더 통화를 했지만 속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만 서로를
단념하자는 것은 줄기찬 감시 속에서 애달아 있는 채옥이에게 차마 못할
짓이었다. 그리고, 그 말이 채옥이를 자극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
렵기도 했다. 아무 말 없이 서독으로 떠난 다음 일을 매듭짓기로 했다.
방에 눈을 감고 있으면 채옥이 생각에 한정없이 빨려들게 되고, 현실
성 없는 공상들이 자꾸 떠올라 유일민은 눈을 떴다. 채옥이가 사라진 눈
앞에는 배상집이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몇 개월 동안에 한독포켓사전
을 거의 외우다시피 한 열정과 집념의 사나이 배상집을 유일민은 물끄
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성화에 못 이겨 자신도 고등학교 때 썼던
한독사전의 먼지를 다시 털었고, 독일문화원에도 다니게 되었다. 그 덕
에 탄광 용어는 완벽하리만치 떼었고, 고등학교 때 실력이 되살아나면
서 회화도 쾌나 능숙해졌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화순 탄광행을 서두른 것은 배상집이었다. 탄
광은 강원도에 많지만 곳곳마다 서독에 가고 싶어하는 '나이롱 광부'들
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 이미 소문나 가짜 경력증을 의심받기 십상이라
는 거였다. 가짜 경력증이 들통나지 않게 하려고 동떨어진 데를 골라낸
것이 화순 탄광이었다.
"5만 원이면 쌀 열 가마값이긴 하지만 많다고 생각할 건 없어. 그보다
몇십 배 많은 돈을 벌기 위한 투자니까 그리고 양심이니 뭐니 하는 것
도 생각할 것 없어. 어차피 가짜끼리 벌이는 경쟁이고, 한국에선 돈 안
쓰고는 되는 일이 없으니까 인생살이 다 돈 놓고 돈 먹기야."
배상집은 마치 세상살이에 이골나고 산전수전 다 겪은 장돌뱅이처럼
말했다. 그 돈 5만 원은 가짜 경력증을 만드는 데 필요한 뒷돈이었다.
어머니가 마련한 5만 원은 시장통의 이자가 비싼 돈이었다. 그러나
서독에 가서 한 달 벌이로 갚을 수 있으니까 마음 가볍게 먹기로 했다.
기차가 광주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막 떠오르고 있었다. 역전에서 광
주 명물 중의 하나인 추어탕을 먹고 그들은 바로 화순행 버스를 탔다.
"이거 영 딴 나라에 온 것 같은데."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배상집이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뭐가요?"
"말씨가 너무 달라서 말야. 어리벙벙한 게 정신이 이상해지는 느낌
이야."
"제가 서울에 처음 갔을 때와 비슷한 모양이군요. 곧 익숙해져요."
유일민은 배상집의 무릎을 잡아주며 웃었다.
화순 탄광은 들녘을 끼고 있는 읍내에서는 예상할 수 없었던 산골짜
기들을 돌고 돌아 자리잡고 있었다. 새로운 야산을 이루고 있는 시커먼
석탄더미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 엄청난 석탄더미들을 보는 순간 유
일민은 가위가 눌리는 것을 느꼈다. 석탄이라고 본 것은 기껏해야 연탄
이었고, 탄광은 첫 발길이었다.
"하아 저 시커먼 게 사람 기죽이려고 하네." 배상집이 침을 뱉으며
담배를 빼물고는, "너희들은 내 인생을 밝힐 등불이다. 앞으로 잘 좀 사
귀어보자. 가자구, 소장 만나러." 그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앞장섰다.
"얼굴을 보나 손을 보나 탄광묵기들이 아니신디?"
탄광에 제격인 것처럼 몸집 건장하고 얼굴 우락부락한 소장이 던진
첫마디였다.
"예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다 알고 계시겠지만 서독에 갈 마음으로
도움을 청하려고 찾아뵈었습니다."
배상집이 문 쪽의 눈치를 살피며 낮고 공손하게 말했다.
"바깥에 안 딛긴께 안심허드라고." 소장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뜸을
들이고는, "그려, 여그서 경력증을 끊어 갖고 비행기 탄 사람덜이 멫십
명이 되기넌 되는디, 근디 고것이 말이여......,긍께 거 머시냐......."
그는 고개를 틀어 돌리며 입맛을 다셨다.
"예, 비용은 다 준비했습니다."
유일민은 배상집이 사투리를 잘 알아듣지 못할까 봐서 얼른 입을 열
었다.
"그려? 공정가격이 얼맨지 아는감?"
"예,5만 원씩 준비했습니다."
배상집은 손가락까지 확 펴 보였다.
"잉, 사람덜이 생김대로 똑똑허시. 근디 말이여, 이 시상 밥그럭은 다
저저끔 임자가 따로 있드랑께. 무신 말인고 허니, 서독에 기술 존 광부덜
얼 보내야 헌다고 작년에 여그 와서 3년 이상 경력자를 뽑아 신체검사를
안 혔다고. 근디 열에 아홉이 미역국이여. 왜냐허먼 폐에 찬 탄가리가 엑
스레이에서 다 걸려부렀단 마시. 나 말이 무신 뜻인지 알아묵겄어?"
소장은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게 자신들의 행위를 교활할 만큼 합리화
시키고 있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럼 어차피 신참들이 가게 돼 있는 거니까
저희들도 맘 편하게 먹겠습니다."
배상집이 눈치 빠르게 대꾸했다.
"잉, 말귀 잘 알아묵어 좋구만 그랴. 글먼 낼보톰 한 열흘 연습혀 보드
라고."
소장은 만족스럽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열흘 가지고 되겠습니까?"
"하먼. 닷새 바깥에서 갱목 날르는 연습허고, 닷새 갱 안에 들어가 귀
경험서 꼭꽹이질 혀보면 되는 것이제. 더 헌다고 기술 늘 것도 아니고,
생고상 먼첨 끌어다가 헐 것 머 있간디?"
"예,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가끔 경력증이 가짜로 탄로나
는 수가 있는데......"
배상집은 소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런 말 들었는디, 그야 줄을 잘못 댄께 그렇제, 여그서넌 절대 그런
일 웂어. 나가 여그 왕이고, 회사로 조회가 오면 나가 다 도장 찍게 되야
있응께. 만약 그런 일 생기면 열 배로 물어줄 것잉께로 아무 꺽정을 하
덜 말어."
소장은 주먹을 쥐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럼 언제쯤이나........"
"그거 머 끌고 자시고 헐 것 있간디. 돈 간수허기만 귀찮허제. 쇠뿔은
단짐에 빼부는 것이 질이여. 1년 경력증이면 되겄제?"
소장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배상집과 유일민은 서로 어이없어하며 속주머니로 손을 디밀었다.
강아지까지 검게 변한 궁기 흐르는 탄광촌의 밥집 겸 여인숙에 잠자
리를 정한 두 사람은 다음날부터 연습을 시작했다.
갱이 무너지지 않게 받치고 버티어대는 갱목은 평균 2미터 길이에 수
령 30년쯤 되는 통나무들이었다. 그 무게는 대충 쌀 반 가마와 맞먹는다
고 했다. 그걸 거뜬하게 한쪽 어깨에 올리고 뛰듯이 걸어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워디서나 광부가 허는 일은 두 가지여. 요 갱목 날라다 세우는 일허
고, 꼭꽹이질 요령지게 혀서 탄 캐는 일 말이제. 나가 들어봉께 서독이
기계화되었다고 혀도 갱목이 나무에서 쇠로 바꽈진 것뿐이제 세우기는
사람 심으로 허는 것이야 매일반이고, 쇠로 안 되는 디는 나무를 쓴다는
것이여. 글고 탄얼 캐는 디도 기계가 못 들어가는 고약시러운 디는 꼭꽹
이질얼 혀야 하고 말이시. 요런 일은 기운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기운
에다가 요령이 잘 버물러져야 허는 것이구만. 쌩기운 쓰면 쌩똥만 빠지
는 법잉께 살살 험스로 머리 써 요령을 익히드라고잉."
소장이 실실 웃으며 한 말이었다.
그들은 통나무를 세워 그 중심을 잡아 어깨에 올리는 첫 단계부터 애
를 먹었다. 별로 표나지 않게 위아래 굵기가 다른 통나무의 무게중심은
가운데가 아니었다. 그 위치를 한눈에 척 알아보고 어깨를 갖다 대는
것, 그것이야말로 경험이 축적된 요령이었다. 그 중심이 맞지 않으면 몸
의 중심까지 흔들리면서 걸음이 비틀거려지고 힘이 배로 들었다.
"고것이 워디 말로 되간이. 탄밥그럭 수가 시나브로 갤차주는 것이제.
어떤 광부의 이 뚱한 말을 배상집은 잘 알아듣지 못하고 유일민을 쳐
다보았다. 유일민이 서울말로 바꾸어서야 그는 탄식하듯 한마디를 토해
냈다.
"그래, 진리가 따로 없다."
그들은 통나무들의 무게중심을 짚어내는 데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통나무마다 굵기가 달라 어깨에 올려놓고 보면 한쪽으로 기울어
지면서 몸을 끌어당기고는 했다. 빨리 그 중심을 잡으려고 선 채로 서너
차례씩 몸을 추슬러 통나무를 옮기는 것은 여간 큰 고역이 아니었다.
"아아. 인내는 쓰다. 그리나 그 열매는 달다!"
갱구 앞에다가 통나무를 부리며 배상집은 이런 경구들을 하늘을 향해
목청껏 외치고는 했다.
유일민은 그런 배상집의 모습을 쓸쓸하고 슬픈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가난 속에서도 사나이의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그렇게 스스로를 독려하
고 있는 그 외로운 모습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튿날 아침 그들은 잠자리에서 선뜻 일어나지 못하고 뒹굴며 번갈아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깨고 옆구리고 허리고 팔다리가 결리고 쑤
시고 욱신거리며 온몸이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다.
"학필이들 단단히 당하는구나, 오오, 가련한 내 청춘이여."
배상집이 네 활개를 펴고 누워 신파조로 읊어댔다.
이틀이 지나면서부터 그들은 갱목을 다루는 요령을 빠르게 터득해 나
갔다. 요령이 늘어갈수록 갱목이 가벼워지고 몸에 탄력이 붙어갔다.
엿새째 되는 날 갱 안으로 들어갔다. 광차가 오가는 널찍한 수평갱을
지나 탄맥을 따라 이어진 사갱으로 들어가면서 검은 먼지가 앞을 가리
기 시작했다. 막장에 이르자 캐프램프 불빛이 2미터 앞도 밝히기 어렵
게 검은 먼지는 자욱하게 퍼져 숨을 막히게 했다
검은 지옥......, 유일민의 머리를 친 생각이었다. 그리고 광부라는 사
람들의 생존을 처음으로 심각하게 생각했다. 숱하게 연탄을 보면서도
그들의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밖으로 나와서 보니
배상집의 얼굴이 온통 새까맸다. 눈만 반짝거리는 그 얼굴에서 유일민
은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워째, 해묵을 만허셔?"
소장이 느물거리며 웃었다.
"예, 탄가루 맛이 아주 삼삼합니다."
배상집이 건달인 척하며 대꾸했다.
그 위장된 표현에 가슴이 찡해지며 유일민은 눈길을 딴 데로 돌렸다.
먼 겨울 하늘은 푸르기만 했다.
"와따메, 봉사 눈 뜨나마나, 앉은뱅이 스나마나 아니드라고. 비누 아
깝고 뜨신 물은 워디서 그냥 솟간디?"
연신 코를 풀어대며 낯을 씻고 또 씻는 둘을 향해 밥집 주인여자가 퉁
을 놓았다.
"예에......?"
배상집이 또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한 얼굴로 주인여자를 쳐다보았다.
"광부 낯 씻으나마나니까 그만 씻으라는 말이 잖아요."
유일민은 빙긋이 웃으며 설명을 붙였다.
"아아, 그런 뜻이군. 이거 말야, 전라도 말은 참묘하고도 희한해 이리
돌려 치고 저리 돌려 치고, 비유도 많고 유식한 말도 많아 정신이 하나
도 없어. 하여튼 뭔가 수준이 다른데, 그 이유가 뭐지?"
배상집은 유일민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글쎄요, 그게 전라도만의 특징일 텐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어려서부터 그런 말 속에 묻혀 살았을 뿐 그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유일민은 그냥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세수를 하면서 코를 풀자 석탄가루가 또 검게 묻어 나
왔다.
"생각보담 강단지시? 하여튼지 간에 돈 잘 벌고, 요것 얼매 안 된께
노자에 보태드라고."
열흘을 채우고 떠나는 그들에게 소장이 누런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와따메, 인심 한번 좋습니다 이!"
화순 읍내 다방에서 봉투에 든 돈이 서울 가는 차비만큼인 것을 확인
한 배상집이 신이 나서 토해낸 말이었다.
"하하하하........"
유일민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전라도 말을 흉내낸다고 냈는
데 그 짧은 말에 서울말이 섞이고 만 거였다.
"아니, 왜 그래?"
"흉내를 내려면 똑똑히 내요. 와따메, 인심 한번 좋습니다 이, 가 뭡니
까. 와따메, 인심 한번 후해부네 이, 지."
"아, 그런가? 어쨌거나 유 형이 그렇게 기분 좋게 웃는 건 첨 보는 것
같은데 역시 내 능력이 탁월하잖아?"
배상집의 바람으로 유일민은 광주 시내 몇 군데를 구경시키고 밤기차
를 탔다. 그들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잠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유 형, 돼지고기 많이 먹어. 몸무게 아슬아슬하잖아."
서울역에서 악수를 하며 배상집이 말했다. 서독 가는 광부의 신체검
사 기준은 키가 1미터 65센티미터 이상에 몸무게가60킬로그램 이상인
데, 유일민은 키 1미터 70에 몸무게가 59를 가까스로 넘었던 것이다.
"선배님도 안심하지 말아요, 괜히."
유일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배상집은 키 169에 몸무게가 60이
될까 말까 했던 것이다. 그들의 가난은 속일 수 없이 몸무게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유일민은 보름 뒤에 마감인 구비서류를 준비하면서 황당한 일을 당하
기 시작했다. 첫 번째 서류인 신청서부터가 말썽이었다. 담당 직원은
'다 떨어졌다'는 한마디로 싸늘하게 내쳤다.
"그럼 더 찍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유일민은 눈치 보아가며 조심조심 말을 꺼냈다.
"당신 뭐야! 당신이 예산 집행해? 늦게 와서 무슨 잔말이 많아."
담당 직원은 정나미 떨어지게 눈을 부라리며 반말지거리를 했다. 전
형적인 공무원의 행투였다.
그러나 신청서는 지원자들이 많아서 다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무료
로 배포하는 그 서류는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구멍가게에서 500원
씩에 팔고 있었다.
"이것도 값이 올랐네. 300원씩이라고 하던데."
어떤 남자의 투덜거리는 말을 들으며 유일민도 돈을 꺼낼 수밖에 없
었다.
그런데 병적증명서가 또 말썽이었다. 용도를 물은 구청 직원은 무조
건 병무청으로 가라고 했다. 병무청에 갔더니 또 무작정 구청으로 가라
는 것이었다.
"당신 빨갱이야? 가라면 가지 뭐 그리 말이 많아!"
유일민은 그때까지도 그게 돈을 받기 위한 수작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두 번째 시계추 노릇을 하고서야 한 사람의 귀띔을 들었다. 그
런데 그 뒷돈이 자그마치 3만 원이었다. 그러나 병적증명서가 없어서는
첫 번째 자격 상실이니까 돈을 안 쓸 수 없다고 했다.
유일민은 난감한 심정으로 배상집을 찾아갔다.
"혁명이고 나발이고 이 나라 이거 망할 거야. 달라진 건 하나도 없고,
군바리 빽이면 안 통하는 데가 없으니까 더 개판이 된 거야. 더런 놈의
세상."
또 빚을 내야 하는 처지라서 배상집은 열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어쩌겠어. 가난한 게 죄고, 이런 나라에 태어난 게 잘못이지. 이제 와
서 작파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긴 한숨을 따라 배상집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서류 마감 닷새 뒤에 신체검사였다. 지정된 병원으로 신체검사를 받
으러 간 유일민은 또 암담한 기분에 빠졌다. 150명 모집에 2천 명이 넘
어 500명씩 네 차례로 나눠 신체검사를 하는 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줄을 선 사람들은 서로 빽 자랑하기에 바빴다.
"이거 빽 없으면 신체검사고 뭐고 받을 것 없어요."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형씨 빽은 뭐요?"
"짱짱하지, 국회의원."
"헤, 그건 구땡밖에 안 되는데, 난 장땡 중정이오."
"뭐요? 국회의원을 뭘로 보고 그러슈."
"이 양반이 간첩인가? 여기다 다 물어보쇼. 어느 쪽 끗발이 더 센가."
한 사람 건너 하나씩이 빽 자랑을 해대는 형국 속에서 유일민은 착잡
해져 있었다.
"저런 것 신경 쓸 거 없어. 다 허풍쳐 대는 거니까. 논산에서 봤지? 군
번 받기 전에 신체검사 받으면서 장군빽 안 가진 놈 하나도 없는 거. 다
그런 쪼의 허풍이야."
배상집이 유일민의 어깨를 두들기며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
에도 어딘가 불안한 기색이 엿보였다.
팬티바람으로 신체검사가 시작되었다. 다른 옷들은 둘둘 말아서 혁대
로 조인 다음 각자가 들고 있었다. 팬티는 거의가 무명베로 집에서 손수
만든 것들이라 헐렁하고 길어 볼품이라고는 없었다.
"아이고, 왜 이렇게 느려 그래. 나 오줌보 터지겠는데."
"아, 얼른 가서 싸고 오슈."
"속 편한 소리 하지 말아요. 난 1키로가 모자라 물이고 쥬스고 배가
터지도록 마셨단 말이오."
"그럼 오짐보 터져야겠구먼."
뒤에서 들리는 이런 말에 배상집은 고개를 돌리다 말고 유일민을 쳐다
보았다. 그 눈길이 몸무게는 어떻게 됐느냐고 묻고 있었다. 유일민은 고
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배상집의 말마따나 돼지고기를 먹고 해서 61킬로
그램이 되어 있었다.
배상집과 유일민은 키를 재고 몸무게를 다는 방으로 들어섰다. 넓은
방에는 스무여 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순서가 조금씩 앞으로 당겨지고
있는데 한 사람이 저울에서 내려오는가 싶더니 푹 주저앉으며 토하기
시작했다.
"어, 저 사람 왜 저래?"
"어디 아픈가 분데."
사람들이 술렁거렸고, 두 의사가 서둘러 그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그
런데 그 사람은 몸을 구부린 채 계속 왝왝거리며 토하고 있었다.
"아니, 저게 뭐야, 저게?"
"저 누렇고 느끼한 게 뭐지?"
"아, 날계란이다, 날계란!"
"맞아, 몸무게 늘리려고 생달걀을 마구 먹어댄 거야."
어느새 그 사람을 에워싼 사람들이 눈치 빠르게 입놀림을 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어디가 아파요?"
의사가 그 사람의 등을 두들기며 물었다. 토하기를 멈춘 그 사람이 고
개를 들었다.
"의사 선생님, 저 좀 살려주세요. 배가 아파 꼭 죽을 것만 같아요."
얼굴이 핼쑥한 그 남자가 부들부들 떨며 힘겹게 말했다.
"도대체 뭘 먹었어요?"
"날계란이오. 체중이 58키로밖에 안 나가서......."
"몇 개나 먹었는데 이렇지요?"
흥건하게 퍼진 토사물을 보며 의사가 얼굴을 찌푸렸다.
"마흔 개요."
"와아!"
둘러선 사람들이 합창하듯 했다.
의사 하나가 그 사람을 부축해 나가고, 청소부가 와서 토사물을 치우
고 하느라고 신체검사는 한동안 중단되었다.
"빤스 속에 2키로짜리 납덩이를 차고 신체검사를 통과했다는 말은 들
었어도 날계란 마흔 개 먹은 친구는 또 첨 보네."
"그러게 말야. 미련하기가 곰이지."
사람들은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엑스레이 촬영, 대변 채취, 넓이뛰기, 40킬로그램짜리 모래가마 들기
순으로 신체검사는 끝났다.
"유 형도 빨리 빽을 찾아봐. 신체검사에서 반이 탈락된다고 해도 7대
1이 넘잖아. 빽 전쟁에 밀리면 도로아미타불이니까."
커피를 마시며 배상집은 아까와는 달리 심각해져 있었다.
유일민은 집으로 돌아가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빽이 될 만한 사람
은 없었다. 이규백과 김선오 선배가 떠올랐지만 그들이 도와줄 것 같지
가 않았다. 지난날 자신이 잡혀갔을 때 그들이 몸을 사리며 외면했던 기
억이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번엔 사상 문제가 아니니까 어쩔
지 모르지만 광부 노릇을 하러 떠나야 하는 자신의 초라한 꼴을 보인다
는 것도 과히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유일민은 며칠 생각하다가 달리 방법이 없어서 이규백 선배부터 찾아
갔다. 그러나 그는 군대생활을 하느라고 다른 도시에 가 있었다. 김선오
선배도 군복무를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난감해져 있던 어느 날 유일민은 파출소의 호출을 받았다. 또 무슨 일
인가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파출소장은 근황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대답을 하다 보니 서독에 광
부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까지 밝히게 되었다. 그 다음에 확인하는
것이 아버지의 과거였다. 기록을 보고 묻는 것이라서 숨기고 말고 할 것
이 없었다.
"이런 내력을 가진 사람이 외국 취업을 다 꿈꿨소?"
파출소장이 서류를 덮으며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유일민은 앞이 가로막히는 충격을 느끼며 항의하듯 말했다.
"다 위에서 하는 일이니까 난 잘 모르겠는데, 일단 신원조회가 붙어다
니는 일이면 그런 내력으로는 절대 안 되게 돼 있소. 5 .16 이후 엄청나
게 강화된 것 모르고 있소? 가보시오."
연좌제에 걸렸다 하면 그 어떤 빽으로도 안 된다는 것을 유일민은 뒤
늦게 알았다. 그리고, 광부로 떠나는 일에도 연좌제가 적용된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 불찰이었다. 남은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뿐이었
다. 유일민은 차라리 죽고 싶은 절망에 빠졌다.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 가지 않아 결국 어머니도 동생들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것이 무신 소리다냐! 자석덜이 무신 죄가 있다고. 시상에 혀도혀
도 너무헌다. 사람 노릇 못허게 아조 목을 비틀어 쥑일 작정을 헌 모양
인디, 그리 꼬라지 뵈기 싫으면 차라리 이북으로 몰아내뿔든지."
어머니가 그런 무서운 말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난 유 형 집안에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지. 나 때문에 괜히 고생
만 하고 빚지고, 본의 아니게 정말 미안하게 됐어, 그치만 빚진 돈은 걱
정하지 마. 내가 가서 월급 받는 대로 바로 보내줄 테니까. 두 달 월급이
면 깨끗하게 오케이잖아."
배상집은 이런 말을 남기고 서독행 비행기를 탔다.
카페 게시글
조정래님의 한강
한 강 = 제 2 부 유형시대 (4권)ㅡㅡㅡ 7. 그리고 또 장벽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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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10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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