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은 내가 8사단에서 중대장으로 재직하던 때였다.
내가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윤장군의 전속부관으로 보직되어 1970년부터
약 2년간을 모신 후, 광주보병학교 특보반(OAC;장교고등군사 교육과정보다 교육
기간이 단축된 임시 보수과정)을 거쳐, 뒤늦게 중대장에 부임을 하게 된 것이어서 인접 중대장으로 25기생이 있었을 정도였다.
1973년3월 어느 날, 신문지상에 탑을 장식하면서 세상이 깜짝놀랐던 "윤필용장군 구속"기사가 호외로 뿌려졌고, 나는 춘계진지보수공사에 투입되어 포천의 어느 산 정상에서 12시 라디오뉴스를 통해 그 경천동지의 뉴스를 들었다.
구속이유는 독직, 부정, 공금횡령등 온갖 죄는 다 뒤집어 씨운 파렴치한 행위로 (박정희대통령이 대노하여 구속을 지시했다함)
현직에서 즉각 퇴출되면서 보안사에서 구속수사가 진행되었고, 군법회의에서 장기징역형에 처해 수 년간 복역 후, 특별 사면되어 이등병으로 강직된체 일반 시민으로 평생을 살다 2010년 병사하셨다.
본인 윤필용장군은 부당한 처사임을 잘 알면서도 사망시까지 재심을 거부하였다.
(주군처럼 모셨던 대통령이 주는 벌에 대해 어떤 반응도 해서는 안 된다는 본인만의 강고한 의지)
장군으로 명예회복이 된 것은 본인이 사망한 후, 그 자손들이 재심을 통해 죄가 없음이 밝혀져 장군으로 복귀하고, 현충원으로 모시게 되므로서 이 사건은 종결된 듯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사유는, 이 사건이 아직도 완결되지 않고 있는 현장에 내가 있게되어 우리가 몸담았던 군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고귀한 한 사람의 인생을 너무도 아프게한 비극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바로 이 단면을 회고하면서 역사의 왜곡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나의 실 경험을 통해 밝히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무슨 도움이 될가?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미래를 잘 준비하기위한 가장 중요한 학습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때문이다.
미래를 준비하는건 국가도,사회도 개인에게도 매우 중요한 과업이므로!
윤필용장군 구속사건이 난 1973년은 박정희대통령이 유신체제로의 전환이 거의 끝나가는 시기여서, 정가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던 때였다.
이 유신체제를 굳혀가던 박대통령은 군의 구테타를 가장 두려워했고, 윤장군을 총애하며 군의 결속을 그를 통해 확인하곤 했었다.
그런 윤장군이 유신을 반대하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기시작한 것이 박대통령에게 보고( 박대통령의 비서측근들이 윤장군을 의도적으로 유인해 유신체제로 가서는 안된다고 한 언사를 녹취함)되었고 이 사건은 유신을 반대한 것으로는 처리가 안되어,
파렴치범으로 각색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중형이 선고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상상도 못하는 비극들이 발생하게된다.
윤장군을 구속한 보안사령관 강창성은(윤장군과 육사8기동기생이며 라이벌관계)
파렴치범으로 둔갑을 시켜야 함에 따라, 엉뚱한 사람을 구속해 지독한 고문으로 죄를 만들어 내 기소를 한 것이다.
이 희생제물이 된 분이 18기 정봉화소령(당시 사령관 비서실장)이었다.
나를 윤장군의 전속부관으로 만들어(?) 주신 분이었다.
만든다는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당시 수경사 33대대 중대장을 하던 유회국대위가 나를 정봉화소령에게 소개해, 정봉화소령이 나를 면접하고 윤장군의 전속부관으로 결정한 과정이 그러하였다.
그 당시 윤장군의 전속부관을 선발하는데 수 많은 후보들이 경선(요새 말로 오디션)을 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이런 인연으로 정봉화선배를 알게 되었는데 이 선배가 고문을 당해 반신불수가
되어 거짓의 진술서를 작성하게하고는 강제로 전역을 시켜 군에서 퇴출시켜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그로부터 46년이 지난 오늘, 그 정봉화선배는 진주의 어느 요양병원에서 대퇴부 골절에 치매초기증상이 겹쳐와 침상에서 꼼작 못하고 뼈만 앙상한채로, 다른 요양병원에 누워있는 부인을 그리며 다리근육을 살려보려고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아! 이런 비극이 이렇게 게속 진행되어야 하는가!
나는 부산에서 시간나는데로 나의 처와 같이 버스를 타고 진주병원으로 정선배를 만나러 간다.
아무도 옆에 없는 외로운 병상생활로 말을 잃어가는 선배에게 말 동무하러 간다.
치매초기여서 본인의 노력과 주변인척,동료등이 헌신적으로 같이 해주어야 치매
진행을 막고, 또 걷게 되도록 도와드려야 언젠가 다른 요양병원에 누어있는 사랑 하는 아내를 보러갈 수 있지 않겠나!
박정희대통령이 1972년 유신체제로 가면서 닥쳐올 비극을 예견하며, 정상으로 전환되기를 바래 움직였던 윤필용장군은 파렴치한 괴물로 영어의 몸이되고,
윤장군의 비서실장 정봉화소령은 파렴치범으로 각색하는 일에 제물이 되어
반병신의 몸으로 내쳐지는 신세가 된,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내가 그 현장을
지켜본 한 증인으로 이 글을 남긴다.
내가 전속부관으로 2년을 수행하면서 실제로 윤장군이 박대통령의 유신체제로의 본격적인 진입에 대해 참모총장 서종철장군과 참모차장 노재현 장군 그리고 정계,언론계등 유명인사들에게 부당함을 설파하는 자리, 그 현장에 내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진주 병원에 누워있는 정봉화소령에게 이 글을 쓰고 있는 8월15일, 이틀전 2019년 8월13일에 기쁜 소식이 날라왔다.
강제로 전역시킨 육군의 조치에 재심을 청구해 수 년간 국가와의 법정다툼에 이겨,보상금과 연금을 수령할 수 있다는 판결이 난 소식이 날라왓던 것이다.
전역시 중령진급예정자여셔 임관 11년만에 소령으로 전역했지만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20년이상 군에서 복무할 자원이므로 연금대상이며, 그동안 받지 못한 봉급과, 연금을 모두 받게 되는 판결결과가 나온 것이다.
오매불망, 이를 기다려온 정봉화선배와 그 가족들에게는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을 것이니! 아! 정의는 살아있구나!
검찰이 항소를 할 수도 있지만 일단은 2심에서 이겼으니 대법원에서 뒤집히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나는 정선배의 치매로의 진행을 막기위해 필살의 노력을 해야할 정봉화선배에게 다음 주에 달려갈 생각을 하고 있다.
최근 정봉화선배에 대한 18기 동기회와 동기생들의 개별적인 격려위문활동을
우리 동기회에 알리고자 한다.
18기동기회에 병석에서 사투하는 정선배의 모습을 자세히 전하는 일을 내가 나섰다. 정권에 눈먼자들에 의해 자행된 일로 희생양이되어 90세를 앞둔 나이에 병상에 누워있는 정선배를 보며, 나는 우선 18기 동기생가운데 평소에 나하고 가끔이지만 안부를 전하며 지내고 있는 선배에게 전화로 정선배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전화로 알렸고,
그 이후,
18기 동기회는 즉각 반응해 모금활동을 전개해서 거의 2천여만원의 거금을 걷어
진주병원에 동기회대표들이 와 전하고 위문하고 가는 일이 지속되고 있다.
이어서 중대(8중대)에서, 천주교동기회에서,개별적으로 몇 분등 줄지어 진주라 천리길을 마다 않고 위문을 오고있다.
나는 옆에서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 어려운 시기에 이렇게 많은 동기생들이 정선배를 찾을가? 하는 의문에 답을 구해 보았다.
정봉화선배가 강제 전역 후, 리어커를 끌며 고철을 모아 팔고,
군 부대 PX 에 쏘시지를 납품해 팔면서 연명하다가,
포항제철협력사로 성장해간 영일기업의 사장을 하는 약 30년간,
어려운 상황에 처한 동기생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며 진정성있는 위로를 해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병상에 누어있는 동기들과 그 부인들에게 금전적도움을 많이 주셨다고 한다.
나는 박정희대통령의 유신을 반대하다 일어난 윤필용장군의 사건의 영향으로
육군대학 정규과정(75년,최초로 시험을 보고 선발했슴)을 마치고
보직을 받지못하던 중(육군대학에서 경제교관을 하라해서 거부했슴,전술학교관을 하라고 했으면 했을텐데..)
기피대상 부대였던 특전사에 지원해, 공수훈련을 받고 9공수여단 지역대장으로 보직을 받았다. 그 당시 육군대학을 나온 소령을 참모보직으로 주로 연대작전주임,사단 참모부에 배치되어 요직을 수행하게 되는데,
나는 그런 직에 보내주지 않고,기피하는 공수단 지역대장(중대장과 같은 병사들과 같이 뛰는 지휘관)으로 부임했다.
다시 한 전 소총 중대장같은 직책을 하며 적응해 나갔다.
나는 1996년 전역 후, 여러 회사에서 일하다가 쉬고 있던 중,
윤필용 장군께서 암으로 2010년 병사하자. 그 장례식에서 내가 조사를 하면서, 정봉화 선배와 다시 만나고, 급기야 포항으로 내려가 영일기업(정선배가 대표로 있었던 포항제철 협력회사)고문으로 수 년간 있을 수 있었다.
고문으로 있으면서 가장 보람있던 일은 정선배의 아낌없는 신임을 받았던 것과
정선배의 끊임없는 도전정신으로, 재래식 된장공장을 세우고 내가 그 된장을 처음으로 시골의 촌로(약20여명)들과 2010년 겨울에 수 만장의 메주를 콩을 삶아 만들어 새끼를 꼬아 메달던 일들, 그 추운 겨울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열흘간을 그 촌로들과 함께했던 일은 나의 평생에 잊지못 할 위업(?)으로 남아있다.
재래식 된장을 만드는 공장이 전국에 천여개가 넘는데 그 많은 공장중 1위가 되어
이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브랜드"竹長然"이 되어있다.
네이버나 다음에서 "죽장연"을 한글로 치면 홈페이지가 나오고 온라안으로 각종 상품을 주문하도록 되어있다.
그 된장이 현재 현대백화점 지하1층 식품 코너에서 팔리고 있는 '竹長然"이다.
이런 인연으로 다시 만난 정선배는 그 당시에도 몸상태가 안 좋아 지팡이를 짚고 다녔고, 암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이 영일기업은 아들에게 상속이 안되는 포항제철의 방침에 따라 다른 기업으러 넘어갔고, 아들은 "竹長然)대표로 포항에 살고 잇다.
정선배는 은퇴 후 진주고향으로 내려가 살아가는 도중에 , 부인께서 치매로 진주 요양원에 가시고, 본인도 치매초기와 대퇴부골절로 병원에 누운지 3개월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내가 진주 병원으로 달려 간지도. 3개월이 지나고 있다.
나의 군대생활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 윤필용장군, 그 비서실장 - 살아있는 정봉화선배! 부산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나에게 병상의 정선배의 현실은 나를 그냥 놔두지 못했던 것이다.
박정희대통령의 유신체제의 망령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무서운 역사의 폭풍이 한 사람(정봉화)의 영혼과 육체에 아직까지도 가혹하게 휘몰아치고 있음을 보면서 우리 동기생들에게 이 현상을 알려, 선과 악이 무엇인지?, 우리 동기들은 동기생이라는 연대를 무어라 생각하는지?
우리 동기생 가운데 어려운 형편에 처한 동기에게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쓰며 실천을 하며 살고 있는지? 하고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 컴퓨터를 키고 쌍쌍방에 들어가 LSLS도배를 헤치고 들어가 갈겨본다.
우리가 걸어온 현역시절(대위시절;1973년)에 일어났던 윤필용 사건이 어떤 일이였고 현재까지도 미해결된 일들로 한 분의 생 전체가 고통으로 지속되고 있는 이 부조리한 현 세상에서 선배의 삶을 통해 나는 Well dying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많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어 그 단상으로 이 난을 채워본다.
부산에서
2019년 광복절에
신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