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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라도(全羅道) 구례현(求禮縣)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0권
동쪽으로 경상도(慶尙道) 진주(晉州) 경계까지 20리이고, 남쪽으로 순천부(順天府) 경계까지 9리이며, 서쪽으로 남원부(南原府) 경계까지 29리이고, 북쪽으로 같은 부 경계까지 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구차례현(仇次禮縣)이던 것을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곡성군(谷城郡)에 소속시켰고 고려 초년에 남원부에 붙였다. 인종(仁宗) 21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연산(燕山) 5년에 고을 사람 배목인(裵目仁)ㆍ문빈(文彬) 등이 참언(讖言)을 만들어 역모를 꾀하다가 죽음을 당하니 폐해서 부곡(部曲)을 삼아 남원(南原)에 소속시켰더니 금상(今上) 2년에 다시 현(縣)을 만들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구차례(仇次禮)ㆍ봉성(鳳城).
【성씨】 본현 장(張)ㆍ도(陶)ㆍ손(孫)ㆍ전(全)ㆍ임(任)ㆍ진(陳), 박(朴) 속성(續姓)이다. 황(黃) 의창(義昌). 서(徐)ㆍ양(梁) 모두 내성(來姓)이다. 남전(南田) 임(林). 방광(放光) 유(劉). 사등촌(沙等村) 임(任), 정(鄭) 속성(續姓)이다.
【산천】 지리산(智異山)- 현의 동쪽 8리에 있는 진산(鎭山) 이다. 남원부(南原部) 편에 자세하다. 오산(鰲山)-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산 정상에 바위 하나가 있고 바위에 빈틈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세상에 전하기를, “중 도선(道詵)이 예전에 이 산에 살면서 천하의 지리(地理)를 그렸다.” 한다. 봉성산(鳳城山)- 현의 서쪽 1리에 있다. 구연(九淵)- 현의 동남쪽 10리에 있다. 못 위에 1천 척이나 되는 험한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있다. 압록진(鴨綠津)- 현의 서쪽 29리 곡성현(谷城縣) 경계에 있다. 잔수진(潺水津)- 현의 남쪽 9리 순천부(順天府) 경계에 있다. 용왕연(龍王淵)- 현의 동쪽 30리 진주(晉州) 화개현(花開縣) 경계에 있으니 곧 잔수진 하류이다. 광양현(光陽縣) 편에 자세하다.
【토산】 닥종이ㆍ치자ㆍ죽전(竹箭)ㆍ은어[銀口魚]ㆍ송이ㆍ석류ㆍ감ㆍ표고버섯ㆍ꿀ㆍ잣ㆍ호두ㆍ산무애뱀[白花蛇]ㆍ복령(茯笭)ㆍ지황(地黃)ㆍ영양각(羚羊角)ㆍ오미자ㆍ석이버섯.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4백 81척이요, 높이가 13척이며 그 안에 우물과 샘이 9개가 있다.
【누정】 봉서루(鳳栖樓)- 객관(客館) 동쪽에 있으니 현감(縣監) 오치선(吳致善)이 세웠다. ○ 김작(金綽)의 기(記)에, “대개 이 고을이 나는 봉의 형국이므로 이렇게 이름지었다.” 한다. ○ 노숙동(盧叔仝)의 시에, “봉성산(鳳城山) 밑 봉서루에 바람과 날씨 서늘하고 맑아 여름 또한 가을일세.” 했다.
【학교】 향교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잔수역(潺水驛)- 잔수진 언덕에 있다. 잔수원(潺水院)- 역시 잔수진 언덕에 있다.
【불우】 화엄사(華嚴寺)- 지리산 기슭에 있다. 중 연기(煙氣)는 어느 때 사람인지 알 수 없는데 이 절을 세웠다 한다. 절 속에는 한 전(殿)이 있는데 네 벽(壁)을 흙으로 바르지 않고 모두 청벽(靑壁)을 만들어서 그 위에 《화엄경(華嚴經)》을 새겼으나 여러 해가 되어 벽이 무너지고 글자가 지워져서 읽을 수가 없다. 석상(石像)이 있어 어머니를 이고 섰는데 이것을 속담에 말하기를, “연기(煙氣)와 그 어머니가 화신(化身)한 곳이라.” 한다. 절 앞에 큰 시내가 있고 동쪽에는 일류봉(日留峯), 서쪽에는 월류봉(月留峯)이 있다. 연곡사(鷰谷寺)- 지리산에 있다. 고려 때 학사(學士) 왕융(王融)이 지은 현각선사(玄覺禪師)의 비문이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석주진(石柱鎭)-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남쪽과 북쪽이 모두 큰 산이고 가운데에 큰 강이 있다. 고려 말년에 진(鎭)을 두고 왜를 막던 곳이나 지금은 다만 옛터만 있다. 사등촌부곡(沙等村部曲)- 혹은 사도(沙圖)라 하는데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유곡부곡(楡谷部曲)-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남전소(南田所)- 현의 북쪽 6리에 있다. 방광소(放光所)- 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토지처(吐旨處)-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효자】 고려 손순흥(孫順興)- 성종(成宗) 9년에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구례(求禮) 백성 손순흥(孫順興)이 그의 어머니가 죽자 어머니의 모양을 그려 제사를 받들고 3일에 한 번씩 분묘에 찾아가서 제사 지내어 살아있을 때와 다름없이 하므로 벼슬을 주게 하여 그의 효성을 찬양하라.” 하였다. 본조 조한(趙漢) 아버지가 죽자 흙을 져다가 무덤을 만들고 울면서 3년 동안 나물만 먹고 물만 마시며 동구 밖에 나가지 않으니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을 세웠다.
【열녀】 백제 지리산녀(智異山女)- 여자가 자색(姿色)이 있었고 지리산 밑에서 살았는데 그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부도(婦道)를 다했다. 백제왕이 그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맞으려 했으나 여자가 죽음을 맹세하고 따르지 않았다. 본조 임씨(林氏)- 왕정(王淨)의 아내이다. 정이 병에 걸리니 힘을 다하여 치료하면서 약속하기를, “설사 죽더라도 나는 마땅히 여묘살이를 하겠다.” 하였다. 정이 죽자 임씨(林氏)는 나이 71세로서 장사와 제사를 예법대로 지내고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했다. 매양 절일(節日)을 만나면 반드시 자식들을 데리고 몸소 무덤에 올라가 90세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았다. 계수(桂樹)- 고진석(高震碩)의 아내이다. 남편이 죄를 짓고 멀리 귀양 가다가 도중에 죽으니 계수는 다니면서 빌어먹었다. 시부모가 그의 궁함을 불쌍하게 여겨 딴 데로 시집보내려 하자 목매어 죽으려 하니 시부모가 놀라서 그만두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웠다.
【제영】 봉무천단산족족(鳳舞天端山簇簇)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봉이 하늘 끝에서 춤추고 산은 올망졸망하고 땅에 뱀이 서린 듯 물이 망망해라.” 하였다. 녹도홍거십리향(綠稻紅蕖十里香) 앞 사람의 시에, “저물녘에 부슬부슬 내리는 비 문득 서늘함을 보내니, 시내빛 산빛 점점 아득하여 가네. 강남의 좋은 경치 참으로 그림 같은데, 푸른 벼 붉은 연꽃 10리에 향기로워라.” 했다. 소계단정횡청천(小溪短艇橫淸淺) 백비화(白賁華)의 시에, “아침에 백계산 아래 길로 나와서 저녁에는 찬수역(鑽燧驛) 동쪽 마을에 들었노라. 조그만 개울에 작은 배 맑고 얕은 물을 가로지르고 해지는 외딴 마을은 멀고 아득한 데로 들어가네. 절벽을 어지러이 둘러싼 구름은 은 궁궐이 솟는 듯, 먼 산은 미친듯이 불붙는 화성(火城)이라네. 밤이 깊어 곤하게 누웠다가 처음 꿈에 놀라 깨니 벽을 등진 쇠잔한 등불 반쯤 침상에 비치고 있네.” 하였다. 찬수(鑽燧)는 즉 잔수(潺水)이다.
2. 연곡사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지리산에 있는 절.
〔연 혁〕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의 말사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였으며,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는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찰이었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 왜병에 의하여 전소된 뒤 태능(太能, 1562∼1649)이 중창하였다. 1745년(영조 21)에는 연곡사가 밤나무로 만드는 왕실의 신주목(神主木)을 봉납하는 곳을 선정되었다.
1907년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이 당시 광양만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정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연곡사로 집결시켰다. 이때 그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에 의하여 고광순과 의병들은 모두 순절하였고, 절은 왜병들에 의하여 방화를 당하였다.
그 뒤 1942년에 다시 중건을 하였으나 6·25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가 된 뒤로 사찰분규와 교통사정 때문에 재흥을 보지 못하다가 1965년에는 소규모의 대웅전이 요사채를 겸하여 세워졌고, 1981년에 1억3000만 원의 예산을 들여 새 대웅전을 준공하였다. 이어서 1983년에 대적광전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94년에 요사를 증축하였다. 1995년에는 일주문을 세웠고, 1996년에는 종각과 수각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문화재〕 이 절에는 국보 제53호인 동부도(東浮屠), 국보 제54호인 북부도(北浮屠), 보물 제151호인 삼층석탑과 보물 제152호인 현각선사탑비(玄覺禪師塔碑), 보물 제153호인 동부도(東浮屠), 보물 제154호인 서부도(西浮屠) 등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고려 초기에 만든 도선국사(道詵國師)의 부도로 추정되는 동부도는 일제강점기 때 동경대학으로 옮겨가기 위하여 수개월 동안 연구하였지만, 산길로는 운반이 불가능하였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은 현재 대웅전 남쪽의 길 옆에 있는데, 옛날 이 탑이 위치한 곳까지 건물이 있었다고 보면 그때의 절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967년 해체, 보수할 때에 하층기단부에서 높이 23.5㎝, 어깨너비 4.5㎝의 동조여래입상(銅造如來立像) 1구가 발견되었는데,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또한, 서부도의 문비(門扉)에는 ‘逍遙大師之塔(소요대사지탑)’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절이 임진왜란 후 소요대사에 의하여 중건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참고문헌≫ 文化遺蹟總覽(文化財管理局, 1977), 名山古刹따라(李孤雲·朴雪山, 신문출판사, 1987), 전통사찰총서 7(사찰문화연구원, 1996).
* 연곡사동부도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연곡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부도. 높이 3m. 국보 제53호. 연곡사에는 동부도·서부도·북부도가 있는데 그중에서 형태가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이 이 동부도이다.
팔각원당(八角圓堂)을 기본형으로 삼은 부도로서 네모난 지대석(地臺石) 위에 기단부(基壇部)와 탑신부 (塔身部), 상륜부(相輪部)를 쌓은 일반형이다. 하대석(下臺石)은 8각 2단이며 하단에는 운룡(雲龍)을, 상단에는 각 면의 좌·우·상부 윤곽을 둥근 테로 두르고 그 안에 각기 형태가 다른 사자를 1좌씩 조각하였다.
윗면에는 각형(角形)으로 된 3단의 굄을 마련하여 중대석(中臺石)을 받았다. 중대석은 낮은 편이며 각 면에는 보통 양식의 안상(眼象) 속에 무기를 잡고 있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조각하였다.
상대석은 3단의 받침대 위에 놓여졌는데 중대석 굄대와 대칭을 이루며, 측면에는 중판앙련(重瓣仰蓮)이 상·하 2열에 16판씩 장식되었는데, 연판 안을 다시 꽃무늬로 장식하였다. 윗면의 탑신굄대에는 모서리마다 중간에 둥근 마디가 있는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가릉빈가(迦陵頻伽 : 불경에 나타나는 상상의 새) 1구씩을 조각하였다.
굄대 윗면에는 낮은 3단의 굄단을 각출하고 그 위에 8각탑신석을 받고 있다. 탑신의 각 면에는 문비(門扉)·향로·사천왕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목조건축의 옥개부를 모방하여 2중의 연목(椽木 : 서까래)과 기왓골을 모각하였고 끝에는 막새까지 나타내고 있으며 아랫면에는 구름문양을 장식하였다.
상륜부는 앙화(仰花) 위에 사방으로 날개를 활짝 편 봉황을 조각한 석재를 얹고 다시 연화문석(蓮華文石)의 보륜(寶輪)을 얹었다. 신라시대의 다른 부도보다 기단부가 높아지는 경향이나 아직 안정된 비례를 잃지 않았다. 각 부의 조각수법은 정교하고 섬세하다.
≪참고문헌≫ 國寶 7-石造-(鄭永鎬 編, 藝耕産業社, 1983), 文化財大觀 6-寶物 4-(韓國文化財保護協會, 大學堂, 1986).
* 연곡사북부도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연곡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부도. 높이 3m. 국보 제54호. 연곡사에 남아 있는 3기(基)의 부도 중 이 부도는 경내에서 북쪽이 되는 산중턱에 위치해 있다.
한 장의 돌로 된 네모난 지대석(地臺石) 위에 기단부(基壇部)와 탑신부(塔身部)·상륜부(上輪部)를 차례로 쌓은 일반형이다. 하대석(下臺石)은 2단으로 구성되었는데 하단에 구름문양이 조각된 8각 대석을 놓았고, 그 위에 복엽(複葉) 16판의 연화문(蓮華文)을 두른 복련대를 놓았는데 여덟 귀퉁이에는 귀꽃무늬를 조식(彫飾)하였다.
윗면에는 3단의 굄단이 있어 중대석(中臺石)을 받고 있다. 중대석은 낮고 잘룩한데 각 면의 안상(眼象) 안에는 조식이 있다. 상대석의 아랫면에 있는 3단의 받침은 밑의 중대석 굄 3단과 대칭을 이루었다. 옆면에는 단엽 중판의 앙련(仰蓮)을 둘렀고 상·하열의 판 안에는 화판장식이 있다.
윗면에는 높은 굄대가 있는데 모서리에는 둥근 마디가 있는 난간을 세우고 그 사이의 안상 안에 가릉빈가(迦陵頻伽 : 불경에 나타나는 상상의 새)를 1구씩 조식하였다. 이 굄대 윗면에는 낮은 3단굄을 각출하여 탑신석(塔身石)을 받고 있다.
8각 탑신 각 면은 문비(門扉)·향로·사천왕상 등으로 장식되었으며 그 조식은 균형이 잡혀서 단아하다. 넓은 옥개석(屋蓋石)은 목조건축의 양식을 따라 이중의 서까래·기왓골·막새 등을 모각하였고, 아랫면에는 비천(飛天)을 조각하였다.
상륜부는 완전하여 앙련의 대석 위에 날개를 벌린 네 마리의 봉황이 얹혀 있고 다시 연화석·보륜(寶輪) 등이 놓여 있다. 이 부도는 누구의 것인지 몰라서 북부도라 하고 있으나 높은 스님의 묘탑일 것으로 짐작된다. 형태나 각 부의 조각 등이 이곳의 동부도와 같이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부도를 대표할 만하다.
즉, 크기·형태·조식 등에서 세부적으로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 거의 같아서 연대에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 부도가 동부도를 모방하여 건조된 것임에 틀림없다.
≪참고문헌≫ 國寶 7-石造-(鄭永鎬 編, 藝耕産業社, 1983), 文化財大觀 1-國寶 1-(韓國文化財保護協會, 大學堂, 1986).
* 연곡사현각선사탑비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연곡사에 있는 고려 초기의 탑비. 979년(경종 4) 건립. 귀부높이 112㎝, 이수높이 75㎝. 보물 제152호. 현재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賂首)만이 남아 있다.
조각수법은 당대의 탑비양식을 잘 따르고 있는데, 몸체에 비해 큰 귀두(龜頭)나 비좌(碑座) 4면에 새긴 안상(眼象)과 귀꽃이 특색이다.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玄覺王師碑銘’이라는 전액(篆額)이 음각되어 있다.
기록이나 옛 탁본에 의하면 비문은 학사(學士) 왕융(王融)이 지었고, 동정주국(同政柱國) 장신원(張信元)이 썼다고 전한다. 글씨는 2㎝ 정도의 해서로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바탕으로 하면서 자형을 바르게 하여, 고박한 서형태미(書形態美)를 나타내고 있다.
≪참고문헌≫ 大東金石書, 朝鮮金石總覽 上, 韓國金石遺文(黃壽永, 一志社, 1976), 韓國金石文大系 1(趙東元, 圓光大學校出版局, 1979).
* 고광순(高光洵)
1848∼1907. 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관은 장흥(長興). 초명은 광욱(光旭) 또는 광순(光珣·光詢). 자는 서백(瑞伯), 호는 녹천(鹿川). 전라남도 담양 출신. 생부는 정상(鼎相), 양부는 경주(慶柱), 항일투사 기산도(奇山度)가 사위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각 읍에 격문을 띄우고, 기우만(奇宇萬)과 의병을 모집하여 좌도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나주를 본영으로 의병을 불러모으자 일본군이 나주로 집결하므로 광주(光州)로 옮겼다.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북진하던 중 선유사(宣諭使)의 권고로 의병을 해산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1906년 4월 최익현(崔益鉉)이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고제량(高濟亮)과 순창에 이르렀으나, 최익현은 이미 패전하여 서울로 압송된 뒤였다. 다시 기우만·백낙구(白樂九)와 모사하였으나, 그들도 곧 붙잡혔다.
1907년 1월 24일 저산(猪山)의 제각(祭閣)에서 제량·광훈(光薰)·광채(光彩) 등 족친들과 윤영기(尹永淇)·박기덕(朴基德)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12월 말 남원의 양한규(梁漢圭)와 남원성을 공격, 관군과 접전을 벌이던 중 양한규가 죽고 남원의진이 붕괴하여 퇴진하였다. 1907년 5월에는 능주(綾州), 8월에는 동복(同福)을 습격하였다.
그 뒤 지리산 문수암(文殊庵)을 거점으로 활약하던 김동신(金東臣)과 연합작전을 구상, 지리산으로 집결하였다. 그 동안 그의 종가는 적의 습격으로 사당만 화를 면하였을 뿐 피해가 컸다.
8월 구례 연곡사(燕谷寺)로 가서 화개동(花開洞)과 문수암 일대를 거점으로 대원들을 머무르게 한 뒤, 군대를 훈련시키고 군량을 보충하며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깃발을 만들어 의기를 북돋웠다.
그 뒤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9월 적의 연곡사 복멸작전에 의한 야습을 받아 부장인 고제량을 비롯, 주요 장졸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義齋實紀, 梅泉野錄, 朝鮮獨立運動 Ⅰ(金正明編, 原書房, 1967), 韓國獨立史(金承學, 獨立文化社, 1965),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독립운동사자료집 2·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 태능(太能)
1562(명종 17)∼1649(인조 27). 조선 후기의 승려.
〔생 애〕 성은 오씨(吳氏). 호는 소요(逍遙). 전라남도 담양 출신. 어머니가 신승(神僧)으로부터 대승경(大乘經)을 받는 태몽을 꾸었으며, 태어나면서부터 살갗이 선명하고 골격이 씩씩하였다. 어려서부터 탐욕을 싫어하고 도훈(道訓)을 듣기를 즐겨하였으며, 베풀기를 좋아하고 자비심이 많아 마을사람들이 성동(聖童)이라고 불렀다. 13세에 백양산(白羊山)에 놀러갔다가 뛰어난 경치를 보고 곧 세속을 떠나기로 결심하여 진대사(眞大師)로부터 계(戒)를 받았다.
〔행 적〕 그 때 부휴대사(浮休大師)가 속리산과 해인사로 다니면서 교화를 폈는데, 그 밑에서 경률(經律)의 깊은 뜻을 익혔다. 부휴의 문하에 수백의 제자들이 있었으나, 오직 태능·충휘(沖徽)·응상(應祥)만이 법문(法門)의 삼걸(三傑)이라 불렸다.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이 왜적을 물리치고 돌아가는 길에 해인사에 머무르다가 그의 단아함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묘향산에서 교화를 편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달마대사가 천축국에서 중국으로 온 뜻이 무엇인가를 묻는 話頭)를 물었다. 서산대사는 한 번 보고 곧 건당(建幢)을 시켜 의발(衣鉢)을 전한 뒤 3년 동안 지도하였다. 그리고 다시 개당설법(開堂說法:스스로 일가를 이루는 법회)을 하게 하였는데 청중이 가득 찼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서산대사는 그에게,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와서, 물 위의 거품에 모두 살라버린다. 우스워라, 저 소를 탄 사람. 소를 타고서 다시 소를 찾는구나(斫來無影樹 醇盡水中穀 可笑騎牛者 騎牛更覓牛).”라는 법게(法偈)를 주었다. 그는 이 법게를 가지고 남방으로 내려와 여러 스승들에게 물어보았으나, 뜻을 알고 해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서산대사에게 다시 와서 물었다.
비로소 무생(無生)의 이치를 깨닫고 자성(自性)에 맡겨 소요하였고, 가는 곳마다 도(道)를 배우려는 자가 모여들어 임제종풍(臨濟宗風)을 크게 떨쳤다. 30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산과 유정(惟政)이 의병을 일으켜 전장으로 나가자, 그는 폐허가 된 빈 절을 지키며 불전(佛殿)을 수리하고 전쟁의 희생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올렸다. 1624년(인조 2) 조정에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축조하려 할 때 그에게 서성(西城)을 보완하게 하여 이를 완수하였다.
그 뒤 지리산의 신흥사(神興寺)와 연곡사(燕谷寺)를 중건하였는데, 태능의 도력에 감화된 사람들의 도움으로 며칠 만에 공사를 끝마쳤으며, 그가 법(法)을 설하면 짐승들과 이류(異類:불교인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감복하였다고 한다.
1649년 11월 21일 열반(涅槃)이 가까웠음을 알고 제자들에게 설법하다가, 붓을 찾아 “해탈이 해탈 아니거늘 열반이 어찌 고향이겠는가! 취모검(吹毛劒)의 빛이 빛나고 빛나니 입으로 말하면 그 칼날 맞으리(解脫非解脫 涅槃豈故鄕 吹毛光鹵鹵 口舌犯鋒鎚). ”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나이 87세, 법랍 75세로 입적하였다. 그 때 붉은 무지개가 하늘에 뻗치고 이상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화장하는 날, 영골(靈骨)이 불 밖에 튀어나오고 사리(舍利) 두 개는 축원(祝願)에 응하여 공중에 솟아오르는 신이 (神異)를 보였는데, 연곡사·금산사(金山寺)·보개산(寶蓋山) 세 곳에 이를 나누어 모시고 부도(浮屠)를 건립하였다. 평소 태능의 도(道)를 듣고 흠모한 효종은 1652년(효종 3) 혜감선사(慧鑑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경석(李景奭)을 시켜 비명(碑銘)을 지어 금산사에 세우게 하였다.
〔사상 및 수행〕 그는 선(禪)과 교(敎)를 일원이류(一源異流:하나의 근원에서 파생한 두 가지 흐름)로 보는 전통적 견해를 취하였다. 이러한 사상과 경향은 서산대사와 일맥상통하는 흐름이다. 그는 서산대사의 법맥계승자로 『소요당집서 逍遙堂集序』에서는, “소요선사는 서산청허조사의 뛰어난 제자이다. 조사의 문중에서 선사와 편양사(鞭羊師)를 선종이라 하고, 송운사(松雲師)를 교종이라 하였는데 같은 시대에 모두 우뚝하였다.” 하며, 오직 태능만이 선지(禪旨)를 통달하였다고 하였다.
그의 선사상을 요약하면 ① 본래청정(本來淸淨)하고 자재하며 완전한 일물(一物)이 있다는 것, ② 이 일물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밖으로부터 얻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닌 우리의 자성(自性)이라는 것, ③ 이 자성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 속에서 모든 사물에 작용하면서도 그 스스로는 초월적이라는 것, ④ 이 자성이 나의 참된 주인공인 동시에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 ⑤ 이 참 주인공을 철두철미하게 자각(自覺)한 사람은 무위진인(無位眞人)으로서 아무 것에도 의존하거나 결점이 없는 온전한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등이다.
특히, 선사상이 실참실수(實參實修)를 통한 체험에 있음을 실감하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상징적인 비유를 즐겨 사용하였다. 즉, 상징적인 비유를 통하여 개념적인 지식을 초월하여 바로 그 실상(實相)을 실감하도록 하는 선종의 방법으로 제자들을 깨우치려 하였으며, 철두철미하게 불교를 주체적으로 깨닫도록 하고자 노력하였다.
후세의 학자들은 그를 평하여, 우국진충(憂國盡忠)의 뜻에서는 유정과 자취를 같이 하였으나, 선적풍격(禪的風格)에 있어서는 유정보다 뛰어난 것이 있었다고 하였다. 뛰어난 제자로는 현변(懸辯)·계우(繼愚)·경열(敬悅)·학눌(學訥)·처우(處愚)·천해(天海)·극린(克璘)·광해(廣海)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소요파(逍遙派)로 불리는 수백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저서로는 ≪소요당집≫ 1권이 있다.
≪참고문헌≫ 逍遙堂集,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西山門徒의 思想(金恒培, 韓國佛敎思想史 4, 圓光大學校 出版局, 1974).
3. 운조루
이 집은 조선 영조 52년 (1776년)에 당시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 (柳爾胄)가 세운것으로 99간 (현존73간)의 대규모 주택으로서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 (品字形)의 배치 형식을 보이고 있는 양반가이다.
류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 (九萬坪)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 (歸晩) 이라했으며 이 집을 귀만와 (歸晩窩) 라고도 불렀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속의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본디 이집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 에서 따온 글 이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 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 오네>의 문구에서 첫머리 두 글자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운조루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앞 도랑)와 외수구(섬진강)가 제대로 되어 있는 명당터에 자리잡고있다.
집 앞의 오봉산은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라고하며, 연당은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것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일대는 금귀몰니 (金龜沒泥), 금환락지 (金環落地), 오보교취 (五寶交聚), 혹은 오봉귀소 (五鳳歸巢)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고 하며, 이 집터에서 거북이의 형상을한 돌이 출토되었기에 금귀몰니의 명당으로서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져 있다.
운조루에는 바깥사랑채, 안 사랑채, 아랫 사랑채 등으로 각각 누마루가 있었으 나 지금은 아쉽게도 안 사랑채와 아랫 사랑채의 누마루는 남아 있지 아니하다. 현재 이 집은 건 평 129평 으로 一 자형 행랑채와 북동쪽의 사당채를 제외하고 T 자형의 사랑채와 ㄷ 자형의 안채, 안마당의 곡간채가 팔작지붕, 박공지붕, 모임지붕으로 연결되어있는 일체형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집에 있는 목독(나무로 된 쌀독의 마개에 <他人能解>라는 글귀를 써두었음)은 가난한 이웃 사람이 쌀을 꺼내 끼니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음덕을 베풀고 적선을 하는 것이 돈을 가진 자의 도리임을 보여 주었던 류씨 문중의 상징물이다. 200년이 지나도록 망하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 가문이 번창한 것은 오로지 분수를 지키며 생활하고, 이웃을 돌보았던 마음이 전승 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류이주의 5세손인 류제양(柳濟陽)은 일만여편의 시(詩)를 쓰고 손자 류형업(柳瀅業)에 이르기까지 8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생활일기와 농가일기를 썼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록문화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선조들의 유업이라 아니할 수 없다.
* 류이주와 운조루
문화유씨 곤산군파 (崑山君派) 30대 영삼(1675~1735)과 영천 최씨사이에서 세 아들 중 둘째로 1726년에 태어난 그는 힘이 장사였다.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에 올라간 그는 당시 훈련도감 김성응 (1699~1744)눈에 띄어 스물여덟 살 나던 해인 1753년(영조29)에 무과에 급제했다.
《조선실록》의 기록을 보면 영조 31년(1755·2월) 홍봉한(1713~1778)의 천거로 특채되었다. 그는 '새재'에서 호랑이를 채찍으로 쳐 잡은 장사로 알려져 있었다. 마흔 두 살의 나이에 1767년 수어청 파총 성기별장이 되어 남한산성을 쌓는 일에 동원된다.
그는 이듬해 전라도 병마우후가 되어 1771년(46살) 낙안군수가 되었고, 금주령을 위반한 죄목으로 1773년 삼수(三水)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가족을 거느리고 구례군 문척면 월평으로 왔다가 토지면 구룡정리로 이사했다고 구전되어 있다.《조선실록》의 기록을 따르면 그는 낙안군수 때 낙안세곡선이 한양으로 가던 길에 침몰한 책임 때문에 귀양갔던 것으로 나타난다. 영조말엽 사색당쟁에 휘말려 유배형을 당했던 것 같다.
유이주를 추천했던 홍봉한이 시파(時派)로 세손인 정조를 옹호하다가 벽파(辟派)에 몰려 1771년 청주로 귀양을 갔다. 홍봉한의 천거로 출세한 유이주도 그 영향을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등극하던 1776년 다시 벼슬길에 오른 것은 홍봉한의 재기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1776년 함흥 오위장(五衛將)으로 재등용되어 함흥성을 쌓는데 그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는 구례로 몸을 피해 살던 시절인 1775년 그의 조카인 덕호(1756~1815)와 이곳 토호였던 이시화(1725~1784)의 딸과 성혼시켜 사돈간이 된다. 처음 그가 살던 '구룡정'은 오늘날 금환락지의 중심지라는'용정'을 뜻한다. 그는 15년 뒤인 1790년 삼수부사 재직때 조카인 덕호를 양자로 입양시키고 구례 토지면의 토호였던 재령 이씨 이시화와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이씨의 땅이었던 지금의 '운조루'자리를 집터로 양여받는다. 1776년 산자락에 자리잡아 사태의 위험이 있고 고인돌마저 널려 있어 이곳 사람들은 개간을 꺼리던 자리에 집을 짓기위해 땅을 파던중 거북처럼 생긴 돌이 나왔다. 1782년 함을 만들어 가보로 전해왔으나 1989년 도둑이 들어 훔쳐갔다. 이 집은 1776년 9월 16일 상량식을 가졌고 6년만인 1782년 유이주가 용천(龍川)부사로 있을 때 완성했다.
집을 착공하자마자 정권이 바뀌면서 유이주는 바로 사면이 되어 정삼품인 오위장에 발탁되었다. 함흥에 부임한 뒤 이듬해 상주 영장을 거쳐 82년(57살) 평안북도 용천부사로 전직되어 근무하였으므로 집을 짓는 일은 그의 조카인 덕호가 맡아했다. 물론 설계는 유이주가 해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도록 엄명을 내렸다. 덕호는 유이주의 사촌인 유이익(1737~1792)의 9남1녀중 차남으로 그의 아버지와 함께 종백부인 유이주를 따라와 구례에서 살다가 결혼도 하고 집짓는 감독을 맡은뒤 뒷날 양자가 되어 재산을 물려 받았다.
유이주는 운조루 터를 닦으면서 <하늘이 이 땅을 아껴두었던 것으로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린 것>이라고 기뻐했다. 유이주는 운조루 곁에 사촌동생인 유이익 집뿐아니라 그의 맏형인 이혜(1721~1790)의 집도 지었다.
이 집에 남아있는 문서에 따르면 구례로 처음 옮겨왔을 때 노비는 5명이었으며 용천부사를 지내고 경상도중군으로 있던 1786년 그 집 노비수효는 11명으로 늘었다. 풍천부사를 지내던 시절인 1792년의 노비는 9명이었고 이듬해 재산상속 문서에는 21명으로 늘었다.
당시 재산은 집이 78칸, 밭이2.5결, 논이 26결이었다.<당시 전답 1결은 1등전일 때 2,753.1평,3등전일 때 3,931.9평,6등전일 때 11,035.5평으로 수확량에 따른 과세의 기준이다.>
오늘날 이 집안의 가대를 지키고 있는 유홍수씨가 경작하는 밭이 12필지 3,004평(15두락),논이 11필지 7,897평(39두락)임야가 18필지 96,292평(32정보)대지가 4필지 1,772평이므로 전답이 조금 줄었다고 하겠다.
유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歸晩)이라 했으며 그의 집을 '귀만와'(歸晩窩)라고도 불렀다. 여러 채가 연결되어 점 자 모양을 갖춘 이 집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누마루채 및 방마다에 당호와 방의 별칭이 붙어 있으나 전체를 일러 '운조루'라 한다. 후손들은 유이주를 '삼수공'이라 부른다.
이 택호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 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본디 이집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글귀이다.
4. 화엄사(華嚴寺)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에 있는 절.
〔창 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華嚴宗)을 선양하였던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화엄사의 창건 및 중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시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세웠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1936년에 찬술된 ≪대화엄사사적 大華嚴寺事蹟≫ 등의 모든 사적기들은 544년(진흥왕 5) 인도의 승려인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웠다고 하였다.
그리고 ≪구례속지 求禮續誌≫에는 진흥왕 4년에 연기조사가 세웠으며, 백제 법왕이 3,000명의 승려를 주석하게 하였다고 부연하고 있다. 화엄사의 중건에 대해서도, 신라 선덕왕 때에 자장(慈藏)이 증축하고, 문무왕 때에 의상(義湘)이 장륙전(丈六殿)을 건립하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백제 땅에 속하였던 화엄사를 자장이 중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 797년(원성왕 13)에 번역된 정원본사십화엄(貞元本四十華嚴)이 의상에 의하여 석각(石刻)되어 장륙전의 사방 벽에 장식될 수 없다고 하는 점, 그리고 양식으로 보아 현존 화엄사의 석조물이 모두 8세기 후반부터 9세기에 걸쳐 조성되었다고 하는 점 등에 의하여, 창건과 중건에 대한 의문이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와 같은 의문은 1979년에 신라 경덕왕대의 화엄경사경(華嚴經寫經)이 발견됨으로써 완전히 풀렸다. 이 사경의 발문에 의하여 연기는 황룡사(皇龍寺)의 승려로서 754년(경덕왕13) 8월부터 화엄경사경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시켰던 실존인물임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창건 연대가 신라 진흥왕 때가 아닌 경덕왕 때이고, 아울러 자장 및 의상의 중수 또한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중 수〕 그 뒤 이 절은 신라 말 도선(道詵)에 의하여 크게 확장되었고, 고려 광종 때에 홍경선사(洪慶禪師)가 퇴락한 건물을 중수하였으며, 문종이 전라도 및 경상도에서 이 절에 매년 곡물을 헌납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이를 저장하기 위한 2채의 큰 창고를 일주문 밖에 짓기도 하였다. 또한, 인종은 정인왕사(定仁王師)로 하여금 이 절을 중수하게 하고 1172년(명종 2) 도선국사의 비를 세우도록 하였으며, 충숙왕 때에는 조형왕사(祖衡王師)가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조선시대의 화엄사는 1424년(세종 6)에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되었지만, 임진왜란의 병화로 완전히 불타버렸고, 석경(石經)마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에 각성(覺性)은 1630년(인조 8)에 중건을 시작하여 7년 만인 1636년에 대웅전을 비롯한 약간의 건물을 이룩하였고, 1649년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으로 승격되었다.
1702년(숙종 28)에는 각성의 뜻을 이어받은 성능(性能)이 장륙전을 중건하였는데, 숙종은 이를 각황전(覺皇殿)이라 사액(賜額)하고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으로 격을 높였다. 이후에도 부분적인 보수가 계속 이루어졌지만 대규모의 중수는 없었다. 1757년(영조 33) 대웅전을 중수했고 1769년 각황전을 중수했다. 1798년(정조 22)과 1827년(순조 27)에 각각 적조당과 보제루를 중수했다. 1977년 각황전 해체보수를 완료했으며, 1984년부터 만월당·일주문을 세웠다. 1989년 원융료·청풍당을 짓고, 연기암을 복원했다.
〔주요고승〕 화엄종의 중심사찰이 되었던 이 절에는 창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승들이 머물면서 창사의 이념인 화엄사상의 구현이 이루어져 왔다. 창건주인 연기조사를 비롯하여 정행(正行)·낭원(朗圓)·현준(賢俊)·결언(決言)·관혜(觀惠) 등의 화엄학승(華嚴學僧)들이 머물렀다.
특히 신라 말 화엄학이 남북악(南北岳)으로 나누어져 대립할 때, 후백제 견훤(甄萱)의 복전(福田)이었던 관혜가, 고려 왕건(王建)의 복전이었던 해인사의 희랑(希朗)과 대립된 학파(學派)를 형성함으로써 이 절이 중요시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의천(義天)이 이 절에 들러 연기조사의 영정(影幀)에 예하고 그를 찬탄하는 시를 남겼으며, 의천의 문도인 정인왕사는 이곳에서 도량을 베풀었다.
조선시대에도 이곳에서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다. 특히, 선수(善修)가 ≪화엄경≫을 강의하여 그 종풍(宗風)을 크게 드날린 뒤 각성·처능(處能)·수초(守初)·명안(明眼)·새봉(璽峰)·조관(璽冠)·윤장(玧藏) 등이 그 뒤를 이어 화엄사상을 펼쳤다. 이들 외에도 해안(海眼)이나 임진왜란 당시 주지로 절을 수호한 설홍(雪泓)·윤눌(潤訥)을 위시한 많은 고승들이 이 절을 위하여 크게 기여하였고, 근세에는 대강사 진진응(陳震應)이 머무르기도 하였다.
〔당우와 문화재〕 화엄사의 현존 건물은 각성이 중건한 17세기 이후의 것이다. ‘지리산화엄사’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 좌우에 금강역사(金剛力士) 및 문수(文殊)·보현(普賢)의 동자상(童子像)을 안치한 금강문(金剛門)이 있다. 그 바로 뒤에는 제3문인 천왕문(天王門)이 있는데, 전면 3칸의 맞배집으로 목각 사천왕상(木刻四天王像)을 안치하였다.
천왕문에서 약 50m 거리에 강당으로 사용되는 정면 7칸의 보제루(普濟樓)가 종루(鐘樓)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곳을 지나면 화엄사의 중요한 당우들이 있다. 동서 쌍탑(雙塔)의 정면에는 대웅전, 그 서쪽에는 각황전이 있으며, 이 밖에도 영산전(靈山殿)·나한전(羅漢殿)·원통전(圓通殿)·명부전(冥府殿)과 노전(爐殿)으로 사용되는 삼전(三殿) 및 요사(寮舍)인 원융료(元戎寮)·청풍당(淸風堂)·만월전(滿月殿) 등이 있다.
이 중 보물 제299호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서 조선 중기에 조성된 삼신(三身)의 삼존불(三尊佛)이 봉안되어 있으며, 1757년에 제작된 후불탱화(後佛幀畵)가 있다. 또한,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그 건축수법이 뛰어나다. 각황전 내부에는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제루(普濟樓)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에는 각황전 앞 석등(石燈)과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노주(露柱)·동서오층석탑(東西五層石塔)·석경 등의 중요한 유물이 전해 오고 있다. 국보 제12호인 각황전 앞의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이는 높이 6.36m나 되는 거대한 석등은 8각의 하대석(下臺石)이 병(甁) 모양의 간석(竿石)을 받치고 있고, 중간에 띠를 둘러 꽃무늬를 연이어 새긴 것으로 현존하는 국내 석등 중에서 가장 큰 것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각황전 서남쪽의 높은 대상(臺上)에는 3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이 석탑의 사방에는 머리로 석탑을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와, 그 중앙에 합장을 한 채 머리로 탑을 받이고 서 있는 승상(僧像)이 있다.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의 모습이라고 전하며, 석탑 바로 앞 석등의 아래쪽에도 꿇어앉은 한 승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불탑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석등을 머리에 이고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그 능숙한 기법과 균형있는 조형미로도 주목되지만, 그 특이한 형태는 더욱 눈길을 끈다. 이 사사자석탑은 창건주 연기의 효성을 나타낸 것이기에 효대(孝臺)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원통전 앞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이마로 방형(方形)의 석단(石壇)을 받치고 있는데, 이를 흔히 원통전전사자탑(圓通殿前獅子塔, 보물 제300호)이라고도 한다.
대웅전 앞의 계단 아래에는 양식을 달리하는 동서 양탑이 있다. 보물 제132호인 동탑(東塔)은 보물 제133호인 서탑(西塔, )에 비하여 아무런 조각과 장식이 없고, 단층기단(單層基壇)으로 되어 있다. 서탑은 1995년 해체보수되었는데, 이때 진신사리와 더불어 47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필사본 다라니경과 불상을 찍어내는 청동불상주조틀 등이 있었다.
장륙전의 사방 벽은 화엄석경(華嚴石經)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보물 제1040호인 이 석경은 의상이 조성한 것이라는 전승이 있지만, 화엄사가 세워진 경덕왕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석경은 불행히도 임진왜란의 병화로 장륙전이 불탈 때 파괴되어 만수천점에 달하는 이들 파편만이 남아 있다. 석경의 크기는 흔히 볼 수 있는 방전(方塼:네모난 벽돌) 정도이고, 사방 벽에 고정할 수 있는 홈이 아래위에 있다. 글자체는 쌍계사진감국사비(雙磎寺眞鑑國師碑)를 닮았다.
화엄사 영산회상도 괘불탱화는 1653년(효종 4)에 조성된 것으로서, 1997년 국보 제301호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인 구층암석등과 교지(敎旨:宣祖가 碧巖禪師에게 하사) 1매, 예조사격(禮曹寺格) 1매, 예조홍각대사첩(禮曹弘覺大師帖) 1매, 겸팔도총섭첩(兼八道摠攝帖), 예조대선사각성첩(禮曹大禪師覺性帖) 1매가 있다.
그리고 인조 하사 어석(御席) 1건, 인조 하사 가사(袈裟) 1령, 인조 하사 어작(御爵) 1대, 선조 어필각본(御筆刻本) 1권, 선조 하사 서산대사발우〔西山大師鉢盂〕 1좌, 선조 하사 서산대사 향합(香盒) 1건, 각황전중건상량문(覺皇殿重建上樑文) 1매, 각황전삼여래사보살복장기(覺皇殿三如來四菩薩腹藏記) 1축, 고종(古鐘), 인조 14년간 ≪화엄사사적 華嚴寺事蹟≫ 1책 등이 있다.
〔산내 암자〕 이 절의 부속 암자는 신라 경덕왕 때에는 81개나 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는 원소암(圓炤庵)·청련암(靑蓮庵)·적기암(赤旗庵)·은무암(隱霧庵)·은선암(隱仙庵)·백련사(白蓮社)·도선굴(道詵窟)·연기암(煙起庵)·보적암(寶積庵)·내원암(內院庵)·봉천암(鳳泉庵)·문수암(文殊庵) 등의 상당히 많은 암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모든 암자가 없어지고, 구층암(九層庵)을 비롯한 금정암(金井庵)과 지장암(地藏庵) 등의 세 암자만이 있을 뿐이다.
구층암에는 탑신 전면에 여래좌상을 조각한 3층석탑과 석등·배례석 등이 있고, 천불을 모신 천불보전(千佛寶殿), 선실(禪室), 요사 등의 건물이 있다. 1562년 설응(雪凝)이 창건한 금정암에는 조선 고종 때에 세운 칠성전(七星殿)과 요사가 있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셨다. 1959년 원응(源應)이 창건한 지장암의 본전인 보광전(普光殿)에는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다. 절 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 大覺國師文集, 擇里志, 湖南道求禮縣智異山大華嚴寺事蹟, 求禮華嚴寺事蹟, 鳳城誌, 求禮續誌, 朝鮮寺刹史料(朝鮮總督府, 1911),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朝鮮金石總覽(朝鮮總督府, 1919), 韓國建築樣式論(鄭寅國, 一志社, 1974), 華嚴寺(韓國佛敎硏究院, 一志社, 1976), 考古美術 6-9(1965.9. 화엄사특집), 新羅華嚴寫經과 그 變相圖의 硏究(文明大, 韓國學報 14, 一志社, 1979), 新羅 景德王代의 白紙墨書 華嚴經(黃壽永, 歷史學報 83, 1979), 新羅 景德王代 華嚴經 寫經 關與者에 대한 考察(李基白, 歷史學報 83, 1979), 전통사찰총서 7-광주·전남의 전통사찰 Ⅱ-(사찰문화연구원, 1996).
* 화엄사각황전(華嚴寺覺皇殿)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화엄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불전. 정면 7칸, 측면 5칸의 다포계(多包系) 중층팔작지붕건물. 국보 제67호. 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되는 대석조기단 위에 선 웅장한 건물로 기둥머리에 창방(昌枋)을 끼고 그 위에 평방(平枋)을 돌리고 있다.
평방 위에는 기둥 위와 주간(柱間)에 공포를 올렸으며, 공포는 상하층이 모두 내외2출목(內外二出目)으로 되었다. 내부는 통층(通層)으로 되었고 초층은 짧은 툇보로 고주(高柱)와 변주(邊柱)가 연결되었다.
천장은 고주를 끼워 井자천장이 가설되었으나 그 주변이 굽어 경사지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적은 수법이다. 공포양식(慊包樣式)은 외부첨차의 곡이 매우 심한 쇠서〔牛舌〕로 시대가 떨어짐을 나타내며, 전체적인 느낌은 복잡한 공포가 처마 밑에 꽉 차 있어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현재 건물 중앙에 길게 설치된 불단(佛壇) 밑에는 석각(石刻) 화엄석경(華嚴石經)이 수장되어 있으며 각황전은 그 거대함과 아울러 이것으로도 이름이 높다.
≪참고문헌≫ 國寶-寺院建築-(申榮勳 編, 藝耕産業社, 1983), 華嚴寺覺皇殿(洪潤植, 건축문화 1, 1981.6.).
* 화엄사각황전앞석등(華嚴寺覺皇殿─石燈)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화엄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 높이 6.36m. 국보 제12호. 현존하는 석등 중 가장 큰 이 석등은 신라석등의 기본형인 8각을 따르고 있으나 간석(竿石)을 고동형(鼓胴形)으로 만들어 전라도지방 석등간석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석등의 간석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8각 하대석 각 면에는 예리한 안상(眼象)이 조각되었고 그 위에 귀꽃이 있는 복련8엽(覆蓮八葉)이 크게 조각되었으며 상면의 얕은 굄 위에 운문(雲文)이 조각된 하단과 8각 소로형〔小累形〕인 상단에 2단의 높직한 간석 굄이 마련되었다.
간석은 얕고 배가 불러서 일견 장구를 연상하게 하며 중앙에 2조 횡대(橫帶)가 있고, 8각의 면마다 화형(花形)이 횡대 위에 장식되었다. 이 중간부 상하는 일단 가늘어졌다가 다시 넓어지면서도 8각의 기본형을 지키고 있다.
상대석은 평박한데 밑에는 거의 수평에 가깝게 복련8엽이 조각되고 위에는 소로형의 8각 화사석(火舍石 :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 굄이 있다. 화사석은 8각 1석인데 화창(火窓)을 네 곳에 내었을 뿐 우주(隅柱)의 표현이나 화창 주위의 구멍이 없다.
옥개석은 얇은 편이고 처마 밑은 수평이며 추녀 위에는 귀꽃이 크게 표현되었다. 상륜부(相輪部)는 사다리꼴의 노반과 8각 앙화(仰花)를 얹고 그 위에 보륜(寶輪)을 사이에 두고 귀꽃이 달린 보개(寶蓋)를 얹었으며, 정상에는 연화가 장식된 보주(寶珠)를 얹어 완형을 이루었다. 간주(竿柱) 이하가 상층부에 비하여 빈약한 감을 주나 당당한 위풍을 보이며 뒤의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대조를 보인다.
≪참고문헌≫ 韓國의 美-石燈·浮屠·碑-(鄭永鎬 監修, 中央日報社, 1980), 國寶-塔婆-(秦弘燮 編, 藝耕産業社, 1983).
*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화엄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높이 5.5m. 국보 제35호. 전체 부재를 화강암으로 조성한 이 사자탑은 경주의 불국사다보탑(佛國寺多寶塔, 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수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현재 화엄사 가람 중심에서 서북방의 ‘효대(孝臺)’라고 불리는 높은 대지에 건립되어 있는데 이 탑의 바로 앞에는 석등 1기가 배치되어 있어서 본래부터 이 장소가 석탑을 세우기 위하여 마련된 곳임을 알 수 있다.
기본조형은 2층기단 위에 3층탑신을 얹고 그 정상에 상륜부(相輪部)를 놓은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기본형을 따르고 있으나 상층기단에서 특이한 의장을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지대석 위에 각형과 원호와 또 하나의 각형 굄 순서로 높직한 3단의 굄대를 마련하여 하층기단을 받고 있다.
하층기단 면석 각 면에는 양쪽 우주가 각출되었을 뿐 중간에는 탱주가 없다. 그러나 각 면에는 고식(古式)의 큼직한 안상(眼象)을 3구씩 오목새김하고 그 안에 천인상(天人像)을 1좌씩 12구를 돋을새김하였다. 보관과 영락(瓔珞)으로 동체(胴體 : 몸체)를 장식하고 천의(天衣)를 공중에 휘날리며 앉은 자세는 모두 같으나, 연화대 위에 앉은 법석과 지물(持物)은 각기 다르다.
어떤 좌상은 악기를 들어 연주하고 있고 혹은 팔을 벌려 춤을 추고 있으며 어떤 천인은 꽃을 바쳐 공양하고 있어 이 여러 천인상들이 모두 불천(佛天 : 부처의 존칭)을 찬미하고 있는 자세로 보인다.
상층기단은 우주를 대신하여 연화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암수 두 쌍의 사자를 한마리씩 지주(支柱) 삼아 네 귀에 배치하고 정상에도 하대와 대칭되게 연화대를 얹어 널찍한 갑석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또한 찰주(擦柱 : 탑의 중심기둥) 대신 연화대 위에 합장한 대덕(大德)의 입상을 안치하고 갑석의 하면 중앙에도 연화문을 장식하여 천개(天蓋)를 삼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네 귀에 앉은 석사자상과 중앙에 서 있는 대덕의 모습인데, 네 마리의 석사자는 상하 앙복련화대(仰覆蓮花臺) 위에 앞발을 뻗고 뒷발을 구부려 앉아서 정면을 바라보며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곧 불국사다보탑의 석사자상을 연상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원각한 대덕의 입상은 얼굴의 인상이나 몸에 걸친 가사의 문양과 균형 잡힌 체구 등이 당시의 불상과도 같은 조성수법을 보이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게 한다. 대덕은 사자상과는 달리 머리가 갑석에 붙지 않고 있으므로 갑석은 4구의 사자만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다.
그러므로 네 마리의 사자를 일반형 석탑의 상층기단 부재에 비한다면 곧 각 면의 양쪽 우주로 볼 수 있고 혹은 불국사다보탑 기단부의 방형4주(方形四柱)와도 비유할 수 있는 구실을 하고 있다. 상층기단 갑석은 1매석으로 만들어지고 그 상면에는 2단의 굄을 각출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는데, 이러한 수법은 곧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기 1석씩으로서 일반형 석탑의 탑신부와 같으나 초층옥신석 4면에 각기 문비형(門扉形)을 새기고, 그 좌우로 여러 가지 존상(尊像)을 조각하였다. 즉 정면에는 인왕상, 양측면에는 사천왕상, 그리고 뒷면에는 보살상을 돋을새김하여 장엄하였다.
이 위의 2·3층 옥신석은 초층과는 전혀 달리 양쪽 우주가 정연하게 각출되었을 뿐 아무런 장식조각이 없다. 옥개석은 초층부터 3층이 모두 같은 형식으로서 처마의 받침이 5단씩이고 상면 중앙에는 2단의 각형 굄을 각출하여 그 위에 부재를 받게 되어 있다.
낙수면이 평박하고 네 귀 전각의 반전이 예리하여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음은 신라 성대(盛代)의 석탑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며, 상륜부는 노반석 위에 복발만이 원형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석탑의 건립연대는 각 부의 조각수법이나 건조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성대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신라시대의 사자석탑으로는 유일하다.
≪참고문헌≫ 韓國의 美-石塔-(鄭永鎬 監修, 中央日報社, 1980), 國寶-塔婆-(秦弘燮 編, 藝耕産業社, 1983).
* 연기(緣起)
생몰년 미상. 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 지리산 화엄사(華嚴寺)의 중창주이다. 흥덕현(興德縣:지금의 전라북도 고창) 출신. 출가하여 도학(道學)을 성취한 뒤 여러 명산을 편력하였다는 설과 인도에서 왔다는 설 등이 있다.
이름도 대체로 연기(緣起)라고 표기하고 있으나, 연기(烟氣) 또는 연기(烟起)로도 쓰고 있으며, 전하는 말로는 그가 연(拍)을 타고 우리 나라에 왔다고 해서 연기(拍起)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어머니와 함께 처음 지리산에 와서 화엄사를 중창하고 화엄학(華嚴學)을 널리 드러내어 퍼뜨렸다. 고려의 대각국사(大覺國師)는 화엄사에 들러, “일생을 바쳐 노력하여 화엄의 종풍(宗風)을 해동에 드날렸네.”라는 글을 남겼다.
특히, 최근에 경덕왕 때 제작된 ≪신라화엄경사경 新羅華嚴經寫經≫이 발견됨으로써 그의 사적이 확인되었다. 즉, 이 사경의 발문에 의하면, 그의 주재하에 754년(경덕왕 13) 8월에 사경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 2월에 완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창건한 사찰로는 흥덕 연기사(烟起寺), 나주 운흥사(雲興寺), 지리산 천은사(泉隱寺)와 연곡사(拍谷寺), 곤양 서봉사(栖鳳寺), 산청 대원사(大源寺) 등이 있다.
저술로는 ≪대승기신론주망소 大乘起信論珠網疏≫ 3권(혹 4권)과 ≪대승기신론사번취묘 大乘起信論捨繁取妙≫ 1권, ≪화엄경개종결의 華嚴經開宗決疑≫ 30권, ≪화엄경요결 華嚴經要訣≫ 13권(혹 6권), ≪화엄진류환원락도 華嚴眞流還源樂圖≫ 1권 등 5종이 있다.
이 저술들에 대해서 ≪신편제종교장총록 新編諸宗敎藏總錄≫에서도 ≪대승기신론주망소≫를 제외한 나머지 넷을 연기의 저술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현재에는 모두 전해지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華嚴寺事蹟記, 大覺國師文集, 朝鮮禪敎史(忽滑谷快天, 鄭湖鏡 譯, 寶蓮閣, 1978), 新發見 新羅景德王代 華嚴經寫經(李基白, 歷史學報 83, 1979).
* 석경(石經)
불경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하여 돌에 새긴 경문(經文).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중국 석경산(石經山)의 것과 전라남도 지리산 화엄사(華嚴寺)의 석경이 있다.
중국 석경산 장경(藏經)은 수(隋)나라 대업연간(大業年間, 605∼616)에 지
원(智苑)이 불교가 박해를 당하더라도 불종(佛種)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시작하였으며 그의 대에 완성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4대에 걸친 제자들이 뜻을 이어 ≪화엄경≫·≪열반경≫·≪반야경≫·≪보적경 寶積經≫ 등 사대부경(四大部經)을 완성하였다.
지리산 화엄사의 석경은 이 절의 3층 법당(法堂)이었던 장륙전(丈六殿) 주위에 흙을 바르지 않고 모두 청벽(靑壁)을 써서 그 위에 ≪화엄경≫을 새긴 것이다.
그러나 몇 차례의 전란으로 인해 현재에는 크고 작은 1만여점의 파편이 남아 있다. 이밖에 우리나라에서 조성된 석경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夢遊集(墾山老人), 新增東國輿地勝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