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인가 11살 때 처음으로 컴퓨터를 보았어요. 에임스에 있는 나사의 연구소에서였죠. 그 때 컴퓨터와 사랑에 빠져버린 거죠.”
- 스티브 잡스, 1995년 4월 20일, 컴퓨터월드 스미스소니언 시상 인터뷰 중에서
스티브는 1955년 2월 2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고아로 태어났다. 출생 직후 중산층 출신의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지금은 작고한 부모님에 대해 스티브 잡스가 간직하고 있는 이미지는 존경으로 가득차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잡스 부부는 스티브에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관심과 개방적인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자유분방한 교육 덕분에 그는 매우 일찍 기술에 눈을 떴고 기존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한 예로 레이저 공장의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스티브가 대여섯 살 때부터 차고에 있는 작업대에서 같이 일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스티브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잡스 가족은 나중에 실리콘 밸리라고 불리게 될 지역의 중심에 위치한 마운틴 뷰로 이사하게 된다. 스티브는 “주변에 엔지니어들이 넘쳐났었죠.”라고 회상하면서, “그 곳은 유년기를 보내기엔 세계에서 최고였어요.”라고 덧붙였다. 스티브의 이웃이었던 래리 랭은 당시 HP의 엔지니어였는데, 자신의 전자공학에 대한 열정을 스티브에게 전해주게 된다. 스티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후론 어떤 제품을 보더라도 더 이상 신비하게 느껴지지 않았죠. 물건들은 사람이 작업한 결과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 겁니다. 그건 제게 아주 강한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배움과 발견으로 인해 복잡해 보이던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그는 전자공학에 대한 열정이 피어오르는 흥분을 느끼며 성장한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아도 ‘전문가들’ 곁에서 그런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훌륭한 학문을 쌓지 않고도 천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가 기억하는 학교와의 첫 접촉은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처음엔 무척 힘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어린 시절의 스티브는 선생님의 수업을 잘 듣는 아이가 아니었다. 매우 자립심이 뛰어났던 그는 겉보기에는 주의가 산만한 학생같았다. 그러던 그가 4학년이 되었을 때 선생님이었던 힐 여사가 그를 눈여겨보게 된다. 후일 스티브는 그녀를 “내 인생의 성녀 중 한 분”이었다고 회고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힐 선생님과 함께 했던 그 해는 당시 채 열 살도 되지 않았던 스티브가 비범한 인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학문적 측면에서 볼 때 저는 일생동안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 한 해 동안에 배웠습니다.”
기술과 달리 학업은 그에게 계속해서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것 같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홈스티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열일곱 살 때, 잡스는 HP의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여름방학 동안 거기서 임시직으로 일하게 된다. 바로 이 때 그는 전자공학의 작은 천재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나게 된다. 후일 잡스는 워즈가 “내가 만난 사람 중 전자공학에 관해 나보다 아는 것이 많았던 첫 번째 인물이었다.”라고 회상했다.
1972년 그는 오리건 주의 리드 칼리지에 입학하고, 많은 분야에 관심을 가졌지만 학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결국 잡스는 입학 6개월 만에 학기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그만둬 버린다(그래서 그에게는 대학 졸업장이 없다). 막 생겨나기 시작한 응용 컴퓨터 산업에 심취한 그는 2년간 아타리 사에서 게임 프로그래머로 일한다. 당시 잡스는 히피의 전형이었다. 매우 독립적이었으며 머리를 반쯤 기른 그의 모습은 어른 같아 보였지만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사소한 일거리’로 번 돈으로 인도 여행을 한 후 1974년 가을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그는, 공동농장에서 몇 개월을 보내고 홈브류 컴퓨터 클럽에서 워즈니악을 다시 만나게 된다. 이 클럽은 컴퓨터광들이 만든 클럽으로서 후일 ‘해킹’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1976-1984 : 애플의 탄생
“사과 : 이 단순한 단어 속엔 고도의 정교함이 내포되어 있다”
- 스티브 잡스
잡스와 워즈니악이라는 성을 가진 이 두 명의 스티브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둘 다 테크놀러지의 신봉자였지만 그 배경은 서로 달랐다. 도구는 인간에게 유용하도록 인간에 맞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워즈니악은 생각했다. 그는 전자공학의 신봉자였으며 간단한 기계들을 고안해내는 데 특출한 재능이 있었다. 반면에 잡스는 창조적 예견자(visionary)의 성향을 지녀, 개인용 컴퓨터의 등장이 세상을 바꾸어놓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예견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매우 보완적인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공동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잡스는 워즈니악에게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으로 일해야 한다고 설득했고, 잡스의 폭스바겐 버스를 비롯해서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처분한 뒤 두 친구는 1,300달러를 가지고 모험을 시작한다. 풀타임의 정규직을 가져본 적도 없고 사회생활 경험도 거의 없던 잡스가 워즈니악을 설득해 그들 자신의 회사를 차린 것이다. 한편 잡스는 회사 이름을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애플’로 지었는데, 이로 인해 ‘바이트(byte)’라는 단어와 회사 이름을 재미있게 연결 지을 수가 있었다. ‘바이트’는 정보의 최소 단위인 비트(bit)의 집합으로 구성된 컴퓨터의 기본 단위를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깨물어먹다라는 뜻의 ‘bite'라는 동사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애플 I’은 실제로 혁신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개인용 컴퓨터는 아니었고 사용자가 기술에 대해 많이 알고 있어야 했다. 게다가 두 스티브는 666.66달러에 그들의 ‘첫 번째 사과’를 판매하는 데 애를 먹었다. 충격적인 숫자(이로 인해 컴퓨터엔 ‘짐승의 기계’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로 이루어진 이 가격은 흔히 말하듯이 잡스가 심취해 있던 우상파괴적 신비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 두 발명가의 ‘학생다운 유머 감각’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애플컴퓨터는 애호가들 사이에서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평가되면서 점점 소문이 퍼지게 되지만 상업적 성공의 길은 멀게만 보였다. 그러나 워즈니악은 벌써 새로운 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1976년 그는 잡스 집의 차고에서 ‘애플 II’를 제작하기 시작하여 그 해 가을 작업을 마쳤다.
이때의 2년간(1974년부터 1976년까지)은 잡스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 잡스는 미리부터 CEO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열정이 매우 빠르게 전달되며 자신에게 카리스마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투쟁하는 법을 배웠으며 자신의 주도권을 나타내는 법을 익혔다. 그러나 이 시기는 특히 자신이 정확한 비전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잡스는 세상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길 원했고 자신이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잡스는 당시 인텔의 마케팅 담당 이사였던 마큘라를 설득해 투자를 받을 수 있었고 애플컴퓨터 주식회사가 도약하게 되는 ‘제2의 탄생’이 되었다. 당시 잡스의 나이는 21세였다. 몇 달 후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된 마큘라는 향후 20여 년간 애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애플 II는 1977년 4월 상용화되었다. 개인용 마이크로 컴퓨터가 탄생한 것이다. 애플 II는 컴퓨터 산업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특히 애플은 단지 연구소나 컴퓨터실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무실에서 소형컴퓨터가 사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 장점을 보여줌으로써 하나의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애플 II에 진정한 애정을 갖고 계속 사용하는 팬들이 수천 명에 달할 정도이다.
1979년은 애플과 잡스에게 매우 중요한 해였다. 회사는 제 모습을 갖추어갔고 재능 있는 엔지니어들을 끌어들이는데, 그 중에는 특히 애플의 31번째 직원이자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맡게 된 제프 라스킨이 있었다. 그는 게임 전용 컴퓨터 제작 계획을 포기하고 ‘강력하면서도 사용하기 편한 컴퓨터’를 만들자고 마큘라를 설득한다. 그러나 당시 모든 노력은 애플 II의 후속 버전인 ‘리사 Lisa'의 개발에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에 매킨토시 프로젝트는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 해 말, 잡스는 향후 수년간의 흐름을 바꿔놓으며 자신의 ‘혁명적’ 개인용 컴퓨터의 비전을 실현시켜줄 기술을 발견하게 된다. 1979년 11월, 제록스 사의 연구소인 PARC가 연구 중인 기술 가운데서 잡스는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발견한 것이다. 잡스에게 이것은 하나의 계시였다. 자신의 비전을 구체화하는 데 부족했던 무언가를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개인용 컴퓨터는 하드웨어 측면에서 아무리 혁신적이라 할지라도 사용하기 쉽고 간편해야 했던 것이다. 다음달 PARC에 다시 찾아가 책임자들에게 애플이 그 기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설득한다. 그 후로 잡스는 PARC의 기술을 반영한 개인용 컴퓨터 출시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1980년 초, 리사 프로젝트의 작업 계획에 여러 가지 지시사항이 추가되었고, 잡스는 리사 작업팀을 보강하기 위해 제록스의 엔지니어 십여 명을 끌어들이게 된다.
1980년 12월 12일, 애플은 증시에 상장된다. 주식은 1시간 만에 모두 팔렸고 주가는 상장 하루 만에 32% 상승한다. 대주주이자 당시 25세였던 스티브 잡스는 일순간에 백만장자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애플의 성장으로 상황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규모가 커지고 증시에 상장되면서 회사의 성격은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직체계는 비대해졌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내세우는 일은 더 어려워졌다. 재정적 문제들과 경쟁의 압력이 대두됨에 따라 이익 다툼이 생겨나게 되었다. 상업적인 요구들과 인간관계에서 오는 문제들은 두 스티브가 차고에서 누리던 행동의 자유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잡스는 이제 자기가 만든 회사에서 입지를 굳히면서 혁명적인 컴퓨터를 만들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했다.
1981년 1월, 잡스는 리사가 자신이 꿈꾸는 컴퓨터가 될 수 없으리란 것을 깨닫고 애플 경영진들을 설득하여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그 후 3년간 잡스는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자신의 생각에 맞도록 고쳐나가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었고, 이 과정에서 일부 동료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 한편 1981년 8월, IBM이 첫 퍼스널 컴퓨터Personal Computer를 출시한다. 혁신적인 것이라곤 전혀 없었고 가격도 애플 II보다 두 배 이상 비쌌지만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로 2년간 백만 대가 팔렸고 첫 글자를 따서 만든 PC가 개인용 컴퓨터의 동의어가 될 정도였다. 1983년 초, 애플은 두 가지의 새로운 컴퓨터를 시장에 출시한다. 약 1만 달러에 출시하여 상업적 실패를 본 리사와 대성공을 거두며 이후 10년 이상 생산된 ‘애플 IIe’가 그것이었다.
1983년 12월, 매킨토시의 첫 TV광고가 방송된다. 이 광고는 애플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왔다. 내용이나 형식 면에서 절제되고 혁신적이며 혁명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광고는 IBM에 대한 애플, 즉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고자 했다. 컴퓨터라는 도구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유의 원천이 되어야 했고, 그는 모두에 맞서서 홀로 그것을 증명해 보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세상은 변화할 것이다. 잡스 자신으로 인해서 말이다.
1984년 1월 24일, 맥이 출시되었다. 사람들은 모니터와 마우스를 갖춘 가볍고 작은 크기의 ‘호감이 가는’ 기계를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용 컴퓨터가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갖추고 그림과 창을 통해 컴퓨터의 내용을 간단하게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맥은 컴퓨터 전문가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는데 이들에게는 맥이 간단한 장난감 정도로 비쳤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맥이 ‘비서를 위한 컴퓨터’라고 빈정거리기도 했지만 맥의 우수성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맥은 컴퓨터에 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컴퓨터의 기능을 선사했던 것이다. 1984년, 애플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세찬 파도에 불을 당겼고 매킨토시는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상표 중 하나가 되었다. 누가 뭐라 해도 스티브 잡스는 도전에 성공한 것이다.
잡스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자신의 비전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단 프로젝트가 끝나자 그는 비즈니스 세계의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고 첫 번째 고난의 행로가 시작되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던 그는 때로 자신이 회사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너무 자기중심적이었으며, 협력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애플의 임원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1985년 여름 애플은 창립 후 처음으로 분기 적자를 기록했고 잡스가 채용했던 애플의 회장 스컬리의 거센 공격이 시작되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그 이사회가 열린 지 며칠 만에 잡스는 애플의 운영진에 의해 모든 직위가 해제된다. 그의 공식적인 지위는 그 때부터 아이러니컬하게 ‘Global thinker'가 되었다. 그는 한 사무실에 고립되었는데, 그 후로 이 방은 사내에서 ’시베리아‘라고 불렸다. 잡스가 그 자신의 회사에서 ‘유배’된 것이다. 1985년 9월 17일, 잡스는 사표를 제출한다.
1985-1995 : 새로운 모험을 향해
“스티브 잡스는 이미 잘 만들어진 자신의 전설에 아마 한두 장을 덧붙이게 될 것이다.”
- 비즈니스위크, 1988년 10월 24일
애플에서 잡스가 보낸 마지막 몇 달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운명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쫓겨난 것에 대해 약간은 상처받은 듯 보였으나 우리가 상상하듯이 그는 당하고만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 유명한 1979년의 PARC 방문이 그에게 안내자 역할을 했다. 잡스는 이렇게 회상한다. "당시에 그들은 작업 중이던 세 가지 일들을 제게 보여주었어요. 그런데 저는 첫 번째 것만을 보고는 너무나 놀라 눈이 멀어버려서 나머지 두 가지를 그만 놓쳐버렸던 거죠. 그걸 다시 발견하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어요. 그 세 가지는 그래픽 인터페이스, 객체지향 컴퓨터, 그리고 네트워크였지요.”
특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문제가 한 가지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육이었다. 애플 초기부터 잡스는 자신이 ‘교육상의 문제’라고 판단한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1995년에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더 이상 아이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죠. 우린 미국의 전 학교에 컴퓨터를 한 대씩 기증하고 싶었어요.” 교육에 대한 잡스의 높은 관심은, 너무 폐쇄적이고 비혁신적인 교육체계에 대한 혐오에서 생긴 것 같다. 어쨌든 잡스는 애플을 떠나면서 다시 한 번 교육시장을 공략해서 아직은 뭔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1986년 2월 그는 한 주를 제외하고 자신이 보유한 모든 애플 주식을 팔아버린다. 잡스의 삶은 이제 애플을 떠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1986년 말, 31세의 잡스는 자신의 두 번째 회사인 넥스트NeXT를 창립하고 컴퓨터의 사양을 교육시장에 적합하도록 만들기 위해 여러 대학들과 공동으로 작업한다. 항상 그랬듯이 잡스는 컴퓨터의 구상과 디자인에 관련된 모든 세부 사항에까지 참견을 했고 역시나 거칠고 완강해 보였다. 1988년 10월, 1년이 넘게 지연되기는 했지만 첫 넥스트 컴퓨터인 넥스트큐브NeXTCube가 출시되었다. 이것은 혁신적인 디자인을 갖춘 강력한 컴퓨터였다. 사실 기업주가 컴퓨터와 그 회사를 이렇게까지 자신과 동일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넥스트는 잡스의 회사였고, 잡스는 넥스트 그 자체였다. 세계 컴퓨터의 ‘앙팡 테리블’로 떠오르고 경영 방식이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혼자 힘으로 선구적이고 혁신적인 프로젝트를 실현할 능력이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던 것이다.
애플을 그만 둔 스티브에게는 넥스트만이 유일한 계획은 아니었다. 1986년, 그는 유명한 영화 ‘스타워즈’의 감독 조지 루카스의 회사인 루카스필름의 컴퓨터그래픽 부문을 개인 돈 1천만 달러에 사들인다. 잡스는 이를 44명의 직원을 거느린 ‘픽사Pixar'라는 이름의 회사로 만든다. 픽사는 노하우와 전문성을 축적하고 있었고 얼마 안 가서 시장에는 이들과 견줄 만한 상대가 없어지게 되었다. 1991년, 픽사와 디즈니 스튜디오는 중대한 계약을 맺는데, 컴퓨터그래픽으로 된 세 편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공동 제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995년 11월 개봉된 ‘토이스토리’는 컴퓨터그래픽에 완전히 의존한 첫 번째 영화이며 3D로 이루어진 첫 ‘만화영화’였다. 또한 그 해의 가장 큰 흥행작이었다. 이후 화려한 성공을 거듭하며 오늘날 디지털 산업의 선두주자로 자리잡았다.
픽사의 성공은 애플의 설립을 가능케 했던 두 가지 요소의 결합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창조성과 기술의 결합이었다. 잡스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모든 이들이 이 분야에서 일하려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분야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장애물이 있죠. 그 첫 번째는 창조성이라는 장애물입니다. 두 번째는 기술이에요. 픽사는 기술을 사들여 만들어진 회사가 아닙니다. 지난 10년간 말 그래도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했어요. 누구도 그 기술을 픽사에서 가져갈 수 없어요. 디즈니도 못 가져갑니다. 세 번째 장애물은 이 둘의 결합이죠. 우린 이 두 가지 문화, 즉 기술과 창조성을 결합시키는 데 10년을 보냈어요. 어느 누구도 그걸 시도해본 적이 없을 겁니다.”
한편 1985년 애플 경영진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데, 이는 이후 ‘컴퓨터 역사상 가장 큰 전략적 실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애플은 당시 운영체제 분야에서 유일하게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갖춘 OS로 크게 앞서 있었다. 맥OS를 다른 업체에 라이선싱했다면 애플은 아마도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가 오른 위치, 즉 개인용 컴퓨터의 세계 1인자가 될 수 있는 방편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플의 경영자들은 컴퓨터를 운영체제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결국 세계 1인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십여 년이 지난 후 애플은 맥OS의 라이선싱을 시도하나 그때는 이미 윈도가 전 세계를 휩쓴 뒤였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몇 차례의 법적 분쟁은 이 두 회사에 대한 인식 자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초기부터 맥의 팬들은 윈도 사용자들과 대치했는데,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이러한 대치 상황이 두 OS 사이의 “종교전쟁”이라고까지 일컬어지곤 했다. 이는 두 사용자 집단 간의 문화의 차이, 때로는 그들의 분쟁이 지닌 폭력성을 나타내는 데 그리 지나친 표현이 아니었다. 1995년 8월, 마이크로소프트가 PC의 발명 이후 가장 훌륭한 발전이라는 찬사를 받은 윈도95를 통해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맥 사용자들은 “결국 매킨토시 84의 마이크로소프트 버전”일 뿐이라며 이를 비웃었다.
1996-2000 : 천재의 귀환
“오늘 우리는 이 산업에 낭만과 혁신을 불어넣었습니다.”
- 스티브 잡스, 1998년 5월 6일, 아이맥 발표 공식성명 중에서
1996년 초, 넥스트는 적어도 상업적 측면에서는 실패가 확실한 것 같았다. IBM과 마이크로소프트가 점령한 세계에서 그를 위한 자리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에 잡스는 실망했다. 그가 이룩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만드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문제는 그들에게 미학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혀 없지요. (중략) 그들은 독창적인 아이디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제품에 문화를 불어넣지 않습니다. (중략) 그것 때문에 슬퍼지는 겁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 때문이 아닙니다. 그건 제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들은 성공할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3류 제품을 만든다는 겁니다.”라고 잡스는 결론지었다.
1990년대 중반은 애플에게 큰 타격을 안겨주었던 시기였다. 10년 동안 애플의 시장점유율은 20%에서 8%로 감소했다. 1995년에서 1996년 사이에 사직 또는 해고로 인해 전 직원 수의 4분의 1이 감축되었다. 매출은 격감했고 공장은 폐쇄되거나 매각되었다. 1997년 2월, 애플의 넥스트 합병 절차가 끝나고, 스티브 잡스는 공식적으로 애플의 새로운 CEO 길 아멜리오의 고문이 되었다. 이후에도 애플은 여전히 실패를 거듭했고 새로운 주인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누가 파산 직전의 쓰러져가는 회사를 떠맡으려 하겠는가? 적자는 쌓여갔고 주가는 지난 5년 이래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공식적으로 애플의 CEO 직은 여전히 비어 있는 상태였으나 회사의 주도권을 잡은 것은 바로 스티브 잡스라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졌다.
1997년 8월 8일은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 간에 역사적인 계약이 체결된 날이다. 잡스는 주머니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조커’를 꺼내어 마이크로소프트가 애플에 1억 5천만 달러를 투자하도록 만들었다. 이 놀라운 계약은 숱한 분석의 대상이 되었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우선 그로 인해 마이크로소프트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분명치가 않았고, 다음은 잡스와 게이츠가 그다지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애플이 항상 ‘윈텔 Wintel' 커플과는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고 항상 자신의 다름을 큰 소리로 외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플의 이름을 마이크로소프트나 오라클 또는 인튜이트에 긴밀히 연계시킴으로써 잡스는 죽어가는 회사처럼 보였던 애플이 여전히 업계의 지지를 얻고 있는 메이저 기업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마이크로소프트와의 역사적인 계약은 잡스가 계획한 간단하면서도 멋진 ‘마케팅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발표가 있던 날, 지난 몇 해 동안 폭락했던 애플의 주가는 33%나 상승했다. 이후 새 이사회가 구성되면서 마큘라가 사직하고 잡스가 이사회 멤버로 선출됨에 따라 이 ‘임시 CEO’의 운신의 폭은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1998년 5월, 잡스는 다시금 맥에 집중하여 노트북 컴퓨터의 새로운 버전으로 ‘파워북’을 출시함과 동시에 아이맥 iMac의 출시를 발표한다. 아이맥의 외형은 맨 처음 매킨토시를 연상시키면서 잡스가 애플의 사령탑으로 정말 다시 돌아왔음을 확인시켜주었다. 1998년 8월 3일, 제품이 마침내 판매되었을 때 그 성과는 놀라웠다. 단 1주일 만에 아이맥 15만 대가 팔려나간 것이다. 아이맥은 애플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판매된 컴퓨터가 되었고, 1998년 10월 회사는 3년 만에 처음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했으며 이후 거의 매 회계분기마다 흑자를 기록하였다. 여전히 혁신적이면서 일관성 있고 애플의 새로운 이미지에도 충실한 제품의 출시가 잇따랐다. 잡스는 어떻게 해서라도 혁신을 계속하고자 했다. “혁신을 위해 태어난 회사에서 위험한 것은 혁신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위험은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000-2003 : 디.지.털. 혁명
“애플은 향후 10년간 가장 수익성 있는 10대 인터넷 기업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 스티브 잡스, 2000년 1월 5일, 맥월드 엑스포 연설 중에서
1999년 말까지 스티브 잡스는 여전히 ‘임시 CEO'로 간주되었고 공식 성명에서도 그렇게 소개되었다. 2000년 1월 5일,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맥월드 엑스포에서 4,000명이 모인 가운데 자신이 공식적으로 애플의 CEO가 되었음을 밝혔다. 그럼에도 그는 ‘iCEO’라는 직함에서 i를 그대로 써달라고 제안했는데, 이는 더 이상 임시직(interim)이라는 의미가 아닌 인터넷을 의미하는 i였다. 잡스가 나아갈 길은 분명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맥이 탄탄한 운영체제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것과 다른 한편 애플이 인터넷의 선두 주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90년대 말 애플을 구한 이후 잡스는 애플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대담한 전략을 수행한다.
잡스는 맨 먼저 운영체제의 새로운 버전인 맥OS 텐 MacOS X을 소개한다. 맥OS 텐은 성능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고 언론은 잡스의 전략을 칭찬했다. 애플의 새로운 전략의 또 다른 핵심 요소인 ‘아이툴즈 iTools'는 일반 대중을 위해 만들어진 일련의 소프트웨어 또는 ‘인터넷 서비스’였다. 잡스가 지휘권을 잡은 후 강화된 애플은 회사의 신조에 충실하면서도 교육시장을 잊고 있지는 않았다. IDC연구소에 따르면 2000년 6월 애플은 미국 교육시장의 25% 이상을, 또 세계 시장의 14%를 점유했다. 7월에 나온 2억 달러의 순이익 발표로 인해 애플은 11회 연속 분기별 흑자를 기록하게 되었고, 새로운 황금시대를 누리고 있었다.
2001년 1월, 아이툴즈에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사용하기 쉬운” 가상의 쥬크박스로 소개된 아이튠즈 iTunes가 추가된다. 이것은 무엇보다 애플이 디지털 음악 시장에 힘 있게 진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0년대 말부터 전자 음악은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인터넷의 대중화와 MP3 포맷의 효율성 덕분에 저작권법에 위배되기는 해도 음악을 변환하고 공급하는 것이 쉬워진 것이다. 2001년에 역시 애플은 예상치 못한 제품 아이포드 iPod를 출시한다. 이는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인데 MP3를 비롯한 여러 가지 디지털 포맷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이포드는 디자인과 성능, 사용 편의성으로 인해 모두에게 환영을 받았고, 2002년 애플은 디지털 플레이어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했다. 아이포드는 그 자체로 잡스의 전략을 상징하고 있다. 이는 소니를 모방하고자 하는 애플의 다각화 정책의 일환일 뿐 아니라 애플이 단지 맥의 소유자만이 아닌 모든 사용자들에게 다가가고자 한다는 증거였다.
2001년 3월 방대한 직영 네트워크인 ‘애플 스토어’를 개설한 이래, 2003년 4월에는 애플에 그 해의 가장 큰 성공으로 기록될 아이튠즈 뮤직스토어(온라인 스토어)가 문을 열었다. 이는 사용자들이 디지털 음악을 다운로드할 수 있는 새로운 유료 서비스였다. 잡스는 이 솔루션이 P2P 공유 서비스와는 달리 합법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가상 스토어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이었고 기획자들의 예상을 크게 넘어섰다. 일주일 만에 애플의 뮤직스토어에서 백만 곡이 판매되었고(이 기록은 한달 만에 달성될 것으로 예상됐었다), 그 다음 주에도 같은 양이 팔려나갔다. 그러나 잡스의 진정한 성공은 모든 음반회사들로 하여금 이 모험에 동참하도록 만들었다는 데 있다. 잡스는 주요 관련 기업들이 내버려둔 황무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혁신과 사용 편의성, 그리고 회사가 갖고 있는 좋은 이미지(매우 현대적인 이미지)에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2003년 들어 애플은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제품을 출시한다. 6년 전에는 별 볼 일 없었던 애플이 이제 놀라운 성공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회사는 이제 각 분야별로 포지셔닝이 잘된 제품군을 구비하고 있으며 더욱이 이들은 누구나 인정하는 신뢰성이 있는 운영체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또한 이 해 연말에는 잡스의 야심을 보여주는 대규모 발표가 있었다. 10월 16일, 아이튠즈를 윈도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애플에 있어 확실히 중대한 결정이자 디지털 음악 시장을 점령하려는 전략이었다. 이는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아이튠즈 윈도 버전은 3일 반 만에 백만 회나 다운로드되었다.
세 가지 제품으로 애플은 세계 음반업계의 거역할 수 없는 강자로 자리잡았다. 뿐만 아니라 애플이 편리하고 완벽한 음악 판매 도구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 곡씩 0.99달러에 살 수 있는 노래들이 잘 구비된 온라인 스토어(아이튠즈 뮤직스토어), 음악을 분류하여 클릭 한 번으로 살 수 있게 해주는 간편한 소프트웨어(아이튠즈), 그리고 음악을 전부 지니고 다닐 수 있게 해주는 휴대용 플레이어(아이포드). 각각을 처음 볼 때는 그리 혁명적이지 않다. 이 세 가지 요소가 합쳐져야 비로소 솔루션이 제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애플의 경쟁자들 또한 사태를 파악하고 대응에 나섰다. ‘디지털 음악 전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2004 : 스티브 잡스의 해
스티브 잡스는 현재의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이것이 바로 미래에 소비자들이 원하게 될 것입니다.”
- 마크 크밤(애플의 전 직원). 2003년 12월 15일, ‘애드에이지’
2003년 하반기에 애플과 잡스는 여러 가지 상을 잇따라 수상했고, 회사의 성과, 특히 디지털 음악 상품과 관련해서 성공 스토리들이 언론에 쏟아져 나왔다. 이제야 잡스가 이루어낸 변화의 크기를 실제로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12월 14일 「포천」지는 아이튠즈 뮤직스토어를 ‘올해의 상품’으로, 맥 G5를 ‘그 해의 가장 좋은 상품 Top 25'에 선정했다. 12월 15일 마케팅 관련 주요 정보 사이트의 하나인 애드에이지는 스티브 잡스를 ’올해의 마케팅 인물‘로 선정했다. 또한 12월 15일, 애플은 공식 성명을 통해 자사의 서비스에서 2,500만 곡이 판매되었다고 발표하는데, 이는 분명히 ‘온라인 음악 서비스 사상 가장 큰 성공’이었다. 12월 27일, ‘샌프란시스코 비즈니스 저널’은 스티브 잡스를 ‘올해의 경영인’으로 선정했다.
2003~04년에 걸친 애플의 전략은 숱한 분석과 논평의 대상이 되었고, 또한 애플의 추종자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잡스의 전략은 그가 공식적으로 회사의 지휘권을 되찾은 2000년 당시 세웠던 목표와 부합하고 있다. 이 전략의 큰 줄기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신뢰성 있는 운영체제에 기반을 둔 시장성 있는 컴퓨터를 일관되게 공급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시장에 더욱 치중한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 ‘디지털 혁명의 새로운 물결’에 부응하며, 윈도의 세계를 잠식해 나가면서 또한 인터넷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겠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지난 4년간 이 이중의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투자했고 결국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첫 번째 측면에서 볼 때 애플의 상황은 매우 긍정적이다. 맥 제품은 모든 소비자층을 겨냥한 깔끔한 컴퓨터들로 일관성 있고 구성요소가 잘 갖추어져 있다. 게다가 이 컴퓨터들은 맥OS 텐이라는 우수한 평판을 받고 있는 운영체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두 번째 측면에서 볼 때 잡스의 전략은 분명한 성공이었다. 애플은 최첨단에 서 있는 ‘인터넷 기업’이 되었으며 전자상거래의 핵심 시장 및 디지털 음악업계에서 리더가 되었다. 특히 아이튠즈-아이포드 커플은 애플이 PC 사용자들 사이에 침투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따라서 지금까지 한정된 시장에 머물렀던 애플이 잠재시장을 엄청나게 확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두 가지 주요 측면 외에도 잡스의 승리 전략의 기반이 되는 몇 가지 다른 강점들을 간추려볼 수 있다. 먼저 일관된 관리다. 애플은 제품의 구상에서부터 제작, 유통까지 도맡아 하는 유일한 회사이다. 이러한 방식은 욕심이 좀 지나치긴 해도 애플과 고객 사이에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 다음은 마케팅이다. 애플은 혁신을 계속하고 있으며, 적어도 광고를 통해 사람들의 기억에 계속 남도록 하고 있다. BBC 뉴스사이트에 따르면 애플은 2년간 아이튠즈와 아이포드 관련해서 6,000개 이상의 기사거리를 제공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애플과 다른 회사들 사이에 체결된 협정의 중요성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는 단연코 잡스가 가진 힘 중의 하나이며 아마도 회사의 재건을 위해 그가 기여한 핵심적인 부분일 것이다. 그의 전략은 주로 다른 메이저 회사들과의 ‘윈윈win-win' 계약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기에 스티브 잡스가 ‘애플 신화를 관리’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덧붙일 수 있다. 애플의 활동 하나하나를 둘러싼 비밀스러움, 화려한 주목을 받는 중대 발표들, 그리고 애플은 항상 우리의 기대를 넘어선다는 인상 등은 회사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한편 이러한 신화는 사용자들에 의해서도 유지되고 있는데, 최근 몇 년 동안에도 그들의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있다.
현재 애플의 포지셔닝이 미묘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서로 다른 여러 개의 시장에 진출해 있음으로써 회사는 제품이나 홍보 측면에서 계속 서로 다른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의 성과로 판단할 때 이 전략은 위험하다기보다는 야심적인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음악시장에 확실히 포지셔닝을 하지 않았더라면 애플은 지금 적자를 기록하면서 다시 불리한 위치에 처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말로 확실한 유일한 사실은 애플이 그리고 잡스가 계속해서 혁신을 해나가리라는 것이다. 애플이 ‘연구 및 개발’부서에 할당하는 예산은 매년 상당히 증가하고 있다. 2003년에는 4억 7,100만 달러였고 이 분야에 종사하는 직원 수는 2,500명이었다. 맥 제품들의 변화 외에 컴퓨터 아닌 디지털 레저를 위한 새로운 기기들이 출현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애플은 몇 가지 유리한 카드를 쥐고 있고 이로 인해 편안한 위치에서 차분하게 미래를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애플은 그 파란만장한 역사에서 가장 좋은 상황을 맞고 있는 것 같다.
스티브 잡스는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에서 아내와 세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오래 전부터 채식주의자였던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며, 편한 복장으로 다니기를 좋아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가 맡고 있는 두 회사의 경영에 투자한다. 잡스는 16억 달러로 평가되는 재산가로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의 400대 부자 중 122번째에 오른 누가 보기에도 부유한 인물이다. 또한 현대 역사상 가장 훌륭한 기업가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그가 ‘세상을 바꾸는 데’ 성공했기에 더더욱 그렇다.
이 책의 진정한 목적은 현대 사회의 삶의 표층을 벗겨내어 그 아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수많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만나게 될 해답들은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기묘하겠지만, 증거를 확인하고 난 후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백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해답을 데이터 속에서 찾는다. 어떤 주제를 놓고 의견을 제시하거나 이론화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다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도덕적 견지를 정직하고 공정한 데이터의 평가로 대체할 때, 종종 참신하고 놀라운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책은 아주 특별한 시각으로 쓰였으며, 그 기저에는 몇 가지 기본 전제가 깔려 있다. 첫째, 인센티브는 현대의 삶을 지탱하는 초석이다. 그리고 인센티브를 이해하는 것, 혹은 그것을 탐색하는 것이야말로 일상의 모든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다. 둘째,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사회 통념 가운데는 잘못된 것들이 많다. 사회 통념은 대개 매우 교묘하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진실을 꿰뚫어보는 일은 악마의 손을 빌려야 할 정도로 어렵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셋째, 전혀 예상치 못한 극적인 결과는 흔히 거리가 멀고 미묘한 요인을 원인으로 한다. 넷째, 이른바 ‘전문가’들은 정보의 우위라는 강점을 자기 자신의 아젠다를 위해 사용한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의 도래로 말미암아 정보의 우위가 매일매일 감소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무엇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를 알면 복잡한 세상이 훨씬 단순해진다. 혼란과 모순의 껍질을 벗겨낼 수 있는 도구로 숫자의 힘을 능가할 만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1. 교사와 스모 선수의 공통점은?
먼저 당신이 놀이방을 하나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규칙 중 하나는 오후 4시면 반드시 부모가 자녀를 데리러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부모들이 자주 지각을 한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학자들이 게으른 부모들에게 벌금을 물리자는 해결책을 제시했고 직접 시험을 해보았다. 아이를 데리러 오는 데 10분 이상 늦을 때마다 3달러를 벌금으로 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벌금 제도가 시작하자 부모들의 지각은 오히려 이전보다 대략 2배로 증가했다. 부모들은 벌금을 냄으로써 지각한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이 부여한 인센티브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킨 셈이다.
경제학은 근본적으로 인센티브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이 원하거나 필요한 것을 얻는가? 인센티브는, 단순히 말해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나쁜 일을 적게 하도록 설득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센티브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인센티브는 그 특색에 따라 기본적으로 세 가지로 나뉜다. 경제적, 사회적, 도덕적 인센티브다. 물론 하나의 인센티브 도식은 대개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포함한다. 금연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담배 한 갑 당 3달러씩 부과되는 ‘죄악세’는 경제적 인센티브다. 레스토랑에서 흡연을 금지하는 것은 강력한 사회적 인센티브이며, 테러리스트들이 담배 암거래로 자금을 마련한다는 미국 정부의 주장은 일종의 도덕적 인센티브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놀이방에 적용했던 인센티브는 어디가 잘못되었던 것일까? 일단 벌금 액수가 너무 적었다. 월회비의 6분의 1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베이비시터에게 맡기는 것과 비교해도 상당히 싼 가격이다. 벌금을 100달러로 올리면 지각은 완전히 사라질 테지만 지독한 반감을 살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도덕적 인센티브(죄책감)를 경제적 인센티브(3달러의 벌금)로 대체한 것이 문제였다. 이는 겨우 하루 몇 달러의 돈으로 죄책감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지각이 그 정도의 가치밖에 안 된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실제로 실험 17주 째에 벌금 제도의 시행을 중단했는데도, 지각하는 부모들의 수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제 그들은 지각을 할 뿐만 아니라 벌금을 내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는 인센티브의 강력하면서도 교묘한 특성이다. 단 하나의 아주 작고 미묘한 변화가 거대하고 극적인, 그리고 대개는 미리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를 낳는다.
이제 놀이방을 경영하는 대신, 연간 40만 명의 학생들을 교육하는 시카고 공립학교 체제의 운영책임자라고 상상해보자. 최근 미국의 교육행정가와 교사, 부모, 학생들 사이의 최고 관심사는 ‘고부담 시험’이다. 이 시험은 단순한 성취도 측정이 아니라 학교가 시험 성적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고부담’이라 불린다. 고부담 시험 옹호자들은 이런 엄격한 시험 제도가 학습 기준을 높이고 공부에 주력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학생들은 시험이라는 게 존재하는 한 부정행위를 저지를 인센티브를 충분히 지닌다. 그러나 고부담 시험은 교사들의 인센티브마저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이제는 교사들까지 부정행위를 저지를 ‘이유’를 지니게 되었다.
고부담 시험의 경우, 가르치는 학생들의 성적이 나쁘면 교사는 비난을 받고, 승진이나 연봉 인상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학교 전체의 점수가 낮으면 정부에서 보조받는 기금이 중단될 수 있으며, 만약 학교가 보호관찰하에 놓이면 그에 따른 책임 문제로 교사가 해고당할 수도 있다. 한편 고부담 시험은 교사들의 긍정적인 인센티브를 자극하기도 한다. 가르치는 학생들이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면 교사는 찬사를 받거나 승진을 하고, 혹은 재산을 늘릴 수도 있다. 일례로 캘리포니아 주는 우수 담임교사에게 2만 5,000달러의 보너스를 주겠다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교사들은 어떤 방식으로 부정행위를 저지를까? 얼굴에 철판을 깐 듯 뻔뻔스러운 모습에서 교묘하고 세련된 수법까지, 그 양상은 아주 다양하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답안지를 채울 시간을 더 주는 것이다. 교사가 미리 시험지를 받았다면 힌트를 줄 수도 있고, ‘시험 대비 수업’만 집중적으로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시험이 끝난 후 교사 자신이 몰래, 빈칸에 답을 채워 넣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교사가 진실로 부정행위를 저지르고자 한다면, 시험이 끝난 후 오답을 지우고 정답으로 대체하는 방법이 가장 확실할 것이다. 만일 이런 유형의 부정행위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이를 어떻게 잡아낼 수 있을까? 자, 그럼 한번 머리를 굴려보자. 너무 많은 답을 고칠 경우 들킬 확률도 높고 시간도 부족하기 때문에 가장 최선의 방법은 답안지 가운데 2분의 1이나 3분의 2 정도를 꺼내 그 중 한 줄에 연속해 있는 여덟 내지 열 개의 답을 고치는 것이다. 특히 답안지의 뒷부분에 손을 댈 가능성이 크다. 시험 문제는 뒷부분이 어려운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찾아야 할 것은 ‘희귀한’ 답안 패턴이다. 특정 구간에 일련의 똑같은 답들이 반복되는 동일 패턴이 보인다면 의심을 품는 것이 타당하다. 특히 어려운 문제가 모인 부분이라면 거의 확실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신호는 쉬운 문제는 놓치면서 어려운 문제는 정답을 맞힌 경우다. 나아가 이 방법을 이용하면 지난 시험에 비해 지나치게 좋은 점수를 받았다가 다음 해에 다시금 성적이 극적으로 떨어진 학생들이 많은 학급을 찾아낼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시카고 공립학교들의 모든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연간 200개 이상의 학급에서 부정행위가 저질러진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전체의 5%에 가까운 수치다. 그러나 이것은 최소한의 추정일 뿐이다. 그 결과, 시카고 교육당국은 부정행위를 저지른 교사들을 해고하기 시작했다. 증거가 확고한 12명의 교사는 해고했고, 다른 많은 교사들에게는 적절한 경고 조치를 취했다. 다음 해, 교사들에 의한 부정행위는 30%이상 줄었다.
교사들이 부정을 저지른다는 사실에 수치심이 느껴진다면, 스모 선수도 부정행위를 저지른다는 것은 더한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일본에서 스모는 국기(國技)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 군사적,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국보(國寶)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것은 데이터다. 스모를 지배하는 인센티브 도식은 난해할 뿐만 아니라 극도로 강력하다. 스모에서 선수들의 순위는 그의 인생 전반을 지배한다. 엘리트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가까울수록 더 많은 수입을 올리며 마치 귀족과도 같은 특권을 누릴 수 있지만 울타리 밖의 선수들은 수입도 열악하고 그들보다 뛰어난 이들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 순위는, 인생의 전부다.
이렇게 중요한 스모 선수의 순위는 1년에 여섯 번 열리는 정규 대회의 결과로 결정된다. 각각의 선수들은 대회가 열릴 때마다 열다섯 번의 시합을 가지는데, 8승 이상의 전적으로 대회를 마치면 순위가 상승하며 7승 이하의 전적으로 패배하면 순위가 하락한다. 따라서 스모 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시합은 8승째를 가르는 순간이다. 위로 올라갈 것인가, 밑으로 추락할 것인가가 그 한 시합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8승6패의 전적을 가진 선수가 7승7패를 기록하고 있는 상대 선수에게 일부러 져주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다음의 통계수치는 대회 마지막 날 7승7패의 선수들이 8승6패의 선수들을 맞아 싸운 몇 백건의 시합 기록을 종합한 것이다. 과거 기록을 바탕으로 한 승률은 48.7%임에 반해서, 마지막 날 실제로 시합에서 이긴 확률은 79.6%이다. 그 다음번 시합에서 두 사람이 만났을 때의 기록은 겨우 40%였다. 한 시합에서 80%의 승률을 올리고, 그 다음번에는 40%라, 이게 과연 자연스럽다 할 수 있을까?
승부 조작의 이유로 징계를 당한 스모 선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모 경기에 조작이 있었다는 주장은 일본 언론에 의해서도 심심찮게 제기되곤 한다. 재미있게도, 이렇게 가끔씩 제기되는 언론의 주장은 스모계의 부패를 측정하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제공한다. 고발자에 의해 승부 조작의 가능성이 제기된 직후 열린 스모 대회의 데이터를 살펴보도록 하자. 대회 마지막 날 7승7패의 선수들이 8승6패 선수들을 맞아 싸웠을 때 승률은? 평소와 같은 50%다. 지난번 데이터 분석 때 우리가 확인한 80%는 온데간데없다! 스모 선수들이 승부를 조작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란 꽤나 어려워 보인다.
2. KKK와 부동산 중개업자는 어떤 부분이 닮았을까?
큐클럭스클랜 Ku Klux Klan은 창립 이후 매우 굴곡이 심한 길을 걸어왔다. 결성 초기에 그들의 활동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장난질 같은 것이었지만 해방 노예들에게 겁을 주거나 심지어 살해하는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변모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애틀랜타는 이미 KKK의 근거지가 되어 있었다. KKK는 조지아 주의 주요 정치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심지어 조지아의 수많은 경찰관, 부(副) 보안관들조차 KKK에 속해 있었다. 그렇다. KKK는 암호와 망토, 단도 뒤에 숨어 책략을 즐기는 비밀조직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진정한 힘은 대중에게 심어주는 공포심에 있었다. KKK와 사법당국이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이 공공연한 비밀에 속했기에 더욱더 그랬다.
애틀랜타는 스테트슨 케네디의 고향이기도 했다. 이 30세 청년은 KKK의 정통 핏줄을 타고났지만, 기질과 사고방식은 그들과 정반대였다. 케네디가 처음으로 KKK의 존재를 실감한 것은 그를 거의 키워주다시피 한 흑인 하녀 플로가 KKK에 의해 나무에 묶여 구타당한 후 강간당한 모습으로 발견되었을 때였다. 그녀의 죄목은 거스름돈을 주지 않는 백인 전차 운전기사에게 대들었다는 것이었다. 케네디는 자연스럽게 편협한 차별과 편견에 대항하는 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의 눈에 KKK는 이런 불합리성을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게 과시하는 단체였다. 그는 이제까지 KKK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는 데 대해 답답함을 느꼈다. 그리하여 케네디는 큐클럭스클랜에 직접 잠입하여 그들의 실태를 알아내기로 결심한다.
케네디는 매주 집회에 참석했으며, 집회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달려와 스스로 개발한 암호와 속기법을 이용해 그날 보고 들은 것들을 모두 기록했다. 그는 KKK의 각 지역 및 지부별 지도자들의 이름을 알아냈고, 그들의 계급체제와 의전 및 의식, 비밀 언어 등을 파악했다. KKK단원으로서 몇 주의 시간을 보내자 케네디는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한 KKK에 커다란 타격을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러나 열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원했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자 절망했다. 그러다 그 캄캄한 절망 속에 한 가닥 빛줄기가 비쳐들었다. 어느 날 꼬마들 한 무리가 바보 같은 비밀 암호를 주고 받으며 스파이 게임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KKK의 암호와 비밀들을 전국의 모든 아이들에게 알려주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다. 비밀 조직을 붕괴시키는 방법으로 그들의 가장 소중한 비밀을 세상에서 가장 유치한 것으로, 아울러 공개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좋은 게 또 어디 있겠는가?
케네디는 어떻게 하면 이 임무를 가장 잘 수행할 수 있을지 방법을 궁리했다. 그때 머리에 떠오른 것이 ‘슈퍼맨의 모험’이라는 라디오 연속극이었다. 그는 즉시 라디오 쇼의 프로듀서에게 접촉해 KKK에 관한 에피소드를 방송할 생각이 없는지 물었다. 프로듀서는 케네디의 아이디어를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전쟁이 끝난 마당이니 신선하고 참신한 적수가 필요했던 것이다. 프로듀서는 즉시 슈퍼맨이 KKK를 물리치는 내용의 4주짜리 라디오 드라마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첫 드라마가 방송된 후, KKK의 근거지인 클래번(마을 선술집)은 침울한 분위기에 젖어 들었다. 다음 주에는 아예 집회장이 텅텅 비었고 가입 신청률은 제로로 떨어졌다.
편견과 싸우기 위해 케네디가 고안해낸 모든 아이디어 가운데 이 슈퍼맨 운동이야말로 가장 간단하고 현명한, 그리고 가장 생산적인 것이었다. 그는 정확히 그가 바라던 결과를 얻었다. KKK의 비밀주의를 오히려 무기로 이용함으로써, 그들의 소중한 지식을 조롱거리로 만들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 수백만 명의 단원을 자랑하던 KKK는 곧 그 힘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결과가 도출된 것은 그가 정보의 순수한 힘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정보는 봉화이자, 몽둥이이자, 올리브 가지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점이다. 정보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하여 그 정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가정이나 추측만으로 무서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정보를 거래할 때, 흔히 특정 그룹이 다른 그룹보다 더욱 유용하고 훌륭한 정보를 지니는 경우가 있다. 이는 경제학자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정보의 비대칭’이라 불린다. 우리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는 자본주의의 진리를 인정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자신이 아는 정보를 이용해 당신에게 손해를 입힌다고 생각하는가? 불행히도, 당신 생각이 옳다. 전문가들은 그들이 아는 정보를 당신이 모른다는 사실에 기대고 있는 족속이다. 또한 정보로 무장한 전문가들은 어마어마한 무언의 지레효과를 활용할 수 있다. 바로 공포심이다. 상업 전문가들이 조성한 공포는 KKK 같은 테러리스트들이 조성하는 것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 원칙만큼은 동일하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꽤나 큰 두려움을 조장하는 금전 거래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주택 매매는 어떨까?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유형의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제값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어쩌면 아예 집이 팔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다. 첫 번째 경우, 당신의 두려움은 가격을 너무 낮게 책정한 게 아닌가하는 우려에 기인한다. 반면에 두 번째는 값을 너무 높게 불렀다는 우려다. 그 두 기준 사이에서 중도의 길을 찾아내는 것이 부동산 중개업자의 일이다. 당신은 그토록 훌륭한 지식을 가진 전문가가 옆에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안심할지 모르지만, 참으로 유감인 것은 그가 당신과 다른 시각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자신의 집을 팔 때와 고객의 집을 팔 때의 얻을 수익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부동산 중개업자가 자신의 주택을 매매할 때는 더욱 유리한 조건이 제시될 때까지 평균 10일 이상 더 오랫동안 시장에 물건을 내놓으며, 대개 당신의 집보다 3% 이상 비싼 가격을 받는다. 그러나 고객의 집을 팔 때는 빨리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 치중한다.
전문가나 상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만이 정보를 왜곡하고 악용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전문가도, 중개인도 모두 평범한 인간이다. 이는 곧 우리가 개인의 삶에서도 정보를 악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정보를 공개하지 않든 공개하는 자료를 조작하고 편집하든,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우리도 똑같다. 직장 면접을 볼 때와 첫 번째 데이트를 할 때 자기를 어떻게 소개하는지 생각해 보라. (두 사람이 첫 데이트를 할 때와 결혼 10년 후에 나누는 대화를 비교해보면 더욱 재미있을 것이다.) 아니면 전국 방송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은가? 아마도 당신은 똑똑하거나, 착하거나, 아니면 잘생겨 보이고 싶을 것이다. 우리가 외부에 공개하는 정보와 진실로 알고 있는 정보 사이에는 상당히 깊은 골이 파여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적인 인간관계, 상업적 거래,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정치에서 흔히 목격된다.
3. 마약 판매상은 왜 어머니와 함께 사는 걸까?
앞의 두 장에서 우리는 솔직히 좀 특이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주제들을 다루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자꾸 적절한 의문을 제기하다보면 결국 가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마련이다. 질문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사항은 그것이 과연 질문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인지를 판단하는 데 있다. 전에는 한 번도 제기된 적이 없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좋은 질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당신이 사람들이 진정 관심을 가진 사안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고 그들에게 충격을 안겨줄 만한 답을 찾아낼 수 있다면, 즉 사회 통념을 뒤집을 수 있다면, 당신은 참으로 운이 좋은 것이다. 물론 통념이 전부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사회 통념이 틀렸을지도 모르는 부분을 알아차리는 것, 이기적이고 조잡한 사고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좋은 질문을 제기하기 위한 첫 걸음이다.
경찰의 경우를 보자. 크랙 코카인(싸구려 코카인)의 급격하고 폭력적인 출현에 대항하여, 그들은 마약과의 전쟁에서 경찰이 불리한 입장임을 상기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마약상,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검은 자금줄, 특히 불법자금 유입을 강조하는 방법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백만장자 마약상의 이미지만큼 준법정신이 투철한 일반 시민들의 분노를 자극할 수 있는 그림도 없었다. 언론은 이 이야깃거리에 열성적으로 매달렸고, 크랙 거래는 미국에서 가장 수익 높은 사업 중 하나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누구든 크랙이 공공연하게 거래되는 저소득층 주택단지에서 조금만 어슬렁거려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대부분의 크랙 판매상들은 여전히 가난하게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자기 집도 없이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사람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린다. “대체 왜 그렇지?”
수디르 벤카테시는 인도에서 태어나 1989년, 시카고 대학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의 담당교수이자 탁월한 빈곤층 전문가인 윌리엄 율리우스 윌슨은 벤카테시에게 현장조사를 지시했다. 과제는 시카고에서 가장 빈곤한 흑인들이 거주하는 주택단지를 방문해 설문지에 답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시카고에서는 갱단 사이의 전쟁이 한창이어서 거의 매일 같이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벤카테시는 설문을 받다가 갱단에게 붙잡혀 거의 24시간이 흐른 뒤에야 풀려날 수 있다. 그는 풀려났다는 데 안도감이 들었지만 동시에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억류했던 ‘검은 갱스터 사도단’이 어떤 식으로 조직되고 운영되는지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파악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몇 시간 후, 그는 다시 빈민가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벤카테시는 설문지 따위는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직접 갱단과 함께 생활해보기로 결심했다. 부하들과의 약간의 언쟁을 벌인 후, 갱단의 두목 JT는 책이 나올 경우 갱단에 해가 될 수 있는 정보를 삭제할 권리를 갖는 조건으로 허락해주었다.
그 후 6년간, 벤카테시는 거의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JT의 보호 아래, 그는 일터에서든 집에서든 갱단원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질문을 퍼부어 댔는데, 때때로 갱들이 그의 호기심을 귀찮아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갱단은 몇 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세력다툼을 벌려나갔고 그 결과 결국 연방법에 기소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어느 날, JT 바로 아래 서열에 있는 부티라는 단원이 벤카테시를 찾아왔다. 무엇보다 부티는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해 조금이나마 속죄를 하고 싶어했고 뭔가 다음 세대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남겨주고 싶었다. 부티는 벤카테시에게 허름하게 해진 낡은 스프링 노트 꾸러미를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4년에 걸친 갱단의 재무제표가 완벽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 어떤 경제학자도 이렇게 중요한 회계자료를 손에 넣어본 적이 없었다. 이제까지 미지의 영역이었던 범죄단체의 재정 상태가 전문적 분석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갱단은 어떤 식으로 활동을 하는 것일까? 놀랍게도, 갱단의 사업은 대부분의 미국 기업들과 대단히 유사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맥도널드와 거의 일치하는 모습을 보인다. 솔직히 말해 맥도널드사의 조직도와 ‘검은 갱스터 사도단’ 조직도를 나란히 펼쳐놓는다면 그 차이점을 구분해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벤카테시가 몇 년 동안 교류해왔던 갱단은 ‘검은 갱스터 사도단’의 수백 개 지부 중 하나에 불과했다. JT는 12개의 블록에서 크랙을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는 대가로 이사회에 수입의 20%에 달하는 돈을 지불했으며 나머지 수입은 임의로 분배할 수 있었다.
갱단이 벌어들인 돈 중에서 조직원들에게 돌아가는 몫에 대한 기록은 JT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한 달에 8,500달러라면 JT의 연봉은 대략 10만 달러가 된다. 당연히 세금도 없을뿐더러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채 곧장 주머니로 들어가는 다양한 수입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JT는 조직의 100여 명에 달하는 중간 보스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즉 서열 120위 안에 드는 조직원들은 꽤나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다. 하지만 JT 휘하인 세 명의 간부에겐 각각 매달 700달러씩, 땅개라고 불리는 50명의 조직원들은 각각 매달 150달러씩 배분되었다. 따라서 앞서 제기된 의문, ‘마약 판매상은 왜 어머니와 함께 사는가?’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조직의 고위 간부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마약 판매상들은 돈을 많이 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크랙 판매조직은 일반적인 자본주의 회사와 별다를 바가 없다. 양쪽 다 많은 임금을 받기 위해서는 피라미드의 상층부에 도달해야 한다. 가족적 사업이라는 간부들의 레퍼토리에도 불구하고, 갱단의 임금 구조는 기업의 임금 구조만큼이나 왜곡되어 있다. 땅개들은 맥도널드나 월마트의 점포 직원들과 아주 유사하다. 사실상 JT의 조직원 중 상당수가 합법적인 업체의 최저임금 직종에 종사함으로써 불법활동의 빈약한 임금을 보충하고 있었다. 또한 빈약한 보수는 제쳐두고라도, 땅개들은 끔찍한 업무환경에서 일하고 있었다. 항상 언제 체포당할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살아야 하며 가장 무서운 것은 폭력에 훤히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살해당할 확률이 무려 네 명 중 한 명 꼴이었다.
크랙 판매가 미국에서 가장 위험할 직업일 뿐만 아니라 시간당 벌이도 3.3달러에 불과하다면, 도대체 왜 그런 직종에 종사한단 말인가? 아마도 위스콘신의 시골뜨기 처녀가 할리우드에 상경하는 것과 같은 이유이리라. 똑같은 이유로 고등학교 미식축구부의 쿼터백 역시 새벽 5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러 간다. 그들은 모두 극도로 경쟁이 심한 분야에서 성공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만 있다면 엄청난 부를 손에 쥘 수 있을 테니까(명예와 권력이 뒤따르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토너먼트의 규칙은 대단히 직설적이다. 참가자는 무조건 맨 밑바닥에서 출발해 가장 높은 자리로 올라가야 한다. 그들은 낮은 급료를 받으면서 장시간의 고된 노동을 기꺼이 감수한다. 토너먼트에서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자신이 단순히 평균 이상이 아니라 특출나게 뛰어난 인물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이 최고의 지위에 도달할 수 없다고 깨닫게 되면 토너먼트를 포기한다.
4. 그 많던 범죄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1966년, 루마니아의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 오른 지 1년 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낙태를 금지했다. “태아는 사회 전체의 재산이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누구든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하는 자는 국가 지속성의 법칙을 포기한 배신자다.” 차우셰스쿠는 낙태를 금지함으로써 그의 주요 목표 중 하나를 달성하고자 했다. 인구를 늘려 루마니아의 국력을 급격히 키우려고 했던 것이다. 차우셰스쿠의 인센티브는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었다. 낙태가 금지되고 1년 만에, 루마니아의 출산율은 2배로 증가했다. 당시 이 신생아들의 조국은 차우셰스쿠의 친족이나 공산당 엘리트에 속하지 않는다면 상당히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는 곳이었다. 결론부터 얘기하겠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당시 권좌에서 쫓겨난 공산주의 지도자 가운데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뿐이다. 그의 몰락을 주도했던 이들이 루마니아의 청년층이라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젊은이들 대부분은 그가 낙태를 금지하지 않았더라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아이들이었다.
루마니아의 낙태 금지 정책에서 1990년대 미국의 범죄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은 무척이나 특이한 논리 전개 방식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루마니아의 낙태 이야기를 거꾸로 뒤집으면 미국의 범죄 이야기가 된다. 1989년 당시 미국의 범죄율은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15년 동안 폭력범죄는 80%나 증가했고, 매일 저녁 뉴스와 미국 전역에서 벌어지는 대화에서 범죄는 결코 빠지지 않는 주요 화젯거리였다. 그러다 1990년대에 이르러 범죄율이 감소하기 시작했을 때, 너무나도 급작스럽고 빠른 변화에 모두가 경악했다. 그리고 화살표는 하강을 계속하여 마침내 40년 전의 수준에 도달했다. 안도감이 뿌리를 내리고 어느 정도 범죄의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되는 삶을 즐기게 되자, 자연스럽게 새로운 의문이 생겨났다. 그럼 그 많던 범죄자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
1966년의 루마니아로 돌아가 보자.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차우셰스쿠가 낙태를 불법화했다. 그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은 그 전에 태어난 아이들에 비해 범죄자가 될 확률이 훨씬 더 높았다. 여성이 낙태를 하려면 법원에서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연구자들은 낙태를 허가받지 못한 여성들이 대체로 자기 자식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좋은 가정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한편 미국의 낙태 역사는 유럽과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1900년에는 미국 전역에서 낙태가 불법화되었는데 20세기의 낙태 시술은 대단히 위험한 데다 대체로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따라서 가난한 여성은 대부분 낙태를 할 수 없었으며, 그렇다고 임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들은 자녀를 많이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73년 1월 22일, 미국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따라 낙태 시술이 미국 전역에서 합법화되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있고 나서 첫해에, 미국에서 75만 명의 여성이 낙태 시술을 받았다(이 수치는 네 명의 신생아가 태어날 때마다 한 명의 태아가 낙태되었음을 의미한다). 1980년이 되자 그 수치는 160만에 이르렀고(신생아 2.25명 중 한 명), 이후 그 수치는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있기 전에는 중류 혹은 상류 가정의 딸들만이 안전하게 불법 낙태를 준비하고 실행할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500달러짜리 불법 시술 대신 어떤 여성이라도 때로는 100달러 이하의 비용으로 낙태를 할 수 있게 됐다.
로 대 웨이드 판결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여성은 누구일까? 미혼모나 10대 임신부, 가난한 여성, 아니면 그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여성들이다. 이들이 아이를 낳을 경우 그 자녀들의 미래는 어떠할까? 한 연구에 의하면 낙태가 합법화된 후 초기에 낙태된 태아들이 만약 세상에 태어났다면 빈곤한 삶을 경험할 가능성은 평균치보다 50%나 높다고 한다. 편부모 슬하에서 성장할 가능성 역시 평균보다 60%나 높았다. 또 다른 연구는 모친의 낮은 교육 수준이 자녀가 범죄를 저지르는 데 영향을 미치는 가장 강력한 단일 요인이라고 보고했다. 달리 말해, 수백만의 미국 여성들로 하여금 낙태를 결심하게 만드는 바로 그 요인이 그들의 자녀들이 태어날 경우 불행한, 그리고 어쩌면 범죄자로 살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확실히 낙태의 허용은 미국에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낙태합법화로 인해 도출된 가장 극적인 결과이자 그 효과가 실체를 드러내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던 부분은 바로 낙태가 범죄에 미친 영향일 것이다. 1990년대 초, 로 대 웨이드 판결 직후 출생한 첫 번째 아이들 집단이 10대 후반에 이르렀을 때 범죄율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모친이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고 싶지 않았음에도 낳을 수밖에 없어서 태어난 아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세대가 계속 성년이 되어감에 따라 범죄율은 꾸준히 감소했다. 낙태의 합법화는 원치 않는 출산을 줄였다. 원치 않는 출산은 범죄율을 높인다. 따라서 낙태의 합법화는 범죄율을 낮춘 것이다.
낙태가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범죄 감소 요인이었다는 발견은 말할 필요도 없이 대단히 불쾌한 일이다. 이건 다윈의 진화론이 아니라 (‘걸리버 여행기’를 쓴) 스위프트의 풍자에 가깝다.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표현하자면, 범죄의 감소는 낙태 허용에 따른 ‘의도하지 않은 혜택’일 따름이다. 하지만 개인의 슬픔이 공공의 이익으로 전환된다는 개념이 맘에 안 든다고 종교나 도덕적 근거를 들어가며 낙태에 반대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5. 완벽한 부모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부모만큼 전문가가 조성하는 공포를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사실 두려움은 육아라는 행위의 주요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결국 부모는 또 하나의 생물체, 더구나 갓 태어났을 때는 다른 그 어느 종보다 연약한 생물체를 보살피는 시중꾼 아니던가. 이로 인해 부모는 단순히 걱정과 불안, 두려움 등에 자신의 양육 에너지를 상당 부분 소비한다. 문제는 부모들이 종종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될 대상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부모들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이다. 소문에서 사실을 분리해내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며, 바쁜 부모들에게는 특히 그렇기 때문이다. (동년배 부모들이 가하는 압력은 말할 것도 없고) 전문가들이 내는 백색 소음은 너무나 위압적이라 부모들은 거의 스스로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된다.
가령 몰리라는 여덟 살짜리 딸을 가진 부모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몰리의 가장 친한 친구인 에이미와 이마니는 모두 몰리의 집 근처에 살고 있다. 몰리의 부모는 에이미의 부모가 집에 총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몰리에게 그 집에 가서 놀지 못하게 한다. 그 대신 몰리는 뒤뜰에 수영장이 있는 이마니의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몰리의 부모는 자신들이 딸을 보호하기 위해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며 안심한다. 하지만 데이터에 따르면 그들은 결코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미국의 경우 집 안에 있는 수영장에서 아이가 익사사고를 당할 확률은 1만 1,000분의 1이다. 한편 총으로 인한 사고로 아이가 목숨을 잃을 확률은 100만분의 1이다. 몰리가 이마니의 집 수영장에서 익사사고로 죽을 확률이 에이미의 집에서 총을 가지고 놀다가 목숨을 잃을 확률의 100배 정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몰리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리스크를 평가하는 능력이 형편없다. 스스로를 ‘리스크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라고 칭하는 피터 샌드먼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는 리스크와 사람들을 실제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리스크가 아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샌드먼은 자신의 전문 지식을 다음과 같은 방정식으로 간단히 정리했다. “리스크 = 유해물 + 분노.” 그는 자신의 리스크 방정식에서 분노와 유해물이 똑같은 무게를 지니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 “유해물의 정도가 높아도 분노가 낮으면 사람들은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고, 유해물의 정도가 낮아도 분노가 높으면 사람들은 과잉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왜 수영장이 총기보다 공포스럽지 않은 것일까? 아이가 이웃집에서 총을 가지고 놀다가 가슴에 총을 맞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극적이며, 공포스럽다. 즉 우리의 분노를 자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수영장은 분노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수영장에 익숙한 것에 일부 원인이 있다. 하지만 부모들이 리스크 평가 능력이 형편없다고 할지라도 결국 부모는 경외감을 느껴야 마땅할 중요한 임무를 책임지고 있지 않은가. 자녀의 인성을 형성하는 것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자녀 양육에 대한 사회 통념에 최근 들어 가장 급진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질문이었다. 과연 부모는 실제로 얼마나 중요할까? 분명, ‘나쁜’ 자녀 양육은 상당히 많은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열렬한 부모가 아이들을 위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될까? 수많은 연구가 이미 유전적 요인으로만 아이의 인성과 능력의 50% 정도가 결정된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선천성이 아이 운명의 반을 좌우한다면 나머지 반을 좌우하는 것은 무엇일까? 분명 그것은 후천성일 것이다. 또 하나의 유명한 연구인 콜로라도 입양 프로젝트는 입양된 아기 245명의 삶을 추적하여 아이의 성격 특성과 수양부모의 성격 특성은 실제로 ‘아무 관련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교과서 저자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저술에 따르면, 부모들이 자녀의 성격 형성에 중대한 공헌을 한다는 믿음은 ‘문화가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한다. ‘피어 프레셔peer pressure’(또래들의 압력)의 근본적 영향, 즉 또래나 학교 친구들이 매일 미치는 암묵적인 힘이 상층의 부모로부터 전해지는 영향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부모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좋은 질문이지만, 지독하게 복잡한 질문이기도 하다. 부모의 영향이 얼마나 되는지 결정하기 위해 우리는 아이의 어떤 면을 측정해야 하는 것일까? 또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많은 요소들에 우리는 각각 얼마만큼의 무게를 할당해야 하는 것일까? 아이에게 나타나는 양상 중에는 인성이나 창의성과 같이 데이터로 측정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학교 성적은 측정이 가능하다. 또 부모라면 대부분 교육이 자녀의 성장 과정에 핵심적인 요소라는 걸 인정할 것이기 때문에, 먼저 의미 있는 학교 데이터를 조사해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1990년대 후반 미 교육부는 ‘아동 성취도 발달에 관한 장기적 연구 Early Childhood Longitudinal Study, ECLS'라는 기념비적인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ECLS는 학생들의 학업 성적을 측정하고 각 학생들의 기본적인 정보(인종, 성별, 가족 구성, 가족의 사회경제적 지위, 부모의 교육 수준 등)를 조사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연구에는 학부모(그리고 교사 및 학교 운영진)와의 인터뷰도 포함되었다. 이 인터뷰에서 던진 질문들은 일반적인 정부기관의 인터뷰보다 상세했다. 그 결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나왔다. 질문만 제대로 한다면 무언가 놀라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데이터였다. 광범위한 ECLS 데이터는 아이들의 개인적 환경과 학교 성적 사이에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제시한다.
결론을 얘기하자면,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즉 교육 수준이 높고 성공적이며 건강한 부모의 아이가 학교 성적이 높은 경향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에게 해주는 일’ 즉 아이를 박물관에 데려가든, 체벌을 가하든, 자주 책을 읽어주든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자녀 양육 기술에 사로잡혀 있는 부모에게는 이것이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소식일 수 있다. 현실적으로 자녀 양육 기술이 지나치게 높이 평가되고 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모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부모가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려운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녀 양육 책을 집어 드는 그 시기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라는 점이다. 사실 중요한 것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에 결정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부모로서 ‘무엇을 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경제적 성과의 선천성과 후천성>이라는 논문에서 경제학자인 브루스 새서도트는 자녀 양육에 대한 장기적인 양적 조사를 통해 선천성-후천성 논쟁을 다루었다. 새서도트는 아이를 입양한 부모가 아이의 친부모보다 보통 더 머리가 좋고, 교육 수준이 더 높으며, 수입이 더 높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수양부모의 이점은 아이의 학교 성적과는 거의 관계가 없었다. 수양부모가 어떤 영향을 끼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유전의 힘을 능가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새서도트 교수가 발견한 바에 따르면 수양부모의 영향이 영원히 아무 소용없는 것은 아니었다. 입양된 아이가 성인이 되자 이들은 IQ만으로 예정되었던 운명을 급격히 벗어났다. 이들이 대학에 가서 보수가 좋은 직장을 얻고 안정적으로 20대에 결혼할 확률이 훨씬 더 높았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은 수양부모의 영향이다.” 새서도트 교수의 결론이다.
6. 부모는 아이에게 과연 영향을 미치는가?
강박적이든 아니든, 모든 부모는 자신이 자녀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녀의 일에 왜 그리 고심하겠는가? 부모의 영향력에 대한 신념은 부모로서의 첫 공식 행위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바로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 말이다. 현대의 부모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아이 작명 산업은 현재 한창 호황을 누리고 있으며, 관련 서적과 웹사이트, 컨설턴트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이를 뒷받침해준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에게 걸맞은 이름을 지어주지 않으면 훌륭히 자라지 못할 거라고 믿는 것 같다. 이름에는 위대한 미학적 힘, 아니 어떤 예언적 힘마저 깃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당신이 지어주는 이름은 과연 아이의 삶에 진실로 영향을 미칠까? 아니, 그보다 더욱 중요한 질문, 이름은 정말 중요한 것일까?
흑인과 백인 학생들 간의 성적차를 분석한 젊은 흑인 경제학자 롤랜드 G. 프라이어 주니어는 펜 스테이트 대학과 시카고 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친 후 스물 다섯의 나이에 하버드 교수로 임용되었다. ECLS 연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프라이어는 산더미 같은 데이터를 통해 답을 찾아 나섰다. 1961년 이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에 관한 출생 정보를 조사한 것이다. 이 캘리포니아 데이터는 흑인 부모와 백인 부모가 아이의 이름을 짓는 데 얼마나 다른 취향을 지니고 있는지 입증해준다. 오늘날 흑인들의 이름 중 대다수는 흑인만 사용하는 이름이다. 어느 해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흑인 여자아이의 약 40%는, 그 해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약 10만 명의 백인 여자아이들과 일치하는 이름이 단 ‘하나’도 없었다.
ECLS 데이터가 단순히 흑인과 백인 사이의 성적차를 넘어서 자녀 양육에 대한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해주었던 것처럼, 캘리포니아의 이름 데이터 역시 흑인 특유의 이름에 대한 것 말고도 다른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조금 넓게 말하자면, 그 데이터는 부모들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 즉 부모가 자녀에게 어떤 종류의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도 이야기해준다. 데이터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아이의 이름과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사이의 상관관계다. 소득과 이름 사이의 상관관계 그리고 소득과 ‘교육 수준’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부모의 교육 수준과 그들이 아이에게 지어주는 이름 사이에 그만큼 밀접한 관계가 발견된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는 1980년에서 2000년까지의 인기 이름 상위 10위 목록을 통해 한 가지 패턴이 작용함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이름이 고소득에 교육 수준이 높은 부모 사이에서 인기를 얻으면, 사회경제적 지위라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스테파니와 브리타니 역시 처음에는 부유층 이름으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10년 후에 이르면 그 5배에 해당하는 저소득층 아이들이 스테파니와 브리타니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소득층 가정은 어디서 이름 쇼핑을 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름의 유행 기류가 유명인사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미미한 영향밖에 끼치지 못한다. 이름의 흐름을 주도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몇 블록 건너 커다란 집에 살며 최신형 차를 모는 가족이다. 많은 부모들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성공적’으로 보이는 이름을 선호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부유층 이름을 대거 차용하기 시작하면 부유층 부모들은 그 이름을 포기하고 다른 이름을 길들이기 시작하게 된다.
부모들이 아이에게 지어줄 이름을 생각할 때는 분명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한다. 따라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든 부모가 ‘똑똑한’ 이름이나 ‘부유층’ 이름을 찾는다고 하면 과장일 것이다. 하지만 부모는 모두 자식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한다. 캘리포니아 데이터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대다수의 부모가 이름을 통해 자신의 자녀들이 앞으로 얼마나 성공적일지 ‘그들 자신의 기대’를 표현한다. 물론 이름 자체는 아주 미미한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부모들로서는 적어도 시작부터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나오며
모든 페이지를 넘긴 지금, 우리가 책 서두에서 했던 약속을 지켰음을 확인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정말 ‘하나로 통합된 중심 주제’가 전혀 없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괴짜경제학을 일상에 적용하는 데에는 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된 끈이 존재한다. 바로 세상 사람들의 실제 행동방식에 관해 이치에 맞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를 관찰하고, 분별하고 측정하는 것뿐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성과는 아주 단순하다. 바로 스스로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중 대다수는 아무런 소득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흥미롭고 때로는 심지어 아주 놀라운 답을 내놓을 수도 있다.
에스프레소(이탈리아어로 ‘Express' 즉 ’빠르다‘라는 뜻, 커피의 발생지 유럽에서는 ’커피의 꽃이며 영혼‘이라고 부를 정도이다) 커피, ‘들고 나가서 마시는’ 테이크 아웃 문화, 한 차원 업그레이드된 제3의 공간에서의 커피 문화, 고객과 바리스타(barista, 커피를 서빙하기도 하고 손님과 대화도 나누는 종업원)의 1:1 커뮤니케이션 등 스타벅스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컨셉트를 가지고 시장을 만들어갔다. 일종의 선점 전략이었다. 선점 전략은 초기 진입자의 이점을 획득하기 위해 경쟁 기업보다 앞서 주요 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선점 전략을 채택하면 기업은 일단 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구축할 수가 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경제적으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시장에서 선도자가 된다는 것은 강력한 진입 장벽을 구축해서 후발 경쟁 브랜드가 소비자 마음속으로 파고들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인식은 보통의 경우, 처음 몇 단어는 잘 기억해내지만 중간으로 갈수록 점점 기억하기 어렵고 나중에 나오는 몇 단어에 대해서는 다시 기억력이 급격히 증진되는 현상을 보인다. 이때 첫 부분의 단어를 잘 기억하는 현상을 ‘초기효과’라고 하고 나중에 잘 기억해내는 현상을 ‘최근효과’라고 한다. 따라서 첫째, 소비자 머릿속에 처음 인지되는 브랜드일수록 기억에 오래 남는다. 둘째, 선도자 브랜드는 커뮤니케이션 효과를 갖는다. 즉 소비자가 어떤 범주, 분야(카테고리)에서 최초로 접하게 되는 것은 각종 매체의 무료 홍보 및 기사 지원(publicity)을 받기 때문에, 뒤에 진입한 브랜드에 비해 월등한 인지 우위를 획득한다. 셋째, 선도 브랜드는 심리적으로 안정적이라 볼 수 있다. 소비자가 선발 브랜드에 맞선 후발 진입 브랜드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력과 비용, 혜택(benefit)을 비교하게 되면 선발 브랜드가 소비자들에게 더욱 호의적이고, 안정적으로 어필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도자 브랜드는 후발 브랜드에 비해 더욱 오랜 기간 동안 광고와 시장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후발 진입 브랜드에 비해서 더욱 잘 알려지게 되고 더 많은 소비 경험을 갖게 되므로 마케팅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다.
지금까지의 스타벅스는 선도 브랜드로서의 사명을 훌륭하고 견고하게 잘 수행해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시장의 변화와 소비자의 필요에 의해 후발 주자의 반격이 예기치 않은 위기를 가져올 수도 있다. 따라서 스타벅스는 독점을 누릴 수 있는 수혜 기간 동안 충분한 진입 장벽을 쌓아야 할 것이고, 후발자는 시장의 흐름과 변화를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선발자가 기반을 확립하기 전에 기습적인 공격을 펼쳐야 할 것이다.
'마케팅 전도사' 스타벅스커피 코리아의 올인 스토리 (정영권 상무와의 인터뷰)
스타벅스커피 코리아의 고성장 비결은 커피 비즈니스보다는 고급 커피 문화를 상품화하는 데 있었습니다. 스타벅스는 직영으로만 매장을 운영합니다. 이는 첫째,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커피를 서비스하고 매장을 관리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스타벅스는 바리스타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품질과 서비스를 중시하는 기업문화 창출을 위해서도 직영점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에게 비전과 가치를 심어주는 것도, 고객만족을 위한 서비스 기술도 결국 직영이어야만 가능할 것이란 생각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스타벅스 브랜드 파워를 만들어낸 원동력입니다. 또한 스타벅스의 마케팅 전략에 해당하는 철저한 입지 선정 및 과감한 투자, 아울러 꾸준한 사회활동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 마음 깊이 새기고 있는 생각, 바로 ‘한국에 스타벅스가 뿌리내릴 수 있는 것은 고객의 성원 덕택’이며, 더불어 커피 문화의 전달자로서 소명을 다하자는 마음가짐입니다.
2. 한국에서의 성공 비결 - 구전 마케팅
스타벅스가 광고에 의존하지 않고 구전 마케팅을 선택한 것은 스타벅스 커피를 경험한 사람들의 입소문이 광고 매체보다 훨씬 신뢰감을 주는 홍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소비자는 하루 1,500여 개씩 쏟아져 나오는 광고를 더 이상 믿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지만, 친구․가족의 조언은 상당 부분 신뢰한다는 사실, 이것이 구전 마케팅의 핵심 키워드다.
광고 없이 한국에 상륙할 수 있을까 (정영권 상무와의 인터뷰)
사실 스타벅스처럼 광고 안 하기로 유명한 회사는 드뭅니다. 하지만 고객이 직접 스타벅스 커피를 경험한 뒤 입소문을 내는 것이 훨씬 더 신뢰감을 주는 홍보입니다. 저희는 광고비를 고객을 위한 샘플 테스트 비용과 지역사회 활동비용으로 씁니다. 스타벅스는 처음부터 기업의 모든 요소를 고객에게 맞추어 어필해온 만큼 광고의 거품이나 간접적인 접근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소비자를 직접 매장으로 불러내어 체험케 하고 그들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을 찾아내려 했습니다. 또한 스타벅스를 얘기할 때 사람들은 ‘문화 마케팅’을 거론하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스타벅스가 전통적으로 지향해온 정책입니다. 스타벅스는 전략적으로 영화 <아이 엠 샘>을 지원하였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이 바로 스타벅스 직원이었죠. 7살 지능의 샘을 통해 이루어지는 감동 스토리에 스타벅스는 자연스런 배경이 되어주었습니다. 이것은 상호 호혜적인 광고 커뮤니케이션 기법입니다. 이 기법은 특히 판매증진, 이미지 개선에 매우 효과적이어서 광고주의 선호도가 높다고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자면, 난타와의 제휴 프로모션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서울 시내 9개 매장에서 총 14일 동안 저녁 7시부터 8시까지 1시간 동안 음료를 구매하는 고객 중 5명에게 난타 티켓 2장씩을 증정하는 게릴라성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소비자들과 대화를 나눕니다. 가격에 연연해하지 않고 상품의 품질과 그것을 소비함으로써 영위할 수 있는 문화적 우월감을 누리고자 노력하는 혁신적인 소비자들과 말입니다. 그들의 직접적 필요에 호응하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다양한 문화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업가뿐 아니라 전 직원이 혁신적 아이디어를 통해 고객과 함께 가치를 공유하고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노력할 것입니다. 오늘도 스타벅스커피 코리아는 체험을 말하고 문화를 얘기하는 고객에 의해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3. 떡을 판매하는 커피점
스타벅스의 주 타깃은 20대 초반에서 30대 중반의 여성 집단으로 시작하여 향후엔 커피를 즐기는 모든 사람으로 그 범주를 넓혀가고 있다. 말하자면 전체 시장 속의 세분화된 특정 시장에서 일반화된 대량 시장으로 포지셔닝되고 있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대중적 마케팅에서 타깃 마케팅으로 이동하는데 스타벅스는 역류현상이라 할 정도로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뒤늦게라도 표적시장의 흐름을 깨달은 기업들은 표적시장의 측정이 가능한지, 최소한의 이윤이 보장될 만큼 크기가 되는지, 접근이 가능할 것인지 분석하여 자사의 능력을 가늠하여 수행할 전략을 짜게 된다.
그 첫 번째 전략이 비(非)차별화 마케팅이다. 이 전략은 구매자의 욕구 차이보다는 공통점에 소구점(광고 캠페인에서 상품이나 서비스의 특징 중 소비자에게 가장 전달하고 싶은 특징)을 맞춰 동일한 마케팅 믹스(제품/가격/유통/촉진)를 적용시키는 마케팅이다. 두 번째 전략은 차별화 마케팅으로 상이한 구매자 욕구에 소구점을 맞추어 세분화된 각각의 시장에 상이한 마케팅 믹스를 사용하는 전략이다. 마지막으로는 표적 마케팅 전략이라고도 불리는 집중화 마케팅이다. 이는 세분화된 시장을 특정 시장의 초점에 맞춰 마케팅 믹스를 집중시키는 전략으로 비용이 크게 절감되고 마케팅 활동을 전문화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 고객의 욕구가 변화하거나 경쟁사 진입시 위험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기업의 자원이 제한적이거나 추가적인 세분시장의 진출을 위해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할 때 사용되는 전략이다.
여기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표적시장의 선정이다. 먼저 매출액이나 성장률, 수익률 등을 따져 시장의 매력도를 측정하고 시장의 경쟁우위가 자사와 적합한지 따져 본다. 그리고 난 후 제품군내 기업 간의 경쟁력, 진입장벽(어떤 산업에 진입할 때의 난이도), 공급자 및 구매자와의 교섭력 등을 세세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스타벅스도 위의 체크 리스트를 바탕으로 한 마케팅 전략으로 인사동 점포를 개점하여 초기부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철저하게 한국화 된 인사동 매장 (정영권 상무와의 인터뷰)
스타벅스가 서울 인사동에 진입한다는 것은 문화적으로 매우 예민한 부분이었습니다. 2001년 출점 당시 지역 주민들이 미국 문화의 상징으로 꼽히는 스타벅스의 출점을 반대하자, 우리는 3개월에 걸쳐 본사를 설득하여 간판을 한글로 달고 매장을 전통 기와와 창살 무늬로 인테리어 공사를 하도록 허가를 받았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인사동 매장은 전 세계 스타벅스 매장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평가받았고, 인사동 매장을 디자인한 스타벅스커피 코리아의 디자이너는 전 세계 디자이너 중 최고의 디자이너에게 주어지는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전통문화의 거리에 융화하기 위해, “철저히 로컬화하자”는 전략에 따라 ‘떡 패스트리’를 개발하였습니다. 이는 인사동의 특성을 살리고 타 점포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한국의 음식을 상징한 떡과 서양의 빵을 조화시킨 퓨전 메뉴입니다. 인사동 매장에 오면 한국 음식인 호박죽, 단팥죽, 수정과, 식혜 등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한국 음식 문화에 뿌리를 내리려는 스타벅스의 눈물겨운 노력이지요.
2부 오감을 자극하는 마케팅의 선수
1. 성공의 키워드는 '오감'이다
우리에게 있어 ‘감성’은 무엇일까? 감성은 개인의 경험과 관계에 의해서 다양하게 일어날 수 있다. 개인의 경험에 의한 감성의 자극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감각의 경험을 자극하는 것으로 청각, 후각, 시각, 미각, 촉각 등을 자극해 고객의 총체적 경험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를 다시 마케팅과 연결하여 해석하면 ‘감성 마케팅은 소비자들의 감성에 어울리는 혹은 그들의 감성이 좋아하는 자극이나 정보를 통해 제품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 반응을 일으키고 소비 경험을 즐겁게 해줌으로써 소비자를 감동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감각 마케팅의 고전적 본보기는 제품의 본질적 혜택 외에 디자인을 통해 차별화 하는 것으로서, 감성시대에 디자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간의 오감 가운데 정보인지 능력이 가장 우수한 것이 시각이라고 한다. 특히 소비의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는 20~30대는 컬러 TV와 영화, 비디오, 패션 잡지 등의 압도적인 영향권 아래 자란 세대이므로, 이들과 접근하여 커뮤니케이션하길 원한다면 이들의 컬러 감각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시선을 잡기 위해서는 시각적 측면, 즉 컬러에 대해서는 ‘핵심 제품(core product)'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컬러는 소비자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직접적인 기호체계이며 감성의 일차적인 인식 대상일 뿐 아니라 제품의 차별점으로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감성 마케팅의 중요한 요소로 향기 마케팅과 음향 마케팅을 꼽을 수 있다. 향기 마케팅의 예로는 베스킨라빈스를 이야기할 수 있다. 매장에 초콜릿 향을, 그리고 페퍼민트향을 사용해보았더니, 향기 마케팅 도입 후 평균 1일 매상이 40%나 증가하였다고 한다.
길거리나 백화점에서 흘러나오는 댄스음악에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거나 어깨춤을 춘 경험이 있는가?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행동은 결국 기업이 고객의 심리적으로 느끼는 음악 경험이나 감성에 소구하여 얻은 결과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객의 환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전개한 음악 마케팅 전략의 효과라는 것이다. 스타벅스의 ’오감 체험, 감성 마케팅‘ 전략도 커피 문화의 갈증을 해소함과 동시에 문화적 감성을 쓰다듬는 탁월한 해법이다.
오감 만족 시뮬레이션 (정영권 상무와의 인터뷰)
감성 마케팅은 한 시대의 마케팅 코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희의 핵심 경쟁력으로 오늘날의 스타벅스를 만들어왔습니다. 스타벅스를 이렇게 여기까지 이끈 감성 마케팅 또는 오감 마케팅이란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에스프레소 커피 문화의 체험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씩 알아볼까요.
시각 : 스타벅스 매장의 인테리어는 생두(green bean)가 한 잔의 커피가 되기까지 거치는 4단계를 형상화하여 디자인되었습니다. 커피 원두의 생장을 뜻하는 밝은 풀색을 사용하여 나무와 땅 그리고 자연의 숨결을 느끼게 한 그로(grow) 컨셉트의 매장, 뜨거운 불 속에서 구워지는 원두를 빨간색으로 표현한 로스트(roast) 컨셉트의 매장, 파랑색을 사용하여 넓고 시원한 느낌의 도시적이고 이지적인 이미지를 표현한 블루(blue) 컨셉트의 매장, 그리고 노란색을 사용하여 밝고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내는 아로마(aroma) 컨셉트의 매장으로 나누었습니다.
청각 : 스타벅스 매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음악을 클래식, 재즈, 오페라, 블루스 등으로 다양하게 편성하고 계절 또는 분기별로 바꿔가며 들려줌으로써 마니아들에게 특별함과 친숙함을 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음악 외에도 고객이 주문한 음료 이름을 바리스타에게 전달하는 소리, 에스프레소 기계의 ‘쉬~’하는 소리, 바리스타가 필터 안의 커피 가루를 빼기 위하여 톡톡 치는 소리, 우유가 금속 피치 안에서 ‘치~’하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리 등 커피에 관련된 모든 소리를 최대한 강조하여 고객들이 커피 문화를 느낄 수 있도록 합니다.
후각 : 스타벅스 매장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없습니다. 이는 담배 연기 때문에 커피 향이 약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고객들의 후각을 자극하고 커피 향을 물씬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 매일 아침 매장 오픈 전에 원두를 그라인딩(grinding)해 커피 향이 매장 전체로 퍼질 수 있도록 합니다.
촉각 : 손안에 있는 컵이 따뜻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그리고 손이 가는 모든 곳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의자의 스타일이나 진열대의 모서리, 마루 결의 구조까지 세밀하게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미각 : 스타벅스는 고객의 입맛에 맞는 맞춤 커피를 제공하여 미각을 자극합니다. 고객은 자기의 취향에 맞게 첨가물을 선택, 조절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2. 스타벅스는 알고 있었다, 관계 맺기에 목마른 사람들을
정보사회에는 과거 산업사회와 달리 고객을 중심으로 깊이 있고 효율적인 마케팅의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아직도 고객과 가까이 하고(밀착), 고객에게 감동을 주며, 나아가 고객이 브랜드를 아끼도록 하는(충성도) 일들은 기업이 해결해야 할 난제로 남아 있다. 스타벅스의 5P 중 한 요소인 피플, 즉 사람을 분석해보면 고객관계 마케팅의 전략적인 부분과 접목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하워드 슐츠 회장이 왜 스타벅스의 자랑으로 바리스타를 내세웠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바리스타 - 커피 전문가와의 기분 좋은 만남 (정영권 상무와의 인터뷰)
스타벅스 매장에 가면 바리스타를 만날 수 있습니다. 바리스타는 고객과 1:1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고객만을 위한 커피를 정성껏 만들 뿐 아니라 일상의 대화를 통해 친밀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들은 입사하면 철저한 교육을 이수하게 되는데, 커피에 대한 교육부터 서비스 교육까지를 몸에 익히게 됩니다. 하워드 슐츠 회장은 상품의 홍보보다는 직원 교육비로 더 많은 비용을 지출했습니다. 바리스타들이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교육․훈련을 했고, 종업원의 만족이 고객 만족으로 연결된다는 신념 하에 제반 복리후생, 심지어 파트타이머들에게까지 스톡옵션을 부여하는 등 종업원 만족도가 최고가 될 수 있도록 힘써 왔습니다. 스타벅스에 대한 열정과 지식을 고객에게 전해주는 파트너, 바리스타에게 주어진 사명감과 기대는 타 기업이 종업원에게 거는 기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것입니다. 스타벅스의 브랜드는 바리스타에게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스타벅스의 성공의 열쇠는 단연 고객을 최우선시하는 전략인데, 인적 서비스가 가미된 스타벅스의 경우 종업원의 열정, 전문성, 근무환경, 조직문화가 그 핵심요소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특히 직원이 고객을 대하는 태도는 브랜드 이미지 강화에 직결되는 요소로서, 바리스타의 고객 커뮤니케이션 행위도 프로덕트(product)의 개념으로 보고 있습니다. 커피의 오묘하고 신비한 세계를 안내하는 바리스타를 만나면, 그들과 얘기하는 동안 고객은 어느새 커피의 달인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객의 기억에 남을 스타벅스 경험입니다.
3부 일류 브랜드 창조의 힘
1. 무엇이 브랜드 이미지를 만드는가
고객 중심의 일류 브랜드 제품을 접하다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첫째는 소비자들 스스로 브랜드에 대해 호의적이고, 강력하고, 독특한 브랜드 연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타벅스라는 브랜드를 제시하면 소비자들은 독특한 로고를 기억해내는 이도 있고, 매장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느꼈던 분위기, 커피 향, 바리스타의 상냥한 접대 등을 이야기한다. 이들의 기억과 연상의 공통점은 소비자에게 호의적이며, 브랜드만 접하여도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하며, 경쟁 브랜드가 차지할 수 없는 견고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일류 브랜드의 제품은 컨셉트(concept)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컨셉트는 ‘누구를 위한 제품인가’, ‘어떤 점이 최대 매력인가’, ‘어떤 것이 명쾌한 차별화 포인트인가’, ‘제품 사양, 네이밍, 패키지에 구체화될 수 있는 쉬운 표현인가’, ‘경쟁 제품은 무엇인가’의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제품 속성과 직접 관련된 연상작용이 타 브랜드와 극명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면도기 하면 질레트를 연상하고 화장지는 크리넥스, 진통제는 타이레놀을 생각하는데, 제품의 범주와 브랜드간의 연결고리가 강한 것이 일류 브랜드 제품의 특성이다. 따라서 이들 제품의 속성은 아예 태생부터 경쟁 브랜드에 의해 무시되고 소홀히 되는 부분을 보강하여 포지셔닝할 수 있도록 기획된다.
한잔의 커피 맛을 만들기 위해 스타벅스가 하는 일 (정영권 상무와의 인터뷰)
‘로스팅(roasting)'이란 볶는다는 의미이지요. 에스프레소의 경우 진하고 달콤한 여운을 내기 위해 커피를 오래 볶게 되는데(강배전이라고 함) 열에 강한 고급 원두, 아라비카종의 최고급 원두를 사용하게 됩니다. 생두가 가진 최상의 맛을 추출하기 위해 스타벅스는 자체 개발한 기법, 즉 가열하는 시간과 방법을 통해 특유의 향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밖에 매년 15만 잔 이상의 원두를 테스트하여 엄격한 품질 기준을 세워놓을 뿐 아니라 개성과 특징이 뚜렷한 한 종류의 커피를 여러 가지로 섞어서 독특한 맛의 커피를 만드는 예술적인 브랜딩을 우리들만의 노하우로 보유하고 있습니다. 원두는 가격과 상관없이 맛을 최우선으로 구매가 결정되며, 구매한 원두는 각각 최고의 향을 낼 수 있을 때까지 볶아지고, 구분되어 신선한 상태에서 판매됩니다. 스타벅스의 신선도와 품질의 기준은 한마디로 전설적이기까지 한데, 엄격한 기준에 맞지 않거나 개봉 후 일주일 이상 경과된 원두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특화된 포장기술이 뒤따라야 하는데, 특히 커피의 경우 로스팅이 끝나는 순간부터 산화가 시작되므로 이를 최대한 억제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정리해봅시다. 커피와 관련된 예술적 노하우들. 즉 로스팅, 블랜딩(blending), 포장기술, 여기에 한 가지 빠질 수 없는 것이 물입니다. 한잔의 커피는 99%의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스타벅스는 신선하고 차가운 물을 수 차례 정수하고 끓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커피 맛을 제대로 낼 수 있는 물인지 미국 본사에서 파견된 직원이 최종 심사 과정을 거칩니다. 스타벅스가 오늘날 세계적인 커피 문화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커피의 전문성과 고급화 전략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독창적인 에스프레소 기구와 커피 증류 기구, 커피 원두, 커피와 관련한 액세서리를 포함해 100여 가지 아이템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배전과 블랜딩, 쿨링(coolng)에서 진공백 포장, 개봉 후 사용에 이르기까지 스타벅스의 커피는 세계의 아침을 깨우는 없어서는 안 될 생활 문화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2. 브랜드는 무엇을 먹고 크는가
실제로 스타벅스는 다른 브랜드처럼 요란하게 홍보 활동을 한 적이 없다. 단순하게 커피 한잔을 마시러 온 고객들에게 커피 이상의 그 무엇인가를 제공하고자 하는 노력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소비재로 커피를 판매하는 것을 넘어서 특별한 질과 서비스 그리고 만남의 공간을 제공하는 브랜드화 한 커피 서비스를 제공한 것이 초일류 브랜드다운 접근법이요 해법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즉 어떻게 하면 강력하고 유망하며 독특한 브랜드 연상을 고객의 마음속에 심어줄 수 있는가, 아울러 브랜드를 통해 어떤 혜택과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가 하는 이 인식들이 일류 브랜드로 가는 지름길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브랜드는 시장경쟁력을 키운다. 기술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브랜드는 소비자 마음속에 한번 자리 잡으면 계속 남아 있다.
브랜드 관리의 세계적인 석학 켈러(Kevin Lane Keller)교수의 한 논문이 브랜드 실무자들의 공감을 사고 있다. <세계 초일류 브랜드의 10가지 특징>이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초일류 브랜드의 특징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 특징을 살펴보자.
1) 고객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가장 먼저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고객들은 제품을 구매할 때 그 제품이 가지고 있는 속성, 예를 들어 가격, 디자인, 성능 등을 고려하여 구매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러한 물리적 제품 속성만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브랜드가 풍기는 이미지, 판매원의 서비스 같은 무형의 요소도 같이 혼합되어 고객들도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전체적 이미지가 구매 단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스타벅스는 바로 이러한 유형의 속성과 무형의 이미지가 혼합된 혜택을 고객에게 잘 전달한 사례이다. 스타벅스 매장들은 고객이 원하는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몹시 노력하였는데, 이는 고객의 모든 감각기관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즉 원두의 매혹적인 향기, 커피의 풍부한 맛, 제품의 진열과 다양한 장식품, 은은하게 흐르는 음악, 아늑한 느낌의 테이블과 의자들을 이용한 것이다. 이것은 성공이었다.
2) 변화와 기술 발전을 받아들이며 끊임없이 진화해나간다
강한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제품이나 서비스의 품질뿐만 아니라 다른 무형의 요소도 갖추어야 한다. 그 무형의 요소로는 사용자 이미지(브랜드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미지), 사용 이미지(브랜드가 사용되는 상황에 대한 이미지), 브랜드 퍼스널리티(예를 들어 성실한, 유능한, 교양 없고 거친), 브랜드가 고객에게서 끌어내려고 하는 느낌(단호한, 따뜻한), 고객과 맺으려고 노력하는 관계의 유형(고착된, 일상적인, 계절적인) 등이 있다.
3) 고객이 느끼는 가치에 맞게 가격을 매긴다
제품의 품질, 디자인, 비용 등과 가격 사이에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쉽게도 많은 브랜드 관리자들은 고객이 제품에 대해서 느끼는 것과 가격을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해서 너무 높거나 낮은 가격을 책정하고 있다.
4) 차별성과 유사성이 혼합된 브랜드 포지셔닝을 한다
포지셔닝을 잘한 브랜드는 고객의 마음속에서 특정한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포지셔닝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유사성과 차별성의 두 요소가 적절히 사용되어야 한다. 성공적인 브랜드는 경쟁사와 경쟁을 하는 분야에서 보조를 맞추되 동시에 다른 분야에서 경쟁사보다 우위에 서기 위한 차별 포인트를 만들어 가야 한다. 예를 들어 메르세데스 벤츠와 소니는 제품 품질 면에서 차별적인 장점을 지니고 있으면서 경쟁사와 유사한 서비스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캘빈클라인과 할리데이비슨은 사용 고객에게 고품격 이미지를 제공하면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제품 성능을 제공하고 있다.
5) 일관된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구사한다
브랜드 파워를 유지한다는 것은 마케팅 활동의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케팅 활동의 일관성이라는 것은 해당 브랜드의 이미지가 흐려지지 않게 하며, 고객에게 기존 정보와 불일치되는 메시지를 전달해서 혼란에 빠뜨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6) 브랜드 포트폴리오 계층구조를 엄격히 관리한다
일반 기업들은 여러 개의 브랜드를 복수로 운용한다. 전사적으로 하나의 브랜드, 즉 기업 브랜드(corporate brand)가 포괄적인 역할을 하고 그 하위의 개념으로 패밀리 브랜드(family brand)가, 또 그 아래에는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가지 형태의 제품을 대상으로 하는 개별 브랜드(individual brand)가 위치하게 된다. 이 같은 계층구조 각각의 수준에 있는 브랜드들이 소비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제품을 인지시키고 다른 브랜드와의 바람직한 연계를 강화하면서 전체적인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형성해나가게 된다. 그러나 각각의 브랜드는 자신의 고유 영역을 지켜야 하는데, 가끔 하나의 브랜드로 너무 넓은 영역을 커버하려다 보면 포트폴리오 내의 브랜드들끼리 서로 영역이 겹치는 중복 위험에 빠질 수 있다.
7) 브랜드 자산 구축을 위해 마케팅의 모든 요소를 이용하고 통합한다
일반적으로 브랜드 자산 구축에는 로고 심벌, 슬로건, 포장 등의 모든 마케팅 요소가 이용된다. 강력한 브랜드는 이러한 요소를 혼합, 조화시켜서 소비자의 브랜드 이미지 지각 향상, 경쟁이나 법적 측면에서의 브랜드 보호 같은 여러 가지 브랜드 관련 기능을 수행한다. 초일류 브랜드의 브랜드 관리자는 개별 마케팅 활동이 브랜드 자산을 형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으며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사람, 장소, 사물들을 자사 브랜드와 정확히 연계시킨다.
8) 브랜드가 소비자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세계 초일류 브랜드의 관리자는 자사 브랜드의 이미지 전체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즉 고객 스스로가 브랜드와 연관 지우는 인식, 믿음, 태도, 행동이 브랜드 전체가 되는데 이것은 그 기업이 의도적으로 만들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고객이 그 브랜드에 대해서 어떤 점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브랜드와 고객이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명확히 안다면 어떤 마케팅 활동이 브랜드와 잘 맞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9) 한 브랜드에 대해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지원한다
브랜드 자산의 견고한 토대는 소비자가 오랜 기간 동안 쌓아온 강하고, 호의적이고, 독특한 브랜드 연상에 의해 구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장기적 관점에서 꾸준히 관리하고 투자해야 한다.
10) 자산의 원천을 항상 모니터링하고 감시한다
일반적으로 강력한 브랜드는 브랜드에 대한 면밀한 감사(brand audit)와 지속적인 브랜드 트래킹(brand tracking : 추적)을 통해 현재의 상태를 수시로 체크하면서 개선․발전시켜나간다.
스타벅스가 일류 브랜드가 된 배경 (정영권 상무와의 인터뷰)
스타벅스는 타 기업과 달리 파트너(회사 직원)들과 함께 회사를 만들어왔습니다. 스타벅스는 고객에게 투자하기보다는 종업원에게 투자해왔습니다. 그들은 고맙게도 열정과 헌신, 지식으로 커피 브랜드를 알리는 전도자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죠. 그게 스타벅스 브랜드 파워라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굳이 브랜드를 위해 한 일이 있다면 소매점 스토어를 개설할 때, 교통이 좋은 번화가와 주거지, 건물 로비와 출근길 행인이 지나가는 거리에 입지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타 기업처럼 엄청난 광고비를 쏟는 일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한 고객과 한 스토어, 한 시장에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열정과 헌신으로 일관한 노력이 초일류 브랜드라는 분에 넘치는 선물로 돌아왔지요. 또한 스타벅스는 처음부터 고객이 단순한 커피만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베이비붐 세대의 등장은 어찌 보면 스타벅스에겐 호기였습니다. 그들에겐 건강, 가족, 가벼운 사교모임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특별한 커피 시장에 뛰어들어 바리스타의 전문적인 서비스와 매장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와 낭만을 소비자에게 제공하였습니다.
초일류 브랜드는 고객이 느끼는 가치에 맞추어 제품 가격을 책정합니다. 스타벅스는 소비자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가격 정책을 세워나가고 있으며, 자체적인 가격할인을 통해 초일류 브랜드의 명예를 지켜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초일류 브랜드는 일관된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구사해야 합니다. 스타벅스의 경우가 꼭 그렇습니다. “우리는 커피를 팔지 않는다. 오직 자유와 편안함을 통한 만족을 판다.”는 일관된 메시지 전략을 폅니다. 브랜드가 없으면 미래가 없다는 것을 스타벅스는 잘 압니다. 고객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브랜드, 따라서 그 후광 효과로 말미암아 타 브랜드까지 동반․편승하여 성장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앞서 여러 번 언급한 대로 스타벅스는 브랜드 파워를 확장시키기 위해 엄청난 광고비와 마케팅비를 쏟아 붓지 않습니다. 좋은 경험과 기억되고픈 서비스를 통해 고객에게 늘 사랑 받고 인정받는 브랜드가 진정한 일류 브랜드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객과의 소중한 관계와 즐거운 시간이 이어지는 ‘스타벅스 경험’, 이것이 스타벅스가 일관되게 추구하는 초일류 브랜드 경영의 핵심입니다.
4부 변신의 귀재, 스타벅스
1. 스타벅스를 성공으로 이끈 것, 발상
발상과 승부 - 여기에서는 자극과 도전을 줄 수 있는 몇 가지 마케팅 트렌드를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라. 역설이란 일반적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것에 반대되는 의견이나 말을 뜻한다. 언뜻 보면 상식에 어긋나거나 논리적으로 모순에 빠져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상징적으로 진리를 암시하기 위한 표현법이기도 하다. 시장에서도 이런 역설적인 수법이 이용된다. 일반적으로 마케팅에서는 한 명의 소비자를 설득하여 끌어오기를 원하지만 이 디마케팅에서는 정반대의 행동을 한다. 말하자면 “저희 상품은 제발 사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소비자 가격은 소비자가 결정하게 하라. 이제 거의 ‘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온 가격(price)마저 소비자가 결정해야 하는 프로슈머의 시대이다.
20%에 치중하라 -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는 19세기 영국의 부와 소득의 유형을 연구하다가 ‘20:80 법칙’을 발견했다. 즉 전 인구의 20%가 전체 부의 80%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전 인구의 20%가 부의 80%를 차지하고 나머지 80%의 인구가 부의 20%를 가진다면 20% 내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평균적으로 16배를 가지게 된다. 어떤 시대, 어떤 나라를 분석해도 20:80이라는 비율로 부의 불균형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비단 부의 분배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운전자의 20%가 전체 교통위반의 80% 정도를 차지하며, 범죄자 가운데 20%가 80%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고, 전체 상품 중 20%의 상품이 80%의 매출액을 차지할 뿐 아니라 전체 고객의 20%가 전체 매출액의 80%를 기여하고 있다. 몇 년 전 조사에 의하면 삼성카드 등 몇 개의 회사가 20%의 핵심 고객에 의해 매출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래서 삼성카드는 20%의 우량고객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시행하여 큰 성과를 얻었다.
각 기업들의 생존을 위한 발상의 전환은 상상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범위와 범주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모습으로 고객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기업은 우위를 지키고 차별화 된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발상하고 도전하는 승부의 레이스에 서 있다.
마케팅 교과서를 새로 쓰다 (정영권 상무와의 인터뷰)
마케팅 전문가나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은 ‘스타벅스’를 두고 경영학 서적에도 없는 브랜드 마케팅을 이루었다고 극찬합니다. TV나 신문광고 하나 없이 기업 이미지를 높였다는 사실이 ‘세상에 없는’이라는 찬사를 듣게 합니다. 스타벅스는 마케팅의 기본 개념 즉 ‘4P’에서 변형된 ‘5P'를 내세웠습니다. 이 개념은 스타벅스만이 내세울 수 있는 노하우라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5P는 마케팅의 기본 개념인 4P, 즉 최고급 품질의 커피를 의미하는 제품(product)과 제3의 공간을 의미하는 장소(place), 그리고 서비스와 제품에 걸맞는 프리미엄 가격(price), 브랜드 차별화 전략인 프로모션(promotion)에 커피를 만들고 고객들에게 서비스하는 사람들(people)을 더한 개념입니다.
제품부터 볼까요? 스타벅스는 높은 기준의 원두 구매 지침을 갖고 최상질의 커피를 구매하고 있으며 50여 종의 커피 관련 음료 및 각종 티, 주스 등 10여 종의 non-coffee 음료를 구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장소입니다. 고객들에게 제1인 장소인 집과 제2의 장소인 학교․직장이 아닌 심신을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제3의 공간을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스타벅스는 이러한 제품과 서비스에 걸 맞는 프리미엄 가격을 책정하였으며 무료로 커피를 제공하는 프로모션을 실시하나 커피 가격 할인은 절대 하지 않는 가격 정책을 사용해왔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프로모션을 통해 마케팅 활동을 극대화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 ’people'인데, 이것이 스타벅스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파트너들이 행복해야 고객이 행복하다는 생각 하에 직원들에게 여러 가지 복리후생을 제공하고 있으며, 인센티브도 지급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교과서에도 찾아볼 수 없는 이 마케팅 기법은 마케팅 역사의 또 다른 사건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5부 크게 볼 줄 아는 기업
1.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현대사회는 심각한 환경오염, 자원 부족, 빈부격차, 실업 등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 마케팅 개념은 기업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이러한 문제를 소홀히 다뤄서도 안 되며 사회적인 측면의 고려가 가미된 마케팅 관리의 철학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윤리경영과 사회적 책임의 부분에서 최고 경영자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인식의 전환을 바탕으로 윤리경영 도입 및 추진 과정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함은 물론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익이나 매출 확대를 위한 투자로 나아가야 한다. 또한 추진 과정에서 생겨날 기업 윤리 준수에 관한 여러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강한 의지를 가진 최고 경영자가 등장해야 할 것이다.
윤리적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낸 스타벅스 (정영권 상무와의 인터뷰)
최근 스타벅스커피 코리아는 <윤리경영 백서 자료집>을 만들어 전 임직원이 숙지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중점 추진 방향은 고객 존중이나 협력 회사 존중 경영, 준법, 청결, 인재 중시, 사회봉사 및 환경보호 경영입니다. 특히 준법 경영은 고객과 협력 회사와의 신뢰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함은 물론, 더 나아가 이런 요소가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촉매제가 되므로 매우 중요시하는 원칙입니다. 인재 중시 경영에서 하워드 슐츠 회장의 리더십과 관련하여 잊을 수 없는 사건을 소개하겠습니다. 1990년대 중반 텍사스의 있는 스타벅스 점포에 강도가 들어 점포 관리자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슐츠는 즉시 전세 비행기를 타고 텍사스로 갔습니다. 그는 가족과 종업원을 만나 상담하고 지원하면서 깊고 진지한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이에 멈추지 않고 죽은 관리자 가족을 위해 기금을 조성했으며 그 관리자를 기념하기 위해 사건이 일어난 점포를 가족에게 기증했습니다. 즉 그 점포의 수익을 가족 부양과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헌납한 것입니다. 이런 감동적인 에피소드는 직원들에게 깊은 신뢰를 주었습니다. 종업원을 내 가족처럼 여기는 윤리경영은 궁극적으로 기업을 장기적인 기반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을 아울러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스타벅스커피 코리아는 타 기업과 달리 기업의 사회적 책임, 즉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에 깊은 관심을 갖고 지속적인 지출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사명 선언서에 ‘지역사회와 환경에 긍정적으로 기여한다’는 대원칙을 세워두고 재활용 실천, 환경 친화적인 여러 요소를 실현하기 위해 ‘그린팀’을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원산지 보호입니다. 사실 커피를 재배하는 곳은 적도 근처에 있는 나라들로서, 대부분 가난합니다. 스타벅스는 이러한 가난한 나라의 농부들을 돕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오늘도 스타벅스는 커피 재배국에 정수 공급 시스템과 건강 위생 교육, 문맹 퇴치를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기금을 기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활동의 근간은 ‘기업은 어떻게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라는 기업 정신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위기관리, 새로운 도약을 위해
위기관리란 개인이나 조직에 위기를 가져다주거나 줄 수 있는 경우가 발생할 때 이에 적절하고 효율적으로 대처하여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신속한 조치를 뜻하며 위기 발생 요소의 측정이나 분석, 대비 및 통제, 위기 상황 후속 조치도 이 관리 기법에 포함된다. 물론 위기관리에는 수동적으로 대처하거나 아예 처음부터 봉쇄하거나 극복하는 적극적인 방법이 있으며 사전에 준비해두는 것도 효율적 관리라 말할 수 있다. 어느 기업이든 위기의 범주 내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따라서 평상시든 긴급을 요하든 이에 대응할 매뉴얼과 커뮤니케이션 체제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100호점 이후의 위기관리 (정영권 상무와의 인터뷰)
최근 스타벅스커피 코리아는 1999년 이대점을 오픈한 지 꼭 5년 만에 용산구 이태원동에 100호점을 오픈하였으며, 이 여세를 몰아 발전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까지 스타벅스의 무적행진이 계속될 것인가’를 자문자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00호점 이후의 위기관리에 대해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그 첫째가 아직도 ‘고급 커피의 대중화 작업’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스타벅스 앞에 많은 난관이 놓일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매우 현실적인지 모릅니다. 번화가 위주로 몰려 있는 스타벅스 매장의 식상함을 토로하는 고객이 늘어날 수도 있으며,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100호점 이후 보다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전략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후발업체들이 넘볼 수 없는 진입 장벽을 구축해 나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스타벅스의 위기관리는 시대를 이끌어 가는 미래 기업의 푯대로 또 다시 자리 잡아갈 것입니다.
나는 스타벅스가 만남의 장소가 되었으면 합니다. 스타벅스에서 친구와 만날 약속을 하고 연인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때론 선남선녀들이 맞선을 보는 장소, 주부들의 계모임 장소, 동호회 미팅 장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아침에 편한 차림으로 스타벅스에 와서 커피 한잔을 시켜 마시며 조간신문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계속 매장을 늘려갈 계획입니다. 고객이 집을 나서면 어디서나 스타벅스를 찾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