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 글은- 그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일종의 지도 그리기라는 차원에서, 스케치도 아닌 속기의 형식으로,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지형지물에만 방점을 찍어놓는 식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방송통신대학과 마로니에 공원 사이에 나 있는 작은 소방도로는- 아쉽겠지만 이 글에서는- 찾기 힘들 것이다.
1. 2002년에 나온 영화 중에 <YMCA야구단>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일본과의 합병이 근 미래에 예정되어 있던 1905년 YMCA가 창설한 조선 최초의 야구단. 어느 순간부터 승승장구, 급기야는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것이 더 장안의 화제를 불러모았다는, 근대와 전근대가 만나고, 갓과 안경이 공존하며, 전차와 달구지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이보다 더 흥미진진할 수 없다!’고 누군가 외친다 해도 나무랄 수 없을 것 같은 혼돈과 잡종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한 마디로 일본의 통치가 여전히 ‘문화통치’에 머물러 있었던 당대 상황 속에서, 야구라는 당시로서는 생소했을 신문물을 매개로 일본과 대적하면서 민족의 소중함을 깨달아가는 민중들의 자각 과정을 그리고 있지 않다.

양반 출신 조선 선수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일본 팀에 지는 게 아니라 얼마 전까지 자기 집에서 머슴으로 일했던 이와 함께 동등한 자격으로 야구를 해야 한다는 상황 그 자체이다. 경기 중 후자와의 접촉을 그 무엇보다 기분 나쁘게 여기면서도 그에게 매번 배트를 건네 받는 그는 안타를 치고도 뛰기는커녕 헛기침을 하면서 갈 짓 자로 완보하다가 번번히 아웃 된다. 물론 일제의 강점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놈들과 같이 뛰고 호형호제하게 되는 상황만큼 수치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렇게 전자가 느끼는 수치심과 분노는 머슴 출신 선수에게도 전달된다. 물론 그에게도 일제의 강점은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라고 가정해보기로 하자). 하지만, 그가 자신의 주인과 동등한 자격으로 운동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실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런 강대국과의 경쟁에서 (그의 주인의) 나라가 패배한 덕을 본 것 또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이 한 쌍의 주인과 노예는 부끄러움 혹은 수치를 공유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부끄러움의 중심에는 알맹이가, 다시 말해 민족이 없다. 그것은 그들의 심장에 (아직) 박혀있지 않다. 지금 거기에 자리잡은 것, 그것은 한 마디로 봉건적 계급구조-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의 (강제적) 폐지가 그들에게 가져온/가져올 결과-이다. 그것의 회복이라는 문제 앞에서 민족은 주인에게 부차적인 문제이다. 노예 역시 마찬가지이다. 머슴이었던 그의 자유는 민족의 자유보다 덜 추상적이고 그만큼 더 절실하다.

2. 역설적으로 이러한 이야기는, 시대가 시대인 만큼 부끄러워 차마 대놓고 고백하진 못했던 몇몇 내향적 맑스주의자들을 기쁘게 할 만하다. 그것은 그러나 1920년대의 자유시를 주요한의 “불놀이”와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양대 축으로 나누고 두 시가 노래하는 ‘자유’를 각각 국가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의 차이로 구분한 김현에 의해 이미 60년대 말에 선취되었던 통찰이라는 것을 기억할 일이다. 이상화의 시에서 자유와 부자유의 대립이 한국인과 일본인이라는, 민족 국가(nation-state)의 경계선을 따라 그어지는데 반해 주요한에게서 자유와 부자유는 근대성과 전근대성이라는 대립항에 조응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유가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한, 전자에게는 일제의 식민지/제국주의가 일차적으로 타기할 대상이지만, 후자에게는 “식민지주의보다는 과거의 유산”이 더 적대시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상화보다는 주요한이 영화 속 머슴의 심정을 더 잘 대변해주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가능할 것이다. (훗날 문학사에 주요한이 친일작가로 기록되고, 가깝게는 일제시대에 ‘한낱’ 창공의 자유에 연연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청연>(2005)이 친일영화라는 여론의 비난을 이기지 못하고 추락한 것은 따라서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근본적으로 대중영화인 이 작품의 서사 속에서 이러한 균열과 긴장이 김현이 쓴 것처럼 오롯이 돌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마저 결국에는 민족주의란 마개로 가뿐히 밀봉되될 뿐이다. 하지만 밀봉이라고 여겨졌던 것은 대개 미봉으로 드러나는 법. 무엇보다 그렇게 한시적인 조치가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어떤 결과를 맺게 될 것인지를 기억한다면 (조정래가 아닌, 임권택의 <태백산맥>(1994)을 보라), 혹은 작가란 때론 단 한 문장을 집어넣기 위해 한 편의 소설을 써내기도 한다는 헤밍웨이의 말을 기억한다면, 여느 사람들처럼 이 영화의 결말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3. 오히려 요즘 책 좀 읽는다하는 학부생들이라면 민족이라는 개념과 단위를 초역사적이고 선험적인 실체로 과거에 일관되게 투사하는 관점의 시대착오성(anachronism)에 주목할 것이다. 그 때 <YMCA 야구단>은 ‘거시기’ 한 방으로,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전제되어온 민족 언어의 투명성에 흠집을 낸 이준익의 <황산벌>(2003)과 같은 계열의 영화로 묶인다. 물론 몇몇 이들처럼 이 작은 예에서 삼국시대의 사람들이 서로의 언어를 영어나 불어 배우듯 배워야 했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지나친 비약임에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당나라에 ‘손을 벌려’ 이룬 신라의 삼국 통일을 외세에 의존한 반민족적 사건이라고 단죄했던, 신채호이후 민족주의 계열 사학자들의 “시대착오주의”(임지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소나무, 1999), 60쪽)를 경쾌하게 발가벗기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는 한, 신라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가장 웅변적이면서도 미학적으로-즉 문체 면에서- 탁월하게 표현된 것은 1980년대까지 대표적인 재야사학자이자 지식인으로 평가 받았던 함석헌의 글에서이다. 특히 “한국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다”, “아, 너 위대한 세계사의 하수구여!”, “세계의 하수구요, 공창인 우리”와 같은, 한국사에 대한 그의 유명한 전언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그의 대표작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 담겨있는데, 삼국 시대는 거기에서 일종의 경첩(hinge)이자 문지방(threshold) 역할을 한다. “한국 역사 전체가 삼국 시대를 경계선으로, 그 때까지가 올라오는 역사고, 그 후부터는 내려가는 역사”(146)인데, 그에 의하면 이 때부터가 “비극의 시작이다.” (129)
“돌아보면, 아아, 삼국 시대 이래 그 걸어온 길이 얼마나 잔혹했나? 눈물과 피로 걸었다기보다
기었고, 기었다기보다 굴러 왔고 발길에 채어 왔다. (266)”
이러한 시대 구분과 가치판단은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일까? 그 단초를 그는 고구려의 패망에서 찾는다. “삼국 시대의 실패의 원인은 고구려가 망한 데 있다.”(126) 그가 “5천년 역사상에서 가장 아프고 쓰린 일”(127)로 평가하는 고구려의 패망은 신라를 깎아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정색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당나라의 도움을 통해 통일을 이룩한 것에 대한 그의 시선과 맞물릴 때 더욱 안타까운 것이 된다. “하물며 제 힘으로 된 것 아니요, 남의 힘을 빌어서 하였음일까?” (127) ‘5천년 한민족의 역사’를 사람의 삶에 비유한다고 할 때, 아, 모든 것은 이미 이 때 결정된 것이다.
“삼국 시대가 사람으로 하면 골탑, 인격이 다 틀이 잡히는 청소년 시대인데 그 때에 그렇게 소
아마비가 생기고 등뼈가 꺾어진 셈이니 그 이후의 발달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370)
왜 우리의 현대사는 이토록 비참한가? 한 마디로 우리의 청소년기가 불우했기 때문이다. 셀 수 없는 수난과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으로 점철된 “고난의 역사”인 한국 역사는 이렇게 ‘설명’된다. 물론 이는 의문의 여지 없는 결정론이다. 이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함석헌에 따르면 그럴 수 있는 길은 안타깝게도, 없다. 하지만 이는 그리 나쁜 소식은 아니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기쁜 소식이다. 의미 없는 고난이란 없기 때문이다. “고난의 역사라지만 그 역사에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의미 없는 고난이 무엇이냐? 사실은 의미 없이는 고난조차도 없다.” (322) 이러한 시각의 전환이 허락하는 시야의 끝에 놓인 것, 우리 역사의 궁극적인 의미, 그것은 다름아닌 사랑이다. “하늘이 미워하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이라”(232). 그 사랑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라는 약속이라는 사실을 굳이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기뻐하라! 이 모든 것은 기쁜 소식, 즉 “복음”이니! <뜻으로 본 한국 역사>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새로 쓴 것이고, 책 말미에 수록된 인터뷰에서 김동길 교수가 한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을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405-6)에 주목해야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양에 이스라엘이 있다면 동양에는 대한민국이 있다는 이 성서적 세계관의 아이러니는 그것을 역사 속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구현한 것이 함석헌이 아니라 박정희라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70년대 후반 ‘국민학교’를 다녔던 한 선배는 당시 학교에서 이스라엘을 배워야 한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코딱지만한” 땅덩어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중동연합군을 괴멸시킨 ‘6일 전쟁’의 이스라엘, 특히 핵무기 개발을 통해 민족의 영웅이 되었던 수상 벤구리온에 대한 박정희의 찬탄과 동경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대한민국의 아이들에게까지 하달된 결과인 것이다. 얼핏 황당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가 21세기에 “한국의 모세”(지만원)로까지 추앙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청년 시절 박정희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애독했다는 사실을 또 다른 아이러니로 괄호 쳐 둔다면 말이다)
4. 가라타니 고진은 “풍경의 발견”이라는 자신의 테제가 불러일으키는 일견 당연해 보이는 의문(“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풍경이 없었단 말인가?”)이 “풍경 이전의 풍경에 대해 말한다”는 일종의 “자가 당착”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원근법적 전도”로부터의 거리두기를- 명백하게 사이드로부터 착안한- ‘비평(criticism)’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강조해왔다. 하지만 대표적인 수정주의 역사가이자 2000년대 한국 지식사회의 가장 뜨거운 쟁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일상적 파시즘’론의 입안자인 임지현 교수 역시 비슷한 논지에서 “역사적 원근법”이라는 용어를 써왔다는 것은 그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리 말해두자면 이 표현은 가라타니가 한국 담론의 레이다에 전면적으로 부상하기 전인 1994년에 쓰여진 것이다) 90년대 후반 이후 지금까지 한국 지성계에 끼친 영향력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이 두 인물이 만드는 공명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질문은 “원근법적 전도”와 “시대착오주의”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치환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있는 그대로의 과거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일까? 지금의 다분히 주관적인 시점으로 과거를 윤색하는 것이 아닌, 과거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인식에 대한 요청? 만약 이런 (고루한) 이해가 맞는 것이면, 그 때 가장 먼저 탈락될 영화들의 명단에는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만 할 것이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2001), <천군>(2005), 그리고 <전국자위대 1549>(2005). 도대체가, 타임머신이라니!?! (물론 여기에는 <한반도>(2006)나 <로렐라이>(2005), 그리고 <망국의 이지스>(2005)와 같은 영화들도 포함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거기에는 혜성과 별자리의 신묘한 조화 덕분에 이루어지는 시/공간 이동은 나오지 않는다!) 왜 이 세 작품인가? 무엇보다 객관적이어야 할 역사가 거기에서 노골적으로 허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의 암살 기도를 물리친 이토 히로부미 덕분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 있고, 통일을 목전에 둔 근 미래의 남북한 군과 자위대 병사들은 각각 핵무기를 가지고 16세기의 조선과 일본을 찾아가 이순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난다. 한 마디로, 웃기는 얘기들이다.
5. 그 우스움에 주목해야 한다, 고 나는 생각한다. 거기에 위에서 제기한 질문들에 대한 열쇠가 있다. 예를 들어 <2009년 로스트 메모리즈>는- 물론 허탈한 웃음을 많이 불러 일으키는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아쉬움에 대한 영화이다. (이를 니체가 얘기했던 의미에서의 원한(ressentiment)의 영화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둘은 결국 같은 이야기이다) 안중근의 암살기도가 실패로 돌아가 한국이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있다는 영화의 서사를 두고 아쉬움이라고? 아, 일본의 관점에서 말이다. 외압에 의해 중단된 제국주의에 대한 일본인들의, 여전히 꺼지지 않는 욕망 말이다. 물론 이러한 관점과 그 안에 내재한 욕망은 우리의 (과잉) 투사(projection)이다. 이런 ‘악몽의 시나리오’를 통해 반사이익을 얻는 것은 물론 ‘어떤’ 민족주의인데, 그것은 그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이러한 투사의 “필수적 부산물(essential by-product)”이다.

<오래된 정원>에 대한 화요논평 글에서 나는- 보다 정확하게는 모모님과 후반에 나눈 꼬리말에서- 그 영화가, 자신이 대면하려는 시대에 없었던 것, 즉 “쿨”함이 없었다고 얘기하지 않고,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한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일본이 갖지 못했던, 그러나 잃어버린 기억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오래된 정원>의 진정한 짝패로 보인다. 양자는 공히 어떤 부재(absence/void)를 상실(loss)로 치환하고, 그 결과 각각 (남성성의) 치유(healing)와 (민족주의의) 강화(fortification)라는 효과를 얻는다. 이러한 치환의 메커니즘의 근저에 자리잡은 아쉬움, 혹은 뒤늦은 통탄의 정서(affect)는 오래 전 피터 브룩스가 지적한 것처럼 멜로드라마의 핵심을 이루는 것인데, 라깡/지젝/프로이트주의자라면 그것이 어린 시절의 자신이 분명한 주체적 의식을 가지고, 다시 말하면 성적인 의식을 가지고 유모의 젓을 빨았더라면 하고 아쉬워하는 프로이트의 환자 이야기와 같은 환타지의 구조를 공유한다고 지적할 것이다.

6. 그러나 나는 이러한 영화들이 소위 포스트 민족주의의 단초들을 보여준다는 식의, ‘30분에 읽는 후기식민주의’식 논의를 펼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적하려는 것은 가라타니나 임지현과 같은 이들이 지적한 시대착오주의, 혹은 원근법적 전도를 벗어나는 유력한 탈출구로 채택되어 온 것이 다름 아닌 아이러니라는 것이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 나머지 영화들은 모두 뜬금없는 시간이동 즉 타임머신이라는, 서사의 논리적 투명성과 완결성을 아예 포기하는 외적인 기제를 서사 속에 무방비상태로 드러냄으로써, ‘역사’라는 신성한 대상과 각각의 서사가 벌이는 위태로운 곡예에 대한 의혹과 불안에 미리 물을 뿌려둔다. <황산벌>에서 당나라가 자국에 이르는 신라의 조공길을 막는다는 이유로 고구려와 백제를 ‘악의 축’으로 선포하는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쿵쿵, 따/쿵쿵, 따”로 시작되는 리드미컬한 전주로 유명한, 퀸의 “We Will Rock You”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14세기의 관중들을 보여주는 <기사 윌리엄> (A Knight’s Tale, 2001)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이 에피소드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시대착오적이라는 사실을 대놓고 전시(exhibit)한다. 시대착오주의가 위험하다면 시대착오주의를 전경화(foreground)하고, 원근법적 전도가 걱정된다면 원근법적 전도를 (대놓고) 드러내면 될 일이다. 이게 영화라는 건 당신이나 나나 다 알고 있던 것 아닌가? 장사 한 두 번 하나? 결국 다 영화 아닌가?!

<천군>과 <전국자위대 1549>에서 현재의 인물들이 발견하는 과거의 ‘위인’들은 우리가 배워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때론 우습고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천군>의 중심인물인 이순신은 ‘난 왜 맨날 이러냐?’라는 푸념을 반복하는 일종의 백수이고, <전국자위대>의 토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촐랑대는 철모르는 소년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두 청/소년들은 우리가 기억하는 ‘성웅 이순신’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기 위해, 그럴 운명에 충실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For this little boy could not possibly have lived his life at the time in order to become ‘Lee soon-shin the Holy Hero’ as we now know of.) 자신이 “이순신”이, 혹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될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냥 그러고 있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 질문은 그러나 이미 <YMCA야구단> 안에 내재되어 있던 것이다. 한일합방으로 과거시험을 보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것을 미미 알았다면 창호는 그 하기 싫은 공부를 진작에 때려 치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을 알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 치 앞도 바라보기 힘든 게 인생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전국자위대>의 주인공 카지마의 대사는 그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모순이다. 그런 말은 자신의 시대가 아닌 전국시대에 들어가 본, 즉 두 가지 이상의 시대를 경험한 인물만이 할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YMCA 야구단>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서사의 정점(climax),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바로 다음에 온다.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스포츠맨쉽(sportsmanship)’이라는, 여태껏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기이한 원칙 덕분에 잠정적으로 보류되었던 제국주의자와 피지배자라는 두 팀간의 권력관계는 결국 귀환한다. 이는 급기야 조선 팀의 기둥이랄 수 있는 일본유학생 출신 독립군인 투수 대현(김주혁)의 체포로 이어지는데, 바로 이 때- 내 기억이 맞다면- 갑자기 카메라는 경기장 바깥을 응시한다. 거기에 마치 이육사의 시에서처럼 멀리서부터 작은 먼지를 일으키며 말을 타고 달려오는 한 청년이 보인다. 그러나 카메라는 그를 섣불리 클로즈업으로 끌어 당기지 않고, 기다리는 쪽을 택한다. 모든 인물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소란은 차츰 잦아든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 쉬던 그는,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머리 위로 힘껏 쳐든다. 그리고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그 청량한 목소리로- 외친다.
“암행어사 출두요~!”
아, 그 썰렁함이란 정말, 대략난감이다. 뭐 대략, “제 뭐(하는 거)니?”라는 기이한, 엉성한, 불쌍한, 반응들. 반응들. 그 공허한, 아니 보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썰렁한’ 메아리의 외침은 그 말의 엄격한 의미에서 ‘아이러니칼한(ironic)’ 것이다. 그것이 시간을 모르는 자의, 아니 햄릿의 말을 빌면 시간이 이미 어긋날 대로 어긋났다는 것(Time is out of joint)을 알지 못하는 자의 외침이기 때문이다. 물론 필요하다면, 정 그래야겠다면, 출두야 암행어사의 자유이겠지만, 이 지점에서 그의 출두는 예를 들어 탁월한 편집의 리듬을 자랑하는 임권택의 <춘향전>(1999)에서처럼, 막았던 둑을 터뜨린 듯 휘몰아치는 포졸들의 강권을 전혀 동반하지 못한 채, 허탈한 조소만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 썰렁한 암행어사를 조승우가 연기한 것은 우연이 아닌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몇 해전 그가 암행어사로 출두했던 <춘향전>(1999)을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마시라. 이 사실을 모른다고 이 장면을 즐기는 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니. 알면 보너스고 몰라도 별탈 없는 암시적 언급(allusion), 이것을 움베르토 에코는 포스트모던 아이러니라고 명명한 바 있다)
8. 썰렁하다고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이 일종의 웃음에 동반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가 확실해지는 것,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이 우스워지거나 비극적으로 보이는 것은 오직 그 바깥에서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ㅋㅋ…”) 혹자는 이러한 역사감각에 ‘역사의 종언’이라는 이름을, 혹자는 ‘후일담’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궁극적으로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둘의 차이는 그리 유의미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만나게 된, 과거의 범인들과 ‘위인’들이 보여주는 멍청함 또는 희극성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그것은 초시간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그래서 보이지 않던 숭고한 ‘도덕(Morality)이 겨우 당대의 그것(morality of a given time)으로 초라하게 판명될 때 생긴다. (“겨우 그 딴 일에 내 목숨을 걸었다니…”) 웃기는 숭고(ridiculous sublime) 혹은 장엄함의 소극…
0. 얘기는 더 길어질 수도 있(겠)지만, 일단 오늘은 두 가지만 지적하기로 하겠다.
<전국자위대 1549 (戰國自衛隊 1549, 2005)>의 원작을 쓴 작가인 '후쿠이 하루토시(Harutoshi Fukui, 福井晴敏, 1968년생)'는 이 작품 외에도 같은 해에 개봉해 큰 흥행을 기록했던, 소위 우파 블록 버스터 삼부작인 <로렐라이 (ロ-レライ, 2005)>, <망국의 이지스 (亡國のイ-ジス, 2005)>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임지현 교수라면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원안 제공자인 복거일과 후쿠이 하루토시의 소설들이 한일 양국의 ‘적대적 공범관계’를 집약적으로 드러낸다고 썼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몇 년 전부터, 한동안 한국의 지성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그 담론이 그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더 이상 동시대적이지 않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는데, 구체적으로 그러한 탈각은 그 담론이 자신의 시대와 맺(고 있다)고 (생각하고)있는 최소한의 비판적 거리가 (최소한의) 적대적 공범관계와 구분되기 어려워지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김진석 교수는 다른 곳에서 ‘근본주의’의 한계라고 지적하면서 그 대상에 박노자를 포함시킨 적이 있는데 그러한 판단에 동의하면서도 나는,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 더 명확하게 논리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내가 가장 바깥에 있다고 여겼는데, 그런 내가 이미 또 다른 ‘바깥,’ 거기에 놓인 모종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지젝/라깡주의자라면 ‘메타언어는 없다’고 쓰겠지만-, 그 지점에 가장 어울리는 표현으로 아이러니보다 좋은 것을 아직 나는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고진이나 프로이트를 따라 유머를 그 자리에 올려놓는 논의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보다 집중적으로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아이러니보다 겸손한 것으로서의 유머란 정식화(formulation)도 일종의 아이러니로 포괄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칼한' 사실만 지적해두기로 한다)
둘째, 지금까지의 글에서 나는 주로 한국 영화에 대해 얘기해 왔(고 또 당분간 계속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서 이야기 했던 많은 것들은 동시대의, 다시 말해 대략 10년 전부터 가장 최근에 이르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한국 소설들 속에 대해서도 약간의 변형을 거쳐 얘기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것을 지적해 둔다. 조만간 그에 대해 꼼꼼하게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김현, “여성주의의 승리,” <전체에의 통찰> (서울: 나남, 1990), pp. 57-77.
Ibid. p. 62.
Ibid., p. 60.
가라타니 고진, “풍경의 발견,”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박유하 옮김 (서울: 민음사, 1997), p. 29, 38.
임지현, “한국사 학계의 ‘민족’ 이해에 대한 비판적 검토-보편사적 관점과 민족사적 관점”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신화와 허무의 민족주의 담론을 넘어서> (서울, 소나무, 1999), pp. 52-83.
Ibid., p. 84.
S. Freud, The Interpretation of Dreams, trans. Joyce Crick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p. 158.
물론 이를 풍자(satire)나 블랙유머(black humor)로 분류할 이들도 있겠지만,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 아이러니의 하위범주로 충분히 포함될 수 있는 것들이다.
첫댓글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도 님께서 언급하신 바로 그 이스라엘과 우리민족의 동일시에 대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인구가 엄청나게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정서적 동지 의식은 말로 설명될 무엇을 이미 뛰어 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중학생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내리 6년을 교회를 다녔던 지라.. 세계사를 배우면서 그런 생각을 저도 모르게 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 이기도 하구 말입니다
민족이란 개념이 계속 도마에 오르고 있는 듯합니다. 세계화 지구화 시대의 민족에 대한 가치정립의 어려움을 느껴야 함에 있어 그 기준점이 무엇이 되어야 할 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군요. 외국인에 섞여 있을 때, 영어라는 언어의 절대절명의 지위와 기준아래에서 판단되어지고, 우리들도 모르게 길들여진 백인우월과 그 따까리 정도의 선민의식같은 것에 우리들 스스로 벗어날 비판적인 자기 인식이 얼마나 되어 있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최근에 읽은 '영어 내마음의 식민주의'란 책과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 민국'은 제게 그런 화두를 던져 두고 있습니다. 다양성의 측면에서 민족이란 의미는 더욱 그 의미와 전
전통의 내용을 올곧이 지키고 발굴해야할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이고, 아무래도 세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외국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을 받아 들임에 있어 민족이란 의미는 어쩌면 편협하고 보수적인 모습으로 다가 들 수도 있으리란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자기 자존감을 세우지 못하고 흔들리게 되면 개화기 서재필이나 윤치호처럼 중심없이 기둥없이 흔들리다가 서양사람들의 그 거대한 덩치에 지레 눌리고 속으로 죽어라 욕만하다가 자살하거나 하고 말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아주 극단적인 예로 '조승희'와 같은 무서운 아이를 만드는 일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 자기 중심을 가지고 세계에
맞서 살아가는 우리들에 대해 자꾸 돌아보고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판단해보는 일이 중요하지 싶습니다.
짐작하신 분도 계시리라 믿지만, 이 글은 이번 논평을 위해 쓰려던 글의 약 1/5에 해당합니다. 한꺼번에 올릴까하다가 좀 심하다 싶어서 뺐지만 사자님 답글로 미루어보아 예를 들어 소조님께서 올려주신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홀로 서기가 힘든 부분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나머지를 이곳에 올릴지 다른 게시판에 올릴지를 생각해 본 후, 오후 쯤 올리겠습니다.
이제 핵심적인 이야기는 언급된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몇 부분은 제외한 것입니다)...
드디어 아쟈비님의 글이 윤곽을 드러냈군요. 님의 글의 매력은 구체적인 것들 - 더구나 영화임에야! - 을 통해서 그 속을 흐르고 있는 매서운 지적 긴장감을 느낄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번 글에선 더욱 그렇군요. 지난번 글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제 생각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저의 물음은 과연 역사의 바깥에 위치하지 않은 역사에 대한 접근이 의미있게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를 소재로 삼는 모든 창작물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후일담'일 수 밖에 없다는 제 생각이 여기서도 반복되는 셈이지요. 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과거", "과거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인식"을 요청하면서 '시간을 모르는 자들'
에 의한 객관적 과거의 '노골적 허구화'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계신 것 같은데, 저는 과연 이미 그것의 결과를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 대해 우리가 알고있는 모든 선지식을 '괄호치고' 접근하는 태도가, 그 말의 부정적 의미에서의 실증주의적 역사관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가능할 것인지 자문합니다. 역사를 소재로 삼는 소설, 영화, 드라마 등등이 목표로 삼는 감정적 반응들 - 거기엔 당연히 님이 말씀하신 '아쉬움, 썰렁함', 혹은 '웃음' 등도 포함되는데 - 은 이미 그 역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선지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바로 그로부터 '초시간적으로 여겨졌던 숭고한 도덕이 당대의 그것으로 초라하게 판명'되는
것도 가능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과거를 가지고 노는 것'은 포스트 모던 역사 감각에 의해 저 초역사적 것을 해체하고 무력화시키는 주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던 것이기도 하지요. 여기에서 저는 님께서 탁월하게 지적하신 것처럼 '부재'를 '상실'로 치환함으로써 남성성의 치유와 민족주의의 강화라는 효과를 가져오는 '역사의 허구적 재현'과 초월적이고 초시간적으로 여겨지던 것을 해체하고 역사화시키는 '역사의 재현'을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또 한가지 생각은, 역사를 '자유롭게' 소재로 삼는 저런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질 수 있는 데에는 크게 두가지 서로 모순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배경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그만큼 오늘날의 시대가 그가 소재로 삼는 과거와 역사로부터 이념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자유로와 졌다는 것이지요. 얼마전 독일에선 히틀러를 주인공으로 하는 코미디 영화가 제작, 상영되었었는데 그를 둘러싼 논쟁의 중심엔 나찌와 히틀러라는 역사적 과거가 독일에서 희극적 소재로 사용되어서도 되는가하는 질문이 놓여 있었지요. 10년전만 하더라도 이런 영화를 만든다는건 마치 한국에서 광주를 소재로 하는 코미디 영화가 제작될 수 없는 것처럼,
불가능했었으니까요. 신라의 삼국통일, 이순신, 안중근, 나아가 80년대가 영화로, 그것도 희극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오늘날 한국사회가 저 과거들을 다루는데 자유로와졌다(혹은 자유롭고 싶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한편 그 과거의 시간이 우리들의 '현재의 시간'과의 결속을 상실, 현재와 분리된 대상으로 사물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김남시님께서 제기하신 질문들은 크게 두 가지로 보입니다. 하나는 실상 인간의 모든 지적/예술적 작업이 후일담일진데 '후일담'이라는 표현 자체가 사실 무의미한 것 아닌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허구적으로 역사에 접근하는 대중문화산물들이 늘어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시대가 그만큼 이전보다 (‘역사’로부터) 자유롭고, 그만큼 (역사적으로) 나은 것이라는 반증이 아니냐라는 것입니다. 이 두 질문은 위 글에서 명확하게 정식화되지 않은, 그러나 보다 정치하게 논의되어야 할 논점들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원래 써둔, 그리고 지금 수정중인 글이 그러한 의문에 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여러 가지 제약상 지금 제가 드릴 수 있
는 대답은 아쉽게도 짧고 제한된 것입니다.
1992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던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이래적으로 40만부가 넘게 팔려나가며 각종 매체의 문화면을 도배했습니다. 2년 후 도합 70만부 이상이 팔려나가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성공이 이 토대 위에서 가능했던 것임은 물론이지요. (후자에는 ‘살아남은 자의 배고픔’이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 두 편의 제목은 서구 문법의 관점에서 얘기하면 ‘완료형 시제’로 쓰여져 있지요. 같은 제목과 내용의 작품이 예를 들어 1980년대의 한국사회에서, 그만한 반향은커녕, 쓰여질 수나 있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부정적입니다.
물론 이러한 마침표, 혹은 깔끔하게 잘려 투명한 랩으로 밀봉된 후 소비자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슈퍼마켓 냉장고에 널린 고깃덩어리 같은 역사에 대한 이미지는, 물론 한국 사회 내부에서 배타적으로 배태된 특유한 것은 아닙니다. 1992년에 단행본으로 나온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은 이미 1989년 여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 National Interest에 발표된 작은 논문(과 그것이 불러일으킨 논쟁)을 통해 예고 되었던 것이고, 거기에 쐐기를 박은 것이 80년대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80년대의 역사가('the' historian of the 80s)로 꼽히는 프랑스와 퓌레의 <지나간 환상(Le Passe d’une illusion, 1995)>입니다.
이 두 권의 서적 역시 종언과 완료(시제)를 쓰고 있는 것은- 안타깝게도- 우연이 아닙니다. (후자의 부제는 “20세기의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에세이”입니다) 이를 고려할 때, 김남시님께서 제기하신 두 번째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은 어떤 의미에서 첫 번째 질문/대답 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지 모릅니다-즉 이제부터, ‘그 때’(?)이후 ‘우리’(?)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세계 안에- 밀봉되어- 살고 있다)라는 것. 우리의 사고가 이러한 대답과 ‘구체적으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사유하는 것, 지금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