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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요논평 ** 화요논평 (2007년 5월 29일) 역사의 종언과 후일담, 혹은 민족영화의 아이러니
ahjabie 추천 0 조회 352 07.05.30 07:09 댓글 1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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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5.30 10:10

    첫댓글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도 님께서 언급하신 바로 그 이스라엘과 우리민족의 동일시에 대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인구가 엄청나게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정서적 동지 의식은 말로 설명될 무엇을 이미 뛰어 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중학생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내리 6년을 교회를 다녔던 지라.. 세계사를 배우면서 그런 생각을 저도 모르게 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 이기도 하구 말입니다

  • 07.05.30 10:21

    민족이란 개념이 계속 도마에 오르고 있는 듯합니다. 세계화 지구화 시대의 민족에 대한 가치정립의 어려움을 느껴야 함에 있어 그 기준점이 무엇이 되어야 할 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군요. 외국인에 섞여 있을 때, 영어라는 언어의 절대절명의 지위와 기준아래에서 판단되어지고, 우리들도 모르게 길들여진 백인우월과 그 따까리 정도의 선민의식같은 것에 우리들 스스로 벗어날 비판적인 자기 인식이 얼마나 되어 있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최근에 읽은 '영어 내마음의 식민주의'란 책과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 민국'은 제게 그런 화두를 던져 두고 있습니다. 다양성의 측면에서 민족이란 의미는 더욱 그 의미와 전

  • 07.05.30 10:22

    전통의 내용을 올곧이 지키고 발굴해야할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이고, 아무래도 세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외국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을 받아 들임에 있어 민족이란 의미는 어쩌면 편협하고 보수적인 모습으로 다가 들 수도 있으리란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자기 자존감을 세우지 못하고 흔들리게 되면 개화기 서재필이나 윤치호처럼 중심없이 기둥없이 흔들리다가 서양사람들의 그 거대한 덩치에 지레 눌리고 속으로 죽어라 욕만하다가 자살하거나 하고 말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아주 극단적인 예로 '조승희'와 같은 무서운 아이를 만드는 일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 자기 중심을 가지고 세계에

  • 07.05.30 10:24

    맞서 살아가는 우리들에 대해 자꾸 돌아보고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판단해보는 일이 중요하지 싶습니다.

  • 작성자 07.05.31 18:25

    짐작하신 분도 계시리라 믿지만, 이 글은 이번 논평을 위해 쓰려던 글의 약 1/5에 해당합니다. 한꺼번에 올릴까하다가 좀 심하다 싶어서 뺐지만 사자님 답글로 미루어보아 예를 들어 소조님께서 올려주신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홀로 서기가 힘든 부분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나머지를 이곳에 올릴지 다른 게시판에 올릴지를 생각해 본 후, 오후 쯤 올리겠습니다.

  • 작성자 07.05.31 18:28

    이제 핵심적인 이야기는 언급된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몇 부분은 제외한 것입니다)...

  • 07.06.01 02:22

    드디어 아쟈비님의 글이 윤곽을 드러냈군요. 님의 글의 매력은 구체적인 것들 - 더구나 영화임에야! - 을 통해서 그 속을 흐르고 있는 매서운 지적 긴장감을 느낄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번 글에선 더욱 그렇군요. 지난번 글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제 생각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저의 물음은 과연 역사의 바깥에 위치하지 않은 역사에 대한 접근이 의미있게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를 소재로 삼는 모든 창작물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후일담'일 수 밖에 없다는 제 생각이 여기서도 반복되는 셈이지요. 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과거", "과거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인식"을 요청하면서 '시간을 모르는 자들'

  • 07.06.01 02:30

    에 의한 객관적 과거의 '노골적 허구화'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계신 것 같은데, 저는 과연 이미 그것의 결과를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 대해 우리가 알고있는 모든 선지식을 '괄호치고' 접근하는 태도가, 그 말의 부정적 의미에서의 실증주의적 역사관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가능할 것인지 자문합니다. 역사를 소재로 삼는 소설, 영화, 드라마 등등이 목표로 삼는 감정적 반응들 - 거기엔 당연히 님이 말씀하신 '아쉬움, 썰렁함', 혹은 '웃음' 등도 포함되는데 - 은 이미 그 역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선지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바로 그로부터 '초시간적으로 여겨졌던 숭고한 도덕이 당대의 그것으로 초라하게 판명'되는

  • 07.06.01 02:52

    것도 가능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과거를 가지고 노는 것'은 포스트 모던 역사 감각에 의해 저 초역사적 것을 해체하고 무력화시키는 주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던 것이기도 하지요. 여기에서 저는 님께서 탁월하게 지적하신 것처럼 '부재'를 '상실'로 치환함으로써 남성성의 치유와 민족주의의 강화라는 효과를 가져오는 '역사의 허구적 재현'과 초월적이고 초시간적으로 여겨지던 것을 해체하고 역사화시키는 '역사의 재현'을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 07.06.01 06:14

    또 한가지 생각은, 역사를 '자유롭게' 소재로 삼는 저런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질 수 있는 데에는 크게 두가지 서로 모순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배경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그만큼 오늘날의 시대가 그가 소재로 삼는 과거와 역사로부터 이념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자유로와 졌다는 것이지요. 얼마전 독일에선 히틀러를 주인공으로 하는 코미디 영화가 제작, 상영되었었는데 그를 둘러싼 논쟁의 중심엔 나찌와 히틀러라는 역사적 과거가 독일에서 희극적 소재로 사용되어서도 되는가하는 질문이 놓여 있었지요. 10년전만 하더라도 이런 영화를 만든다는건 마치 한국에서 광주를 소재로 하는 코미디 영화가 제작될 수 없는 것처럼,

  • 07.06.01 06:28

    불가능했었으니까요. 신라의 삼국통일, 이순신, 안중근, 나아가 80년대가 영화로, 그것도 희극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오늘날 한국사회가 저 과거들을 다루는데 자유로와졌다(혹은 자유롭고 싶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한편 그 과거의 시간이 우리들의 '현재의 시간'과의 결속을 상실, 현재와 분리된 대상으로 사물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 작성자 07.06.06 03:53

    김남시님께서 제기하신 질문들은 크게 두 가지로 보입니다. 하나는 실상 인간의 모든 지적/예술적 작업이 후일담일진데 '후일담'이라는 표현 자체가 사실 무의미한 것 아닌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허구적으로 역사에 접근하는 대중문화산물들이 늘어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시대가 그만큼 이전보다 (‘역사’로부터) 자유롭고, 그만큼 (역사적으로) 나은 것이라는 반증이 아니냐라는 것입니다. 이 두 질문은 위 글에서 명확하게 정식화되지 않은, 그러나 보다 정치하게 논의되어야 할 논점들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원래 써둔, 그리고 지금 수정중인 글이 그러한 의문에 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여러 가지 제약상 지금 제가 드릴 수 있

  • 작성자 07.06.06 03:54

    는 대답은 아쉽게도 짧고 제한된 것입니다.

  • 작성자 07.06.06 10:28

    1992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던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이래적으로 40만부가 넘게 팔려나가며 각종 매체의 문화면을 도배했습니다. 2년 후 도합 70만부 이상이 팔려나가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성공이 이 토대 위에서 가능했던 것임은 물론이지요. (후자에는 ‘살아남은 자의 배고픔’이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 두 편의 제목은 서구 문법의 관점에서 얘기하면 ‘완료형 시제’로 쓰여져 있지요. 같은 제목과 내용의 작품이 예를 들어 1980년대의 한국사회에서, 그만한 반향은커녕, 쓰여질 수나 있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부정적입니다.

  • 작성자 07.06.06 07:49

    물론 이러한 마침표, 혹은 깔끔하게 잘려 투명한 랩으로 밀봉된 후 소비자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슈퍼마켓 냉장고에 널린 고깃덩어리 같은 역사에 대한 이미지는, 물론 한국 사회 내부에서 배타적으로 배태된 특유한 것은 아닙니다. 1992년에 단행본으로 나온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은 이미 1989년 여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 National Interest에 발표된 작은 논문(과 그것이 불러일으킨 논쟁)을 통해 예고 되었던 것이고, 거기에 쐐기를 박은 것이 80년대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80년대의 역사가('the' historian of the 80s)로 꼽히는 프랑스와 퓌레의 <지나간 환상(Le Passe d’une illusion, 1995)>입니다.

  • 작성자 07.06.06 03:59

    이 두 권의 서적 역시 종언과 완료(시제)를 쓰고 있는 것은- 안타깝게도- 우연이 아닙니다. (후자의 부제는 “20세기의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에세이”입니다) 이를 고려할 때, 김남시님께서 제기하신 두 번째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은 어떤 의미에서 첫 번째 질문/대답 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지 모릅니다-즉 이제부터, ‘그 때’(?)이후 ‘우리’(?)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세계 안에- 밀봉되어- 살고 있다)라는 것. 우리의 사고가 이러한 대답과 ‘구체적으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사유하는 것, 지금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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