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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은
소련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양대냉전세력의 힘겨루기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반쪽짜리 행사에 그쳤다.
하지만 85년 고르바쵸프 집권 이후로 개방개혁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냉전분위기가 차츰
풀려지기 시작하던 터에 열린 88년 서울올림픽은 동서양이 화합하 수 있는 최고의 무대가 되었던 것이고,
실지로 전세계에서 159개국 1만 3,304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여 올림픽 사상 최대 대회규모를 기록했다.
이 행사는 한국민에게는 전후 폐허가된 나라를 30년간의 노력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고,
국민적 자긍심을 세울수 있었던 것에 의미가 컸지만,
이 행사를 통해 세계의 통합과 화합에 기여했다는 역사적 의미까지 주워졌다.
이러한 전환기적인 시대에 열린 이 거대한 세계적 문화 스포츠 제전의
'중심'에는 바로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88올림픽 공식지정곡)라는 곡이 있었다.
이 곡은 그간의 살육, 전쟁, 폭력, 분쟁, 대립으로 얼룩진 인류의 아픔을 넘어서,
'하나로' 다시 나고 인류의 화합과 번영을 갈구하자는
한민족 특유의 평화의식이 담겨있었다.
이 곡이 전하고자 했던 인류의 화합과 번영에 대한 세계인의 공감대가 형성된 이유로,
일본, 홍콩, 스웨덴, 독일, 스페인 등의 17개국에서 가요차트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 곡을 중심으로 한 88올림픽 제전이 우리를 전율케 하는 것은
단순히 폐허에서 다시선 민족의 역동적 생명력을 과시하는 계기여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이뤄낸 행사를 시작으로 세계의 평화와 화합을 이룰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평화와 화합을 기원했던 그 간절한 (신)바램이 한바탕의 아름다운 꿈이라는 것은 그 직후 드러났다.
소련이 해체되고, 제국주의세력들이 약소국을 대상으로 빚어내는 갖은 야만적인 폭력을 우리는 접해야 했고,
앞으로도 인류의 그 '서로 손잡고 화합'하지 못함에 의한 참담한 미래가 예상된다.
88년의 열광으로 부터 거언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과연 역사의 어느 시점에 서 있는지를 살펴봐야할 때이다.
단순히 '내 자신'과 '우리 민족'차원에서 만이 아닌, '인류'는 어느 시점에 서 있는가.
우리는 진정 이 모든 갈등과 분열의 고통의 근원인 우리 자신의 '욕망'과 '집착'의 굴레를 벗어나서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을 수는 없는가 ...
아래를 클릭하시면 동영상이 나옵니다. =>
http://video.naver.com/2007090714541676444
손에손잡고 부르기 직전에 둥그런 원을 만들며 마스게임을 하는 장면이 1분 정도 지속됩니다.
3
나는 무엇을 얻고 있는가?
연 5일째 비가 내리고 있는 상황이다.
전날 저녁에는 무주초등학교로 들어가 수돗가 옆으로 텐트를 치고 나서
신발과 양말부터 빨았다.
비 때문에 양말과 신발이 몇 일 째 계속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꿈지럭거리면서 풍기는 발 냄새가 말 할 바가 아니었다.
빨래를 해서 말릴 방법이 마땅이 없었지만, 냄새가 워낙 심해서 물에 적셔서
우선 때 국물을 빼냈다.
계속 몸이 젖고 말릴 새 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꿉꿉하기가 이를데없다.
배낭은 물론, 침낭, 텐트, 깔판, 냄비주머니, 슬리퍼주머니 등등으로 해서
모든 장비가 습기를 한 바가지씩은 머금었다. 몸에는 곰팡이가 쓸 지경이다.
이날도 전날의 악몽은 이어졌다. 아침부터 비 떨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야 했다.
다시 젖은 양말과 젖은 신발을 신고, 역시 빗물에 젖어가는 텐트를 접어서 배낭에 챙겨 넣었다.
하루 종일 질척이는 발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볼 일을 봐야 했는데,
글피까지 비가 온단다. 아마 그날 쯤 되면 몸이 팅팅 불어 있을 듯 하다.
이렇게 옷과 신발 갈아 챙겨 입는 문제부터,
밥 먹는 것, 싸는 것, 자는 것 등등으로 하루하루가 수월하지가 않다.
수 많은 사람들과 부데끼고, 예상할 수 없었던 상황에 직면해서 쩔쩔 매고,
가끔 동물들에게도 괄시 받기까지 한다.
물론 고뇌와 난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담 너머로 풍성한 열매가지를 늘이워트린 대추나무와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아주머니가 건네는 음식들,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서의 낮잠,
기계적인 일상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은 내가 현재 접하는 일상의
비루함과 싸워 얻어내는 전리품이다.
자... 그렇담 과연 나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인가?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거나 시민단체 운동을 한다면,
방해 받지 않는 잠자리와 세끼의 밥, 빨래를 돌려 말릴 세탁기를 통해서 기본적인
생리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테고,
그로 인해 남는 시간에 보다 ‘고차원적인 고민’을 통해서 좀 더 ‘생산적’인 문제의식을
사람들과 공유할 수도 있을 터인데,
왜? 나는 이렇게 가장 기본적으로 해결되어야할 ‘의식주’문제 처리에 내 유랑생활의
상당부분을 할애하면서, 비루한 현실에 버거워 하고 있는가?
내가 이리 돌아다니면서 얻으려고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하나라도 더 갖고 높아지려는 인간의 욕망이 파괴시키는 세상 속에서
낮은 자로 살아가며 기본적인 생리작용(의식주)의 해결을 하는 과정에 여지껏의
잘 못 세워진 내 자신을 허물어트리고, 내 ‘온전한’ 인간적 원형을 발견하고 싶은 이유이고,
또 한편으로는 현대사회에 잘 적응해서 사는 많은 사람들과의 ‘부대낌’속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 면모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과 관계와 조직과 문화의 적응된 안정감 속에서는
결코 들여다 볼 수 없는 것으로, 늘상 새로운 환경과 분위기와 느낌과 자극이 있는,
항시 내 자신을 깨여 있게 할 수 있는
기회 속에서나 어렴풋이 찾아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밥 먹고, 잠을 자며, 빨래를 빨고, 길을 걷는 순간순간이 매번 새롭고 생소하게 펼쳐지는
상황과 공간과 의미 속에서 그렇게 내 자신을 돌아보고, 인간을 돌아보며, 세상을 돌아보는 것!
내 유랑을 통한 최고의 수확은 바로 이것이리라.
금산을 향해서...
무주에서 점심을 먹고 금산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무주를 나서서 길이 나눠지는 분기점에서 금산으로 향하는 길의 표지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 0010 무주에서 나서는 출구 - 금산가려면 어디로 가야한다는 말야? ]
더군다나 갈림 길 주변에 인가가 없어 사람들에게 길을 물을 수가 없었다.
[ 0020 입에 먹이를 문 청설모 한 마리가 어디로 올라야할지 몰라서 쩔쩔매는 모습.
이 녀석을 본 게 흉조였지. 그 후로 나도 한 시간을 길을 헤맸다. ]
그래서 이 길 올랐다가 잘 못 들어서 다시 돌아오고,
저길 갈까 고민하고를 반복하며 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어렵사리 오른 금산가는 길에 오른 후에 ‘돈벼락’을 맞았다.
도합 세 차례 합해서 250원을 주웠다.
만사가 잘 풀릴 것이라고 신께서 ‘힌트’를 주는 것인가?
세 번이나 길가에 떨어져 있는 돈을 줍게 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나와 같이 ‘질’보다 ‘양’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액수’가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주웠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거렁 뱅이 생활을 하면서 질보다 양을 중요시 하는 습성이 들다 보니
금전관계에 대한 개념이 흐트러지는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큰 돈 땅에 떨어져 있다고 해서 이를 기뻐하거나 함부로 줍지는 않는다.
어차피 그것은 내 돈도 아닐 뿐 아니라, 그 돈을 ‘집어들기위해서’, 혹은 ‘집어들면서’ 고개를 드는
미묘한 욕망은 그 돈을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물질적인 혜택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진 잔돈은 차바퀴에 눌리고 튀이면서
쇗가루가 될 신세이기에 기꺼히 주워서 챙겨 넣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0050 모 시내 한편 버스 정류장에 떨어져 있던 돈.
버스를 기다리며 누가 주워가는지 그냥 구경만 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이 떨어져 있는 사실을 몰랐기에 그냥 지나쳤는데,
돈이 떨어져 있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양산을 쓰며 지나가던 할머니가
후딱 달려가서 주머니에 챙겨 넣으셨다.
한편으로 내 주머니에 챙겨 넣지 못함에 아쉬움이 있었지만,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만족감은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가 절대반지를 보인 프르도에게 ‘날 유혹하지 마라!’고
신음하다가 결국은 시험에서 이겨낸 만족감의 약 79분의 1 수준이다. ]
비는 여전히 오다 말다를 반복했다.
무주 들어오면서 통과했던 싸리재 터널을 다시 거슬러 올라서 걷다가 인근 샛길 한편에
밤 송이가 제법 두툼한 듯 하여 따 먹으려 했다가 인건비도 못 챙겼다.
[ 0060 이것을 따 먹으려고 땅벌에 쏘일 뻔한 위기를 넘겼다.
니기미 인권비도 안나오겠다. ]
게으름뱅이 거미들
국도상의 가드레일에 한 뭉텡이의 거미줄이 걸려있고,
거미가 세 마리가 달라붙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이 천하의 게으름 뱅이들 얼마나 일하기 싫었으면 그렇게 한 뼘도 안 되는 거미줄에
그리 다닥다닥 붙어 사는 것인가?
[ 0090 한 뼘도 안 되는 거미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거미들 ]
어떤 거미들 보면 저 높이 5,6m 위의 전선줄로부터 가닥을 타고 내려와서
아래 쇄기둥과 전봇대를 잇는 거대한 제국을 구축해 놓고
불어오는 바람에 의연히 대처하며, 그 중심에 당당히 버티고 서있기도 한데,
저 녀석들은 어찌 저리 초라한 거미줄 위에서 저리 게으르게 먹이사냥을 한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1km 쯤 더 가서 똑같은 광경이 보인다.
[ 0100 이번에는 네 마리가 함께 산다. ]
그러고 보니 이는 녀석들 대대로 내려오는 가풍인가보다.
그렇지!
자연에는 정답이라는 것이 없고, 그 모두의 삶의 방식이 ‘존귀’하고 ‘합당’한 것인데...
나는 또 인간의 시각으로 그들을 재단하려 했구나.
‘스팩터클’하고 ‘폼나게’ 살아가는 것이 ‘멋지고’ ‘아름다운 것’인가?
인간의 삶의 방식이 하나라도 더 갖고 높이려고
그리 내 달음질 쳐온 결과로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고,
그래서 ‘덜쓰고’ ‘덜갖으며’ ‘함께사는’ 삶의 미덕을 전파하자고 돌아다니는 놈이
소탈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거미 가족에게 오히려 손가락질을 하다니.
때가 덜 빠진 것이 확실하다.
늘상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불쑥 불쑥 솟아나는 상념들이 내가
한없이 부족한 상태에 있음을 종종 말해준다.
내 부족함에 대한 깨우침을 주신 거미가족님들께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 0110 계속 폭우가 내렸었던 지라, 하천의 갈대밭도 쑥대밭이 되었다. ]
37번 국도를 타고 금산으로 향하라는 표지를 따라 10여분을 더 걸었는데,
비를 피할 곳도 없는 상황에서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난리가 아니었다.
주변 포도밭 옆에 창고가 있길래 잠시 피할 수 있을까 해서 허둥지둥 뛰다시피 들어갔다.
창고가 열쇄에 잠겨 있어서 그 지붕 밑에서 비를 피했는데,
떨어지는 비의 양이 워낙 많아서 그 자리에서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 0120 떨어지는 비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는 순간 고개를 돌려보니 무르익어가는 포도가 눈에 띈다.
떨어지는 비는 비고~ 황급히 손을 뻗어서 포도 알 몇 개를 따서 입에 쳐 넣는다.]
하지만 포도밭 창고의 지붕 밑이 도저히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아녀서
다시 도로로 나와서 ‘씩씩’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새 팔소매와 바지와 신발은 다 젖었고, 배낭에도 물기가 흥건히 젖어서
밑으로 흘러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2, 3분을 더 걸으니 농자재 창고가 눈에 들어온다.
그나마 지붕이 길게 뻗어 나와서 그 밑에서는 쉴만 했다.
하지만 지붕골을 타고 모두아 떨어지는 빗방울이 시멘트 바닥에 맞고 튀기며 물기를 튀겨 댄다.
좀 덜 튀기라고 주변에 천막 쪼가리 등을 모아서 그 자리에 댔다.
[ 0150 농자재 창고 지붕 아래서 - 빗물이 튀겨대는 통에 천막쪼가리 등을 비떨어지는 바닥에 대 놓고,
빨래 끈 두 줄을 길게 늘어트려서 그 위에 양말을 걸어 놓고 버너로 말렸다.
급히 말리다가 양말을 태워먹기도 했다. ]
일주일간 비에 쩔어 있다가 그래도 조금 마르는가 싶었던 양말과 신발이
다시 흠뻑 젖으면서 냄새를 풍겨댄다.
끈 두 줄을 가로 매어서 양말을 말렸다.
[ 0170 도로에 비 떨어져 내리는 모습 ]
쪼그리고 앉아서 비를 피하고 있으려니 궁상맞기가 그지 없다.
기온도 쌀쌀해서 몸이 웅크려 진다.
그런데 저 너머에 비둘기인지 매인지 모를 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비에도 아랑곳 않고
전선 줄 중앙에 의연히 버티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마치 인간인 나를 조롱하는 듯하다.
'못난 인간들아 비가 그리 무섭냐?' 하고...
[ 0190 떨어지는 비에 아랑곳 않고 의연히 버티고 있는 새 한 마리 ]
한 시간 반 가량을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서 궁상을 떨고 있으니,
비가 좀 잦아져서 짐을 챙겨 네시 반쯤 다시 나섰다.
다시 금산을 향하려 하는데 발등이 이상하다.
진안에서 무주로 입성하기 몇 시간 전부터 통증이 심해졌던 발등인데,
정말로 인대가 늘어났는가 보다. 온전히 걷기가 힘이 들다.
다음날 내로 우체국에서 스티커 택배를 찾아야 하는데,
비도 또 떨어져 내릴 테고, 발은 아픈 상태에서 20여 km 이동하기가 쉽지 않을 듯 하다.
고민 끝에 ‘차 얻어 타기’를 결정한다.
순식간의 이동
첫 번째 멈췄던 승합 차량은 바로 인근 마을 사시는 분들이라 그냥 보내고,
두 번째 멈춘 1톤 화물차는 대전가는 길이라며 타라 하신다.
짐칸에 배낭을 내려놓고 조수석에 앉는다.
이분은 고향이 무주이고 대전에 살고 계신데, 무주 선산에서 벌초하고 다시 대전으로 가시는 중이시란다.
고속국도를 타고 가면 빠를텐데, 왜 꼬불꼬불한 지방도, 국도를 타고 가시냐고 물으니,
시간은 두 배가 걸리지만, 그냥 그렇게 산과 들을 끼고 돌아가는 길이 좋으시단다.
그러고 보니 참 소탈하신 성격을 하신 듯 하다.
느긋이 앉아 등을 기대니, 차창 앞으로 산하가 빠르게 지나쳐 간다.
좌우로 방향이 바뀌고 언덕을 오르고 내리고, 다리를 건너고, 자전거탄 아저씨를 지나쳐 보내고,
마을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 싶더니 금세 뒤로 지나쳐 가고,
멀리 희미하게 보여지던 교각을 어느새 통과해 쉴새 없이 차는 달렸다.
책장 넘어가듯한 가로수와 산하...
걸었다면은 무수한 땀과 호흡과 발걸음과 잡다한 상념 속에 꼬박 하루가 걸릴 그 길의 끝 ‘금산’이,
십 몇분 만에 눈에 와 닿았다.
[ 0195 금산읍 입구 ]
금산 입구에서 화물차는 멈춰 섰고, 짐칸에서 배낭을 내려 매고는
‘복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말씀으로 아저씨께 감사를 대신했다.
화물차는 대전방향으로 사라진다.
금산에 도착하니 이건 정말로 도시 전체가 ‘인삼밭’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삼축제장 바로 너머로부터 인삼, 홍삼, 약재를 파는 상점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
하여간 1주일 내내 비에 쩔어 있는 몸을 씻고 옷도 갈아입기 위해서 금산읍 입구쪽에 있는
찜질방에 일찌감치 들어가서 여장을 풀었다.
금산군
금산은 충청도의 최남단이며 영.호남의 관문으로 인구 5만 9천의 지역이다.
금산은 인삼의 종주지로 지역경제 80%를 인삼 등의 약제가 담당하고 있다.
1일 거래 금액이 15억원에 달하고 연평균 거래 금액은 평균 5,683억원이란다.
강진의 ‘청자문화축제’와 경북 안동의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과 함께 문화관광부지정
최우수축제인 ‘금산인삼축제’가 이곳에서 행해지는 것도 그만큼 인삼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력이 엄청나기 때문이리라.
원래 금산의 인삼축제는 현재와 같은 모습을 한 것은 아니었단다.
인삼경작인 개인별로 ‘삼장제’라 하여 인삼포를 완성하고 인삼의 새싹이 돋아오를 때면
인삼을 이 고장에 재배토록 하여준 산신령에게 감사드리고 인삼밭의 피해를 막아 인삼농사가
풍성하게 되기를 기원하는 제사가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왔단다.
이러던 중 이 삼장제를 현대적인 조화로 전승하고, 군민 축제로 발전시키며, 인삼활용
방안의 적극적인 모색과 소비창출을 위한 목적으로 고장의 전통문화 행사로 정립시키기
위해서 조례를 제정해서, 1981년 10월 1일에 제 1회 금산인삼제를 개최했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 금산인삼축제는 산업형문화관광축제로 자리잡게 되었단다.
[ 0200 금산의 상징역시 ‘자연’과 ‘인삼’을 소재로 하고 있다 ]
9월 7일
‘가는 날이 장날’ 이라고 마침 이날부터 금산인삼축제가 시작된다기에 축제장으로 향했다.
안그래도 과거 ‘강진’에 갔을 때도 도착한 당일 날에 ‘강진청자문화축제’가 시작되는 이유로
행사 전경을 잠깐 살필 수 있었는데, 발 길에 운이 좀 있는가 보다.
우선 [인삼약초시장]은 금산천을 한편으로 끼고, 금산인삼종합쇼핑센터와 금산수삼센터
등의 주요 시설과 좌우로 끝없이 들어선 약초 상가를 통칭한다.
그 넓이는 대략 가로 500m 세로 1km 정도의 규모이다.
이 방대한 지구에 좌우로 즐비하게 늘어선 상설상가의 규모는 과히 입을 쩍 벌어지게 한다.
전국의 모든 약재상들이 이곳에 모두 터를 잡고 있는 것일까?
지역경재의 80%를 인삼을 비롯한 약재가 담당하고 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전국 인삼유통량의 80%가 금산에서 거래된단다)
인삼과 관련된 각종 전통문화의 맥의 계승이 온전히 되고 있는지는 제대로 알 수 없으나,
이렇게 인삼이 지역경제의 기반을 받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아마 인삼축제에 저절로 힘이 실리고 사람들이 모여듦으로 유명세를 탈수 있는 듯 싶다.
인삼축제장(엑스포광장)은 바로 그 인삼약초시장의 한쪽 편 금산 들어오는 입구에
인삼종합유통센터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
[ 0210 금산읍 지도 ]
배낭을 금산도서관 한편에 짱박아 놓고, 인삼축제 구경차 [인삼약초시장]으로 향한다.
나서는 길부터 벌써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들썩이는 듯 하다.
[ 0220 거리를 장식한 깃발들 ]
[ 0230 거리의 먹거리 천막 앞에서 돌아가는 통돼지구이가 축제분위기를 돋운다
[ 0240 짚신을 팔로 다니시는 할아버지 / 시골의 정취가 느껴진다. ]
(코가 막혀서 냄새를 잘 못 맞는 관계로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하지만 )약초냄새가
진동할 인삼약초시장은 입구부터 사람들로 번잡 거렸다.
[ 0300 0310 쌓여있는 약초 더미들 ]
[ 0320 도로양편으로 끝까지 늘어선 약초 상가(인삼약초시장 전경)]
[ 0330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풍경 - 인삼주 ]
인삼약초시장 입구에서부터 인삼축제장 까지
서너곳에서 각기의 행사가 진행되는 모습이 눈에 띈다.
[ 0400 인삼약초시장 입구 행사장 위에서 노래자랑 ]
[ 0410 구경하며 흥겨워 하는 시민들 ]
[ 0430 약초시장 중앙광장에서 놀이마당 ]
약초시장 상가가 딱 끝나는 지점부터 해서 천막 40여개 정도가
주 행사장까지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천막 중에서는 유료판매부스도 꽤 있었지만, 약 20여개 정도의 천막에서
‘인삼민속촌 및 인삼로드쇼’라는 이름으로 무료로 전통문화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주워지고 있었다.
그 내용은 인삼을 깎고 접는 등의 ‘인삼제조 체험’ 과
보부상체험, 도량형체험, 수결체험, 저울체험 등의 ‘인삼장터 체험’ 이 있었다.
[ 0510 0520 인삼제조체험, 인삼장터 체험장 ]
[ 0522 - 보부상 체험 장]
[ 도랑형체험 장 ]
[ 0530 산가지체험 - 조선말까지 널리 이용되던 셈도구 체험 ]
[ 0540 수결체험 장 - 수결이란 조선시대에 상민 이상의 사람들은 오늘날 서명
또는 사인이라고 할 수 있는 형태로 공문서 등에 사용했다고 한다.
손바닥을 펴서 놓은 후에 붓으로 그 가를 뺑둘러 표시한 후에
그 중간에 자신의 이름이나 표식을 넣는 것이다. ]
[ 0550 둥글이도 수결체험 ]
[ 0560 인삼씨앗 고르기 체험 - 젓가락으로 인삼씨 골라내기 ]
[ 0600 축제장에는 과거만 재현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 살아있는 인형 판토마임 ]
[ 0650 가장 눈에 띄는 이색적인 풍경 - 인삼종합유통센터를 배경으로 인삼주를 담그고 있는 모습.
시민들 아무나 참여해서 잔에 술을 담아 인삼주 담는 작업에 함께 참여 할 수 있었다. ]
둥글이가 ‘자이언트인삼주통’이라고 명명한 저 술통은 술주정뱅이의 로망이겠지?
저 통 아래에 ‘졸졸졸’ 술떨어지게 끔 구멍을
내서 그 아래 누워있으면 나는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 0670 주 행사장에서는 외국인 신랑신부들을 대상으로 해서 전통혼례식이 이뤄지고 있었다. ]
[ 6750 행사장 한편에서는 아이하나가 굴렁쇄 던지기 놀이에 빠져있다. ]
대충 행사장을 돌아가는 길에 반가운 장면이 눈에 띈다.
인삼주 무료 시주코너~
[ 0700 아무나 가서 그 앞에서 침 꼴딱 꼴딱 삼키고 있으면 한잔씩 따라줌~ ]
마다할리 있는가 냉큼 가서 한잔 받아먹었다.
쌉싸름하니 톡 쏘는 맛과 인삼향이 괜찮다.
지역의 향토 음식을 ‘온전히’ 체험하고
금산 경제부흥에도 일조할까 해서 한 병 사 들이키려다가 꾹 참았다.
몇 발짝 더 가니 인삼튀김을 판다.
한 개에 천원이다. 정력보강차원에서 하나 사서 베어문다.
[ 0710 인삼푸드관 전경 ]
구경을 마치고 다시 인삼약초시장을 거쳐 돌아오는 길에 외국인들이 눈에 띈다.
[ 0730 약초를 눈여겨 들여다보는 외국인 ]
또 한편에서는 떡치는 아저씨가 ‘떡쳐~’하고 소리를 지른 후에 인절미 반죽을 내리쳐댔다.
[ 0740 떡치는 아저씨 ]
좀 더 가니 축제의 흥을 북돋기 위함인지 도로변을 말들이 거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0750 파란불 직진~ ]
저녁에는 읍 외곽에 도로 보수공사를 위해서 통행을 임시로 막아 놓은 도로 가에 텐트를 쳤다.
식수는 따로 물통에 담아오기는 했고, 인근 산자락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이 있어서
발을 씻고 설 걷이 하기가 용이했다.
[ 0800 공상대기중인 도로변에 텐트를 치고 ]
그런데 영 하늘이 불안하다. 구름이 가득 껴 있다.
근처에 비 피할 곳도 없기 때문에 비 떨어지면 끝장이다.
하지만 금산읍내 여기저기를 돌며 대충 확인해 본 바
지붕있는 텐트 칠 만한 곳이 아직 눈에 안띄니 어쩔 수 없다.
[ 0810 하늘에 가득한 구름 - 비떨어지면 끝장이다. ]
그나마 대기는 안정적이고 바람은 불지 않아서 다행이다.
[ 0820 보통 취사는 텐트 안에서 하곤 한다. 왜냐하면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어오면,
버너의 불 빨을 냄비가 제대로 받지 못해서 밥이 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날은 대기가 안정되어서 버너의 불꽃이 곧게 뻗어 올라갔다. ]
공사 대기중이라 좌우를 막아 놓았길래, 사람도 안다니는 줄 알았더니,
오토바이, 자전거 등을 타고 이동하는 사람이 솔찬히 된다.
더군다나 운동코스로 애용되는 곳인지 츄리닝 복장으로 팔을 힘차게 내두르며 지나는 이들이 상당하다.
혼돈의 청소년기
아홉시 쯤 넘어서 텐트 안에 누워있는데, 농구공 하나가 튀기는 소리가 들린다.
주번에 사는 학생 하나가 산책 겸, 운동 겸으로 해서 나온 듯 했다.
그런데 녀석은 내 텐트 주변 20여m 지점에 와서 불규칙한 괴성을 지르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녀석이 나에게 시비를 걸려고 하는 줄 알고 여차하면 '발진'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듯 싶더니, 혼잣말로 절규하듯 외치는 것이다.
‘내 꿈은 무엇입니까? 난 나중에 무얼 하고 있을까?’
갈등과 혼돈이 가득 내재 된 사회 속에서, 불안에 몸부림 칠 수 밖에 없는
한 청소년의 그것이 마음에 전해왔다.
학교와 가정이 그에게 주는 생의 목적과 인생의기준이라는 것이,
삶에 있어서의 수 많은 기회와 가능성과 직관과 아름다움과 풍요를 거세한
‘많이 갖고 많이 쓰면서 폼나게 사는 수준의 것’일 것이기에,
아직 기성사회의 이해와 가치와 욕망의 길을 따라서만 에너지를 고착시키는 방법에
익숙치 않은 그는,
그리 허공을 향해서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회의를 쏟아 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방황하는 수 많은 청소년들 역시 마찬가지 이리라.
가족과 학교와 문화와 사회가 가하는 압력과 기준을 수용하며 받아들일 여력이 없는
‘기질’, ‘가정-경제환경’을 가진 이들은 필연적으로 일상의 괴리를 겪게 되고,
이에 무수한 갈등과 방황이 이어지게 된다.
자신들이 원한 삶이 아니었음에도 기성사회가 그들에게 강요하는 가치기준과 생활양식을
받아들이고 그에 굴종해야 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 대부분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어떻게 ‘그들’이 그들만의 길을 온전히 가게 도울 수 있을까?
어떤 ‘사회’가 그들에게 그 길을 온전히 트여줄 수 있는 것일까?
남들이 가는 대로의 똑같은 길을 가지 않으면 ‘낙오자’로 불도장을 찍어내는
이 독특한 집단주의와 획일주의와 물질주의가 인간의 영혼을 파먹는 이 야만의 사회에서...
앗어라~ 나는 내 길을 가기도 버겁구나.
9월 8일
텐트 너머로 햇살이 느껴진다.
지퍼를 열어 하늘을 올려다 본다. 해가 떴다.
거언 10일만에 접하게 되는 해다.
해가 저리 동그랗고 저리 밝은 줄을 미처 알지 못했었다.
[ 0830 오랜만에 떠오르는 태양. 네모 모양이었는지, 동그라미였는지도
기억이 잘 안날만큼 그리 오랫동안 구름 뒤편에 감춰져 있었지. ]
아침 햇살 받으며 할머니 한분이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나서신다.
한편으로 젖은 양말과 신발들을 늘어놓고, 토요일 아침의 한가함을 만끽하며
아홉시가 다 되도록 빈둥거린다.
금산천
금산의 중앙에는 금산천이 흐른다.
이 금산천은 금산읍양지리 열두봉재에서 발원해서 금강으로 흐르는데,
정비사업을 통해서 깔끔한 모습을 갖춘 상태였다.
[ 0900 0910 0920 금산천 전경 ]
그런데 그 거세게 흐르는 물줄기의 반대방향으로 뭔가가 튀어오르는 것이 눈에 띈다.
처음에는 물방울이 좀 튀기는가 했다.
하지만 '고기'였다.
물이 그리 거세게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잘한 고기들이 이를 거슬러 오르려 하고 있었다.
[ 0930 튀어오르는 저 고기들이 연어 새끼들인가? ]
이들이 목적하는 곳까지는 그들의 진군을 방해하는 수 많은 '벽'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몸을 뒤틀어 순간적으로 튀어 올라 한단 한단 그 벽들을 넘어 오른다.
한번에 거슬러 올라가면 좋겠지만, 도약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 중간쯤에 떨어지면,
비늘이 둘러쌓인 민감한 몸이 시맨트 바닥에 그대로 패댕이 쳐진다.
포기하지 않는 끝없는 시도를 통한 기술적인 '필연'과
시맨트 바닥에 몸이 패댕이쳐져서 상처받지 않을 재수좋은 '우연'의 가능성이 조합된 결과
몇몇의 고기들만 그 '끝'(목적지)에 다다르겠지?
경의로운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이들이여...
[ 0925 밥을 먹고 나서 잠시 쉴 겸 신발을 벗어서 햇빛에 말리고,
다리 아래쪽 그늘이 비추는 곳에서 발을 담궜다. 시원~시원~ ]
[ 0945 금산천 양옆 둑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팔을 벌리고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는데,
20여 m 정도 간격마다 평상이 하나씩 놓여져 있어서 마을 분들과 지나는 나그네가
잠깐씩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었다. ]
[ 0950 잠시 쉬고 있는데 새 두 마리가 보인다.
새 종류는 ‘참새’와 ‘독수리’와 ‘닭’밖에 구분 못하는 사람이라서... ㅠㅜ 무슨 새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녀석이 매미를 잡아다가 삼키려고 하니, 옆에 있는 녀석이
‘이 새꺄 혼자만 쳐 먹지 말고 좀 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자 잠시 후에 녀석이 먹을 것을 옆에 놈에게 넘기는 것이다.
등치는 비슷하게 보여도 아마 먹이를 물고 있는 것이 어미인가 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왼쪽 녀석이 낸 소리는 ‘이 새까...’가 아니라,
‘엄마 저도 먹을 것을 좀 주어요’였던 듯 하다.]
저녁 야영
학교로 숨어 들어가려다가 괜히 야영 중에
쫓겨나는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서 인근 다리 밑으로 갔다.
어두컴컴한 다리 아래쪽에 당도하니 새로로 하수도물이 흘러 금천천에 다다르는데,
그 하수도랑의 깊이는 알 수 없으나 폭이 1m 50 정도 되어 보였다.
텐트를 치기 위해서는 넘어야할 난관이었다.
맨 몸으로는 한발 들고도 뛸 수 있는 거리였지만, 짐을 맨 상태로 도약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뛰다가 그 속으로 폭 빠지기라도 하면 유랑생활이 끝장날 수도 있는 판이었다.
하지만 ‘모험은 나의 것!’ 용기를 내어서 가까스로 그 하수도랑을 뛰어 넘은 후에
적당한 시멘트 바닥에 판을 깔고 그 위에 텐트를 세웠다.
[
1000 다리 밑 야영장 ]
바로 옆으로 흐르는 금천천의 물줄기 굽이굽이 흐르는 소리가 귀를 계속 때려댔고,
금천천으로 스며드는 생활하수의 악취가 이따금 코끗에 흔적을 남겼지만,
무리 없이 잠에 들 수 있었다.
9월 9일
아침에 일어나서 텐트를 열어 보니 체 아침 안개가 걷히지 않은 풍경이 눈에 띈다.
[ 1110 다리 너머로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은 모습 ]
짐을 챙겨서 둑 위로 오르려는데, 어제 ‘생사’를 걸고 뛰어 넘었던
하수도랑의 실체를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 1120 하수도랑의 실체 - 밤이라 잘 안보였고, 언듯 하수도 물 흐르는 윤곽이 보여서
온통 하수도랑인 줄 알고 목숨 걸고 (사진의 오른쪽)뛰어 넘었는데,
두발짝만 방향을 돌렸으면, 그냥 걸어 지날 수 있는 길이었다.
‘밤은 인간을 위험으로 이끌고, 무지는 인간을 야만으로 향하게 하네~(둥글이)‘ ]
존재감
특히나 (겨울에)춥거나 비가 오는 날이라면 아침에 일어나서 그 추위와 비를 피하기 위해
관공서 등의 앞에서 두 어 시간 죽치고 서서 기다려야 하고,
밤에는 야영장소를 물색한 후에 텐트를 세우기 위해서 어둑해지고 사람의 자취가 끊기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데 이때의 ‘빈’ 시간이 주는 공허감이 상당하다.
텐트를 세우고 나서도 홀로 암흙의 중심에 놓여진 내 자신을 대면해야 하는 것도
여간 곤욕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일상적 생활의 공간에서는 그러한 ‘공허함’은 아예 존재하지가 않는다.
짜여진 계획이나 친근한 분위기, 일할 장소, 익숙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늘상 내 자신을 ‘안정’?하게 매여 놓는다.
물론 이는 ‘안정’이라는 표현 보다는 ‘번잡’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익숙한 ‘주위의 사물’ ‘사람’ 등을 통해서 내 자신을 가만히 두지 못하게
끊임없이 자극해 왔기에, 뇌가 자극을 받아서 스파크가 일어나는 상태를 ‘안정’쯤으로
여기는 듯 하고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불안’을 느끼는 듯 싶다.
어쨋거나 그러한 ‘번잡’한 ‘안정’ 상태에서 나는 ‘평안’을 얻어왔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갖고 높이려는’ 인간적인 욕망이 부추겨져서 세워진 세상에서,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류의 속담을 부모들로부터 들어오고,
학교 교육에 의해서 ‘좀 더 많이 갖기 위한 효과적 기술의 체계’를 세우며,
‘노동한 만큼 댓가를 받는 자본주의적인 사회체제’의 통념을 몸소 경험해 왔음에
‘쉴새 없는 자극’을 받고 ‘분주한 활동’을 하지 않는 시간에 ‘공허’가 몰려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끝간데 없는 욕망을 쫓아 쉴새없이 스스로를 자극하고 채우고 높인다면,
즉, 자본과 권력으로 돌아가는 사회관계에 철저히 적응해서 아무런 회의도 없이
그에 하나로 일상에 적응된다면, 그러한 ‘공허’와 ‘상실’을 맞볼 이유는 없을 터이다.
그러한 일상에 적응된 삶이 개인에게 가끔씩 감성과 사고의 괴리를 발생시키고,
의식의 원형은 보다 현명한 길로 인도하기 위한 다양한 직관을 종종 제공 하기는 하지만,
적응된 가치와 관점은 이를 쓸데없는 생각으로 여길 것이고,
그 ‘잘~’ 닦여지고 ‘명확히 눈에 보이는 일상의 길’로 다시 들어서게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상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작심’하고 ‘더 갖고 높이려는’ 사회관계의 역학을 벗어나서,
그 역학이 머릿속에 심어 놓은 관성을 털어내고,
우선적으로 ‘비우고 낮추려는 노력’을 고도화 해야 한다.
이렇다면 ‘할일 없는 순간’의 ‘공허함’마저도 온전히 대면하고
내 안에 품을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전까지 느끼는 존재감은 허구이리라.
나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10월 10일
금산초등학교에서 하루 묵었다.
전날 저녁에 수돗가 근처로 찾아 들어 텐트를 쳤는데,
밖에서 볼일 보고 오시는 주사님의 오토바이 헤트라이트에 그대로 포착이 되었다.
순간 ‘뜨끔’했다.
급히 사태수습차 고개를 조아리고 사정말씀 올렸더니, ‘혼자서 고생한다’고 하시면서
신분을 확인하고 가셨다.
하루일과 끝~
그렇게 맘편히 푹 쉬고 아침에 일어나서 금산초교 앞 캠페인을 위해 섰다.
[ 금산초교 캠페인 ]
[ 3000 정문 전경]
통행량이 많은 후문에 자리 잡고 섰다.
중 고등학생들도 지나가는 지라 건네줄까 말까 고민했다.
욘석들은 초등학생들 보다 더 질서의식이 없는 경우가 있어서
받은 스티커를 바로 바로 찢어 발겨서 거리에 버릴 때가 상당하다.
그래도 그 표정의 선량함과 순수함을 믿고 20여 장 정도 지나가는 중고생들에게 나눠줬는데,
나중에 보니 40% 정도가 버려진 듯 하다.
‘첫 고객’에 대한 인상 역시 좋지 않았다.
중학생 또래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걸어 오길래,
나름 상냥한 표정과 말투로 스티커를 건넸는데 벌레 보듯이 위아래 흝더니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쌀쌀맞게 지나쳐 가는 것이다.
이런 때는 속에서 ‘울컥’거린다.
한편으로 좁은 속이 만들어내는 알량한 자존심이 아우성치고,
한편으로는 ‘어른이 애써 말하면서 건네는데 버르장머리 없이...’라는
권위주의적인 발상이 고개를 들어, 서로 복잡히 어우러져서 묘한 심경을 만들어 낸다.
물론 그것을 밖으로 표출해 내지는 않는다.
상대가 그렇게 나오는 것은 그의 ‘자유’임으로...
하여간 이런 상황에서는 ‘얼른’ 심정을 수습해서 ‘다음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한다.
‘내가 애써 만들어 건네는 스티커를 상대가 당연히 받을 것’을 전제했기 때문에,
받지 않고 쌀쌀맞은 표정으로 지나가는 것에 불만이 생겼던 것이다.
앞으로는 캠페인 준비하면서 교문 앞에서면서 그 절대적 ‘전제’부터 바꾸어야겠다.
‘이론상으로 한사람도 안 받을 수 있음으로 한시간 내내 한명만이라도 받아주면 기쁘게 여기자!’는 식으로...
하여간 첫 고객에 대한 인상이 그래서였는지, 등교하는 아이들에게서도 별로 생동감을 느끼지 못했다.
전형적인 도시 아이들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보통 군 단위 아이들은 고장을 둘러싼 수려한 자연과 농촌문화가 제공해 주는
해 맑고 순수한 모습을 조금씩 간직하고 있곤 한데,
금산이라는 지역은 인삼과 약초로 경기가 좋고 상가형성이 든든히 되면서
아이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기심’이 들어차서 그런지,
왠지 경계하는 표정, 무뚝뚝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아이들의 비율이
다른 곳에 비해서 높은 듯 했다.
스티커가 거의 떨어져 갈 무렵 예닐곱명 아이들이 내쪽으로 몰려나와
종류별로 스티커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는데, 남은 양이 없어서 한 장씩만 건네고 말았다.
끝나고 휴지를 주우려고 다니다 보니, 아이들 한 무리가 버려진 스티커 중에서
‘성한 것’이 있는가 하고 운동장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싸늘함
금산에서는 유난히 불편한 모습을 많이 대하게 된다.
첫날 찜질방에서 자는데 홀에서 떠드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가마 내에서 귀에
윙윙 울리게 전화를 해대는 통에 이 가마에서 저 가마로 이동을 했었고,
다시 새벽녘에 ‘저 가마’에서도 또 전화를 해 대는 통에 다시 홀 한쪽 구석으로 나가 잤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또 이런 저런 사업상의 문제로 책장 사이에서
대여섯 차례 넘게 전화를 하는 아저씨,
도서관 전산실 바닥에 침 뱉는 초등생 등을 접했다.
우체국에서는 택배물품을 보내려고 상자를 올려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늦게 온 아주머니가 저울 위에다가 우편물을 먼저 올려놓는 것이다.
‘먼저 왔는데요’라고 얘기를 하자, 불쾌한 듯이 다시 들어서 옆의 저울로 휙 던져 놓는 것이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시골아이들 답지 않게 좀 냉냉한 것도 눈여겨본 상황이다.
몇 일 동안 묵었던 경험을 통한 이런 판단이 객관성이 있겠냐만은
인삼약초 시장의 형성으로 인해서 돈이 몰려들다 보니 지역 주민들의 마음의 평온함이 깨진 것일까?
하여간 군단위 지역 답지 않게 시끌 뻑짝한 도시 분위기와 활기를 띈 상가가 눈에 띄는 만큼
군단위 지역 답지 않은 싸늘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오후
우체국에서 볼 일을 보고 있는데, 목탁 소리가 갑자기 들린다.
입구로 들어온 스님 한분은 중앙에 서서 목탁을 두드리기 시작하신다.
[ 2100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 ]
일반 가게도 아니고 그렇게 서서 목탁 두드린다고 ‘주인’이 와서 보시해줄 것이 아닌데도,
그렇게 한동안 두드리다가 그냥 말없이 나가신다.
보시를 받으로 온 것이 아니라, 우체국에 그냥 축복을 전하로 오신 건가?
[ 2200 금산읍의 우체국 사거리 한편에는 거대한 느티나무 두주와 정자가
쉴만한 장소를 제공해 준다. 상가의 중심지에서 이렇게 한산한 풍경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
[ 2400 금산천 아래편에 내려와 낮잠을 즐기면서 보니, 전전날에 야영했던
다리 밑에서 어르신들 회합이 있는 풍경을 살필 수 있었다. ]
[ 2410 금산천 주변의 한가로운 풍경 ]
저녁에 다리 밑에서 야영을 하려고 배낭을 열고 보니 이상하게 안쪽이 물에 젖어 있는 것이다.
바로 직전에 인근의 민가에서 물을 받아왔기 때문에 물통 둘레에 묻은 물기가
조금 배일 수는 있었지만, 정도가 심하다.
물통을 자세히 보니 통이 꺾인 부분이 깨져서 그리로 물이 흐르는 듯 했다.
수 많은 짐들의 한편에서 부데끼는 압력들을 지난 1년간 견뎌내기 쉽지 않았으리라.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은 참으로 위대하면서도 어처구니 없다.
1회용으로 사용하는 물통을 이리 튼튼히 만들어 내다니.
저녁에 야영지를 찾아 들어갈 때 그 안에 물을 가득 머금어,
쌀을 씻고 식수를 제공하며 다음날 아침 양치물 까지 제공했던 물통아!
잘가라 !
[ 2420 1년을 함께 했던 물통 ]
아직 햇빛이 남아 있어서 젖은 물건들을 꺼네서 바닥에 말린다.
[ 2430 저녁 다리 밑 야영지 풍경 ]
금산천 흐르는 저녁의 노을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 2450 금산천에 내리 깔리는 노을 ]
[ 2600 금산천의 맑은 물 ]
[ 어둠이 오는 풍경 ]
- 2007년 9월 11일 충청남도 금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