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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종합교양 [21]
한국사 용어해설
분량이 아주 많으니... 슬~~슬~~~ 읽어 가세용~~ v^^V
간경도감 [ 刊經都監 ]
조선 세조 때 불경을 번역하고 간행하던 기관.
1461년(세조 7) 왕명으로 설치되어 1471년(성종 2)까지 존속하였다.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불교를 선호하여 세종의 불서편찬과 불경간행을 도왔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특히 왕위찬탈을 속죄하려는 마음에서 더욱 불교를 믿었다. 1457년 《묘법연화경》을 간행하고, 1458년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꺼내 전국 사찰에 분장하였으며, 1459년에는 《월인석보》를 간행하였다. 이렇게 불경 간행의 업적을 쌓은 뒤 1461년 설치하였다.
고려의 대장도감과 교장도감을 참고하여 중앙에 본사(本司)를 두고 지방 여러 곳에 분사(分司)를 두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분사로는 안동부․개성부․상주부․진주부․전주부․남원부 등이 있다. 직제는 도제부․제조․사․부사․판관 등을 두었는데, 관리는 약 20명이고 총 종사자는 170여명에 이르렀다. 또 이 일에 30일 이상 종사하면 도첩을 주어 승려가 되게 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유명한 승려와 학자를 초빙하여 불경을 번역하고 간행하는 일이 주된 사업이었으며 불서를 구입하거나 수집하고, 왕실 불사와 법회를 관장하기도 하였다. 불경 발간은 한문본 발간과 한글 번역본 발간의 두 종류로 나뉘었다. 한문본은 특히 고려 때 조성된 《속장경》을 판각하는 일이 주업무였다. 거의 대부분의 업무를 세조가 관장하였고, 신미․수미․홍준 등의 승려와 황수신․김수온․한계희 등의 학자가 실무를 맡았다. 1470년 세조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성종이 즉위하자 그 이듬해 폐지되었다.
이 때 발간된 한문불경으로는 《금강반야경소개현초》 《대반열반경의기원지》 《대승아비달마잡집논소》 《묘법연화경찬술》 《화엄경론》 《사분률상집기》 《대방광불화엄경합론》 《노산집》 등이 있고, 한글번역 불경으로는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선종영가집언해》 《법어언해》 《금강반야바라밀다경언해》 등이 있다. 이들 경전은 불교 보급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한글로 번역한 언해본은 불교학 연구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의 우리말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갑신정변 [ 甲申政變 ]
1884년(고종 21)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1. 배경
조선 후기 이래로 조선시대의 사회는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자본주의의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가 일고 있었고,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위협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중인출신 지식인과 양반관료들 사이에서는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깨닫고 세계역사의 발전방향에 따라서 사회를 이끌려는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다. 이 사상에 따라 내외정치를 개혁하려고 결집된 정치세력이 개화파이다. 김옥균 ․박영효(朴永孝)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등 양반출신 청년지식인은, 19세기 중엽 박규수(朴珪壽) ․오경석(吳慶錫) ․유홍기(劉鴻基:본명 劉大致) 등의 사상과 그들로부터 받은 서구사회에 관한 문명서적을 통해서 실학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정세의 흐름 및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개항 이후 개화파들은 민씨정권의 개화정책에 참여하면서 점차 김옥균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개화사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려는 하나의 정치세력 즉, 개화파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개화파 안에서는 개혁의 궁극적 방향을 같이하면서도 실현방법에서 입장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김홍집(金弘集) ․어윤중(魚允中) ․김윤식(金允植) 등의 온건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민씨정권과 타협 아래 청과의 사대외교를 종전대로 계속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방법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급진개화파는 청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우선과제로 삼고 민씨정권도 타협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개화파는 개항 후 전개되는 나라 안팎의 정세변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충의계(忠義契)를 통하여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개혁운동의 수단으로서 당시 서구의 근대문물에 관심을 표명하던 고종에게 적극 접근하였다. 특히 1880년 이래 조선정부의 해외시찰정책, 즉 일본수신사와 신사유람단의 파견, 청으로의 영선사 파견 등에 박영효 ․김옥균 등 개화파가 적극 참여함으로써 세계의 정세흐름과 새로운 문명을 직접 확인하고 자각을 넓혀 나갔다. 또한 개화파는 양반의 자제뿐만 아니라 광범한 층의 청년을 모집하여 일본의 군사사관학교와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등에 유학하게 하여 근대적인 군사학과 학문 ․사상 등을 배우게 하였다. 박영효는 1883년 8월 외무아문 아래 박문국을 설치하여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하였다. 이 신문을 통해서 개화파는 나라 안팎의 정세에 관한 소식은 물론, 구미의 입헌군주제와 삼권분립의 우월성 등 그들이 지향하는 개혁의 내용을 선전하였다. 그런데 민씨정권이 부분적인 개화정책을 실현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과 청의 침탈이 강화되면서, 개화파의 평화적 개혁노력은 벽에 부딪혔다.
1882년 임오군란은 수구적인 민씨정권과 급진개화파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급속히 냉각시켰다. 민씨정권의 요청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출병하여 봉기를 진압한 뒤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침략을 획책했고, 민씨정권은 청에 의지하여 정권유지를 꾀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개화파는 큰 위협적 존재였다. 이 때문에 민씨정권은 개화파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가하였다. 이런 정세 아래 민씨정권에 참여하면서 평화적으로 일대개혁을 꾀하려던 개화파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1884년 봄 안남(安南)문제를 두고 형성된 청과 프랑스의 대립관계는, 개화파에게 다시 한번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있는 유리한 정세를 만들어주었다. 마침내 1884년 8월 베트남에서 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3,000여 명 가운데 절반을 철수시켰다. 한편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축출하려는 일본은 민씨정권과 대립하던 급진개화파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2. 준비
급진개화파는 이러한 정세변화와 일본의 접근에 다시 용기를 얻었다. 1884년 9월 17일, 박영효의 집에서 김옥균은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자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이제 민씨정권의 친청수구정책에 대항하여, 종래의 평화적 방법에 의한 개혁에서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일시에 권력을 장악하여 개혁을 실현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홍영식이 총판(總辦)으로 있던 우정국 개설 피로연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일본사관학교의 유학생, 종래의 신식군대 가운데 자신들의 영향 아래 있는 조선군인을 동원하기로 하는 등 정변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켰을 때 민씨정권을 비호하는 청군의 반격에 대한 군사문제와 자신들이 개혁정책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재정확보문제를 일본을 이용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일본 역시 개화파의 군사․재정 문제를 도와, 조선진출에 걸림돌이던 청과 민씨정권을 내몰고 조선침략에 우위를 차지할 속셈으로 일본군대의 동원과 차관을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약속하였다.
1884년 10월 17일 오후 6시경, 급진개화파들은 우정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민씨척족 세력을 제거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왕과 왕비를 창덕궁에서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겨 일본군 200명과 50여 명의 조선군인으로 호위케 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정변에 성공한 개화파는 민씨세력을 제거한 뒤 그 동안 민씨정권에게 소외되어 왔던 왕실의 이재선(李載先)을 궁으로 불러 정변의 취지를 설명하고 왕실과 연합정부 구성을 제안하였다. 개화파와 왕실은 새정부 구성을 위한 인물 배정에 착수하는 한편, 각국 공사관에도 정변의 뜻을 전달하고 지지를 요청하였다.
3. 새정부 구성과 14개조 정강
급진개화파는 이튿날인 10월 18일 새정부 조직과 구성원을 발표하였다. 새정부는 형식적으로는 왕실과 연합한 형태를 취했지만 실제로는 개화파가 개혁추진을 위한 중요한 자리를 장악한 급진개화파의 권력이었다. 최고 권력기관인 의정부의 좌의정에는 홍영식이, 군사․사법․경찰․외교․통상․인사․재정 등 정부 중추기관의 자리에는 김옥균(호조참판)을 비롯하여 박영효(전후영사 겸 좌포장), 서광범(좌우영사․우포장 겸 외무독판 대리), 서재필(병조참판 겸 정령관), 박영교(朴泳敎:도승지) 등이 배치되었다.
이어 10월 19일에는 새정부가 앞으로 단행할 개혁정치의 내용을 담은 14개조로 된 ꡐ신정강ꡑ을 발표하였다.그 내용은, ①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 ②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여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③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고 간리(奸吏)를 근절하며 빈민을 구제하고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④ 내시부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 ⑤ 전후 간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⑥ 각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면제할 것, ⑦ 규장각을 폐지할 것, ⑧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⑨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 ⑩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시킬 것,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 육군 대장은 왕세자로 할 것, ⑫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재정 관청은 금지할 것, ⑬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하여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집행할 것, ⑭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갖는 정강은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그 동안 조선의 개혁을 위해서 발전시켜온 개화사상과 그에 따른 정치적 개혁활동의 총체적 표현이었다.
4. 의의와 한계
갑신정변은 ꡐ삼일천하ꡑ로 끝나고 말았다.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명성황후가 청(淸)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서울에 남아 있던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10월 19일 오후 3시경 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를 공격하였다. 이때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개화파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일본군인을 철수시켰다. 결국 홍영식․박영교 등은 청군에게 사살되고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이른바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정변이 실패한 뒤 일본측은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데 대한 책임을 조선정부에 물었고, 1885년 1월 9일 두 나라는 조선의 일본에 대한 사의 표명, 배상금 10만 원 지불, 일본 공사관 수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또한 일본은 1885년 4월 18일, 청나라와 조선에서 청․일 양국군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天津]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청나라와 같이 조선에 대한 파병권을 얻게 되었고, 10년 뒤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의 파병 구실이 되었다.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은 개화파가 위로부터 시도한 최초의 개혁운동이었다. 신정강에서 구체화된 개화파의 개혁 구상은 정치면에서 대외적으로 청나라와 종속관계를 청산하려 하였고 대내적으로 조선왕조의 전제주의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려 한 정치개혁이었다. 사회면에서도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여 중세적 신분제를 청산하려 하였다. 경제면에서는 개화파들이 지주전호제를 유지하는 선에서 국가재정를 강화하려고 지조법의 개혁만을 내세웠다. 상공업면에서도 자본주의적 기업의 육성 문제나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직접적인 원인은 청군의 간섭 때문이었다. 그 밖에 정변 자체가 민중에 뿌리박지 못한 개화파의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도 한 몫을 하였다.
한 예로 지조법 개혁방침은 종래의 지주제를 인정한 위에서 세제개혁의 차원에서만 토지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당시 반봉건 투쟁에 가장 철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민중을 고려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정변 당시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이는 급진개화파의 대다수가 봉건 대지주에 기반을 둔 계급적 한계에 기인한 것이었다. 나아가 개화파의 계급적 한계는 지주제 존속을 바탕으로 조선사회의 식민지화를 획책하던 구미열강과 투쟁할 내적 근거를 박약하게 하여 구미열강의 침략성에 철저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곧 정권탈취와 개혁에 일본을 이용하려던 그들의 주관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침략자를 원조자로 끌어들이게 되었고, 결국 일본의 배반으로 정변을 실패로 이끈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건설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고, 단계적으로나마 국민주권주의를 지향한 최초의 정치개혁운동이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갑오개혁 [ 甲午改革 ]
1894년(고종 31) 개화당이 집권한 이후 종래의 문물제도를 근대적 국가형태로 고친 일.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한다. 2차에 걸쳐 봉기한 반봉건 ․외세배척운동으로서의 동학농민운동이 실현되지 못한 가운데 이를 진압할 목적으로 정부는 청 ․일 양국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 양국은 더 이상 조선에 주둔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에 청은 일본에 대해 공동 철병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일본은 오히려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內政)을 개혁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청의 거절로 회담은 결렬되었고 청 ․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일본의 승리로 끝난 전쟁의 결과 조선에서의 청의 종주권(宗主權)은 부인되었고, 대신 일본의 지배를 전적으로 인정해 주는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을 체결함으로써 청국의 조선에 대한 세력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이후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내정개혁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침략정책 추진상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밝히고,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확립된 정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일파를 축출하였으며,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개화파의 친일정부를 수립하여 국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노인정회담(老人亭會談)에서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5개조 개혁안의 제출로 시작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교정청(校正廳)에 의한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
그러나 1894년 7월부터 대원군의 섭정이 다시 시작되어 제1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었으며, 김홍집 ․김윤식(金允植) ․김가진(金嘉鎭) 등 17명의 회의원으로 구성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라는 임시 합의기관이 설치되었다. 이 기관은 중앙과 지방의 제도 ․행정 ․사법 ․교육 ․사회 등 제반문제에 걸친 사항을 3개월 동안 208건을 심의 의결하는 개혁의 주체세력이 되었으며, 정치제도의 개혁을 단행, 개국기원(開國紀元)을 사용하여 청과의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1차개혁 때에는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宮內府)로 구별하고 종래의 6조(六曹)를 8아문(八衙門)으로 개편,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하였다. 2차개혁 때는 의정부를 내각이라 고치고 7부를 두었다. 인사제도는 문무관(文武官)을 개편하고 월봉제도(月俸制度)를 수립하였으며, 과거제도를 없애고 새로운 관리임용법을 채택하여 종래의 문무 ․반상(班常)의 구별을 폐지하였다. 지방제도의 개혁은 8도(道)를 23부(府)로 고쳤다가 다시 13도로 고쳤다. 지방관으로부터 사법권과 군사권을 박탈함으로써 횡포와 부패를 막아 지방행정체제를 중앙에 예속시키는 근대 관료체제를 이룩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재정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탁지부(度支部)에서 관장하여 재정의 일원화를 꾀하였다. 또 신식화폐장정(新式貨幣章程)에 의한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조세의 금납화(金納化) 실시와 도량형(度量衡)을 개편하여 일본식으로 통일하였다. 군사제도는 군대수와 무기의 제한 등 지엽적인 것만을 개혁하여 1910년 국권이 피탈될 때까지의 병력이 불과 9,0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아 독립국가로서의 군대기능은 미약하였다. 사법제도는 행정기구에서 분리시켜 재판소를 설치하고 2심제(二審制)가 채택되었다. 1심 재판소로서 지방재판소와 개항장재판소(開港場裁判所)를, 2심 재판소로는 고등재판소와 순회재판소를 설치하였고, 왕족에 대한 형사재판을 위해서 특별법원을 두었다. 서울에 경무청(警務廳)을 두어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고 지방은 각 도 관찰사 아래 경무관을 배치하여 치안을 맡아 행정과 경찰권을 구분하였다.
이 개혁의 중요한 내용은 사회적인 개혁에 있다. 반상(班常)의 계급타파, 문벌을 초월한 인재의 등용, 인신매매의 금지, 천민대우의 폐지 등 전통적인 양반체제 하에서의 신분제도를 철페하였다. 이 외에 죄인의 고문과 연좌제(連坐制)의 폐지, 조혼금지, 자유의사에 의한 과부의 재혼, 양자제도의 개정, 의복제도의 간소화 등 인습적인 전통을 근대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이와 같은 갑오개혁은 조선 개국 이후 500년을 이어온 구제도를 일신한 제도상의 근대적 개혁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일본의 침략적 의도에 따라 강행된 타율적인 개혁이므로 국내의 항일세력은 크게 반발하였다. 또한 일본의 자본주의가 침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게 되었고 이와 함께 친러적인 세력이 등장하여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강화도조약 [ 江華島條約 ]
1876년(고종 13) 조선과 일본간에 체결된 수호조약.
한 ․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종래의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통문관계(通文關係)가 파괴되고, 국제법적인 토대 위에서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강압 아래서 맺어진 최초의 불평등조약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맞서 개화론자들은 부국강병을 위해서 개화사상을 도입하고 문호를 개방하여 대외통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즈음 조선 조정 내에서의 권력투쟁으로 대원군이 하야하게 되자 이러한 국내의 정황을 탐문한 일본은 1875년 통교교섭을 위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왔으나 교섭은 성립되지 않았다. 이에 일본 정부는 측량을 빙자하여 군함 운요호[雲揚號]를 조선 근해에 파견하여 부산에서 영흥만(永興灣)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의 해로측량과 아울러 함포(艦砲)시위를 벌였다. 또한 운요호를 강화도 앞바다에 재차 출동시켜 초지진(草芝鎭)의 수비병들이 발포하는 사태를 유발하게 하였다. 1876년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던 일본 정부에서는 전권대신(全權大臣) 일행을 조선에 파견하여 운요호의 포격에 대하여 힐문함과 아울러 개항을 강요하였다. 2월에는 일본 사신 일행이 군함 2척, 운송선(運送船) 3척에 약 4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강화도 갑곶(甲串)에 상륙하여 협상을 강요해왔다. 이에 조선 정부는 국제관계의 대세에 따라 수호통상의 관계를 맺기로 결정하고 신헌(申櫶)을 강화도에 파견하여 일본 사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협상하게 한 결과, 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의 무력시위 아래 체결된 조약은 모두 12개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에는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세력을 조선에 침투시키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제1조에서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되어 있으나, 이의 목적은 조선에서 청(淸)나라의 종주권을 배격함으로써 청나라의 간섭없이 조선에 대한 침략을 자행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 있다. 제2조에서 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 정부는 20개월 이내에 부산과 그 밖의 2개 항구를 개항할 것을 규정하고, 2개 항구의 선정은 일본의 임의에 맡길 것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동해안에는 원산이, 서해안에는 인천이 각각 선정되었으나, 다만 인천항으로부터의 미곡 수출만은 금지되었다.
또한 제4조와 제5조에서는 개항장 내에 조계(租界)를 설정하여 그곳에서의 일본 상인의 자유로운 무역과 가옥의 조영(造營) 등 거주의 편의를 제공할 것을 규정하였다. 제7조에서는 일본이 조선의 연해(沿海) ․도서(島嶼) ․암초(岩礁) 등을 자유로이 측량하고 해도(海圖)를 작성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제8조와 제10조에는 개항장에서의 일본인 범죄자들에 대해 현지에 파견된 일본영사가 재판한다는 치외법권의 조항이 명시되었다. 이 조약에 규정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일본은 개항장을 통해서 일본인을 조선에 침투시키고, 여기에 조차지(租借地)를 확보하여 일본세력의 전초지로 삼고자 하였다. 아울러 치외법권을 설정하여 일본인 상인들의 불법적이고 방자스런 행동에 대해서 조선의 사법권(司法權)이 미칠 수 없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불평등한 조약으로 하여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을 시작하게 되고,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서양의 신문명을 수입하는 반면에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거문도사건 [ 巨文島事件 ]
1885년 4월부터 약 2년간 영국의 동양함대가 전남 거문도를 점령한 사건.
당시 세계적인 규모로 러시아의 남하세력에 대항해온 영국은 극동에서도 러시아의 남진책에 예민한 반응을 나타냈다. 러시아는 일찍이 1860년 한반도 동해(東海)에 임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강점하였는데, 이 항구는 겨울에 얼어 해만(海灣)으로서 활용가치가 적었으므로 부동항(不凍港)을 물색하였다. 그 대상지는 영흥만(永興灣) ․제주도 ․쓰시마섬[對馬島] 등이었고, 이 중에서도 함남 영흥만이 가장 유력한 점령 대상지였다고 한다. 한편 영국은 1882년 한영수호(韓英修好)의 교섭이 시작되던무렵부터 이미 거문도의 조차(租借)를 제의함으로써 거문도에 대한 관심을 표시해왔다. 또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후 한국의 조정이 급속히 제정(帝政)러시아에 접근하여 한 ․러밀약[韓露密約]을 체결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국외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의 사태가 급박해졌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영국은 러시아의 선점(先占)을 예방하고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영국선박 1척이 러시아가 점령 대상지로 삼았다는 영흥만 일대를 탐사한 후, 4월 15일 군함 6척 ․상선 2척으로 거문도를 점령하고 그 달 하순경 영국기를 게양하였다. 한국 정부는 영국 부영사(副領事)와 청(淸)나라 주재 영국 대리공사(代理公使)에게 항의를 제기하였다. 또 미국 ․독일 ․일본에게 조정을 요청하는 한편, 엄세영(嚴世永)과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교섭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청나라에 사건의 중재를 요청하였는데, 이 무렵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의 위기가 고비를 넘기고 9월 10일 아프가니스탄 협상이 조인됨에 따라,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은 이 때가 거문도 문제를 해결할 기회라고 보고, 적극적으로 중재하였다. 그 결과 이홍장은 청나라 주재 러시아공사로부터 러시아는 한국의 영토를 어느 지점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영국에 통보함으로써 드디어 1887년 2월 27일 영국 함대가 철수하였다.
건원중보 [ 乾元重寶 ]
고려 성종 때 주조된 한국 최초의 화폐.
철전(鐵錢)과 동전의 두 종류가 있으며, 외형은 둥글고 가운데에는 네모의 구멍이 있다. 건원중보라는 이름의 화폐는 이미 중국 당(唐)나라 숙종의 건원 연간(756~762)에 발행되었으며, 고려는 이를 모방하여 앞면에는 '건원중보'라는 화폐이름을 새기고, 뒷면에는 위아래로 '동국(東國)'이라 표기하여 996년(성종 15) 철전을 처음으로 주조하였다가 이듬해 유통시켰다. 액면가 표시가 없는 이 화폐는 종전까지 화폐대용으로 사용되어온 포(布) ․토산물과 함께 사용되었으나, 다주점(茶酒店) ․식미점(食味店) 등에서만 사용되는 등 유통의 제한을 받았다. 건원중보의 동전은 1910년대 초 개성 부근의 고려고분에서 출토되어 처음으로 그 발행사실이 밝혀졌다. 수집품으로서의 건원중보는 희귀통화에 속하여 1973년 철전 하나가 35만 원에 거래된 바 있다.
경국대전 [ 經國大典 ]
조선왕조는 개창과 더불어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여 고려 말 이래의 각종 법령 및 판례법과 관습법을 수집하여 1397년(태조 6)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제정, 시행하였다. 그 전에 왕조 수립과 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한 정도전(鄭道傳)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바친 일이 있었지만 개인의 견해에 그친 것이었다. 《경제육전》은 바로 수정되기 시작하여 태종 때에 《속육전(續六典)》이 만들어지고, 세종 때에도 법전의 보완작업이 계속되지만 미비하거나 현실과 모순된 것들이 많았다. 국가체제가 더욱 정비되어 감에 따라 조직적이고 통일된 법전을 만들 필요가 커졌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당시까지의 모든 법을 전체적으로 조화시켜 후대에 길이 전할 법전을 만들기 위해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최항(崔恒)․김국광(金國光)․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강희맹(姜希孟)․임원준(任元濬)․홍응(洪應)․성임(成任)․서거정(徐居正) 등에게 명하여 편찬작업을 시작하게 하였다.
1460년(세조 6) 먼저 〈호전(戶典)〉이 완성되고, 1466년에는 편찬이 일단락되었으나 보완을 계속하느라 전체적인 시행은 미루어졌다. 예종 때에 2차 작업이 끝났으나 예종의 죽음으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성종대에 들어와서 수정이 계속되어 1471년(성종 2) 시행하기로 한 3차, 1474년 시행하기로 한 4차 《경국대전》이 만들어졌다. 1481년에는 다시 감교청(勘校廳)을 설치하고 많은 내용을 수정하여 5차 《경국대전》을 완성하였고 다시는 개수하지 않기로 하여, 1485년부터 시행하였다.
그 뒤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법령이 계속 마련되어 1492년의 《대전집록(大典輯錄)》, 1555년(명종 10)의 《경국대전주해》, 1698년(숙종 24)의 《수교집록(受敎輯錄)》 등을 거느리게 되었다. 1706년(숙종 32)의 《전록통고(典錄通考)》는 위의 법령집을 《경국대전》의 조문과 함께 묶은 것이다.
또한 반포 때에 이미 〈예전(禮典)〉의 의식절차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따르고, 〈호전〉의 세입과 세출은 그 대장인 공안(貢案)과 횡간(橫看)에 의거하도록 규정되었다. 또 형벌법으로서 《대명률(大明律)》과 같은 중국법이 〈형전〉에 모순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적용되었다.
시기가 많이 지남에 따라 후속 법전도 마련되었다. 1746년(영조 22)에는 각종 법령 중 영구히 시행할 필요가 있는 법령만을 골라 《속대전》을 편찬하여 시행함으로써 또 하나의 법전이 나타났고, 1785년(정조 9)에는 《경국대전》과 《속대전》 및 《속대전》 이후의 법령을 합하여 하나의 법전으로 만든 《대전통편》이 시행되었으며, 그 이후의 법령을 추가한 《대전회통(大典會通)》이 조선왕조 최후의 법전으로서 1865년(고종 2)에 이루어졌다.
《경국대전》은 조선왕조 개창 때부터의 정부체제인 육전체체(六典體制)를 따라 6전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기 14~61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졌다. 〈이전(吏典)〉은 궁중을 비롯하여 중앙과 지방의 직제 및 관리의 임면과 사령, 〈호전〉은 재정을 비롯하여 호적․조세․녹봉․통화와 상거래 등, 〈예전〉은 여러 종류의 과거와 관리의 의장, 외교, 의례, 공문서, 가족 등, 〈병전(兵典)〉은 군제와 군사, 〈형전〉은 형벌․재판․노비․상속 등, 〈공전(工典)〉은 도로․교량․도량형․산업 등에 대한 규정을 실었다.
짧게는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한 지 30년 만에, 길게는 고려 말부터 약 100년 간의 법률제정사업을 바탕으로 완성된 이 법전의 반포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밑받침하는 통치규범의 확립을 의미하였다.
또한 새로운 법의 일방적인 창조라기보다 당시 현존한 고유법을 성문화하여 중국법의 무제한적인 침투를 막고 조선 사회 나름의 질서를 후대로 이어주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형전〉의 자녀균분상속법, 〈호전〉의 매매 및 사유권의 절대적 보호에 대한 규정, 〈형전〉의 민사적 소송절차에 대한 규정 등은 중국법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유법이다.
한편, 당시 사회의 한계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국왕에 대한 규정이 없는 것이 한 예이다. 실제 정치운영에서는 점점 세밀한 규정들이 수립되어 국왕의 권한에 많은 제약을 가하였지만, 조선 사회의 기본 정치이념에서 국왕은 법률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관리의 자격에 대해 천민이 아닐 것 이상의 신분적 제약을 정해놓지 않아 중세 신분제의 극복과정에서 한층 발전된 수준을 보여주지만, 노비에 대한 규정을 〈형전〉에 자세하게 담은 것은 당시의 지배층이 노비제의 기반 위에 서 있었고 그들을 죄인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경국대전》은 조선시대가 계속되는 동안 최고법전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법률의 개폐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그것을 반영한 법전이 출현하였지만, 이 법전의 기본체제와 이념은 큰 변화없이 이어졌다. 《대전회통》에는 비록 폐지된 것이라 하더라도 《경국대전》의 조항이 그 사실과 함께 모두 수록되었다.
사회운영의 질서는 실질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고 따라서 법전의 시행 내용 또한 매우 큰 폭으로 달라져 갔다. 그것은 단순한 법질서의 혼란이 아니라 사회의 변동과 발전에 대한 체제의 적응 노력이었다. 예를 들어 최고위 관서로 의정부가 있고 그곳의 3정승이 관료의 정상을 이룬다는 기본구조는 19세기 말까지 변화가 없었지만, 조선 전기 3정승과 의정부가 비교적 강력하게 백관을 통솔하고 국정을 총괄한 반면, 조선 중기 이후로는 비변사(備邊司)가 국정을 총괄하는 관서가 되었고 3정승이 그곳의 대표자로서 권한을 행사하였다. 이때의 비변사는 고위관리의 회의를 통해 운영되는 합좌기구로서 당시 지배층의 확산에 조응하여 좀더 많은 사람의 의견을 끌어모으고, 더욱 복잡해진 국가행정을 전문적으로 이끌어간다는 의미를 지녔다. 물론 후기 법전인 《속대전》부터는 비변사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다.
매우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며 현대에 들어와서는 법제처가 1962년에 번역본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85년에 번역본과 주석서를 함께 간행하였다.
계유정난 [ 癸酉靖難 ]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
세종(世宗)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文宗)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세 사람 중 남지는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였으므로 그의 후임인 정분(鄭)이 대신 당부를받았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1453년 문종의 유탁(遺託)을 받은 삼공(三公) 중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사변 직후에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모반하였으므로 주륙(誅戮)하였는데, 사변이 창졸간에 일어나 상계(上啓)할 틈이 없었다"고 사후에 상주(上奏)하였으며, 곧 이어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을 소집한 뒤, 사전에 준비한 생살(生殺)계획에 따라 황보 인,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찬성 이양(李穰) 등을 궐문(闕門)에서 죽였으며, 좌의정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인 조수량(趙遂良) 등을 귀양보냈다가 죽였으며,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이 "황보 인 ․김종서 등과 한 패가 되어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다"고 거짓 상주하여 강화도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사(賜死)하였다.
수양대군은 10월 10일의 정변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그는 의정부영사와 이조 ․병조 판서,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직하였고,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 한확(韓確)을 우의정으로 삼았으며,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는 등 그의 집권태세를 굳혀갔다.
이 정변이 계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이를 계유정난이라 하는데, 이 사건에 공이 있다 하여 수양대군 ․정인지 ․한확 ․이사철(李思哲) ․박종우(朴從愚) ․이계전(李季甸) ․박중손(朴仲孫) ․김효성(金孝誠) ․권람(權擥) ․홍달손(洪達孫) ․최항(崔恒) ․한명회(韓明澮) 등 37명은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었다.
고부민란 [ 古阜民亂 ]
1894년(고종 31) 1월 고부 지역의 동학접주(東學接主) 전봉준(全琫準)이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항의하고자 이 지역 농민들을 규합하여 일으켰다.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부임한 이래 ① 농민에게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여 면세(免稅)를 약속하고서도 추수시에 강제로 세금을 받고, ② 군민들에게 불효․불목(不睦)․음행(淫行)․잡기(雜技) 등의 죄명을 날조하여 2만냥 이상을 강탈하고, ③ 태인군수(泰仁郡守)를 지낸 적이 있는 그의 부친의 송덕비각(頌德碑閣)을 짓는다고 1,000냥 이상을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징수하였으며, ④ 대동미(大同米)를 농가에서 거둘 때는 좋은 쌀 16말[斗]을 표준하고, 상납할 때는 나쁜 쌀을 사서 바치게 하여 그 차액을 착복하였다. ⑤ 만석보(萬石洑)가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데도 임금 한푼 주지 않고 농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신보(新洑)를 쌓게 하고 가을에 가서 1두락에 1~2말의 수세(水稅)를 받아 700석이나 착복하였다.
처음 전봉준 등은 두 차례 40~60명이 조병갑에게 가서 만석보 수세에 대한 감면을 진정하였으나, 조병갑은 이를 일축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1894년 1월 10일 약 1,000의 동학도와 농민을 이끌고 고부 군아(郡衙)를 습격하였다. 농민군은 먼저 무기고를 부수어 총을 빼앗고, 옥을 열어 억울한 죄수들을 석방하였으며, 불법으로 약탈한 수세미를 농민에게 반환하고 만석보의 신보를 파괴하였다. 이 틈에 조병갑은 전라감영으로 달아났다가 정부에 의해 체포되고, 박원명(朴源明)이 새로 고부군수로 부임하여 사태를 잘 수습하고 농민들도 흩어져 귀가하였다.
그러나 안핵사(按史)로 임명된 이용태(李容泰)는 민란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죄없는 농민들을 함부로 체포하고 부녀자들을 능욕하며 재산을 약탈하는 등 패악을 자행, 농민들을 극도로 자극하게 되었다. 이에 전봉준은 3월 21일 백산(白山)에서 동학군 8,000으로 전면전을 일으켰다.
과전법 [ 科田法 ]
고려의 문란한 토지제도를 바로잡기 위하여 1391년(공양왕 3) 사전개혁(私田改革)을 단행하여 새로운 전제(田制)의 기준으로 삼은 토지제도.
고려의 토지제도는 경종 ․목종 ․문종 때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문종 때 공음전시과(功蔭田柴科) ․경정전시과(更定田柴科)의 제정 실시 후 사전의 확대와 과점(過占)의 모순을 자아냈다. 더욱이 무신의 난 이후 권문세족들의 농장확대와 사원전(寺院田)의 팽창으로 국가경제의 파탄과 농민들의 생활고는 극심하였고, 관료들에게 분급할 전지마저 부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고종 때 급전도감(給田都監), 충선왕 때 전민추쇄도감(田民推刷都監), 공민왕 때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권문세족들의 토지겸병을 억제하고 농장 몰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런 근거하에서 1388년 위화도회군 이후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는 사전개혁을 주장하였고,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은 전제개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온건한 개혁파 조민수(曺敏修) ․이색(李穡) 등의 반대가 있자 이들을 축출하고, 우왕(禑王)의 아들 창왕(昌王)마저 축출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킨 뒤, 1390년(공양왕 2)에 종래의 공사전적(公私田籍)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1391년 새로운 전제(田制)의 기준이 되는 과전법을 공포하였다. 이와 같은 전제개혁은 귀족의 경제적 파괴이며 신흥 사대부에 의한 새 왕조인 조선조(朝鮮朝) 개창의 경제적 기반이 된 것이다. 당시의 토지결수(土地結數)를 보면, 경기도의 실전(實田) 13만 1755결(結), 황원전(荒遠田) 8,387결, 과전 ․공신전 ․별사전(別賜田) ․능침전(陵寢田)과 경기 내의 관아(官衙)에 속하는 공해전(公田)으로 하고, 지방의 실전 49만 1342결, 황원전 16만 6643결은 공전으로 하여 군전(軍田)으로 삼았다.
과전법의 특색을 보면 개혁의 원래 취지는 전시과의 기본원칙에 환원함으로써 관료 지배체제를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과전법은 국유(國有)가 원칙이며, 수조권(收租權)의 귀속 여하에 따라 사전과 공전으로 구분하며, 사전은 경기도에 한하여 직산자(職散者)의 고하에 따라(18등급) 제1과 150결에서 제18과 10결까지의 땅을 지급하되, 1대에 한하였다. 공전은 경기도를 제외한 전국의 토지로서 수조권이 국가에 소속되었고, 사전인 경우는 수조권이 개인이나 관아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전시과와는 달리 시지(柴地)를 지급하지 않았으며, 과전법의 성립으로 전호(佃戶)가 전주(田主)에게 50 %의 조(租)를 바치던 병작반수제가 금지되고, 수확의 1/10(1결당 30두)을 징수하였다.
과전법에 의한 토지개혁은 경자유전(耕者有田)에 의한 균등분배가 아니고, 수조권의 재분급에 불과하였으므로 토지소유의 불균등과 빈부의 차에서 발생하는 모순뿐만 아니라 토지의 세습화가 될 여지가 있었다. 다만, 전호의 부담을 적게 한 점과 전주는 전호의 경작지를 함부로 빼앗지 못하며, 전호도 경작권의 양도나 매매를 금지하여 모든 농민을 한층 토지에 고착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과전 ․수신전(守信田) ․휼양전(恤養田) 등이 점차 세습되었고, 공신 ․관리의 증가로 사전의 부족을 초래하였다.
1417년(태종 17)에는 과전으로 지급될 땅 1/3을 하삼도(下三道:충청 ․전라 ․경상도)로 이급(移給)하였다. 세원(稅源)의 감소와 식량부족으로 1431년(세종 13)에는 하삼도 사전을 다시 경기로 이환(移還)하게 되었고, 1434년에는 공해전을 축소 정리하여 과전을 보충하였으며, 1443년에는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전세(田稅)를 개혁하여 세율을 낮추고, 20년마다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양안(量案:토지대장)을 작성하고, 호적을 3년마다 재작성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는 곧 과전법의 폐단을 반영한 것이다. 이로써 1466년(세조 12)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하여 현직관료에 한하여 최고 110결~10결까지 과전을 지급하였다. 이 제도는 관료의 퇴직 후 또는 사후(死後)에 대하여는 아무 보장이 없는 제도였기 때문에 재직 중의 수탈(收奪)이 심하였다.
광개토대왕비 [ 廣開土大王碑 ]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한․일 고대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온 구절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로서, 여기에서 문맥과 전혀 관계없이 왜(倭)가 나온다.
이를 근거로 일제의 학자는, 4세기에 한반도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그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런 해석은 1884년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정인보(鄭寅普)는 해석상의 모순을 지적하였고, 1972년 재일(在日) 사학자 이진희(李進熙)는, 비문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3차의 석회도부(石灰塗付) 작업이 있었다는 사실 등을 들어, 문제의 비문 중 왜(倭) 이하 도(渡)․해(海)․파(破) 등 4자를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1972년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이어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되어, 이 주장이 공인을 받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광작 [ 廣作 ]
조선 후기에 농민들이 경작지를 늘려서 넓은 토지를 경작하려던 현상.
벼농사에 이앙법(移秧法:모내기)이 널리 보급되면서 같은 양의 노동력으로 더 넓은 토지를 경작할 수 있게 되자 경작지를 늘려 농사짓기를 하려는 농민들이 점차 늘기 시작하였다. 이앙법은 조선 초기부터 행해지고 있었지만, 이 경작방법이 재래식 직파법(直播法)을 밀어내고 지배적인 경작방법으로 자리를 잡아간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였다. 이때부터 광작도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는데, 광작 농업이 확대되면서 조선사회는 사회․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광작은 대개 부농층(富農層)인 지주들에 의해 추진되었고, 이에 따라 토지가 없는 농민들은 소작할 땅조차 얻기가 어렵게 되었다. 할 일이 없어진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나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금 노동자가 되었고, 심지어 노비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가 자주 일어나자 이에 대한 대책론으로 한 사람 소유의 대토지를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경작하게 하자는 분경론(分耕論) 등이 제안되기도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광작하는 농민은 자급자족을 위하여 생산하는 단계를 넘어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농업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광작으로 더욱 부를 축적한 부농들은 가난한 농민들이 가을에 수확물을 싼값에 팔 때 이를 사들여 두었다가 곡가가 오를 때를 기다려 다시 판매함으로써 곡물의 상품화를 촉진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소농의 몰락을 기반으로 하여 성장한 지주형․부농형 광작은 조선 후기 농촌사회의 분화(分化)를 촉진한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광작, 상업적 농업 등 농업 경영방식의 변화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소작료 지불 형태에도 변화를 가져왔고, 이는 소작인으로 하여금 지주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농업을 경영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적 예속 관계에 있던 종래의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관계를 대립 관계로 바꾸어 놓았고, 마침내는 지주제를 타도하고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을 체제적으로 해결하려는 민란(民亂)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광혜원 [ 廣惠院 , Widespread Relief House ]
1885년(고종 22)에 고종의 허락과 미국인 선교사 H.G.앨런의 주관 아래 세워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의료기관으로 1885년(고종 22년) 2월 29일 미국 선교의사인 H.N.앨런(한국명:安蓮)이 서울 재동(齋洞)에 왕립 광혜원(王立廣惠院)을 설립했다. 앨런은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회의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 활동하던 중, 갑신정변 때 칼을 맞아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해 생명을 구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고종의 총애를 받아 왕실부(王室附) 시의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병원 설립을 건의하여 고종의 허락을 받았다.
정부는 광혜원 규칙을 제정해 국립병원으로서 원장 격인 광혜원당랑(廣惠院堂郞)을 두었으며, 의료진으로는 미국인 의사인 알렌을 초빙해 환자 진료를 실시했다. 이외에 병원 운영을 맡은 관리와 사무를 맡아보는 직원을 두는 등 의사 앨런을 제외하고 모두 한국 관리로 조직을 구성하였다. 광혜원은 개원 12일만인 3월 12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계(啓)에 따라 제중원(濟衆院)으로 바꿨다.
제중원을 찾는 환자수와 업무량이 많아지자, 선교사 J.H.헤론이 가세하여 의료활동에 종사하였다. 1886년 여의사 A.J.앨러스가 오면서 부인부(婦人部)가 설치되고, 이듬해 정부의 후원으로 홍영식(洪英植)의 집(지금의 을지로 입구 한국외환은행 본점)으로 옮겼다. 고종은 제중원의 의료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앨런과 엘러스에게 당상관 품계의 벼슬을 내렸다.
교정도감 [ 敎定都監 ]
고려시대 최충헌(崔忠獻) 이래 무신정권의 최고 정치기관.
교정소(敎定所)라고도 한다. 1209년(희종 5) 4월 권력을 농단하기 시작한 최충헌․최우(崔瑀) 부자를 살해하기로 모의한 청교역(靑郊驛:경기 개풍군) 역리(驛吏)와 이에 관련된 자를 색출하기 위해, 개경(開京)의 흥국사(興國寺) 남쪽 영은관(迎恩館)에 임시로 이 기구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그뒤 계속 존치되어 최씨정권의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데 이용될 뿐만 아니라 서정(庶政) 감시, 세정(稅政), 비위(非違) 규찰(糾察)과 제반 명령 하달 등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의 정치기구가 되었다. 무신정권의 최고 집권자가 겸임하는 교정별감을 두었으며, 이 직위는 최충헌․최우․최항(崔沆)․최의(崔)로 이어져 국정을 독단하였다.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김준(金俊)․임연(林衍)의 무신정권 아래서도 존속하다가, 1270년(원종 11) 임연의 뒤를 이은 임유무(林惟茂)가 피살되어 무신정권이 끝남으로써 소멸되었다.
국자감 [ 國子監 ]
고려시대 중앙의 최고교육기관.
607년 중국 수(隋)나라에서 창시되어 고려에서는 992년(성종 11) 태조 이후 교육기관이던 경학(京學)을 국자감으로 개칭하여 설치하였다. 1275년(충렬왕 1)에는 국학(國學), 1298년에는 성균감(成均監), 1308년(충선왕 즉위)에는 성균관(成均館), 1356년(공민왕 5)에는 다시 국자감, 1362년에는 또다시 성균관으로 고쳐 조선으로 계승되었다. 국자감은 성종이 중앙과 지방관제를 정비하여 관리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관리양성기관의 기능도 가지게 되었는데, 여기에 국자학(國子學) ․태학(太學)․사문학(四門學) 등 유학(儒學) 전공의 3학과, 율학(律學)․서학(書學) ․산학(算學) 등 실무직 기술을 습득하는 3학을 두어 이들을 경사육학(京師六學)이라 하였다.
이 중 앞의 3학은 모두 유교의 경전(經典)과 문학을 전공하는 기관으로, 학과의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신분에 따른 구별이었으며, 지배계급의 자제로서 장래 고급관원으로 출세하려는 자들이 입학하였다. 한편 율학 등 3학은 일종의 직업학으로 전문직으로 나갈 계급이 낮은 신분의 자제들이 들어갔다. 국자감의 정원은 국자․태학․사문학이 각각 300명으로 모두 900명이었고, 율학 등 3학은 미상(未詳)이며, 각 학과마다 박사․조교가 교수하였다.
수학내용은 국자학․태학․사문학이 모두 동일하여 《효경(孝經)》․《논어(論語)》를 공통 필수과목으로 하고, 《주역(周易)》․《상서(尙書)》․《주례(周禮)》․《예기(禮記)》․《모시(毛詩)》․《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 등은 전공교과로 하였다. 수학연한은 국자감시에 응시하는 데 필요한 6년과 국자감시에 합격한 후 3년이 지나야 최종시험인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할 수 있어 9년이 소요되었으며, 율학․서학․산학은 6년이 소요되었다.
1063년(문종 17) 문종은 사학(私學)이 융성하고 관학(官學:국자감)이 부진하자 교관의 책임이라 책망하고 국자감의 질적 향상을 꾀하여 직제를 제정하였다. 즉 제거(提擧:종2품) ․동제거(同提擧:종2품) ․관구(管句:정3품) ․판사(判事:정3품) 각 2명, 좨주(祭酒:종3품)․사업(司業:종4품)․승(丞:종6품) 각 1명,국자박사(정7품)․대학박사(종7품)․주부(注簿:종7품)․사문박사(종8품)․학정(學正:정9품)․학록(學錄:정9품) 각 2명, 학유(學諭:종9품) 4명, 직학(直學:종9품)․서학박사(종9품)․산학박사(종9품) 각 2명과 이속(吏屬)으로 서사(書史)․기관(記官) 각 2명을 두었고, 그 후에도 대사성(大司成:정3품)․명경박사(明經博士:정8품)․율학박사(종8품)․명경학유(明經學諭:종9품)․율학조교 등을 두었다.
1109년(예종 4)에는 과거 합격자를 십이도(十二徒)에 많이 빼앗기자 과거응시자를 위하여 국자감에 여택재(麗澤齋:周易)․대빙재(待聘齋:尙書)․경덕재(經德齋:毛詩)․구인재(求仁齋:周禮)․복응재(服膺齋:戴禮)․양정재(養正齋:春秋)․강예재(講藝齋:武學)의 7재를 두고 전공별 강의를 하였다. 1101년(숙종 6) 국자감에 서적포(書籍)라는 국립도서관을 설치하고, 1562년 성균관으로 개칭된 뒤에는 강예재가 없는 6재를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전문적으로 강의하는 9재로 바꾸어 성리학 중심의 교육으로 전환하였다.
규장각 [ 奎章閣 ]
조선시대의 관아.
설립년도 : 1776년
설립목적 : 정치, 경제, 사회 등 현실문제의 학문적 해결
주요업무 : 국립도서관
내각(內閣)이라고도 한다. 정조(正祖)가 즉위한 1776년 궐내(闕內)에 설치,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親筆)의 서화(書畵)․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譜:王世譜)․보감(寶鑑) 등을 보관 관리하던 곳이다. 규장각의 명칭은 1464년(세조 10) 양성지(梁誠之)가 헌의(獻議)한 일이 있고, 1694년(숙종 20)에는 종부시(宗簿寺)에 예속된 어제(御製)․어필(御筆)을 보관하는 한 소각(小閣)의 각명(閣名)으로 쓰기도 하였으나 곧 폐지되었다. 정조는 즉위하자 곧 창덕궁(昌德宮)의 북원(北苑)에 새로 집을 짓고 고사(故事)를 따라 규장각이라 명명(命名), 직제(職制)를 갖춘 한 독립된 기구로서 국립도서관의 기능을 가지게 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단순히 역대 국왕의 어제․어필을 보관하는 일뿐만 아니라, 당시왕권을 위태롭게 하던 척리(戚里)․환관(宦官) 들의 음모와 횡포를 누르고, 건국 이래의 정치․경제․사회 등의 현실문제의 해결은 곧 학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 국가적 규모로 도서를 수집하고 보존 간행하는 데 있었다.
정조는 당색(黨色)을 초월하여 학식이 높은 사람을 모아 우대하였고, 그들 학자들은 조선왕조가 지니고 있던 구조적(構造的)인 모순에 대한 비판과 재검토를 하였다. 정조는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부터 정색당(貞堂)이라는 서고(書庫)를 지어 도서수집에 전렴하였으며, 명나라에서 기증해 온 중국본을 모았으며, 또 입연사절(入燕使節)을 통하여 새로운 서적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부속기구로서 서고(西庫)와 열고관(閱古館)을 두었으며, 서고에는 조선본, 열고관에는 중국본을 나누어 보관하였고, 열고관의 도서가 늘어남에 따라 다시 개유와(皆有窩)라는 서고를 증축하였다.
규장각의 도서는 1781년(정조 5)경에 장서 정리가 되면서 총 3만여 장서의 도서목록이 서호수(徐浩修)에 의하여 작성되어 이를 《규장총목(奎章總目)》이라 하였다. 규장각은 도서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와 함께 도서를 편찬하는 데도 힘을 기울여 많은 책을 편찬하였다. 그 중에서도 매일매일의 정사(政事)를 기록한 《일성록(日省錄)》은 대표적인 것으로, 정조 때 편찬하기 시작한 이 편년체(編年體) 사서(史書)는 한말(韓末)까지 계속되었다.
규장각은 1894년 갑오개혁 때 궁내부(宮內府)에 두었다가 이듬해인 1895년 규장원(奎章院)으로 고쳐 이때 한․중 양국본의 도서와 각종 왕가 전보(傳寶)를 보관하였으며, 1897년(고종 34) 다시 규장각으로 이름을 환원시켰다. 규장각에는 제학(提學:종1~정2품) 2명, 직제학(直提學:종2품~정3품 당상관) 2명, 직각(直閣:정3~종6품) 1명, 대교(待敎:정7~9품) 1명 외에 검서관(檢書官) 4명 등의 관원이 있었다. 이 중에서 특히 검서관에는 종래 임용되지 못하던 서얼(庶孼)도 등용하여 서적의 교정과 서사(書寫)를 맡기어 5품에 해당하는 군직(軍職)을 주었다.
규장각은 교서관(校書館)을 외각(外閣)으로 편입시켜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인쇄․반포하였으며, 1907년 제실(帝室)의 문한(文翰)․기록을 보관하였다.
1908년 근대적인 직제(職制)를 편성하여 전모(典謀)․도서․기록․문서 등 4과가 사무를 집행하였으며, 이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각 관서의 일기 및 등록과 정족(鼎足)․태백(太白)․오대(五臺)․적상(赤裳) 등의 사고(史庫) 장서까지 관할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로 그 이름이 없어지고, 소장되어 있던 도서는 한때 이왕직(李王職)에 도서실을 두어 보관하고 있었으나 1911년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으로 넘어갔다. 이때 넘어간 도서는 5,353부 10만 187책, 각종 기록은 1만 730책에 달하였다.
그러나 1912년 총독부에 참사관실(參事官室)이 설치되어 이들 도서와 관련된 사무는 참사관실로 이관되었고, 1922년 학무국으로 이관되었다가, 다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으로 이관되었는데, 이때 15만 1519권의 책이 이 대학의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이 책들은 광복 후 서울대학교에서 인수하여 관리하고 있다.
균역법 [ 均役法 ]
조선시대 군역(軍役)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하여 만든 세법.
1750년(영조 26) 종래 인정(人丁) 단위로 2필씩 징수하던 군포(軍布)가 여러 폐단을 일으키고, 농민 경제를 크게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자 2필의 군포를 1필로 감하기로 하는 한편, 균역청을 설치, 감포(減布)에 따른 부족재원(不足財源)을 보충하는 대책을 마련하게 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어전세(漁箭稅)․염세(鹽稅)․선세(船稅) 등을 균역청에서 관장하여 보충한다는 등의 균역법이 제정되어 1751년 9월에 공포되었다.
군역은 처음에 16세부터 60세까지의 양인(良人)에게 부과하여 이를 정군(正軍)과 보인(保人)으로 나누어 번상(番上)하는 정군을 보인이 경제적으로 돕게 하였다. 정군의 번상제가 해이해지면서 중종 때부터는 번상대신 포(布)를 바치게 하는 군포제(軍布制)가 이루어지더니, 임진왜란 후 모병제가 실시되면서 군역은 군포 2필을 바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어 군역으로서의 군포는 국가재정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군정의 문란으로 돈 있고 세력 있는 양인은 관리와 결탁하여 군역을 면제받고, 무력하고 가난한 양인만이 군역을 지게 되었다. 따라서 부족한 군포를 보충하기 위해 이미 사망한 군역 대상자에게도 그 몫을 가족에게서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16세 미만의 어린아이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던 황구첨정(黃口簽丁), 군포 부담자가 도망하면 친척에게서 군포를 징수하던 족징(族徵), 이웃에 연대책임을 지워 군포를 징수하던 인징(隣徵) 등 갖은 비법이 횡행하였다. 후에 균역청 구관당상(句管堂上)으로 임명된 홍계희(洪啓禧)에 의하면 50만이 져야 할 양역(良役)을 10만여 명이 부담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자 곳곳에서 농민의 농촌 유리현상이 두드러진다 하였다.
군역의 개선책은 효종․인조 이후 계속 강구되어 숙종 때에는 군포징수를 인정(人丁) 단위로 하지 않고 가호(家戶) 단위로 하여 양반에게도 징포하자는 호포론(戶布論), 군포를 폐지하고 토지에 부가세를 부과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자는 결포론(結布論), 유한양정(有閑良丁)을 적발하고 양반자제 및 유생(儒生)에게도 징포하자는 유포론(游布論:儒布論), 군포를 폐지하고 매인당 전화(錢貨)로 징수하자는 구전론(口錢論)과 군문(軍門)의 축소로 군사비를 감축하자는 등 논의가 분분하여 가호당의 호포제와 가호단위의 호전제(戶錢制)가 유력하였다. 그러나 양반층의 강경한 반대로 실현을 보지 못하고, 군포를 반으로 줄이자는 감필론(減匹論)이 대두하였다.
1742년(영조 18)에는 양역사정청(良役査正廳)을 두어 양역의 실태파악에 노력하는 한편 양인의 호구조사를 하였으며, 1743년에는 이 조사를 바탕으로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에게 양역실총(良役實摠)을 만들게 하여 각 도에 인반(印頒)하도록 명하였다. 1748년 이 작업이 완료되어 전국의 양정수(良丁數)와 군포필수를 조사 수록한 양역실총(처음에는 良役査定冊子)이 반간(頒刊)되어 군포를 감필할 경우의 부족한 군포수를 알게 되자, 영조는 1750년 5월 홍화문(弘化門)에 친림(親臨)하여 재조(在朝) 제신(諸臣) 및 서울 5부(部)의 방민(坊民)에게 양역변통(良役變通)의 의견을 물었다. 영조는 민의에 따라 호전제(戶錢制)를 실시하려 하였으나 반대가 너무 많아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7월 여러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균역청(원명은 均役節目廳)을 설치하여 군포 2필을 1필로 감필한다는 선포를 하고 이에 따라 각 군문에 부족한 군포를 보충해 주는 급대재정(給代財政)의 마련을 강구하게 하였다.
1751년 9월 반포된 균역법의 내용은 군포감필에 따른 급대재정으로,
① 군문을 합치고 군사비를 절약하는 감혁(減革)으로 얻는 재원이 약 10만 냥,
② 선혜청(宣惠廳)과 지방관청 경비의 일부를 균역청 재원으로 이획(移劃:移越)하여 얻는 재원 약 7만 냥,
③ 놀고 있는 한정(閑丁)을 수괄(搜括)하여 매인당 선무군관포(宣 武軍官布) 1필씩을 부과하여 얻는 재원 5만 냥,
④ 어장(漁場) 및 어전세(漁箭稅)․염세(鹽稅)․선세(船稅)의 수세(收稅)로 얻는 10만 냥,
⑤ 토지 매결당(每結當) 쌀 2말 혹은 5전(錢)씩을 전세(田稅)에 부과하여 얻는 40만 냥,
⑥ 지방관의 사용(私用)으로 쓰던 은결(隱結)과 여결(餘結)을 국가수입으로 전용(轉用)하여 얻는 5만 냥
등 모두 80만 냥으로 군포의 감필에 따른 부족재원을 마련하였다. 여기에서 감혁은 군문의 지출을 줄인 것이고 이획은 경상재정이 아니므로, 이것을 뺀 60여만 냥을 각 아문(衙門)․군문 및 각 도에 지급하였다.
이렇게 하여 군포 1필이 감해졌으나, 군포의 근본적인 성격에는 변동이 없었으므로 군역대상자의 도망은 여전하였으며, 도망자․사망자의 군포가 면제되지 않아 이를 다른 양인이 2중․3중으로 부담함으로써 군포감필 정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이에 양인들은 계속되는 무거운 군역에 불만을 품고, 철종(哲宗) 때는 농민반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금난전권 [ 禁亂廛權 ]
조선 후기 육의전(六矣廛)과 시전상인(市廛商人)이 난전을 금지할 수 있는 권리.
시전(市廛)이 가진 본래적 특권이라기보다, 조선 후기 상업발전과 더불어 성장한 비시전계 사상인층(私商人層)인 난전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고 시전상인이 정부와 결탁하여 확보한 강력한 독점상업특권이다.
난전은 전안(廛案:숙종 32년부터 실시한 제도로, 시전에서 취급한 물종과 상인의 주소, 성명을 등록한 상행위자의 臺帳)에 등록되지 않은 자나 판매를 허가받지 않은 상품을 성안에서 판매하는 행위였다. 조선 후기 이래 난전의 등장은 곧 붕괴적 어용상인인 시전상인의 상권을 침해하였고, 이에 시전상인은 자신의 상업적 특권을 유지․보호하려고 난전 금지를 정부에 요청하였다. 정부는 재정수입을 늘릴 목적에서 국역을 부담하는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상인에게 서울 도성 안과 도성 아래 십리 이내의 지역에서 난전의 활동을 규제하고, 특정 상품에 대한 전매권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금난전권을 부여하였다.
즉, 금난전권은 시전측으로서는 새로이 성장하는 비시전계 상인인 난전 또는 사상(私商)과의 경쟁을 배제하고 이윤을 독점할 수 있고, 그것을 인정한 정부로서는 이를 통해 상업계에 대한 파악도를 높이고 특정상인의 자본을 육성함으로써 세수입을 증대시키는 방책이었다.
그러나 금난전권의 실시는 조선 후기 이래 확대된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 도시 소비자뿐만 아니라 시전체계 안에 포섭되지 못한 사상층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또한 권세가․궁방 등과 결탁한 사상도고(私商都賈)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면서, 금난전권의 혁파에 대한 여론이 높아졌다. 이에 정부는 18세기 말경 통공발매정책(通共發賣政策)을 취하여, 육의전을 제외한 일반 시전이 가진 금난전권의 특권을 혁파하고, 육의전에서 취급한 상품을 제외한 모든 상품을 자유로이 판매하게 되었다. 이후 시전상인이 금난전권을 되찾으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부에 의해 번번이 거절되었다.
이처럼 조선 후기 금난전권의 출현과 혁파는 조선 사회를 지배한 봉건적 상업질서의 붕괴였고,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도시 인구 증가에 따른 상품화폐경제 발달의 반영이었다.
난전 [ 亂廛 ]
조선 후기 전안(廛案:숙종 32년부터 실시한 제도로, 시전에서 취급하는 물종과 상인의 주소, 성명을 등록한 행위자의 臺帳)에 등록되지 않거나, 허가된 상품 이외의 것을 몰래 파는 행위 또는 가게.
조선 후기 상업발전과 더불어 성장한 비시전계(非市廛系) 사상인(私商人)이 상행위를 하여 봉건적 상업구조를 어지럽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은 초기부터 국역(國役)을 부담하는 육의전(六矣廛)과 시전상인에게 그 보상으로 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고, 이 규정을 어기고 마음대로 상행위를 하면 난전이라 하여 금지시켰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서울의 경우 시전상가 외에 남대문 밖의 칠패(七牌)와 동대문 근처의 이현(梨峴) 등에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고 거리마다 난전이 생겨 시전의 전매품을 매매하게 되었다. 또한 비교적 큰 자본을 가진 사상도고(私商都賈)가 서울 외곽의 송파 ․동작진 ․누원점 ․송우점 등에서, 삼남 ․동북지방에서 올라온 상품을 매점하여 서울 성안의 난전상인에게 넘김으로써 난전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이러한 난전의 주체는 주로 서울의 권세가와 그들의 가복(家僕), 각 관아의 저리(邸吏), 호위청(扈衛廳) 산하의 군병(軍兵)과 각 영문의 수공업자, 서울과 개성의 부상(富商) ․도고(都賈)나 중도아(中都兒) 등이었다.
이들은 대개 봉건 특권층과 결탁하여 관부에 일정한 사업세를 내고 자신의 상권을 확보함으로써 육의전과 같은 특권적 시전상인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상인은 한때 정부로부터 난전을 금지하는 금난전권을 얻어 난전에 압박을 가하였지만, 18세기 후반 금난전권의 폐지로 사상인층에 의해 주도된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막을 수 없었다. 이처럼 난전의 발전은 조선 후기 성장한 비특권적인 수공업자와 상인에 의해 봉건적인 상업 구조가 허물어지던 도시상업 발전의 반영이었다.
단양 신라적성비 [ 丹陽新羅赤城碑 ]
신라 진흥왕 때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의 적성(赤城)에 세워진 비석.
1979년 5월 22일 국보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93cm, 윗너비 107cm, 아랫너비 53cm이다. 정확한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545년(진흥왕 6) 이전, 550년, 551년 등 각기 다른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1978년 1월 단국대학교박물관 조사단이 발견하였다.
단단한 화강암을 물갈이한 뒤 그 위에 직경 2cm 내외의 글자를 음각하였다. 윗부분은 파손되었으나 좌우 양측면은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비문은 전체 22행에 각 행당 20자씩 새겨져 있지만, 제20행에서 제22행까지는 18~19자씩만 있어서 전체 글자수는 430자 내외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글자 수는 비면의 288자와 주변의 발굴을 통하여 수습된 21자를 합쳐 309자이다.
오랫동안 땅속에 파묻혀 있었던 탓인지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는 거의 없지만, 윗부분이 파손되어 전체 내용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문장은 순수한 한문식이 아니라 신라식 이두문(吏讀文)과 한문이 섞여 있다. 서체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해서체(楷書體)이지만 예서풍(隸書風)이 강하게 남아 있다.
이 비는 이사부(伊史夫)를 비롯한 여러 명의 신라 장군이 왕명을 받고 출정하여, 고구려 지역이었던 적성을 공략하고 난 뒤, 그들을 도와 공을 세운 적성 출신의 야이차(也次)와 가족 등 주변인물을 포상하고 적성지역의 백성들을 위로할 목적에서 세웠다. 여기의 이사부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사부(異斯夫)로 알려졌다.
이 비에는 기존의 문헌자료에 보이지 않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어 신라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예를 들면 대중등(大衆等) ․군주(軍主) ․당주(幢主) ․사인(使人) 등의 명칭을 통해 중앙과 지방의 통치조직 및 촌락의 존재양상을 보다 깊이 파악할 수 있고, 국법(國法) ․적성전사법(赤城佃舍法) ․소자(小子) ․소녀(小女) ․여(女)와 같은 용어를 통해서 율령(律令)과 조세제도 등 사회사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다.
대동법 [ 大同法 ]
조선시대 선조 이후 공물(貢物: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
조선시대 공물제도는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였는데, 부담이 불공평하고 수송과 저장에 불편이 많았다. 또 방납(防納:代納), 생산되지 않는 공물의 배정, 공안(貢案)의 증가 등 관리들의 모리 행위 등의 폐단은 농민부담을 가중시켰고 국가수입을 감소시켰다.
이에 대한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조광조(趙光祖)․이이(李珥)․유성룡(柳成龍) 등은 공물의 세목을 쌀로 통일하여 납부하도록 주장하였다. 특히 이이는 1569년(선조 2) 저서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대공수미법(貸貢收米法)을 건의하였으나 실시하지 못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전국의 토지가 황폐해지고 국가수입이 감소되자 1608년(선조 41)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한백겸(韓百謙)의 건의에 따라 방납의 폐단이 가장 심한 경기도부터 실시되었다. 중앙에 선혜청(宣惠廳)과 지방에 대동청(大同廳)을 두고 이를 관장하였는데, 경기도에서는 세율을 춘추(春秋) 2기로 나누어 토지 1결(結)에 8말씩, 도합 16말을 징수하여 그 중 10말은 선혜청으로 보내고 6말은 경기도의 수요에 충당하였다.
1624년(인조 2) 조익(趙翼)의 건의로 강원도에서도 실시되었는데, 연해(沿海)지방은 경기도의 예에 따랐고, 산군(山郡)에서는 쌀 5말을 베[麻布] 1필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였다. 1651년(효종 2) 김육(金堉)의 건의로 충청도에서 실시, 춘추 2기로 나누어 토지 1결에 5말씩 도합 10말을 징수하다가 뒤에 2말을 추가 징수하여 12말을 바치게 하였다. 산군지대에서는 쌀 5말을 무명[木綿] 1필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였다.
전라도에서는 1658년(효종 9) 정태화(鄭太和)의 건의로 절목(節目)을 만들어 토지 1결에 13말을 징수, 연해지방에서부터 실시하였다. 산군 26읍에서는 1662년(현종 3)부터 실시하였는데, 부호들의 농간이 적지 않아 현종 6년에 폐지되었다가 다음해에 복구되었고, 뒤에 13말에서 1말을 감하여 12말을 징수하였다.
경상도는 1677년(숙종 3)부터 실시하여 1결에 13말을 징수하였는데, 다른 지방과 같이 1말을 감하여 12말을 징수하였다. 변두리 22읍은 쌀을, 산군 54읍은 돈[錢]․무명을 반반씩, 그 외 4읍은 돈과 베로 반반씩 바치게 하였다. 1708년(숙종 34) 황해도에 대동법을 모방한 상정법(詳定法)을 실시하였는데, 1결당 쌀 12말을 징수하는 외에 별수미(別收米)라 하여 3말을 더 받았다.
대동법이 전국적으로(함경도와 평안도는 제외) 실시된 뒤 세액도 12말로 통일하였다. 산간지방이나 불가피한 경우에는 쌀 대신 베․무명․돈[大同錢]으로 대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 후에도 별공(別貢)과 진상(進上)은 그대로 존속하였다. 따라서 백성에게 이중 부담을 지우는 경우가 생겼으며, 호(戶)당 징수가 결(結)당 징수로 되었기 때문에 부호의 부담은 늘고 가난한 농민의 부담은 줄었으며, 국가는 전세수입의 부족을 메웠다.
대동법 실시 뒤 등장한 공인(貢人)은 공납 청부업자인 어용상인으로서 산업자본가로 성장하여 수공업과 상업발달을 촉진시켰다. 대동미는 1894년(고종 31) 모든 세납(稅納)을 병합하여 결가(結價)를 결정했을 때 지세(地稅)에 병합되었다.
도병마사 [ 都兵馬使 ]
고려시대의 국방회의기구(國防會議機構).
국가의 군기(軍機) 및 국방상 중요한 일을 의정(議政)하던 합의기관(合議機關)으로, 989년(성종 8) 양계(兩界)에 병마사(兵馬使) ․지병마사(知兵馬使) ․부사(副使) ․판관(判官) ․녹사(錄事)를 파견하여 방위임무를 맡게 하고, 중앙에서는 이를 통령(統領)하기 위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 ․중서령(中書令) ․상서령(尙書令) 등 최고관직자가 합의체를 구성, 국방문제를 협의하였다.
문종 때 이것을 확대 개편하고 도병마사로 개칭하여 최고 정무기관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5재(宰)가 판사(判事)를 겸하고, 군기(軍機)를 관장하는 중추원(中樞院)의 7추(樞)가 사(使)를 겸하여 중대한 일이 있을 때 회동하여 국방문제를 결정하였는데, 판관(判官) 이상의 관원들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무신란(武臣亂) 이후 기능이 마비되었다가 고종(高宗) 이후 몽골과의 투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기능이 재개되었는데, 기능면에서도 많은 변질을 가져와 국방문제뿐 아니라 국가의 모든 중대사에 관여하게 되었다.
1279년(충렬왕 5) 원(元)나라의 압력으로 관제가 개편됨에 따라 도병마사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개편되어 모든 국사를 합의 ․시행하는 최고 정무기관으로 상설되어 조선 개국 초까지 존속하다가 1400년(정종 2) 의정부(議政府)로 개편되었다.
도지법 [ 賭地法 ]
조선시대의 소작제도에서 소작료를 정하던 제도.
도조법(賭租法) ․도작법(賭作法)이라고도 한다. 소작료를 미리 협정하고 매년의 수확량에 관계없이 일정의 소작료를 징수하는 방법으로, 풍흉(凶)에따라 소작료가 변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는 집조법(執租法)과 정조법(定租法)이 있는데, 전자는 매년 수확하기 전에 지주가 간평인(看評人)을 보내 소작인과 함께 작황을 파악, 소작료를 정하는 방법이고, 후자는 미리 일정의 소작료를 정하여 징수하는 방법이다.
이때 지주들은 전년까지의 수확량과 소작료 징수액을 기록한 추수기(秋收記)라는 장부를 참작하여 정하였다. 이 방법은 주로 역둔토(驛屯土)와 궁방전(宮房田)에서 시행되었으며, 지역별로는 전라도에서 비교적 널리 시행되었다.
독서삼품과 [ 讀書三品科 ]
신라의 관리선발제도.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라고도 하며, 788년(원성왕 4) 유교정치사상에 입각한 정치운영을 목적으로 국학(國學) 내에 설치하였다. 학생들의 독서능력에 따라 성적을 3등급으로 구분하여 관리로 선발하는 데 참조하였다.
하품(下品)은 《곡례(曲禮)》 《논어》, 중품(中品)은 《곡례》 《논어》 《효경(孝經)》을 읽을 줄 아는 자, 상품(上品)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예기(禮記)》 《문선(文選)》을 읽어 그 뜻에 능통하고 아울러 《논어》 《효경》에도 밝은 자가 되었다. 특히 오경(五經) ․삼사(三史:사기 ․한서 ․후한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에 모두 능통한 자는 관리로 특별채용하였다.
그러나 신라 하대에 들어와 진골의 수가 늘어나고 진골귀족간의 왕위쟁탈과 세력갈등이 격화되면서 골품제가 폐쇄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자 관계진출도 학문적 능력보다는 출신신분이 중요시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또한 당(唐)나라로 유학가거나 그곳에서 관리로 활동하다 귀국하여 신라의 관리로 임용되는 경우도 빈번하였다. 그 예로 789년 자옥(子玉)이라는 사람을 양근현(楊根縣) 소수(少守:지방관직)로 임명하려 할 때 그가 문적(文籍) 출신이 아니라고 하여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으나 당나라 유학 경력이 인정되어 관리로 채용되었고, 802년(애장왕 1)에는 당나라에 유학하였던 양열(梁悅)이 두힐현(豆縣)의 소수로 임명되었으며, 최치원(崔致遠)도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로 있다가 귀국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이처럼 하대로 갈수록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 출신이 관직진출의 주류를 이룸에 따라 상대적으로 국학의 중요성은 점점 약해졌고 독서삼품과의 비중도 감소되었다. 그러나 독서삼품과의 시행은 관리임용의 기준을 학문적 능력에 둠으로써 골품제라는 신분에 의존하던 기존의 불합리한 관리선발방식을 지양하게 되었으며, 유학에 대한 이해를 높여 유능한 유학자를 많이 배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동국문헌비고 [ 東國文獻備考 ]
한국의 문물제도를 분류 ․정리한 백과전서적인 책.
구분 : 백과전서
시대 : 조선 영조 46년(1770)
목판본. 100권 40책. 영조의 명으로 1769년(영조 45) 편찬에 착수, 1770년에 완성되었다. 체재는 중국 《문헌통고(文獻通考)》의 예에 따라 상위(象緯) ․여지(輿地) ․예(禮) ․악(樂) ․병(兵) ․형(刑) ․전부(田賦) ․재용(財用) ․호구(戶口) ․시적(市) ․선거(選擧) ․학교(學校) ․직관(職官)의 13고(考)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그 후 이를 다시 증보, 고종 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라 하여 250권으로 간행하였다.
동국통감 [ 東國通鑑 ]
조선 성종 때 서거정(徐居正) 등이 신라에서 고려 때까지의 역사사실을 모아 편찬한 책.
활자본. 56권 28책. 세조 때 시작된 편찬작업은 1476년(성종 7)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로 고대사 부분을 마무리짓고 1484년 편찬되었으며, 여기에 사론(史論)을 보충하여 다음해 57권의 《신편동국통감》이 완성되었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이후의 사서(史書)를 수집하고 거기에 담긴 사론을 계승함으로써 이전의 유교적인 사관을 발전시키고 있다.
편년체(編年體)로 외기(外紀) ․삼국기(三國紀) ․신라기(新羅紀) ․고려기(高麗紀)로 나누어 서술하였는데, 외기는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의 상고사 부분이고, 삼국기는 삼국의 역사를 하나의 편년으로 묶고 무정통(無正統)의 시대로 서술하였다. 신라기는 669년(문무왕 9)부터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는 935년(태조 18)까지의 역사이며, 고려기는 936년부터 고려 멸망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시대구분은 정통사상에 입각한 것이지만 서술에 있어서는 명분론적인 관점도 보인다. 신화와 전설적인 것이 배제되고 역사적 교훈을 주는 사료들을 발췌하여 서술하였으며, 고려기에서 세가(世家)와 열전 부분이 강화된 것은 정치의 주체로서 국왕과 신하를 중시하였음을 말해준다.
기존의 사서에 있던 사론과 찬자의 사론이 아울러 실려 있으며, 군주와 신하의 명분을 중시하고 불교나 풍수지리설을 배격하였다. 유교적이고 사대적인 입장을 표방하고 있다 하여 신채호(申采浩)는 그 가치를 폄하하였지만, 당시 자국의 역사에 대한 이해, 관심과 역사 서술방법의 진전, 민족문화의 정리라는 점 등에서 그 중요성을 지적할 수 있다.
동사강목 [ 東史綱目 ]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안정복(安鼎福)이 저술한 국사책.
활자본. 20권 20책.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체제에 따라 고조선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로 서술한 것으로, 1778년(정조 2)에 완성되어 필사본으로 전하다가 1915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활자본은 본문 19권, 부록 3권으로 이루어졌으며, 책머리에 스승 이익(李翼)의 미완성 서(序)와 저자의 자서(自序) ․목록 ․범례 ․역대전수도(歷代傳授圖) ․지도 ․역대관직연혁도(歷代官職沿革圖)가 있고, 부록은 고이(考異) ․괴설(怪說) ․잡설(雜說) ․지리강역고정(地理疆域考正)으로 되어 있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정통으로 삼아 단군조선을 이에 부수시키는 등의 오류를 범하고는 있으나, 역대관직연혁도와 부록 중에 수록된 고증의 일부는 귀중한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정부지원 고전국역사업의 하나로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번역, 출간하였다.
동학농민운동 [ 東學農民運動 ]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군에서 시작된 동학계(東學系) 농민의 혁명운동.
규모와 이념적인 면에서 농민봉기로 보지 않고 정치개혁을 외친 하나의 혁명으로 간주하며, 또 농민들이 궐기하여 부정과 외세(外勢)에 항거하였으므로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1. 배경
조선 왕조의 봉건적 질서가 해이(解弛)하기 시작한 18세기부터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곧 농업․산업․수공업․신분제도 등 하부구조에서의 봉건적 구성의 붕괴가 바로 사회의식에 반영되어 실학(實學)의 발생과 평민의식의 대두를 보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단적인 실례로서 1811년(순조 11)에 있었던 홍경래의 난을 들 수 있으며, 그후 1862년(철종 13) 진주(晉州)의 농민봉기를 시초로 삼남 각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극도로 문란해진 삼정(三政)에 대한 반항으로, 이미 이때부터 혁명 발생의 역사적 배경은 조성되고 있었다.
혁명의 이념적 바탕이 된 동학은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풍수사상과 유(儒)․불(佛)․선(仙)의 교리를 토대로 서학(西學:기독교)에 대항하여 '인내천(人乃天):천심즉인심(天心則人心)'을 내걸고, 새로운 세계는 내세(來世)가 아니라 현세에 있음을 갈파하여, 당시 재야에 있던 양반계급은 물론 학정과 가난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가 커다란 종교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최제우를 체포, 1864년 사형에 처하였다. 교도들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궐기하여 혁명에 호소하자는 강경론이 대두되었고, 뒤에 그 동학군을 영도한 인물로 전봉준(全琫準)이 등장하였다.
2. 제1차농민운동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감행하여 조선을 일본의 시장화하는 한편, 조선에서 쌀을 반출해 감으로써 물가를 자극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이중으로 억압하였고, 일본인 어부들의 횡포는 조선 어민의 생활을 위협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기선(汽船)이 조선 연안에서 무역에 종사함은 물론, 세미(歲米) 운송을 위한 기선의 도입으로 종래의 조군(漕軍)과 선상(船商)은 몰락하게 되었고, 그 위에 세미운송의 책임자인 전운사(轉運使)의 횡포 또한 막심하였다.
이러한 절박한 사정 속에서 탐관오리의 횡포는 갈수록 가중되어 백성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 무렵 고부군수로 조병갑(趙秉甲)이 부임하였다. 신임 군수는 농민들로부터 무리한 세미를 거두어 들이고, 백성들에게 무고한 죄명을 씌워 2만 냥이 넘는 돈을 수탈하는가 하면 부친의 송덕비각(頌德碑閣)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1,000여 냥을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징수하였다. 또한 시급하지도 않은 만석신보(萬石新洑)를 축조한다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쌓게 하고, 가을에 수세(水稅)를 받아 700여 섬을 착복하는 등 온갖 탐학을 다하였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고부군민은 학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동학의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있는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을 선두로 마침내 울분을 터뜨렸다. 1894년 1월 10일 새벽, 1,000여 명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몽둥이와 죽창을 들고, ꡒ전운사를 폐지하라, 균전사(均田使)를 없애라, 타국 상인의 미곡 매점과 밀수출을 막아라, 외국상인이 내륙 각지로 횡행(橫行)하는 것을 막아라, 각 포구의 어염선세(漁鹽船稅)를 혁파하라, 수세 기타 잡세를 없애라, 탐관오리를 제거하라, 각읍의 수령․이서(吏胥)들의 학정 협잡을 근절시키라ꡓ는 등의 폐정개혁 조목을 내걸고 노도와 같은 형세로 고부관아에 밀어닥쳤다. 이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모두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전라감사(全羅監司)로부터 고부민란에 관한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군수 조병갑을 체포 압송하게 하는 한편, 용안현감(龍安縣監) 박원명(朴源明)을 후임으로 부임하게 하고, 이어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使)로 보냈다. 신임군수 박원명은 도내 형편을 잘 아는 광주사람으로, 그의 적절한 조처에 의하여 군중은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후에 부임한 안핵사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와 농민에게 전가시켜 농민봉기의 주모자를 수색하는 한편 동학교도의 명단을 만들어 이들을 체포하고자 하였다.
전봉준은 피신하여 정세를 관망하다가 이 기회에 고질의 뿌리를 뽑아야 하겠다고 판단, 인근의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교조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마침내 1894년 3월 하순,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構)․부안(扶安)․고창(高敞)․흥덕(興德) 등의 접주들이 각기 병력을 이끌고 전봉준이 먼저 점령한 백산(白山)으로 모여드니, 그 수가 1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전봉준은 대오를 정비한 다음 거사의 대의를 선포하였다. 곧, ①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말 것, ②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 ③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 병(兵)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권귀(權貴)를 진멸(盡滅)시킬 것 등의 4대강령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관리들의 탐학에 시달리던 인근 각처의 동학군과 농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앞을 다투어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태인의 동학군은 3월 29일 자발적으로 관아를 습격하여 관속(官屬)들을 응징하고 무기를 탈취하니 혁명군의 기세는 한층 더 충천하였다. 급보에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이재섭(李在燮) 등에게 명하여 영병(領兵) 250명과 보부상대(褓負商隊) 수천 명을 이끌고 동학군을 섬멸하라고 하였다. 4월 6일부터 7일 새벽까지 관군은 도교산(道橋山)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군과 황토현(黃土峴)에서 싸움을 벌였다. 관군은 철저히 참패하여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이 전사하였다.
사기충천한 동학군은 불과 한 달 만에 호남 일대를 휩쓸면서 관아를 습격하고 옥문을 부수어 죄수를 방면하였으며, 무기와 탄약을 빼앗고 이서가(吏胥家)에 방화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하고 군사 800을 파견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전주성(全州城)에 입성한 초토사 홍계훈의 경군(京軍)과 동학군은 월평리(月平里)의 황룡촌(黃龍村)에서 첫 대전을 벌였다. 일대 격전의 결과 경군은 대패하였고 동학군은 정읍 방면으로 북상, 4월 27일에는 초토사가 출진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주성을 쉽게 함락시켰다. 한편 홍계훈의 경군은 28일에야 전주성 밖에 이르러 완산(完山)에 포진하고 포격을 가하였다.
동학군은 여러 차례 반격을 가하였으나 소총과 죽창만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차차 수세에 몰려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하고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홍계훈은 이 때를 이용하여 선무공작(宣撫工作)을 시작하였으니, 즉 정부는 고부군수․전라감사․안핵사 등을 이미 징계하였고, 앞으로도 탐관오리는 계속 처벌할 것과 폐정(弊政)의 시정을 약속하였다. 때마침 앞서 요청하였던 청(淸)나라의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였고, 일본은 일본대로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에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학군은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지구전(持久戰)을 벌이는 것은 불리할 뿐더러 청․일 양군이 출동하여 국가의 안전이 염려되는 시기에 정부군과 싸운다는 것은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폐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정부군의 선무공작에 순응하여 전주성에서 철병하였다. 강화(講和)가 성립된 뒤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하고 동학군은 폐정개혁의 실시와 교세확장을 위하여 전라도 53주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으로 청군은 이미 상륙하였고, 일본도 톈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3. 제2차농민운동
전라도 각읍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정치의 실현을 꾀하던 전봉준은 대원군이 섭정하고, 청․일 양국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폐정개혁을 논할 때가 아니라 항일투쟁을 벌일 때가 왔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신곡(新穀)이 여무는 시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9월에 접어들자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孫華中)은 광주에서 궐기하였으며, 호남․호서의 동학교도와 농민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전봉준은 전주 삼례(參禮)를 동학군의 근거지로 삼고 대군을 인솔, 일단 논산에 집결한 뒤 3방향으로 나누어 공주(公州)로 향하였다. 또한 각지의 수령들도 수원․옥천 등 요지를 점거하여 동학군을 원호하였다.
한편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관군과 일본군은 급히 증원부대를 요청, 동학군이 공주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0월 21일 전봉준의 10만 호남군과 손병희의 10만 호서군은 관군과 일본 연합군을 공격, 혈전을 거듭하였으나 상대방의 막강한 근대적 무기와 화력으로 인해 우금치(于金峙)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여 논산․금구․태인 등으로 퇴각하였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서 재기를 꾀하던 중, 11월 배반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1895년 3월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이로써 미증유(未曾有)의 광범한 민중의 무장봉기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1년 동안에 걸쳐 30~40만의 희생자를 낸 채 끝났고, 이들의 개혁의지는 이후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쳐 위정자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정치적 혁신을 가져왔다.
목민심서 [ 牧民心書 ]
정조 때의 문신 ․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고금(古今)의 여러 책에서 지방 장관의 사적을 가려 뽑아 치민(治民)에 대한 도리(道理)를 논술한 책.
필사본. 48권 16책. 규장각도서. 저자의 《경세유표(經世遺表)》가 정부기구의 제도적(制度的) 개혁론을 편 것이라면, 이 책은 지방 관헌의 윤리적(倫理的) 각성과 농민경제의 정상화 문제를 다룬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순조 때 천주교(天主敎) 박해로 전라남도 강진(康津)에서 귀양 생활을 하는 동안에 저술한 것으로, 조선과 중국의 역사서를 비롯하여 여러 책에서 자료를 뽑아 수록하여 지방 관리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지방행정을 쇄신코자 한 것이다. 내용은 모두 12편(篇)으로, 각 편을 6조(條)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엮었다.
① 부임편(赴任篇):치장(治裝) ․사조(辭朝) ․계행(啓行) ․상관(上官) ․위사(事). ② 율기편(律己篇):칙궁(飭躬) ․청심(淸心) ․제가(齊家) ․병객(屛客) ․절용(節用) ․낙시(樂施). ③ 봉공편(奉公篇):선화(宣化) ․수법(守法) ․예제(禮祭) ․문보(文報) ․공납(貢納) ․요역(役). ④ 애민편(愛民篇):양로(養老) ․자유(慈幼) ․진궁(振窮) ․애상(哀喪) ․관질(寬疾) ․구재(救災). ⑤ 이전편(吏典篇):속리(束吏) ․어중(馭衆) ․용인(用人) ․거현(擧賢) ․찰물(察物) ․고공(考功). ⑥ 호전편(戶典篇):전정(田政) ․세법(稅法) ․곡부(穀簿) ․호적(戶籍) ․평부(平賦) ․권농(勸農). ⑦ 예전편(禮典篇):제사(祭祀) ․빈객(賓客) ․교민(敎民) ․흥학(興學) ․변등(辨等) ․과예(課藝). ⑧ 병전편(兵典篇):첨정(簽丁) ․연졸(練卒) ․수병(修兵) ․권무(勸武) ․응변(應變) ․어구(禦寇). ⑨ 형전편(刑典篇):청송(聽訟) ․단옥(斷獄) ․신형(愼刑) ․휼수(恤囚) ․금포(禁暴) ․제해(除害). ⑩ 공전편(工典篇):산림(山林) ․천택(川澤) ․선해(繕) ․수성(修城) ․도로(道路) ․장작(匠作). ⑪ 진황편(賑荒篇):비자(備資) ․권분(勸分) ․규모(規模) ․설시(設施) ․보력(補力) ․준사(竣事). ⑫ 해관편(解官篇):체대(遞代) ․귀장(歸裝) ․원류(願留) ․걸유(乞宥) ․은졸(隱卒) ․유애(遺愛)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 책은 농민의 실태, 서리의 부정, 토호의 작폐, 도서민의 생활 상태 등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는데, 한국의 사회 ․경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묘청의 난 [ 妙淸-亂 ]
1135~36년 고려 서경(西京:평양) 출신 술승(術僧) 묘청이 서경에서 일으킨 반란.
고려 제17대 왕 인종(仁宗)은 15세에 즉위하였으므로, 국내가 어지럽고 민심이 동요하여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이 횡행하였다. 이러한 풍조로 불안해진 국내정세와 유행하던 음양도참설을 교묘히 이용한 묘청은 인종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여, 국수주의적 입장에 서서 이미 지세(地勢)가 떨어진 수도 개경(開京:開城)에서 고려조 중흥의 명당인 서경으로의 천도(遷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나라 밖에서는 새로 일어난 금(金)나라가 고려를 엿보고 있어 불안한 정세를 자아냈고, 나라 안으로는 척신(戚臣) 이자겸(李資謙)이 자기의 셋째․넷째딸을 인종에게 바쳐 세력을 확대시켜 대권을 장악한 후, 스스로 왕위를 찬탈하려는 뜻을 품고 난을 일으켜 고려의 조정은 더욱 더 기강이 어지러워졌다. 묘청 일파는 역대 고려사회의 민심을 지배해온 도참설에 의거하여 국수주의적 배타주의를 표방하고, 인종의 용기를 북돋워 개경의 유교주의․사대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서경천도운동을 추진하였다.
원래 묘청을 인종에게 추천한 사람은 시인․문신(文臣)인 정지상(鄭知常)이었는데, 일관(日官) 백수한(白壽翰)과 더불어 서경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서경으로 천도하면 일신의 부귀뿐만 아니라 자손대대로 복을 누리게 된다고 주장하여, 왕의 측근자들과 조정의 대신들을 설득시켜 묘청을 성현(聖賢)으로 추천하여 모든 정사(政事)의 최고 고문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였다. 처음에는 유신들이 의심하여 반대했으나 결국 그들의 교묘한 음양설에 넘어가게 되어, 묘청 등은 인종의 서경행차에 성공하고 15조항의 유신정교(維新政敎)를 선포하였다. 1128년 다시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에는 대화세(大花勢)가 있으므로 그곳에 신궁(新宮)인 대화궁(大花宮)을 세우면 천하통일을 이루고, 금나라 및 그 밖의 많은 나라가 고려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이라 하여 서경천도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당시 인종도 이자겸․척준경(拓俊京) 등의 난으로 궁궐이 소실되자 그해 11월부터 신궁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묘청 일파가 지나친 농간을 부렸기 때문에 그것이 폭로되면서 유신들의 강경한 반대가 대두되었으며 민심 또한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와, 인종의 서경천도 중지명령까지 나오게 됨으로써 묘청 등의 서경천도운동은 좌절되었다. 이렇게 사태가 반전(反轉)하자 묘청은 35년 서경의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및 분사병부상서 유참(柳) 등과 반기를 들고 개경의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부류현(副留縣) 수령(守令) 이하 관리들을 잡아가두는 한편, 자비령 이북의 길을 막고 서북 여러 고을의 군대를 모두 서경으로 집결시킨 후,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라 선포하고,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불렀으며, 서북면의 모든 관청, 즉 주군수(州郡守)까지의 관리들을 서북인만으로 충당시킨 다음 개경으로 진격해 들어갈 뜻을 밝혔다.
이와 같은 묘청 등 서북인들의 반란에 부딪힌 개경의 중앙정부에서는 김부식(金富軾)을 평서원수(平西元帥)로 하는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김부식은 출정에 앞서 묘청 일파인 정지상․백수한․김안(金安) 등을 참수하고 좌․중․우 3군을 지휘하여 서북면으로 진격하였다. 관군이 안주(安州)에 이르는 동안 그 기세에 눌려 도중의 모든 반란군은 항복하고 서경에도 7~8차례 사람을 보내어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으므로, 승산이 없음을 안 반란군 주모자 조광 등이 묘청․유참 등의 목을 베어 항복의 뜻을 표시하고 죄를 용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조정에서는 조광 등의 죄를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였으므로 반란이 재연되어 이후 약 1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포위당한 평양성에서는 식량부족으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36년 2월 관군의 총공격으로 조광 등이 전사함으로써 반란은 끝났다. 결국 묘청의 난은 약 1년만에 진압되었으나, 묘청의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이나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은 자주정신에 입각한 민족적 기상의 표출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 無垢淨光大陀羅尼經 ]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에서 발견된 세계 최고(最古)의 통일신라 때 불경인쇄본(佛經印刷本).
1967년 9월 16일 국보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두루마리 1축(軸)으로 너비 약 8㎝, 전체길이 약 620㎝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목판(木板)으로 인쇄된 이 경문은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의 해체 ․복원공사가 진행되던 1966년 10월 13일 탑신부(塔身部) 제2층에 안치된 사리함(舍利函) 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이때 석탑 내부에서 함께 발견된 총 28점의 일괄유물이 67년 9월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경문은 한 폭(幅)에 55~63행, 한 행에 7~9자씩으로 되어 있으며, 상하(上下)는 단선(單線)이고, 필체는 힘찬 해서(楷書)로서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 특히 북위(北魏)의 서법(書法)을 연상하게 한다.
이 《다라니경》의 출간연대 상 ․하한(上下限)은 700년대 초에서 751년 사이로 추정하는데, 그 까닭은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집권한 15년 동안에만 주로 통용되고 그후에는 자취를 감춘 신제자(新制字) 4자(注[證] ․澍[地] ․全[授] ․葺[初])를 이 경문 속에서 발견할 수 있고, 또 최소한 석가탑의 건립연대인 751년을 그 하한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인경(印經)으로 알려진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百萬塔陀羅尼經)》(770년 인쇄)보다 20년이 앞서는 셈이고, 지질(紙質)이나 인경의 형태를 보더라도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신라에서 조판(雕板)되었음이 확실하므로, 한국 고인쇄문화(古印刷文化)의 높은 수준을 증명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백두산정계비 [ 白頭山定界碑 ]
1712년(숙종 38) 백두산에 세운 조선과 청(淸)나라 사이의 경계비.
정계비라고도 한다. 백두산이 청조(淸朝) 발상의 영산(靈山)이라 하여 그 귀속을 주장하던 청은, 1712년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을 보내어 국경문제를 해결하자는 연락을 해왔다. 조선에서는 참판(參判) 권상유(權尙游)를 접반사(接伴使)로 보내었으나, 청의 사절이 함경도로 입국함에 따라 다시 참판 박권(朴權)을 접반사로 출영(出迎)하게 하였다. 이때 조선측의 접반사는 산정에 오르지도 못하고 목극등 자신이 조선측의 접반사 군관(軍官) 이의복(李義復), 감사군관(監司軍官) 조태상(趙台相), 통관(通官) 김응헌(金應) 등만을 거느리고 산정에 올라가 거의 일방적으로 정계비를 세웠다.
그 지점은 백두산 정상이 아니라 남동방 4km, 해발 2,200m 지점이었으며, 비면(碑面)에는 위에 대청(大淸)이라 횡서하고 그 밑에 '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 勒石爲記, 康熙 五十一年 五月十五日'이라 각서(刻書)하고 양쪽의 수행원 명단을 열기하였다. 그뒤 1881년(고종 18) 청나라에서 길림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 흠차대신(欽差大臣) 오대징(吳大 ) 을 보내어 간도 개척에 착수하자,1783년 조선측은 어윤중(魚允中)․김우식(金禹軾)을 보내어 정계비를 조사하게 하고, 그 뒤 9월에 안변부사(安邊府使) 이중하(李重夏), 종사관 조창식(趙昌植)을 보내어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으나, 청은 토문(土門)이 두만강이라고 주장하여 아무런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그뒤 1909년 일제는 남만철도의 안봉선(安奉線) 개축 문제로 청나라와 흥정하여, 남만주에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지방을 넘겨주고 말았다. 이 비는 만주사변(滿洲事變) 때 일제가 철거하였다.
병인양요 [ 丙寅洋擾 ]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
대원군은 병인년(1866) 정초부터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을 비롯하여 남종삼(南鍾三) ․정의배(丁義培) 등 한국인 천주교도 8,000여 명을 학살하였다.
5월 한국을 탈출한 리델 신부는, 중국 톈진[天津]에 주둔한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천주교도 학살사건을 알렸다. 보고를 받은 베이징[北京]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는 청국정부에 공한(公翰)을 보내어 한반도로 진격할 결심을 표명하고, 이후 어떠한 사태가 발생하든 청국정부는 이에 간섭할 수 없다고 통고하였다. 청국 총리아문사무(總理衙門事務)의 공한을 통해 프랑스 동태를 알게된 대원군은,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변경(邊境)의 수비를 굳게 하였다.
9월 18일 리델 신부와 한국인 신도 3명의 안내로, 로즈 제독이 인솔한 프랑스군함 3척은 인천 앞바다를 거쳐 양화진(楊花津)을 통과하여, 서울 근교 서강(西江)에까지 이르렀다. 극도로 긴장한 조정에서는, 어영중군(御營中軍) 이용희(李容熙)에게 표하군(標下軍) ․훈국마보군(訓局馬步軍)을 거느려 경인연안을 엄중 경비하도록 하였다. 프랑스 함대는 이러한 경비태세에 불리함을 느꼈는지, 9월 25일 강류(江流) ․연변만 측량하고 중국으로 퇴거하였다.
그러나 10월 로즈 제독은 순양전함(巡洋戰艦) 게리에르를 비롯, 모두 함대 7척과 6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부평부(富平府) 물치도(勿淄島:芍藥島)에 나타났다. 10월 14일 이 중 4척 함정과 해병대가 강화부(江華府) 갑곶진(甲串津) 진해문(鎭海門) 부근의 고지를 점거하였다. 프랑스군은 한강수로의 봉쇄를 선언하고, 16일 전군이 강화성을 공격하여 교전 끝에 이를 점령하고, 무기 ․서적 ․양식 등을 약탈하였다. 조선은 이경하(李景夏) ․신헌(申櫶:申觀浩) ․이기조(李基祖) ․이용희 ․한성근(韓聖根) ․양헌수(梁憲洙) 등 무장들에게, 서울을 위시하여 양화진 ․통진(通津) ․문수산성(文殊山城) ․정족산성(鼎足山城) 등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19일 일단 프랑스측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선교사 처단의 합법성과 프랑스함대의 불법 침범을 들어 퇴거할 것을 통고하였다. 로즈는 회답을 통하여 선교사 학살을 극구 비난하고, 그 책임자를 엄벌할 것과,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자기와 조약의 초안을 작성하라고 맞섰다. 10월 26일 프랑스군 약 120명은 문수산성을 정찰하려다 미리 잠복, 대기중인 한성근의 소부대에게 27명이 사상되는 등 처음으로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다. 이로부터 민가 ․군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포격을 가했으며, 이러한 만행은 황해도 연안(延安)에까지 미쳤다.
11월 7일 프랑스 해병 160명은 대령 올리비에의 지휘로 정족산성을 공략하려다가 잠복 ․대기 중인 양헌수가 이끈 500명 사수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받아 사망 6, 부상 30여 명의 손실을 입고 간신히 갑곶으로 패주하였다. 정족산성에서의 참패는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게 저상시켜, 로즈 제독도 조선 침공의 무모함을 깨닫고 철수를 결정하였다.
11월 11일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점거한 강화성을 철거하면서, 장녕전(長寧殿)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앞서 약탈한 은금괴(銀金塊:당시 화폐로 환산하여 3만 8000달러)와 대량의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났다. 이로써 세계정세에 어두운 대원군은 그 기세를 돋구어,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는 등 쇄국양이(鎖國攘夷)정책을 더욱 굳히고, 천주교 박해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구미열강은 이를 계기로 조선을 청국의 종속국가가 아닌 독립한 주권국가로 인식하여, 종래의 한 ․청 관계를 재검토하였다. 프랑스군이 탈취한 많은 서적 ․자료 등은, 뒷날 유럽사람들이 한국 ․동양을 연구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병자호란 [ 丙子胡亂 ]
1636년(인조 14) 12월~16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의 싸움.
1627년 후금(後金)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하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과 결전(決戰)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몽골․한인(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白馬山城:義州)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고, 14일 적은 개성(開城)을 통과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강화유수 장신(張紳)을 주사대장(舟師大將)으로,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강화․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神主)와, 세자비․원손(元孫)․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종실(宗室)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등에게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도록 격문(檄文)을 발하였으며, 명나라에 급사(急使)를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陣中)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 거의 모두 굶어죽고 얼어죽었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露宿)한 장수․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相憲) 등 주전파(主戰派)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우선 인조가 친히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되, 양국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때마침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된 소식을 들어,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항복조건을 교섭하게 하였다. 1월 28일 이에 청군은 용골대․마부대를 보내 다음과 같은 강화조약 조항을 제시하였다.
①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책인(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중국황제의 생일)․정조(正朝)․동지(冬至)․천추(千秋:중국 황후․황태자의 생일)․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등이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빈궁(嬪宮)․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후에는 많은 고아들의 수양(收養)문제와, 수만에 이르는(어느 기록에는 50만) 납치당한 이들의 속환(贖還)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청나라 군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이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30냥이고 대개 150~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서 비싼 경우 1,500냥에 이르렀다. 속환은 개인․국가 모두 그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여기에 순절(殉節)하지 못하고 살아돌아온 것은 조상에 대해 죄가 된다 하여,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문제가 사회․정치문제로 대두하였다. 1645년 10년의 볼모생활 끝에 세자와 봉림대군은 환국하였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은 볼모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北伐)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향·소·부곡 [ 鄕·所·部曲 ]
신라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존속한 특수한 지방하급 행정구획.
향·소·․부곡의 사람들은 일반적인 양민과 달리 그 신분이 노비(奴婢) ․천민에 유사한 특수한 열등계급이었다. 그 발생은 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정복전쟁(征服戰爭)에 패배하였거나 투항 또는 귀순한 집단지, 촌락 본래의 형태인 공동체의 보존과 사회계층의 분화에 따른 예속관계와의 대립 ․모순, 또는 반역죄인의 집단적 유배지, 귀화인의 집단부락, 기타 특수한 생산노비의 집단거주 등에서 연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사회발전에 따른 공동체의 통합과 붕괴, 계급분화에서 야기된 것으로 이해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조선 전기에는 13개의 향 ․소 ․부곡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그 이전에 있던 것으로 파악된 것은 향 138, 소 241, 부곡 406 등 모두 785개가 있던 것으로 전한다.
이 중에서 부곡은 217개가 신라의 본거지인 경상도 지방에 집중되어, 부곡의 전성기가 신라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향 ․부곡은 대체로 같은 것으로 보이며 농업생산에 치중하였으나, 소는 수공업 생산을 담당하였다. 부곡이라는 말은 본래 중국에서 한(漢)나라 때는 군오(軍伍)의 뜻이었고, 위(魏) ․진(晉) ․남북조시대에는 관사(官私)의 병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뒤 당나라 때는 천민(賤民)의 칭호로 변하여 양민과 노비와의 중간층을 이루었다가 명나라 때 이르러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러한 신분적 의미와 함께 행정구획으로도 사용하였다. 부곡민은 매매 ․양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노비보다 신분적 지위가 높다고 할 수 있으나, 이들도 역시 천적(賤籍)에 따라 장악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형식은 지방의 호장(戶長)이 주 ․군 ․현의 행정기관을 매개로 하여 간접적으로 이들의 천적을 장악하였다. 이 부곡이 붕괴된 원인은 가부장적 대가족 구성으로부터 단혼가족으로의 분화와 천인의 반란, 대외전쟁 등에 기인하며, 그러한 변화과정과 아울러 붕괴의 법제적 조치라고 할 수 있는 신라시대의 9주(州) 창설, 고려 성종 때의 12목(牧) 설치, 조선 건국 초의 행정구획 재편 등이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한편, 소는 그 발생이 향 ․부곡에 뒤지고 있어, 고려시대 군현제(郡縣制) 확립의 일환으로 처음 실시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소는 중앙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물품을 생산 ․공급하는 기구였으며, 주민의 신분은 공장(工匠)이었다. 예컨대 자기소(磁器所) ․철소(鐵所) ․은소(銀所) ․금소(金所) ․동소(銅所) ․사소(絲所) ․지소(紙所) ․주소(紬所) ․와소(瓦所) ․탄소(炭所) ․염소(鹽所) ․묵소(墨所) 등의 명칭으로 수공업 생산의 중요 부분을 차지하였다.
소는 향·부곡이 호장 등 토착관리가 통제하던 것과는 달리, 국왕의 권한 아래에서 소속 주 ․군 ․현의 기관을 통해 직접 그들의 천적이 장악되었다. 부담하는 공물(貢物)도 그 부과와 징수가 보다 직접적으로 중앙정부와 결합되었으며, 수취(收取)도 매우 가혹하였다. 소도 역시 12세기 후반 이후 쇠퇴하였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국가의 수요가 소의 생산능력을 초과하게 되자, 그 부담에 고생하던 소 주민들의 저항운동이 격화되어 그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한 데 있다. 한편, 이를 더욱 조장한 것은 이 시기 이후 한국의 사회적 ․정치적 변동, 즉 대토지 소유의 증가, 귀족층의 항쟁, 대외 전쟁 등의 계속으로 그 영향이 소에 직접 ․간접으로 끼쳐 양적인 감소와 질적인 변화를 촉진하였다.
소는 조선 전기에 이르러 지방관이 없는 행정구획의 정리로, 15세기 후반에는 군 ․현으로 승격되거나 소속 군 ․현에 흡수되어 완전 소멸하였다. 이같은 향 ․소 ․부곡과 일반 군현의 행정구획과의 구분 기준은 호구(戶口)의 다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부곡 중에는 현보다도 많은 호구를 갖는 예도 많았고, 또 반란 등이 있던 군현은 부곡으로 강등되거나 반대로 공로가 있는 부곡은 현으로 승격하는 수도 있었다. 향 ․소 ․부곡의 주민들은 양민에 비해 신분적인 차별을 받았다.
예를 들면, 국학(國學)에 대한 입학이 금지되고, 형벌은 노비와 동등하였으며, 자손의 귀속도 잡척인(雜尺人)과 동일한 대우, 즉 양민과의 소생도 그대로 부곡에 남아야 하였고, 승려가 되는 것도 금지되었다. 향 ․소 ․부곡의 해체와 붕괴는 특수한 하층 지방행정 조직에서 벗어나 일반 지방행정 조직으로 재편성되는 과정이며, 고려의 군현제에서 조선의 군현제로의 이행과정이었고, 이러한 속에서 전체 국민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 三國史記 ]
고려시대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
1145년(인종 23) 국왕의 명령을 받은 김부식의 주도 아래 최산보(崔山甫) 등 8명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 등 2명의 관구(管勾)가 편찬하였다. 이들은 자료의 수집과 정리에서 함께 작업했지만,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와 머리말, 논찬(論贊) 및 사료의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은 김부식이 직접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진삼국사기표〉에는 ꡒ사대부가 우리 역사를 잘 알지 못하니 유감이다. 중국 사서는 우리 나라 사실을 간략히 적었고, 《고기(古記)》는 내용이 졸렬하므로 왕 ․신하 ․백성의 잘잘못을 가려 규범을 후세에 남기지 못하고 있다ꡓ고 하여 편찬 동기를 기록하고 있다.
구성은 크게 본기(本紀) 28권, 지(志) 9권, 연표(年表) 3권, 열전(列傳) 10권으로 이루어졌다.
【본기】 신라 12권(신라 5, 통일신라 7), 고구려 10권, 백제 6권으로 구성되어 신라에 그렇게 편중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정치 ․천재지변 ․전쟁 ․외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정치 부문은 축성(築城)과 순행(巡幸), 관제 정비와 인사 이동, 조상과 하늘에 대한 제사라는 종교 관례 등이 서술되어, 당시 삼국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축성은 백제가 가장 많아 늘 전쟁을 치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순행은 1 ․2월에 많이 했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수렵을 목적으로 한 것이 많았던 반면에, 신라는 구휼과 권농 및 수렵 등 다양한 목적을 띠고 있었다. 인사 이동은 신라에서 가장 빈번하였으며, 종교 관례는 백제에서 많이 하였다. 천재지변 부문은 혜성 ․유성 ․일식 ․가뭄 ․홍수 등 600여 회의 천재와, 지진 ․화재 등 330여 회의 지변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주로 정치적 사건을 예언하는 기능을 하였다. 전쟁 부문은 전체 440여 회의 전쟁이 발생하는데 대체로 고구려는 이민족, 백제는 신라와 전쟁하였다. 외교 부문은 620여 회의 교섭기록이 있는데 주로 조공(朝貢)을 중심으로 한 대중국 외교가 많았다. 물론 삼국은 독립국가로서 외교관계를 맺은 것이며 중국에 종속된 것은 아니었다.
【연표】 상 ․중 ․하로 구성되었는데 내용이 소략하다. 상(上)은 BC 57년(박혁거세 즉위)부터 274년(미추왕 13), 중(中)은 275년(미추왕 14)부터 608년(진평왕 30), 하(下)는 608년(진평왕 30)부터 935년(경순왕 9) 신라가 멸망한 다음해인 936년 후백제의 멸망까지 기록되어 있다.
【지】 제1권은 제사와 악(樂), 제2권은 색복(色服)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 제3~5권은 신라 지리, 제6권은 고구려 ․백제 지리, 제7~9권은 직관(職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지리지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통일 뒤에 넓혀진 영토 관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사지는 5묘(廟) ․3사(祀)에 대한 설명이 많이 차지하고 있고, 악지는 악기 ․가악(歌樂) ․무(舞) ․악공, 직관지는 중앙관부 ․궁정관부 ․무관과 외직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열전】 기전체의 역사서로서는 열전이 빈약한 편이다. 전체 69명을 대상으로 했지만 특별히 항목을 분류하지는 않았다. 제1~3권은 김유신 열전이고, 제4권은 을지문덕 ․거칠부 등 8명의 열전, 제5권은 을파소(乙巴素) 등 10명의 열전, 제6권은 강수(强首) ․최치원 등 학자들의 열전, 제7권은 관창(官昌) ․계백(階伯) 등 순국열사 19명의 열전, 제8권은 솔거(率居) ․도미(都彌) 등 11명의 열전, 제9권은 연개소문 ․창조리(創助利) 등 반신(叛臣)의 열전, 제10권은 궁예 ․견훤 등 역신(逆臣)의 열전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 동안 이 책에서 가장 주목되어 왔던 것은 사론(史論)의 성격을 지닌 논찬(論贊)이다. 논찬은 신라본기 10개, 고구려본기 7개, 백제본기 6개, 열전 8개 등 모두 31개가 있다. 내용은 주로 유교적 덕치주의, 군신의 행동, 사대적인 예절 등 유교적 명분과 춘추대의를 견지한 것이지만 반면에 한국 역사의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신채호 등이 비난한 것처럼 사대적인 악서(惡書)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이 단순히 사대주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은 이것이 편찬된 시기와도 관련된다. 즉 이 책은 고려 귀족문화가 최고로 발전하던 시기의 산물이었다. 이런 시대는 대체로 전 시기의 역사를 정리하는 때인데, 특히 당시에는 거란 및 여진과 전쟁한 뒤 강력한 국가의식이 대두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단지 유교정치 이념의 실현만이 아니라 국가의식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편찬되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이 책은 전근대 역사서의 특징인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객관성을 유지했는데, 이를 유지하기 위해 《고기》 《신라고사(新羅古史)》 《구삼국사(舊三國史)》 《삼한고기(三韓古記)》와 최치원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및 김대문의 《화랑세기》 《고승전》 《계림잡전》과 《삼국지》 《후한서》 《위서(魏書)》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북사(南北史)》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오히려 한국 전근대 역사서술을 한 차원 높여주는 역할을 했는데 이 점은, 첫째 삼국을 1세기부터 완성된 국가로 파악하고 국왕을 절대적 지배자로 이해했으며, 둘째 천재지변과 인간활동을 연결시키면서 역사를 바라보고 국왕의 정치행동을 연결시켰으며, 셋째 역사를 교훈을 위한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넷째 강한 국가의식과 자아의식을 강조하였고, 다섯째 역사에서의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였다는 것에 잘 나타난다.
책은 1174년(명종 4) 사신을 통해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전에 초판을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13세기 후반에 성암본(誠庵本)이 만들어졌는데, 현재는 일부만 일본 궁내청(宮內廳)에 소장되어 있다. 다음으로 1394년(태조 3)에 3차 간행, 1512년(중종 7)에 4차 간행이 있었다. 4차 간행은 현재 완질의 형태로 옥산서원과 이병익(李炳翼)이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1760년(영조 36)에 간행된 것이 있는데, 러시아과학원 동방연구소 상트페테르부르크지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95년 서울대학교 허성도(許成道)가 25년의 노력 끝에 CD-ROM책을 출판하였다.
상평창 [ 常平倉 ]
중국․한국에서 곡가조정(穀價調整)을 위하여 국가에서 설치한 창고.
'상평'이란 상시평준(常時平準)의 약어이다. 즉 풍년이 들어 곡가가 떨어지면, 국가는 곡물을 사들여서 곡가를 올리고, 흉년이 들어 곡가가 폭등하면 국가는 상평창의 곡물을 풀어서 곡가를 떨어뜨린다. 또는 수확기에 사들여서 단경기(端境期)에 방출하는 방법 등으로 곡가의 부당한 변동을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정책의 배후에는 곡가의 변동에 따라 생활을 위협받는 일반농민을 보호하고, 반대로 그에게서 부당한 이윤을 취하는 상인의 활동을 억제하려고 하는 의도, 즉 중농억상사상(重農抑商思想)이 깔려 있다.
이 이름의 창고가 설치된 것은 BC 54년 전한(前漢)의 선제(宣帝) 때에 대사농중승(大司農中丞) 경수창(耿壽昌)의 건의에 따라 설치한 것이 최초이다. 그후 상평창은 출납을 관장하는 관리의 부정 등으로 개폐(改廢)가 거듭되면서도 역대 왕조가 이 정책을 답습하였으며, 수(隋)․당(唐) 나라 때에는 각 주(州)에 설치되었고, 청(淸)나라 때에는 각 주현(州縣)에 설치되었다.
한국에서는 고려 때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곡물을 중심으로 하여 물가를 조절하던 기관으로 '흉년에는 백성들을 다치지 않게 하고(구휼하고), 풍년에는 농민들을 손해보지 않게 한다(饑不傷民 豊不損農)'는 정책에서 나온 것이다. 풍년에 곡가가 떨어지면 관(官)에서 시가보다 비싼 값으로 곡물을 사들여 비축하였다가, 흉년에 곡가가 오르면 시가보다 싼값으로 방출함으로써 곡가를 조절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제도는 993년(고려 성종 12) 처음으로 양경(兩京:개성․평양)과 12목(楊․黃․海․忠․淸․公․全․羅․昇․尙․晉․廣)에 두었는데, 포(布) 32만 필로 쌀 6만 4000섬을 사들여, 그 중 5,000섬은 상경의 경시서(京市署)에 비축하여, 대부시(大府寺)와 사헌대(司憲臺)에서 시기를 보아 방출하게 하였다. 나머지 5만 9000섬은 서경과 주군창(州郡倉) 15개소에 나누어 보관하였다가, 서경의 것은 분사(分司)의 사헌대에, 주군창의 것은 각각 지방관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이 제도는 그대로 존속 시행되었는데, 1608년(선조 41) 선혜청(宣惠廳)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신간회 [ 新幹會 ]
1920년대 후반에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결성된 대표적인 항일단체.
1927년 2월 ꡐ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ꡑ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이다. 안재홍(安在鴻)․이상재(李商在)․백관수(白寬洙)․신채호(申采浩)․신석우(申錫雨)․유억겸(兪億兼)․권동진(權東鎭) 등 34명이 발기했다.
정강정책(政綱政策)은 ① 조선민족의 정치적․경제적 해방의 실현, ② 전민족의 현실적 공동이익을 위하여 투쟁함, ③ 모든 기회주의 부인 등이었다. 초대 정․부회장에 이상재와 권동진이 각각 추대되었으며, 35명의 간사와 하부조직으로 총무․재무․출판․정치문화․조사연구․조직․선전 등 7개 부서를 두었다. 그러나 주요 직책을 민족주의 진영에서 주도하여 사회주의 진영의 불만을 샀다.
내부적으로 좌우익의 갈등은 있었지만, 신민회는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예속의 탈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의 쟁취, 청소년․여성의 평형운동 지원, 파벌주의․족보주의의 배격, 동양척식회사 반대, 근검절약운동 전개 등을 활동목표로 삼아 전국에 지회(支會)와 분회를 조직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930년에는 전국에 140여 개의 지회와 3만 9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으며, 일본에까지 조직된 각 지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일본의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는 ꡐ배일선인(排日鮮人) 가운데 저명한 인물은 거의 여기에 가입하였고…이들이 집회 등에서 하는 언동으로 보아 이 운동의 도달점은 조선의 독립에 있음을 알 수 있다.ꡑ라고 당시 신간회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신간회의 세력이 이렇게 성장하자, 일제의 탄압이 거세져서 대규모 집회를 열 수 없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일제에 대해 학생운동의 탄압을 엄중 항의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지향한 민중대회를 열 것을 계획했다가, 조병옥(趙炳玉)․이관용(李灌鎔)․이원혁(李源赫) 등 주요 인사 44명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인사 가운데 조병옥 등 6명은 실형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신간회의 뿌리가 흔들리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만든 단체였지만, 민족주의 진영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데 대해 사회주의 진영의 불만이 높았다. 이들은 신간회의 주요 간부들이 투옥된 사이를 이용하여 해산운동을 벌였으며, 1931년 5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산을 결의함으로써 발족한 지 4년만에 해산되었다.
신미양요 [ 辛未洋擾 ]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사건.
당시 대(對)아시아팽창주의정책을 추진한 미국은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사건을 계기로 두 차례 탐문항행을 실시하면서 셔먼호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1871년 조선을 침략하였다. 주청전권공사 F.F.로우가 전권을 위임받고, 조선원정을 명령받은 아시아함대 사령관 J.로저스는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해군과 육전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5월 16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 항구를 출발하였다. 19일 남양만에 도착한 미군은 뱃길을 탐사하면서 북상, 물치도를 본 함대의 정박지로 정하였다. 미군은 조선에 탐측 승낙을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 해협 수로의 측량과 정찰을 목적으로 두 척의 군함을 파견하였다. 당시 밖으로 강력한 쇄국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은 미군의 불법 영해침범을 경고하고 즉시 철수를 요구하였다.
미군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광성진으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경고용 포격을 가하였고 이에 미군은 일단 물러났다. 그러나 미군은 조선군의 경고용 사격을 빌미로 삼아 오히려 조선정부에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조선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미군은 6월 10일 포함 2척을 앞세우고 육전대원 644명을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하고, 이어 덕진진 ․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그러나 6월 11일의 광성진전투에서 미군 역시 피해가 많아 이튿날 물치도로 철수하였다. 미군은 이곳에서 조선정부를 상대로 위협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단호한 쇄국정책과 조선 민중의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조선에서 아무런 성과없이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아직 봉건적 체제에 머물러 있던 조선이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운 프랑스와 미국의 두 차례에 걸친 무력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조선 민중의 반침략 의지 때문이었다.
신민회 [ 新民會 ]
1907년에 국내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
1907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보안법․신문지법 등의 악법을 만들어 반일적 색채를 띤 계몽운동을 탄압함에 따라, 사회계몽운동가들이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이다. 안창호(安昌浩)의 발기로 창립된 이 단체의 회원들은 대부분 1896년도에 결성되어 2년 동안 활동하다 와해된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청년회원들이었다.
중심인물로는 회장 윤치호(尹致昊), 부회장 안창호, 유학자 출신의 장지연(張志淵)․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 청년장교 출신의 이동휘(李東輝)․이갑(李甲), 평양지방의 자산가인 이종호(李鍾浩)․이승훈(李昇薰), 그리고 안태국(安泰國)․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 등이었다.
신민회의 목표는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체(政體)를 공화정체로 한다고 하여, 이전의 주장인 입헌군주제를 탈피했다는 점에 큰 특징이 있었다. 또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의 양성을 주장했고, 실력의 양성을 위해 국민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신민(新民), 신민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자신(自新), 자신을 위한 신사상, 신윤리, 신학술, 신모범, 신개혁을 주창했다.
비밀결사인 만큼 엄격한 심사를 거쳐 회원을 받아들였으며, 조직은 총본부 산하에 감독부(1도에 1개소), 총감소(總監所:5군 이상을 합함), 군감소(郡監所:1군에 1개소), 반(班)의 종적인 형태로 구성했으며, 당사자 2명 이상은 서로 알지 못하게 했다. 회원은 전국에 걸쳐 800여 명에 이르렀는데, 서북지방의 그리스도교인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고 신흥시민층과 신지식층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폭넓은 활동을 전개했다.
① 교육구국운동 : 신민회 회원들에 의해서 설립된 학교는 수십 개에서 10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서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는 완전한 시설을 갖춘 중학교였으며, 강화에 중학교 본교를 둔 보창학교(普昌學校)는 강화군에만 21개 소학교 분교를 열었으며, 북부와 중부 각 지역에도 보창학교가 설립되었다. 신민회의 학교설립은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
② 계몽강연 및 서적․잡지 출판운동 : 계몽강연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함으로써 일반 국민들에게 애국주의, 국권회복, 민권사상, 구습타파, 자발적 의무교육실시, 민족단합의식 등을 고취했다.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이용했고, 최남선을 중심으로 1908년 11월에 창간한 잡지 《소년》 역시 신민회의 입장을 대변했다. 또한 출판물 보급과 사업연락을 위해서는 평양․서울․대구에 각각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합법적인 활동을 했으며, 민족문화와 국사학에 관심있는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는 외곽단체로서 출판사업을 이끌었다.
③ 민족산업진흥운동 : 민족산업 자본의 발흥을 위한 실업장려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일환으로 평양 마산동에 자기제조주식회사(瓷器製造株式會社)를 세운 것을 비롯하여 협성동사(協成同事)․상무동사(商務同事)․조선실업회사 등의 회사를 세웠으며, 사리원의 모범농촌 등을 주도했다. 이 사업은 신민회 재원의 확보에 도움을 주었지만, 취약한 자본으로 인해 일제의 대자본에 밀려 큰 성과를 낼 수 없었다.
④ 독립군 양성운동 : 국권회복을 위하여 의병운동을 지원했으며, 의병운동의 현대화를 위해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설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다. 이 계획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1910년 가을에 만주 일대에 후보지를 선정하고, 1911년 봄에는 만주 봉천성 유하현(柳河縣)에 신한민촌(新韓民村)을 건설해 단체 이주를 시작했으며,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신흥무관학교는 4년제 본과 외에 3개월․6개월의 속성과정을 두어 애국청년과 의병들에게 현대적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신민회의 활동은 1909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한일합병을 마무리지으려고 애국적 인사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면서 벽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일제의 주된 감시대상이던 안창호를 비롯한 이갑․이동휘․신채호․조성환(曺成煥) 등은 1909년에 이미 미국과 러시아령 연해주, 서북간도 등지로 망명했으며, 이회영․이시영(李始榮) 등 6형제와 회원 일부가 만주 독립군 기지로 이주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이 선언된 후, 신민회의 운동방향을 새로이 모색하려는 회의가 나라 안팎에서 열렸다. 양기탁․이동녕․안태국․김구(金九) 등 나라 안에 있던 신민회원은 서울의 양기탁 집에서, 나라 밖의 망명자들인 안창호․신채호․이갑 등은 중국 산둥성[山東省] 청도에서 모임을 가졌다. 두 회의에서 안창호의 준비론이 소수로 밀리고 독립전쟁론이 결정되었고, 이에 따라 신민회는 ꡐ독립전쟁에 대비하는 만주 이민계획과 무관양성ꡑ을 위해 청년들을 모아 만주로 이주시키고 이를 지원할 자금조달 책임을 지역별로 분담하여 비밀리에 활동했다.
그러나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사건을 계기로 신민회 조직이 드러나고 국내에 남아 있던 세력이 탄압을 받으면서 조직이 무너졌다. 신민회는 신채호가 비판하였듯이 비밀결사이면서도 스스로 비합법적인 반일활동을 회칙으로 부정함으로써 한말 계몽운동의 일반적 한계였던 합법주의와 문화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맹점이 있지만, 국권피탈을 전후하여 독립군기지 건설과 무장독립전쟁으로 운동노선을 전환함으로써 이후 만주와 중국에서 일어난 독립군전쟁의 실질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아관파천 [ 俄館播遷 ]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건양 1)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관에 옮겨 거처한 사건.
노관(露館)파천이라고도 한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세력의 배경으로 조직된 제3차 김홍집(金弘集)내각은 일세일원연호(一世一元年號) ․태양력 사용, 군제개혁, 단발령의 실시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명성황후의 살해와 단발령의 실시는 친일내각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국민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이범진(李範晉) ․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 세력은 친위대(親衛隊)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분산될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만회와 신변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의 희망에 따라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협의, 파천계획을 진행하였다.
이들은 미리 인천에 와 있던 러시아 수병(水兵) 150명과 포(砲) 1문을 서울로 이동하고 2월 11일 새벽 국왕과 왕세자를 극비밀리에 정동(貞洞)에 있던 러시아 공관으로 옮겼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김홍집 ․유길준(兪吉濬) ․정병하(鄭秉夏) ․조희연(趙羲淵) ․장박(張博) 등의 5대신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포살(捕殺) 명령을 내려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魚允中)은 군중에게 타살되고 유길준 ․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친일내각은 몰락하고 박정양(朴定陽:首相 ․內相) ․이완용(外相 ․學相 ․農相) ․이윤용(李允用:軍相) ․윤용선(尹容善:度支相) ․이범진(法相 ․警務使) 등의 친러파 정부가 구성되었는데, 중심인물은 이범진이었다. 신정부는 의병항쟁을 불문에 부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수습에 힘쓰고, 일본세력으로 개혁하였던 제도를 구제(舊制)로 환원하였다. 일시에 지지기반을 상실한 일본측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내세워 국왕의 조속한 환궁을 요청하였으나 고종은 ꡐ불안 ․공포의 궁전보다는 노국공관의 일실(一室)이 안정하니 당분간 환궁할 수 없다ꡑ고 거절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왕조의 보호국을 자처하게 된 러시아는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비롯하여 경원(慶源) ․종성(鐘城)의 채광권, 경원전신선(京元電信線)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 월미도 저탄소(炭所) 설치권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했다.
이에 구미열강(歐美列强)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여 경인(京仁) 및 경의선(京義線) 철도부설권 등 중요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외국에 넘어갔다. 아관파천 1년 간은 내정에 있어서도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밑에 놓이게 되어 정부 각부에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士官)이 초빙되고, 러시아 무기가 구입되어 중앙 군제도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었으며 재정도 러시아인 재정고문에 의해 농단되었다.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운궁(慶運宮:덕수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왕을 황제라 칭하여 중외에 독립제국임을 선포하였다.
왕오천축국전 [ 往五天竺國傳 ]
고대 인도의 5천축국을 답사한 여행기.
필사본. 1권 1책. 신라시대의 승려 혜초(慧超:704~787)가 727년(성덕왕 26)에 지은 책이다. 이 책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P.펠리오가 중국 북서 지방 간쑤성[甘肅省]의 둔황[敦煌] 천불동 석불에서 발견, 중국의 나옥진(羅玉振)이 출판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이 책에는 당시 인도 및 서역(西域) 각국의 종교와 풍속 ․문화 등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 때는 벌써 불타(佛陀)의 유적은 황폐하여 기울어져 가고 있었으며 사원은 있으나 승려가 없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느 큰 사원에는 승려가 3,000여 명이나 있어서 공양미가 매일 15석이나 소요되어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 곳도 있다고 하였다. 또한 대 ․소승(大小乘)이 구행(俱行)하고 있으나 곳에 따라 대승만 행하는 곳도 있고, 소승만 행하는 곳도 있으며, 북방에는 사원과 승려 및 신자가 많아서 조사설재(造寺設齋)할 때에는 아내와 코끼리까지 사시(捨施)하는 독신자(篤信者)도 있다고 하였다. 나체 생활의 풍속, 가봉뇌옥(枷棒牢獄)은 없고 벌전(罰餞)만 있는 법률, 장(醬)은 없고 소금만 있으며, 여러 형제가 아내 한 사람으로 같이 사는 것, 살생하지 않는 것, 흙솥에 밥을 짓는 것 등 여러 가지 색다른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운요호사건 [ 雲揚號事件(운양호사건) ]
1875년(고종 12) 9월 일본 군함 운요호의 불법침입으로 발생한 조선군과 일본군의 충돌사건.
강화도사건이라고도 한다. 조선측의 대일문호개방(對日門戶開放)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에, 일본은 열강세력에 앞서 조선에의 진출을 시도한 계획이 지연됨에 따라, 그 타개책으로 무력시위로써 조선당국을 굴복시키고자 군함 30척을 조선연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무력위협정책의 일환으로 운요호를 조선연해에 파견, 8월 21일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하고 담수(淡水)를 구한다는 구실로 보트에 군인을 분승시켜 연안을 정탐하면서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 포대까지 접근하였다. 이에 초지진 포대에서는 포격을 가하고 운요호에서도 맹포격으로 응수하여 포의 성능이나 포술이 그들에 비해 떨어지던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진(永宗鎭)에도 맹포격을 가하고 그들의 육전대(陸戰隊)까지 상륙시켜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 결과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을 내고 첨사(僉使) 이민덕(李敏德) 이하 400~500명에 이르는 수비병은 모두 패퇴하였고 대포 35문, 화승총 130여 정과 그 밖에도 무수한 군기 등을 약탈당하였으나 일본측은 2명의 경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이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측에 씌워 전권대사를 파견해서 힐문함과 아울러 무력을 배경으로 개항을 강요하였다. 이에 따라 양국 간에는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의 개국이 이루어졌다.
을미사변 [ 乙未事變 ]
1895년(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
갑오개혁을 통하여 깊숙이 조선 내정에 간여하게 된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박영효(朴泳孝)․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세력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 프랑스․러시아․독일 등 3국은 일본의 대륙침략 저지를 위해,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청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세력확장에 제동을 걸었다. 그동안 일본의 강압하에 내정개혁을 추진한 조선정부는, 러시아공사 K.베베르와 제휴하고 친일세력의 완전 제거를 위하여, 1895년 9월 6일 왕비시해 음모혐의로 전 내무대신 박영효에 대해 체포령을 내려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이미 8월에 민영환(閔泳煥)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로 등용한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魚允中)․김가진(金嘉鎭) 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李範晋)․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를 기용하여, 제3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어, 친미․친러세력이 우세하였다.
더구나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조선정부에 약속한 증여금 300만 원을 일본정부가 제공하지 않자, 조선정계에서는 배일세력이 증가하였다. 이에 일본측은 이노우에 대신 무인 출신 미우라를 주한일본공사로 파견하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한 신제도를 구제도로 복구하려고,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2개 대대의 훈련대도 해산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우라는 명성황후시해계획을 세우고, 1895년 10월 2일 하수인으로서 한성신보사(韓城新報社)에 있는 낭인(浪人)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安達]를 공사관으로 불러 6,000원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공덕리(孔德里) 아소정(我笑亭)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 외 일본군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 및 친일조선인까지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훈련대의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등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를 포섭하였다.
한편 정부에서는 군부대신 안경수(安壽)를 일본공사관에 보내어 훈련대해산과무장해제, 민영준(閔泳駿)의 궁내부대신 임명을 통고하였다. 일본은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하고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결행하였다.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일본인 자객들은, 서대문을 거쳐 우범선․이두황이 지휘한 조선 훈련대와 합류하여 광화문을 통과하였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으로, 이들의 대궐 침범을 제지하려다 충돌이 일어났다.
흉도(兇徒)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홍계훈을 살해한 다음, 이어서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玉壺樓)에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에 묻었다. 곧 새로 유길준(兪吉濬)․서광범(徐光範)․정병하(鄭秉夏)․김종한․권형진(權瀅鎭)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내각을 수립하였다. 명성황후시해 현장에는 고종․황태자 및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 그외 많은 조선인이 있어 진상을 낱낱이 목격하여,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졌다.
이에 구미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일본인의 사건 관여사실을 주장하고 나서자, 일본은 이의 처리방안으로서 미우라를 해임, 고무라[小村]를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임명하였다. 한편 미우라 등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구치하고, 형식적으로 관련혐의자에 대한 취조를 하였으며,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석방시켰다. 결국 을미사변은 항일의병활동의 원인과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계기가 되어,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국과 같은 지위로 떨어졌고, 일본의 식민지화계획에 차질을 가져왔다.
을사조약 [ 乙巳條約 ]
1905년(광무 9)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
을사보호조약․제2차한일협약․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을사늑약이라고도 한다. 제3차 러․일협약(露日協約) 체결을 계기로 러시아와 일본이 타협하여 일제의 한국 진출은 경제적인 면에 주력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은, 한국 전체의 철도부설권을 점차 획득하고 광산․삼림․어업․항시(港市)․온천 등에서 얻은 갖가지 이권과 함께 한국의 금수출․상무역(商貿易)까지 장악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 무렵 만주를 점령하던 러시아에 대해 영일동맹(英日同盟)을 체결한 영국과 일본이 철수요구를 하는 등 만주를 둘러싼 국제적인 관계는 더욱 미묘하게 진행되었다.
1903년 4월 러시아군이 만주의 마적과 함께 한만국경(韓滿國境)을 넘어서 용암포(龍岩浦)를 강제 점령하자 일본은 즉각 러시아의 철수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러시아는 오히려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을 중심으로 분할점령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일본측에서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 아래서 1904년 1월 23일 한국정부는 엄정 중립국임을 해외에 선포하였다. 2월 6일 39도선 문제와 만주문제로 대립하던 러시아와 일본이 국교를 단절하여 8일 뤼순[旅順]에서 첫 포성이 울렸고 이튿날 새벽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 서울로 입성하고 10일 대러시아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러시아와 일본은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러․일전쟁의 개시와 함께 23일 일본의 강요로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가 체결되었다. 의정서는 6개조로서 제2,3조에 한국 황실의 안전과 독립 및 영토보전을 보증한다고 되어 있으나 기타 조항은 모두가 주권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것이었다. 러일전쟁이 일본측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한국정부는 5월 18일자의 조칙(詔勅)으로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되었던 일체의 조약과 협정을 폐기한다고 선포하는 동시에 러시아인이나 러시아 회사에 할애하였던 이권도 전부 취소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심화시켜 8월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尹致昊)와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 사이에 〈외국인용빙협정(外國人傭聘協定)〉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이는 곧 일제의 한국재정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이었다.
한편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조정으로 러․일 양국의 강화회담이 포츠머스에서 열려 전문 15조, 추가 약관(約款) 2개조의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포츠머스회담). 한국에서의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한 조약은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에 따라 독립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것이었고 열강이 일본의 한국침략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이 되었다. 포츠머스회담의 내용상 전승(戰勝)의 대가로 부족한 것을 한국에서 보충하자는 일본 자체 내의 여론은 곧 1905년 11월 9일 일본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하여 하야시공사와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앞세우고 '보호'를 강행하려 하였다.
외교권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신협약안(新協約案)은 이토와 하야시를 거쳐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로 전달되었다. 이토는 하세가와와 함께 전후 3차례에 걸쳐 고종을 알현하였으며 11월 16일 정동(貞洞)의 손탁호텔에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이하 8대신을 위협하여 협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이어서 그들의 강요 아래 5시간이나 계속된 17일의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이토와 하야시는 일본 헌병 수십 명의 옹위 아래 회의장에 들어가 대신 각각에게 가부의 결정을 강요하였다.
이때 고종은 다만 "정부에서 협상 조처하라"고 하여 책임을 회피했을 뿐이며 한규설만 무조건 불가하다고 하였다. 한규설에 동조한 사람은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閑泳綺)와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이었고,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하여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은 모두 책임을 고종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성을 표시하였는데,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賦)이라 한다. 이토는 강제 통과된 협약안을 궁내대신 이재극(李載克)을 통해 황제의 칙재(勅裁)를 강요한 뒤 동일자로 한국 외교권의 접수, 일본 통감부(統監府)의 설치 등을 중요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 조인하고 18일에 이를 발표하였다.
이 조약의 체결 소식이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신문사 사장 장지연(張志淵)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게재함에 따라 전국에 알려져 국민들의 조약 체결에 대한 거부와 일제에 대한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이상설(李相卨)의 상소를 비롯하여 종1품 이유승(李裕承), 법부주사(法部主事) 안병찬(安秉瓚), 원임의정대신(原任議政大臣) 조병세(趙秉世),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閉泳煥), 전참찬(參贊) 최익현(崔益鉉), 특진관(特進官) 이근명(李根命), 종묘제조(宗廟提調) 윤태흥(尹泰興), 승지(承旨) 이석종(李奭鍾), 유림(儒林) 이건석(李建奭) 등이 강경하게 상소하였다.
한편 민영환은 상소로도 조약체결이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자 유서로써 전국민에게 경고하면서 자결 순국하였고, 뒤이어 조병세, 전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주사(學部主事) 이상철(李相哲), 평양대(平壤隊) 일등병(一等兵) 김봉학(金奉學), 주영공사(駐英公使) 이한응(李漢應) 등도 죽음으로써 일본에 항거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전개되어 전참판 민종식(閔宗植)이 홍주(洪州)에서 거병한 것을 비롯하여 전라도에서 최익현이, 충청도에서는 신돌석(申乭石)이, 경상도에서는 유인석(柳麟錫)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그 외 이근택․이완용․이지용 등을 암살하기 위해 개별적인 거사를 하기도 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은 주한일본공사관을 철폐하여 신설한 통감부로 이양하고 각지에 있던 영사관은 이사청(理事廳)으로 개편하는 <통감부 및 이사청관제>를 1905년 12월 20일에 공포함으로써 서울에는 통감부가 개설되고 개항장과 주요 도시 13개소에는 이사청이, 기타 도시 11개소에는 지청이 설치되었다. 통감부는 종래 공사관에서 맡았던 정무(政務) 이외에도 조선보호의 대권, 관헌의 감독권, 그리고 병력동원권도 보유하였다. 또한 조선의 시정을 감독하거나, 어떠한 정책의 시행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됨으로써 통감부는 명실공히 조선보호의 최고감독기관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1906년 프랑스 파리법과대학의 교수인 F.레이는 을사조약이 협상대표에 대한 고종의 위임장과 조약체결에 대한 비준서 등의 국제조약에 필요한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데다가 한글과 일본글로 된 조약문의 첫머리에도 조약의 명칭조차 없이 그대로 비어 있어 국제조약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그 법적 유효성을 주장하고 있어 그 후에도 계속 논란의 여지가 되고 있다.
임오군란 [ 壬午軍亂 ]
1882년(고종 19) 6월 일본식 군제(軍制) 도입과 민씨정권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구식군대의 군변(軍變).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점차 붕괴되고 대신 국내의 정세는 개국(開國)․개화(開化)로 향하게 되었다. 정권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守舊派)와 국왕과 명성황후측의 척족(戚族)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開化派)로 양분, 대립하게 되었으며 외교노선은 민씨정권이 추진한 문호개방정책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구미제국(歐美諸國)과의 통상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은 더욱 심해졌으며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백성들을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거듭되었다.
한편 개화정책에 따른 제도의 개혁으로 정부기구에는 개화파 관료가 대거 기용되었으며 1881년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고 이듬해에는 종래의 훈련도감․용호(龍虎)․금위(禁衛)․어영(御營)․총융(摠戎)의 5영(營)을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의 2영으로 개편하자 여기에 소속하게 된 구영문의 군병들은 자기들보다 월등히 좋은 대우를 받는 신설 별기군을 왜별기(倭別技)라 하여 증오하게 되었다. 구군영소속 군인들에게는 군량이 풍부하였던 대원군집정 시대와는 달리 13개월 동안 군료(軍料)가 밀려 불만은 고조되었고 불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군병은 민씨정권 이후 빈번하게 일어나는 군료미불 사태의 원인이 궁중비용의 남용과 척신들의 탐오에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특히 군료관리의 책임자인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병조판서 민겸호(閔謙鎬)와 경기도관찰사 김보현(金輔鉉)에 대해서는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1882년 6월 초 전라도조미(全羅道漕米)가 도착되자 6월 5일 선혜청 도봉소(都捧所)에서는 우선 무위영 소속의 구(舊)훈련도감 군병들에게 1개월분의 급료를 지불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혜청 고직(庫直)의 농간으로 겨와 모래가 섞였을 뿐 아니라 두량(斗量)도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아 군료의 수령을 거부하고 시비를 따지게 되었다. 군료의 지급 담당자가 민겸호의 하인이며 그의 언동이 불손하여 군병들의 격노를 유발시킴으로써 군료의 수령을 거부한 구훈련도감 포수(砲手) 김춘영(金春永)․유복만(柳卜萬)․정의길(鄭義吉)․강명준(姜命俊) 등을 선두로 하여 선혜청 고직과 무위영 영관(營官)을 구타하고 투석하여 도봉소는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민겸호는 주동자의 체포령을 내려 김춘영․유복만 등 4, 5명의 군인이 포도청에 잡혀갔다. 이어서 그들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 중 2명이 곧 사형되리라는 소문이 퍼지게 되어 군병들은 더욱 격분하였다(도봉소사건). 이에 김장손(金長孫)․유춘만(柳春萬:유복만의 동생)이 주동이 되어 투옥된 군병의 구명운동을 전개시키기 위해 통문을 작성하였다. 6월 8일에는 이최응(李最應)이 별파진(別破陣)을 동원하여 군변을 진압할 것을 국왕에게 건의했다는 소문이 퍼져 군병들은 더욱 흥분되어 도봉소의 군료시비사건은 정변으로 확산되었다. 6월 9일 김장손과 유춘만을 선두로 한 무위영 군병들은 무위대장 이경하(李景夏)의 집에 가서 민겸호의 불법과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으나 이경하는 군료관할의 권리가 없다는 것을 내세워 변백구해(辨白求解)하는 글을 써주고 민겸호에게 직접 호소하도록 하였다. 민겸호의 집 앞에 이르른 군민들은 도봉소 고직을 발견하여 민겸호의 집안으로 난입하게 되었으나 민겸호와 고직은 찾지 못한 채 가재도구와 가옥을 모두 파괴시키고 폭동을 일으켰다. 사태의 중요성을 생각하여 민씨정권의 보복이 있을 것이라 예상한 김장손과 유춘만 등은 운현궁(雲峴宮)으로 올라가 대원군에게 진정한 후 진퇴를 결정해주기를 요청하였다.
대원군은 이러한 군민의 소요사태에 대해 무위영 군졸 장순길(張順吉) 등에게 명하여 표면상으로는 효유선무하는 태도를 취하여 밀린 군료의 지급을 약속하며 해산하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김장손과 유춘만 등을 불러 밀계(密啓)를 지령하고 심복인 허욱(許煜)을 군복으로 변장시켜 군민들을 지휘하게 하였다. 대원군과 연결된 군민들은 좀더 대담하고 조직적인 행동을 개시하여 일대(一隊)는 동별영(東別營)의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약탈하여 포도청에 난입한 후 김춘영․유복만 등을 구출하고 이어서 의금부(義禁府)를 습격하여 척사론자(斥邪論者)인 백낙관(白樂寬) 등 죄수들을 석방시켰다. 다른 일대는 경기감영을 습격하여 무기를 약탈하고 나머지 일대는 강화유수(江華留守) 민태호(閔台鎬)를 비롯한 척신과 개화파 관료의 집을 습격 파괴하였다. 군민들은 이날 저녁에 일본공사관을 포위 습격하자 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 등 공관원 전원이 인천으로 도피하였다. 또 한편의 군민들은 별기군병영 하도감(下都監)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공병소위를 살해하고 일본순사 등 일본인 13명을 살해하는 등 일본 공사관 습격을 마지막으로 하여 이날의 폭동은 끝났다.
이튿날은 전날보다 더 강력해진 폭동군민들이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 흥인군(興寅君) 이최응과 호군(護軍) 민창식(閔昌植)을 살해하고, 창덕궁 돈화문(敦化門)에 육박한 후 곧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궐내로 난입하였다. 난군들은 궐내 도처에 흩어져 명성황후와 척신들을 수색하던 중 선혜청당상 민겸호와 경기도관찰사 김보현을 발견하여 살해하고 계속 명성황후의 행방을 찾았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명성황후는 무예별감(武藝別監) 홍재희(洪在羲)의 도움으로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군민들의 난동을 조정에서는 민겸호의 보고에 의해 단순한 도봉소의 군료분쟁으로 생각했으나 척신들의 집들이 습격․파괴되고 군민이 대거 폭동에 참가하게 되자 무위대장 이경하를 동별영에 보내어 진무시켰으나 실패하였다. 점점 사태가 위급하게 번지자 당면의 책임자를 문책한다는 뜻에서 선혜청당상 민겸호, 도봉소당상 심순택(沈舜澤), 무위대장 이경하, 장어대장(壯禦大將) 신정희(申正熙) 등을 파직시키고 무위대장 후임으로 대원군의 장자 이재면(李載冕)을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상호군(上護軍) 조영하(趙寧夏)의 제안에 따라 별기군 영병관(領兵官) 윤웅렬(尹雄烈)을 통해 일본공사 앞으로 서한을 보내어 군변사실을 통고하고 자위책을 강구하도록 요구하였으나 군민들의 공격으로 공관원 전원이 인천으로 탈주한 뒤였다. 난민들이 궐내로 진입을 하게 되자 국왕은 사태의 수습을 위해 대원군의 입시를 명하였고 이에 따라 대원군은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閔氏)와 장자 이재면을 대동하고 입궐하였는데 이 때 허욱의 지휘하에 구훈국병(舊訓局兵) 200명이 대원군을 호위하였다. 대원군은 사태수습의 책임을 맡고, 왕명으로 ꡐ자금(自今) 이후 대소 공무(公務)는 대원군 전에 품결(稟決)하라ꡑ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사실상의 정권을 장악했다. 곧이어 국왕의 자책교지(自責敎旨)가 반포되어 군변의 정당성이 합리화되었고, 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군민을 무마하여 사태수습에 나서 우선 군병의 요청에 따라 무위영․장어영과 별기군을 혁파하고 5영을 복구시키도록 하였으며,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혁파하고 3군부(三軍府)를 설치하였다. 또한 군병들에 대해 군료의 지급을 공약하고 척족의 제거를 위한 인사조치를 단행하여 이재면으로 하여금 훈련대장․호조판서․선혜청당상을 겸임하게 하여 병(兵)․재(財) 양권을 장악하게 하고 중앙의 각 부서와 지방의 관찰사 등 수령들에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였다. 대원군이 기용한 인물은 대개 남인계열의 노정치가들이며 인재의 보충을 위해 투옥되었거나 정배당한 죄수들을 석방시키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또한 서정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민심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는데 6월 15일에는 각 지방의 미납세미(未納稅米)를 급히 서울로 보낼 것을 지방관에 명하여 군병들의 군료와 도민(都民)의 식량에 충당했으며 20일은 각공원가(各貢援價)에 감합(勘合) 등의 절차는 갑자년(甲子年:1864) 이후의 신정정식(新定定式)에 의하도록 하고, 21일에는 민폐의 근원이 되는 신감채(辛甘菜)․해홍채(海紅菜)의 징수를 금지하도록 했다. 이어서 22일에는 주전(鑄錢)을 금지시키고 동시에 각종 도고(都賈)의 민폐에 관한 것도 혁파시켰으며 26일에는 수세(收稅)에 원래 정한 액수 이외의 부과는 일체 금지하도록 하였다. 한편 일부 난병들은 명성황후의 처단을 주장하고 해산을 거부했으므로 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실종을 홍거(薨去)로 단정하고 명성황후상(喪)을 공포하였다. 이에 민씨 일파는 큰 타격을 받았으나 곧 청(淸)나라 톈진[天津]에 주재하고 있던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 등에게 통지하여 청나라의 원조를 청하였다. 통지를 받은 김윤식 등은 대원군의 존재 위험성과 함께 난당(亂黨)의 소탕, 조선과 일본과의 사이에 청국이 조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청국정부는 김윤식의 의견에 따라 일본과 대항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파견할 필요성을 느끼고 오장경(吳長慶) 등으로 하여금 4,5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곧 출동하게 하였다. 한편 명성황후의 국상을 강제 진행함에 따라 대원군의 정치적 실권은 단축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청국은 종주국(宗主國)으로서 속방(屬邦)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갖고 이 기회에 일본에 빼앗겼던 조선에 대한 우월한 기득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이에 군사를 거느리고 입경한 오장경은 서울 요소에 군사를 배치한 후 조선의 내정에 직접․간접으로 간섭을 하며 군령(軍令)을 찾아온 대원군을 납치하여 톈진[天津]으로 호송함으로써 대원군은 정권에서 다시 축출되었다.
한편 일본에 도착한 하나부사공사가 군변의 사실을 일본정부에 보고하자 일본은 곧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청의 신속한 군사행동에 대항하지 못했고 대원군이 청나라에 의해 제거되었기 때문에 조선측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책임을 물어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일본정부는 조선에 대해 군란의 수모자(首謀者)를 처단하고, 일본인 조해자(遭害者) 유족에게는 위문금을 지불할 것이며, 일본 정부에 손해배상금 50만 원을 지불할 것과 일본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키는 것 등이다. 군변으로 시작한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주는 국제문제로 변하였고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조선사편수회 [ 朝鮮史編修會 ]
일제가 한국역사를 그들의 통치목적에 부합되도록 편찬하기 위해 설치한 한국사 연구기관.
일제의 조선사료 강탈기간 중이던 1916년 1월 중추원 산하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로 발족하여 1922년 12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찬위원회로 바뀌었다.
조선사편찬위원회는 일본민족의 우위성을 고취하고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민의 민족의식을 배제하고자 설립되었다. 그러다 학문적으로 더욱 권위 있는 기구로 만들기 위하여 1925년 6월 일황칙령에 의해 조선사편수회로 명칭을 바꾸고 독립된 관청으로 격상되면서 조직이 확대 개편되었다.
1925년 10월 8일 제1회 위원회를 개최했는데, 이 회의에서 결정한 주요 사항은 관계 자료의 수집방안이었다. 초기에는 강제 수색과 압수를 통해 사료를 수집했으나 수장자들이 비장하는 바람에 수집이 어려워지자 대여 형식으로 방법을 완화했다.
1910년 11월부터 1937년까지 27년간 전국을 누벼 조선사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했고, 전국의 도․군․경찰서 등 관청에 협력할 것을 강력히 지시했다.
1932~1938년 식민사관에 바탕한 《조선사》(37책),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20종), 《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3책) 등을 간행하였다. 특히 일제는 '단군조선'을 없애려고 편찬기구의 개편 때마다 한국사의 상한선을 아래로만 끌어내렸다. 《조선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간 앞장서서 관여했던 일본인 이마니시[今西龍]는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하고 한국사를 왜곡․말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관제(官制)를 보면 일제가 얼마나 단군조선 등 한국사 왜곡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조선사편수회 고문에 부일역적들인 이완용, 권중현을 앉히고 박영효․이윤용을 비롯해 일본인 거물들과 어용학자들을 위촉하였다. 조직구성에는, 위원장급인 회장은 현직 정무총감들이 맡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본인들을 참여시켰다. 고문․위원․간사와 편찬사무를 담당하는 수사관(修史官) 3명, 수사관보 4명, 서기 2명을 두었다.
조선어학회사건 [ 朝鮮語學會事件 ]
일제가 국학연구의 탄압책으로 조선어학회의 관계자를 죄로 몰아 투옥한 사건.
1942년 8월 함흥 영생(永生)고등학교 학생이 검거되고 그 증인으로서 과거 이들 학생의 은사였던 조선어학회 회원 정태진(丁泰鎭)이 잡히면서 10월에는 조선어학회를 관련시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4월 1일 함흥경찰서는 이윤재(李允宰) ․이극로(李克魯) ․최현배(崔鉉培) ․김윤경(金允經) ․이희승(李熙昇) ․장지영(張志暎) ․한징(韓澄) ․이중화(李重華) ․정인승(鄭寅承) ․권승욱(權承昱) ․이석린(李錫麟)을, 21일에는 이강래(李康來) ․이병기(李秉岐) ․김선기(金善琪) ․이만규(李萬珪) ․정열모(鄭烈模) ․김법린(金法麟) ․이우식(李佑植)을, 23일에는 윤병호(尹炳浩) ․서승효(徐承孝) ․김양수(金良洙) ․장현식(張鉉植) ․이인(李仁) ․이은상(李殷相) ․정인섭(鄭寅燮) ․안재홍(安在鴻) 등을 검거하였다. 이듬해 3월에는 김도연(金度演) ․서민호(徐珉濠)를 검거하였으며, 권덕기(權悳基) ․안호상(安浩相)은 병중이어서 잡히지 않았다. 이들은 홍원(洪原) 경찰서의 유치장에서 1년 동안 갖은 야만적인 고문의 시달림을 받은 끝에 ꡐ학술단체를 가장하여 국체(國體) 변혁을 도모한 독립운동단체ꡑ라는 죄명으로 기소되어 함흥 검사국으로 넘어갔다. 그 밖에도 어학회를 물심으로 도와준 50여 명이 증인신문으로 시달림을 받았으며, 곽상훈(郭尙勳) ․김과백(金科白) 등은 피고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유치장에 구금하기도 하였다. 한편, 함흥 검사국에서는 경찰에서 송치한 가운데 이윤재 ․한징 ․최현배 ․이희승 ․정태진 ․이극로 ․이중화 ․김양수 ․김도연 ․김법린 ․이인 ․장현식 등 13명만 공판에 회부하고 나머지는 석방하였는데, 판결 전에 이윤재 ․한징이 심한 고문과 기한(飢寒)으로 옥사하였으며, 나머지 11명은 각각 6년에서 2년까지의 징역판결을 받았으며, 장현식은 무죄로 석방되었다. 나머지 인사들은 항소(抗訴) 중에 광복을 맞아 석방되었다.
중원고구려비 [ 中原高句麗碑 ]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立石) 마을에 세워져 있는 고구려 시대의 비석.
1981년 3월 18일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203cm,폭 55cm이며 1979년 4월 5일 조사되어 알려졌다. 발견 당시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형태는 넓적한 돌기둥처럼 보이며, 자연석의 형태를 그대로 비면(碑面)으로 삼고 있다. 4면 모두에 글을 새긴 4면비이며, 글자는 전면이 10줄에 23자씩이고, 좌측면은 7줄에 23자씩, 우측면은 6줄이며 뒷면은 9줄로 추정되고 있는데, 글자의 지름은 3~5cm이다. 마멸이 심해 정확한 글자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00여 자로 추정하고 있다.
이 비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발견 이후로 가장 큰 고구려비 발견이라는 점과 당시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비석이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더구나 고구려의 금석문(金石文)이 남아 있는 것은 광개토대왕비 등 그 수가 적기 때문에 이곳 중원지방에 완전한 돌비가 남아 있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다. 글씨나 글에 고구려인의 독자성이 잘 나타나 있으며, 비가 만들어진 연대는 423년 장수왕 때로 추정하고 있다.
진대법 [ 賑貸法 ]
흉년․춘궁기에 국가가 농민에게 양곡(糧穀)을 대여해 주고 수확기에 갚게 한 전근대 시대의 구휼제도(救恤制度).
진은 흉년에 기아민(飢餓民)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뜻하고, 대는 봄에 양곡을 대여하고 가을에 추수 후 거두어 들인다는 뜻이다.
이러한 제도는 고구려 때 194년 10월 고국천왕이 왕권강화를 위해 국상(國相) 을파소(乙巴素)의 건의에 따라, 매년 3~7월에 관가의 곡식을 가구(家口)수에 따라 차등을 두어 대여하였다가 10월에 환납(還納)하는 것을 상식(常式)으로 시행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진대법 실시의 최초의 기록이다.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국가적 차원에서의 진휼사업(賑恤事業)이 행하여졌다. 고려시대는 진휼기관인 의창(義倉)을 설치하고 은면지제(恩免之制)․재면지제(災免之制)․환과고독진대지제(鰥寡孤獨賑貸之制)․수한역려진대지제(水旱疫賑貸之制) 등의 방법으로 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상평(常平)․환곡(還穀)의 제도로 그 범위가 확대, 정비되어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전근대 사회에서 시행된 이러한 진대법은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계급적 대립을 완화시켜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진흥왕순수비 [ 眞興王巡狩碑 ]
신라 진흥왕이 국토확장과 국위선양을 목적으로 세운 기념비.
진흥왕대는 신라가 종전의 미약했던 국가체제를 벗어나 일대 팽창,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때이다. 6세기 진흥왕은 재위 37년 동안 정복적 팽창을 단행하여 낙동강 서쪽의 가야세력을 완전 병합하였고, 한강 하류 유역으로 진출하여 서해안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동북으로는 함경남도 이원지방에까지 이르렀다.
진흥왕은 이렇게 확대된 영역을 직접 순수하면서 이를 기념하려고 이른바 순수비를 세웠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국보 33)․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국보 3)․마운령 신라진흥왕순수비․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 등 모두 4개이다.
또한 이러한 전승 기념비에는 정복집단의 신통한 능력과 정복사업의 위업을 자랑하고 정복지의 백성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고 선전함으로써 피정복민을 회유하는 고대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선전의 역할도 하였다.
해서체로 음각된 이들 순수비에는 신라의 강역뿐만 아니라 신료(臣僚)의 명단과 소속부명․관계명․관직명 등이 기록되어 있어, 진흥왕 당대의 금석문 자료로서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혜민국 [ 惠民局 ]
고려시대 서민의 질병 치료를 위하여 설치한 의료기관.
1112년(예종 7)에 설치하여 충선왕 때에는 사의서(司醫署)에 예속되었다가, 1391년(공양왕 3)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관원으로는 판관(判官) 4명을 두었으며, 본업(本業:醫官)과 산직(散職)을 교대로 보내어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혜민서(惠民署)로 고쳤다.
홍범 14조 [ 洪範十四條 ]
갑오개혁 후 고종이 선포한 14개 조항으로 된 정치혁신의 기본강령.
일본의 후원으로 보수세력을 극복하고 개화를 추진해오던 개화당은 드디어 김홍집(金弘集) 내각을 탄생시키고 내정을 정비,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1895년(고종 32) l월 7일, 고종은 세자와 대원군 ․종친 및 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아가 먼저 독립의 서고문(誓告文)을 고하고 이를 선포하였다. 다음날에는 이를 전국민에게 반포하였다. 서고문 ․홍범 14조는 근세 최초의 순한글체와 순한문체 및 국한문 혼용체의 세 가지로 작성하여 발표하였는데, 순한글체에서는 홍범 14조를 ꡐ열 네 가지 큰 법ꡑ이라 표기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청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② 왕실전범(王室典範)을 작성하여 대통(大統)의 계승과 종실(宗室) ․척신(戚臣)의 구별을 밝힌다. ③ 국왕이 정전에 나아가 정사를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되, 왕후 ․비빈 ․종실 및 척신이 간여함을 용납치 아니한다. ④ 왕실사무와 국정사무를 분리하여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⑤ 의정부와 각 아문(衙門)의 직무권한의 한계를 명백히 규정한다. ⑥ 부세(賦稅)는 모두 법령으로 정하고 명목을 더하여 거두지 못한다. ⑦ 조세부과와 징수 및 경비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장한다. ⑧ 왕실은 솔선하여 경비를 절약해서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게 한다. ⑨ 왕실과 각 관부(官府)에서 사용하는 경비는 l년간의 예산을 세워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⑩ 지방관제도를 속히 개정하여 지방관리의 직권을 한정한다. ⑪ 널리 자질이 있는 젊은이를 외국에 파견하여 학술과 기예(技藝)를 익히도록 한다. ⑫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제도를 정하여 군제(軍制)의 기초를 확립한다. ⑬ 민법 및 형법을 엄정히 정하여 함부로 가두거나 벌하지 말며,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⑭ 사람을 쓰는 데 문벌(門閥)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인재를 등용한다.
훈몽자회 [ 訓蒙字會 ]
1527년(중종 22) 최세진(崔世珍)이 지은 한자 학습서.
목판본. 3권 1책.종래에 보급되었던 《천자문》 《유합(類合)》 등은 일상생활과 거리가 먼 고사(故事)와 추상적인 내용이 많아 어린이들이 익히기에는 부적당하므로,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지은 책이다. 상 ․중 ․하 3권에 나누어 한자 3,360자를 4자 유취(類聚)로 33항목으로 갈라 한글로 음과 뜻을 달았다. 상권에는 천문 ․지리 ․화품(花品) ․초훼(草卉) ․수목 ․과실 ․화곡(禾穀) ․소채 ․금조(禽鳥) ․수축(獸畜) ․인개(鱗介) ․곤충 ․신체 ․천륜(天倫) ․유학(儒學) ․서식(書式) 등으로, 중권에는 인류 ․궁택(宮宅) ․관아(官衙) ․기명(器皿) ․식찬(食饌) ․복식(服飾) ․주선(舟船) ․거여(車輿) ․안구(鞍具) ․군장(軍裝) ․채색 ․포백(布帛) ․금보(金寶) ․음악 ․질병 ․상장(喪葬) 등으로, 하권에는 잡어(雜語) 등 모두 33개 물목(物目)으로 나누어 배열하였다. 이는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에 관한 글자로 되어 있어 국문 보급에도 공이 크며, 본문 한자를 국역(國譯)한 것은 고어(古語)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책머리의 범례(凡例)는 국어학상 획기적인 자료로 ꡐ ․? ․ꡑ 식의 이중모음 표기법을 창시한 것이라든지, 원래 훈민정음의 28자모(字母)에서 ꡐᅙꡑ자가 없어진 27자로 정리한 것 등인데, 명칭이나 순서는 오늘날 쓰이는 것과 같다.
이 책은 끝장 1항 3~4자가 '미만(漫)'과 '낙예(洛汭)'로 쓰인 두 가지 책이 전해지므로 각각 미만본과 낙예본이라 불리는데, 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1613년(광해군 5)에 간행된 것이 가장 오래 된 책이다. 목판본으로 현존하는 것이 5, 6종 있으나 시대가 아래로 내려올수록 한글 오자가 많다. 1913년의 광문회본(光文會本)은 오자가 많아 해독하기 어렵고, 58년 동국서림의 영인본을 남광우(南廣祐)가 현대 한자음에 따라 가나다 순서로 색인을 꾸민 것이 있다. 그 밖에 1945년 간행된 《한글 역대선(歷代選)》 제1집에 초선(抄選)된 것과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영인 ․간행한 것이 있다.
사화 [ 士禍 ] .... 중요 ^^*
조선시대에 조신(朝臣) 및 선비들이 반대파에게 몰려 화(禍)를 입은 사건.
조선 개국 이래 역대의 임금이 문치(文治)에 힘을 쓰고 유학(儒學)을 장려했기 때문에 우수한 학자가 많이 배출되고, 선비사회, 즉 유림(儒林)은 활기에 차 있었다. 그러나 세조~성종 때에 이르러 그들 사이에 주의․사상․감정․정실(情實)․향토(鄕土)관계 등으로 여러 파별(派別)이 생겼는데, 개중에는 기미가 상통하는 파도 있었으나 서로 대립․반목하는 파도 있었다. 이를 네 파로 대별하면 훈구파(勳舊派)․절의파(節義派)․사림파(士林派)․청담파(淸談派) 등이다.
특히, 1498년(연산군 4)~1545년(명종 즉위)에 일어난 네 차례의 사화 4대사화라고 하는데 그 중의 훈구파는 세조의 찬역(簒逆)을 도와 높은 지위와 많은 녹전을 차지한 부귀가 겸전한 일파인데,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이석정(李石亭)․양성지(梁誠之)․권람(權擥)․신숙주(申叔舟)․강희맹(姜希孟)․서거정(徐巨正)․이극돈(李克墩) 등이다. 절의파는 세조의 찬역행위를 절대반대한 김시습(金時習) 등의 생육신(生六臣)을 중심으로 한 파이다. 사림파는 경상도 밀양(密陽) 출신인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한 일파이다. 사림파의 중심인물인 김종직은 동방성리학(性理學)의 정통을 이어받은 대학자로서 그의 제자 중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위(曺偉)․김일손(金馹孫)․유호인(兪好仁) 등이 있었다.
이들은 세조의 찬역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점에서는 절의파와 일맥상통하지만 적당한 기회를 얻으면 조정의 요직에 들어가 포부를 펴보려는 점에 있어서는 절의파와 생각을 달리하였다. 그러므로 훈구파에 있어서 정면의 적은 사림파였다. 청담파는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떠 서울 동대문 밖 죽림에 모여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세월을 보낸 일파로서 남효온(南孝溫) ․홍유손(洪裕孫) 등이 대표적이다. 훈구파는 조정의 요직에 있어 세조~성종 시대의 여러 가지 관찬사업(官撰事業), 즉 조정에서 간행하는 서적 편찬에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이며, 따라서 한 나라의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들의 녹전은 주로 경기도 ․충청도에 있었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볼 때, 이들은 기호파(畿湖派)이고,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은 대개 경상도, 즉 영남(嶺南)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영남파라 하였다.
훈구파와 사림파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대립과 반목이 점점 심각해졌는데, 1498년(연산군 4) 두 파는 정면충돌을 하였으며, 그 결과 권력을 쥐고 있던 훈구파의 일격에 사림파는 패배하였다.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게재(揭載)한 것에서 발단이 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의하여 김종직은 이미 죽은 후였으므로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욕을 당하고 그 밖의 많은 제자들은 처형되거나 귀양갔다.
두 번째의 사화는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甲子士禍)이다. 갑자사화는 투기가 심하여 왕비(王妃)의 자리에서 쫓겨나 사약을 받은 성종의 비(妃) 윤씨(尹氏)의 소생인 연산군이 성종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후 생모(生母)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되자, 폐비에 찬성한 신하들과 평소에 연산군의 학정을 불평하던 일부 사림파의 선비들을 한데 묶어,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서 일어났다. 이것은 무오사화처럼, 훈구 ․사림파 간의 대립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선비가 많이 죽음을 당하였다는 의미에서 사화이다.
세 번째의 기묘사화(己卯士禍)도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대립에서 발생한 사화이다. 훈구파의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훈에 비판적이던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위훈삭제사건(僞勳削除事件)을 일으켜 심정(沈貞)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에게 타격을 가하려다 그들의 반격을 받아 패배한 사건이다. 조광조 ․김식(金湜) ․기준(奇遵) ․한충(韓忠) ․김구(金絿) ․김정(金淨)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등의 기묘명현(己卯名賢)이 죽거나 유배되었다.
네 번째는 1545년(명종 1)의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이것은 왕실의 외척인 윤임(尹任), 즉 대윤(大尹)과 같은 파평(坡平) 윤씨인 윤원형(尹元衡), 즉 소윤(小尹) 사이의 권력다툼에 말려들어 많은 선비가 타격을 받은 사건이다. 이것도 갑자사화의 경우처럼 선비사회 사이의 싸움은 아니지만 많은 선비가 희생되었기 때문에 사화라고 한다.
4대사화는 1575년(선조 8)에 이르러 당쟁(黨爭)이 일어나기 전의 선비들에 대한 옥사였다. 그러나 사화는 소수인의 음모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고, 파당을 가진 다수인의 공공연한 논쟁이 따르는 대립과 투쟁에서 패자는 반역자로 몰려 지위를 빼앗기거나 목숨을 잃고, 한 파가 승리하면 이에 대하여 새로운 반대파가 또 생겨 그것이 또다른 사화를 야기시켰다. 이러는 동안 정치의 기강은 더욱 문란해지고, 뜻있는 선비들은 관직을 버리고 당 ․서원 등을 세워 유생(儒生)들의 집합 또는 강학(講學)의 장소로 삼는 동시에, 그들 일족의 자녀교육을 하고 이를 통하여 동족적인 당파의 결합을 굳게 하였다. 이와 같이 사화에 의하여 육성된 정치비판과 반대파에 대한 복수관념은, 서원의 발전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당쟁을 격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뜻있는 선비들의 향토 복귀와 교육 실시는 고관대작이 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공리적 ․세속적인 관학(官學)에 대하여 수양과 사색을 주로 하는 진리탐구의 참다운 학문을 하겠다는 사조와 경향을 낳게 하고, 이로 인하여 사학(私學)의 대연원(大淵源)이 열리게 되었다.
6 ․10만세사건 [ 六十萬歲事件 ]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하여 일어난 독립운동.
병인만세사건(丙寅萬歲事件)이라고도 한다. 주동자는 연희전문의 이병립(李炳立)․박하균(朴河鈞), YMCA 영어과의 박두종(朴斗鍾), 중앙고보의 이선호(李先鎬)․이황희(李晃熙), 경성대학의 이천진(李天鎭) 등이다. 이들은 순종의 국장일인 6월 10일에 많은 민중이 참배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계기로 3․1운동과 같은 대일항쟁운동을 유발하고자 격문(檄文)을 인쇄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사전준비를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날 전경찰과 조선군사령부 휘하 일본군 5,000명을 동원해서 경비에 들어갔다. 오전 8시 30분경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나면서 중앙고보생이 주창하여 독립만세을 부르며 격문을 뿌렸고, 이어 관수교(觀水橋)․경성사범학교앞․훈련원․동대문․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에서도 만세와 격문을 뿌려 많은 민중이 이에 호응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날 200여 명이 붙들렸고, 그 영향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순창․정주(定州)․군산․울산․평양․홍성․공주 등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 전국에서 1,000여 명이 체포․투옥되었다. 이 밖에 사회주의계열의 권오설(權五卨)․박내원(朴來源)․민창식(閔昌植) 등도 6월 10일을 기하여 전국적 규모의 민족운동을 전개하고자 사전에 상하이[上海]의 여운형(呂運亨) 등과 연락하여 격문 10만 장을 인쇄하는 등 준비를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6․10만세에 합세하지 못하였다.
추천교재 : 한국고시회 7급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