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숨은 그림 찾기
단풍산행이라고는 하지만 이번은 아니다. 돌밭에 무슨 단풍? 생각했던 대로 주차장에 도착하니 주변에 단풍은 거의가 다 져버렸다. 그래도 찾아올 줄 알고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남은 몇몇이 밝은 얼굴로 맞아준다. 그 위로 육중하기도 하고 토란 같아 보이기도 하는 암봉들이 불끈불끈 솟아있다. 저기를 올라야 한다. 청대 숲을 빠져나가 조각공원을 넌지시 바라본다. 이미 잿더미에 묻혀버린 천황사 갈림길에 섰다. 왼쪽 구름다리 쪽이 아닌 오른쪽 바람폭포 쪽을 선택했다. 돌너덜 계곡을 타고 올라야 한다.
오른쪽은 장군봉 왼쪽은 사자봉 곧장 올라야 천황봉에 오른다. 일명 바람골로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물줄기 또한 만만치 않은 계곡이라는데 오늘은 모두가 전설 같이만 들린다. 그런 모습이나 기운은 찾아보거나 낌새조차 엿볼 수 없다. 그러나 다만 암벽 암봉 바위들은 그런 것들에 개의치 않는다는 듯 미동도 않으며 여전히 듬직한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아니 마음껏 몸매를 드러내놓고 뽐내며 있지 싶었다. 어쩌면 금세 굴러 떨어질 성싶기도 한데 만물상을 벌려놓고 있어 헤아리기에 현기증이 들기도 한다.
이제 계곡은 말랐다. 대신 돌들만 늘어서서 대신 흘러내리는 시늉을 펼친다. 그러니 바람폭포도 따라서 말라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폭포로서는 참담하니 정말 치욕스러운 모습이다. 그런 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계곡 깊숙이 숨어있는데도 그래도 보고 싶다고 찾아온 이에게 수치스런 치부를 드러냈다. 15미터 웅장하게 쏟아내던 물줄기는 바람에 꽁꽁 어는 겨울이면 빙폭으로 더 위용을 드러낸다는데 수도꼭지 하나 틀어놓은 것 같다. 물이 연신 흘러내리던 곳은 아예 새카맣게 타버려 애잔하게 젖어있다.
암벽에서 흘러나온다는 석간수를 한 구기 마신다. 아주 시원하다. 그 위쪽에 수질검사표가 걸려있다. 그런데 최종검사일이 2007년 5월 25일로 적혀있다. 아니 이건 근 6개월 전이 아닌가. 왜 저런 것을 달아놓았지 싶다. 그렇다면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관리를 안했다는 것인지. 마시거나 말거나 본인들이 알아서 하라는 것인지. 의구심에 좀은 속이 찜찜해진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물은 목구멍을 질주하여 뱃속에 안착을 하였을 텐데. 그냥 훌훌 털어버리고 간이의자에 앉아본다. 불끈 솟은 기암괴석이 압도한다.
저만큼 사자봉 작은 봉우리에 얹어놓은 현수교 구름다리가 마치 철교처럼 보인다. 걸려있는 바위가 아슬아슬하다. 제과점 식빵처럼 생긴 식빵바위다. 포효하며 연인을 찾는 듯 사자바위가 노려보고 있다. 힘차게 내닫는 말바위도 있다. 작은 능선에 오른다. 이번엔 육형제바위다. 여섯 개가 늘어서 소곤소곤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순간 도봉산의 오봉이 스쳐간다. 맏형격인 오른쪽 바위는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어 거북바위라는 이름을 하나 더 얻었다. 형제들의 안녕과 장수를 기원하는 듯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길은 이제 구름다리 쪽과 만난다. 통천문이 나온다. 이곳을 통해야 하늘에 이를 천황봉(810m)에 오를 수 있다. 좁은 문에 바람이 잽싸게 밀려들며 영암읍내가 들어온다. 내친김에 정상으로 내닫는다. 오른쪽으로 목포 앞바다며 왼쪽에 강진 앞바다가 있을 터인데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앞쪽에는 구정봉과 향로봉이 우뚝 솟아있다. 크고 작게 늘어선 암봉은 마치 무슨 조감도를 보고 있는 성싶다. 돌의 잔치, 돌들의 만물상을 본다. 자연은 빼어난 작품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 이제 그 속에서 <숨은 그림 찾기>를 한다.
구정봉 방향으로 내려선다. 서역으로 불경을 가지러 갔던 삼장법사바위다. 험한 산행을 하는 이들의 안전을 위하여 천황봉에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손오공이나 저팔계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이번엔 우람한 남근바위다. 그 옆을 통로처럼 지나야 한다. 그 돌을 어루만지다 남근바위라는 말에 아직도 수줍은 아가씨인가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힌다. 바람이 핥고 지나간다. 사실 바위들은 여러 얼굴을 가졌다. 거리와 각도를 잘 맞추어야 어느 형상인가를 감지할 수 있다. 조금만 빗나가면 그냥 밋밋한 바윗덩이다.
바람재에 닿는다. 이름에 걸맞게 바람이 시원시원하게 불어온다. 구정봉 아래쪽 암봉 위에 의자바위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누구라도 와서 잠시 앉아 쉬면서 놓치기 아까운 저 모습들을 보고가라고 하는 성싶다. 바위가 바위를 쌓고 얹어놓고 부둥켜 세우고 서로 기대어 의지하면서 봉우리를 만들고 더 큰 바위를 만들고 있다. 아래쪽에는 돼지바위가 그만의 야릇한 웃음을 짓고 있다. 벌건 대낮에 저쪽에선 사랑바위가 드러내놓고 얼굴이라도 포갤 듯 농도 짙은 사랑을 속삭거리고 있다. 호박을 닮은 호박바위도 있다.
등에 혹이 달린 낙타바위도 있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나도 수많은 이름들을 붙여주고 싶었다. 단지 좋은 이름이라서가 아닌 그의 실물에 근접한 이름이다. 그러나 아직은 서로에게 공감을 주고받을 만큼 객관화가 덜 된 상태이다. 그 속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모습들이 숨은 그림처럼 놓여있을 것이다. 언젠가 누군가의 눈에 띄면서 다시 한 번 감탄을 자아내기도 할 것이다. 그냥 단순한 바윗덩이 같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결코 같지가 않다.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서로 다르듯이 자연이 빚어놓은 다른 작품이다.
베틀굴이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 여인들이 숨어서 베를 짰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그러나 그보다 10미터쯤 석굴로 떡 벌린 입은 마치 여인의 국부와도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어 음굴이라고도 한다. 안쪽 끝에 들어서니 움푹 파인 곳에 물이 고여 있다. 지팡이를 꽂아보니 30cm쯤 되었다. 마르지 않는 음수였다. 천황봉 쪽에 하늘을 찌를 듯이 불끈 치솟은 남근석을 차마 내놓고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약간 방향을 틀어 누웠다. 하지만 음양조화를 이루기에 비록 월출산이 돌산이라도 생명력 얻어 맘껏 기를 내뿜는다.
구정봉(738m) 정상에 오르려면 비좁은 바위 틈새를 빠져나가야 한다. 새삼 너무 배가 툭 튀어 나왔다든지 너무 살이 붙었다든지 자신의 몸매를 돌아보게 한다. 정상 암반에 파인 아홉 개 구덩이에 일 년 내내 물이 고여 있다 하여 九井峰이다. 가장 큰 구덩이는 예닐곱 명이 들어앉아 목욕할 만한 욕조 같다. 그러나 바닥은 그다지 깊지 않다. 사방을 휘둘러본다. 물론 어느 쪽을 훑어봐도 바위들이지만 형태가 각양각색이다. 어느 것은 성을 쌓아올린 것과도 흡사하게 보인다. 천황봉을 바라보노라니 그저 우람하다.
읍내 방향 기슭에 자리 잡은 마애여래좌상(국보114호)을 찾아 나선다. 5백 미터쯤 능선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 거대한 바위를 밑에 깔고 오른쪽을 쌓아올렸다. 자연이 올려놓은 듯싶은 바위의 전면을 약간 파서 직사각형의 방을 만들고 그 안에 불상을 새겼다. 귀가 어깨에 닿고 짧은 목에 꽉 다문 입은 근엄한 모습이지만 전체적으로 균형미에 조화를 이뤄 안정감을 주는 빼어난 작품이다. 높이 7m나 되는 거대한 마애불은 고려시대를 대표하고 있다. 좀은 외진 곳이지만 석양빛이 잘 드는 곳으로 과일도 놓여있다.
다시 구정봉에 오른다. 망개나무 열매가 송이를 이루며 새빨갛게 익었다. 나무를 타고 오른 것이 아주 선정적으로 눈길을 잡아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 옆으로 수줍은 듯 진달래도 피어나고 작은 산새가 쫑알거린다. 다시 베틀굴 곁을 지나 바람재에서 오른쪽 계곡으로 하산이다. 동백나무 자생지다. 파란 잎이 반질거린다. 제법 큼직한 꽃망울이 매달렸다. 겨울을 이겨내고 새봄에 빨갛게 피어나리라. 경포대계곡을 빠져 나왔다. 녹차밭이 펼쳐진다. 이발이라도 한 듯이 잘 다듬었다. 꽃이 피고 짙은 향기가 번진다.
성큼 뒤에 다가서 있는 천황봉을 올려다본다. 물론 저 봉우리를 넘어왔기에 아침과는 정 반대방향인 동쪽이다. 하지만 눈이라도 지그시 감고 있으면 <하춘화의 영암아리랑>이 간드러지게 흘러나올 성 싶은데 야속하게도 초닷새 손톱 달은 이미 천황봉을 넘어 서녘으로 바삐 달려가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속에 달이 뜬다. 천황봉에 둥근 달이 떠오른다. 그 달빛을 받으며 그만 돌아가야 한다. 종일토록 돌 틈바구니서 하나의 돌이 되기도 하고 돌에 취하고 채이며 무거웠던 걸음걸음이지만 이제 훌훌 벗어 놓는다. - 2007.11.14. 文房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영암 고을에 둥근달이 뜬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둥근둥근 달이 뜬다
월출산 천왕봉에 보름달이 뜬다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서와 데야
달 보는 아리랑 님 보는 아리랑
- 엉암아리랑(하춘화)